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는 모든 것은 살아있다. 이 말은 하나의 주문처럼 그의 뇌리에 박혀 새로이 얻은 가르침을 계속해서 되새겨주었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 말이 깨달음, 즉 완전히 새로운 지식 세계를 여는 열쇠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이 그가 여기에 온 까닭이었다.



노분도는 그 말을 음미하면서 거대한 버섯 포자가 아침 안개에 젖어 붉고 푸른 색으로 반짝거리는 장가르 습지대의 숲을 천천히 걸었다. 습지대의 얕은 웅덩이 위를 가로지르는 삐걱대는 나무다리를 몇 개 건너자 금세 목적지에 다다랐다. 노분도는 다른 모든 존재를 작아 보이게 할 만큼 커다란 버섯의 빛나는 밑동에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 버섯 머리 꼭대기에 텔레도르라는 드레나이 주거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릎에 전해지는 통증을 원망하며 지팡이에 힘겹게 몸을 기댄 채, 꼭대기까지 자신을 실어다 줄 승강판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걱정이 드는 이유는 다른 이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아직도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종족이 뒤틀리지 않은 드레나이 주거지에 발을 들여놓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던 시절도 있었기에.



그냥 나를 비웃겠지.



노분도는 차갑고 축축한 습지대의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앞으로 다가올 도전에 맞설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빌어 보았다.



승강판이 멈춰 서자, 노분도는 느릿한 걸음으로 조심스럽게 아치형의 입구를 지나쳐, 야트막한 계단 몇 개를 밟고 내려가서 거주지의 작은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나갔다. 그곳에는 이미 의회가 소집되어 있었다.



다양한 드레나이의 굳은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경멸과 우월감으로 가득 찬 눈망울들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결국 크로쿨… “뒤틀린 드레나이"일 뿐이었다.



뒤틀린 드레나이는 추방당한 천한 존재였다. 그것이 맞는 일도, 옳은 일도 아니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뒤틀리지 않은 노분도의 많은 형제자매들은 크로쿨의 쇠락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는지, 특히나 노분도처럼 성스러운 빛으로부터 재능을 부여받고 사랑받던 존재가 그토록 심하게 퇴락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노분도 자신도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언제였는지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존재가 몰락하기 시작한 그 정확한 순간만큼은 놀랍도록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오크가 샤트라스를 포위했을 때에는 하늘도 눈물을 흘렸다.



빗방울이 드레노어 대지에 은혜를 베푼 지도 오래전 일이었는데, 지금은 다가오는 전쟁에 반대라도 하듯이 먹구름이 머리 위에서 넘실대고 있었다. 가랑비가 샤트라스와 밖에 있는 군대의 머리 위로 흩뿌려지다가 양 진영이 대치하는 동안 점차 억수같이 퍼붓는 폭우로 바뀌었다.



천 명도 더 넘어 보이는군, 노분도는 안쪽 성벽 위에 높이 있는 연단에서 으스스함을 느꼈다. 바깥쪽 성벽 너머에는 횃불이 타고 있는 테로카르 숲의 나무들 사이로 그림자가 움직였다. 만약 오크가 시간을 들여서 더 신중한 계획을 세웠다면, 공격을 위해 외곽 지역의 나무를 베어냈을 테지만, 당시의 오크는 전략을 짜는 데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크에게는 오직 전쟁의 전율과 핏방울이 떨어질 때 즉각적으로 얻게 되는 만족감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텔모르가 함락되었고, 카라보르와 파랄론도 마찬가지였다. 한 때 장엄했던 드레나이의 수많은 도시가 이제는 폐허가 되었고, 남은 것은 샤트라스가 전부였다.



오크 무리가 천천히 전열을 가다듬자 노분도는 공격을 앞두고 똬리를 트는 독사 한 마리가 떠올랐다. 이번 공격은 샤트라스 수호자들에게 종말을 가져다줄 것이 분명했다.



어쨌거나 우리는 살아남을 운명이 아니다.



노분도는 오늘 밤 여기 모인 자신과 다른 이들 모두가 희생물이 되리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들은 끝까지 남아 최후의 전투를 치르기 위해 자원하였다. 압도적인 승리에 도취한 오크는, 드레나이를 섬멸 당하고 멸종한 종족으로 여기게 될 것이다. 다른 곳으로 피난처를 찾아 떠난 드레나이는 살아남아서 언젠가 세력이 균형을 이루는 날에 다시 싸울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그렇게 되라지. 내 영혼은 빛의 영광을 받은 존재가 되어 계속 살아나갈 것이니.



담대해진 노분도는 자신의 강인하고 튼튼한 몸을 다가올 일에 대한 긴장감으로 가득 채워 꼿꼿이 세웠다. 사자 같은 양다리로 버티고 서서 단단한 돌 바닥 위에 발굽을 문지르자 두꺼운 꼬리가 불안한 듯 흔들렸다. 빛의 축복이 어린 수정 망치 자루를 꽉 그러쥐며 심호흡을 했다.



하지만, 그렇게 조용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신성한 빛의 전사인 노분도와 다른 조언자들은 끝까지 싸울 것이다. 노분도는 벽 양쪽에서 정렬해 있던 동지들이 걸어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들 또한 노분도처럼 자신 앞에 놓인 운명을 받아들이며 마음의 평정을 얻어 침착하고 결연한 자세를 유지했다.



밖에는 전투 장비들이 도착하고 있었다. 투석기, 성벽분쇄기, 노포 같은 공성용 기계가 횃불 사이를 빠르게 지나다녔다. 그러한 무거운 장비들이 성벽을 공격할 수 있는 사거리 안에 정렬하며 끼익끼익 소리를 내면서 불길하게 삐걱거렸다.



처음에 산발적으로 울리던 북소리는 비처럼 부드럽게 시작했다가 점점 빨라져서, 끊임없는 우레처럼 울려 퍼지는 그 리듬에 맞춰 숲 전체가 살아났다. 노분도는 빛에게 힘을 간청하는 기도를 읊조렸다.



머리 위에서 광란의 북소리를 아래로 반사하던 먹구름 속에서 깊숙한 울림과 움직임이 있었다. 한순간 노분도는 자신이 간청한 것 이상의 힘과 분노, 잔인하고 피에 굶주린 군대 전체를 단 한 번의 위엄으로 쓸어버릴 수 있는 성스러운 불꽃의 강력한 빛줄기로 빛이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신 게 아닌가 생각했다.



실제로 그런 빛줄기가 나타났지만, 빛의 신성한 힘에서 온 것이 아니었다.



불꽃을 뿜는 거대한 발사체가 우르릉 소리를 내고 빙빙 돌며, 용솟음치던 구름을 뚫고 유성같이 빠른 속도와 뼛골을 울리는 힘으로 대지와 충돌했다.



귀청이 터질 듯한 굉음이 노분도의 귀를 강타했고, 물체 중 하나가 위험할 정도로 가까이 스쳐 지나가며 근처에 있는 부벽을 박살 내고는 그를 흩날리는 잔해들과 함께 내동댕이쳤다. 이런 신호를 기다렸다는 듯이 바깥쪽에 있던 군중이 도시를 뒤덮는 소름 끼치는 함성과 함께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파괴할 듯이 맹렬하게 전진했다.



빗줄기는 점점 거세지고 가장 외곽에 있는 벽은 조잡한 투석기가 쏘아 올린 커다란 돌을 맞고 흔들렸다. 노분도는 외곽 벽이 버텨내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 벽은 급하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오크가 드레나이를 조직적으로 말살하자 샤트라스가 최후의 보루가 되리라는 우려 때문에 방어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어 이전 해에 바깥쪽 원형 지역의 내려앉은 바닥 위로 벽을 추가한 것이었다.



잔인한 오우거 몇몇이 포탄으로 이미 손상된 벽의 한 구획을 뚫고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거대한 몸집의 짐승 같은 오우거 둘이 샤트라스 정문을 거대한 성벽분쇄기로 강타하고 있었다.



노분도의 동지도 적을 향해 몇 방의 공격을 날렸지만, 한 놈을 쓰러뜨리면 둘이 달려드는 형국이었다. 손상된 벽이 완전히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반대편에서는 광분한 오크들이 피에 대한 욕망으로 격노하여 아우성치며 서로를 딛고 하나씩 꼭대기로 기어올랐다.



시간이 오고야 말았다. 노분도는 망치를 들어 올리고, 눈을 감은 채 압도적인 전투의 소음 속에서 마음을 비웠다. 마음으로 소리쳐 구하자, 빛이 주는 친숙한 따스함으로 그의 몸이 씻겨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망치가 빛을 발했다. 노분도는 정신을 집중하고 축복받고 정화된 신성한 힘을 아래쪽의 오우거에게 비추었다.



앞을 못 보게 할 정도로 강렬한 섬광이 전장 전부를 비추었고, 앞줄에 있던 오크들의 비명이 뒤따랐다. 성스러운 빛에 불탄 오크들이 충격으로 말을 잃고 움직이지 못하자 드레나이 전사 몇몇이 커다란 오우거 한 놈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쓰러뜨렸다.



노분도는 잠깐 숨을 돌릴 수 있었지만, 그것도 나무가 쪼개지는 소리와 함께 끝이 났다. 강력한 성벽분쇄기가 마침내 정문을 부수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노분도는 고난의 거리에 있는 수비병들이 물결 치며 몰려오는 오크와 오우거에 맞서러 달려나가자마자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노분도는 다시 한번 빛에게 간청했다. 자신의 치유력을 가능한 모든 이에게 발휘하였지만, 적은 너무 강력했다. 상처입은 드레나이를 치료하면 몇 초 후에 똑같은 드레나이가 다시 잔인한 공격으로 상처입는 일이 반복되었다.



약해진 외벽을 파괴하러 갔던 오우거들이 이제 벽을 뚫고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수비병들은 가망 없을 만큼 적은 수였고 양쪽으로 포위당해 있었다.



오크들은 피에 대한 굶주림에 광분하고 취해버렸다. 외곽 구간이 오크로 가득 찼을 때, 노분도는 오크 떼의 눈을 볼 수 있었다. 그 눈은 상대편을 겁에 질려 꼼짝 못하게 할 만한 핏빛 격노로 불타오르며 빛나고 있었다. 노분도와 다른 구원자들은 치유에서 정화로 전략을 바꾸었다. 다시 한번 샤트라스 전체에 밝은 광명이 내리쬐자 빛에 닿은 수많은 오크의 핏빛 안광이 순간 희미해졌고, 비틀거리던 오크들은 남은 드레나이 전사들에 의해 하나 둘 쓰러졌다.



