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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9-21 0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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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플 자작 소설] 빛의 그늘 - 4아스완 신전 대예배당. 거대한 기둥 사이로 향료의 연기가 몽환적으로 피어올랐다. 수천 명의 민중이 바닥에 머리를 조아린 가운데, 보좌 위에 앉은 대무녀 힐라가 차갑고도 우아한 목소리로 신탁을 내리고 있었다. "신께서 가라사대, 이번 달의 갈증은 북쪽 암벽의 숨은 물줄기로 해소될 것이니라." 그녀의 손짓 한 번에 메말랐던 화분에서 푸른 꽃이 피어났고, 광장에는 광적인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사람들에게 힐라는 더 이상 지하 골목의 가난한 소녀가 아니었다. 아스완의 생존을 책임지는 살아있는 신,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녀의 바로 뒤, 그림자처럼 서 있는 사내가 있었다. 칠흑 같은 갑옷을 두르고, 투구 아래로 서늘한 눈빛을 내뿜는 대무녀 전속 수호기사 단장, 엘란이었다. 그는 의식이 진행되는 내내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힐라에게 향하는 수많은 시선을 칼날처럼 받아내고 있었다. 의식이 끝나고 내전으로 향하는 복도. 주변을 감싼 시종 무녀들 사이에서 힐라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기사 단장." "예, 대무녀님." "내전 입구의 경계를 강화하도록 하라. 오늘 밤은 기도를 올리며 누구의 출입도 허하지 않을 것이다." "명 받들겠습니다." 철저히 격식을 차린 대화. 누구도 두 사람이 같은 빵 한 덩이를 나누며 석굴 바닥을 구르던 사이라고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대무녀의 침소 앞, 시종 무녀들이 모두 물러간 복도에는 오직 시종무녀 메디아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무녀로 처음 들어왔을 무렵, 메디사는 실력이 뛰어나지 못해 매번 실수를 연발하는 요주의 인물이었다. 재능이 없다는 이유로 무녀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하며 홀로 눈물을 삼키던 그녀의 손을 잡아 끌어준 사람이 바로 대무녀 힐라였다. "너를 무녀로서 인정한 자는 국왕 폐하가 아닌, 바로 대무녀인 나다. 내가 전부 책임질 테니 걱정하지 마라." 실수할까 봐 두려워하던 메디사의 불안을 단칼에 잠재워주던 힐라의 위엄. 힐라는 메디사에게 감히 넘볼 수 없는 완벽한 우상이자, 어두운 절망 속에서 자신을 건져 올려준 구원과도 같은 존재였다. 힐라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르던 그녀는, 차가운 대무녀가 오직 엘란 단장 앞에서만 보여주는 미세한 눈빛의 변화를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그렇기에 메디사는 대무녀를 향한 깊은 경애를 가슴에 품은 채, 신전의 엄격한 규율과 감시 속에서도 유일하게 힐라와 엘란이 비밀스럽게 만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조력자를 자처하고 있었다. 메디아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두 사람의 거룩하고도 애달픈 비밀을 지켜주는 유일한 울타리가 되어줄 뿐이었다. "단장님, 안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메디아가 나직이 고개를 숙이며 복도 끝 사제들의 동태를 살폈다. 엘란은 그녀에게 가볍게 목례를 건넨 뒤, 단단히 잠긴 목재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침소 안으로 들어섰다. 