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1일, 그 날은 가디언의 사전생성이 시작된 날입니다. 항상 일러스트로만 봐오던 그녀를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 저는 이 때를 놓칠 수 없어 미리 레인저를 삭제해놨죠. 대체 레인저가 무슨 죄냐 싶으시겠지만 그 친구는 12레벨이었습니다. 요즘은 철저한 스펙사회에요.

그렇게 전 두근거리는 마음을 달래며 캐릭터 생성 버튼을 눌렀습니다. 그러자 가디언이 빼어난 용모를 자랑하며 등장했습니다. 그걸 보자마자 한 생각은 '그냥 기본 커스터마이징으로 해도 충분하겠다' 였죠. 하지만 습관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라고, 제 손은 이미 뷰티앨범으로 향해 있었습니다. 그래도 과거에는 직접 커스터마이징을 하겠다며 만져보곤 했었는데 이미 옛날에 포기한지 오래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선생님이 미술은 하지 말라고 했거든요.

저는 차분하게 뷰티앨범을 둘러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조금 실망할 수밖에 없었죠. 가디언이라 하면 도끼를 든 강인한 여성의 모습을 생각했는데, 뷰티앨범엔 대개 손에 물 한 방울 묻혀선 안될 것 같은 느낌의 얼굴형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전 어쩔 수 없이 스크롤을 점점 아래로 내렸고, 다행스럽게도 제 마음에 드는 이상형(?)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 누나 나 죽어!!!

원래 검은사막 설정 상 가디언은 설원에서 내려온 백인이지만 이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강인한 눈매와 탄탄한 검은색 피부. 제가 원하던 가디언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냥 제껀 어디 다른 밀림에서 왔다고 해주세요. 그리고 이제 사전생성을 완료했으면 사전 이벤트를 해야죠. 저는 경매장 대전투에서 당당히 승리를 차지해 큰 점쟁이 버섯을 획득했습니다. 그리고 가디언이 오픈되는 날 정체가 밝혀질 '속삭이는 서리 결정'을 얻었죠.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17일 화요일, 드디어 가디언 오픈날이 다가왔습니다. 전날밤부터 너무 기대했던 나머지 자동으로 눈이 떠졌고, 그 덕분에 저는 평소보다 일찍 컴퓨터를 켜서 검은사막에 접속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흑정령을 만나 메인퀘스트를 진행해버렸죠.

제가 받은 첫 임무는 회색 여우를 잡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 걸, 처음 뛸 때부터 무언가 묵직한 느낌이 들더니 공격은 더 가관이었습니다. 가디언이 온몸에 잔뜩 힘을 주는가 싶더니 도끼를 번쩍 들어 내리쳤습니다. 이게 뭐가 문제냐구요? 그렇게 걸린 시간은 체감상 1초. 다른 클래스였으면 이미 두번 때리고 발차기까지 했을 시간입니다.


▲ 정지화면 같겠지만 영상입니다. 원래 이렇게 느려요. 아, 죄송합니다 사진이었군요.

이건 마치 검은사막이 아니라 몬스터를 사냥하는 유명한 모 게임을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게임은 공격 속도가 느리고 적이 강력해서 상당한 난이도를 자랑하는 것으로 유명하죠. 특히 어떤 무기의 경우 몬스터가 올 것을 예측해서 미리 휘둘러야 할 정도의 게임이니까요.

물론 가디언이 그 정도로 느린 것은 아니었지만, 검은사막 세계에서 볼 때에는 아주아주 느린 편에 속했습니다. 약간 과장해서 말하면 무게 디버프가 걸린 상태로 게임을 하는 것처럼요.

굳이 이걸 좋게 말하면 현실 고증을 잘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자기 몸통만한 도끼를 장난감처럼 휘두르는 것은 말이 안되죠. 온 몸에 힘을 실어서 한방, 또 한방 치는 것이 맞긴 합니다. 또 그래야 더 묵직한 타격감을 느낄 수도 있고.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저는 타격감보다는 답답함을 더 많이 느꼈습니다. 전 원래 빠른 속도를 가진 매화를 주로 플레이하는 유저라 더욱 답답하게 느껴진 것일 수도 있지만요.