쿠-쿠쿵!



벽이 흔들렸고, 노분도의 발굽이 비에 젖은 돌 위로 미끄러졌다. 노분도는 몸을 단단히 버티고 서서 오우거 하나가 나무줄기만큼 굵은 몽둥이로 자기 왼쪽 부벽 토대를 사정없이 내려치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노분도는 망치를 하늘로 치켜들고 눈을 감았으나, 다른 소리 때문에 집중하고 있던 마음이 바로 흐트러졌다…



쿠-쿠콰쾅!



이번에는 오우거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아래쪽 어디에선가 발생한 폭발 때문에 균형을 잃었다. 노분도는 한쪽으로 몸을 굴려 가장자리 너머로 한 줄기 붉은 안개가 고난의 거리로 굽이치며 들어오는 것을 응시했다. 몇 명 남은 수비병들이 바로 숨이 막혀 구역질하기 시작했다. 수비병 중 몇 명은 무기를 떨어뜨리며 몸을 구부렸다. 잔인한 오크들은 피의 향연을 한껏 즐기며 쇠약해진 전사들을 빠른 속도로 처치해 나갔다.



살육이 끝나자 오크 떼는 벽에 있는 수비병들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 욕망을 맹렬히 드러내며 위를 노려보았다. 오크 몇 명은 손으로 얇은 표면을 떼어내며 오우거 등 위로 기어올랐다. 오크의 호전성과 고삐 풀린 광폭함은 압도적이었다. 그 붉은빛 안개는 고난의 거리 전체로 퍼져 나갔고 이제 아래쪽에서 벌어지는 커다란 혼란을 뒤덮기 시작했다.



노분도는 자기 뒤에서 소란스러운 소리를 들었다. 어떻게 해서인지 내곽 구간의 방어를 뚫고 들어온 몇몇 오크가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쿠-쿠쿵!



벽이 다시 한 번 흔들렸고, 노분도는 의심할 여지 없이 부벽을 두드리러 다시 돌아온 아래쪽의 오우거에게 저주를 내렸다. 노분도가 오우거의 반격을 막아낼 준비가 되었을 때 두 번째 불타는 포탄이 일제히 하늘에서 떨어졌다.



노분도는 빛의 분노를 정면에 있는 첫 번째 오크에게로 향하게 했다. 그 녹색 짐승은 눈빛이 흐려지며 무너져 내렸다. 노분도가 수정 망치의 머리 부분을 오크의 정수리를 향해 정면으로 내리치고 나서 오크를 위로 들어 올려 망치를 왼쪽으로 휘두르자, 오크의 갈비뼈가 산산조각 부스러졌다. 노분도는 망치를 돌려 아래로 포물선을 그리며 다른 오크의 다리를 향해 휘둘러 무릎 관절을 박살 냈다. 오크는 고통으로 울부짖으며 성벽 앞으로 거꾸러졌다.



붉은 안개가 솟아오르며 계속 밀려들어 돌 위를 양탄자처럼 뒤덮었다. 노분도와 동료 구원자들은 끊임없이 싸웠지만 붉은 안개는 가슴 높이까지 차오르고 결국에는 얼굴 높이까지 차올라서 눈을 따갑게 하고 폐를 화끈거리게 했다.



노분도는 동지 몇 명이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는 것을 들었으나 짙게 낀 붉은 안개가 시야를 가려 그들의 행방을 놓쳤다. 다행히 노분도를 향한 적의 공격은 약해진 듯했고. 노분도는 급격한 구토감으로 답답함을 느끼며 뒤로 한 걸음 비틀거렸다. 머리가 곧 터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후에 뼛속까지 저리게 만드는 안갯속에서 끔찍한 전투의 외침이 들려왔다.



어둠이 다가왔다. 노분도는 애를 쓰며 경련으로 자신의 몸이 뒤틀리는 것을 보았다. 짙게 깔린 진홍빛 안갯속에서 문신을 한, 무시무시한 눈빛의 거대한 오크 하나가 양손 도끼를 손아귀에서 돌리면서 드레나이의 독특한 푸른색 피로 뒤덮인 채 헐떡거리며 나올 때 노분도는 필사적으로 숨을 죽이려 했다. 검은색 털이 오크의 두꺼운 가슴과 어깨에 달라붙어 있었고, 아래턱은 송진처럼 검게 물들어서 두개골의 모습을 그대로 얼굴에 드러내 주었다.



뒤에서는 수십 명의 오크가 일어나며 달려들었다. 노분도는 끝이 가까워져 온 것을 알았다.



쿠-쿠쿵!



벽이 다시 한번 요동쳤다. 악몽 같은 오크가 달려들었다. 노분도의 몸이 뒤로 휘었다. 칼날이 갑옷을 가르고 몸 왼쪽 부분의 감각을 앗아 가면서 가슴을 가로질러 깊은 상처를 아로새겼다. 노분도는 망치를 휘둘러 그 오크의 오른쪽 손가락을 박살내고 손과 들고 있던 도끼를 동시에 못 쓰게 함으로써 그에 보답했다. 그러자, 두렵게도 그 끔찍한 존재는 미소를 띠었다.



그 오크는 노분도를 꽉 붙잡고는 활활 타오르는 두 눈빛으로 태울 듯이…. 아니 뚫어질 듯이 노려봤다. 노분도는 숨을 쉬려고 헐떡거렸다. 그 순간, 의지의 한 켜 한 켜가 벗겨져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어떤 어두운 악마의 마법이 작용하는 것 같고, 자신의 본질 일부가 없어지는 느낌이었다. 노분도가 아무런 해답도 찾아낼 수 없는 공격이었다.



쿠-쿠쿵!



노분도는 오크의 얼굴과 가슴에 짙은 피를 토해냈다. 눈을 감고 미친 듯이 그러나 절망적으로 빛을 불러, 방어막을 형성하도록 충분한 시간 동안 오크를 중화해달라고 호소했다. 노분도는 소리쳐 구했다…



노분도가 빛과 접하며 그 광휘의 축복으로 은혜를 받은 이래 처음으로….



응답이 오지 않았다.



공포에 질려 노분도는 눈을 뜨고 광분한 오크의 불구덩이 같은 안구를 쳐다보았고, 그 오크는 커다란 입을 벌리고 고함을 질러 다른 소리를 모두 잠재우고 노분도의 고막을 산산조각 내려는 듯이 위협했다. 그건 마치 어떤 끔찍하고 소리 없는 꿈속으로 갑자기 던져진 듯한 느낌이었다. 그 짐승 같은 오크는 몸을 뒤로 젖혔다가 머리로 노분도의 얼굴을 들이받았다. 노분도는 팔을 휘두르면서 뒤로 비틀거렸고, 비가 내리퍼붓는 가운데 오크의 불타는 눈길이 노분도의 눈길을 파고들 때 아래로, 아래로, 아래로… 안개를 뚫고 으르렁 소리를 내는 무언가 커다란 것이 노분도 아래에 부서지듯이 떨어져 내렸다.



여전히 소리 없는 악몽 안에 갇힌 채, 노분도는 벽의 모퉁이로 오크가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근처에서 허물어진 부벽이 무너져 내렸다. 성벽 윗부분의 커다란 구획이 떨어져 하늘과 비를 가리고 노분도를 완전한 어둠의 세계로 가둬 넣었다.



거기에 누워서 노분도는 숨을 곳을 찾아 떠난 자들, 이 학살에서 탈출하기를 기도하고 있는 자들, 사랑하고 아끼던 이들,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며 지켜내려 했던 바로 그들을 생각했다.



어떻게든 아직 목숨은 부지하고 있었다.



노분도는 어두운 무의식의 구덩이에서 나왔지만 숨 막히고 앞을 볼 수 없는 곳에 갇혀 있다는 사실만을 발견했다. 호흡은 들쑥날쑥하고 숨이 가빴지만, 그래도 아직 살아 있었다. 그 이후부터… 벽이 무너진 뒤부터…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노분도는 다시 정신을 차렸다. 전투의 혼란 속에서 그 빛에 도달할 수 있을 만큼 정신을 집중하는 데 실패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은, 지금 그가 만날 수 있는 것은, 분명히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



노분도는 이토록 무기력하게 낙담하고 완벽하게 혼자라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만약 빛에 도달할 수 없고 그가 여기서 죽는다면, 자신의 영혼은 어떻게 될까? 그 빛이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다면? 자신의 본질은 공허의 세계를 영원히 떠도는 저주받은 존재가 되는 것인가?



노분도는 일생을 명예롭게 살아왔다. 그러나… 이것은 일종의 벌인가?



그의 정신이 해답을 찾는 동안에도, 그는 손을 뻗어 차가운 돌을 발견했다. 노분도는 자신이 아주 이상한 모습으로 누워 있다는 것과 어떤 부드럽지만 끔찍한 덩어리가 바로 자신 옆에 바짝 붙어 있다는 것, 왼쪽 다리가 거의 전부 다 부서졌다는 것을 천천히 깨닫게 되었다.



노분도는 갈비뼈와 다리에 전해지는 고통을 무시하려 애쓰며 오른쪽으로 몸을 돌려 심호흡을 했다. 빛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자신을 치유할 수 없어서 당분간은 고통을 견디며 살아 있어야 할 터였다. 다행히 왼쪽 부분에 감각이 돌아왔다. 그리고… 움직일 때마다 희미하게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청력도 돌아온 모양이었다.



그가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은 어딘가에서 공기가 들어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눈이 주변에 적응하는 동안, 노분도는 작은 구멍, 빛은 아니고 자신을 에워싼 어둠보다 약간 더 밝은 그림자를 발견했다. 손을 좀 더 뻗어보자 친숙한 원통형의 물체에 손이 닿았다. 그의 망치 자루였다.



남아 있는 미미한 힘으로 노분도는 망치 머리부분 바로 아래를 쥐고서 그 작은 구멍 방향으로 들어 올렸다. 돌벽 덩어리가 떨어져 내렸고 커다란 돌조각이 어긋나며 만들어낸 틈새 사이로 좁은 통로가 생겨났다.



