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디쓴 충격이었다. 그녀는 승리자로서 이곳을 찾을 거라고 생각했지, 또 한 번의 패배를 맛볼 줄은 몰랐다. 승리는 공허했다. 그녀는 왕좌로부터 뒷걸음치며, 어깨를 펴고 순환이 계속되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아서스는 죽었다. 다른 시체 하나가 텅 빈 왕좌를 채운다고 해도 무슨 상관인가? 실바나스 윈드러너는 복수를 끝마쳤다. 실바나스와 그녀의 백성을 수년 동안이나 이끌어온 목표는 이루어졌다. 생명을 잃어버린, 움직이는 시체가 되어버린 그녀의 육신은 앞으로의 세상에 대해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제 모든 게 끝났다. 그녀는 한편으로 언제나 자신의 마음 한구석을 잡아끌던 아서스가 없음에도 자신의 존재가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녀는 왕좌에서 물러나 천천히 주위의 차가운 회색빛 세상을 바라봤다. 그녀는 지극한 행복의 장소, 반쯤 잊어버린 예전 세상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고향. 이제 돌아갈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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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왕관



실바나스 윈드러너가 평안의 바다 위에 떠 있다. 순수한 감정이 육체적 감각을 대신한다. 행복이 손에 잡힐 듯 아련하다. 기쁨이 보이고, 평화가 들린다. 이곳은 사후 세계, 그녀의 운명이다. 실버문을 지키다가 쓰러진 그녀가 도착한 영원의 바다, 바로 그녀가 있어야 할 곳이다. 하지만 이곳을 회상할 때마다 기억에 먹구름이 낀다. 소리가 멀어지고, 온기는 식어간다. 눈에 보이는 것은 반쯤 잊은 꿈처럼 파리하게 바랜다. 그래도 기억의 끝은 언제나 끔찍하리만큼 선명하다. 실바나스의 영혼이 뜯겨 나간다. 너무나도 강렬한 고통에 그녀의 영혼에 영영 찢긴 상처가 남는다. 아서스 메네실의 비웃음, 그 뒤틀린 웃음과 생명 없는 눈동자가 그녀를 다시 세상으로 끌어오며 조롱한다. 그녀를 타락시킨다. 아서스의 공허한 웃음소리, 그 기억이 실바나스를 소름 끼치게 한다!





* * * * *






"개 같은 놈!" 실바나스가 울부짖으며 리치 왕의 얼어붙은 갑옷 조각을 걷어찼다. 공허에 가득 찬 그녀의 무시무시한 목소리는 극도로 고조된 증오로 갈라졌다. 그 소리는 온 얼음왕관 꼭대기에 메아리치며, 이 끔찍한 장소를 공포로 가득 채운 안개처럼 계곡 여기저기에 퍼졌다.



여기, 아서스의 옛 권좌에 그녀는 홀로 찾아왔다. 얼음왕관 성채의 최정상, 얼어붙은 왕좌가 하얀 얼음의 평원 위에 도사린 곳. 그래, 그 자만심 가득했던 애송이는 세상을 지배하기라도 하는 양 여기 앉아 있었지. 하지만 지금은 어디에 있나? 먼지가 되어 버렸다. 그녀는 이제 자신의 의식 끄트머리를 잡아당기던 아서스의 악의를 느낄 수 없었다. 그의 부서진 갑옷은 하얀 봉우리 꼭대기의 옛 왕좌 앞에 조각나 흩어져 있다. 이를 둘러싼 것은 켜켜이 쌓여 검게 변한 선혈, 바로 아서스를 무릎 꿇게 한 용사들이 흘린 피였다.



실바나스는 아서스가 쓰러지는 모습을 현장에서 지켜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그녀는 한때 서리한을 움켜쥐었던, 이제는 조각난 건틀릿을 집어들었다. 아서스가 마침내 죽었다. 하지만 가슴 속은 왜 이리도 공허한가? 왜 몸은 아직도 분노로 떨리는가? 그녀는 손에 든 방어구를 봉우리 밖으로 던져 소용돌이치는 안갯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희미하게 빛나는 아홉 영혼이 첨탑을 둘러싸고, 가면 쓴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흐릿한 형체는 우아하고 실체 없는 날개를 펄럭이며 떠 있었다. 그들은 발키르, 한때 아서스의 의지에 묶여 노예가 되었던 고대 여전사였다. 왜 아직도 여기 남아 있지? 실바나스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실바나스가 분노를 터뜨릴 때에도 그들은 그녀를 방해하지 않았고, 침묵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를 보고 있는 것일까? 가늠하려는 것일까? 실바나스는 발키르를 무시한 채 눈밭 위를 걸어 아서스의 권좌로 다가갔다.



누군가 왕좌에 앉아 있었다.



실바나스는 처음에 누군가 아서스를 조롱하기 위해 왕좌에 그의 시체를 앉혀놓고 얼음덩이로 봉인했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형상이 전혀 달랐다. 그녀는 왕좌에 다가가 얼음 표면을 손으로 문질러 그 안의 뒤틀린 형체를 들여다봤다. 인간이었다. 얼라이언스의 어깨 갑옷 윤곽을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육체가 심한 화상을 입은 채였고, 피부는 구운 고기처럼 갈라져 있었다. 그는 아서스의 왕관을 쓰고, 점멸하는 의식이 비치던 아서스의 눈을 지니고 있었다.



아서스를 대신할 자가 남아 있었다. 왕좌에 앉아 있는 자는 새로운 리치왕이었다!



실바나스는 또 한 번 울부짖었다. 충격은 폭발적인 분노로 이어졌다. 그녀는 손바닥으로 얼음을 내리치고, 다시 주먹으로 때렸다. 얼음이 갈라졌다. 거미줄처럼 갈라진 얼음 사이로 보이는 얼굴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울부짖음은 점차 잦아들어, 성채 꼭대기를 둘러싼 안갯속으로 공허하게 사라졌다. 놈을 대신할 자가 남아 있었다. 리치 왕은 영원히 존재할 거란 뜻인가? 순진하기도 하지... 멍청이들. 이 꼭두각시 왕은 언젠가 세상을 제멋대로 비틀어 놓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보다 더 끔찍한 존재가 휘두르는 치명적인 무기가 될지도 모른다.



