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란데는 한숨을 쉬고 모르디스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대의 용기와 신념 덕분에 소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모르디스. 정말 고마워요. 비극이 닥친 이래 본토 소식을 듣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더는 그대를 붙잡아 두지 않겠어요. 일단 쉬세요."



정찰병은 끄덕이고 피곤한 발걸음으로 걸어나갔다.



말퓨리온은 아내에게 몸을 돌렸다. 나이를 알 수 없는 아름다운 얼굴에 걱정, 공포, 그리고 함께한 오랜 세월 덕에 겨우 눈치챌 수 있게 된 결연한 투지가 서려 있었다.



"루테란엔 다섯 명의 희생자가 있었어요." 그녀는 말했다. "난 아무도 살리지 못했어요."



"티란데..." 말퓨리온이 자신의 두 손으로 그녀의 손을 따뜻하게 감쌌다.



"난 그 애에게 가봐야 해요, 말. 샨드리스는 내게 딸이나 마찬가지라고요." 그녀는 말을 멈췄다. "어쩌면 앞으로도 내게 유일한 딸일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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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자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별로 마음에 안 드는 꿈을 꾸는 듯 꾹 다문 입만 빼면 이 나이트 엘프의 표정은 매우 평온했다. 최근 본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몸도 온전했고, 전체적으로 상처가 없었다. 티란데 위스퍼윈드는 시체 옆에 무릎을 꿇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죽은 여자의 머리카락에는 피투성이 해초가 엉켜 있었고, 바다 냄새와 썩는 냄새가 풍겨왔다. 죽은 지 며칠이 지난 것이다. 아마도 대격변의 첫 번째 희생자, 홍수에 휩쓸린 이들 중 하나이리라. 이젠 어느 엘룬의 여사제도 그녀를 살릴 수 없었다.



"티란데 님!" 가장 가까운 이들 중 하나인 머렌드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대여사제는 머리를 홱 쳐들었다. 루테란 마을 바닷가를 찾다 보니 하얀 로브를 입고 흐느끼는 앳된 여사제를 머렌드가 달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면서, 티란데는 두 여사제가 왜 그러고 있는지 알았다. 한 나이트 엘프 소녀의 뒤틀린 시체가 그들 앞에 있었다.



'얘 동생이래요...' 머렌드는 비탄에 빠진 여사제를 가리키며 입을 벙긋거렸다. 티란데는 끄덕이고 데려가라고 손짓했다. 두 여사제가 사라지자 티란데는 시체로 눈길을 돌렸다. 희망이 없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팔다리가 끔찍한 각도로 뒤틀리고, 피를 얼마나 흘렸는지 상처는 하얗게 말라붙어 있었다. 하지만 나이트 엘프는 죽은 동족을 외면하지 않는다. 이 시체도 깨끗이 씻기고, 상처를 감추고, 부러진 부분도 제 모양으로 이어 붙인 후 대지로 돌려보낼 터였다.



티란데는 쪼그리고 앉아 소녀의 얼굴에서 진흙을 닦아내며 달의 여신에게 부드럽게 기도를 올렸다. 소녀의 영혼을 인도해 달라고, 비탄에 빠진 그녀의 언니를 보살펴 달라고. 모래가 쓸려나가자 연보랏빛 피부가 드러나고 짙은 푸른색 머리카락이 물결쳤다. 아몬드 형태를 한 눈은 아직도 크게 열려, 구름에 뒤덮인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수천 년 전에 처음 본 얼굴을 많이 닮아 있었다. 티란데는 솟구치는 눈물을 참으려 눈을 감았다.



샨드리스... 소식이라도 듣고 싶구나...



* * * * *




"어디까지 갔다 왔나, 모르디스?" 말퓨리온 스톰레이지가 물으며 뜨거운 사과주를 건넸다. 다른 나이트 엘프는 감사히 잔을 받아들고, 뜨거운 음료를 들이마시며 오한을 억눌렀다. 정찰 임무를 마치고 막 돌아온 터라 뼛속까지 젖었지만, 찾아낸 걸 보고하는 게 휴식보다 중요했다. 두 드루이드는 세나리온 자치령 꼭대기 방에서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바람이 너무 매서웠습니다. 마에스트라 주둔지까지밖에 못 갔지만, 거기 가니 아스트라나르와 페랄라스에서 보고가 들어와 있더군요." 정찰병은 방 안의 나무 의자에 걸터앉아, 창 밖에서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초조한 기색으로 응시했다.



"아스트라나르가 아직 건재한가?" 말퓨리온의 목소리가 안도감에 높아졌다. 며칠 동안이나 드루이드들을 조직해 정찰을 보냈지만, 그중 반은 안간힘을 써도 본토에 닿지 못했다. 모두 소식에 굶주려 있었고, 많은 이가 최악의 사태를 우려했다.



"예. 나이젤의 야영지도 살아남았습니다. 하지만 해변의 마을들은 그렇게 운이 좋지 못했습니다."



"무슨 말인가?"



고화질 파일 다운로드 "어둠해안에는 갈 수가 없습니다. 거기로 간 드루이드 중 누구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모르디스의 목소리가 슬픔으로 갈라졌다. 실종자 중에는 그의 친구들도 있었다. "강풍에 휩쓸리지 않도록 그곳을 빙 돌아 비행해야 했습니다."



"페더문 요새는 어찌 되었나?" 말퓨리온이 물었다. 그 순간, 티란데의 호리호리한 형체가 방문에 나타났다.



"페더문이요?" 모르디스는 이야기를 계속해도 되는지 알 수 없어 머뭇거리며 대드루이드의 눈치를 살폈다." 어느 정찰병도 페더문 요새의 나이트 엘프와 접촉하지 못했습니다. 멀리서 봤을 뿐이죠. 요동치는 바다와... 나가를요." 티란데가 다가오는 것을 눈치챈 모르디스의 목소리가 속삭임에 가깝게 낮아졌다. "… 수백 마리의 나가 말입니다." 뱀을 닮은 그 끔찍한 생명체들은 과거에도 종종 페더문 요새를 공격했지만, 대규모 공격은 지금껏 보고된 바가 없었다.