바로 그때, 노분도의 귀에 어느 정도 떨어진 곳으로부터 공포 그 자체가 자아낸 울부짖음과 희미한 비명이 들려왔다. 노분도는 망치를 사용하여 자기가 만든 구멍을 지나 좁은 공간으로 상반신을 끌어당겼다. 그 순간, 뒤쪽의 파편 깊숙한 곳에서부터 슬피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힘을 짜내어 좁은 통로를 마저 지나가며, 부러진 다리가 뾰족뾰족한 돌 문턱에 긁혀 찌르는 듯한 고통이 몸 전체를 훑고 지나갈 때는 비명이 터져 나오는 것을 참아야 했다. 억지로 짜낸 듯한 울음은 계속되었다. 주위의 돌은 움직이고, 모래와 먼지는 갈라진 틈 사이로 스며들었다. 희미하게나마 빛의 흔적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되는 출구를 향해 재빨리 몸을 끌었다.



파편 속에서 무엇인가가 울부짖는 소리가 커짐에 따라, 노분도는 그것이 몸을 빼내려고 필사적으로 애쓰는 오우거라고 추측했다. 그 오우거가 필사적으로 애쓰는 동안 노분도는 몸을 뒤집어 팔꿈치로 기었다. 이제 커다란 잔해 무더기가 보였다. 오우거가 마지막으로 내지른 분노의 고함은 거대한 무더기 전체가 무너져 내리고 사방에 먼지 구름이 일어나면서 멈췄다.



갑자기 또 다른 울음소리가 뒤를 이어, 위쪽의 어딘가에서부터 들려왔다. 공포에 질린 여자의 소리였다.



몸을 돌렸을 때, 그날 이후로 아무리 애써도 잊을 수 없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달빛이 비추고 위쪽에서 불빛이 에워싼 고난의 거리 전체가 토막 난 드레나이 시체로 산을 이루고 있었다. 비는 그쳤지만, 시체들은 여전히 사방으로 튄 구토물과 피로 미끈거렸다.



노분도의 마음은 아이들 시체를 보고 허물어졌다. 어린 나이임에도 많은 수의 아이들이 용감하게 부모들과 함께 남기를 자청했었고, 부모들도 오크들이 드레나이 도시에 아이들이 없으면 이상히 여기고 종족을 말살하려고 마지막 한 명까지 찾아 나서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직도, 마음 한구석으로는 남은 아이들이 살아남아서 산에 급히 만들어둔 은신처에 안전하게 머물러 있기를 바랐고, 또 그러기를 온 힘을 다하여 기도하고 있었다. 바보 같은 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매달릴 유일한 희망이었다.



아이들을 죽이는 것만큼 몰상식한 일이 또 어디 있을 것인가?



여자의 비명이 다시 한번 그의 귀를 강타했고, 조롱과 비아냥거림도 잇따랐다. 오크들은 흥청거리며 승리를 자축하고 있었다. 위를 올려다보고 그 비명이 들려오는 곳을 찾아냈다. 저 위 높은 곳, 드레나이가 알도르 마루에 세운 울타리 언덕 절벽에서 튀어나온 곳이었다. 그곳에서 오크들이 가엾은 여자 드레나이를 고문하고 있었다.



내가 막아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혼자이고, 다리는 부러진 채로 수백 명을 상대로… 게다가 빛으로부터 버림받은 존재로 망치 하나만 든 채로… 어떻게 저 위에서 벌어지는 미친 짓을 멈출 수 있단 말인가?



방법을 찾아내야만 한다!



노분도는 각종 액체에 미끄러지고 고약한 악취와 드러난 내장은 애써 생각지 않으면서 미친 듯이 시체 위를 기어올랐다. 고난의 거리 외곽을 돌아 벽과 산이 접해 있는 절벽 아래에 다다랐다. 저리 올라갈 길을 찾아내리라. 반드시…



비명이 그쳤다. 위를 쳐다보니 달빛에 비친 그림자가 보였다. 오크들이 움직이지 않는 물체를 꼭대기로 가지고 가 흔들더니 그 생기가 사라진 물체를 짐짝처럼 깊은 구덩이로 던져 넣었다. 그것은 노분도가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앞으로 기면서 그 여자 드레나이에게서 어떤 생명의 징후가 없는지 살펴보았다… 가까이 다가가 모습을 살펴보니 샤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주 간단한 일로만 얘기를 나누긴 했어도, 여러 번 만난 적이 있었다. 항상 밝고 명랑한 아이였다. 이제는 목이 베이고 생기는 모두 말라붙었으며 매를 맞아 멍든 채로 누워 있을 뿐이었다. 적어도 고통은 느끼지 않을 터였다.



위에서 또 다른 비명이, 다른 여자 드레나이의 소리가 들려왔다. 분노가 노분도의 가슴 속에서 솟구쳐 올랐다. 분노와 좌절, 그리고 복수를 향한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이.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절망에 빠져 망치를 꼭 부여잡고 다시 한번 빛의 힘을 불러 보았다. 빛이 도와주신다면 무언가, 아니 어떤 것이라도 할 수 있을 터였지만… 마찬가지로 그가 받은 응답은 침묵이었다.



내면의 무언가가 가능한 한 빨리 밖으로 나가라고, 은신처에 있는 다른 드레나이를 찾으라고, 살라고… 언젠가 더 커다란 목적을 이뤄내라고 그를 몰아대었다.



그건 비겁한 짓이다.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그래야만 해.



그러나 내면 깊은 곳에서는 이 전쟁이 이미 끝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어떤 엄청난 운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면, 즉시 떠나야만 했다. 만약 애써 나아가려 한다면 의미 없는 죽음만 맞게 될 것이었다. 괴로움에 쌓인 울음소리가 다시 한번 밤하늘을 갈랐다. 노분도는 일부분 폐허가 된 외곽 벽을 둘러보았다. 위험한 장애물이기는 했지만 이겨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고, 게다가 지키는 자도 없었다.



지금이 그때다. 선택을 해야만 한다.



기회였다. 살아서 언젠가 다시 한번 변화를 가져올 기회였다.



해내야만 한다. 계속 나아가야 한다.



기다란 울부짖음이 다시 한 번 울려 퍼졌지만, 이번에는 다행히도 짧게 끝났다. 그리고서 바로 내곽 벽 구부러진 곳에 있는 오크들의 목소리가 노분도에게 흘러들어왔다. 무언가 아니면 누군가를 찾으려 시체를 뒤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시간이 다했다.



노분도는 망치를 집어들었다.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들었지만 얼마 남지 않은 힘을 짜내어 남아 있는 시체를 넘어 벽에 난 틈으로 들어갔다.



천천히, 고통을 느끼며 테로카르 숲으로 휘청거리는 발걸음을 옮길 때, 알도르 마루에서 새로운 드레나이 여자의 비명이 시작되었다.



“자네가 살아남다니, 이건 빛의 계시임이 분명해.”



“빛은 우리를 그 나름의 방식으로 축복한다네. 때가 되면 자네도 빛을 다시 찾을 게야.”



그 말이 사실이길 바라네, 오랜 친구여. 난 그저… 예전과 같지 않아. 내 안의 무언가 변했네.”



“허튼소리 말게. 자넨 지치고 혼란스러울 뿐이야. 자네가 겪은 그 모든 일을 생각하면 당연히 그럴 법하지. 가서 좀 쉬게나.”



롤크는 동굴을 나갔다. 노분도는 몸을 눕히고 눈을 감았다.



비명. 공포에 질린 여인들의 애원.



노분도는 눈을 번쩍 떴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 숨은 이들의 야영지 중 하나인 이곳에서 지낸 지도 며칠이 흘렀다. 하지만 여전히 노분도는 그가 죽게 내버려 둔 여인들의 가슴 찢어지는 비명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었다. 눈을 감을 때마다 그 소리는 노분도를 애타게 불렀다. 도와 달라고, 살려 달라고 애원하며.



너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하지만 정말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가? 그는 확신할 수 없었다. 최근 맑은 정신으로 생각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생각은 흐릿하고 산산이 흩어지기만 했다. 노분도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돌바닥에 깔린 담요에서 일어났다. 삐걱대는 뼈마디가 신음을 자아냈다.



그는 안개 자욱한 습지의 대기로 나아가 흠뻑 젖은 갈대밭 사이로 발길을 재촉했다. 장가르 습지대는 살기에 적당하지 않은 지역이었지만 적어도 지금은 이곳이 집이었다.



습지대는 항상 오크가 꺼리는 지역이었고 거기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소금기 가득한 얕은 물로 덮인 이곳의 동식물들은 적절히 대비하지 않으면 위험하기 그지없었다. 더 거대한 생물 중에는 자신을 먼저 먹어치우지 않는 상대라면 뭐든지 잡아먹는 것들도 많았다.



우뚝 솟은 커다란 버섯들 사이를 지나던 노분도는 흥분한 목소리를 들었다. 야영지 변두리에서 소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는 재빨리 다가갔다. 초췌한 드레나이 남자 둘과 드레나이 여자 하나가 야영지에 있던 자들에게 부축을 받아 방어선의 경비병을 지나치는 참이었다. 다른 한 명은 의식을 잃은 채로 뒤에서 옮겨지고 있었다.



의문이 담긴 눈초리가 경비병에게 향하자 그는 노분도의 말 없는 질문에 답했다. “샤트라스의 생존자들입니다.”



갑자기 활기를 띤 노분도는 이들을 따라 동굴로 돌아갔고, 생존자들은 조심스럽게 담요에 눕혀졌다. 롤크는 먼저 의식을 잃은 이에게 손을 얹었지만 그를 깨울 수는 없었다.



멍한 상태의 여인은 중얼거리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무언가…”



롤크가 다가와 그녀를 진정시켰다. “마음을 편히 가지세요. 이제 친구들과 함께 있습니다. 모두 괜찮아질 것입니다.”



노분도는 의심스러웠다. 전부 괜찮아질 거라고? 생존자를 추적하는 오크 무리가 이미 야영지 하나를 발견해서 쓸어버린 터였다. 그리고 이 네 명은 도대체 어떻게 살아남았단 말인가? 저 여인은 무슨 무시무시한 광경을 보았을까? 의식을 잃은 저자는 왜 저런 상태가 되었는가? 더욱이 이들의 모습과 행동거지는… 육신을 넘어서는 상처를 입은 게 아닐까, 노분도는 생각했다. 그들은 진이 빠지고 기가 꺾인 듯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어 보였다.



며칠이 지나자 생존자들은 샤트라스에 대해서 물어봐도 되겠다 싶을 만큼 회복되었다.



여자인 코린이 먼저 이야기를 시작했다. 무서운 경험을 다시 떠올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운이 좋았어요. 깊은 산 속에 숨어 있었거든요. 발각되지 않은 몇 안 되는 장소 중 하나죠… 적어도 대부분의 시간 동안은.”



