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명한 센진이 이끄는 검은창 부족 정글 트롤들은 많은 것을 견뎌냈습니다. 구루바시 제국 시절 부족간의 증오가 극에 달한 나머지 대대적인 전쟁이 일어났는데, 이때 검은창 트롤은 조상들의 고향에서 쫓겨나 무인도에 자리잡고는 검은창 섬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검은창 부족은 이 새로운 고향에 정착하기를 바랬지만, 앞으로 부족의 운명이 어떻게 될 지는 알 수 없는 상태입니다.



“사람들이 그러는데 로아가 우리 마음을 가져간대.” 잘라제인이 음산하게 말했다. “로아는 우리를 뒤틀리고 비뚤어지게 만든 다음에 우리에게 환영을 보여준대.”



“많은 시험이 있다고 들었어. 그들이 내 값어치를 인정하면 나는 어둠사냥꾼이 되겠지.” 볼진이 대답했다. “내 값어치를 인정받지 못하면... 아무것도 우리를 구할 수 없어.”



“아, 그들은 분명히 날 보면 감동할 거야.” 잘라제인이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널 보면 실컷 비웃어 주겠지.” 그는 진흙 속에 발을 들이고는 친구 곁으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그들은 잠시 서로 바라보더니 엄니를 드러낸 채 함박웃음을 지었다. 검은창 마을에서 보낸 유년기 내내, 볼진과 잘라제인은 이 웃음 뒤에 뭔가 대단히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곤 했다.



그들은 커다란 함성을 내지르며 포도덩굴과 나무뿌리를 헤치고 첫 번째 고향으로 무턱대고 돌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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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림의 울창한 수풀 사이로 아른거리는 오솔길을 응시하며 젊은 트롤은 빗속에 몸을 웅크렸다. 햇빛도, 산들바람도 그 빽빽한 잎 사이를 관통할 수는 없었다. 섬의 이쪽 부분은 “첫 번째 고향”이라 불렸고, 어둠사냥꾼과 멍청이들 말고는 그 누구도 발을 들이지 않는 곳이었다.



볼진은 어둠사냥꾼이 아니었다.



그는 발가락 사이로 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등에 떨어지는 빗방울 하나하나가 볼진의 발걸음을 첫 번째 고향으로 재촉했다. 어둠사냥꾼들은 가끔 무사히 돌아왔지만, 멍청이들은 하나도 돌아오지 못했다. 볼진 뒤에는 또 다른 트롤이 커다란 종려잎 아래 몸을 피하고 있었다.



잘라제인도 어둠사냥꾼이 아니었다.



“우린 아직 준비가 안 됐어.” 코무 고기를 시끄럽게 씹어대며 잘라제인이 말했다. “심판은 이미 대단한 업적을 이룬 경험 많은 트롤들을 위한 거라고. 우리는 나이도 어리고 별 볼 일 없는 놈들이잖아.”



“난 그냥 어린 거고, 네가 별 볼 일 없지.” 볼진이 낄낄 웃으며 일어났다. “이제 가야 해, 잘. 우리 아버지가 어젯밤에 몇 시간이나 불꽃을 응시하고는, 곧 마지막이라도 맞을 사람처럼 굴고 계셔. 아무래도 환영을 보신 것 같아. 큰 변화가 있을 거고 우리는 그 변화에 미리 대비해야 한다고.”



“로아가 너를 어둠사냥꾼으로 만들어 줄 것 같아?”



“확실한 건 나를 심판할 거라는 거지. 나를 시험할 거고. 사실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나도 정확히는 몰라.”



“사람들이 그러는데 로아가 우리 마음을 가져간대.” 잘라제인이 음산하게 말했다. “로아는 우리를 뒤틀리고 비뚤어지게 만든 다음에 우리에게 환영을 보여준대.”



“많은 시험이 있다고 들었어. 그들이 내 값어치를 인정하면 나는 어둠사냥꾼이 되겠지.” 볼진이 대답했다. “내 값어치를 인정받지 못하면… 아무것도 우리를 구할 수 없어.”



“아, 그들은 분명히 날 보면 감동할 거야.” 잘라제인이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널 보면 실컷 비웃어 주겠지.” 그는 진흙 속에 발을 들이고는 친구 곁으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그들은 잠시 서로 바라보더니 엄니를 드러낸 채 함박웃음을 지었다. 검은창 마을에서 보낸 유년기 내내, 볼진과 잘라제인은 이 웃음 뒤에 뭔가 대단히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곤 했다.



그들은 커다란 함성을 내지르며 포도덩굴과 나무뿌리를 헤치고 첫 번째 고향으로 무턱대고 돌진했다. 그곳에서 수많은 이가 갑작스럽게, 혹은 서서히 죽음을 맞았지만 그들은 어렸고, 아직 자기들은 죽을 때가 되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로아가 있었다. 죽음을 초월한 고대의 영혼인 로아는 놀라운 은혜를 선사하기도 하지만 끔찍한 형벌을 가하기도 했다. 로아는 트롤에게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을 선사할 수도 있지만, 완전히 미쳐서 자기 눈을 뽑아버리게 할 수도 있었다. 그들의 심판은 잔인하고, 신속하며, 예측할 수 없었다.



한동안 달리면서, 볼진과 잘라제인은 첫 번째 고향에 대한 전설이 과장된 것은 아닌지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딱히 위험해 보이는 건 하나도 없었다. 그때, 커다란 잎 두 장이 그들 앞을 가로막았다. 볼진과 잘라제인이 살짝 몸을 틀어 양쪽으로 미끄러지자 거대한 육식성 식물인 남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털로 뒤덮인 넓게 벌린 입술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고 쩍 벌어진 입속에는 섬유질의 이빨이 격렬하게 몸부림치고 있었다. 제때 멈춰 설 수 없었던 볼진은 왼쪽으로 몸을 날리며 남부의 측면을 스쳐 지났다.



팔다리를 흔들며 비틀거리던 볼진은 미끄러져 비늘로 뒤덮인 딱딱한 무언가에 부딪쳤다. 그는 정신이 혼미해져 머리를 흔들며 휘청휘청 물러섰다. 그때 그 무언가가 뒤돌아섰는데 극도로 화가 난, 여태껏 볼진이 본 것 중 가장 큰 랩터였다. 볼진은 자신의 뒤쪽 어딘가에 남부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뒤로 나자빠질 수밖에 없었다. 어딘가에서 잘라제인의 이상하게 희미한 외침이 들렸지만, 볼진은 이미 친구의 행방을 놓친 상태였다.



