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2년 4월 29일 아테네.

아테네 근해에서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을 통보받았다.
좋은 소식은 신성동맹에 속한 용병들과 베니스 군이 합세해서 튀르크의 영지인 아테네를 탈환했다는 것이다. 도시 국가 아테네가 튀르크군으로부터 독립 된 것이다. 그런 이유로 아테네의 실질적인 영주인 여해적 크산티페가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내기 위해 아테네 법정에 섰고 그녀가 소유했던 염전과 조선소를 압류당했다고 한다.
나쁜 소식은 한 문장으로 간결하게 말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아테네에 흑사병이 돌고있다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선원들이 아테네에 발을 딪는 것을 거부했다. 흑사병이 돈다는 소식을 들은 뒤로는 갑판 밖으로 나오기도 조차 꺼려하는 눈치였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배에서 내린 것은 나와 아그네스, 그나마 쓸만한 5명의 선원 뿐이었다. 흑사병의 피해는 생각보다 더 심각했다. 거리 이곳저곳에 죽어서 사늘하게 식어가는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그 시체를 수거하는 수레에는 시체가 한가득 넘쳐나고 있었다. 영주가 죽어서 도시 기능도 일정부분 마비된 것인지 화물선의 규모와 그 내용물에 따라 세금을 매기는 세관과 경비들도 보이지 않았다. 아테네의 영주이며 술탄인 크산티페가 망해버렸으니 당연한 것이다.  

"가관이로군..."

습관적으로 하는 말이었지만 정말로 눈 앞의 풍경은 가관이었다. 아테네에서 떠날 채비를 갖춘 이들로 항구 전체가 북적거렸다. 이슬람교도와 그리스인들이 반반이다. 기침만 콜록거리다가도 갑자기 픽하고 쓰러져 죽는 사람도 곳곳에서 보였다. 그럴 때면 태연하게 시체를 수거하는 병사들이 수레에 싣고서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아마도 어딘가에 단체로 묻어버릴 셈이겠지.

"참 징그러운 병이야."

아그네스가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면서 말했다. 난 그런 것이 소용 없다는 걸 알았으므로 손수건을 그녀 손에서 떼어 놓았다.

"흑사병에 대한 속담으로 이런 것이 있지. 오찬을 즐기고 만찬 때 죽는다. 손수건으로 막아질 것 같아?"

내 말을 들으니 그제서야 흑사병의 무서움을 짐작하는 듯 보였다. 그녀의 걸음이 사못 빨라졌다.

"빨리 이얀을 찾아야해."

"소용 없을거야. 이얀도 흑사병이 도진 도시에서 술이나 퍼마시고 있을 만큼 태평한 사람은 아닐테니. 아니다, 이얀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어."

"오빤 아직도 이얀에게 감정이 있는 거야?"

"물론이지. 허울 뿐인 명성의 영국 군인출신..이지만 지금은 퇴역한 용병에 불과하지. 별 볼일 없는 남자야."

아그네스는 날 째려보며 말했다.

"오빠가 정말 싫어."

또 시작이군.. 이런 일은 한 두번이 아니었으므로 평소처럼 웃어 넘겼다.
아그네스와 이얀 토마스는 2년전에 약혼을 했던 사이였다. 나는 반대했지만 아그네스가 일방적으로 그의 부모님과 인사를 하게했고 약혼식을 올렸다. 이얀도 아그네스와의 약혼은 싫은듯 했지만 집안에서 강요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치룬 것이었다. 남은 것이라곤 귀족보다 못한 군인의 명성 뿐인 허물어져가는 집안에서 유복한 상인집안의 아가씨는 무척이나 탐낼만한 인물이었다. 돈만 있다면 가문을 회복시키는 것도 금방일테니.
하지만 이런식의 결혼은 불행으로 끝나리란 것을 잘 알기에 난 이얀 대신 페르세포네의 유망주 앙드레와 아그네스를 맫어주려고 노력했다. 앙드레는 프랑스의 이름있는 귀족 출신이었고 재산도 많았으며 젊고 잘생겼다. 무엇하나 빠지지 않는 사람이 아그네스와 교재해도 되겠냐고 나에게 물었을 땐 재고가 남아 도는 향신료의 시세가 폭등한 것만큼이나 기뻤다. 이 때까지만해도 페르세포네 상회와는 친했으므로 앙드레와 아그네스가 맫어진다면 돈을 벌기에도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 때문이다. 물론 그와 맫어짐으로써 가문의 지위가 높아지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아그네스는 죽어도 이얀과 결혼하겠다고 했고 결국 아그네스가 강제로 연 결혼식에 이얀은 찾아오지 않았다...