노분도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어느 순간 녹색 피부의 괴물 한 무리가 우리를 찾아냈어요. 전투가 뒤따랐죠… 살면서 그런 건 처음 봤어요. 주민들을 지키겠다고 자원한 남자 중 네 명은 처참히 살해됐어요. 하지만 그들도 많은 오크를 죽였죠. 결국에는 헤락과 에스테스만 남았어요. 남아 있던 그 난폭한 생물들을 둘이서 처리했죠. 정말 야만적인 짐승들이었어요. 그리고 그 눈, 그 끔찍한 눈… 코린은 기억에 몸서리쳤다.”



에스테스가 말했다. “폭발이 있었습니다. 몇 분 후 부패한 가스가 은신처로 흘러들어와, 우리는 모두 숨이 막혀 이전에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고통에 몸부림쳤지요.”



노분도는 수상한 붉은 안개를 떠올리고는 재빨리 기억을 떨쳐냈다. 헤락이 끼어들었다. “죽어가는 기분이었습니다. 저희는 대부분 정신을 잃었죠. 깨어났을 땐 아침이었습니다. 도시의 높은 쪽은 초토화됐지요. 우리는 울타리 언덕으로 갔다가 나그란드로 향했고, 많은 날이 지나고 비로소 구조됐습니다.”



“거기엔 몇 명이나 있었소?”



헤락이 대답했다. “스무 명, 어쩌면 더 많이요. 대부분이 여자였고 아이들도 좀 있었습니다. 다른 이들은 며칠 후 하나둘씩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저기 동굴 안에 의식을 잃고 누워 있는 드레나이처럼 말이죠… 그의 이름은 아카마라고 불리더군요. 다른 누구보다도 많은 양의 가스를 마셨다고 들었습니다. 과연 그가 회복될 수 있을지 롤크는 아직도 확신을…" 헤락은 갑자기 말을 중단하고 침묵에 빠져들었다.



에스테스가 뒤를 이었다. “나중에 우리는 갈라져 장가르 습지대와 나그란드의 서로 다른 야영지에 보내졌습니다. 예방 조치였지요. 한 야영지가 오크에게 발각돼도 모두 한꺼번에 죽는 일이 없도록 말입니다.”



“빛의 대리인… 사제나 구원자는 있었소?”



세 명 모두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카마에 대해서는 모르겠습니다만, 에스테스와 저는 어떤 종류의 무기에도 익숙하지 않은 평범한 장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동굴로 보내진 거죠. 마지막 방어선에 서도록 말입니다.”



코린이 노분도에게 물었다. “당신이 탈출했을 때 다른 누구라도 함께 탈출했나요? 생존자가 더 있었나요? 도시의 아래쪽에서 오크의 소리를 들었지만 발각되는 위험을 무릅쓸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도망쳤죠.”



노분도는 고난의 거리에 쌓인 시체를 생각했다… 알도르 마루에서 퍼져나오던 애원 소리가 들렸다. 그는 쥐어짜는 비명을 마음속에서 몰아내려고 노력했다.



“아니오.” 그는 대답했다. “내가 알기로는 아무도 없었소.”



계절이 지나갔다.



예언자이며 지도자인 벨렌이 이틀 전 그들을 방문했다… 아니 나흘 전이었던가? 노분도는 최근 뭔가를 기억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벨렌은 인접한 다른 야영지에서 왔다. 그의 정확한 위치는 누군가 끌려가 고문당해도 밝혀지지 않도록 철저하게 비밀로 지켜졌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정보를 누설할 드레나이는 없을 테니. 여하튼 벨렌은 그들의 미래에 대해 예언했다. 오크와 관련된 일들이 어떻게 풀릴지 보고, 기다리고, 또 보려면 그들이 숨죽이고 보내야 할 긴 시간, 어쩌면 수년에 달할 그 미래를 말이다.



벨렌에 따르면 녹색 피부의 생물들은 무언가를 건설하기 시작했는데, 여기에 모든 시간과 자원을 투자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한동안이나마 이 작업은 남아 있는 드레나이 사냥으로부터 그들의 관심을 돌렸다. 까맣게 그을은 땅에 있는 오크 근거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그들이 짓고 있던 이 건물은 일종의 관문처럼 보였다.



벨렌은 더 많이 알고 있는데도 이야기하지 않는 듯했지만 어쨌든 그는 예언자였고 선지자였다. 노분도는 이 고매한 현자가 알고 있는 것은 어차피 노분도 자신과 다른 이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노분도는 코린이 작살을 들고 물살을 가르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어딘가 달라 보였다. 지난 몇 주 동안 몸이 변한 것 같았다. 팔꿈치 아래에 조금 살이 붙었고 얼굴은 찡그린 듯 보였다. 자세도 어딘가 구부정했다. 믿을 수 없게도, 그녀의 꼬리는 실제로 오그라든 것 같았다.



헤락과 에스테트가 다가왔고, 노분도는 그들에게서도 같은 변화를 보았다고 맹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의 팔뚝을 내려다보았다. 단지 상상일 뿐인가, 실제로 팽창했나? 그 밤… 그 밤 이후로 그는 제대로 느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회복되리라 생각했었다. 이제 정말로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코린이 다가왔다. “오늘은 이만 할래. 눕고 싶어.” 그녀는 노분도에게 작살을 넘겼다.



“괜찮은 거야?” 노분도는 물었다.



억지 미소를 지으며 코린은 대답했다. “그냥 피곤해서 그래.”



노분도는 눈을 감고 장가르 습지대가 내려다보이는 산꼭대기에 앉아 있었다. 뼛속 깊숙이까지 피곤했다. 혼자 있고 싶어서 여기 온 것이다. 며칠 동안 코린을 보지 못했다. 그녀와 다른 두 명은 동굴 중 하나로 보내졌고, 그들의 상태에 대해 물으면 돌아오는 건 의미를 모를 어깻짓뿐이었다. 아카마라고 불리는 자는 롤크의 끊임없는 노력에도 여전히 의식 불명 상태로 생명만 유지하고 있었다.



뭔가가 분명히 잘못됐어. 노분도는 알고 있었다. 그 자신과, 아카마를 포함한 다른 생존자들에게 있었던 변화를 직접 목격했으니까. 야영지의 다른 이들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노분도에게 점점 말을 적게 걸었다. 심지어 롤크까지도. 언젠가는 작은 물고기들을 잡아서 돌아왔는데, 식량이 넉넉하니 그냥 혼자 먹으라는 말도 들었었다… 마치 그가 어떤 병에 걸려 있고 그가 손댄 음식을 만지기만 해도 그 병이 옮을 것처럼.



노분도는 구역질이 났다. ‘나의 봉사가 아무 의미도 없었단 말인가?’ 그는 언덕 꼭대기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조용히 깊은 사색에 잠겨 마음을 한 곳으로 집중시키며, 여전히 미치기 어려운 그것, 빛에 다가가려고 절망적으로 애썼다. 문이 닫힌 것만 같았다. 빛과 접할 수 있었던 마음 일부분이 그 기능을 잃었거나 더 나쁘게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간단한 명상조차 그의 머리를 아프게 했다. 요즈음에는 명료하게 생각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졌다. 계속 부풀어 가는 팔뚝은 전처럼 되돌아가지 않을 터였고 발굽은 갈라지기 시작했다. 실제로 발굽에서 조각들이 떨어져 나갔고 그 부분은 다시 자라나지 않았다. 그리고 악몽들… 악몽은 계속됐다.



최소한 오크 전투 부대가 순찰하는 횟수는 전보다 줄었다. 오크가 짓는 건물이 무엇이든 간에 곧 완성된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그 건물은 벨렌이 예언한 대로 어떤 종류의 관문처럼 보였다.



좋아, 노분도는 생각했다. 오크가 그 문 너머로 가버리고, 그 문이 파멸로 직행하는 문이었으면 좋겠군.



그는 일어나 망치가 체중을 받쳐 주는 것에 감사하며 느릿느릿 야영지로 향했다. 최근 몇 주 동안 망치는 너무 무거워져 이제 그는 망치의 머리를 아래로 하고 지팡이로 더 자주 사용했다.



몇 시간 후 야영지에 도착한 그는 롤크를 만나기로 마음먹었다. 함께 회의를 열어 점점 거세어지고 있는 이 몹쓸 차별에 대해 의논하리라…



노분도는 롤크의 동굴 입구에서 멈췄다. 코린이 담요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이제 너무 변해 드레나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드레나이를 서투르게 모방한 무엇인가처럼 보였다. 그녀는 창백하고 야위었다. 눈은 허옇고 팔꿈치 아래는 더 부풀 수 없을 만큼 부풀어 있었다. 발굽은 껍질이 벗겨져 두 개의 뼈 같은 돌기로만 남았고 꼬리는 이제 조그만 매듭에 지나지 않았다. 이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도, 그녀는 여전히 롤크의 품 안에서 싸우고 있었다.



“죽고 싶어요! 그냥 죽고 싶어요! 고통 없는 곳으로 가고 싶어요!”



롤크가 그녀를 꼭 붙잡았다. 노분도는 재빨리 다가가 몸을 굽혔다.



“바보 같은 소리 말아!” 노분도는 롤크를 바라보았다. “코린을 고칠 수 없나?”



사제는 얼굴을 찡그렸다. “나도 할 만큼 했어!”



“놔 줘! 죽게 해 줘!”



은은한 빛이 롤크의 손에서 흘러나와 코린을 조용히 어루만지자 격심한 흥분이 잦아들다가 마침내 완전히 멈췄다. 그녀는 조그맣게 몸을 웅크리고 발작적인 흐느낌 속에 빠져들었다. 롤크는 고갯짓으로 동굴 밖을 가리켰다.



밖으로 나오자, 롤크는 단호하게 노분도를 응시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전부 다 했다네. 그녀의 몸은, 마치 그녀의 의지처럼 부서진 것 같아.”



“분명히 있을 거야… 무슨 방법이…"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어 괴로워하던 노분도는 마침내 소리쳤다. “무언가 해야 한다고!”



잠시 동안 롤크는 말이 없었다. “난 그들이, 그리고 자네가 걱정된다네. 다른 야영지에 있는 샤트라스의 생존자들도 같은 현상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네. 이게 무엇이든지 간에 어떤 치료도 듣지 않고 저절로 낫지도 않아. 뭔가 조치가 취해지지 않으면 우리 모두 사라지게 될 거라고 다들 두려워하고 있네.”



