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악 사이, 회색의 서사

모든 선택에는 대가가 있다. 우리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의 본질.

 

 

왕좌의 게임에는 영웅이 없습니다.

 

 

정확하게는, 영웅으로 남는 사람이 없습니다. 

 

명예를 지킨 사람은 참수당했고, 권력을 쥔 사람은 괴물이 되었고, 사랑을 택한 사람은 죽었습니다.

 

 

시즌 1에서 티리온 라니스터가 한 말이 있습니다.

 

 

"죽음은 그것으로 끝이지만, 삶은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거든."

 

 

저희가 이 게임의 내러티브를 설계할 때 가장 오래 붙잡고 있었던 문장입니다. 웨스테로스에서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발라 모르굴리스(Valar Morghulis)'

 

 

하지만 그 죽음이 찾아오기 전까지, 모든 사람은 자신의 삶을 치열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저희가 보여주고 싶은 건, 그 '치열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죽음에는 여러 얼굴이 있습니다.

 

 

조프리나 램지처럼 비참하고 허무한 최후가 있습니다.

 

롭 스타크나 미샨데이처럼 잔인하고 비극적인 죽음도 있습니다.

 

거인족에 맞서 터널을 지키던 밤의 경비대원들처럼 숭고한 희생도 있습니다.

 

 

선인이든 악인이든,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냉혹하게 찾아옵니다.

 

그리고 원작에서는 그 죽음을 하나도 숨기지 않습니다.

 

 

저희도 숨기지 않기로 했습니다.

 

대신, 드라마가 미처 다 보여주지 못한 곳을 보여주기로 했습니다.

 

킹스로드의 이야기는 원작의 조명 밖에서 시작됩니다.

 

 

드라마에는 주연이 있습니다. 카메라가 비추는 사람들이 있고, 카메라가 비추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희가 보여주고 싶은 건 그 조명 밖의 그림자입니다.

 

 

원작에서 에다드 스타크가 킹스랜딩으로 남하하는 동안, 윈터펠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롭 스타크가 북부에서 전쟁을 벌이는 동안, 그 전쟁에 동원된 병사의 가족은 어떻게 살고 있었을까요.

 

원작에 등장하지 않는 인물들 역시, 주연들과 다름없이 치열하게 고민하고 행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원작의 스토리가 흘러갈 수 있었습니다.

 

 

플레이어는 그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드라마의 조연이 아니라, 조명 밖에서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선택에 개입하게 됩니다.

 

이 이야기들은 원작을 잘 아는 분이라면 더 깊게 읽힐 수 있도록 설계했지만, 원작을 모르더라도 그 자체로 완결된 이야기입니다.

 

드라마를 한 편도 안 보셨어도, 이 사람이 왜 이런 상황에 놓여 있는지는 게임만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큰 줄기는 명확하게 전달하되, 디테일은 조금 놓치더라도 괜찮은 수준으로 설계하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이야기를 전하는 방법에도 철학이 있습니다.

 

 

저희 팀이 가장 싫어하는 퀘스트가 있습니다.

 

NPC가 '저기 가서 뭐 가져와'라고 하고, 먼 곳까지 걸어가서 아이템을 줍고, 다시 걷어와서 건네주는 퀘스트.

 

심부름 퀘스트입니다. 저희도 싫어하고, 유저도 싫어합니다.

 

시나리오에 몰입하고 있는데 억지로 플레이 시간을 늘리기 위한 행위가 끼어들면, '그래서 내가 왜 이걸 하고 있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순간 이야기의 흐름이 끊깁니다.

 

 

킹스로드의 퀘스트는 몇 가지 원칙으로 만들어집니다.

 

먼저, 되돌아가지 않습니다. 한 번 지나친 길을 다시 걷지 않도록 동선을 설계합니다.

 

퀘스트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감각을 유지하는 게 중요합니다.

 

 

다음으로, 이동 중에도 이야기가 끊기지 않습니다.

 

두 장소 사이를 이동해야 할 때, 아무 일 없이 몇백 미터를 걷게 하면 퀘스트의 긴장감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경로에 이벤트를 배치하거나, 누군가를 쫓는 상황이면 단서를 계속 발견할 수 있도록 배치하거나, 동행하는 NPC가 있으면 대사를 추가합니다.

 

이동 시간이 빈 시간이 되지 않도록.

 

 메인 시나리오에서는 주인공의 목표를 끊임없이 재각인시킵니다.

 

이곳저곳 삼천포로 빠지지 않고, 목표를 향해 흔들리지 않고 나아가는 흐름을 유지합니다.

 

다른 콘텐츠를 즐기다 돌아와도 '아, 내가 이걸 하고 있었지'가 바로 떠오를 수 있도록.

