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따, 미숙한 작은 사회의 희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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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철

우리 사회에는 군대에 가면 철이 든다는 슬프고 우스운 말이 있다.

이 말은 보통 자신의 경험에 의존한다. 직접 경험해보니까 그렇다더라, 라는 것이다. 이런 군대에 가면 철이 든다는 말은 모병국가의 청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 반박이 가능하다. 하지만 왜 이런 선입견이 생기는지에 대해 생각해봐야한다.


왜 이런 선입견이 생겼던 걸까?

그건 군필자와 미필자(사회초년생)의 사회경험을 동일선상에서 비교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선입견이다. 보통 사람들은 군대에서 보내는 기간에 대해 너무 가볍게 생각한다. 나라를 지키러 가는 것은 당연하니 둘째치고... 그 외엔 입시에 실패했을 때 가는 곳, 자기계발하러 가는 곳, 시간 낭비하러 가는 곳 등. 이미지가 별로 좋지 못하다. 군필자조차 시간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 참 슬픈일이다.

그렇게 가볍게 생각하기 때문에 군대에서 보낸 기간을 경력으로 취급하지 않는 사태까지 벌어진다. 도대체 군대를 뭐라고 생각하는가. 군대도 일종의 사회. 스스로 행동에 책임을 져야하는, 사회성(어두운 단면도 있지만)을 배울 수 있는 공간이다.

그런 군필자와 미필자(사회초년생)을 동일선상에서 비교하니 군필자가 더 철들어보이는 것일뿐. 실제로는 스스로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하는 사회인(경력자)과 비교한다면 크게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군대에 가면 철이 든다는 말은 이런 군대를 낮게 보는 사회의 분위기가 만든 슬픈 말이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참 우습다.

철들다라는 말은 사리분별을 하는 힘이 있다는 말이지만 사회를 경험한 군필자 혹은 사회인(경력자)들이 철들었다는 말을 듣는 것을 보면 철들었다는 말의 실제 쓰임새는 사회성을 익혔을 때 쓰인다고 본다. 그런데 사회를 경험한 사람들이 사회성을 익혔다는 소리를 듣는 것을 보면, 배움의 터인 학교가 사회성을 가르치지 않다는 말과 같다. 학교에서 사회성을 익힐 수 없으니까 사회초년생들이 철이 없다는 소리나 듣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으니까 당연하게 생각해왔겠지만 그게 이상한거다.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배우는 공간인 학교에서 사회성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모순은 정말이지 웃을 수 밖에 없다.

오늘은 이런 사회성을 가르치지 못하는 학교가 만들어내는 희생자인 왕따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1. 사회성

우리는 학교에서 도대체 뭘 배웠던 걸까.

사람은 동물이다. 그래서 자연스런 욕구와 감정들이 존재한다. 자연이라면 마음대로 행동해도 된다.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하지만 사회는 자연이 아니다. 인공사회다. 동물인 사람이 인공인 사회에서 살려면 자신들의 자연스런 욕구와 감정들을 사회의 규칙에 따라 제어해야한다. 이런 사회속에서 적응하는 성질을 가리켜 사회성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런 사회성은 시험에 나오는 것만 중점적으로 가르치고 시험 성적에만 연연하는 학교에선 배울 수가 없다. 학교는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배우는 공간인데 시험에 나오는 것만 중점적으로 배우고 있으니 학원이랑 무슨 차이가 있나 싶다. 실제로 그런 연유로 학교에선 자고 학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도 있을 정도다.

도대체 학교의 존재가치는 뭔가? 시험 성적으로 줄세우는 곳인가? 사교육 열풍이니 뭐니 이야기 하기 전에 학교가 지금 껏 무슨 역할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지금의 학교는 사회성을 길러줄 수 없는 미숙한 곳이다.




2. 왕따

다양한 작은 사회가 있지만 학교라는 작은 사회는 큰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공부하러 가는 곳이다.

하지만 지금의 학교는 사회성을 익힐 수가 없다. 욕구나 감정들을 강제로 막거나 자연상태로 방치되어있기 때문이다. 교사와 학생간의 관계에선 교칙을 통해 욕구나 감정들을 강제로 막아 제어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고, 학생과 학생간의 관계에선 자연상태로 방치되어 욕구나 감정들을 자유롭게 해소해 제어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한다.