"섬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답니까? 생존자가 하나도 없나요?" 대여사제가 날카롭게 물었다.



정찰병은 고개를 흔들었다. "없습니다." 티란데의 표정은 참담했다. 모르디스는 그녀의 가슴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하늘이 워낙 어둡고 폭우가 쏟아졌으니까요. 사령관이 과연..."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신중하게 단어를 골랐다. "그러니까, 페더문 요새의 파수꾼들은 능력 있는 이들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대여사제님."



티란데는 한숨을 쉬고 모르디스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대의 용기와 신념 덕분에 소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모르디스. 정말 고마워요. 비극이 닥친 이래 본토 소식을 듣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더는 그대를 붙잡아 두지 않겠어요. 일단 쉬세요."



정찰병은 끄덕이고 피곤한 발걸음으로 걸어나갔다.



말퓨리온은 아내에게 몸을 돌렸다. 나이를 알 수 없는 아름다운 얼굴에 걱정, 공포, 그리고 함께한 오랜 세월 덕에 겨우 눈치챌 수 있게 된 결연한 투지가 서려 있었다.



"루테란엔 다섯 명의 희생자가 있었어요." 그녀는 말했다. "난 아무도 살리지 못했어요."



"티란데..." 말퓨리온이 자신의 두 손으로 그녀의 손을 따뜻하게 감쌌다.



"난 그 애에게 가봐야 해요, 말. 샨드리스는 내게 딸이나 마찬가지라고요." 그녀는 말을 멈췄다. "어쩌면 앞으로도 내게 유일한 딸일 거고요."



말 속에 쓰라림이 배어 있었다. 한때 모든 나이트 엘프는 무한한 미래를 가졌었다. 하지만 세계수 놀드랏실의 축복을 희생하면서 그 불멸의 꿈도 끝나고 말았다. 나이트 엘프가 전과 달리 필멸의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게 실제로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는 아직 뚜렷하지 않았지만, 많은 이가 마음 한구석에서 조용히 공포를 느꼈다. 별의 아이들은 이제 그들의 이름에 담긴 의미와 달리, 나이를 먹지 않는 존재가 아니었다.



"이해하오. 하지만 왜 지금이오? 요새의 운명은 이미 결정 났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말퓨리온이 물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미간에는 주름이 잡혀 있었다.



" 이 모든 일이 시작될 때부터 한시도 샨드리스를 잊어본 적이 없어요. 어떻게 아는지는 말할 수 없지만, 살아 있단 건 확신해요."



"그럼, 환영을 본 거요?" 말퓨리온은 과거에 달의 여신 엘룬이 티란데에게 그런 능력을 부여했음을 알고 있었다.



"아니요. 이번엔 아니에요. 요즘엔 엘룬께서 많은 일을 보여주지 않으셨어요. 내 확신은... 어머니가 자기 아이가 위험에 처했다는 걸 느끼는, 그런 감각에 가까워요." 말퓨리온의 회의적인 눈길에 티란데는 잠시 말을 멈췄다. "모든 인연이 피로 연결된 건 아니에요, 말."



"하지만 우리는 이 비극이 닥친 이래, 주민들에게 텔드랏실에 머무르라고 하지 않았소? 죽을지도 모르니 본토의 친지들을 찾지 말라고 말이오."



"내가 텔드랏실을 나가면 죽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녀의 눈에 얼음장처럼 차가운 빛이 스쳤다.



"아니오." 그는 인정했다. 대여사제는 엘룬 여신의 총애를 받는 존재가 아니더라도 훌륭한 전사였다. "하지만 나라면 이런 끔찍한 사태를 맞아 다르나서스를 비우진 않을 거요. 내가 예전엔 너무 자주 자리를 비웠다는 걸 알고 있소... 그게 언제나 맘에 걸리오. 내가 직접 보지 못해 아쉬운 순간들이 있소. 텔드랏실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나, 내 동생이 아웃랜드에서 죽음을 맞았을 때처럼..." 말퓨리온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과거를 바꿀 수는 없는 법.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요." '그리고 당신이 내 옆에 있어주면 좋겠소.' 티란데의 표정에 말퓨리온은 이 말을 덧붙이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일리단의 운명은 참으로 불운했지요, 말. 우리 모두 어쩔 도리가 없었어요. 광기가 그를 집어삼켰고, 결국 예전의 그는 한 조각도 남지 않았죠." 살게라스가 수천 년 전 그의 눈을 불태웠을 때... 거의 괴물에 가깝던 일리단의 모습을 티란데는 아직도 기억했다. "살릴 수 있는 이를 살리려고 애써야죠... 그러지 않으면 두고두고 자신의 선택을 후회할 테니."



티란데는 몸을 돌려 걸어나갔다. 상아색 로브가 성난 폭풍처럼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사령관 샨드리스 페더문은 빗물에 젖은 여관 들보 위에서 중심을 잡았다. 파수꾼 십여 명이 그녀의 주변에 앉아 있었다. 모두 상처입고 지쳐 있었지만, 항복할 생각은 그 누구에게도 없었다. 샨드리스는 익숙한 수신호를 취하며 손을 올렸다.



"발사!" 궁수들은 아래쪽에 들끓는 나가를 향해 화살을 날렸다. 그들은 지쳐 있었다. 화살의 반수 정도만이 목표에 명중했다. 샨드리스의 화살은 나가 세이렌의 미간을 정확히 꿰뚫었다. 뱀 같은 세이렌의 몸뚱이는 몇 초 동안 격렬하게 뒤틀리다가 파도 속으로 사라졌지만, 수십 마리의 나가가 죽은 세이렌의 자리를 대신했다. 물속은 나가의 영역이었고, 나가 증원군은 샨드리스와 그녀의 파수꾼들이 나가를 죽이는 속도보다 빨리 충원됐다.