쓰디쓴 충격이었다. 그녀는 승리자로서 이곳을 찾을 거라고 생각했지, 또 한 번의 패배를 맛볼 줄은 몰랐다. 승리는 공허했다. 그녀는 왕좌로부터 뒷걸음치며, 어깨를 펴고 순환이 계속되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아서스는 죽었다. 다른 시체 하나가 텅 빈 왕좌를 채운다고 해도 무슨 상관인가? 실바나스 윈드러너는 복수를 끝마쳤다. 실바나스와 그녀의 백성을 수년 동안이나 이끌어온 목표는 이루어졌다. 생명을 잃어버린, 움직이는 시체가 되어버린 그녀의 육신은 앞으로의 세상에 대해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제 모든 게 끝났다. 그녀는 한편으로 언제나 자신의 마음 한구석을 잡아끌던 아서스가 없음에도 자신의 존재가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녀는 왕좌에서 물러나 천천히 주위의 차가운 회색빛 세상을 바라봤다. 그녀는 지극한 행복의 장소, 반쯤 잊어버린 예전 세상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고향. 이제 돌아갈 때가 되었다.



천천히, 그녀는 얼어붙은 산 정상의 삐죽삐죽한 가장자리로 힘겹게 발걸음을 옮겼다. 발아래 까마득한 곳에는 앞서 보았던 사로나이트 가시가 구름에 둘러싸인 채 숲을 이루고 있었다. 이곳에서 그냥 떨어진다고 해도 죽지는 않으리라. 되살아난 그녀의 육신은 거의 파괴가 불가능했다. 하지만 저 가시들, 고대 신의 피가 딱딱하게 굳어 생긴 가시라면 그녀의 육신뿐 아니라 영혼까지도 갈가리 찢어 놓으리라. 그녀는 그런 최후를 갈망했다. 평화로의 귀환. 실버문 숲에서 시작된 그녀의 복수가 마침내 아서스의 죽음과 함께 종지부를 찍을 순간이었다.



그녀는 어깨에 메었던 활을 벗어 옆으로 던져버렸다. 울퉁불퉁한 얼음 바닥에 떨어진 활은 쨍강 소리를 냈다. 그리곤 화살통을 풀었다. 쏟아져 내린 화살은 얼음왕관 성채의 측면을 타고 떨어져 하나씩 안갯속으로 사라졌다. 텅 빈 화살통이 그녀의 발치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무기를 벗어버리자 실바나스의 낡은 검은색 망토가 풀어졌고, 망토는 살을 에는 듯한 바람에 그녀의 목 주위를 채찍질하듯 펄럭였다. 그녀는 추위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먹먹한 아픔뿐이었다. 곧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되리라. 그녀는 십여 년 만에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낭떠러지의 가장자리 너머로 체중을 맡겼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발키르들은 마치 하나처럼 그녀를 향해 조용히 돌아섰다.





길니아스



"앞으로 전-" 소리치던 부대장은 명령을 끝맺지 못했다. 총탄이 그의 아래턱을 부숴놓았기 때문이다. 그의 앞에 솟은 성벽은 부서진 상태였으나, 쏟아져 내리는 빗속에서 저격수에게는 좋은 은신처가 되었다. 비는 마치 하늘에서 내려뜨린 흰 장막처럼 퍼부었고, 공격과 방어 양측 모두를 흠뻑 적셔 놓았다. 부대장은 통나무처럼 쓰러지며 잔해 더미에서 미끄러져 내려, 결국 진흙탕에 처박혔다. 그의 포병 부대에 속한 파괴전차와 시체마차는 수렁에 빠져 있었고, 부대원들 역시 마찬가지로 진격하지 못하는 중이었다. 인간이라면 그 일격으로 목숨을 잃었을 것이 분명하지만, 이미 죽은 몸이었던 부대장은 진흙탕에서 기어 올라와 남아 있는 얼굴에서 피가 뭉친 침을 뱉었다.



한편, 가로쉬 헬스크림은 그 북쪽에서 바퀴 자국이 깊이 팬 들판을 지나 흐릿하게 세상을 가린 빗줄기 너머에 있는 최전방의 상황을 이해하려 애쓰고 있었다. 그는 거대한 길니아스 성벽의 회색 윤곽선과 대격변이 비틀어 열어 놓은 거대한 틈을 볼 수 있었다. 코르크론 병사들이 최전선에 있었다면, 그 틈으로 곧장 걸어 들어갔으리라. 그는 패배한 포세이큰 정찰대가 누더기 같은 모습으로 진흙탕을 지나 터벅거리며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 으르렁댔다. 승리의 순간에도 포세이큰의 꼴은 시체 같았다. 물론 패배했을 때는 그보다 더 험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정찰병 놈들. 성벽 방어선을 견제하라고 보냈더니만, 걷어차인 강아지처럼 기어오는군." 가로쉬는 옆에 선 상대방은 쳐다보지도 않고 코웃음을 쳤다. 거대한 갈색 피부의 오크, 가로쉬는 가장 위압적인 전투복을 차려입은 상태였다. 핏줄이 솟고 문신이 새겨진 그의 팔 근육이 뿔 달린 어깨보호대 밑에서 꿈틀댔다. 그는 천막 앞에 서 있었지만, 비를 피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비는 도끼눈을 부라리는 가로쉬의 얼굴과 거뭇거뭇한 수염이 난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거대한 오크 옆, 천막 덮개 아래에서 비를 피하는 수석 연금술사 라이던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이 보였다. 대족장의 현란한 욕설에 얻어맞지 않을 대답을 생각해 내느라, 보라색과 회색이 섞인 머리카락 아래 곰보 자국이 있는 얼굴이 찡그려졌다. "저들은 분명히 온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는 거칠고 새된 목소리를 차분하게 가다듬고 말했다. "길니아스 방어 병력도 틀림없이 혼란에 빠졌을 겁니다."