실제로 많은 학생들이 학교를 약육강식의 공간으로 인식한다.

교칙이 있지만 학생과 학생사이에는 큰 의미가 없다. 다들 알고 있지 않나. 강하면 일진이 되고 약하면 왕따가 된다. 그걸 학생사이에서 해결하지 않고 교사나 다른 곳에 퍼트리면 그 순간만 보호받지(보호받지 못할 수도 있다) 더 심하게 따돌림 당한다. 그걸 알기에 많은 교사들이 왕따사태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의사가 없다. 심지어는 교사가 왕따를 지시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1일 왕따를 지시한 한 교사가 정직3개월 처분을 받았다고 한다. 제정신이 아니다.


이런 따돌림은 학교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회에서도 동일하게 벌어진다. 학생이나 성인이나 똑같은 사람이다. 철이 들었다고 듣는 사회인들도 똑같이 따돌림한다는 사실은 도대체 사회성과 왕따가 무슨 관계가 있는건가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학교에서 제대로 된 사회성을 익히지 못하고 자랐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가 아닐까?

지금의 사회성은 학교에서 미리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나가서 강제적으로 체득한다. 스스로 생각해서 습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법의 사각지대에서는 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자연상태로 되돌아가 자신의 욕구와 감정을 제어하지 않고 배출한다. 남들 눈에 안보이는 곳에서 약자를 괴롭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왕따, 즉 약자에 대한 괴롭힘이 사라지지 않은 까닭은, 학교에서 사회성을 스스로 생각해서 익힐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학교에서 시행착오를 통해 스스로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없으니까 학교의 문제가 사회의 문제로 고스란히 이어지는 것이다.




3. 약자

사회는 규칙을 통해 약자를 괴롭히지 말라고 한다.

그 때문에 사회에 적응할려는 성질인 사회성을 제대로 익히면 왕따가 사라질 수 있다. 그런데 왜 사회는 약자를 괴롭히지 말라고 할까? 그건 우리 사회가 자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우리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만들어진 인공적인 공간이다. 약자를 괴롭히는게 허용되다보면 자연스럽게 약자는 도태되고, 그런 사회는 인류라는 종의 개체수가 줄어들어 집단의 생존에 불리해지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들이 약하다고 괴롭히는게 당연하면 그들이 살아남을 수가 없고 그런 집단은 생존할 수 없다. 노인들이 약하다고 괴롭히는게 당연하다보면 사회주류층이 마음편하게 다음세대에게 사회를 이어주지 않게 된다. 사회가 파멸한단 말이다. 임산부를 괴롭히면 아이가 태어나지 않겠지. 파멸한다.

이렇듯, 약자를 괴롭히는게 당연해지면 우리 모두가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에 괴롭히지 말라는 거다.


사회성이란 사회에 적응할려는 성질.

사회의 존재이유와 규칙의 필요성을 알고 나면 왕따는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왕따란 곧 약자를 괴롭히는 것.(따돌리는 왕따엔 예외가 있긴 있다. 하지만 괴롭히는 왕따엔 예외란 없다.) 왕따를 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생존을 위협하는 악이다, 라는 인식이 뚜렷하게 생기면 자연스러운 생존본능을 통해 근절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4. 학교

사회성을 익히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간단한 문제다. 사회처럼 구성하면 된다. 무슨 말이냐고? 우리 사회의 일을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그래, 무대다. 연기자가 인물 체험하는 것처럼 학생들도 실제 사회를 가상체험하며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사회성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는 것이다.

지금이랑 다를바 없지 않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의 학교는 사실상 사회적 역할이 거의 없다. 역할을 맡더라도 권한이 작다.


권한이 작다보니 의무도 적다.

할 수 있는 일이 적은데 의무가 많을 수야 없지 않는가. 그런 까닭에 다음과 같은 비정상적인 일이 발생한다. 한 교사가 왕따 문제를 보고 제지하다 괴롭히던 학생에게 협박까지 받은 사례가 발생했다. 심지어 괴롭히던 아이가 주동하여 제지한 교사의 점수를 적게 줘 무능교사로 낙인이 찍히기까지 했다고 한다. 학생인권조례를 통해 권리는 주어졌는데 권한이 작다보니 의무도 적어 제멋대로 구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그렇다면 답은 나와있다. 권한은 늘려주면 되는 것이다.