"조심해라!" 요동치는 바다에서 파도가 높이 솟아오르는 것을 본 샨드리스가 외쳤다. 파도는 약해질 대로 약해진 여관 정면에 부딪히며 사령관과 그녀의 적을 흠뻑 적셨다. 샨드리스 왼쪽에 있던 파수꾼인 넬라라가 그 충격에 지붕을 반쯤 미끄러져 내려갔지만, 샨드리스가 그녀를 쫓아가 팔을 붙잡았다. 힘은 조금 들었지만 결국 사령관은 넬라라를 끌어올렸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여관 1층은 급속도로 물에 잠기고 있었다.



"생존자를 모아서 더 높은 곳으로 이동한다." 샨드리스가 명령했다. "이 건물은 언제라도 무너져내릴 수 있어. 넬라라, 사람들을 탑으로 데려가라! 내 왼쪽에 있는 이들은 모두 넬라라를 따라라." 샨드리스는 파수꾼 반에게 손짓했다. "그쪽이 살아남을 가능성이 크겠지." 넬라라는 끄덕이고는 지붕 가장자리로 조금씩 이동해 아래에 있는 발코니에 뛰어내렸다. 다른 파수꾼들도 그녀를 따랐다. 그들의 발걸음에서 느껴지는 피로에 샨드리스는 문득 움찔했다.



"남은 이들은 들어라. 우리는 이동하는 이들에게 적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도록 엄청난 혼란을 일으켜야 한다. 아쉬 카라스!" 사령관은 외치고는 활을 들어 엄청난 기세로 화살을 쏘아댔다. 자신들이 위기에 처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집중력이 조금만 흐트러져도 피신하는 이들이 죽을 수 있었다.



다행히도 남은 엘프들은 잘 따라주었다. 화살이 물속에 마구 쏟아지자 나가 무리가 흩어지며 분노에 차 쉿쉿 소리를 냈다. 침략자의 공세가 약해지고, 심지어는 퇴각하는 듯했다. 몇 분 후에는 나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파도 아래 검은 그림자만이 보일 뿐이었다. 샨드리스는 남몰래 여관 뒤쪽을 흘끗 보았다. 섬 대부분이 물에 잠겼지만, 파수꾼과 민간인들은 무사히 탑으로 가고 있었다. 하지만 다시 바다를 본 순간, 샨드리스는 나가의 모습이 왜 보이지 않는지 깨달았다.



나가 병사들이 열 마리는 한꺼번에 숨을 만큼 큰 조개껍데기를 가져온 것이다. 나가는 그것을 방패로 이용해 화살을 막으며 느릿느릿 전진하고 있었다. 샨드리스는 파수꾼들에게 사격을 멈추라고 신호했다. "먼저 간 이들과 합류해라. 여기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 나이트 엘프들은 의아해하는 눈빛을 주고받으며 머뭇머뭇 움직이기 시작했다. "넬라라에게 가라. 당장!" 샨드리스가 외쳤다.



대답을 듣지도 않고 샨드리스는 지붕에서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나가는 새로운 목표물에 힘을 얻은 듯 서둘러 그녀에게 다가왔다. 샨드리스의 뇌리에 그들의 길고 배배 꼬인 과거가 떠올랐다. 아즈샤라 여왕을 따르는 귀족, 명가의 일원들은 멍청하게도 아제로스에 불타는 군단을 불러왔다. 마구 날뛰던 악마들은 나이트 엘프와 다른 종족들이 조직한 군대에 패배했다. 그 여파로 벌어진 참사 속에서, 남아 있던 명가의 일원들은 바다 밑바닥으로 가라앉아 끔찍한 돌연변이를 일으켰다... 그렇게 탄생한 존재가 나가였다.



샨드리스는 그때 어렸지만, 그래도 티란데 옆에서 직접 싸웠다. 나가는 결국 자기 선조들의 영광을 손에 넣지 못했지만, 그래도 샨드리스는 생각만 해도 이가 갈릴 만큼 그들을 미워했다. 그녀는 때가 올 때까지 계속 기다렸다. 눈을 감고 엘룬에게 바치는 고대 기도문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믿음과 외경에 차 있었다. 달의 여신을 섬기는 여사제로서 공부하던 시절에 티란데에게 배운 대로. 나가 무리가 나이트 엘프 사령관을 둘러쌌다. 신성한 기도를 끝내면서, 그녀는 나가 사이에 기쁨에 찬 낮은 웃음소리가 퍼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엘룬은 빠르게 응답해 주었다. 엄청난 에너지가 샨드리스 주변의 나가를 쓰러뜨렸다. 그들의 얼굴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나가의 요란한 비명이 잦아들자, 샨드리스는 음울한 만족감을 느끼며 시체를 조사했다.



"너흰 항상 믿음이 부족했지. 명가 쓰레기들."



위험한 방법이었지만, 제대로 먹혀들었다. 비록 자신의 스승인 티란데에 비하면 자신은 반만큼도 강하지 못했지만, 샨드리스는 신전에서 보낸 어린 시절을 소중하게 생각했다. 그곳에서의 수행 덕분에 그녀는 다른 파수꾼보다 훨씬 큰 힘을 얻을 수 있었고, 그 힘은 활이나 화살, 글레이브 등의 무기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확실한 대안이 되어 주었다. 하지만 기도는 힘이 빠지는 일이었다. 기도문을 읊을 때에는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파도에 맞서 안간힘을 쓰며 샨드리스는 해안으로 헤엄쳐 갔다. 뭍에 발이 닿자 그녀는 피신한 민간인과 파수꾼이 있는 쪽으로 물을 헤치며 느릿느릿 나아갔다. 뭔가 잘못됐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봤던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다가가면서 샨드리스는 네랄라와 동료 파수꾼들이 그들보다 훨씬 많은 미르미돈과 마주 보고 있음을 알았다. 페더문의 거주민들이 겁에 질리고 절망에 빠진 채 피신처를 찾아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었다. 하나하나가 샨드리스에게는 자신의 심장만큼이나 익숙하고 소중한 이들이었다.