"그렇다면 왜 너희 정찰병이 진격하지 않고 저렇게 비실거리며 돌아오는 거냐?" 가로쉬는 옆에 있던 통을 걷어찼다. 그의 곁에는 직속 부대가 내리는 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이 서 있었다. 가로쉬가 손수 고른 오크와 타우렌으로 구성된 정예병 4개 중대와 이들을 지원할 오그리마의 강인한 전사들 4개 대대였다. 이들은 은빛소나무 숲의 들판 위, 진홍빛으로 빛나는 깃발의 뒤에서 녹색과 갈색 얼굴의 바다가 되어 당당히 서 있었다. "그리고 로데론에서 약속한 지원군은 어디에 있나? 붕괴된 성벽 틈으로 진입하기로 되어 있을 텐데? 이건 시간 낭비다."



라이던은 독불장군인 대족장과 전술에 대해 논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공격 개시 시간이 다가오자 점점 더 초조해졌다. 그는 검보랏빛 혀로 자신의 갈색 입술을 핥았고, 태연하게 대꾸하면서 이성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려고 애썼다. "분명히 비 때문에 진격이 늦어지고 있을 겁니다. 그자들은... 진정한... 로데론의 최정예병이거든요. 우리 지상군의 핵심이자 전체 작전의 중심입니다..."



가로쉬는 주먹으로 얼굴 한쪽을 슥 문질렀다. 라이던이 말하는 동안 그는 눈으로 지형을 살피며 곧 전선에 합류할 보병과 기병을 머릿속으로 배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성벽 중앙부의 붕괴 지점으로 그들을 바로 진격시킬 수는 없습니다." 라이던이 말을 이었다. "그곳은... 병목지입니다. 굳건한 방어 요새가 구축되어 있고, 면밀한 감시를 받고 있지요. 중장갑을 갖추고 말에 탄 병력은 그 틈을 통과할 수 없습니다. 잔해 뒤에 숨은 적 사격병들에 의해 살육될 겁니다. 물론 알고 계시겠지만-"



"당연히 알고 있지!" 가로쉬가 답했다. "문이 조금 열렸을 뿐이다. 이제 발로 차서 부숴버려야지. 이게 바로 너희가 할 일이다." 대족장은 수석 연금술사를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서늘한 가로쉬의 눈이 라이던의 눈구멍을 채운 희미한 노란색 불빛에 고정되어 있었다. "너희는 이미 송장이야. 거의 죽일 수가 없지. 병목 지점에 물밀듯이 밀어닥쳐서 힘과 정신력을 최고조로 유지하는 나머지 호드 병사가 지나갈 길을 열어라. 필요하다면 너희의 박살 난 몸뚱어리를 밟고 달려야 할 수도 있겠지. 이게 바로 성벽을 뚫는 방법이다. 전쟁에서 승리하는 방법이지."



수석 연금술사는 앙상한 손가락 두 개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역병을 아주 조금... 조금만 쓰면 어떨까요? 진입로를 열기 위해서 말이지요. 어떤 피해를 주자는 게 아닙니다. 그냥 살짝 묻히는 정도면 됩니다! 실질적인 해를 주자는 게 아니라 두려움과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가로쉬의 손등이 허공을 갈라 라이던의 얼굴 측면을 강타했고, 빗방울이 반짝이는 호를 그리며 천막에 흩뿌려졌다. 수석 연금술사는 말발굽에 걷어차인 듯 비틀거렸지만, 가까스로 쓰러지지 않고 버텼다.



"너희가 감춰 놓은 그 쓰레기를 단 한 방울이라도 쓰겠다는 말을 했다간, 네놈과 너희 하수도 소굴까지 모조리 불태워버리겠다." 으르렁거린 가로쉬는 다시 전장을 향해 몸을 돌렸다.



"네, 대족장님." 굴욕을 당한 수석 연금술사 라이던은 앙다문 이 사이로 거의 들리지도 않게 대답하며 속으로 분을 삭였다. '어둠의 여왕, 실바나스 님은 어디 계신가?' 회색빛 하늘을 향해 텅 빈 눈구멍을 들어 올리며 그는 생각했다 '여기서 이 야수를 상대해 주셔야 하는 것 아닌가?'





얼음왕관



실바나스는 눈을 감고 얼음왕관의 봉우리 가장자리로 비틀거리며 다가갔다. 그녀는 팔을 들어 올렸다. 매섭게 찬 바람이 그녀를 물어뜯었지만, 둔한 통증만이 느껴졌다.



그녀는 주위에서 누군가의 기척을 느끼고 눈을 떴다. 발키르가 다가와 있었다. 그들의 무기가 유령 같은 허벅지에서 반짝이는 모습까지 보일 만큼 가까웠다. 뭘 원하는 거지?



예고도 없이 그녀의 머릿속에 환영이 떠올랐다. 기억이었다. 그녀는 따스하고 햇살 가득한 침실에 있었다. 황금빛 태양볕이 창으로 쏟아져 들어와, 목적 없이 떠도는 먼지를 비춰 바닥에 화려한 장식을 어른거리게 했다. 이곳은 그녀의 방이었다. 이번 생을 살기 전의 일이었다. 젊은 실바나스는 스무 번째 가을을 지내기도 전에 이미 집안 최고의 사냥꾼이었다. 그녀는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가죽 장화를 신고, 신중하게 끈을 묶어 화려하게 장식했다. 그녀는 나뭇잎 모양의 자수 위치를 조정한 후,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감탄했다. 폭포수처럼 허리까지 흘러내린 금발은 햇살 속에서 투명해 보였다. 그녀는 거울을 향해 활짝 웃으며 길고 날씬한 귀 뒤로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넘겨 가장 완벽한 모습으로 꾸몄다. 집안 최고의 사냥꾼이 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밖에 나섰을 때 모두가 그녀의 미모에 숨죽이는 인물이 되어야 했다. 그녀는 그렇게 허영심이 가득했다.