사회는 각자 역할을 다함으로서 돌아가는 곳이다.

그 곳처럼 학교에서도 그러면 되는 것이다. 모든 학생들에게 역할을 주어 그 역할에 맞는 권한과 의무를 부여하면 된다. 지금도 그러고 있긴 하지만 사실 유명무실하지 않나. 학교회장이나 반장은 교사의 잡일꾼이나 마찬가지고, 선도부의 힘도 학생에게 있다기보단 교사에게 있다. 권한이 너무나도 작다.

그 때문에 의무도 질 수 없고 책임도 질 수 없다. 이런 사회적 역할을 미리 경험하여 사회성을 쌓게 해야되는데 어리다는 이유로 그런 기회조차 박탈한다. 그래놓고 사회초년생들에게 사회성(철)이 없다는 이야기를 꺼내는건 말의 앞뒤가 맞지 않는게 아닐까?


실제 사회처럼 무대를 꾸며주면 된다.

학생회장의 권한도 대폭늘리고 선도부의 권한도 대폭늘리고 모든 학생들이 각자 역할을 맡게끔 하여 실제 사회에 있는 역할들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면 된다. 학생들이 다하면 교사들은 뭐하냐고? 교사들은 그 역할들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도록 가르쳐주는 역할이지 그 역할을 대신할 필요는 없다. 부모들이 자식들의 어려움을 지켜보는게 아니라 대신할려고 하니까 발전이 없는 것처럼, 교사들이 학생들의 역할을 대신하다보니까 발전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작은 사회인 학교가 큰 사회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맡으면 된다. 권한이 늘었을 때도 햄버거 쏜다고 학생회장으로 당선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은 막아야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권한을 늘려주고 나서 왕따가 생기면 신고를 통해 학생들끼리 해결하도록 지켜보면 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학생들 일을 교사가 간섭하면 피해자가 더 괴로워지는 일들이 빈번하다. 그러니까 더더욱 학생들의 일은 학생들이 해결하도록 해야되는 것이다. 그래야 스스로 잘못을 알고 스스로 반성을 하며 스스로 바꿔나갈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 문제가 발생한다.

학생들의 권한을 늘려주면 분명 악용할 여지가 많다. 내가 봐도 얼토당토하다. 분명히 문제가 발생한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큰 사회에도 마찬가지 아닌가. 부정부패에 찌들은 공직자 이야기들 한두번 듣나? 어른이나 아니아 별 차이가 없다. 오히려 어렸을 때 이런 것을 미리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커서 부정부패를 저지르는게 아닐까?

그래, 확실히 권한을 늘려주면 개판이 될거라 생각된다. 하지만 한번은 겪어야할 문제 아니었나? 학교는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공부하는 곳. 배우면서 시행착오를 겪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 외면해왔던 지금까지의 교육은 제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그들은 의무와 책임을 방기한 것이다.


다양한 사회활동이 있겠지만 본주제에 맞는 왕따를 예시로 들어 왕따가 발생했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실제 사회처럼 돌아가게끔 무대를 꾸며주는 것이다. 한 학생이 경찰역할을 맡은 학생에게 신고하고 그 학생은 가해자 학생을 잡아 구치소에 가둔다. 그리고 법정을 만들어 검사와 변호사 판사 역할을 맡은 학생들이 적절한 판결을 내린다.

그 모든 과정을 교사와 현직(혹은 은퇴한) 검사 변호사 판사들이 도와가며 진행하여 배울 수 있도록 도와주면 된다. 학생들이 비리를 저지르거나 잘못된 길을 걸으려고 하면 바로잡아주면 된다. 만약에 교사조차도 문제가 발생하면 교육청에 고발하여 조치하면 된다.

말이 안된다고? 처음은 그렇겠지. 하지만 한번 자리잡으면 쭉 이어질 수 있다. 물론 이런 상황이 발생하려면 사회전체의 공감대 형성이 이루어져야한다. 그래야 가해자 부모가 이런 절차를 납득할 수 있다.