조사원인 퀸티스 존스파이어가 성급히 앞으로 달려나왔다. 그가 숨을 곳을 찾아 내달리자, 다가오는 미르미돈 무리와 파수꾼 사이에 유지되던 팽팽한 긴장이 불안하게 깨져버렸다. 샨드리스는 판드랄 스태그헬름에 대해 퀸티스와 나눈 대화를 기억했다. 둘 다 티란데가 스태그헬름의 이상한 행동에 대해 더 일찍 캐물어 주길 바랐지만, 대여사제는 언제나 세나리온 의회는 그녀의 권한 밖이라고만 얘기할 뿐이었다. 하지만 퀸티스는 스태그헬름의 마음속에 자라나는 어둠을 남들보다 빨리 알아챌 만큼 눈치가 빨랐고, 페더문 요새에서 샨드리스의 보호를 받으면 그 대드루이드에게서 안전할 것임을 알 정도로 똑똑했다.



하지만 퀸티스의 영리함은 지금 그를 구해줄 수 없었다. 미르미돈의 지도자들은 앞으로 달려나오는 나이트 엘프를 보고는 무기를 들어 올렸다. 샨드리스는 퀸티스에게 피하라고 소리 질렀지만, 그는 자기 등에 나가의 삼지창이 꽂히고 나서야 그녀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무력함과 불안감이 담긴 눈으로 그녀를 잠시 바라보고는, 그대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피로 붉게 물든 물은 서서히 맑아졌다.



* * * * *




어차피 먹구름에 가려 노을빛이 보이지 않는데도 다르나서스의 주민들은 예전과 비슷한 시각에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끔찍한 재난 속에서도 예전 습관을 유지함으로써 한 가닥 위안을 얻었다. 어떤 이들에게 이 습관은 홀로 슬픔에 잠길 시간을 버는 핑계이기도 했다. 티란데에게 이 시간은 탈출할 기회였다.



대여사제는 주위를 휙 둘러보고는 신전을 몰래 빠져나와 다르나서스의 위풍당당한 건물들 뒤로 뚫린 조용한 길에 들어섰다. 멀리 돌아가는 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오늘 밤만은 누구의 눈에도 띄고 싶지 않았다. 모퉁이를 돌아, 그녀는 남편과 함께 쓰는 소박한 숙소에 도착했다.



티란데가 문을 열자 빛줄기가 어두운 마룻바닥 위를 가로질렀다.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마도 말퓨리온은 아직 세나리온 자치령에 있을 터였다. 그녀는 앞으로의 위험한 여정에 대비해 짐을 싸기 시작했다. 여사제의 로브를 파수꾼의 제복 같은 판금 갑옷으로 갈아입는 데에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전에 걸치고 있던 것 중 남은 거라곤 그녀의 지위를 상징하는 초승달 모양의 머리장식뿐이었다.



티란데는 재빨리 커다란 나무줄기로 다가가 활과 화살통을 내리고 아름답게 세공된 초승달 글레이브를 꺼냈다. 덮개를 풀어내자 희미한 불빛이 세 개의 날을 훑고 지나갔다. 그녀는 무기에 담긴 축복이 여느 때처럼 강력함을 느꼈다. 모르디스의 보고대로라면, 이 무기는 물론 이용할 수 있는 건 모두 이용해야 목적을 이룰 터였다.



떠나려는 순간, 익숙한 물건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정면의 선반에 얹힌 커다란 화분이었다. 하트 모양의 잎사귀가 우아한 나뭇가지를 감싸고 있었다. 알로렐, 혹은 "연인의 잎사귀"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식물이었다. 수천 년 전에는 흔했지만, 지금은 칼림도어 전역에서 서서히 사라지고 있는 종이었다.



샨드리스가 어렵게 이 식물을 구해, 결혼식 날 티란데와 말퓨리온에게 선물로 주었다. 티란데의 양녀는 기쁨에 차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모든 하객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고대의, 하지만 근거 없는 전설에 따르면 알로렐은 완벽한 사랑을 나누는 두 사람을 위해서만 꽃을 피운다고. 샨드리스는 이 전설이 사실인지 시험하는 데 말퓨리온과 그의 아내가 완벽한 후보라고 생각했다. 다른 이들도 믿어 의심치 않는다며 환호하고 축배를 들었다. 하지만 알로렐에는 아직 봉오리라고 할만한 것도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오직 샨드리스만이 줄 법한 선물이었다. 그리고 티란데는 알로렐이 그녀의 마지막 선물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당신이 여기서 죽게 내버려두진 않겠습니다. 절대로." 샨드리스는 베스티아 문스피어의 손목을 더욱 꽉 잡았지만, 여사제는 더 격렬하게 흐느낄 뿐이었다.



"라트로... 라트로가 뒤처졌어요. 오, 엘룬이여, 그이를 지켜주소서. 라트로가 없어졌어요. 라트로가 없어졌어요..." 흐느끼는 소리가 커지자, 샨드리는 몇몇 피난민이 불안한 듯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눈치챘다. 전쟁터가 된 이 섬에서 그들은 모두 베스티아가 느끼는 것 같은 강렬한 감정과 싸워 왔었다.