이상한 기억, 잊었던 기억이 봉우리 가장자리에 선 실바나스의 발길을 되돌렸다. 무엇이 이 기억을 떠올리게 했을까? 그 삶은 수천 번 죽었다 깨어나도 되찾을 수 없는데.



또 다른 기억이 그녀의 감각에 밀려 들어왔다. 이제 그녀는 영원노래 숲에서 봉긋 솟아오른 바위 뒤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가을 초목이 머리 위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기척을 숨긴 그녀의 동료가 발소리를 죽이고 달려와 실바나스 곁에 숨었다. "수가 너무 많아!" 그는 거칠게 말하고 한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목소리를 낮췄다. "위쪽에는 우리 순찰대 이십여 명밖에 없어." 속삭임에 가까운 소리로 그가 말했다. "그 인원으로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어!" 실바나스는 꾸물거리며 강 여울을 압박해 들어오는 시체 무더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3차 대전쟁의 정점, 아서스의 병력에 실버문이 무너지기 불과 몇 시간 전이었다.



"태양샘의 방어를 강화하는 동안만 시간을 끌어주면 돼." 그녀가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모두 죽고 말 거야!"



"그들은 화살통 속의 화살이야." 실바나스가 말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모두 소모해야 해."



그녀는 무모했다. 무정했느냐고? 아니, 그녀는 싸움꾼이었다. 전사의 심장을 지녔을 뿐이다.



세 번째 기억 역시 전과 마찬가지로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로데론의 정당한 계승자들이여!" 실바나스가 활을 높이 들고 외쳤다. 그녀의 팔은 여전히 날씬하고 탄력이 있었지만, 청회색, 즉 죽음의 색이었다. 이번 기억은 앞서와는 많이 달랐다. 죽음 뒤에 경험한 기억에는 특유의 차가운 광택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 앞에는 기괴하게 몸을 떠는 시체 무리가 있었다. 여기저기서 주워 모은 방어구와 깨진 육신, 그리고 상상하기 싫을 정도로 끔찍한 악취가 함께했다. 그들의 애처롭고 절박한 시선은 아이들을 연상시켰다. 실바나스는 그 모습에 역겨움을 느꼈다. 하지만 그 시련이 그녀에게 힘을 주었다. "리치 왕이 흔들린다. 너희 의지는 너희 것이다. 지금 너희 땅에서도 쫓겨난 신세로 전락하겠느냐? 아니면 운명이 우리에게 던진 잔인한 인생의 패를 받아들이고, 이 세상에서 우리의 자리를 다시 차지하겠느냐?"



그녀의 질문을 군중은 까르륵거리며 귀에 거슬리는 소리와, 그에 이어지는 절박함에 가까운 환호성으로 답했다. 앙상한 주먹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올랐다. 소작농, 농부, 사제, 전사, 영주와 귀족들까지... 이 가엾은 이들은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을 아직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어느 누군가, 그들이 어딘가에 속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자 마치 감전된 듯한 충격을 받았다. "우리는 버림받았다. 우리는... 포세이큰이다. 하지만 내일의 태양이 떠오르면, 수도는 우리 것이 될 것이다." 그녀가 선언했고, 모두가 포효했다.



"인간들은 어떻게 합니까?" 환호성이 잦아들자 한 젊은 연금술사가 물었다. 실바나스는 전날 밤의 전투에서 활약했던 그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다. 냉철한 지성이 눈구멍 속에서 반짝였다. 그의 이름은 라이던이었다. 그는 이미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인간을 다른 종족으로 부르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써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자신의 본분을 다할 것이다." 그녀가 답했다. 그녀는 머릿속으로 이미 셈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도시를 해방시킬 거라 믿는다. 싸우게 내버려 둬라. 모두 우릴 위해 소모될 것이다. 그들은..." 그녀는 갑자기 자신이 예전에 사용했던 비유를 떠올렸다. "화살통 속의 화살이다."



대지를 가득 채운 언데드 무리가 그녀의 말에 찬성하며 손뼉을 치고, 켁켁거리며, 기쁜 듯 무기를 휘둘렀다. 실바나스는 냉철하게 그들 무리를 바라봤다. '너희도 마찬가지야.' 그녀는 생각했다. '내가 아서스의 심장에 쏘아 보낼 화살이지.'



전사의 심장 때문인가? 그녀는 차가워졌다. 아니, 그녀는 그대로였다. 죽었음에도 살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였다.



실바나스는 고개를 저으며 기억을 외면했다. 모두 그녀의 기억이었지만, 기억하는 이는 자신이 아니었다. 누군가 그녀에게서 기억을 꺼내고 있었다. 발키르의 짓이었다. 침묵하는 이들 영혼은 그녀의 주위를 돌며 조용히 실바나스를 바라봤다. '놈들이 나를 살펴보고 있어!' 실바나스는 깨달았다. '날 심판하고 있다!'



그녀는 차가운 공기를 폐 안으로 빨아들였다. 그녀의 눈이 갑자기 되살아났다. "난 심판 받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봉우리 가장자리에서 물러나, 자신을 비난하는 자들을 바라보며 외쳤다. "너희도, 다른 누구도 날 심판할 수 없다." 분노가 그녀의 몸 안에서 솟아올랐다. 밴시의 통곡이 이것들에도 통할까?



하지만 싸울 필요가 없었다. 그녀가 할 일은 이미 끝났다. "물러나라." 그녀가 명령했다. "그리고 내 머릿속에서 나가!"



실바나스는 뒤로 물러났다.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휘두르고 해진 망토를 잡아챘다. 예전 모습과 지금 모습에 대한 기억에 배알이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이 느낌을 극복하려 그녀는 움직였다. 더는 썩어가는 시체로 이루어진 잡종들의 복수심 가득한 지도자로 머물 수 없었다. 그녀가 할 일은 끝났다. 오랫동안 거부해 온 보상이 그녀를 기다렸다. 잊었던 행복을 염원하며, 그녀는 얼음왕관 성채 꼭대기에서 뒤로 뛰어내렸다. 그녀가 가르는 세찬 바람은 점점 커지는 통곡 소리 같았다. 첨탑과 그 꼭대기, 고요한 발키르가 점점 사라져갔다...



