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니코폴리스의 기원(왕국력 1096년)

세이지 마스터 루파스 케헬

제14대 국왕이셨던 발티넬 국왕의 재기 기간 15년은 건국초의 활기가 쇠퇴하고 정파와 당파들의 분쟁이 극에 달한 시기였다. 정확히 기술하자면 왕국력 348년부터 363년까지의 시기이며 지금으로부터 700년도 넘은 옛 시기였다. 발티넬 국왕은 불안한 내정을 쉽게 수습하지 못하자 여러 군제를 개혁해 왕국군의 기반을 닦은 재위기간으로 평가된다.

제로멜 국왕 시대의 법전과 귀족에 대한 여러 규율이 왕국의 오랜 안정을 가져왔던 점을 생각하면 발티넬 국왕의 이러한 군사제도 정비는 문제를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여 문제 해결을 돕는 방식이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발티넬 국왕 말기와 다음 대 국왕 유스엘 시대의 초기에 조정에 있었던 정치적 분쟁을 해결할 수 있었던 바탕이 된 것도 이러한 군제 개혁이 큰 도움이 되었다.

이리하여 유스엘 국왕 시대에 이르러 정치적인 정파와 당파들은 상당히 수습하였으나 발티넬 국왕 시대부터 물려받은 조정 밖의 상황을 수습하는 일은 새로운 시작이 필요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큰 문제는 마법사들이었다. 이 때에 이르러 일부 마법사들이 연맹을 결성하고 다른 마법사들에게 가입을 강권하였다. 그리고 일단 가입하면 강력한 규약을 따르도록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당시의 마법사 사회는 연맹파와 비연맹파로 대립되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조직력에서 앞설 수밖에 없는 연맹파가 비연맹파에 비해 힘이 강했다. 여신들의 힘을 지닌 성직자와 강력한 무사들이 다수 존재하는 왕국 사회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다면 연합된 마법사들의 힘만으로 나라를 뒤엎을 수도 있다는 걱정이 세간에 떠돌 정도였다.

결성된 마법사 연맹이 단순히 힘만 지니고 있었다면 나오지 않았을 소문이었으니 당시 분명히 연맹에 가담한 마법사들 가운데 적어도 상층부는 그 힘을 사용해 권력을 누리겠다는 마음도 분명히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에 비해 비연맹파는 독자 행동을 하는 마법사들이고 기본적으로 은자형이거나 연구자형의 인물들이었다. 따라서 굳이 연맹파 마법사들이 세속적인 권력을 노리지 않더라도 최소한 마법사들 사회의 주도권과 분위기는 연맹측이 원하는 방향으로 흐를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이것을 방치하여 세월이 많이 흐르면 후대에는 마법사 사회의 성격이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조금이라도 식견이 있는 사람들의 생각으로 이것은 왕국 사회 전체에 심각한 위기를 가져올 수 있는 현상이었다.

그리하여 유스엘 국왕께서 당시에 실행한 대책은 비연맹파 마법사들을 지원하는 방법이었다. 그들의 연구와 생계를 정책적으로 재정적으로 후원하는 조치를 취한 것이다. 그러자 연맹파의 마법사들은 이에 반발하여 비싼 가격으로 마법을 팔고  용병으로 나서는 등 자금을 모으며 힘을 길렀다.

비연맹파 마법사들은 은거형이나 연구형의 인물이 많았기 때문에 친화력이 없는 반면에 연맹파는 적극적으로 그리고 조직적으로 부유층과 귀족층에 마법물품을 팔고 마법용역을 받아 수행하면서 인맥의 저변을 넓히고 자금을 모았다. 유스엘 국왕께서는 왕국의 신민간 계약과 거래를 통제할 수 없기에 이를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조정이 우회적인 규제 수단을 내고 심지어 새로운 조세 항목까지 만들어 연맹의 수익에서 세금을 걷었으며 왕실에 우호적인 비연맹파를 적극적으로 움직여 저렴한 마법물품과 용역을 시장에 제공하자 연맹파의 입지는 차츰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당시 왕국 관료들은 왕국 고관들의 압박을 받아 은거형이나 연구형인 비연맹파 마법사들을 끊임없이 자주 방문하여 이런 성과를 이루는 일에 대단한 수고를 했다고 한다.

사태가 이런 식으로 전개되자 연맹파는 왕실에 조치에 항의할 수는 있었지만 그 이상은 어려웠다. 그 이상은 반역과 내란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법사들이 강하고 비연맹파는 속세의 일에 나서기 싫어하는 사람이 많다지만 사태가 반역에 이르면 전부는 몰라도 일부는 왕실의 편에 설 것이고 여신의 힘을 지닌 성직자들과 왕국의 모든 귀족과 장군 및 그 병사들을 상대해야 했다. 연맹 내부적으로도 사태가 반역에 이른다면 탈퇴자가 반드시 나올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봉기의 명분이 없었다. 하지만 연맹파는 여기서 굴하지 않고 다른 방법을 생각했다.{nl}연맹파가 왕국의 테두리 안에서 가능한 독립된 자치령을 요구한 것이다. 세상의 주도권을 쥘 수 없다면 그들만의 도시이자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도시를 만들어보자는 뜻이었다고 한다.