"당신 남편은 당신이 계속 가길 바랄 겁니다, 베스티아. 그를 위해서라도 계속 가야 해요. 오늘 자신의 목숨을 희생한 모든 이를 위해서요. 제발." 샨드리스는 주저하는 나이트 엘프를 애원하는 눈길로 쳐다봤다. 뿌리가 약해진 탓에 나무 탑이 발아래에서 흔들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참으로 다행히도, 베스티아는 눈물을 삼키며 샨드리스가 이끄는 대로 히포그리프에 올라탔다. 새를 닮은 그 생명체의 감청색 깃털은 비에 젖어 거의 검게 보였지만, 눈은 여전히 밝고 초롱초롱했다.



"본토로 데려가라. 바람 조심하고." 샨드리스는 히포그리프의 높은 지능에 감사함을 느끼며 말했다. 보통 새는 이렇게 사나운 바람을 뚫고 날 수 없었지만, 그녀 앞의 이 고귀한 생명체라면 성공할 수도 있었다.



베스티아를 태운 히포그리프가 두꺼운 구름 속으로 사라지자 넬라라가 경사진 복도를 뛰어 올라왔다. "사령관님! 아래쪽에 가보셔야겠습니다. 나가가 탑을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생존자를 본토로 데려가라, 넬라라. 히포그리프는 많으니 너와 다른 파수꾼들도 대부분 탈 수 있을 것이다. 되도록 빨리 탈라나르에 지원을 요청해라."



넬라라는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전 떠나지 않겠습니다. 아무리 사령관님이라도 혼자서 나가를 전부 물리칠 수는..."



"넌 임무를 다했다, 파수꾼이여." 샨드리스가 딱딱하게 말했다. "네가 받은 명령은 퇴각하라는 것이다."



"다시 생각해봐 주시면 안 될까요...?" 넬라라가 고개를 떨어뜨렸고, 샨드리스는 눈물 한 방울이 빗물에 섞여 그녀의 뺨을 흘러내리는 걸 언뜻 본 것 같았다.



"언젠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누군가 내 목숨을 구해줬지." 사령관이 천천히 말했다. "다른 이에게 그런 선물을 줄 수 있다면 내겐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일 거야." 그녀는 전투의 소음이 들려오는 곳으로 내려가며 말했다. "안데토라스 에씰, 넬라라."



"목적지에 도착하면 바로 히포그리프를 돌려보내겠습니다!" 넬라라가 외쳤다. "탑 꼭대기에서 기다리세요!"



젊은 파수꾼에게 그건 가망 없는 일이라는 걸 숨기자니 힘들었지만, 잠시 후 남은 히포그리프를 불러모으는 넬라라의 목소리를 듣고 샨드리스는 그녀를 그냥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가 내린 마지막 명령대로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샨드리스는 탑 아래층에서 벌어진 끔찍한 전투에 몸을 던졌다. 좁은 건물이 자연스럽게 병목 역할을 해 주었고, 지금까지는 소수의 파수꾼이 건물을 잘 방어하고 있었다. 그들은 입구를 막은 방벽 뒤에 진을 치고, 몰려드는 나가를 향해 화살을 쏘아댔다.



샨드리스는 자신의 활을 집어들고 몸에 익은 일정한 속도로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교대 시간이다. 모두 제일 윗방으로 올라가라. 히포그리프가 대기 중이다."



나이트 엘프들은 너무 지치고 상처 입어 그녀의 명령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일부 파수꾼이 뻣뻣하게 굳어 땅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자 샨드리스는 가슴이 아팠다. 하나씩 하나씩, 살아남은 나이트 엘프는 가느다란 핏자국을 남기며 위로 올라갔다. 그러나 부하들이 떠나는 것을 볼수록 샨드리스에게는 힘이 샘솟았다. 그녀의 화살은 이제 목숨을 구하고 있었다. 나가를 하나 죽일수록 페더문 요새의 생존자들이 도망칠 시간을 몇 초 더 벌 수 있었다.



하지만 탑을 오래 지켜내지는 못할 것임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나가의 공격에 방벽은 조금씩 약해지고 있었다. 한 세이렌이 샨드리스가 있는 방향으로 주문을 외자 불빛이 번쩍였다. 방벽이 산산조각났고 사령관은 칼도레이의 맹세를 읊조리며 팔을 들어 머리를 보호했다. 나무조각이 온 방 안에 흩어졌다. 팔을 내리자, 눈앞에 위풍당당한 미르미돈 둘을 거느린 세이렌이 서 있었다. 그녀의 지위를 보여주는 고급스러운 의복이 낮은 불빛 아래 번쩍였다. 점점 더 많은 나가가 그들 뒤에 몰려들었다.



"네가 사령관이로군. 난 여군주 스제나스트라 님의 부하이다." 세이렌이 말했다. "만나서 반갑구나."



샨드리스는 활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정말 그럴지 두고 보자고."



나가 지도자는 가소롭다는 듯 샨드리스를 훑어봤다. 명가의 일원들 특유의 젠체하는 태도가 세이렌의 비늘 하나하나, 가시 하나하나에 배어 있음을 깨달은 샨드리스의 몸이 오싹했다. "계속 이렇게 싸울 필요 없잖아? 여군주께서 페더문의 평화를 대가로 네게 제안을 하나 해도 된다고 하셨다."



"어찌나 너그러우신지 몸둘 바를 모르겠군. 원하는 게 뭐냐?"



"너의 주인, 가짜 여왕 티란데의 목을 가져와라."



달래는 듯한 미소를 띤 나가의 얼굴을 향해 샨드리스는 화살을 날렸다. 나가는 목을 붙잡으며 경련을 일으켰지만, 비명 대신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숨이 막힌 세이렌은 땅바닥에 쓰러졌다.



샨드리스는 경비병을 차갑게 쳐다보았다. "저걸 네 여주인에게 가져가라."



다음 순간, 나가 무리가 샨드리스를 덮쳤다. 그녀는 글레이브를 휘두르며, 처음 덤벼든 두 미르미돈을 손쉽게 처치했다. 하지만 삼지창에 팔을 찔린 샨드리스는 무기를 놓치고 말았다. 부상을 입은 그녀가 비틀거리며 뒷걸음치자 다른 칼날이 그녀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사방에서 나가가 무서운 기세로 무기를 휘둘렀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방어 수단은 하나뿐이었다.