랩터가 볼진을 향해 쏜살같이 덤벼들었고 볼진은 왼쪽으로 몸을 굴렸다. 거대한 턱이 볼진이 있던 자리에서 탁하고 사납게 닫혔다. 랩터의 입에서 타액이 이리저리 튀었다. 이 역동적인 움직임에 남부가 번개같이 반응하여 이빨로 랩터를 물고 야수의 찢어진 살 안에 독을 퍼뜨렸다. 남부의 방해로 아주 짧은 시간을 번 볼진은 칼을 꺼내 들고 남부 옆으로 접근하여 기회를 엿봤다. 잘라제인은 남부 반대편 알추 둥지 안에서 벌레 떼에 물리고 쏘이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볼진에게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랩터는 남부를 땅에서 뿌리째 뽑아내 멀리 내던져 버렸다. 미친 듯한 잘라제인의 움직임이 야수의 작고 성난 두 눈을 잡아끌었다.



시간이 없었다. 볼진은 전투의 함성을 외치며 랩터에게 난폭하게 칼을 휘둘렀다.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랩터의 등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 랩터는 분노에 찬 비명을 지르며 볼진을 머리로 들이받아 수풀 속으로 날려버렸다. 이슬 맺힌 끈끈한 나뭇잎이 얼굴을 뒤덮어, 볼진은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볼진은 야수가 돌진하니 땅이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볼진은 휘청거리며 뒤로, 그리고 오른쪽으로 몸을 날렸고, 다시 한 번 랩터의 턱이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랩터가 몸을 추스르고 돌진해오기 전에, 그는 서둘러 자신의 얼굴에 뒤덮인 잎사귀를 떼어냈다.



랩터 반대편에서 잘라제인이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볼진은 감히 야수에게 등을 보이지 못하고 뒷걸음질치며 기어 올라갔다. 잘라제인이 반대편에서 랩터를 공격하는 모습이 보였지만, 랩터는 꼬리를 낮게 휘둘러서 잘라제인의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그 동작이 볼진에게 아주 짧은 시간을 벌어 줬고, 그 정도면 그에겐 충분했다.



볼진은 랩터에게 껑충 뛰어올라 긴 팔로 랩터의 목을 감쌌다. 무시무시한 순간, 야수의 아래턱이 볼진의 얼굴을 짓눌렀고, 거친 숨결에 모호크 머리가 헝클어졌다. 볼진은 야수의 목을 타고 꿈틀대면서 무릎으로 랩터의 어깨뼈를 조였다.



랩터는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저항했고, 몸을 추스른 잘라제인은 날카로운 발톱이 달린 야수의 발을 지팡이로 내리쳤다. 뼈가 산산이 조각나는 소리가 들렸다. 볼진은 야수의 목을 더욱 세게 조이면서 칼을 가져다 댔다.



랩터는 볼진을 포기하고 부서진 발을 질질 끌며 잘라제인에게 다가갔다. 잘라제인은 천천히 뒤로 물러섰고 볼진은 팽팽하게 경직된 야수의 근육을 느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볼진은 사납게 칼을 잡아당겼고, 칼이 랩터의 근육과 동맥으로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커다란 호를 그리며 칼을 뽑아내자 진홍색 커튼처럼 피가 휘날렸다. 랩터가 이리저리 몸을 비틀거리더니 잘라제인의 발 바로 옆에 주둥이를 떨어트리며 쓰러졌고 볼진은 재빨리 야수에게서 뛰어내렸다.



“대체 이게 뭐지?” 잘라제인이 헐떡이며 말했다. “내가 본 랩터 중에 제일 큰 놈이었어.”



“로아가 기르는 랩터인가? 우리의 첫 번째 시험?”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친구.” 잘라제인은 야수의 단말마를 무시하고 피를 뿜는 목 근처로 다가갔다. “시험이라면 알 수 있었을 거야.” 그는 두 손을 모아 랩터의 피를 받더니 자기 얼굴에 바르기 시작했다.



“대체 뭐 하는 거야?” 볼진이 물었다.



“흑마법이야, 친구.” 잘라제인이 피로 그린 가면에 마지막 손질을 하고 손가락을 빨면서 대답했다. 그는 볼진에게도 똑같이 해보라는 듯한 몸짓을 보냈다.



“난 이 동네에서 피비린내를 풍기고 싶지 않아.” 볼진이 대답했다. 잘라제인은 자기 몸에 달라붙은 곤충을 떼어내서 볼진에게 내던졌다. 볼진은 주저하지 않고 벌레를 받아서 잘라제인에게 도로 던졌다.



“어차피 우리한테서는 사악한 놈들의 피 냄새가 나게 될 거라고. 위험한 죽음의 냄새 말이야.” 잘라제인이 다른 벌레를 집어던지며 말했다. 최근에 검은창 트롤을 대표하는 의술사인 가드린 장로와 함께 일하기 시작한 잘라제인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볼진은 벌레를 쳐버리고는 아직도 쏟아지고 있는 죽은 짐승의 피를 받아 들었다.



“우리를 지켜줄 수도 있다고.” 잘라제인이 말했다. “로아에게서 지켜줄 수는 없겠지만.”



“로아에게서 지켜줄 수는 없지.” 볼진이 따뜻하고 끈적이는 피를 얼굴에 바르며 동의했다. 피 냄새가 강하게 풍겼다. “그래도 어쨌든 우리는 로아를 만나야만… 그리고 그 결과를 받아들여야만 심판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그래, 맞아.”



“아!” 갑자기 고통이 느껴져 볼진은 아래를 내려다봤다. 피를 바르느라 눈을 감고 있는 동안 잘라제인이 사나운 곤충 세 마리를 볼진의 가슴에 붙여놓은 것이다.



“내가 암흑사냥꾼이 되면 로아에게 널 죽여달라고 부탁할 거야!” 볼진이 잘라제인에게 소리쳤다.



“그때쯤이면 나도 꽤 강해졌을 텐데.” 잘라제인이 웃으며 화답했다.