 

 

이 원칙들이 합쳐지면 퀘스트의 체감이 달라집니다.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감각, 멈추지 않는 이야기.

 

퀘스트가 '하는 것'이 아니라 '겪는 것'처럼 느껴지길 바랍니다.

 

 

 

퀘스트에서 정보를 얻는 방식에도 원칙이 있습니다.

 

 

보통 게임에서는 퀘스트를 받으면 목표가 바로 화면에 뜹니다.

 

'이름모를 NPC를 찾아가세요' 같은 식으로.

 

편리하지만 플레이어가 알아낸 게 아니라 시스템이 알려준 것처럼 느껴집니다.

 

 

 

저희는 플레이어가 직접 알아내는 과정을 선호합니다.

 

 

 

예를 들어, 특정 NPC를 찾아야 하는 퀘스트가 있다고 합니다. 처음부터 그 NPC의 이름이 화면에 뜨지 않습니다.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단서를 모으고, 점점 범위를 좁혀갑니다.

 

처음에는 '그냥 주민'이었던 사람이, 정보를 모두 알아낸 후에는 이름이 밝혀집니다. 플레이어가 알게 된 순간에 화면도 바뀝니다.

 

 

 

확실한 정보를 얻으면 나머지 과정은 건너뛸 수도 있습니다.

 

다섯 명의 NPC와 대화할 수 있는데, 세 번째 NPC에게서 결정적인 정보를 얻으면 나머지 두 명은 안 만나도 됩니다.

 

시스템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아니라, 플레이어가 판단해서 움직이는 구조입니다.

 

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게임 시나리오는 글자에만 집중하는 매체가 아닙니다.

 

유저는 화면을 보면서 동시에 대사를 읽습니다. 그래서 짧은 시간에도 뜻이 들어와야 합니다.

 

어려운 단어, 난해한 문장은 무조건 쉽게 고칩니다. 한 번 읽어서 이해가 안 되면 그건 문장의 문제입니다.

 


 

플레이어가 뭔가를 했으면, 세계가 반응해야 합니다.

 

 

빈 바구니에 빵을 채우면, 상호작용 후에 빵이 찬 바구니로 바뀝니다.

무언가에 불을 붙이면 진짜로 불이 납니다.

당연한 것 같지만 이게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게임이 많습니다.

 

 

저희는 플레이어의 행동에 대한 피드백을 눈에 보이게 만드는 데 집착합니다.

 

작은 상호작용 하나에도 메모를 남기는 캐릭터의 혼잣말을 출력하고, 선택의 결과는 명확하게 돌아옵니다.

 

특히 선택지에서 이게 중요합니다. A를 고르면 A의 결과가, B를 고르면 B의 결과가 눈앞에 보입니다.

 

'어차피 둘 다 해봐야지'로 끝나지 않습니다.

 

 

A를 고르면 B는 영원히 닫힙니다. 그래야 선택이 무겁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이런 구조를 모든 퀘스트에 넣지는 못했습니다.

 

선택에 따라 결과가 갈라지는 분기를 만드는 데는 생각보다 많은 비용이 듭니다.

 

한 장면을 만드는 게 아니라 두 장면을 만들어야 하고, 그 이후의 흐름도 각각 따로 설계해야 합니다.

 

저희도 더 많이 넣고 싶었고 지금도 기회가 될 때마다 넣으려고 합니다.

 

다만 분기가 있는 순간에는 그 선택이 확실하게 의미를 갖도록 만들었습니다.

 

플레이어가 메인 시나리오에서 한 행동이 서브 시나리오에서 결과로 돌아오기도 합니다.

 

모든 곳에 있지는 않지만 있는 곳에서는 무겁습니다.

 

내 행동이 월드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감각.

 

 

그게 있어야 웨스테로스가 살아 있는 세계처럼 느껴집니다.

 

 

원작의 요소들도 같은 방식으로 다룹니다. 왕좌의 게임을 이야기할 때 사람들이 기억하는 건 특정 장면입니다.

 

백귀가 시체를 나선형 문양으로 배치한 표식, 피의 결혼식. 이런 장면들이 게임에도 존재하지만 뜬금없이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시나리오의 흐름 안에서 자연스럽게 마주치도록 배치했습니다.

 

메인 퀘스트뿐 아니라 서브 퀘스트에서도 원작의 흔적들이 종종 나타납니다.

 

알아보는 분은 알아보고 모르는 분은 그냥 이 세계의 일부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킹스로드의 이야기에는 영웅이 없습니다.

 

 

정답이 없는 선택지가 있고,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있고, 모든 것에 대가가 있습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그 전까지 모든 사람은 자신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 회색 지대에 서는 게 어떤 느낌인지는, 직접 경험해보시길 바랍니다.

 

 

4컷 만화: 「눈물 한 방울의 각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