전투를 위해 단조롭고 우람차게 지은 건물을 그리스 양식이라고 한다면 쓸 때 없이 벽을 나누고 끝을 동그랗게 깎고 기둥을 세워놓은 양식은 튀르크의 양식이다. 그 둘의 양식을 합친 묘한 건물들이 아테네에 이곳 저곳에서 볼 수 있었다. 그리스 양식의 도시 입구를 튀르크의 궁전 입구처럼 만들어 놓은 것도 이러한 것이다. 출입문 역할을 하는 나무 문을 싹 없애버리고 대신 동그랗게 깎아 누구든지 드나들 수 있게 만들었다. 대신 보초들이 지키고 있지만 콜록거리며 기침을 하는 걸 보니 감기가 아니라면 분명히 패스트이다.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지나가는 도중에 피를 토하고 죽어버렸다. 아그네스는 징그럽다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나는 소용 없다는 걸 알았지만 흑사병 전염때문에 아찔한 기분이 들었으므로 손수건으로 입을 막았다. 공기중으로 전염되는 병이니까 말이다.

도시 안에는 사람들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항구 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시골에서 은거하기 위해 마차에 오른 귀족들이나 귀족들의 장례행렬 따위이다. 광장에는 이 때다 싶어서 까마귀처럼 몰려든 상인들이 즐비했다. 흑사병의 유일한 치료제인 육두구와 메이스를 성냥갑에 넣어 팔고 있었다. 지나가는 도중에 외치는 말로 싯가를 들어보니 다섯 알 정도 들어있는 한 주머니가 베니스 근교의 집 한채값이었다. 죽음을 담보로 이정도의 이윤을 얻는다면 해볼만한 장사이다. 나도 상인인지라 이들이 마냥 부러울 따름이었다. 그저 향신료를 정해진 곳에 납품하기 위해 도착해보니 흑사병이 도저있었다고 한다면 벼락맞고 살아날 만큼의 행운이다. 이런 말은 배가 아파서 인정하긴 싫지만, 시세가 폭등한 것이다.

"지나가는 쥐들도 픽픽 죽어버리네."

아그네스가 도시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공포에 질린 표정을 했다.

"흑사병을 보는 게 처음이지?"

"응. 베니스에 도졌을 땐 시골 별장으로 피신해 있었으니까..."

"난 그 때 향신료를 팔았어. 유럽의 한 주치의가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흑사병의 유일한 치료제는 육두구와 메이스라고 주장했거든. 학회에서도 그걸 인정했고. 원래 가격이 높았던 물건이 세간에 집중을 받게되고 유행품이 되어버린다면 그 가격은 너무나도 높아져서 돈으로는 살 수 없는 물건이 되어버리지."

"무슨 말이야. 돈으로 살 수 없는 물건이라니?"

"돈으로 값어치를 따질 수 없을만큼 시세가 폭등해버렸단 말이야. 그것을 얻기 위해 집, 배, 심지어는 자기 가족까지 팔아버리기도 하는 가격이 아닌 가격.
때마침 향신료의 유일한 거래처인 튀르크상인들은 지방 술탄의 반란으로 전쟁이 한창이었고 포루투갈과 에스파니아 상인들은 향신료 개척이니 뭐니해서 우리 시장에 크게 관여하지 못했어. 흑사병이 도졌다는 소문을 듣고 뒤늦게 와봤자 이미 늦었을테지만.
남은 것이라곤 베니스의 상인들이 시세가 좋을 때 팔려고 남겨둔 향신료들의 재고 뿐이었지. 우리 상회는 약 1톤 정도 가지고 있었어."

"때돈을 벌었겠군."

"아니... 오히려 적자를 봤어."

"어째서?"

"향신료는 잘 팔아서 많은 돈을 모았어. 베니스를 통채로 살 수 있을 만큼. 하지만 우리 상회에 투자한 몇몇 큰 손들이 흑사병으로 죽어버렸지. 너도 알잖아? 이 때 아버지가..."

"아, 그 얘기구나. 그 다음은 말 안해도 돼."

"그래. 얘기도 하기 싫다."