* * * * *






밤이 찾아왔다. 밀림은 항상 어둡기에, 볼진은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고 커다란 물결을 그리며 윙윙 날아다니는 성난 벌레 떼를 보고서야 밤이 왔음을 알 수 있었다. 손만큼 커다란 모기들이 먹이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볼진과 잘라제인은 작은 언덕 꼭대기에 앉았다. 언덕 한쪽은 낭떠러지였고, 그 아래는 삐죽삐죽한 바위투성이였다. 그들은 발이 아프고 숨이 막혀 질식할 지경이 될 때까지 계속 걸어왔다. 공기는 탁하고 고요했다.



“이건 정말 이상한 시험이야.” 잘라제인이 낮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우리는 그냥 돌아다니면서 야수 사냥만 하고 있잖아. 대체 로아는 어디 있는 거야?”



볼진이 잘라제인에게 대답하려던 찰나, 볼진은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무언가 그들과 함께 있음을 느꼈다. 로아가 그들과 함께 언덕에 와 있었다. 볼진은 로아를 볼 수도 냄새를 맡을 수도 없었지만, 그의 목 뒤에 난 머리카락이 로아가 함께 있음을 알려줬다. 잘라제인을 바라보자, 친구의 눈에도 자신이 느낀 것과 똑같은 극심한 공포가 서려 있었다.



그리고는 고통이 찾아왔다. 그것은 뼈가 부러진 것보다, 칼로 찔린 것보다 더욱 극심한 고통이었다. 볼진이 여태껏 느낀 그 어떤 고통보다 심한 고통이 마음속을 헤집고 다니면서 그를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벼랑,” 소리 없는 목소리였다. “그 아래 바위. 고통을 멈출 수 있다. 쉽고, 빠르게.” 볼진은 그 말이 사실임을 깨달았다. 그는 지금 당장 벼랑 아래로 뛰어내릴 수 있었고, 그러면 고통은 사라질 것이다. 유일한 대안은 고통을 인내하는 것뿐이다.



볼진은 눈을 감고 인내했다.



영원인 듯한 시간이 지나고, 볼진은 육체에서 분리되어 아무런 감각 없이 떠돌았다. 눈앞에 환영이 보이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좀 더 나이 들고 자신감 넘치는 볼진 자신이 있었다. 볼진은 환영을 멀리서 지켜보면서 동시에 그 안에 살고 있었다. 검은창 트롤 한 무리가 그의 뒤에 정렬해 있었다. 그들은 초목은 적고 주황색 바위로 뒤덮인 미지의 땅을 걷고 있었다. 저 멀리 뾰족한 날과 못이 가득한 거대한 도시가 솟아났다. 전쟁의 북소리가 들려왔고 두꺼운 연기가 도시를 뒤덮었다. 이상하고 땅딸막한 녹색 생명체가 정교한 갑옷을 차려입고 도시 앞에 서 있었다. 커다랗고 털이 많은, 발굽 달린 또 다른 생명체 몇몇은 한쪽에서 망을 보고 있었다.



볼진은 녹색 생명체들의 강인하고 현명한 얼굴을 한 지도자에게 다가갔다. 둘은 동등하게 악수를 나누며 서로에게 미소 지었다. 볼진의 마음속에 단어들이 떠돌았다. 오크. 오그리마. 타우렌. 스랄.



녹색 생명체들은 환영하는 몸짓을 보였고, 검은창 부족은 짐을 내려놓으며 안도하는 듯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왠지 지쳐 보였다.



“왜?” 목소리가 물었다. 뼛속에서 느껴지는 목소리가 온몸에 울려 퍼졌다. “왜 우리 부족을 남의 밑으로 이끄는가? 혼자 명예롭게 싸우고, 혼자 명예롭게 죽는 게 훨씬 나은 길인데.”



“아니,” 생각 끝에 볼진이 대답했다. “검은창 트롤은 항상 자유롭고 명예로워야 한다. 하지만 자유롭기 위해서는 살아남아야 한다. 죽으면, 지는 거다. 우리의 때를 기다리며 참는 것이 낫다. 우리는 고대의 종족이다. 우리는 인내한다.”



볼진은 말하면서 그 말이 진실임을 느꼈다. 그는 친구들 사이에서 항상 문제점을 분석하고 해결해나가는 전략가로 유명했다. 살아남고 승리하겠다는 그의 결심은 확고했다.



“어린 친구치고는 현명하군.” 목소리가 말했다. “검은창 부족은 고통받을 것이다. 투쟁할 것이다. 그들에게는 인내가 생존하는 길이다.” 환영이 볼진 앞에서 녹아내리면서 로아일 수밖에 없는 그 모습을 드러냈다. 어딘가 바래고 흐려진 느낌이 드는, 고대의 지식과 슬픔을 뿜는 구체였다. 아주 오래전, 볼진이 태어나기 전부터 첫 번째 고향에 숨겨져 있던 그 무언가였다. 표면에서는 여러 이미지와 형상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볼진이 겨우 로아를 인식하자마자 로아는 볼진 앞에서 사라져버렸다. 볼진 주변의 세계가 바뀌었다.



“너에게 새로운 시각을 부여하노라.” 목소리가 사라지며 말했다. 볼진은 자신이 다시 언덕 위에 있음을 깨달았다. 잘라제인도 있었다.



“로아가 보여. 로아가 보인다고!” 잘라제인이 기쁨에 겨워 외쳤다. 두 트롤은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우리는 내일까지 살아남을지도 몰라.” 볼진이 말했다.



“꿈이 너무 큰 거 아냐?” 잘라제인이 말했다. “아직 끝난 게 아니라고. 가드린 장로님은 많은 가르침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했어. 심판은 복잡하다고. 로아는 우리 앞에 더 많은 시련을 준비해 놨을 거야.”





* * * * *






“로아가 네게는 뭘 보여줬지?” 볼진이 물었다. 볼진과 잘라제인은 모닥불 옆에 앉아 꼬챙이에 코무를 끼워 구워 먹고 있었다. 뼈에서 흘러나온 기름이 불에 떨어져서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튀어 올랐다. 정확히는 몰라도 며칠이 흐른 건 분명했고, 모닥불 같은 호사를 누리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하지만 야생 동물들은 마치 로아가 둘에게 표식이라도 남긴 듯 그들을 건드리지 않았다. 그러나 설령 그게 사실이라 해도 둘은 안심할 수 없었다.