“그게 무슨 뜻인가?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롤크는 한숨을 쉬었다. “그냥 말뿐이야. 당장은. 이 문제에 대해 이성적으로 생각하려고 했지만 나조차도 자네와 다른 이들을 오랫동안 지켜 주지는 못할 걸세.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그래야 하는가도 확신하지 못하겠어.”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하지만 이제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편협한 망상에 굴복한 벗에게 노분도는 쓰디쓴 실망을 느꼈다.



할 말을 잃은 노분도는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떠났다.



코린의 상태는 더욱 나빠졌다. 며칠 후, 롤크가 이전에 언급해 노분도를 두려움에 떨게 했던 결정이 결국은 내려지고 말았다.



노분도, 코린, 에스테스 그리고 헤락은 야영지의 거주민 앞에 끌려왔다. 몇몇은 험상궂은 표정이었고 몇몇은 슬퍼 보였다. 나머지는 속을 알 수가 없었다. 롤크는 마음속의 서로 충돌하는 생각에도 단호해 보였다. 죽이고 싶지는 않지만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먹잇감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준비를 하는 사냥꾼처럼.



야영지의 대변인으로 선정된 인물은 롤크였다. “이는 저에게, 아니 우리 중의 누구에게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는 등 뒤의 냉정한 무리를 가리켰다. “하지만 다른 야영지에서 온 대변인들과 논의를 거쳐 함께 결정을 내렸습니다. 최대한 많은 이를 위해… 감염된 이들이 뭉쳐서… 건강한 자들에게서 떨어져 지내는 게 낫겠다고 말입니다.”



가장 절망한 듯한 코린이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를 추방하는 건가요?”



롤크가 항변하기 전에 노분도가 끼어들었다. “그게 정확히 저들이 하고 있는 짓이지! 우리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으니까, 그러니까… 우리를 무시하고 싶은 거야! 우리가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게지!”



“우린 자네들을 도울 수가 없다고!” 롤크가 외쳤다. “그런 상태가 전염되는 건지 어떤지 알 수도 없고, 자네들의 쇠약해진 육체가, 떨어진 지적 능력이 우리가 감당하기엔 너무 큰 짐이란 말이네. 모험을 하기에는 남은 자들이 너무나 적어!”



“다른 이들은요? 아카마는요?” 코린이 물었다.



“깨어날 때까지 여기서 우리가 돌볼 걸세.” 롤크가 대답했다. “깨어난다면 말이지만.”



“어찌나 친절하신지.” 노분도는 마디마다 빈정거림을 담아 중얼거렸다.



롤크가 성큼성큼 다가와 도전적인 태도로 노분도 앞에 섰다. 쇠잔한 육체에도, 노분도는 몸을 꼿꼿이 세워 롤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롤크는 말했다. “샤트라스에서의 실패에 대한 벌로 빛이 침묵하는 게 아닌지 걱정된다고 자네가 말했었지.”



“난 샤트라스에서 모든 것을 바쳤네! 자네를, 그리고 다른 이를 모두 살리려고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어!”



“그래, 하지만 자넨 죽지 않았지.”



“자넨… 자넨 내가 의무를 저버리고 도망쳤다고 말하고 있는 겐가?”



“빛이 자네를 버렸다면 거기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할 뿐일세. 우리가 어찌 빛의 의지를 짐작할 수 있겠나?” 롤크는 동의를 구하기 위해 뒤를 돌아보았다. 몇몇은 시선을 피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다. “어쨌든 간에 자네가 순리에 따라 새로운 위치를 받아들여야 할 때라고 생각하네. 다른 이들도 생각해 줘야 할 때라고 생각해…”



롤크는 손을 뻗어 노분도의 손에서 망치를 잡아챘다.



“그리고 자네가 아닌 누구인 척하는 짓도 그만둬야 할 때라고 생각하고.”



돌아오는 게 아니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너는 여전히 크로쿨… 뒤틀린 존재일 뿐.



아니. 그들은 들어주리라. 듣게 만들 것이다. 어쨌든, 기적이 있지 않았던가. 노분도는 모여든 인파로부터 눈길을 돌려 조그만 광장 중앙에 있는 분수로 가져갔다. 그 물에서 그는 깨달음을 갈구했다.



생각이 한 점으로 모이는 것을 느꼈다. 그는 물에 감사하며 지팡이에 무겁게 몸을 기대고 의심에 찬 눈초리를 마주하러 나아갔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이건 말도 안 돼.” 누군가 속삭였다.



처음 이야기를 꺼냈을 때, 작고 목쉰 그의 목소리는 자신의 귀에조차 멀게 들렸다. 노분도는 목을 가다듬고 좀 더 큰 목소리로 다시 시작했다. “나는… 나는 이야기하러…”



“시간 낭비야. 크로쿨이 우리한테 이야기할 게 뭐가 있겠어?”



더 많은 목소리가 동조했다. 노분도는 말을 더듬었다. 입은 움직이는데 목소리를 잃어버린 것 같았다.



더 많은 목소리가 동조했다. 노분도는 말을 더듬었다. 입은 움직이는데 목소리를 잃어버린 것 같았다.



떠나려고 몸을 돌린 노분도는 드레나이의 지도자이며 예언자인 벨렌의 평온한 눈과 마주쳤다.



선지자는 나무라는 시선으로 노분도를 바라보았다. “어디 가는가?”



***************



노분도는 검게 탄 땅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꼭대기에 앉아 있었다. 지난번에 봤을 때와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처음 여기를 탐험한 지 얼마나 흘렀던가? 5년? 6년?



마침내 그들이 얻은 이름, 크로쿨을 위한 새 야영지로 그와 다른 이들이 보내졌을 때 노분도는 분노하고 좌절하고 우울했다. 그는 허락된 유일한 방향으로, 갈 수 있는 한 가장 멀리 나아갔다. 늘 장가르 습지대 변경의 언덕을 조사하고 싶었지만 언덕 기슭은 ‘온전한’ 이들의 야영지였고 ‘같은 부류’에게만 허락되었다.



그래서 그는 타오르는 열기 속에서 이곳을 탐험했다. 드레노어의 가장 황폐한 땅의 높은 산봉우리를, 오크의 증오와 학살이 있기 전에는 싱그러운 숲이었던 황무지를, 흑마법사와 그 비틀린 마법에 의해 창조된 불모지를.



다행히 요즈음 오크는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슬렁거리는 오크 무리가 여전히 순찰을 하며 눈에 띄는 드레나이를 죽였다. 하지만 그 수는 적었다. 녹색 피부의 야만인들은 대부분 그들이 지은 관문을 지나 몇 년 전 떠나갔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덕분에 노분도는 습지 어딘가에 그의 동족이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상관없어. 그는 생각했다. 내가 절대로 환영받지 못할 도시인걸.



노분도와 다른 이의 변화는 계속되었다. 전에 아무것도 없었던 곳에서 신체 기관이 튀어나왔다. 종기와 혹, 이상한 종양이 몸에 퍼졌다. 드레나이의 가장 특색 있는 부분 중 하나인 발굽은 그 모습을 완전히 잃고 기형적인 발 같은 무언가로 바뀌었다. 변화는 육체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더욱 고차원적인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의 뇌는 몸부림쳤다. 그리고 몇몇은, 몇몇은 완전히 자신을 잃어버리고 이렇다 할 목적도 없이 방황하는 텅 빈 껍질로 남았다. 그들의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청중과 대화를 나누며. 이 잃어버린 자들 중 어떤 이는 어느 날 평범하게 잠에서 깨어나 정처 없이 사라져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가장 먼저 그렇게 된 이는 에스테스였다. 이제 코린에게는 샤트라스에서의 어두운 시간을 함께 나눈 동료가 단 한 명 남았다.



충분해. 그는 생각했다. 그만 좀 미뤄. 하려고 생각한 일을 해.



그의 일부분은 이번 역시 전과 다르지 않을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시도를 미루고만 있었다. 하지만 지난 몇 년 동안 매일같이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결국 하게 될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건, 어떤 면에서건 그는 여전히 희망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을 감고, 관계없는 모든 생각을 마음속에서 몰아내고 빛을 향해 나아갔다. 제발, 단 한 번만이라도… 당신의 찬란한 영광을 제게 다시 내리소서.



아무것도 없었다.



더 노력해 봐.



그는 남아 있는 마지막 집중력을 모두 기울였다.



“노분도.”



그는 펄쩍 뛸 만큼 놀라 눈을 번쩍 뜨고 진정하려고 가슴에 손을 얹었다. 주위를 둘러보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내가 너를 찾았도다!”



그는 몸을 돌려 코린을 보고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내뱉었다.



빛이 다시 은혜를 내리리라 생각할 만큼 어리석다니.



코린은 다가와 노분도 옆에 앉았다. 노분도는 지치고 수척하고 조금은 혼란스러워도 보였다.



“오늘은 좀 어때?” 그는 물었다.



“평소보다 나쁠 거 없어.”



노분도는 다음 말을 기다렸지만 코린은 그저 황량한 경치를 바라볼 뿐이었다.



둘 다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뾰족한 돌무더기 근처에서 어떤 형체가 그들을 훔쳐보며 이야기를 엿듣고 있었다.



“뭔가 얘기하고 싶은 게 있는 거야?”



코린은 잠시 생각했다. “아, 있어!” 그녀는 마침내 대답했다. “오늘 야영지에 누가 새로 왔어. 그자가 말하길 오크가… 다시 모이고 있대. 뭔가에 대비하면서. 그… 뭐더라? 암흑의 마법을 쓰는 자들이 이끌고 있다던데?”



“흑마법사?”



“맞아. 그거였던 거 같아.” 코린은 일어나 발걸음을 옮겨 벼랑 끝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섰다. 그녀는 오랫동안 침묵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돌 뒤의 누군가가 올 때처럼 조용히 사라졌다.



코린의 눈은 그녀의 갈라진 목소리처럼 아득했다. 마치 그녀가 온전히 여기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내가 몇 발자국 더 나아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노분도는 코린이 농담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어서 머뭇거렸다. “떨어지겠지.”



“그래, 내 몸은 떨어질 거야. 그런데 가끔 난 내 영혼이 날아간다고 할까? 아냐, 무슨 말이 있을텐데. 그게 뭐랄까… 위로 쭉 올라간달까, 높이 쭈욱…?”



노분도는 생각에 잠겼다. “날아오르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그래! 내 몸은 떨어지겠지만, 내 영혼은 하늘로 날아오를 거야.”



며칠 후 노분도는 두통과 허기를 느끼며 잠에서 깼다. 그는 밖으로 나가 전날 저녁 식사 때 남은 생선이 있는지 찾아볼 작정이었다.