연맹파가 이전에 벌인 행태와 동기가 불순했지만 그럼에도 유스엘 국왕으로서는 이를 딱히 막을 수단이 없었다. 내부적으로는 달라도 이것은 법률상 귀족 영주가 다스리는 영지의 모양을 갖추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연맹파가 그들이 지닌 모든 수단을 활용하고 또한 그간 모은 자금으로 그들의 영지가 될 땅을 구입한 뒤 연맹의 대표자를 그곳의 통치자로 신청했을 때 왕실은 반쯤 포기한 심정으로 너희들끼리 거기 모여있으면 사고를 쳐도 거기서만 칠 것이라는 사실을 위안 삼으며 그것을 인가하였다. 이에 연맹파는 그 도시에 니코폴리스라는 이름을 붙이고 자신들의 승리를 축하하였다. 니코폴리스는 그 후 한동안 번영을 구가하였다. 그들이 한 곳에 모이자 효율이 올랐고 그에 따라 그들이 공급하는 마법물품과 마법용역의 질과 양이 향상되고 가격은 내렸기 때문이었다.

왕실로서도 니코폴리스가 번영하면 조정에 바치는 조세도 늘어나니 이점은 나름대로 긍정적인 면이었다. 그리고 이런 변화에 따라 비연맹파 마법사들을 지원하는 부담도 더 이상 지지 않아도 되었다. 니코폴리스에 모인 마법사들이 외부에 나와서 엉뚱한 일만 벌이지 않는다면 모두가 행복했을 결말이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일은 그렇게 진행되지 않았다. 지금도 그 전말이 알려지지 않은 일이지만 니코폴리스의 마법사들은 그 정체가 명확하지 않은 전대미문의 마법실험을 시도하다가 그 부작용으로 연맹에 속한 마법사 전체는 물론이고 니코폴리스에 거주하던 일반 시민들 전부가 사라지는 대사고가 일어났다.

훗날의 조사의 추정에 의하면 이 실험은 마법사들의 마력을 극도로 강화하려는 실험이 해당 마법에 참여하여 연결된 연맹소속 마법사들과 도시의 모든 생명체에게만 어떤 알 수 없는 부작용이 나타나 모두 어딘가로 사라지게 되었다고 결론지어졌다.

이후 빈 도시가 되었지만 실패한 부작용이어서 니코폴리스의 건물 등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그럼에도 세월이 흘러도 마법사들이 노력하여 지은 도시는 시간의 풍화작용에 놀라운 저항력을 보였고 아무도 돌보지 않는 도시임에도 바로 어제 모든 사람이 이사간 도시처럼 유지되며 낡아지지 않았다. 여전히 강력한 마법이 작용하는 덕분이었다. 

따라서 세월이 더 흐르고 사람 없는 유령도시에 대한 두려움이 희석되자 도시는 점차 이주해온 왕국의 백성들에 의해 활용되어 신수의 날에 이르기까지 평범한 도시로 이어져 내려왔다. 그러나 후대에 니코폴리스에 정착한 시민들이 도시의 수선과 보강 공사를 덜 하여도 되도록 불편을 덜어주었던 마법은 신수의 날에는 재앙으로 돌아왔다.

아무도 몰랐던 도시에 잠복된 마법력 때문에 페디미안이나 다른 도시에 비해 더 큰 피해가 발생했고 이는 특히 인간에게 해로워서 시민들의 상당수가 도시에서 떠나게 된다. 다만 신수의 날로 어차피 왕국 전체에 온전한 곳이 드물고 이곳은 마법에 의해 도시의 건물과 시설은 다른 지역에 비해 양호한 탓에 머무른 시민도 있다고 한다.

또한 소문에 의하면 이후 도시의 마법력에 이끌린 몬스터가 모여들어 위험한 상태가 되고 왕국에서는 도시를 다시 확보할 여유가 없기에 일반인이 진입을 삼가도록 권고하고 있다.






2, 현대 마스터 총람 3권

이번 호의 인물들은 대부분 봉직기간이 오래되고 그 신상이 잘 알려진 편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지난 총람과 같은 도움 없이도 비교적 쉽게 저술할 수 있었다. 다만 언제나 그렇듯이 당대의 마스터들에게 관해 같은 마스터가 서술하는 일은 언제나 불필요한 오해와 분란을 일으킬 소지가 있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기록을 남기지 않으면 더구나 지금 같이 신수의 날로 인해 기록되지 않은 사실의 소멸 가능성이 높은 시기라면 우리 시대의 역사를 후대에 전할 수 없다는 마음에 나는 다시 역사에 한 줄의 기록을 더하는 바이다.

세이지 마스터 루파스 케헬


1. 소드맨 마스터 라슈아

라슈아는 군대의 가장 낮은 계급에서 출발하여 장군이 된 평민 출신 마스터입니다. 왕실의 경비대장을 두 번이나 지냈고 장군이 되어서도 신병 훈련 같은 상대적으로 시시하다고 생각되는 일도 꺼리지 않고 맡은 참된 군인으로 유명합니다.