“나는 검은창 부족의 위대한 의술사가 되어 있었어.” 잘라제인이 말했다. “우리는 이상한 지역에서 발버둥치고 있었어. 생존이 걸려 있었다고, 친구. 우리는 강인해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어. 모두에게 힘든 시간이었고, 특히 지도자에게는 더 큰 시련이었지. 지도자가 누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너희 아버지는 아니었어.” 잘라제인은 조용히 말하고는 미소 지었다. “난 의술사가 된다고!”



“잘, 내가 거짓말을 했어.” 볼진이 말했다. 잘라제인은 아무 대답 없이 볼진이 계속 이야기를 하도록 두었지만, 볼진은 잘라제인이 순간 관심을 보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둘은 평생 알고 지낸 사이였고, 누구도 상대방에게 심각한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다. “우리 아버지는 이상한 행동을 보이시기만 한 게 아니야. 내게 환영에 대해 얘기해주셨어. 내가 가서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지. 시간이 부족하다고 하시면서.”



“우리가 떠나야 한다고 하신 거야?”



“우리가 아니라 나만. 아버지의 그런 모습은 처음 봤어. 내 얘기는 하나도 듣지 않고 그냥 무조건 가라고만 하셨다고. 얼마나 급하셨는지… 그래도 나는 길을 떠나면서… 아버지를 뒤돌아 봤어.”



“근데?”



“아버지는 우리가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처럼 나를 바라보고 계시더라고. 마치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으시는 것처럼.”



“그래서 나까지 죽여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잘라제인이 장난기 넘치는 미소를 보이며 물었다. 잘라제인은 언제든지 볼진의 기분을 풀어줄 수 있었다. 둘은 항상 서로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난 아직 준비가 안 됐어, 잘. 혼자서는 할 수가 없었다고. 그래도 둘이 함께라면…” 그 말과 동시에 볼진의 머릿속에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약한 녀석. 센진은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여리고 약해 빠진 녀석. 검은창 부족의 지도자는 절대 그래서는 안 된다. 삶은 처절하다. 여기 우리 섬에서조차.



“함께라면 우리는 강하지. 괜찮아, 친구. 네가 약해지면 내가 도와줄게.” 잘라제인이 말에서 가시를 빼고 싱긋 웃으며 말했다. “너도 항상 날 돕잖아. 우리 함께 해나가는 거야.”



볼진은 대답하려고 입을 열려다가 밀림에서 불빛을 발견하고 얼어붙었다. 더욱 태고의, 더 불가사의한 또 하나의 로아가 나뭇잎 사이에 빛나고 있었다. 아주 먼 거리였지만, 그것은 볼진을 부르고 있었다. 볼진은 벌떡 일어나서 나무 사이로 뛰어들어 갔다.



“어디 가는 거야, 친구?” 잘라제인이 외쳤지만 볼진은 멈추지 않았다. 로아가 사라지게 둘 수는 없었다. 볼진이 나뭇가지에 걸려 넘어지며 불빛 근처에 도착했을 때, 로아가 갑자기 사라졌다. 볼진은 밀림의 어둠 속에 혼자 남겨졌다.



마침내 그는 다시 오른편에서 불빛의 흔적을 발견하고 나뭇가지와 뿌리를 헤치며 로아를 향해 질주했다. 볼진이 마지막 나뭇가지를 젖혔을 때, 영혼은 또다시 사라져버렸다.



그는 잠시 숨을 헐떡이며 기다렸고, 가만히 서 있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로아는 김이 잔뜩 서린 캄캄한 첫 번째 고향의 어둠 속에 볼진을 내버려둔 것이었다. 그는 이제 로아의 장난질에 놀아나지 않기로 했다. 숲에서 방황하고 있으면 로아가 이끌어줄 터였다. 어쩌면 로아가 그를 발견하기 전에 그가 먼저 로아를 찾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볼진은 빽빽한 덤불을 이전보다 더 조심스럽게 헤쳐나갔다. 야영지에서 어디로 왔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로아를 찾는 것이 살아남는 길이었다. 로아를 찾지 못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가장 중요한 건 로아를 찾는 일이었다.



볼진은 빈터에 멈춰 섰다. 그곳에서는 지붕처럼 밀림을 덮은 나뭇가지 사이로, 그보다 더 어두운 하늘이 얼룩처럼 엿보였다. 볼진은 조용히 하기 위해 숨을 고르고 나무 사이를 살피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깊은 잠에서 깨어나듯이 서서히 등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볼진이 돌아서자 로아가 눈앞에 있었다. 불빛 안쪽에서 반짝이며 장난스럽게 움직이는 촉수가 보일 만큼 가까이에 로아가 와 있었다. 로아의 불빛이 커지면서 환영이 볼진을 채웠다.



어느새 그는 굴처럼 생긴 동굴 안에 서 있었다. 앞에는 여러 갈래로 나뉜 길이 있었고, 각각의 길에 볼진 자신의 환영이 있었다.



한쪽 길에서 그는 눈부신 순금 왕좌에 앉아 있었다. 커다란 고기가 종려잎에 싸여 있었고, 최고급 밀림 맥주가 주위에 가득했으며, 여자 트롤들이 그를 위해 춤을 추고 있었다. 그는 무척 건강하고 행복해 보였다. 아주 작은 금 사슬이 볼진의 한쪽 발목을 왕좌의 다리에 묶어두고 있었다. 다른 환영에서 그는 초췌한 모습으로 적에게 둘러싸여 상처입고 피 흘리고 있었다. 환영은 흐릿했고 계속 바뀌었지만, 그는 항상 싸우고, 몸부림치고 있었다. 다른 검은창 트롤을 이끌기도 했고, 혼자 싸우기도 했지만, 그 의미는 확실했다. 싸움과 투쟁이 끊이지 않는, 휴식이 없는, 항상 더 많은 학살만이 기다리고 있는 삶이었다.



볼진은 웃었다. “위대한 로아여, 이게 시험이란 말인가? 너무 쉽군. 나는 자유를 선택하겠다. 싸우고 투쟁하고, 어쩌면 평생 행복을 찾지 못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난 자유를 택하겠다.”