굳이 말하자면 상회에서 향신료에 대한 지분은 상인이 60% 투자자가 40%정도를 쥐고 있었다. 그런데 투자자들 중에서도 가장 많은 투자를 한 프랑스의 귀족, 크리스티앙이 흑사병으로 죽어버리는 바람에 향신료에 대한 그의 지분이 그의 유가족에게로 돌아갔다. 그리고 얼마 뒤 유가족은 우리 상회에 지분 만큼의 이익금을 요구했다. 하지만 죽은 사람에 대한 지분은 우리 상회의 소유이고 지분에 대한 공문서는 죽어버린 시점에서 무효였기 때문에 우린 결코 배상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문제는 결국 법원까지 올라가게 되었고 우리 상회는 돈까지 먹여가며 재판을 진행했다. 크리스티앙은 우리가 향신료를 모두 매각한 이후에 죽었고 그 전에 이미 유서와 공문서로 향신료에 대한 지분을 모두 유가족에게 떠넘긴 상태였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이익을 배분하는 것이 아무런 손해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얻은 이익을 지분만큼 돌려주면 되니까.
하지만 죽은 사람이라서 문제가 되었다.
배상액을 측정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얻은 이익에서 재한 것이 아닌, 그 당시 향신료가 팔렸던 평균 시세로 값을 측정하라고 판결이 내려졌다. 지분이 유가족에게로 옮겨짐과 동시에 가장 많은 지분을 물려받은 유가족들에게 이익금을 돌려주지 않고 부당하게 이익을 취하려고 했다는 죄목 때문이었다. 향신료 1톤을 매각한 값 중 그의 지분인 11%를 그 때의 평균 시세에 맞춰서 이익금을 줘야한다는 것이다. 망할 판사놈. 돈에 돈자도 모르는 녀석이 그러한 판결을 내리면 상인들은 분통이 터지기 마련이다.
우리는 그 당시에 베니스와 가까운 튀르크와 에스파니아 근거지에서 향신료가 들어올 것이라 생각했다. 거기서 들어온 것이 시장에 풀리면 향신료의 가격도 그 만큼 떨어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빨리 파는 것이 이득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다른 상회보다 싼 값으로 급히 매각했다. 물론 적정선을 지켜가면서 말이다. 아무리 급하다고 그래도 우리는 이성보다 이익에 대한 판단이 앞서는 철두철미한 상인이었으니까.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생명을 쥐락펴락하는 것이 향신료이다. 그 당시의 향신료 시세는 천지차이였다. 말도 안되는 가격에 팔아도 흑사병이 걸린 와중에 눈에 뵈는 것이 있을 리가 없다. 미쳤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가격을 불러도 흑사병에 걸린 사람은 풀 한포기 쥐는 심정으로 향신료를 구입하게 되는 것이다. 상황이 이랬으니 평균시세를 따지자면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싯가로 책정되기 마련이었다.
불행하게도 우리가 벌어들인 돈은 법원에서 제시한 평균에도 못 미쳤기 때문에 지불 금액이 고작 11%임에도 불과하고 투자자 지분에 대한 손해를 보고 말았다. 죽은 상인들은 제외하고 살아있는 상인들만 이익을 나눠 가진 상태에서 말이다. 크리스티앙 외에도 몇몇 때에 잘 맞춰 죽은 투자자의 유가족들이 돈을 쏙쏙 빼먹는 바람에 우리 상회는 크게 휘청거렸다. 향신료를 매각한 다음에 죽어버렸으니 우리가 어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웅변은 은, 침묵은 금이라는 속담이 있는데 죽은 놈이 침묵을 하니 금보다 비싼 향신료를 얻어버리게 되었다. 상회 관계자들은 미쳐버릴 노릇이었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을 읽어보았는가? 작가는 엄연히 희극이라 말한다. 하지만 상인들의 입장에서보면 그것은 엄청난 비극이다. 당연히 받아야 될 돈과 그것에 대한 이자라고 할 수 있는 살점을 못 받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살은 자르되 피는 한 방울도 흘리지 말아라'라고 어처구니 없는 판결을 내놓는 재판관들은 실제로도 베니스에 널리고 널렸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재판관 중 한명에게 판결을 받았을 뿐이다.
아무튼 이러한 사정으로 아버지가 상회의 마스터에서 쫓겨나게 되고 난 지방에서 물건을 매각하는 지점장이 되었다. 그래서 거의 행상인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지방의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빌어먹을 향신료와 재판관 녀석 때문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