공식적으로는 그는 전역한 것으로 되어있지만 클라페다에서 신병 모집의 사명을 받아 임시로 복귀하였고 따라서 신수의 날로 인해 추가 지시가 없는 지금 법률상 현역이란 소문도 있습니다. 사실 라슈아는 경비대장과 훈련소장 등의 직책도 물러났다가 군에서 요구하면 다시 맡곤 했기에 정확한 사정은 본인만 압니다. 특히 경비대장의 직위는 하이랜더 마스터 더글라스 블랙에게 물려줬다가 다시 본인이 맡은 뒤 다시 라민 장군을 지목한 일은 유명한 사건입니다.

이렇게 유명해서 저절로 퍼진 사건을 제외하면 다른 일들은 어쨌거나 군의 기밀에 해당하는 일이므로 그가 전후사정을 자세히 말할 리가 없습니다.


2. 마리아 리드 펠타스타 마스터

마리아 리드는 어떤 점에서 특이한 인물입니다. 그녀는 연관 분야의 다른 마스터들과 달리 군대와 직접적으로는 무관합니다.{nl}이런 경우 대개 용병에 연관되는데 그녀는 딱히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 둘 다가 아니라면 혼자 행동하는 일을 좋아하는 취향의 마스터로 분류할 수 있지만 많은 부하와 제자들을 거느린 그녀는 여기에도 해당하지 않습니다. 그녀와 그녀를 따르는 사람들도 용병처럼 고용되거나 대가를 받고 일을 하기도 하지만 용병처럼 그것이 주업은 아닙니다. 이처럼 매우 특이한 그녀의 성격과 거느린 집단의 특색 때문에 마리아 리드는 지속적으로 하이랜더 마스터측의 협조 요청을 거절하는지도 모릅니다.


3. 파이로맨서 마스터 아브레 멜린

아브레 멜린은 양립하기 쉽지 않은 두 가지, 여신에 대한 신앙과 마법학에 대한 탐구의지를 병행하여 상승효과를 낸 흔치 않은 마법사입니다.

마법에 대한 그녀의 높은 학문적 성취에 불의 여신 가비야의 은총이 더해져 화염마법에 대한 그녀의 성취는 역사 이래 가장 높은 경지에 도달했다고 여겨집니다. 전성기의 아가일라 플러리마저도 화염마법만으로 싸운다면 아브레 멜린의 불꽃을 감당하지 못하리란 평가가 과장이 아닐 수 있습니다.


4. 위저드 마스터 루시아

평민 출신의 재능조차 평범했던 루시아는 알려진 바로는 수습생 시절부터 마법에 입문하기에 소질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불굴의 의지로 자신의 재능 없음을 극복하여 대마법사의 반열에 섰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마법 입문자들을 돕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루시아는 일반적으로 마법사들을 격려하는 편이나 마법사의 길을 경시하거나 제대로 수련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엄격합니다.


5. 클레릭 마스터 로잘리야

로잘리야는 클라페다와 샤울레이 등지에서 일하던 치유사로 치유와 간호 그리고 성직에 두루 재능을 발휘해 많은 사람을 도왔고 덕분에 젊은 나이에도 많은 사람에게 사랑 받는 아가씨이기도 합니다.

플레이그닥터 마스터는 두 사람의 나이차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그가 은퇴할 무렵에는 로잘리야가 자리를 이어받아도 그리 오래 봉사하지 못하리란 점을 아쉬워합니다. 따라서 아마도 그녀가 다음 대의 플레이그닥터 마스터가 되는 일은 없겠지만 플레이그닥터 마스터는 만약의 경우를 자신에게 유고 상황이 생기면 로잘리야가 자리를 대신하도록 지명해두었습니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기면 로잘리야는 클러릭 마스터와 플레이그닥터 마스터를 겸직하다가 어느 쪽이든 먼저 적당한 후계자가 나타나면 그쪽부터 물려주기로 했다고 합니다.


6. 크리비 마스터 헤르쿠스

모든 성직자 가운데 크리비들은 가장 전통적인 여신 신앙을 지닌 성직자입니다. 전통과 과거를 중시하기에 나이 많은 성직자들의 클래스로 여겨지며 가장 전통적인 여신 신앙이 또한 정통적이라는 생각으로 일찍 이 길로 들어선 성직자도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대개 이 길을 벗어나지 않고 가장 신실한 신앙생활을 영위합니다. 헤르쿠스는 신실한 엄격함과 여신의 은혜를 사람들에게 쉽게 전달하는 친화력을 함께 갖춘 연륜있는 크리비 사제입니다.

그는 또한 팔라딘 마스터의 절친한 벗입니다. 이 우정은 우리 시대에 성직자의 오랜 두 종단이 과거보다 사이 좋게 지낼 수 있는 배경이기도 합니다. 과거에 문제가 있었다기 보다 서로 소원했던 사이라고 해야겠지만 말입니다.