그녀의 육신은 사로나이트 암석에 부딪혀 최후를 맞았다.





길니아스



마치 꿈처럼 로데론에 주둔한 언데드 군단의 중추가 전진을 계속했다. 쏟아지는 명령도 이상하게 희미하게 들렸다. 중장갑을 두른 기병대가 성벽 틈새로 파고 들어갔다. 해골마의 뼈 발굽은 무너져 내린 성벽의 잔해 틈 속으로 어떻게든 디딜 곳을 찾아냈다. 포세이큰은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가려 애썼지만, 어떤 곳은 네 명이 함께 지나가기 힘들 만큼 비좁았다.



그때, 적의 포화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불을 뿜었다. 탄환이 적중한 곳의 포세이큰과 말은 폭발하여 가루와 핏덩이를 남겼다. 머스킷총 소리가 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북소리처럼 터져 나왔다. 진격하던 병력이 한 줄 한 줄 쓰러졌다. 하지만 이들 정예병은 얼음왕관의 공포에서도 살아남은 자들이었다. 이들은 희생에 굴하지 않고 성벽 너머의 적과 맞서기 위해 성벽 틈새로 쏟아져 들어갔다. 두 번째 병력이 도착해서 성벽 꼭대기에 갈고리를 던져 걸자, 위쪽에서 뜨거운 기름이 쏟아졌다. 선두는 순식간에 화염 덩어리로 변해 불타올랐다. 총탄이 계속해서 쏟아졌지만, 포세이큰은 돌격을 멈추지 않았다.



일부는 성벽 꼭대기에 도착했지만 칼에 베일 뿐이었다. 적은 인간이 아니었다. 은빛소나무 숲에 도사리던 광적인 늑대 무리가 규합한 세력이었다. 총과 칼이 빗나가면 이빨과 발톱이 언데드 병사들을 갈가리 찢었다.



포세이큰이 다시 한 번 쇄도했다. 피에 젖은 무기를 들고 내리는 비에 흠뻑 젖은 채였다. 병사들은 안갯속에서 회색빛처럼 아련했고, 이들이 쓰러질 때의 비명은 조용한 메아리 같았다. 이제 적도 지쳐 허덕이고 있었다. 그들은 정말 많은 아군을 쓰러뜨렸다. 아직도 남은 병력이 있을까?



그때 첫 오크 병력이 길니아스인을 급습했다. 호드의 병력이 시체의 융단을 타고 넘어, 두 눈과 목청에 승리에 대한 갈망을 가득 담고 쇄도했다. 이제 온 세상이 침묵했다. 하지만 그 순간 환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환영이 사라진 자리에 보루가 나타났다. 보루는 역병지대로 알려진 지역과 로데론 사이의 경계를 이루는 미완성 요새였다. 수석 연금술사 라이던이 그곳에 있었다. 왼팔은 없고 커다란 상처가 얼굴을 가로질러 나 있었다. 그는 다급하게 부하들에게 말했지만,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는 보루 최후의 방어전을 지휘해야 했지만, 병력이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포세이큰 핵심 병력은 길니아스에서 희생된 후였다.



그렇게 얼마 남지 않은 병력은, 안돌할에서의 승리를 발판으로 서쪽으로 연이어 진군하는 인간과 드워프의 조직화된 병력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보루에 남은 초라한 부대가 승리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고, 나머지 호드 세력은 보이지 않았다.



'이건 현실이 아니다.' 실바나스는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의 의식이 유령 같은 이들 사건을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갑작스럽게 깨달았다. 그녀는 죽었다.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영혼은 이승과 저승 사이의 경계에 있었다. '이건 뭐지?'



그녀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죽음을 향한 추락이었다. 이 환영들은 마치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에 대한 기억 같았다. 이들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리고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포세이큰의 수도가 습격받고 있었다. 린 국왕이 불타오르는 비행선 탑의 잔해 너머에 서서 언더시티의 내부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장군들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이 도시를 전에도 습격한 적이 있었기에, 승리를 확신했다.



도시의 성벽 안쪽에서 불이 타올랐다. 실바나스는 속을 끓였다. 얼라이언스는 벌써 시체를 태우고 있었다. 아니, 잠깐. 그녀는 구름처럼 흐릿해진 환영을 이해하려 애썼다.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포세이큰들이 처형자들과 맞서는 길을 포기하고 스스로 불 속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이건 현실이 아니야!" 실바나스가 단언했다. 머릿속에 울리는 자신의 목소리가 마치 살아 있던 시절 같았다. 그녀의 백성이 정말 이리도 약했던가? 아냐... 아냐! 가로쉬가 어리석은 소모전을 통해 내 최고의 병사들을 모두 죽여버렸다. 포세이큰의 지위가 시궁창에 처박혔다. 그게 바로 이 환영이 보여주는 것의 의미였다.



안개가 세상을 가득 채우면서 미래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실바나스는 몸의 감각을 느낄 수 없었다. 그녀는 생과 사의 경계를 떠돌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소리 없이 경탄하며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살결은 살아 있던 때처럼 다시 황금빛 도는 분홍색이었고, 탄탄하며 윤기가 흘렀다. 하지만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실바나스는 헉 소리를 내며 놀랐다. 아홉 명의 여성이 그녀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의 미모는 그녀보다도 우월했다. 발키르는 살아 있을 때의 모습이었다. 몇몇은 까마귀 같은 검은 머리를 볕에 그은 얼굴과 보석 같은 푸른색 눈동자 양옆으로 늘어뜨리고 있었다. 또 몇몇은 눈밭 위에서 반짝이는 창백하고 환한 햇살 같은 금발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부드러웠지만, 턱은 굳게 다물고 있었다. 팔은 부드럽고 탄력 있었으며 허벅지는 두텁고 탄탄했다. 모두 서로 다른 무기를 들고 있었다. 창, 미늘창, 그리고 턱에서 땅까지 닿는 거대한 양손 클레이모어가 모두 잘 연마된 강철로 빛나고 있었다. 모두 각 세대 최고의 전사였다.