문이 닫히자 메디사는 스스로 문 앞을 막아서며 조용히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오직 두 사람만이 유일하게 숨을 쉬며 진실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공간. 이 비밀스러운 시간을 지켜주는 것이야말로 메디사가 힐라에게 바치는 가장 순수한 헌신이었다. 신전 깊숙한 곳, 달빛만이 스며드는 침실. 전속 기사 단장으로서 낮 동안 착용했던 거친 철갑 상의가 스르륵 벗겨지자, 엘란의 넓은 어깨와 흉터투성이 몸이 달빛 아래 드러났다. 힐라는 무거운 은빛 보관을 내려놓은 뒤, 침상 끝에 앉아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방금 전까지 만민 위에 서 있던 대무녀의 서늘한 위엄은 온데간데없었다. 엘란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오직 유년 시절 석굴의 그 다정한 소녀만이 살포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이쪽으로 와, 엘란." 엘란이 다가가 침상 아래 한쪽 무릎을 꿇었다. 낮에는 수천 명의 민중과 사제들 앞에서 올려다봐야 했던 높은 보좌의 여주인. 하지만 지금 이 밀폐된 방 안에서, 그녀는 오직 그만의 온전한 여인이었다. 힐라는 떨리는 손을 뻗어 엘란의 뺨과 옆구리에 새롭게 그어진 붉은 상처를 조심스레 쓸어내렸다. 손끝에 닿는 거친 감촉에 가슴이 알싸하게 저려왔다. ![]() "또 새로운 상처가 생겼네…." "별것 아니다. 밑바닥 출신인 내가 단장 자리에 앉았다고 반발하는 귀족 기사 놈들의 도전을 연무장에서 좀 눌러주었을 뿐이야." "거짓말." 힐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엘란의 상처 결을 따라 손가락을 천천히 내리며 나직이 속삭였다. "귀족 기사들의 검은 이렇게 비겁하게 독을 바르거나 뒤를 노리지 않아. 밤마다 내전 복도 어둠 속에서 나를 감시하려 들던 자카리아의 첩자 놈들을… 네가 혼자 잘라내고 있는 거잖아." 엘란은 더 이상 둘러대지 않은 채, 힐라의 눈가에 맺힌 이슬을 투박한 손으로 살포시 훔쳐냈다. 그리고는 매일 대규모 치유 의식을 치르느라 차갑게 얼어붙어 떨리는 힐라의 가냘픈 손가락들을 두 손으로 감싸쥐었다. "하아-." 엘란이 입김을 불어넣으며 굳은살투성이인 손바닥으로 그녀의 손가락 마디마디를 정성스럽게 마사지했다. 손끝에서부터 엘란의 뜨거운 체온이 흘러들어오자, 힐라는 안도감에 길게 숨을 내쉬며 그에게 몸을 내맡겼다. "낮에는 연무장에서 기사 기강을 잡고, 밤에는 사제들의 눈을 베어내야 해. 그래야 그 누구도 단장인 내 권위에 토를 달지 못하고, 너를 함부로 넘보지 못하니까. 내 몸에 새겨지는 상처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엘란은 품속 깊은 곳에서 비단 천에 싸인 작은 물건을 꺼내 힐라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그것은 사막 깊은 굴에서나 겨우 채굴되는, 작지만 영롱하게 빛나는 붉은 보석을 엘란이 밤새 단단한 가죽 끈에 꿰어 만든 목걸이였다. "이건…?" "사제들의 감시망을 뚫고 몰래 구했다. 너한테 꼭 주고 싶었어. 사제들도, 그 누구도 보지 못하게 옷 안쪽에 깊이 숨겨. 우리가 힘겨울 때마다 서로를 떠올릴 온전한 표식이다." 힐라는 목걸이의 붉은 원석을 가슴에 꼭 품었다. 엘란의 체온이 닿아 있던 원석은 달빛 아래서 차갑지만 가슴 시리도록 따뜻하게 빛났다. "평생… 내 몸에서 떼어놓지 않을게. 내가 가장 괴롭고 숨이 막힐 때마다 이 원석을 쥐고 너를 떠올릴게, 엘란." 힐라는 목걸이를 꼭 쥔 채, 무릎을 꿇고 있는 엘란의 목을 살포시 감싸 안았다. 차가운 붉은 원석보다 엘란의 목덜미에서 전해지는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영혼을 녹여 내렸다. 힐라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나직하게 속삭였다. "가끔은 숨이 막혀, 엘란. 다들 나를 보는 게 아니라 내 손끝에서 피어나는 신성력만 보거든. 하지만… 네가 내 뒤에 서 있다는 걸 떠올리면, 네가 내 손을 잡아주면 신기하게 버틸 수 있게 돼." 