7. 아처 마스터 에드뮨다스 틸러

에드뮨다스 틸러는 몰락한 귀족의 후예로 아주 오래 전 조상 대에 이미 공식적으로 평민이 되었습니다. 그 후 농민으로 대대로 이어온 가문에서 입대한 그는 결국은 마스터로 성공하였습니다.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여 재능 있는 사람과 어려운 처지의 사람을 후원하는 일에 관심이 있으며 별의 탑에 관련된 일에도 주목하고 있습니다. 클라페다 같은 대도시의 시민들을 방어하기 위한 성벽의 수리나 물자축적 등도 근래 그가 크게 신경을 쓰는 부분입니다.


8. 쿼렐슈터 마스터 리엄 토일러

신수의 날 이전의 리엄 토일러는 쇠뇌와 자신의 여러 장비의 개선과 리디아 샤펜의 전승을 연구하는 취미 생활의 비중이 높았다고 합니다.

또한 살도 통통하게 찐 편이었다고 합니다. 성실한 노력가였음에도 그가 그런 푸짐한 인상이었던 이유는 마스터의 일과 자신의 취미를 적절히 병행하는 여유 있는 성품 때문이었다고 봅니다.

그러니 지금 그의 인상과 일상을 보는 사람은 신수의 날로 그가 클라페다를 위해 정말 열심히 일하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도 남의 말 하기 좋아하는 어떤 사람들은 그가 헌터 마스터 피오나 이에바에게 잘 보이려고 체중감량을 했다는 헛소리도 합니다.



3. 태고의 사건들 : 보루타

보루타Boruta에 관하여

다섯 명의 신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이 장소에 도착했을 때부터 불만이 있던 아우스테야 여신이 말했다. [이건 잘못된 일이에요.] 메데이나 여신이 그 말에 반응했다. [그러나 아우슈리네님과 길티네님이 결정한 일이다.] [사실은 길티네님이 일방적으로 주장하고 아우슈리네님이 그 고집에 양보한 것이죠.]

바로 나온 아우스테야의 반박에 메데이나 역시 동의하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결정은 내려졌고 이제 와서 되돌릴 방법은 없지 않니?] [물론 그렇지만  그렇다고 차원 하나를 날려버리는 일이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그냥 그곳이랑 여기를 서로 오가지 못하게 막을 수도 있었잖아요.]

[그건 길티네님의 취향에 맞지 않았나 보지. 아니면 차원간 이동을 봉인하는 방식은 불완전하다고 아우슈리네님이 생각하셨을 수도 있고..] 그 때 음악회에 끼어든 잡음처럼 거친 목소리가 여신들의 대화 사이에 침입하여 자신의 뜻을 드러냈다.

[그것 참 재미있는 일이군. 너희들은 인간을 위하는 일이라면 사족을 못쓰지 않았나? 다름 아닌 인간의 미래와 그들의 안전을 위해 위험한 녀석들을 미리 치우자는 일인데 아우스테야 네가 불만을 지니다니 의외로군.] 아우스테야가 끼어든 자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이봐요. 바우바스 도대체 당신은 그렇게 오랜 세월을 살았는데도 답답한 소리나 하고 있네요. 우리가 인간을 위하는 것과 이건 분명 다른 일입니다. 그리고 창조주께서 세상과 인간을 돌보는 일을 시키신 것은 우리만의 과제가 아니고 당신도 해당하는 일입니다.]

[크크크 그러니 내가 너희들과 이 자리에 있는 것 아닌가? 다만 길티네님의 취향은 모르겠거니와 적어도 내 취향은 봉인보다는 멸절이 훨씬 마음에 드는군. 그리고 차원 하나를 통째로 멸망시키는 일은 길티네님 정도의 능력과 발상이 아니면 불가능한 위대한 행사라 할 수 있지.]

바우바스의 옆에 서있던 라가나가 하늘을 쳐다보며 뭔가를 가늠하다가 말했다. [지금쯤이면 길티네님과 그분이 이끌고 간 부하들이 녀석들 차원을 거의 정리했을 것 같아. 아마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생존한 녀석들이 그 차원에서 도망쳐서 곧 이리로 올 것 같은데..]

이제까지 조용히 있던 제미나 여신이 중얼거렸다. [비록 크기가 이쪽 세상의 대륙 정도 밖에 안 되는 작은 차원이라지만 이 정도 시간에 그렇게 쉽게 정리가 될까? 아무리 길티네라고 해도 말이지..] 바우바스가 제미나의 말을 듣자 말했다.

[그쪽에 있는 녀석들을 일일이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쪽 세상 전체 환경을 지옥처럼 바꾸는 일이지. 어렵기는 해도 일단 성공하면 녀석들도 그곳에서 버틸 수 없지.] [녀석들이 버틸 수 없을 정도의 지옥 같은 환경이라니 끔직하네.] 제미나의 이어진 혼잣말 비슷한 이야기에 바우바스가 다시 말을 보탰다.

[거기는 여기와 달리 기반이 네가 맡은 이런 대지가 아니지. 아마 길티네님은 그 점을 이용하리라 본다. 프로스터 로드 그 녀석을 데리고 가셨으니 한빙지옥이 되지 않을까 싶다만 뭐 알 수 없지.]