멀리서, 로아의 낮고 원시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택은 시험이 아니었다, 작은 형제여. 만약 네가 망설였다면, 조금이라도 생각이 필요했다면, 심장이 한 번 뛸 동안이라도 유혹을 느꼈다면, 너는 실패했을 것이다.” 로아의 목소리를 들은 볼진은 몸이 떨렸다. 로아의 어조는 마치 실패는 죽음이나 더 끔찍한 결과를 의미한다는 듯했다.



동굴이 녹아내리고 볼진은 투기장을 내려다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손이었지만, 좀 더 나이 든 사람의 손 같았다. 오랜 세월에 걸친 치열한 전투의 흔적으로 상처와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볼진 주위에는 검은창 부족의 장로와 전사들이 늘어서 있었고 그 너머로는 오크, 타우렌 등이 서 있었다. 모두 두 생명체가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는데 열중했다. 하나는 거대한 도끼를 든 갈색 오크였고, 다른 하나는 창을 든 타우렌이었다. 둘 다 허리에 간단한 천만 두르고 전투를 위해 온몸에 기름을 바른 상태였다. 다시 한 번 볼진의 마음속에 단어들이 떠올랐다. 가로쉬와 케른. 피의 울음소리와 룬창.



둘은 투기장 안에서 치열하게 싸웠다. 갈색 오크는 상처를 많이 입고 피를 흘려댔지만, 타우렌은 손끝 하나 다치지 않은 듯했다. 새로 얻은 시각을 통해, 볼진은 주위에 가득한 로아도 볼 수 있었다. 로아는 공중에 무리지어 볼진의 시야 가장자리를 맴돌았다. 그들은 모여서 동요하고 있었다. 이 순간이 볼진의 부족, 어쩌면 아제로스 전체에 엄청난 의미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볼진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크가 커다란 호를 그리며 도끼를 내리쳤고 무기 양날에 파인 홈 사이로 바람이 새어나가며 커다란 소리가 났다. 타우렌은 창을 들어 공격을 막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도끼가 창을 부수고 타우렌을 스치고 지나갔다.



두 투사가 순간 멈추어 섰다. 오크는 부상이 심해서 서 있기조차 힘든 반면에, 타우렌은 거의 상처를 입지 않았다. 하지만 위기에 처한 이는 타우렌이었고, 그는 힘없이 양손을 떨어뜨렸다. 무기력한 손가락에 창 조각이 느슨하게 걸려 있었다.



오크가 무기를 치켜들고 달려들었다. 도끼에서 나는 매서운 소리가 투기장을 가득 메웠다. 오크의 무기가 타우렌의 목을 파고들었다.



타우렌이 치명적인 피해를 입는 것을 본 볼진은 심장을 찌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는 그 고통이 절친한 친구이자 위대한 장로를 잃어버린, 시간을 초월해서 메아리치는 환영 속 볼진의 슬픈 감정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타우렌이 쓰러졌다. 그가 땅에 쓰러지기 직전, 세상이 느려졌다. 감각이 예민해지는 가운데, 볼진은 세상이 커다란 절규를 내지르기 전에 숨을 들이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로아가 격노했다. 그들은 쉿 하는 소리를 내며 속삭이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쏜살같이 움직이며 그의 귓가에서 아우성치고 그의 몸속을 들락거렸다. 다른 이들은 아직 반응하지 않았다. 모두 꼼짝 않고 있었다. 타우렌은 아직 피를 뿜으며 땅에 쓰러지고 있었다.



그때 볼진은 깨달았다.



독. 갑자기 그는 깨달았다. 도끼에는 독이 묻어 있었고, 이건 분명히 옳지 않았다. 이건 이들의 방식이 아니었다. 타우렌이 큰 소리를 내며 땅에 쓰러졌다. 다시 모든 것이 제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군중은 환호와 격노의 함성을 질렀다.



모든 것이 차츰 사라지고, 새로운 환영이 만들어졌다. 볼진은 환영을 바라보는 동시에 그 안에 있었다. 그는 또다시 트롤 무리 맨 앞에 서 있었다. 모두 단호한 표정으로 짐을 잔뜩 들고 있었다. 그는 아직 이상한 주황색 풍경 속에 있었다. 어깨 너머로 이전 환영에서 봤던 거대한 도시가 보였지만 이번에는 더 어둡고, 어딘가 날카로워 보였다. 성벽 위에 늘어선 오크들이 떠나는 트롤들에게 음침한 위협의 눈초리를 보냈다. 볼진은 깊은 불안감을 느꼈다. 환영 속의 다른 무언가가 마음에 걸렸다. 볼진은 갑자기 깨달았다.



잘라제인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잘은 어디 있지? 볼진은 알고 싶었다. 나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내 친구가 필요하다고.



볼진은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의심과 걱정이, 앞으로 다가올 위험에서 검은창 부족을 지켜내고야 말겠다는 차가운 분노와 결의로 바뀌는 것을 느꼈다.



“너는 내 형제에게 살아남는 게 낫다고 했지,” 로아가 말했다. “설령 그것이 나약함을 의미한다 해도, 살아남아 또 하루 싸워나가는 게 낫다고 말이야. 영광스럽게 죽는 것보다 인내하는 것이 낫다고 했지.” 목소리가 볼진의 마음을 환영에서 끌어내며 가슴 속에서 재잘거렸다. 그건 볼진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 영광과 공포를 체험한 이의 목소리였다. “지금 너는 안전한 오그리마에서 검은창 부족을 끌어내고 있다. 힘을 상징하는 동맹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 자, 결정을 내릴 수가 없나?”



볼진은 망설였다. 아주 중요한 질문을 받았지만, 전혀 정황을 파악할 수 없었다. 왜 그가 이런 일을 하겠는가? 그는 주변을 둘러봤다. 그의 동족에게서 분노, 두려움, 결의, 즐거움이 느껴졌다. 그는 다시 성벽을 돌아봤다.



그의 시선은 가로쉬에게 향했다. 당당한 대족장은 흉벽 위에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입가에는 아주 희미하게 만족의 미소가 감돌았다. 그는 액자 속 인물처럼 하늘을 배경으로 갑옷을 입은 채 서 있었고, 아래턱에 새긴 뚜렷한 검은 문신에 빛이 내리쬐었다.