▲ 영차영차하면서 때리는 느낌

이렇게 가디언으로 도끼를 힘겹게 휘두르다보니 왜 가디언이 샤이보다 무게를 더 들지 못하는지도 이해가 되었습니다. 가디언은 생각보다 가녀린 사람이었던 거에요. 그러다보니 갑자기 연민이 들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녀의 강인함은 여린 내면을 가리기 위한 장치일 수도 있겠어요. 어쩔 수 없이 조금 더 플레이해봐야겠네요.

마음을 잡은 저는 가디언과 함께 퀘스트를 하나하나 진행해나갔습니다. 그러면서 조금 위안이 되었던 것은 저 말고도 다른 가디언들이 많았다는 것이에요. 제각기 다르게 생긴 가디언들이 똑같은 도끼를 들고 똑같은 장소를 뛰어다니는 것은 생각보다 진풍경이었습니다. 왠지 모를 동료애와 경쟁심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마치 달리기 경주 같은 느낌? 그리고 다른 유저들의 커스터마이징을 몰래 훔쳐보는 맛도 있었어요. 왜요, 저만 그래요? 저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그리고 가디언이 강인한 여전사 이미지다 보니까 퀘스트를 진행하면서 다소 웃긴 점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발레노스 퀘스트를 진행하다보면 크론성의 참모장에게서 고서를 훔치는 장면이 있는데, 원래는 캐릭터가 몰래 다가가서 조심스럽게 주머니를 뒤져야하지만 가디언은 그런 느낌이 아니더군요. 제 생각엔 아마 크론 참모장이 알면서도 모른척 한 것 같습니다. 솔직히 뒤에 왠 건장한 여자가 도끼를 들고 서있는데 저 같아도 얌전히 있겠어요. 과연 참모라서 현명하군요.


▲ 처음보는 사람과 함께 뛰고 함께 낙하하는 맛

▲ 솔직히 이건 알아도 모른척 해야한다.

그런데 한가지 신기한 것이, 발레노스 퀘스트를 완료할 즈음이 되면 생각보다 플레이 할 맛이 납니다. 이제 가디언의 움직임이 나름대로 적응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처음에 느렸다고 생각했던 공격 속도가 손에 익게 되고, 한방 한방 강력한 공격을 꽂아넣다보면 뭔가 통쾌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대신 이 정도 적응했을 때 다른 캐릭터를 꺼내면 부작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이때 잠깐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매화를 꺼냈다가 공격 속도에 다시 한번 놀랐어요. 하마터면 그대로 가디언 접고 매화 유삼신기 맞춰주러 갈 뻔했습니다. 그러니 쿠툼 각궁 싸게 팔아주세요.

그렇게 발레노스 퀘스트를 모두 완료하고 벨리아 마을을 떠나기 전엔 이벤트로 받았었던 '속삭이는 서리 결정'을 녹였습니다. 뭐가 나올까 궁금했었는데, 움바라고 하는 뿔피리가 하나 나오더군요. 나름 장식용 템이라서 좋았습니다. 이걸 착용하면 가디언이 말을 호출할 때 뿔피리를 꺼내서 부는 모션을 취하게 됩니다.


▲ 뿌우우~ 근데 사실 딱히 필요는 없다.


세렌디아 지역 이후부터는 무난무난했습니다. 스킬 적응도 됐고, 움직임 하나하나가 크다보니까 계산적으로 콤보를 넣는 맛이 생기더군요. 사실 다른 클래스도 스킬 콤보가 중요하지만, 가디언은 스킬 쿨타임이 길고 움직임이 느리기때문에 더 신중하게 계산을해서 하나하나 넣어야합니다. 근데 그래서 오히려 재밌었던 것 같아요. 마치 격투게임에서 콤보를 계산해서 넣는 느낌이랄까요?

그리고 콤보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가디언을 플레이하다보니 캔슬모션(한 동작을 취한 후 발생하는 딜레이를 무시하고 바로 다음 동작으로 이어질 수 있게 하는 기술)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원래 공격속도가 느린 가디언이니 중간중간 캔슬모션을 넣어서 콤보를 만드는 것이죠. 그러면 생각보다 빠른 기술 연계가 가능했습니다.