[그 추측이 사실이라면 거기서 얼어 죽든가 아니면 이리로 살아서 도망친 다음에 우리에게 죽든가 둘 중 하나겠군.] 라가나의 말이었다.

[녀석들 중에 매우 강력한 것은 죽지도 살지도 못하고 꽁꽁 얼어붙은 상태로 그곳에 갇힐 가능성도 있겠네.] 메데이나의 이런 추측도 덧붙여졌다.

아우스테야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무튼 녀석들도 생명체라 할 수 있는데 세상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이러는 건 싫어요. 가능하면 어디다 묶어두면 좋을 텐데..

창조주께서 세상과 인간을 보호하라고 하셨지만 그 방법을 선택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린 일인데 이번 결정은 너무 길티네님의 의견에 휩쓸려 가는 것 같아 별로 마음에 들지 않네요.] [만약 아까 말한 추측이 사실이라면 그곳의 괴수들이 모두 동면에 들 가능성이 있지. 그럼 묶어두는 셈이고. 우리는 거기서 빠져 나와 여기로 도망 오는 녀석들을 잡으면 되는 거고 정말 원한다면 여기서도 죽이지 않고 봉인하더라도 말리지는 않겠다.

아우스테야 네 혼자 실력으로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말이지. 하지만 이렇게 마냥 기다릴 줄 알았다면 이미 이 세상에 와있는 녀석들을 사냥하는 임무에 지원하면 좋았다는 생각이 드는군.] 바우바스의 말이었다.

메데이나 여신이 그 말에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그 녀석들 왜 자기들 세상과 여기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것치고는 여기 와서 있는 것들 수가 많지 않아 다행이지. 덕분에 도망쳐올 지점에 이렇게 다섯이나 모여 기다릴 수 있는 것이고..]

제미나 여신이 자매의 말을 보충했다. [지금은 그렇지만 신수의 기운이 점점 퍼져서 우리가 인간들을 지상에 내놓을 때가 되면 녀석들도 살기 좋아진 이곳 세상으로 더 많이 와서 더 오래 머물 거야. 지금은 인간이 지하에서 우리의 보호를 받으면 지내니 상관없지만 그 때는 늘어난 인간들과 더 많이 넘어온 저쪽 세계의 괴수들이 마주칠 테고 그건 끔직한 결과를 일으킬 거야. 그 때 가서 인간과 이 세계를 그 녀석들에게서 보호하려고 애쓰느니 지금이 좋아.  이 세계의 하늘과 땅에 영면하신 창조신의 신수의 기운이 미약하게 퍼져 아직은 다칠 것이 적은 불모의 세계일 때 말이지.]

바우바스가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소리와 함께 그 말에 동의했다. [너희 무리에도 생각을 제대로 하는 자가 있었군.]

아우스테야가 이 말에 약간 발끈한 기색을 보이며 나섰다. [우리는 항상 바르게 생각합니다. 바우바스 당신 같은 이들이 창조신의 유지를 제멋대로 해석하고 자기 입맛대로 행동한단 말입니다. 특히 길티네님이 심합니다.]

이 말이 다시 라가나를 도발했는지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아우슈리네님을 중심으로 모인 너희들은 뭐 하나 단결해서 제대로 된 성취를 해낸 적은 있느냐는 말이다.] [굳이 우리 자매들이 모여서 뭔가를 해야만 할 일도 없습니다. 각자 맡은 바 일을 충실히 하면 창조신의 유지를 잘 잇는 겁니다.]

[그래서 그렇게 너희 무리 각자가 일을 잘 해서 라이마의 일이 그 모양인가? 창조신에게서 예언과 운명의 권능을 받았으면 뭐 하나? 제대로 맞추는 것도 없잖아? 아니면 다 알면서 너희들끼리만 공유하고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는 것인가? 그런 건가?]

[길티네님이 라이마님이 지니신 은사를 통해 미래를 알기 위해 핍박하는 것을 모르는 자매가 있나요? 라가나 당신도 잘 아는 일이지 않습니까? 라이마님이 지닌 창조신의 예지의 은사와 권능은 우리 각자가 품은 흥미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자기만을 위한 계획이나 야심 깃든 의도와도 무관하게 행사되어야 하는 권능입니다.]

[그래서 너 지금 길티네님이 자신의 야욕을 위해 창조신께서 내려주신 권능을 엿본다고 주장하는 것이냐?] [그렇다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이번 일처럼 명분을 앞세워 길티네님의 취향대로 다른 차원의 세계를 멸망으로 이끄는 행태는 지나친 감이 있다는 말입니다..] 아우스테야의 말을 라가나가 끊었다.

[흥 너희 일단의 무리들이 길티네님을 두고 왈가왈부 하지만 따지고 보면 창조주께서 영면에 드신 이후로 길티네님만큼 강력한 지도자가 우리 사이에 없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더구나 이 일은 아우슈리네님도 어쨌거나 동의하신 일이고 저 짐승 같은 녀석들이 너희 무리들이 그렇게 죽고 못살도록 좋아하는 세계와 인간에 장차 해가 된다는 사실도 명확하니 너희 처지에서도 어차피 그냥 둘 수 없는 일이다. 즉 아우스테야 네 하찮은 취향 따위가 고려될 상황이 아니다. 여기 있는 바우바스님이나 내가 이번 일에 손을 보태는 일이 딱히 인간이 예쁘고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라가나가 노려보며 하는 말에 아우스테야는 잠시 그 눈빛을 마주보았으나 딱히 논리로는 반박할 말이 없고 더 나가면 결국 길티네를 성토해야 하므로 결국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는 것으로 끝을 내었다.