그는 폭력과 전쟁에는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짐승 같은 인물이었지만, 외교와 타협에는 문외한이었다.



그제야 볼진은 깨달았다.



“나는 우리 몸을 보호하기 위해 검은창 부족을 이곳으로 이끌었다.” 볼진이 로아에게 말했다. “우리는 살아남아 다음날 또 싸워나가야 한다. 하지만 그건 단지 우리의 육신에 대한 얘기지. 로아여, 검은창 부족이 잃어서는 안 되는, 우리가 절대로 잃어서는 안 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영혼이다. 검은창 부족에게는 영혼이 있고 만약 우리가 이 오크와 함께 한다면, 그의 명령을 따른다면, 우리는 영혼을 잃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되돌릴 수 없다.”



“검은창 부족은 반드시 살아남아야 하지만 영혼을 잃어버리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검은창 부족은 진실해야 한다. 진실해야 한다.” 목소리가 말했다. “너는 이제 모든 로아를 듣는다. 항상 우리 목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귀를 기울여 듣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볼진은 눈을 떴다. 그는 항상 진흙투성이인 밀림 바닥에 누워 있었다. 여러 종류의 곤충이 볼진의 몸에 신나게 진흙 고치를 만들고 있었다. 옆에는 아직 모닥불이 타올랐지만, 불길이 많이 사그라져 있었다. 환영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잘라제인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볼진은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잠시 후, 잘라제인이 어둠 속에서 절뚝거리며 나타나서는 볼진 옆에 앉았다. 둘은 잠시 타오르는 불꽃을 조용히 응시했다.



“나는 봤어…” 잘라제인이 망설이면서 말했다. “내가 검은창 전사들을 부족에서 이끌고 나오는 모습을 봤어. 지도자가 너무 나약했고, 우리를 모두 팔아넘겼다고, 친구. 나는 새로운 지도자가 됐고 부족은 둘로 나뉘었어.” 잘라제인은 볼진을 쳐다보지 않았다.



“지도자가 누구였는데, 잘? 우리 아버지는 아니라고 했지만, 분명히 우리가 아는 인물일 거 아냐.”



잘라제인은 여전히 볼진을 쳐다보지 않았다.



볼진은 막대기를 들고 불을 휘저었다. “이따위 시험은 이제 지긋지긋해.” 그게 볼진이 말한 전부였다.







* * * * *



볼진은 불 주위를 맴돌았다. 불안하고 화가 나서 무언가를 죽이고 싶을 정도였다. 어딘가 마구 끌려다니고, 내몰리고, 갈기갈기 찢긴 기분이었다. 볼진이 부족과 아버지에 대한 사랑 말고 유일하게 믿을 수 있었던 그의 친구 잘라제인과의 우정에 금이 가고 있었다.



“그만,” 볼진이 잘라제인을 보지 않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사냥을 가야겠어. 우리는 식량이 필요하고, 나는 화풀이할 게 필요하니까.” 그는 칼을 꺼내 들고 캄캄한 풀숲을 헤치고 들어갔다. 섬에서 가장 위험한 곳으로 홀로 들어가는 것이 그냥 옳은 일처럼 느껴졌다.



그것이 힘이었다.



불가에서 잘라제인은 나지막하게 부두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잘라제인 앞쪽 어둠 속에서 볼진은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를 들었다. 커다란 생명체가 몰래 숨어 있었다. 볼진은 입술을 엄니 바깥쪽으로 벌리며 미소 지었다. 칼을 잡은 손가락에서 맥박이 느껴졌다.



그는 업카 나뭇잎에 난 부드러운 털이 얼굴에 스치는 것을 느끼며 앞으로 나아갔다. 다시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왼쪽이었다. 볼진은 생명체를 오른쪽에 두려고 몸을 틀었다.



또다시 왼쪽 수풀 속에서 소리가 들렸다. 그는 깨달았다. 이 생명체는 볼진을 염탐하고 있었다.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볼진은 돌진했다.



그는 나뭇가지와 나무뿌리를 헤치고 뱃속에서 우러나오는 함성과 함께 돌진했다. 앞쪽에서 또 한 명의 트롤이 몸을 일으켰다.



볼진이 그를 덮쳤고 둘은 함께 쓰러졌다. 볼진이 어둠 속에서 칼을 꺼내 상대방의 목에 가져갔다. 섬에 있는 트롤은 전부 검은창 트롤이었고 그의 동료였지만, 볼진은 사악한 구루바시 부족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그리고 이곳은 어떤 일이든 벌어질 수 있는 장소가 아닌가.



쓰러진 트롤이 볼진을 올려다봤고, 멀리서 불빛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볼진의 아버지 센진이었다.



“아버지?” 볼진은 쓰러져 있는 트롤에게서 몸을 떼며 놀라서 물었다. 센진은 웃으며 볼진을 밀어 제쳤다. 어린 트롤은 웃으며 진흙 위에 떨어졌다.



센진은 벌떡 일어나서 지팡이를 돌리며 볼진의 흉부를 겨냥했다. 아버지의 얼굴에서 살기를 느낀 볼진은 뒤로 기어 간신히 공격을 피했다. 맞았다면 갈비뼈가 부서져서 심장에 박힐 만한 공격이었다. 볼진은 일어나서 경계 태세를 취했지만 공격을 하지는 않았다.



“아버지?” 그가 물었다. “왜 그러세요?” 센진은 그저 미소를 띨 뿐이었고 지팡이를 아래로 휘두르며 치명적인 공격을 가했다. 볼진은 뛰어오르며 공격을 피했지만, 센진은 탄력을 이용해서 머리로 볼진의 흉부를 들이받았다.



볼진은 헉 하고 숨을 내쉬며 식물 더미에 떨어졌다. 그는 헐떡이며 돌아누웠다. 센진은 미끄러지듯 볼진 앞으로 와서 다시 지팡이를 돌렸다.



“아빠, 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 제가 실패했나요? 이해가 안 돼요!” 볼진이 애원했다.



센진이 잠시 공격을 멈추며 말했다. “내가 네 아비라고 공격하지 않는 거냐? 나약한 녀석.”