'모두 나와 똑같았구나.' 실바나스는 깨달았다. '허영심과 승리에 취하고 자만에 빠졌어.'



"그래 우리 모두 그랬지." 실바나스가 소리 내어 말하지도 않았는데, 클레이모어로 무장한 금발 발키르가 답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그윽하고 풍성했다. "난 소환자 안힐드이다. 이들은 내 자매 전사들이고, 우린 세상에 남은 마지막 아홉 명의 여전사이다. 생전에는 북부의 전사들을 섬겼고, 죽음 뒤에도 우리 섬김을 계속하기로 선택했다."



"리치 왕을 섬기려는 것인가."



안힐드의 환영이 분노하며 물었다. "너도 리치 왕을 섬기기로 선택했었나?"



"이게 뭐지? 이 환영은 대체 무엇이냐?" 실바나스가 물었다.



"미래의 모습이다." 안힐드가 설명했다. "모든 삶은 지나간 길에 발자취를 남기지. 이것은 바로 네가 남길 흔적이다."



"수정구 따위가 없어도 헬스크림이 언젠가 정복욕에 눈이 멀어 호드의 자원을 허비하고 호드를 조각내 버릴 것이라는 사실은 얼마든지 알 수 있다." 실바나스는 옛 분노가 다시 차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몸의 반응을 느낄 수 없었다. 아무 감각도 없었다. "날 어디로 데려온 것이냐? 난 죽었어야 한다."



"넌 죽었다." 다른 발키르가 말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마치 석탄과 같은 흑갈색이었다.



"난 이미 소멸을 맛본 적 있다." 실바나스가 반박했다. "너흰 나를 생과 사의 경계에 붙들어두고 있어. 왜지?"



안힐드는 참을성 있게 기다리다 차분하게 가다듬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죽음이 가져올 결과를 보여주고, 네가 선택할 수 있게 하려는..."



"내 선택은 끝났다." 실바나스가 말을 끊었다.



"네 백성이 멸망할 것이다!" 검은 머리의 발키르가 말했다. 분명히 살아생전 가장 어린 전사였으리라. 죽음 뒤, 지금에도 가장 참을성이 없으니.



실바나스는 포세이큰에 대해 생각했다. 로데론의 수도가 붕괴되고 남은 폐허에 쌓여 있던 시체들. 그들은 혼란 속에서 갈망과 함께 되살아나 지금까지 먼 길을 걸어왔다. 포세이큰은 이제 진정으로 하나의 국가가 되었다. 악취를 풍기는 피투성이, 끔찍하고 생명 없는 껍데기들의 무리. 전투에 능하고 강력한 마력을 뿜어내며 죽음이라는 구속에 영향받지 않는 자들. 그들은 완벽한 무기로 연마되었다. 실바나스의 무기였다. 그리고 그녀가 세웠던 목표대로 적에게 죽음의 일격을 날렸다. 이제 그들의 운명은 그녀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멸망하라지!" 실바나스가 외쳤다. "이제는 상관없는 자들이다!"



안힐드는 한 손을 들어 어린 자매들의 목소리를 잠재웠다. "쉿, 아가타. 이 자는 아직 모르는 것 같다. 더 봐야 해." 발키르의 지도자는 빛나는 초록색 눈을 실바나스에게로 돌렸다. 눈가에는 슬픔이 어려 있었다. "실바나스 윈드러너. 네가 원하는 소멸을 주마. 우린 널 막지 않겠다."



안힐드가 눈을 감았고, 그 즉시 그들의 모습은 사라지고 얼굴 없는 유령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실바나스는 무언가 자신을 잡아당기는 힘을 느꼈다. 감각이 흐려졌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시간이 멈췄다.



"죽었어!" 아가타가 비명을 질렀다.





길니아스



비는 쉼 없이 계속 내렸고, 길니아스 성벽 앞 땅은 늪으로 변했다. 가로쉬가 포세이큰 부대를 시찰하는 동안, 그가 타고 있는 거대한 전투늑대의 앞발이 진흙탕에 푹푹 박혔다. 빗물이 가로쉬의 얼굴을 타고 흐렀고, 그의 박박 민 머리 위로는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길니아스인들은 저 거대한 성벽 뒤에서 벌벌 떨고 있다." 대족장이 소리쳤다. 웅장한 목소리는 비와 천둥소리 너머로 쩌렁쩌렁 울렸다. "너희 로데론의 시민은 길니아스의 역사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동맹, 인간들이 도움을 청했을 때 길니아스인들은 뭘 했지? 저 성벽을 쌓고 숨었다."



수많은 칼이 방패에 부딪혔다. 포세이큰 모두가 생전의 기억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몇몇 그런 이들은 세계가 도움을 청하던 그때에 등을 돌려버린 왕국에 대해 전혀 애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



가로쉬가 말을 이었다. 고개를 높이 쳐들고 대기를 자신의 말로 채웠다. "그들은 불명예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은 어떻게 싸울까? 명예롭게?" 가로쉬는 꿀럭거리며 웃었다. "아니다. 그들은 겁쟁이처럼 죽을 것이고, 그렇게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오늘 너희의 영광은 이야기와 노래가 되어 살아남을 것이다." 가로쉬 헬스크림은 뒤로 돌아 길니아스의 부서진 성벽을 바라봤다. 전설적인 도끼 피의 울음소리를 들어 올려, 그는 톱니 모양의 날로 부서진 성벽을 겨눴다. "성벽은 무너진다. 하지만 명예는 영원하리라!"



수석 연금술사 라이던은 앙상한 손가락으로 엉킨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오크, 타우렌, 포세이큰 모두의 고함이 천둥소리마저 압도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라이던은 궁금했다. '내 포세이큰 형제들이 자신을 패망으로 이끌 작전에 환호하다니!'