그 때 메데이나가 말했다. [다 같이 창조되어 이 세계의 책임을 맡은 우리입니다. 우리가 서로 맞지 않는 점은 있으나 언쟁 이상의 불화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야 지금처럼 이 세계를 위해서 일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침내 기다리던 녀석들이 오나 봅니다.]

그 순간 아무것도 없던 공중에 검은 점들이 생겼다. 그리고 그것들은 추락하고 있지만 날개가 있었다. 대부분 의도되지 않은 혹은 성급하게 결행한 차원 이동의 후유증으로 제대로 날개를 사용해 비행을 하지 못했다.

그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몇이 간신히 날개를 펴고 비행이라기 보다는 활공에 가까운 몸짓으로 연착륙을 시도하려 노력했다.

메데이나 여신이 [그렇게 놓아둘 수는 없지.] 라고 말하면서 공중으로 팔을 뻗자 빛의 화살 같은 것이 창공을 향해 무수히 솟아올랐다.

가장 먼저 적응하여 활공 자세를 취하던 것들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것들도 모두 공평하게 적중 당했고 활공에 성공했으면 다섯 명의 신들이 기다리던 장소에서 멀리 갈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못하고 근방의 대지를 향해 낙하하기 시작했다.

바우바스가 그 모습을 보면서 제미나에게 말했다. [일단 땅에 닿으면 네가 그 대지의 권능으로 그들을 대지에 묶으라고 날아다니면 쫓아다니기 귀찮으니까.]

제미나 여신이 답했다. [그렇게 하겠지만 저들을 영구히 땅에 묶어서 차후로는 영원히 못 날게 하려면 나라 할지라도 시간이 필요해.]

라가나가 말했다. [그럴 필요 있나? 그냥 지금 모두 죽이면 되는데 다 죽일 시간만 벌면 충분해.] 그러나 바우바스는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하나라도 도망가면 귀찮으니 이왕 할 일 제대로 하자고 혹시 하나라도 놓치면 곤란하니 다시는날지 못하도록 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아우스테야는 전투에 가담하지 말고 제미나가 의식을 마칠 때까지 지키는 편이 좋겠군. 직접 손을 대지 않고도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으니까..]

바우바스가 그렇게 말하자 두 여신은 찬성하는 의사를 나타냈다. 그리고 금방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까마득한 허공에 점으로 나타났던 것들이 굳이 신의 눈을지니지 않았어도 확연하게 그 특징을 알아볼 수 있는 고도까지 내려왔다. 후대에 전설을 통해서나마 인간에게 알려져 드래곤이라고 부르게 되는 괴수들이었다.

메데이나의 빛의 화살이 다시 공중으로 치솟았다. 잠시 후 길티네와 그녀가 이끄는 부하들의 공격을 피해 이 세계로 건너온 드래곤들이 대부분 대지에 추락했고 그 결과 소수를 제외하고 그 자리에서 낙하의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충돌 순간에 죽었고 아직 숨이 붙은 드래곤들도 사정은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땅에 닿기 전에 죽은 일부와 충돌로 사망한 대다수와 달리 메데이나의 공격을 피하고 활공에 성공하여 충격을 줄인 드래곤이 몇 있었다. 착륙했다고 말할 정도의 안정적으로 땅에 도달하지는 않았으나 다른 드래곤처럼 대지에 처박혔다고 표현하기는 어려운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단 한 개체도 완벽한 상태로 어떠한 부상도 없이 대지를 딛고 서있는 드래곤은 없었다. 바우바스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말했다.{nl}[이 정도만 살아서 도착할 줄 알았으면 혼자와도 충분했겠군.]{nl}{np} 다른 여신들이 아니라 라가나가 의외로 그 말에 토를 달았다.{nl}[혼자 왔으면 더 살아남았을 테고 제미나가 저들을 묶지도 못할 테지.]{nl}[다른 곳에 간 동료들이 제 몫을 해낼지 염려스러워서 해본 소리지.] [라이마의 예언에 따르면 여기로 올 녀석들이 가장 수가 많았으니까 그리고 나타난 것을 보니 실제로도 그렇고..]

[바로 그 라이마의 예언이라 믿기지 않는다는 말이지..] 그렇게 라가나와 서로 말을 주고받던 바우바스는 그 와중에 빈사 지경의 드래곤 여럿의 숨을 끊었다. 그리고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비교적 멀쩡한 녀석이 있네. 내가 저 녀석을 맡지. 나머지는 너희들이 다 맡아 처리하라고.]