그 말과 함께, 센진은 지팡이로 볼진의 펼쳐진 손을 내리쳤다. 공격에는 늙은 트롤에게 남아 있는 힘이 전부 실려 있었고 볼진의 손은 으스러졌다. 손 아래 눌려 있던 엄지손가락이 가장 큰 타격을 받고 뼈가 조각나 발톱처럼 오그라들었다.



볼진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손목 아래가 전부 부서지고 엄지손가락은 엉망이 된 오른손을 왼손으로 붙잡고 옆으로 굴렀다. 충격에 휩싸여, 이 모든 현실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센진의 커다란 맨발이 밀림으로 사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 볼진이 외쳤지만 센진은 멈추지도, 속도를 늦추지도,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수풀이 흔들리며 센진은 사라졌다. “아버지!” 볼진은 괴로움에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팔을 붙잡고 뒤로 넘어졌다.



잠시 후, 볼진은 마음을 가다듬고 손을 내려다봤다. 엄지손가락이 완전히 망가졌다. 칼이 진흙 속에 놓여 있었다. 은은한 광택이 나는 칼날에는 진흙과 피가 얼룩져 있었다.



손은 회복될 것이다. 하지만 엄지손가락은 기형이 될 것이다. 그 손으로는 칼을 던지지도, 검을 잡지도 못할 것이다. 사냥하지도, 공격 지시를 내리지도 못할 것이다.



하지만 고칠 방법이 있었다. 볼진은 그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심호흡을 하고 왼손으로 칼을 집어 머리 위로 높이 치켜들었다. 두 눈을 뜬 채로 해낼 작정이었다. 그는 길고 우아한 호를 그리며 칼을 휘둘렀다. 칼은 속삭이듯 피부와 뼈를 관통했고, 기형이 된 엄지손가락이 어둠 속으로 날아갔다.



볼진은 하늘의 별을 향해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이를 악물고 앞뒤로 몸을 흔들며 피가 멎을 때까지 버텼다. 그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엄지손가락은 다시 깨끗이 자라날 것이다. 트롤은 모두 로아에게서 재생 능력을 선물 받았다. 사지나 내장처럼 복잡한 기관까지는 무리였지만, 손가락과 발가락은 다시 자라나게 할 수 있었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그는 다시 완전해질 것이다.



시야 바깥쪽에서 밝은 빛이 느껴졌다. 볼진은 자신이 의식을 잃는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빛은 점점 더 밝아졌다.



볼진은 위를 올려다봤다.



로아가 가까이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 빛은 밝고 생기가 넘쳤다. 이 로아는 전에 봤던 비밀스러운 고대의 로아보다 더 강력하고 새로운 것 같았다. 볼진은 이 로아가 왠지 친근했고, 마치 이 영혼을 전에 어디선가 알고 지낸 것 같았다.



새로운 로아의 등장을 느끼면서 동시에 볼진은 자신이 환영 속에 있음을 깨달았다. 밀림이 우거진 섬이었지만 지금 사는 곳과는 매우 달랐다.



볼진은 꿈속에 있는 자신을 보았고 동시에 그 꿈속에 살고 있었다. 좀 더 나이 들고, 현명하며, 강인하고, 훨씬 슬픈 모습이었다. 그는 수풀 사이로 트롤들을 이끌었다.



장면이 바뀌고 이번에는 그가 다른 트롤과 싸우고 있었다. 상대는 짐승 발톱으로 엮은 목걸이, 그리고 우상으로 치장한 사나운 눈매의 의술사였다. 둘은 사투를 벌였고, 다른 이들도 주변에서 전투를 펼쳤다.



의술사는 잘라제인이었다.



로아가 말했다. “동족과 싸우는 건가? 다른 검은창 트롤과? 어린 시절의 친구와?”



볼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둘이 싸우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 장면은 비 맞은 우상에서 칠이 벗겨지듯이 색이 바래고 흐릿해지며, 서서히 눈앞에서 사라졌다.



잘라제인만은 아니길 바랐다. 둘은 항상 같이 뛰어다니고, 낚시하고, 몸싸움하며 유년기를 함께 보냈다. 그들은 진흙으로 요새를 만들었고, 함께 처음으로 야수를 사냥했다. 잘라제인은 볼진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볼진의 두려움과 승리를. 볼진이 어린아이였을 때 애완동물이 죽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때, 나이 많은 골목대장을 두들겨 패서 의식을 잃게 했을 때, 잘라제인은 언제나 그 자리에 볼진과 함께 있었다.



볼진은 아래를 내려다봤다. 엄지손가락이 잘려나간 오른손이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나는 검은창 부족의 미래를 위협하는 자는 누구든 처치할 것이다.” 볼진이 말했다. “그게 누구든 상관없다. 부족이 전부이다. 부족의 미래… 그것이 전부이다.”



“너는 현명한 아이다.” 로아가 익숙지 않은 친근한 어투로 말했다. “네가 손가락을 자른 것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를 위해서였다. 검은창 부족은 맹렬해야 한다. 진실해야 한다. 인내해야 한다. 절대 쉽지 않겠지만, 그것만이 유일한 길이다.”



“당신은 누군가?” 볼진은 참지 못해 물었다.



로아는 볼진의 질문을 무시했다. “네게 로아와 교감하는 능력을 부여하노라. 우리가 언제나 네가 바라는 대로 움직이진 않겠지만, 편견 없이 네 얘기를 들어줄 것이다. 트롤이여, 이제 너는 어둠사냥꾼이다.” 말을 마치고 로아는 사라졌다.







* * * * *



볼진과 잘라제인은 울창한 풀숲을 거닐었다.



“미래는,” 볼진이 입을 열었다. “정해진 게 아니야. 우리는 놀이판의 말이 아니라고. 내가 무언가를 죽인다면, 내 선택에 의해 죽이는 거야.”



“맞아, 친구.” 잘라제인이 대답했다. “나는 영혼의 여행을 하면서 모든 걸 깨달았어. 우리는 길을 보았지만, 모두 확실한 건 아냐. 가능성일 뿐이지. 누군가 강해야 할 때 약해진다면, 다른 트롤이 나서면 될 거야. 그러면 그 약한 트롤은…” 그는 볼진에게서 눈길을 돌렸다. “강한 트롤 이야기의 악당이 되는 거지.”