라이던은 뭔가 말을 하려고 필사적으로 애썼다. 가로쉬의 계획에 반대하고, 동포들이 정신을 차리게 마지막으로 호소하고 싶었다. 어둠의 여군주라면 어떤 말을 할지, 어떻게 가로쉬의 맹목적인 열망을 억누를 수 있을지 절박하게 생각했다. 입을 벌렸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포세이큰 선봉대의 후방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가로쉬가 전투늑대에 박차를 가해 부대 측면으로 이동하며, 돌격을 위한 길을 터 주었다. "포세이큰의 영웅들이여! 너희가 내 창의 창날이다. 무기를 들고 소리를 높여라. 저 성벽 위에서 호드의 깃발을 들어 올릴 때까지 멈추지 마라." 피의 울음소리가 아래로 떨어졌다. "돌격!"



"당장 멈춰라!" 북쪽에서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가 들렸다. 밴시 여왕의 외침은 너무나도 무시무시한 힘과 순수함을 지니고 있어서, 내리는 비마저도 잠시 멈춘 듯이 느껴졌다. 하늘을 찢을 기세로 번개 한줄기가 떨어졌고, 그 천둥소리는 마치 망치로 돌을 쪼개는 것처럼 우렁찼다. 모두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둠의 여군주는 비에 젖은 두건으로 눈을 가린 채 격노에 차 해골마를 타고 뛰어오고 있었다. 그녀의 검은 망토가 격렬하게 휘날렸다. 포세이큰은 그녀 앞에서 무기를 진흙 바닥에 내리고 고개를 숙인 채 무릎을 꿇었다.



수석 연금술사 라이던은 무릎을 꿇지는 않았지만, 포세이큰의 구원자 앞에서 무릎이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 후들거렸다. 그는 긴 로브를 질척한 진흙탕에 끌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비틀거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실바나스의 해골마가 서서히 멈춰 서자, 그는 손을 들어 말고삐를 붙잡았다. "여군주님." 안도감에 말문이 막힌 그가 가까스로 속삭였다.



그리고 그는 놀라움에 눈을 깜박였다. 꿈에 나타날까 두려운 발키르 둘이 여군주의 양옆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반투명한 날개를 펄럭이며 공중에 떠 있었다.



가로쉬가 진흙탕으로 늑대를 몰아 다가왔다. 조용히 무릎 꿇은 포세이큰 병사들은 그의 주위로 수천 개의 말 없는 석상처럼 줄지어 있었다. 가로쉬의 눈은 피에 대한 갈망으로 번득였다. 라이던은 몸을 움츠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실바나스는 눈도 깜빡이지 않았고, 존중의 뜻으로 두건을 벗지도 않았다. 그저 미세하게 턱을 들어 올렸을 뿐이다. 그녀는 노래하듯 가로쉬에게 말했지만, 모두가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목소리였다.



"헬스크림. 길니아스는 무너질 것이오. 그리고 호드는 원하던 보상을 받을 것이오. 하지만 당신이 내 백성을 이용하려 한다면, 이 전쟁은 내 방식대로 해야겠소." 그녀는 망토를 걷어 한쪽 어깨를 드러냈다. 얼룩덜룩한 회색 피부와 깃털로 장식된 화려한 검은색 가죽 방어구가 드러났다. "지금 가장 빠른 배 세 척이 길니아스의 주의를 끌기 위해 남부 해안으로 출동했소.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죽음의 종소리 마을에서 지원군을 모으고 있소."



수석 연금술사 라이던은 그녀의 으스스한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알고 있는 한, 죽음의 종소리 마을에는 무덤 외에 남은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여군주의 존재 자체가 변화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언제나 무시무시했지만, 이제는 날이 서 있었다. 마치 신처럼 단호한 말투였다. 게다가 그녀의 주위를 말없이 떠도는 저 발키르는 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여군주시여." 라이던이 속삭였다. "어디에 다녀오신 것입니까?"



그녀는 자신의 종복을 내려다보았다. 수석 연금술사 라이던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며, 떨리는 손으로 말고삐를 놓을 수밖에 없었다.





암흑



여군주 실바나스 윈드러너는 자유로이 추락했다. 물리적인 의미가 아니었다. 그녀의 육신은 얼음왕관 첨탐의 발치에서 소멸했다. 폭풍 속에서 키를 잃고 길을 벗어난 배처럼 추락하는 것은 그녀의 영혼이었다.



여기 어떻게 왔을까? 기억할 수가 없었다. 아서스에게 죽었던가? 자살했던가? 발키르가 내린 심판을 받기 위해서인가? 이곳에서는 시간이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녀의 인생 전체가 사건의 연속이 아니라 영원한 공허 안에서 한 점으로 반짝이는 한 순간 같았다.



보이는 것은 오직 암흑뿐이었다.



그녀는 아주 오랜만에 무언가를 느꼈다. 그래서 몸을 움츠려야만 했다. 고통이었다.



이곳에서 마침내 그녀의 영혼은 다시 한 번 하나가 되었지만, 느낄 수 있는 건 고통뿐이었다. 느낌을 되찾았지만, 남은 건 극도의 고통. 그리고 냉기, 절망.



공포.



어둠 속에는 다른 것들도 있었다. 그녀가 알아보지 못하는 것들, 산 자의 세계에는 존재할 수 없는 끔찍한 것들이었다. 가시발톱이 그녀를 찢었지만 그녀에게는 입이 없어 비명을 지를 수 없었다. 무언가의 눈이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마주 바라볼 수는 없었다.



후회.



그녀는 익숙한 기척을 느꼈다.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한때 그녀를 손아귀에 쥐고 있었던 자의 조롱하는 목소리. 아서스? 아서스 메네실? 여기에? 그의 정수가 실바나스에게 몰려왔다. 소름 끼치는 깨달음과 함께 절망에 빠진 그녀는 움츠러들었다. 리치 왕이 될 아이. 겁에 질린 어린 금발 꼬마, 일생에 걸친 실수의 여파를 저승에서 수습하고 있다니. 그 순간 실바나스의 영혼이 찢기고 고통 받고 있지 않았다면, 그녀는 처음으로 아서스에 대한 일말의 동정심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온 세상의 고통과 영원한 악이라는 장대한 풍경 안에서, 리치 왕은... 그저 보잘것없는 존재였다.