그렇게 말하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그가 정한 목표로 다가갔다. 메데이나는 한숨을 쉬며 떠나고 라가나는 잠시 바우바스의 등을 노려보았으나 이내 생존한 다른 드래곤의 몇 초에서 몇 시간에 이르는 다양한 범위의 남은 생애를 종결시키기 위해서 움직였다. 죽은 드래곤은 정말 죽었는지 확인하는 것도 겸하는 일이었다.

바우바스가 다가가자 그 드래곤의 의사가 전해졌다. 음성이 아니었으나 바우바스는 그와 소통이 가능하였다. [사악한 냄새가 진동하는 너는 누구냐? 네 녀석들의 사악함이 우리 고향을 파괴하고 우리를 이곳으로 내몰았다.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이런 죄악을 행한 것이냐?]

바우바스는 상대에 대한 비웃음을 가득 담아 표정과 정신으로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다. 그런데 그의 표정은 이 세계의 마신과 여신에 대해서 아무런 정보가 없는 드래곤에게는 무의미한 겉모습의 변화에 불구했기 때문에 조금도 영향이 없었다.

그러나 드래곤의 뇌리를 울린 바우바스의 의사 표시는 그럼에도 충분히 그 의미를 전달할 수 있었다. [질문이 많구나. 하지만 내 이름은 네 언어로 전달하기 어렵다. 그건 네가 전해오는 이름도 마찬가지지. 그럼에도 아무튼 대답한다면 네게 어떻게 들리거나 받아들여지든 나는 바우바스라고 한다. 네가 전해오는 개념은 굳이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보루타라고 하면 되겠군. 모처럼 친절을 발휘해 다른 질문에 답하자면 애초에 네 녀석들이 함부로 이쪽 저쪽을 오가지 않았으면 멸종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우스테야에게는 몰라도 적어도 내게는 그런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니까 이유나 명분 같은 것으로 짐승들과 논의할 생각은 없다는 말이다. 지능이 있다고 다같이 존중 받을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들이나 그런 것들을 보살피는 것들이나 둘 다 짜증나는 일인데 그런 것을 주구장창 땅속에서 지켜보고 있지나 울화를 풀 대상으로 네 녀석들이 적당하다는 것이지. 동료들과 싸울 수는 없고 인간은 너무 약하니까 말이야.]

[네 동료? 인간? 그건 무슨 의미인가?] [아 그런 게 있어. 네 녀석들은 너희들이 오가는 세계가 어떤 곳인지 어떤 존재들이 사는지 관심도 없었겠지만 그래서 난데 없이 나타나서 여기 동물들이나 집어 삼켜 잡아먹고 돌아가곤 했겠지. 하지만 그런 멍청한 태도 때문에 오늘날 이 꼴을 당한 것이니 이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해라.

네 녀석들 숫자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면 나 혼자 건너가도 충분했겠지만 길티네님은 더 강하시고 현명하시기 때문에 이렇게 효과적으로 너희를 이리로 몰아주신 것이지. 그러고 보니 앞으로 아우스테야에게도 이런 식으로 주장하면 되겠군.]

[닥쳐라. 무슨 말로도 우리 고향과 동족들을 학살한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쪽 세상 존재들 사이의 구분 따위 우리에게는 무관하다. 용족이 아니면 어차피 포식자를 피하는 숙명을 지닌 사냥감에 불과하다. 크든 작든 그건 마찬가지다.]{nl}[그래도 주제를 모르고 설치는구나.]

그 말을 끝으로 바우바스는 말이 아닌 행동을 보여주었다. 바우바스의 손이 보루타의 허리를 공격했다. 보루타는 그것을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오히려 막지 못했다. 다른 드래곤들과 다툴 때와 달리 끝에서 속도가 더 높아지며 공격이 더 날카롭게 살아났기 때문이었다.

옆구리에 전해지는 난생 처음 겪는 고통을 느끼며 보루타는 간신히 두 번째로 들어오는 공격을 날개에 달린 발톱으로 저지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막았다고 생각한 순간 그의 발톱이 부러져 나갔다.

허리와 달리 발톱은 빠른 시일 안에 회복되겠지만 보루타의 방어를 무너뜨린 바우바스의 손은 다시 허리를 노렸다. 발톱을 뭉갠 상황에서 더 가까운 부위 예를 들어 날개를 공격할 수도 있었는데 다시 몸통을 노린 것은 바우바스가 전력을 다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 정도면 내 권능은 고사하고 무기도 쓸 필요가 없겠는데..] 정말 당혹스러운 사실이었지만 보루타는 자신이 바우바스를 일대일로 상대해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우바스가 지나가면서 한 말대로 저들의 동료 숫자가 그렇게 많지 않다면 그리고 동족들이 무사해서 이들과 제대로 된 싸움을 한다면 이길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충분히 강력하고 수도 많은 동족들은 자신의 세계에서 오랜 세월을 만족하며 살았고 이쪽 다른 세상을 발견하고도 자만심에 빠져 이곳에 있는 소위 신들이라는 존재를 깊이 알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무관심의 결과 치고는 이것은 대가가 너무 컸다. 크게는 동족의 몰살이었고 보루타에게는 개체의 죽음이 눈앞에 있었다.