동굴에서 밖으로 나가면서, 노분도는 다른 뒤틀린 드레나이들이 모여서 눈을 찌푸린 채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노분도는 커다란 버섯 아래서 걸어 나와 위를 올려다보았으나 그 역시 눈을 똑바로 뜨고 하늘을 바라볼 수 없었다. 그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이른 아침의 핏빛 하늘에 균열이 벌어져 있었다. 마치 그 세계의 조직이 찢기듯 드러난 틈 사이로, 어지러운 빛줄기와 원시적인, 말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이 뿜어져 나오는 듯한 광경이었다. 그 흔들거리는 균열은 빛으로 빚어진 한 마리 거대한 뱀처럼, 미끄러지듯이 춤을 추었다.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노분도는 머리에 압력을 느꼈고, 그것은 마치 귀에서 터져버릴 듯이 노분도를 위협했다. 전기가 하늘을 가르는 순간 노분도의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아주 짧은 순간 동안 현실 자체가 무너지는 듯했다.



노분도가 그 광경을 보고 있었던 그 찰나에 모여든 뒤틀린 드레나이들은 거울에 비친 듯한 몇 개의 형상으로 갈라졌다. 몇몇은 더 늙고, 몇몇은 더 젊었으며, 몇몇은 뒤틀리기 전의 건강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나서 환영이 사라졌다. 마치 몸을 실은 멈춰 있던 수레가 갑자기 움직이듯, 땅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노분도와 다른 드레나이들은 진창에 던져졌고, 흔들림이 계속되는 동안 그들은 그곳에 머물렀다.



몇 차례의 진동이 지나자 흔들림의 강도가 약해졌고 마침내 움직임이 멎었다. 코린은 눈을 크게 뜨고 이제 다시 닫히고 있는 균열을 응시했다. “세상이 끝나는 건가…" 그녀는 작게 말했다.



세상은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끝에 가까워졌다.



다음 날 노분도가 산맥의 꼭대기에 있는 익숙한 장소로 돌아왔을 때, 지평선은 미쳐가고 있었다. 연기가 하늘로 소용돌이치며 올라가, 거대한 검은 구름이 넓은 땅 위를 덮었다. 공기는 그의 폐부를 불태웠다. 그가 서 있었던 절벽 언저리에, 거대한 틈이 열렸다. 증기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몸을 기울인 노분도는 땅 아래 깊은 곳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빛을 보았다.



거대한 땅덩이들이 사막의 바닥에서 떨어져 나와 불가해한 힘에 의해 하늘 높이 떠다니고 있었다. 또한 하늘의 일부는 다른… 그 어떤 곳으로 통하는 창문처럼 보였다. 노분도는 그 창문 너머로 어떤 먼, 몇몇은 더 가까운, 다른 세계들을 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것이 실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대재앙의 장난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치 지상의 모든 생명체가 죽어 사라지거나 아주 먼 은신처로 숨어버리기라도 한 듯이, 모든 곳에, 그 모든 곳에 손으로 만져질 듯한 침묵이 퍼져 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분도는 혼자라고 느끼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그는 시야의 바로 바깥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음을 알아챘다. 그는 주변의 지역을 둘러보며 마음 한구석으로는 코린의 모습을 찾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혼란한 그의 정신만이 장난을 치고 있었다.



노분도는 다시 한번 습지대의 야경에 눈길을 보내며, 그가 지금껏 알고 있었던 세상이 곧 종말을 맞이할 것인지 의심했다.



하지만 시간은 흘러 삶은, 마치 예전처럼, 계속되었다. 야영지에는 모든 지역이 철저하게 파괴되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그러나 세계는 살아남았다.



부서지고, 비틀리고, 고통으로 얼룩진… 세계는 살아남았고, 뒤틀린 드레나이도 살아남았다. 그들은 나무 열매와 뿌리, 습지대에서 찾을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물고기를 먹으며 연명했다. 그들은 물을 끓였고, 전에 보지 못한 폭풍우로부터 자신을 지켜줄 은신처를 찾아다녀야 했지만, 그들은 살아남았다. 계절이 지나자, 동물들이 돌아왔다. 몇몇 동물들은 처음 보는 종들이었지만, 동물들은 돌아왔다. 운 좋게도 사냥에 성공할 때면, 뒤틀린 드레나이들은 고기를 먹었다. 그들은 살아 남았다.



최소한, 그들 중 대부분은 그랬다. 불과 며칠 전 헤락이 사라졌다. 그는 멀리 떨어져 있었고 몇 달 동안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비록 코린이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코린과 노분도는 그가 잃어버린 드레나이에 가까워져 가는 것을 알고 있었다. 헤락은 샤트라스에서 온 코린의 수호자 중 유일하게 남아 있었던 드레나이였기에, 노분도는 코린의 상실감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노분도가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 역시 언젠가는 정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미지의 세계로 빠져들어 가,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기억으로만 남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머나먼 산꼭대기까지 순례를 지속하면서 날마다 철야 기도를 쉬지 않았고, 언젠가는 자신의 고행으로 은혜를 얻게 되면, 다시 자신에게 빛이 내려질 것이라는 희망을 어떻게든 버리지 않았다.



매일 야영지에 돌아오는 그의 표정은 어두워 보였다.



그리고 매일 밤 그는 똑같은 악몽에 시달렸다.



죽어가는 자들의 비명소리가 밤 공기를 가를 때, 노분도는 샤트라스 바깥에서 잠겨진 문에 주먹을 부딪치고 있었다. 노분도는 반쯤 깨어 있는 상태로 다시 그것이 꿈이었다는 것을, 또 한 번의 악몽이었다는 것을 의식했고, 그가 꾸었던 다른 악몽과 같은 결말로 이어질 것인지 생각했다.



그는 계속해서 나무문을 두드렸고 그의 주먹은 벗겨져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문의 안쪽에서는, 여인들과 아이들이 천천히 두려운 죽음을 맞이했다. 비명은 차례로 잦아들었고, 고통스러운 울부짖음만이 남았다. 그 울음소리는 그에게는 이미 낯익은 것이었다. 그 소리는 노분도가 샤트라스로부터 도망쳐 나왔을 때 테로카르 숲 나무들 사이로 울려 퍼지던 소리였다.



곧 울음소리는 희미해져, 정적만이 남았다. 노분도는 문에서 뒤로 물러나, 약하고, 뒤틀리고, 쓸모없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꿈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리며, 몸을 떨면서 울었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서서히 문이 열렸다. 노분도는 눈을 크게 뜨고 올려 보았다. 이런 적은 없었다.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이건 무슨 일인가?



그 육중한 문 사이로 거대한 하나의 불꽃에 비친 안쪽의 벽과 방벽들, 텅 빈 고난의 거리가 드러났다.



노분도는 불꽃의 온기를 느끼면서,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불더미의 주변에 널려져 있는 몇몇 버려진 무기 너머엔 어떤 시체도 혹은 다른 학살의 흔적도 없었다.



천둥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고, 노분도는 팔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느꼈다. 다시 한 걸음 나아가자, 그의 뒤에 있던 커다란 문이 닫혔다.



그러자 소리가 들렸다. 뭔가를 끄는 소리가 불빛 저편에서 흘러나오나 싶더니 점점 가까워졌다. 그는 지팡이 같은 변변찮은 무기조차 들고 있지 않았고, 꿈을 꾸고 있다는 생각에 다가오는 위협에 대처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한 여자 드레나이가 빛 속으로 걸어들어오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불더미 속에서 장작을 하나 빼어 들려고 했다.



비는 멈추지 않고 간간이 내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갇혀 있던 자들 중 하나가 살아남았다는 생각에 노분도는 미소를 지을 듯했으나, 목을 둘러싼 피투성이의 상처와 몸 곳곳에 드러난 멍든 자국을 보았을 때 그의 미소는 사라지고 말았다. 그녀의 왼팔은 몸에 매달려 흔들리고 있었다. 공허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몸짓은 무언가를… 고발하는 듯했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자, 그는 그녀가 샤카임을 깨달았다. 곧 다른 이들이 그녀를 뒤따랐고, 양쪽에서 많은 수의 드레나이들이 흐릿한 눈과, 소름끼치는 몸의 상처들을 드러내며,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바람은 거세져, 불꽃을 흔들었다. 비는 가랑비가 되어 계속 내리고 있었다. 차례로, 여자들은 무릎을 구부려, 땅바닥에서 각종 무기를 주우며, 다가왔다. 노분도는 불더미에서 불타는 장작 하나를 꺼내 들었다.



나는 그대들을 구출하고 싶었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단 말이네, 그는 소리치고 싶었으나 아무런 말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의 움직임은 느렸고, 무언가에 결박당한 것 같았다.



바람이 또다시 강해졌고, 노분도가 들고 있던 횃불은 꺼져 버렸다. 매서워진 바람이 불꽃을 매질하여 마침내 불꽃이 꺼지고 노분도가 완전한 어둠 속에 갇혔을 때, 살해당한 여인들이 점점 다가와, 들고 있던 무기를 들어올렸다.



그는 쏟아지는 빗속에서 그들이 다가오는 소리를 들으면서… 기다렸다.



순간 얼음처럼 차가운 느낌이 그의 허리를 감쌌다. 노분도는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깨어났다. 잠이 들기 전보다 더 지친 노분도는, 기운을 차릴 수 없었다. 깨어날 시간이었다.



그는 아침 공기를 마시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코린은 깨어 있으리라, 그렇다면 이야기라도 나눌 수 있겠지.



그는 밖으로 나가 다른 이들이 아침 식사를 하는 곳으로 가서 새로 합류한 뒤틀린 드레나이중 한 명에게 코린의 행방을 물었다.



“그녀는 떠났다오.”



“떠나다니? 어디로? 언제 떠났단 말이오?”



“조금 전이오. 어디로 가는지는 말하지 않았소. 행동이 좀 수상하긴 했지만… 뭘 한다고 그랬었지? 그…”



그 뒤틀린 드레나이는 잠깐 침묵하더니,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녀는 ‘날아오를’ 것이라 했소.”



노분도는 있는 힘을 다해 달렸다. 산의 정상에 다다랐을 때, 그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기침을 하자 진한 녹색의 점액이 섞여 나왔고, 그의 다리는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흔들리고 있었다.



절벽으로 치닫는 언덕배기에서 그는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코린을 보았다.



“코린! 안돼!”



그녀는 뒤를 돌아보며, 보일 듯 말듯 희미한 미소를 남기고, 몸을 돌린 후 소리 없이 자신을 내던졌다. 그녀의 모습 뒤로 수증기를 잔뜩 머금은 두꺼운 구름만이 남아 있었다.