제가 주로 사용하는 콤보 몇 개를 말하자면 먼저 서리절개(기본공격)-대지강타(시프트+F)-설산가름(시프트+좌클릭)-발톱꺼내기(스페이스 바)입니다. 좌우방향키를 누르면서 서리절개를 사용해 이리저리 몹을 모으다가 순간적으로 대지강타를 눌러서 조금 더 빠른 시전을 가능하게 하는 거죠. 그런데 본래 대지강타는 사용 후 몸을 못 가눌 정도의 딜레이가 생기는데, 이 때 설산가름을 사용하면 모션이 살짝 캔슬되면서 좀 더 빠르게 기술이 나갑니다. 그리고 발톱꺼내기를 연계해서 자연스럽게 이어나가는 것이죠. 이렇게 긴 콤보를 맞으면 왠만한 몬스터는 다 사라집니다.

사실 서리절개 다음에 나오는 대지강타는 잡기 기술인 '드잡이' 이후에도 연계가 가능하지만, 자이언트 산적같은 조금 큰 몬스터에게는 잡기 기술이 잘 통하지 않아 PVE에서는 많이 쓸 일이 없더군요. 그래서 서리절개를 쓰다가 사용하는 것이 체감상 더 나았습니다.


▲ 콤보연계를 하면 상당히 빠르고 묵직한 기술사용이 가능했다.

또 다른 콤보 하나는 사지절단(시프트+우클릭)-검은피의도륙(우클릭)-맹렬한기만(좌 또는 우 방향키+우클릭)-자비없는발길(우클릭 유지)입니다. 이것은 툴팁에도 비교적 쉽게 명시되어있는 콤보라서 굳이 자세히 설명드릴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한가지 단점이라면 맨 처음 사용하는 사지절단은 초반에 살짝 딜레이가 있습니다. 대신 그 다음 연계되는 콤보들은 모두 전방가드 혹은 슈퍼아머 상태이기 때문에 사지절단만 잘 들어간다면 그 후엔 문제가 없다는 장점이 있죠.

그리고 이런 콤보 외에도 20레벨 이후에 배우는 '용의 사명' 패시브 기술의 생명력 회복 옵션이 체감상 굉장합니다. 일부러 몬스터에게 왠만큼 맞아줘도 기술 몇 방으로 체력을 회복해버리는 모습을 보여주었어요. 아직 저스펙기준 사냥터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가디언이 가지고 있는 유지력은 앞으로 계속 연구해볼 만한 것 같습니다.

이런 점들을 하나하나 알아가다보니 처음엔 몰랐는데 신기하게도 점점 가디언에게 빠지게 되는 저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더군요. 어쩌면 이번에 큰 실수를 한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더군다나 아직 각성이나 전승이 나오지 않은 상태이기에 앞으로의 모습이 어떻게 변할지 더욱 기대가 됩니다.


▲ 용의 사명 패시브의 생명력 회복 효과는 은근히 체감 될 정도

마지막으로, 펄옷 이야기를 빼 놓으면 섭섭하겠죠? 제 개인적인 생각은 그래도 이번에 나온 므브우르스가 제일 나은 것 같습니다. 기능성 의상인 카나페나 베네실 드레스도 입혀보았는데 영 어색한 느낌이 들더군요. 건장한 제 (남성)친구가 메이드복을 입은 느낌이에요. 인간적으로 정말 그러면 안됩니다. 물론 잠수복이나 위장복을 입혀서 캐릭터를 다 가려버리는 것도 어울리긴 합니다. 근데 그런식으로 나오면 더 이상 옷을 입히는 의미가 없잖아요.

이렇게 해서 저의 가디언 체험기를 마무리하려 합니다. 결론적으로는 제가 만약 지금 신규유저였다면 가디언을 메인캐릭터로 키웠을 것 같네요. 가디언의 재미를 알고 나니까 오히려 다른 캐릭터는 조금 가벼운 느낌이 들더군요. 게다가 처음에는 헤드폰을 안써서 몰랐는데 사운드 효과음이 상당히 괜찮습니다. 발로 걷어 찰 때, 도끼를 휘두를 때, 내리찍을 때 나오는 묵직하면서도 강력한 사운드를 들으면 상당히 신선한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실제 도끼로 녹음을 한 건가요? 가디언이 가진 이런 재미에 한번 빠져버리면 나올 길이 없을 것 같네요.


▲ 가디언 펄의상 므브우르스

▲ 이런 거친 매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