샨드리스는 엘룬을 부르며 마지막 남은 힘을 기도에 실었다. 마음속의 기도는 다 녹아내린 초에 켜진 불처럼 흔들리다가 종내 끊기고 말았다.



"믿음이 모든 것의 시작이다." 엘룬의 자매로서 처음 배우고 가슴에 새긴 가르침이었다. 티란데는 소녀들을 찬찬히 살펴보던 대여사제 데자나의 엄격한 태도를 떠올렸다. 단지 자신에게 마법 소질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엘룬의 자매들에 들어온 성의 없는 학생을 빨리 찾아서 내보내는 것이 그녀의 목적이었다. "비전 마력이 있긴 하되 강하지는 않은 자도 마법사가 될 수 있다. 실과 바늘을 다룰 줄 알지만 엄청난 실력은 아닌 자도 재봉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믿음이 있긴 하되 강하지는 않다면, 그자는 절대로 사제가 될 수 없다."



히포그리프의 등에 붙어 있으려 안간힘을 쓰는 이 순간, 왜 그런 말들이 이렇게 선명하게 떠오르는지 이상했다. 사나운 바람이 불어닥치고, 짙은 청색 머리카락은 비에 젖어 어깨에 딱 달라붙었다. 하지만 티란데의 마음 한 조각은 여전히 수라마르에 있는 엘룬의 신전, 데자나의 날카로운 눈 앞에 있었다.



어째서 이 길을 선택했지, 티란데 위스퍼윈드?



"왜냐하면," 티란데는 말했었다. "다른 이들을 지키고 싶으니까요. 특히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이요." 그 말을 들은 대여사제는 오랫동안 티란데를 쳐다보았다. 데자나가 실제로 어떻게 생각했는지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티란데는 그녀가 자신을 후계자로 임명하게 된 계기는 진심이 담긴 그 짧은 문장에 있다고 생각해 왔다.



전임자인 데자나가 자신을 대여사제로 지명한 게 옳은 일인지 티란데는 몇 번이나 속으로 되묻곤 했다. 지도자라는 짐이 없었다면 삶이 어떻게 달랐을까? 불타는 군단이 쳐들어왔을 때 일리단의 도움을 얻기 위해 감시자들을 죽여야만 했을까? 지도자가 아니었더라도, 사랑하는 이와 혼인하려고 몇 천 년을 기다려야 했을까? 고대의 전쟁 때 나이트 엘프를 이끄는 이가 더 경험 많은 이였다면, 동족이 조금은 덜 고통받았을까?



데자나가 옳았다. 믿음만이 티란데를 이끌어 주었다. 그리고 믿음이 지금 티란데를 가차 없는 폭풍 속으로 이끌고 있었다. 실체는 알 수 없지만 마음속에서 떨쳐버릴 수 없는 위험에서, 그녀가 아는 가장 능력 있는 사령관을 구해내기 위해. 게다가 티란데는 혼자였다. 티란데의 믿음은 굳건했지만, 어떤 말로도 말퓨리온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믿음은 드문 재능인 모양이었다.



히포그리프가 꽥꽥거렸다. 티란데는 히포그리프의 뿔 너머로 앞을 내다봤다. 눈앞에 페랄라스가 있었지만, 살도르 섬은 자욱한 안개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안개 속 어딘가에서 샨드리스가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그녀가 살아 있다고 믿어야 했다.



티란데는 히포그리프의 목을 살짝 건드리고는 그들이 착륙할 남쪽을 가리켰다. 세찬 바람 속에서는 가벼운 접촉으로 의사소통하는 게 훨씬 쉬웠고, 이 영리한 생명체는 언제나 전하고자 하는 바를 잘 알아차렸다. 히포그리프는 알아들었다는 듯 앞쪽으로 솟구치더니 날개를 활짝 펴 난기류에 대비했다. 그래도 강풍을 이기리란 쉽지 않았고, 이들은 철썩이는 바다에 거의 내동댕이쳐질 뻔했다. 티란데는 히포그리프가 균형을 잡는 걸 도우려고 안장 오른쪽 가장자리로 몸을 옮겨 무게 중심을 바꾸었다. 짧은 시간 동안 둘은 바람에 휘말린 나뭇잎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러자 갑자기 히포그리프가 몸을 기울이며 떨어지는가 싶더니 재빨리 방향을 바꾸어 해변으로 날았다.



티란데는 있는 힘껏 히포그리프에게 매달렸다. "휴, 무모한 짓이었지만 효과가 있었구나." 히포그리프는 자랑스러운 듯 가슴을 잔뜩 부풀리고는 페더문 요새 바로 바깥의 자그마한 마른 땅에 내려앉았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이렇게 같이 있는 게지. 가까이 있으렴." 티란데는 말하고 히포그리프에서 내려 조심조심 거주지로 다가갔다.



모르디스의 보고는 거짓이 아니었다. 페더문은 난장판이었다. 건물은 붕괴되어 물에 잠겨 있었다. 사방에 나가가 쫙 깔려서 잔해를 뒤지고, 지원군의 도착을 기다리는 듯 해변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비바람이 몰아쳐서인지 그들은 남쪽에서 다가오는 티란데를 눈치채지 못했다. 어쩌면 나이트 엘프 하나 정도야 안중에도 없는 것일지도 몰랐다.



나가의 공격 전에 샨드리스가 섬을 빠져나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시 스쳤지만, 티란데는 제대로 조사하지 않고는 만족할 수 없었다. 샨드리스를 걱정하는 마음이 티란데의 마음을 가득 채워 결국엔 루테란 해변에서 발견한 죽은 소녀에 대한 생각에 이르렀다. 티란데는 순찰 중인 나가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면서, 가장 가까운 건물로 조금씩 꾸준하게 이동했다. 전투가 두려운 건 아니었지만, 불필요한 교전을 피한다면 목표를 더 빨리 이룰 수 있을 터였다.