“잘라제인, 그러다가 약한 트롤이 다시 강해지면?”



“모르겠어, 친구. 어쩌면 둘 다 위대한 지도자가 되겠지. 어쩌면 친구가 될 수도 있고, 어쩌면 강한 트롤이 악당이 될 수도 있겠지.”



“잘라제인, 우린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우리는 친구고 아직 배우는 중이야. 너하고 나는 인내하고, 진실하고, 맹렬해야 해.”



“그래,” 잘라제인이 약간의 희망을 안고 말했다. “우린 방법을 찾아낼 거야, 볼진.”





* * * * *






볼진과 잘라제인은 풀숲을 헤치고 재빨리 첫 번째 고향에서 벗어났다. 검은창 트롤의 땅이 가까이 있음을 알려 주는, 친숙한 모습의 표지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난 며칠 간의 환영과 계시가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볼진은 좌절감을 느끼며 자세한 내용을 기억해내려 했지만, 첫 번째 고향에서 한 걸음씩 멀어지면서 기억 또한 조금씩 사라졌다. 어쩌면 그게 바로 로아가 바란 것일 수도 있다.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한 그저 막연한 느낌 정도. 남은 것이라곤 몇 개의 단어뿐이었다. 인내, 진실, 맹렬함.



볼진과 잘라제인은 이제 달라졌다. 그들은 자신감 있게 움직였고 끊임없이 위험을 살폈다. 둘은 첫 번째 고향에서 변했다. 새끼의 모습으로 들어가서 포식자가 되어 나왔다. 그들은 위협적이고, 당당하고, 강력했다. 그들은 검은창 트롤 부족의 일원이었다.



마을이 가까워지면서 그들은 뜻밖의 흔적들을 발견했다. 짓밟힌 나뭇잎, 피 얼룩, 연기 냄새.



볼진의 모든 감각이 무언가 변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섬의 기본적인 생활 방식 일부가 영원히 바뀌어버린 듯했다.



볼진이 손짓하자 잘라제인은 바로 멈춰 섰다. 그들은 검은창 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오솔길에 서 있었다. 아직 마을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들려오는 소리부터가 이상했다. 볼진은 일꾼들이 나무를 자르고 망치질하는 소리를 들었다.



볼진은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며 로아의 음성을 들었다. 그들의 속삭임은 아직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곧 배우게 되리라.



“아무래도 마을이 습격당한 것 같아.” 볼진은 흥분한 로아의 전언을 알아들으려고 애쓰며 잘라제인에게 말했다.



잘라제인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에게는 이제 자신만의 방식이 있었고, 서로 다른 관점이 둘을 가르고 있었다.



둘은 무기를 꺼내 들고 다시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수풀을 지나 검은창 마을에 도착했다. 오두막 여러 채가 쓰러져 있고 잔해가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마을 가장자리에 시체가 깔끔하게 줄 맞춰져 놓여 있었다. 트롤들이 죽은 자 사이를 누비며 그들이 편히 안식에 들도록 자세를 고쳐 주고 있었다. 시체 곁에 무릎 꿇고 앉아 흐느끼는 여자와 아이들이 여기저기서 보였다. 사제 하나가 눈을 감고 앞뒤로 몸을 흔들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살아 있건 죽었건, 거기 있는 트롤은 모두 검은창 부족이었다.



볼진과 잘라제인은 마을 중앙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곳의 파괴 흔적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둘은 많은 검은창 트롤을 지나쳤지만, 모두 볼진과 잘라제인을 알아볼 겨를도 없이 각자의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둘은 호수 근처에서 배를 만들고 있는 검은창 트롤들을 보았다. 많은 배를… 조직적인 움직임은 볼진이 기억하는 느긋한 섬 생활과는 아주 거리가 멀었다.



볼진의 심장이 더욱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의 동족은 정복당한 건 아니었지만 볼진이 떠나있던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완전히 변해 있었다.



볼진과 잘라제인은 마을회관에 멈춰 섰고, 둘은 소란한 움직임 속에 유일하게 가만히 서 있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둘을 지나치는 몇몇 트롤들은 경계하는 듯한, 혼란스러운 듯한 눈빛을 보냈다.



로아가 시끄럽게 외치기 시작했다. 볼진만이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누군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다. 주위를 둘러보자 트롤 하나가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볼진과 잘라제인은 뒤를 돌아 부족의 최고 의술사인 늙은 가드린을 마주 봤다.



“얘들아,” 가드린이 말했다. “대체 어디 갔었던 거냐? 죽은 줄 알았단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잘라제인이 되물었다.”저희는 일주일 동안 밀림에 있었어요.”



“일주일? 볼진, 잘라제인… 너희는 석 달 동안 떠나 있었단다. 그동안 많은 일이 일어났지. 바다 건너에서 이상한 녹색 생명체가 나타나서는…”



“오크군요.” 볼진이 말했다.



“그래, 맞다.” 가드린은 놀라서 대답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다시 말을 이었다. “볼진, 너희 아버지가 바다 마녀와 싸우셨는데…”



“저 세상으로 가셨군요. 아버지는 이제 브원삼디와 함께 계십니다, 장로님. 전 알아요.” 말이 입술을 떠남과 동시에 볼진은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다. 그의 아버지가 이제 검은창 부족과 함께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적어도 트롤로서는 말이다.



“우린 오크를 따라 바다를 건널 거다.” 가드린이 계속했다. “바다 마녀가 너무 강력해서 우리는 여기 남아 있을 수 없다. 너희 아버지도 우리가 떠나야 한다고 하셨지. 그래도 시간이 좀 걸릴 거다. 준비해야 하니까 말이야.”



“알겠어요.” 볼진이 갑자기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피난을 책임지죠.”



“내가 도와주지.” 잘라제인이 웃으며 말했다.



볼진은 친구를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가장 현명한 방법은 잘라제인을 먼저 보내서 준비시키는 것이었다. 잘라제인은 볼진이 가장 신뢰하는 친구였고 맡은 일을 완벽하게 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러기엔 왠지 마음 한구석이 꺼림칙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볼진은 지금부터는 잘라제인을 항상 곁에 두어야 한다고 느꼈다.



그들은 서로 도울 것이다. 둘이 함께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 둘은 진실하고, 맹렬하며, 인내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