그 외에 다양한 역할을 주고 그 역할을 행하는 것에 대해 칭찬을 주는 것.

그것은 장대한 롤플레잉 게임과 같다. 교사는 마스터. 학생들은 각자의 역할을 맡은 플레이어. 그 역할을 즐기면서 배우면 된다. 현실 직업을 역할로 만들어 경찰, 정치가, 행정가, 교사(성적이 부진한 학생 상대로 교습한다거나) 등의 역할을 부여하여 그것을 행하게끔 하면 자연스럽게 그것이 꿈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배우는 공간이니 조금 어설퍼도 되고 실수해도 된다. 한발짝 한발짝 교사들과 현직(혹은 은퇴한) 직종종사자들이 도와가며 발전하면 된다.


학생인권조례를 통해 권리 뿐만이 아니라 이런 식으로 권한까지 늘려줘야만 의무와 책임을 다할 수 있다. 그리고 의무와 책임을 다할 수 있어야 사회성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사회를 간접경험하는 것이야말로 교과서적인 교육이 아닌 요즘 이슈가 되는 문제해결방식의 교육이라 생각되며 이런 교육을 하지 않는다면 왕따는 사라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사회를 미리 체험하여 배울 수 있는 교육이야말로 성숙한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5. 게임

게임 또한 작은 사회 중 하나다. 리그오브레전드의 왕따, 그러니까 약자에 대한 괴롭힘은 보통 못하는 유저를 상대로 이루어진다. 정치질을 통해 희생될 수도 있다. 현실과 달리 게임 상에서의 괴롭힘은 욕설이나 패드립이다. 그렇게 괴롭힘을 당할 때 같이 맞받아치거나 게임 내 신고기능을 이용하기도하고 심각할 경우 고발조치까지 진행한다.

현실세계와 마찬가지로 게임 내 세계도 성숙해지면 된다고 생각한다. 자발적으로 필요한 규칙을 준수하는 것이 이루어진다면 욕설이나 패드립이 있을 수가 없다. 물론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걸 위해 노력할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라이엇이 놀고만 있던 것은 아니다. 배심원단도 시도해봤다. 잘안돼서 그렇지..

다양한 노력을 통해 성숙한 가상세계로 되길 바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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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6일

보통 글을 쓸 때 다양한 것을 고려하며 씁니다. 계기 중 하나는 세월호를 인양한다는 소식이었어요. 그래서 저 스스로 할 수 있는건 기억하는것 정도밖에 없겠구나 싶어서 쓰게 됬습니다만... 그러다보니 시야가 좁았어요. 생각이 짧았네요. 죄송합니다. 3월 26일 잊지 않겠습니다.


민주주의

국민이 나라다, 라는 말이 있죠. 네 맞습니다. 지도자를 선거를 통해 선출하는 나라는 국민이 나라죠. 일정 나이가 지나면 모두에게 선거권이 주어집니다. 모두가 공평하게 1표씩.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똑똑하지 않으면 안돼요. 탄핵을 주도하거나 집회에 참가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2표가 주어진다거나 그런거 아니잖아요. 모두가(대부분이)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할 줄 알아야 올바른 지도자를 선출하고 행복한 나라가 되겠죠.

저도 집회에 나갔습니다. 주도해서 뭔가 한건 아니지만요. 그렇다고 해서 제가 다른 사람들에게 갔다고 이야기 할 수도 없고, 그걸 하라고 말할 수도 없어요. 편견이나 선입견이 생긴다거나, 자격지심을 느낀다거나, 소외감을 느낀다거나 해서 올바름을 꺼려하면 안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였는지에 대해 말하고 칭찬하는 정도로 그쳤죠. 사람은 올바른 생각만 제대로 갖춰지면 알아서 스스로 올바르게 행동할거라 생각해요. 모두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니까요.

저는 세상이 평화롭고, 우리나라가 행복한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저도 좀 행복하죠.


검찰

잘했어요.


외교부

소식봤어요. 행동한 건 칭찬할만하지만 좀 더 잘했으면 좋겠어요. 여론(커뮤니티..지만)을 보니까 제 생각보다 이미지가 더 안좋더군요.


모두가 좀 더 행복하게. 그런 나라를 위해 힘쓰는 모두를 응원해요.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