노분도는 절벽에 다가가 그녀를 찾았으나, 멀리, 까마득한 저 아래엔 희미한 빛만이 보일 뿐이었다.



너무 늦었어.



노분도는 샤트라스의 여인들을 구하는 데 실패했던 것처럼 다시 또 실패하고 만 것이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성스러운 빛에 대답을 구했다. ‘왜입니까? 왜 저를 버리시는 겁니까? 저에게 왜 이런 시련을 계속 안겨주시는 겁니까? 제가 충심으로 섬기지 않았나요?’



여전히 공허한 메아리만 울렸다. 그저 산들바람만이 그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아마 코린이 옳았으리라. 노분도는 왜 그녀가 스스로를 내던졌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잃어버린 드레나이처럼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그녀가 탈출구를 찾았던 건지도 모른다.



이 세계엔 이젠 그를 위해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벼랑 끝에서 뛰어내려 이 고통스러운 세월에 종지부를 찍는 게 쉬울지도 모른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튀어나온 암석 뒤에서 한 형상이 걸어나와 무언가를 외치려고 몸을 내밀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동족에게 내쫓기고, 성스러운 빛에게 무시당하고, 자신이 구해내지 못한 이들의 영혼에게 고통받는 지금 이 순간에도… 노분도는 자신이 포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자 산들바람이 세차게 몰아쳐서 노분도를 절벽 끝자락으로부터 물러서게 만들었다. 몰아치는 바람의 끝자락에서 그는 희미하게 들려오는 한마디를 듣게 되었다. ‘모든 것…’



노분도는 귀를 기울였다. 확실히 그의 이성은 한계에 달해있었고, 분명히 그의 정신이 자신에게 장난을 걸고 있는 것이리라.



암석 근처에 있는 그 형상은 다시 몸을 숨겨 조용히 눈앞의 광경을 주시했다.



바람이 다시 한번 속삭였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바람의 속삭임이 점점 분명해졌다. 이게 무슨 착란 상태지? 이건 성스러운 빛이 행한 일은 아니다. 성스러운 빛은 아무런 응답이 없었지 않았던가. 바람의 속삭임에는 따스함이 충만해 있었다. 이 속삭임은 뭔가 새롭고 다른 것이었다. 마지막 돌풍이 고원 전역을 휘감으며 노분도를 주저앉혔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살아 있다.



백성들을 구하고자 분투한 지 수년이 지나고서야 노분도는 드디어 대답을 얻은 것이다. 성스러운 빛이 아닌…



바람으로부터…



노분도는 대지, 바람, 불, 물의 네 가지 정령을 다루는 오크의 주술에 대해 들어본 바 있었다. 그의 백성들은 오크의 잔인한 학살 행위가 펼쳐지기 이전에, 이미 이 “주술사"들이 사용하는 힘의 일부를 목격했다. 하지만 그런 주술은 드레나이족에겐 완전히 생소한 것이었다.



그 후 며칠 동안 노분도는 절벽을 다시 찾아가서 바람에 실려오는 속삭임을 들었다. 그 속삭임은 노분도에게 그가 혼자가 아니라는 확신과 풍요로운 지식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계시이자 암시를 전해줬다. 바람의 속삭임은 때론 잔잔하고 평안했으며, 때론 집요하고 강제적이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노분도는 결국엔 자신이 그냥 미쳐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다섯 번째 되던 날, 절벽의 끝자락에 앉아 있던 노분도는 맑은 하늘에서 천둥과도 같은 덜그렁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눈을 뜨자 절벽 끝자락 너머 저 아래의 균열에서 커다란 불기둥이 용솟음쳐 올라오고 있었다. 불꽃이 사방으로 튀며 번쩍이는 춤사위 속에서 노분도는 변화하는 흐릿한 형체를 보았다. 불의 목소리는 마치 거대하고 강력한 폭풍의 소리와 같았다.



나그란드의 산맥으로 가라. 그 산꼭대기 중 가장 높은 곳에서 너는 찾을 수 있을 것이니라… 바로 너의 진정한 여정이 시작되는 곳을…



노분도는 그 말을 되뇌곤 대답했다. “그곳에 가려면 난 나와 같은 이들의 출입이 금지된 순수한 드레나이의 야영지를 통과해야만 하오.”



그러자 불길이 빠르게 치솟아 올랐고 노분도는 자신의 얼굴에 밀려오는 뜨거운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너에게 주어진 기회를 의심하지 마라!”



그 말을 뒤로하곤 불길이 사그러들었다.



“이제 너는 혼자가 아니니 가슴을 펴고 앞으로 나아가라.”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노분도를 계속 관찰해오던 자가 은신처 뒤로 몸을 숨겼다. 그는 노분도처럼 정령의 소리는 듣지 못했지만 불길의 춤사위 모습은 볼 수 있었다. 노분도가 그 관찰자의 눈을 들여다보았더라면, 완전히 경악한 자의 눈을 보았으리라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그로부터 또 이틀이 지나 노분도는 항상 그의 귀에 속삭이며 뒤를 따라오는 바람과 함께 고된 여행길을 헤쳐나갔다. 그는 오크 주술사들이 정령을 벗 삼아 지내지만 오크가 타락한 마법을 사용할 때면 그들의 결속력이 매우 위태로워진다는 사실을 배웠다. 노분도는 더 많은 걸 배울 수 있었지만, 마치 대화가 걸러지거나 흥미를 잃어버리는 것처럼 느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여행길을 나아가던 중 몇 차례에 걸쳐 그는 어딘가에서 뒤를 밟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노분도가 뒤를 돌아볼 때마다 항상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가 그의 뒤를 쫓다가 시야에서 숨어버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정령이 아닐까 생각했다. 아니면 그의 마음속에서 빚어낸 가공의 것일 수도 있었다.



노분도가 마침내 순수한 드레나이의 야영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오래전에 태양이 하늘에서 자취를 감춘 뒤였다. 하지만 정찰병들은 그가 야영지에 접근하고 있는 걸 당연히 눈치채고 있었고, 노분도가 야영지 방어선에 진입하자 경비병 둘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곳엔 무슨 일이오?” 덩치가 더 큰 경비병이 물었다.



“난 그저 이곳을 통과하여 산으로 가고자 하오.”



야영지 주민들 몇몇이 나타나더니 경계하는 눈초리로 노분도를 훑어보았다.



“우린 엄격한 명령을 받았소이다. 크로쿨은 이 야영지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으니 다른 곳으로 가시오.”



“난 이곳에 머무를 생각이 없소이다. 그저 지나가고 싶을 뿐이오.” 노분도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덩치 큰 경비병이 손을 내밀더니 노분도를 난폭하게 뒤로 밀며 말했다. “어허, 내가 뭐라 했…”



갑자기 귀청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천둥소리가 울리고 조금 전까지 청명했던 하늘에 검은 먹구름 떼가 생겨나 갑자기 폭우를 뿌려댔다. 노분도 뒤에서 살랑살랑 불던 바람이 세차게 몰아쳐 두 명의 경비병을 뒤로 밀쳐냈다. 이 일련의 현상 중에서 가장 믿기 어려운 일은 강한 바람과 쏟아져 내리는 비가 노분도 주위로 모여들어, 두 경비병을 강하게 내리쳐서 미끈거리는 진흙에 빠뜨렸다는 것이다.



노분도는 경탄에 가득 찬 놀란 눈으로 이 광경을 목격했다. 깊은 생각에 잠긴 노분도는 미소를 머금은 채 큰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이게 바로 내 편에 정령들이 있다는 게 어떤 건 지 말해주는군.”



야영지의 거주자들은 동굴에 있는 은신처로 향했고, 경비병들은 공포에 찬 얼굴로 노분도를 우러러보고 있었다. 노분도는 지팡이에 몸을 기댄 채 야영지를 천천히 통과하여 반대편에 있는 구릉지로 나아간 게 전부였다. 하지만 야영지의 거주자들은 충격과 두려움과 혼란에 휩싸였다.



한편 노분도를 따라다니던 형상도 커다란 버섯 뒤에 있는 은신처에서 벗어나 걸음을 재촉하였다. 그 역시 크로쿨이었기에 감히 앞으로 나아갈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형상, 아카마가 지금 목격한 일련의 일들이 그의 마음속에 작은 씨앗을 심어 주었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 이후로 그는 절망과 미래에 대한 공포만을 몸서리치게 느꼈을 뿐이다. 하지만 이 크로쿨이 방금 행한 일, 노분도를 보호하기 위해 정령들이 일어서는 것을 본 아카마는 오래전에 사라졌다고 생각한 감정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는 희망을 느꼈다.



그는 새로운 희망을 품고 늪지대를 빠져나왔다.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 피곤으로 찌든 노분도는 산맥의 고지로 올라가 신록의 식물에서 느껴지는 상쾌한 기운을 느꼈다. 극도의 피로로 노분도의 얼굴에 활력이 사라질 때면 바람이 불어 그를 밀어주고, 발 아래 대지는 그에게 힘을 내어주는 듯했다. 사방에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지만 노분도에게만은 내리지 않았고, 흐르는 물줄기가 생겨나 노분도에게 식수를 제공했다.



노분도가 산의 정상에 이르렀을 때 그는 마음속에서 목소리들이 다투는 소리를 들었다. 처음에는 낮고 완고한 목소리, 그 다음에는 친근한 바람의 소리, 마지막에는 불꽃이 튀는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들은 노분도와의 대화를 서두른 나머지 혼란스럽고 서로 충돌하고 있었다. 불협화음을 참지 못한 노분도가 외쳤다. 그만! 당신들이 하는 말을 동시에 다 알아들을 수는 없소.



노분도는 그가 남겨둔 작은 힘을 끌어내 우거진 푸른 숲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로 올라갔다. 이곳은 여전히 비옥하고 평온하며 여러 단의 폭포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정원과도 같은 피난민들의 안식처, 드레노어였다.



그들을 용서해야 한다. 주술사들의 분노가 풀어놓은 화를 입은 지도 오랜 세월이 지나지 않았는가. 그들은 성나고 혼란스러워하며, 그들에게 가해진 심각한 타격으로 아직도 비틀거리고 있다.



“대격변,” 노분도는 평온한 환경 속으로 한 걸음 더 발을 내딛으며 말했다. 무릎을 꿇고 고여 있는 물을 마시자 갑자기 원기가 회복되는 것을 느꼈다. 마음이 열리고 그의 생각이 주위의 환경과 동화되더니 주위 환경 또한 그의 일부가 됨을 느꼈다.



