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번 4강전에서 페이커가 5세트 연속으로 갈리오를 쓰는 것을 보고 RNG의 설계에 감탄했다.
'SKT에게 갈리오를 줘서는 안 된다'는 것은 롤판의 불문율이다. 그렇기에 페이커에게 5세트 연속으로 갈리오를 허용하는 것을 RNG의 실수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RNG가 SKT의 전력을 날카롭게 분석했고, '페이커에게 5연 갈리오를 강제하자'는 결론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일단 페이커에게 5연 갈리오를 '강제'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SKT 입장에서 갈리오는 원딜지키기 조합을 잘 쓰는 RNG에게 절대로 줄 수 없는 카드이다. 따라서 갈리오가 밴되어있지 않고 RNG가 갈리오를 선픽하지 않는다면 SKT에서 갈리오를 선픽으로 잡을 수밖에 없다.
 
2. 또한 갈리오는 페이커가 가장 빠르게 다른 라인을 커버할 수 있는 카드이다. 다른 라인의 부진, 특히 정글의 부진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충할 수 있는 픽이 갈리오이기 때문에 SKT 입장에서도 갈리오를 선픽하는 것이 밴픽 단계에서 손해보는 선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렇게 5연 갈리오 유도를 성공했을 때 나타나는 RNG의 이점은 다음과 같다.

1. RNG는 초중반 미드 전략으로 '대 갈리오 전략' 만을 준비해도 충분해진다. 따라서 전략 구상의 난이도가 낮아진다.

2. 갈리오는 기본적으로 캐리 라인에 힘을 실어주는 픽이다. 즉, 딜러 라인의 폼에 큰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지금 뱅의 불안한 폼이라면 갈리오의 '원딜 보호' 의 의미가 빛을 발하지 못할 것이다.

3. 페이커가 탈리야, 라이즈처럼 '개입력도 좋고 후반캐리력도 좋은' 픽을 사용할 수 없으므로 페이커의 후반 폭발력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

RNG는 페이커에게 5연 갈리오를 강제하는 데에 성공했고, 그 결과는 경기 내용에도 잘 드러났다. '대 갈리오 전략' 으로 말자하와 라이즈 픽이 등장했고, '원딜 보호'가 의미를 찾지 못하고 무력하게 무너졌으며, 결국 후반의 페이커는 맞아주는 역할 외에는 할 수 없었다.

SKT 또한 RNG의 의도를 눈치챘을 것이다. SKT는 처음엔 RNG의 2번 이점을 없애는 전략을 사용했다. 자크나 레오나 등의 이니시에이터를 활용함으로서 갈리오를 원딜 지키기가 아닌 이니시를 덮어주는 방식으로 활용한 것이다. SKT는 이 전략으로 2세트를 승리했지만 1세트와 3세트를 넘겨주게 된다.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 RNG는 이미 페이커에게 5연 갈리오를 줄 생각을 하고 경기를 준비했고, 갈리오를 활용한 이니시 조합에 대한 대처는 완벽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2패를 기록하며 벼랑끝에 몰린 SKT는 이제 변수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RNG가 5연 강제 갈리오 전략을 준비하면서 계산에 넣지 않았던 변수이자 RNG가 이 과감한 전략을 사용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 바로 뱅의 기량이다.
SKT는 4세트를 뱅에게 올인하며 승부수를 던졌고, 뱅의 기량이 기적적으로 회복되며 승리를 거두었다.

4세트를 넘겨준 RNG는 다음 전략을 꺼내든다. 코르키-리신-쉔을 이용한 바텀 터트리기 전략이다. 이 역시 뱅의 부진을 공략하는 전략이다. 하지만 이 전략은 오히려 피넛의 날카로운 갱킹이 적중하면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리신 픽이 자충수로 작용해 5세트 또한 SKT가 승리하게 된다.

전략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는 이렇다.
RNG는 뱅의 부진을 노리는 날카로운 전략을 가져왔다. 'SKT에게 갈리오를 주면 안 된다'는 불문율을 냉철히 분석해 갈리오의 활약은 뱅의 기량과 크게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찾아내고, 뱅의 폼이 떨어진 지금이라면 5연 갈리오를 주는 것이 오히려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RNG의 이러한 판단의 근간에는 뱅의 부진이 있었고, 뱅의 부진에 대한 확신이 없이는 사용할 수 없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4세트에 뱅이 갑작스럽게 기량을 회복하면서 RNG의 전략이 흔들렸고, 결국 자충수를 두며 경기를 패배한 것이다.

RNG의 5연 강제 갈리오 전략은 아주 참신하고 날카로운 전략이었다. 하지만 RNG는 상대의 허점을 노리는 데에 너무 몰두하는 바람에 자신들의 강점인 '우지 지키기 전략'을 단 한 번도 사용하지 못했다.
자신들이 손쓸 수 없는 영역인 '적의 부진'에 의존하지 말고, 자신들의 강점에 더 집중했다면 RNG에게도 충분히 승산이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특히 5세트에서 RNG는 갈리오를 선픽할 수 있었고, 그랬다면 무서운 '우지 지키기 조합'이 완성되었을 것이다.
상대의 약점을 파고드는 RNG의 전략은 훌륭했지만, 뱅의 잠재력을 믿어준 SKT와 달리 자신들의 힘을 신뢰하지 못했던 RNG의 소극적인 태도가 결정적인 순간에 승패를 가르는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