엘란은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아 침상 위로 끌어당겼다. 수년 전 석굴에서 나누던 온기와 다를 바 없는, 가혹한 신전에서 그들에게 허락된 유일한 구원의 공간이었다. "기억나, 힐라? 우리 조금 더 자라면 이 사막을 떠나서 촉촉한 흙이 있는 땅으로 가자고했던 거." "기억하고말고. 빛나는 하늘 아래서 매일 따뜻한 밥을 먹기로 했었지." "머지않았어. 내가 더 강해져서 그 누구도 너를 억압하지 못하게 만들 테니까. 그때는 어디든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데려다줄게." 엘란은 힐라의 차가운 이마와 눈풀린 눈가, 그리고 떨리는 입술 위에 천천히 깊은 입맞춤을 내렸다. 달빛이 두 사람의 얽힌 그림자를 포근히 감쌌고, 문밖에서 경계를 서던 메디아조차 숨을 죽인 밤 속에서 두 사람은 비로소 무녀와 기사의 가면을 벗어던진 채 서로의 체온을 깊이 탐했다. 하지만 그 비밀스러운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엘란은 집무실로 향하던 중 복도 끝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자카리아와 마주쳤다. 힐라를 신전에 끌고 왔던 자이자, 이제는 대사제의 자리에 올라 신전을 주무르는 권력자였다. "기사 단장, 잠시 대화를 좀 나눌 수 있겠나?" 자카리아의 미소는 인자해 보였지만, 그 눈 속에는 뱀 같은 냉기가 서려 있었다. 엘란은 검 손잡이를 잡은 채 차갑게 대답했다. "대무녀님의 호위 업무 중입니다. 길게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허허, 자네의 충성심은 신전 전체가 다 알지. 하지만 충성심이 지나쳐서 대무녀님의 신성한 명예에 흠집이 나서는 안 되지 않겠나?" 자카리아가 엘란의 곁을 스쳐 지나가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출신도 모르는 밑바닥 쥐새끼가 갑자기 수호기사 단장이 된 것에는 다 이유가 있겠지. 하지만 조심하게. 대무녀는 신의 그릇이지,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야. 만약 마마께서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려 신성을 더럽히게 된다면… 그 원인이 된 자를 뿌리째 뽑아버리는 것이 우리 사제들의 의무거든." 엘란의 턱관절이 굳게 다물어졌다. 자카리아는 엘란의 반응을 즐기듯 그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유유히 멀어져 갔다. 그것은 단순한 경고가 아니었다. 힐라의 권력이 커질수록 그녀를 완벽한 인형으로 통제하려는 신전의 탐욕이, 엘란이라는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신호였다. 몇 주 뒤, 아스완의 번영을 축하하는 최대 축제가 열렸다. 대규모 인파가 신전 앞 광장을 가득 메웠고, 힐라는 예복을 입고 단상에 올랐다. 그녀가 지팡이를 휘두르자 황량한 모래 광장에 일순간 푸른 싹들이 돋아났고, 사람들은 광적인 찬사를 보내며 울부짖었다. "대무녀님 만세! 아스완의 태양 만세!" 찬란한 조명과 쏟아지는 꽃잎 속에서 힐라는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존재처럼 보였다. 그 누구도 그녀의 위상을 범접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단상 아래에서 호위하던 엘란의 눈은 군중 속에 숨은 자카리아의 서늘한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축제라는 이름의 찬란한 빛이 강해질수록, 그들이 서 있는 발밑의 그림자는 점점 더 짙고 길게 늘어지고 있었다. 엘란은 투구 아래에서 입술을 피가 나도록 꽉 깨물었다. '힐라의 찬란함이 무너지기 전에, 내가 더 강해져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순간, 비극은 이미 소리 없이 뱀의 혀를 날름거리며 두 사람의 턱밑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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