이제 다른 것들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그녀를 포위했다. 즐겁게 그녀를 고문하고, 그녀의 의식을 찢고, 그녀의 고통에 기뻐했다.



공포.



이것이 그녀를 기다리는 영원이었다. 끝없는 공허. 어두운 미지의 고통이 도사린 영역.



한순간, 또는 하나의 일생이 지난 후, 한 줄기 빛이 어둠을 뚫었다. 그리고 그들이 무기를 내밀고 다가왔다. 아홉 명의 발키르. 이 어둠 속에서 불가능할 정도로 아름다웠고, 모두 하나의 빛이 되어 실바나스를 감쌌다.



그녀는 자신이 작고 벌거벗겨진 느낌이 들었다. 자신 안으로 움츠러들었다. 목소리를 다시 찾았을 때, 나오는 건 흐느낌뿐이었다. 실바나스 윈드러너는 무너졌다. 하지만 발키르는 아직 심판을 내리지 않은 상태였다.



"실바나스 여군주여." 안힐드가 달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실바나스의 얼굴에 손을 댔다. "우리에겐 네가 필요하다."



"무... 무엇을 원하느냐?"



"우리는 잠든 리치 왕의 의지에 묶여 있다. 얼음왕관 꼭대기에, 아마도 영원히 갇혀버린 리치 왕이지. 우리는 자유를 갈망한다. 너도 그러했듯이." 안힐드가 실바나스 옆에 무릎을 꿇었다. 다른 발키르는 서로 팔짱을 끼고 주위에 둘러섰다. "우리를 품어줄 존재가 필요하다. 우리와 비슷한 자. 전쟁의 자매. 강하고 삶과 죽음을 이해하는 자. 빛과 어둠을 본 자. 그리고... 삶과 죽음의 힘을 지닐 가치가 있는 자."



"우리에겐 네가 필요하다." 아가타가 다시 말했다. 검은 머리가 빛 속에서 자유로이 날리고 있었다.



"내 자매들은 영원히 리치 왕의 힘을 벗어나 자유로워질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영혼은 네게 귀속된다." 안힐드가 말을 이었다. "실바나스 윈드러너, 어둠의 여군주, 포세이큰의 여왕... 넌 발키르 자매들과 함께 다시 산 자들의 세계를 거닐 것이다. 그들이 사는 한 너도 산다. 자유, 삶, 그리고 죽음을 극복하는 힘. 이것이 우리의 맹약이다. 우리의 축복을 받아들이겠는가?"



실바나스는 입을 열어 제안에 답했다. 하지만 바로 답한 것은 아니었다. 도사린 망각이 그녀를 공포로 가득 채웠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분노가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이것이 그녀가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하지만 두려움에 쫓겨 섣불리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 이상의 무언가를 느낄 때까지 기다렸다. 유대감. 자매애. 내 자매들. 서로 멀어지면 그들은 모두 덫에 갇힌다. 하지만 함께라면 그들은 자유롭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라면 자신의 운명을 연기할 수 있다.



"좋다. 맹약을 맺겠다." 실바나스가 말했다.



안힐드는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났다. 그녀의 모습은 흐릿한 유령 같았다. "맹약은 맺어졌다, 실바나스 윈드러너. 내 자매들은 너의 것이고, 넌 그들의 삶과 죽음을 지배한다." 긴 침묵이 지난 후, 안힐드가 말을 이었다. "내가 널 대신하겠다."



빛은 눈을 멀게 할 듯 밝았다.



실바나스는 깨어났다. 그녀의 육신은 비틀렸지만 온전했고, 거대한 얼음왕관 성채의 기둥이 마치 묘비처럼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힐드는 사라졌다. 실바나스는 여덟 발키르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들이 사는 한, 실바나스도 살 것이다.





길니아스



"네가 뭔데 내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냐?" 가로쉬가 자신의 전쟁늑대를 앞으로 몰아붙이며 물었다. 이 거대한 오크는 육중한 몸뚱이를 실바나스에게 불쾌할 만큼 가까이 접근시키고는 똑바로 노려봤다.



실바나스는 움직이지도, 움츠러들지도 않았다. "나도 한때는 당신과 같았소, 가로쉬." 그녀는 대족장만 들을 수 있는 조용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날 섬기는 자들은 도구였지. 내 화살통 속의 화살들." 그녀는 손을 들어 천천히 두건을 벗었고, 어두운 시선으로 가로쉬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녀의 눈은 살아 있었다. 지나치게 큰 검은색 눈동자 깊은 곳에서는 마치 붉은 잿불처럼 분노가 불타올랐다.



그 순간, 어느 누구도 감히 실바나스 윈드러너의 눈을 바라보지 못했다. 가로쉬 헬스크림을 제외하고는.



그가 본 것은 거대하고 검은 공허, 무한한 어둠이었다. 그 눈에는 두려움과 함께 또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위대한 대족장도 공포에 질리게 하는 무언가였다. 그의 늑대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가로쉬 헬스크림. 난 죽은 자의 세계를 걸었소. 무한의 어둠을 봤소. 당신이 무슨 말을 하든, 무슨 짓을 하든, 날 겁먹게 할 수는 없소."



어둠의 여군주를 둘러싸고, 보호하던 언데드 군대의 육신과 영혼은 아직 그녀의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화살통 속의 화살이 아니었다. 무한에 맞선 보루였다. 현명하게 사용해야 했다. 그리고 그녀가 산 자의 세계를 거니는 동안 멍청한 오크가 그들을 모두 소모해 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대족장은 도끼를 다시 등에 멨고, 늑대를 서서히 실바나스에게서 물렸다. 긴 시간이 흐른 후, 마침내 그는 그 눈에서 시선을 뗐다.



"좋다, 어둠의 여왕." 그는 모두가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소리로 말했다. "길니아스를 점령하자... 네 방식대로."



그는 탈것에 박차를 가해 앞으로 달려나갔고, 진흙탕을 지나 천천히 자신의 부대를 향해 다가갔다. '지켜보리라.' 가로쉬는 생각했다.



'나, 헬스크림의 눈이 널 주시할 것이다. 그 누구보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