심하게 파손된 건물 안에 들어가자, 마룻바닥이 그녀의 발아래에서 삐걱이고 갈라진 지붕에서 빗물이 흘러내렸다. 주위를 둘러보던 티란데는 책장 옆에 연보라색 무엇인가가 조그맣게 드러난 것을 발견했다... 귀인가? 그녀는 자신이 너무 늦지 않았기를 빌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책장은 구석에 단단히 박혀 있었지만, 세차게 발길질을 한 후 대여사제는 마침내 책장을 옆으로 밀치고 그 아래의 몸을 발견했다. 몸을 굽혀 그녀는 건물 바닥에 고인 흙탕물에서 나이트 엘프를 건져냈다.



길게 땋은 그의 머리를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라트로니쿠스 문스피어. 페더문 요새에서 나가를 상대하는 최정예 전사 중 하나였다. 티란데는 그의 눈을 감기고 망자를 위한 기도를 중얼거렸다. 지난 며칠 사이에 그녀는 이 기도문을 외는 데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었다.



방에서 더 찾아낸 거라곤 나가에게 죽었음이 분명한 다른 파수꾼의 시체와, 물에 잠겨 못쓰게 되어 버린 보급품 정도였다. 건물을 나서는 순간, 나가 정찰병 무리가 모서리를 돌다가 그녀를 발견했다. 대여사제는 팔을 앞으로 쭉 뻗고 기도문을 외었다. 적은 공격을 시작하기도 하기 전에 하늘에서 쏟아지는 달빛 섬광을 맞고 힘없이 쓰러졌다. 티란데는 여관으로 달려가 그녀를 샨드리스와 다른 생존자들에게 안내할 흔적이 있는지 물 아래를 열심히 살폈다. 하지만 밀려들어온 물 때문에 바닥은 온통 진흙탕이었다.



그녀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티란데는 재빨리 글레이브를 들었다. 거대한 새가 그녀 위 하늘을 맴돌고 있었다. 그녀는 딱딱하게 굳어, 믿을 수 없다는 듯 새를 바라보았다. 폭풍까마귀가 급강하하자 어두운 깃털과 빛나는 눈이 뚜렷이 보였다. 땅에 내려앉은 새는 순식간에 사랑하는 이의 익숙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오." 그가 미소 지었다.



"말..." 티란데는 말퓨리온을 얼싸안았다. "결국은 와 줬군요."



"이제 하나가 되어 싸우는 거요. 우리의 친구 브롤 베어맨틀이 날 대신해 드루이드 정찰대를 조직하고 있소. 머렌드가 다르나서스에서 당신의 일을 돌보고 있고."



"고마워요, 내 사랑. 페더문 요새에 위기가 닥쳤어요. 우리의 도움이 필요해요. 생존자는 하나도 찾지 못했고, 이런 홍수 속에서는 흔적을 찾을 수도 없었어요."



말퓨리온이 끄덕였다. "그 부분은 내가 도울 수 있을 거요." 대드루이드는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 팔을 쭉 뻗었고, 손바닥을 황폐해진 대지로 향하고는 손을 쫙 폈다. 말퓨리온 주위에 세찬 바람이 몰려들어 거대한 회오리바람을 이루었다. 탁한 물이 잔물결을 일으키더니, 강한 회오리바람에 밀려 바다 쪽으로 빠져나갔다. 살도르 섬의 짓밟힌 땅이 모습을 드러냈고, 북동쪽의 거대한 나무 탑으로 가는 길에 널린 시체들이 보였다.



하지만 이 주문이 나가의 주의를 끌었다. 왜 물이 빠지는지 알아내려고 나가들이 사방에서 몰려왔다. 나이트 엘프를 발견한 나가가 소리를 지르자 더 많은 병사가 몰려들어 공격을 준비했다. 번쩍거리는 나가 무리 가운데에 나가 여마법사, 여군주 스제나스트라가 보였다. 주변에 명령을 내리는 스제나스트라의 모습에 티란데는 그녀가 이 군대의 지도자임을 알아차렸다.



"살도르는 이제 우리 것이다. 고귀하신 '여왕님'이 죽을 곳을 제발로 찾아왔군." 스제나스트라가 조롱했다.



"난 여왕 따위가 아니다." 티란데가 쏘아붙였다. "그리고 그런 호칭을 듣느니 차라리 죽고 말겠다. 여기 살던 칼도레이에게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네 동족은 영원히 잠들었다. 보지 못했더냐?" 스제나스트라가 여유로운 손짓으로 시체를 가리켰다. "원한다면 저들과 함께 잠들게 해주지. 네가 협조적으로 굴면 여군주 스잘라 님께서 기뻐하실 게다. 못 그러겠다면, 내가 직접 널 처리할 수밖에." 스제나스트라가 손짓하자, 미르미돈 장교들이 스르르 앞으로 나왔다.



티란데와 말퓨리온은 눈짓을 주고받았다.



"저 멍청한 것들은 패배한 기억은 곧잘 잊어버린다니까." 대여사제가 앙다문 잇새로 내뱉었다.



"그러면 우리가 상기시켜 줘야겠군." 말퓨리온이 말했다. 티란데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드루이드가 주문을 외자 머리 위에서 벼락이 번쩍거렸다. 섬 위의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이 더욱 짙어졌고, 나가들은 놀라서 고개를 쳐들었다. 스제나스트라는 쉿쉿거리는 나가 특유의 목소리로 계속해서 명령을 내렸고, 나가 군대는 한 쌍의 나이트 엘프를 향해 전진하기 시작했다.