그에게 대답했던 그 목소리가 곧 분명해지고 진정되고는 강하고 확고한 목소리로 변했다. “그래. 아마 난 가장 적게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줄곧 이런 식이였지. 삶의 토대를 제공하는 것이라면 내가 빨리 적응하는 건 불가피한 일이다.”



“물”



그는 확언을 듣기보다는 느꼈다.



어서 오라. 이 조용한 주둔지는 정령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생각하지 않고도 우리의 의도를 알게 되기 전까지, 우리는 더 쉽게 담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특히나 이 여정의 시작에 있어서 말이지. 진리를 이해하고 깨닫는 데는 수년이 걸리겠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네 부름에 응할 것이다… 하지만 절대 우리에게 지시를 내려서는 안 된다. 네가 우리를 존중하고 너의 진의에 사리사욕이 없다면, 우린 절대 널 버리지 않을 것이다.



“왜 나를 선택하신 것이오?”



대재앙은 우리를 불안정한 환경과 혼란 속으로 내몰았다. 그래서 한동안 우리는 길을 잃었었지. 네게서 우리와 유사한 영혼을 느꼈다. 혼란스럽고 무시당한 그런 영혼 말이지. 너를 만나기 위해 회복하는 데까지 시간이 걸렸지만 우리가 너를 만났을 때 네가 우리를 받아들여 주기를 바랐다.



지금 이 상황이 노분도에겐 현실이 되기엔 너무나 좋아 보였다. 하지만 성스러운 빛은? 내가 이 길을 선택하면 내가 성스러운 빛을 저버리는 건가? 성스러운 빛에 등을 돌리는 건가? 이것은 일종의 시험인가?



그렇다 해도 위험을 감수할 만한 일이다. 만약…



“이 능력을 내 백성들을 돕는 데 사용할 수 있소?”



그렇다. 주술사와 정령의 관계는 공시적이다. 주술사의 영향력이 우리를 차분하게 만들고 우리를 연합하게 만든다. 마치 우리의 영향력이 주술사를 풍성하게 하고 완성시키듯이. 훈련을 마치면 필요할 때 정령을 소환할 수 있을 것이다. 너의 대의명분이 옳은 것이라면 우리는 어떤 수가 있더라도 너를 도울 것이다.



진정한 깨달음은 물이 약속했듯이 수년이 걸렸다. 하지만 그동안 노분도는 자신 주변에 생명의 기운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 드레노어의 거대한 생명체로부터 한낱 모래까지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생명의 기운과 함께 살아 있고 이러한 기운은 지리적 위치와 적대 세력이 있음에도 연결되어 있고 서로 독립적이다. 더한 것은 이러한 기운을 자신의 일부로 느낄 수 있고 이제는 자신의 일부임을 깨달았다.



정령들은 흥정을 계속했다. 그들의 본성의 위상이 그에게 제공되었다. 물로부터 그는 명쾌함과 인내를 얻었다. 처음으로 그의 근심은 사라졌다. 불로부터 열정, 삶에 대한 새로운 감성, 장애를 극복할 열정을 얻었다. 대지로부터 그는 강력한 의지와 흔들리지 않는 결의를 얻었다. 바람으로부터 그는 용기와 불굴을 배웠다. 역경을 어떻게 헤쳐나가고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지.



여전히 그가 알지 못하는 중요한 교훈이 있었다. 그는 느꼈다. 정령이 무언가를 감쳐두고 있다는 것을. 단순히 그가 아직 이해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그리고… 여전히 악몽은 남아 있었다. 어느 정도는 지워졌으나 매일 밤마다 노분도는 여전히 샤트라스에서 죽어가던 자들의 비명을 들었다. 그리고 이제는 정문을 넘어 불 옆에 서면, 원망에 사로잡힌 망자들이 나타날 때, 코린이 그들과 함께했다.



그는 물의 부드러운 음성을 느꼈다. 내가 느끼기에는 너는 아직… 갈등에 빠져 있구나.



“그렇소.” 그는 대답했다. “샤트라스에서 죽어간 자들의 영혼에 사로잡혀 있소. 정령이 나에게 도움이 되어 줄 수 있겠소?”



갈등은 죽은 자의 영혼과 함께 있지 않고 너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그 갈등은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이러한 내부의 갈등이 주술사로서의 진정한 가능성을 차단하게 될 것인가?”



환희의 감각이 그의 주변 물웅덩이에서 퍼져 나왔다. 모든 정령 중에서 물은 가장 명랑했다. 당신의 마음속 갈등은 하늘 위에 비춰있다. 땅 아래에서, 내 속에서 그리고 특히 불 속에서. 이는 균형을 맞추고 유지하기 위한 자연의 영원한 싸움을 반영하는 것이다.



노분도는 잠시 생각했다. “얼마나 먼 여행길이 될지 모르나 진정한 깨달음은 모험이 결코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아는 데 있다.”



좋아… 아주 좋아.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가 되었군.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단계로.



“준비되었소.”



눈을 감으라.



노분도는 눈을 감았다. 땅이 아래로 꺼지는 느낌이 들었고 정령이 떠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한순간 그의 정신은 샤트라스로 이동하여 어둠 속에 남겨졌다.



그때 그는 무언가를 느꼈다. 다른 정령과 매우 다른 그 무엇. 거대하고 차갑고 무서운 것. 그 앞에서 노분도는 한없이 작아짐을 느꼈다. 그때 그 존재가 여러 목소리와 대화 중인 것을 느꼈다. 남성과 여성의 목소리. 조화로운 화음이 그를 둘러쌌다.



눈을 떠라.



노분도는 눈을 떴다. 그리고 다시 무수한 세상으로 가득한 어둡고 끝없는 광대함을 목격하자 왜소하고 볼품없는 의식을 느꼈다. 드레노어같은, 얼음과 서리로 만든 큰 공 같은, 물로 가득한, 생명이 없고 메마른 세상.



그리고 갑자기 노분도는 깨달았다… 어쩌면 아주 단순한… 하지만 그의 생각을 완전히 벗어난 개념. 무한한 세상이 있었다. 거기까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의 종족은 수많은 세상을 떠돌아다니다가 드레노어에 정착했다. 하지만 노분도가 이해하지 못한 것은 정령의 힘이 그만큼 멀리 펼쳐져 있다는 것이었다. 각 세계는 고유의 정령이 있고 소환할 수 있는 고유의 힘이 있다.



그리고 그 이상이 있다. 공허 속에 또 다른 정령이 있다. 세상을 함께 연결할 수 있을 것 같은. 무한의 기운으로 구성된. 만약 그가 이를 소환할 수 있다면… 하지만 그는 곧 깨달았다. 현재 단계의 모험에서 그는 너무 경험이 부족하여 이러한 신비롭고 새로운 정령과 소통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것은 단순히 희미한 깨달음의 축복이라는 것을…



깨달음…



벨렌은 수정처럼 푸른 눈으로 노분도를 바라보았다. 노분도는 반박했다. “그들은 내 말을 듣지 않을 겁니다! 이건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벨렌은 한쪽 입술을 위로 올렸다. 노분도가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을 알고 있는 것처럼. “이 모든 과정을 거쳐 왔는데, 이 모든 것을 극복했는데 정말 지금 포기할 셈인가?”



“그들은 나를 단순히 크로쿨 이상으로는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내가 가르쳐야 할 무언가가 있을지는 몰라도…”



“아마 진정한 문제는 그들에게 있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정령이 말한 것이라고 노분도는 생각했다.



과거에 나눈 소중한 대화의 교훈으로, 노분도는 이 예언자의 생각을 예측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조용히 기다렸다.



벨렌은 계속했다. “너의 마음속에서 비명 소리가 들린다. 샤트라스의 여인들의 비명. 너의 마음의 짐을 나는 알고 있다. 너는 네가 떠난 것이 비겁한 행동인지 아닌지 의문을 품었었지.”



노분도는 고개를 끄덕였고 갑자기 감정이 북받쳤다.



“너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살아남아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위대한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이후 수많은 시험을 거쳤고 한 번도 포기하지 않았지. 그래서 나는 너를 선택한 것이다. 왜 정령들이 너를 선택한 것일까. 우리 백성은 너를 크로쿨, 즉 뒤틀린 드레나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나는 네가 우리에게 큰 희망을 가져다줄 것으로 믿고 있다.”



벨렌은 부드러운 손을 노분도의 어깨로 뻗었다. “이젠 가게 내버려 둬라. 비명을 잠재워라.”



사실이었다. 그는 겁쟁이가 아니었다. 그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날 이후 일어난 모든 일에 절망하여 그 마음 한구석이 사라졌었던 것이다. 노분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는 그날 밤 잠자리에 들 때 악몽이 다시 그를 기다리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정령으로부터 기쁨의 감정을 느꼈다. 마치 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듯한.



벨렌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우리 모두의 선을 위해 가거라. 가서 너의 운명을 받아들여라.”



노분도는 집결지로 돌아갔다. 군집한 드레나이는 자기들끼리 얘기를 나누고 있었고 그에게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지팡이를 올렸다. 청명한 하늘에 구름이 몰려왔고 어둠이 내려왔다. 드레나이들은 대화를 멈췄다.



노분도는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는 습지대를 울려 퍼졌다. “잘 보고 들으시오.”



폭우가 내리쳤다. 광장 주변의 등불 사이로 번개가 내리쳤고 유리가 박살났다. 군집한 드레나이들은 두려움에 떨며 그 장면을 보고 있었다.



“당신들은 이곳에 가르침을 받으러 왔소. 언젠가 이런 힘을 얻기 위해, 바로 주술사의 힘을.”



“하지만 주술신앙은 오크의 것이오!” 무리 중 하나가 외쳤다. 다른 이들도 이에 동조했다.



“그렇소. 그들이 악마와 교통하기 위해 저버린 믿음이오. 이제 우리는 주술사의 길을 갈 것이오. 이 길은 우리를 미래로 인도할 것이오. 아무도 우리의 여인들과…”



노분도는 잠시 멈췄다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아이들을 다시는 해치지 못할 미래의 길로 말이오. 우리 종족이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꿈을 깨닫기 위해 크로쿨과 온전한 드레나이들이 함께 연합할 것이오… 진정한 자유를 위해.”



의회의 의원들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그들은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그의 말을 따르는 것이다.



“당신들의 모험은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될 것이오…”



노분도는 미소를 지었다. 하늘 위에서 구름이 소용돌이쳤다. 번개가 내리쳤다. 폭우가 쏟아졌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