보루타는 오른 날개를 휘둘러 바우바스를 밀어내는데 성공한 보루타는 연달은 공격으로 바우바스를 물려는 시도를 해서 그를 더 멀리 물러나게 하는데 성공했다. 그러자 날개를 강하게 움직여 날아오르려 했다.{nl}도망가려는 의도보다는 위에서 공격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 순간 자신이 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그 당혹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여전히 보루타는 바우바스의 표정을 구별할 수 없었지만 바우바스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보루타가 당황한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이번에는 보루타의 머리에 제대로 공격이 들어갔다.

보루타에게는 허리와 머리의 상처에서 오는 고통은 난생 처음 겪는 일이었다. 아무도 그의 가죽을 뚫고 이런 고통을 준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세계에서도 드래곤 동족간에 전투가 발생하고 그 싸움에서 이 보다 심한 부상을 당한 드래곤도 있었다.

그 중에는 고통에 울부짖는 녀석도 있고 더 심한 상처에도 꿋꿋하게 입을 다물고 버티는 녀석도 있었다. 보루타는 그쪽에서는 항상 이기는 입장이었기에 지는 쪽이 입는 상처가 주는 고통의 크기를 체감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 자신이 얼마나 신체적으로 강하건 간에 고통을 감내하는 능력에서는 그리 강하지 않다는 비참한 현실을 처음으로 낯선 세상에서 낯선 존재로부터 배우는 중이었다.

어찌 보면 너무 운이 없었다고도 할 수 있었다. 아무튼 상처에서 오는 고통이 없이 냉정하게 생각해도 그가 이길 가능성은 없었다. 따라서 그는 달아나야 했다. 그러나 비행이 불가능했으니 상처 입은 몸으로 땅 위를 이동해서 바우바스에게서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 뒤를 바우바스가 유유자적하게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걸어서 따라갔다.{nl}보루타는 달리고 있었으나 어찌되었든 이 땅의 마신인 바우바스가 천천히 움직이는 속도를 많이 앞서지는 못했다.{nl}보루타의 부상과 바우바스의 권능이 그런 상태의 이상한 추격 상황을 만들고 있었다. 그 때 소리도 없이 바우바스의 옆에 아우스테야가 내려섰다. 바우바스는 그녀가 곁에 서기 전에날개 소리만으로도 그게 아우스테야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바우바스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자 아우스테야가 말했다.

[살려줘.] [크크 우습지도 않지만 오랜 만에 나긋나긋한 말투로 말하니 물어보지 않을 수도 없군. 왜? 왜 살려주어야 하지?] [어쩌면 마지막 남은 드래곤일 수도 있으니까..]

[그럴 수도 있지만 녀석의 본래 세계에도 어딘가 생존한 것이 있을 수도 있어. 우리 말고 다른 동료들이 간 곳에서도 생존한 녀석이 존재할지도 모르고.] [그렇기는 하지만 최소한 여기에는 없어.] [살려두면 인간에게 해를 끼칠 텐데? 저 녀석 인간과 우리와의 차이도 잘 모르더라고 힘이 없으면 그냥 집어 삼킬 걸?]

[아마 어딘가 땅속으로 숨어들 테지. 그러면 대지의 권능을 지닌 제미나는 그게 어디든 알 수 있어. 그러면 다시는 못 나오도록 봉인하면 돼. 일단 대지의 깊은 곳에 봉인되면 제미나의 힘이나 그것을 넘어서는 창조신의 힘이 없다면 누구도 풀어줄 수 없어. 심지어 아우슈리네님이나 길티네님이라도 어렵지.]

[너다운 물렁한 제안이로군. 좋아. 모처럼 부탁이니 그렇게 하도록 하지. 다만 두 가지가 궁금하군.] [그게 뭔데?] [아니 세 가지네. 언제 다시 이렇게 부드러운 네 말을 들을 수 있을지. 언젠가는 아우스테야의 전투적인 모습을 볼 수 있을지. 그리고 언제 다시 보루타가 세상에 풀려날지 그 세 가지가 궁금하다.]

[셋 다 불가능합니다.] 다시 낯빛을 굳힌 아우스테야의 반응이었다.

[크큭 너무 장담하지 말라고 언제 다시 내게 뭔가 부탁할 날이 또 올지 모르고 우리가 끝내는 언젠가 싸우게 될지도 모르고 창조신께서 다시 깨어나거나 그 힘이 세상에 다시 휘몰아치지 말라는 법도 없으니까 말이지.]

[저 드래곤을 살려준 대가를 원하는 것이라면..] [그 대가는 당장 받도록 하지. 나는 살생은 좋지만 청소는 싫어. 여기저기 널린 드래곤 시체들 누군가는 정리해야겠지. 내 몫까지 수고해 달라고.]

그렇게 말하고 바우바스는 아우스테야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떠나갔다. 아우스테야는 바우바스가 떠 넘긴 청소보다는 그가 그 전에 한 말에 잠시 불길한 예감이 들었으나 '무슨 일이 생긴다면 라이마님이 뭔가 알려주겠지.’라고 생각하고 곧 이어 눈에 들어온 사방의 드래곤의 시체와 그 잔해에 다시 한숨을 쉬고는 그 정리를 위해 몸을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