말퓨리온은 태연하게 그들을 바라보며 에너지가 모이길 기다렸다. 거대한 폭풍이 형성되자 그는 뿔이 난 머리를 천천히 기울여 하늘을 보았고, 하늘은 나가 군대에게 아낌없는 분노를 쏟아부었다. 땅에 벼락이 내리꽂혔다... 벼락은 땅에 꽂히며 네 갈래로 갈라져 불운한 미르미돈 무리 사이를 헤집었다. 나가 군대가 혼란에 빠져 흩어지자, 티란데는 나가 여마법사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여군주 스제나스트라는 이미 도망가려고 하고 있었지만, 대여사제가 그녀 위로 엄청난 달빛 섬광을 쏟아냈다. 나가는 섬광이 몸을 꿰뚫자 경련을 일으키다가 땅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화려한 장신구가 진흙에 파묻혔다.



티란데는 탑으로 다가갔다. 안에서 막기라도 한 것처럼 출입구가 잔해로 막혀 있었다. 의연하게 글레이브를 휘둘러 티란데는 마침내 길을 뚫을 수 있었다.



피가 고여 번들거리는 바닥에 샨드리스 페더문이 누워 있었다.



상처 입은 엘프 곁으로 달려가는 티란데에게서 목 막힌 흐느낌이 새어나왔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비통함에 말을 제대로 잇기 어려웠다. "엘룬이여, 다른 건 전부 가져가시더라도, 이것만은 허락해 주십시오. 샨드리스를 살려 주십시오. 제발... 제 딸입니다. 제가 자길 살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이 아이가 절 살린 겁니다... 몇 번씩이나... 이 아이가 없었다면 제 삶은 공허했을 겁니다." 별똥별이 하늘을 가르듯, 반짝이는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말퓨리온이 달려와 티란데 뒤에 섰지만, 제정신을 잃은 티란데는 말퓨리온이 자기를 단단히 붙잡을 때까지 그를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단순한 행동이 그녀가 정신을 차리게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티란데는 말퓨리온이 자신에게 힘을 실어 주고 있음을 느꼈다. 둘은 함께 샨드리스를 치유하려고 애썼다.



둘은 오랫동안 숨죽이고 샨드리스를 지켜보았다. 문득 샨드리스의 속눈썹이 떨리더니, 그녀가 졸린 듯 눈을 떴다. 힘겹게 고개를 돌린 샨드리스는 자기 옆의 부연 형체... 익히 아는 이들의 형체에 초점을 맞추려 애썼다. "민다? 안다?" 그녀는 혼란에 빠져 눈썹을 찡그리고 힘없이 물었다.



티란데는 말이 없었다. 눈물 방울이 흘러내려 얼룩진 마룻바닥을 더욱 어둡게 물들였다. 티란데는 샨드리스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긴 한숨을 내뱉었다. " 샨드리스, 너의 부모님께서는 아직 엘룬 여신 곁에 있단다. 하지만 넌 아니야. 말이 도와줬단다."



"티란데는 자네가 위험에 빠졌단 걸 알고 있었네. 눈에 보이는 게 없더군." 말퓨리온이 덧붙였다.



샨드리스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제가 뛰어 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이었군요." 그녀는 웃다가 고통에 움찔했다. "저는... 그게... 엘룬 여신께서 결국 제 기도에 응답해 주신 것 같아요."



티란데는 말퓨리온에게로 시선을 올렸다. "우리 모두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지."



* * * * *




고대의 장송곡 가락에 샨드리스는 눈을 떴다. 그녀는 조심스레 몸을 일으키고 근처의 창문을 통해 다르나서스 중심부를 내다보았다. 익숙한 물길이 촛불로 환히 빛나고 있었다. 위습이 숲을 밝히듯, 조그맣고 둥근 불빛이 거울 같은 수면을 비추었다. 말퓨리온과 티란데가 엄숙한 표정으로 중앙에 서고, 그 주변을 다르나서스 주민들과 칼림도어 피난민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많은 나이트 엘프가 울어서 부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며칠 동안 잠을 아예 자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샨드리스는 그들의 비탄을 마음 깊숙이 이해했다. 인파를 눈으로 훑다 보니, 행렬 가장자리에 베스티아도 있었다. 너무 많은 이를 잃었다. 거의 모든 이가, 지난 몇 주간의 혼란 속에서 죽은 누군가를 알고 있었다.



관이 얹힌 수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레를 끄는 밤호랑이 두 마리는 시체의 무게가 힘겨운 듯 힘을 잔뜩 주고 있었다. 티란데가 앞으로 나와, 매장에 앞서 마지막으로 망자들에게 축복을 내렸다. 여사제들이 부르는, 마음을 후벼 파는 쓸쓸한 가락 이외에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가슴이 저미는 광경이었지만, 슬픔을 극복하지 않고는 영영 상처를 치유할 수 없을 터였다. 샨드리스는 이 시간이 지나가야 동족이 앞으로 다가올 시련을 마주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샨드리스는 나란히 서서 밀려오는 고통과 상실감에 맞서고 있는 말퓨리온과 티란데를 다시 쳐다보았다. 그들의 머리 위 높은 곳에서 구름이 움직이기 시작이고, 은은한 달빛이 구름 가장자리에 얇게 은테를 둘렀다. 엘룬께선 모든 걸 아신다. 샨드리스는 생각했다. 우린 홀로 싸우는 게 아니다.



안심이 된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퓨리온이 준비해 둔 약초 뿌리를 가지러 절뚝거리며 방을 가로질렀다. 그녀가 행복한 한 쌍에게 결혼 선물로 준 커다란 알로렐이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많이 자라 있었다. 덩굴손 하나는 선반 가장자리에 드리워져 있었다. 기쁨의 탄성과 함께, 샨드리스는 금방이라도 피어날 것 같은 꽃망울이 그 덩굴손을 뒤덮고 있음을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