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영원꽃 골짜기


영원꽃 골짜기는 판다리아의 중심부에 숨겨진 나름의 작은 세상과도 같았다. 고요하고도 따스한 바람이 금빛 잔디로 뒤덮인 언덕을 씻었고, 나뭇잎과 꽃잎이 떨어져 내리며 주위를 달콤한 향기로 가득 채웠다. 보통 나뭇잎이나 꽃잎같이 메말라서 바스락거리지 않고 며칠 동안이나 생생하고 보드라웠다.

눈앞에 보이는 많은 것들이 내가 들었던 영원꽃 골짜기의 전설과 들어맞는 듯했다. 판다리아 곳곳의 어린 아이들은 모두 이 골짜기의 전설을 들으며 자란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건, 이곳에 마법이 깃든 웅덩이가 여럿 있다는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그 웅덩이에 있는 물이 기적을 일으킨다고도 했다! 영원꽃 골짜기에는 분명히 무언가 특별한 점이 있었고, 이곳에 대한 전설이 사실인지 확인해보고 싶은 이는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판다렌 난민 수십 명이 황금빛 골짜기로 모여들었다. 난민 중 대부분은 쿤라이 봉우리에서 쫓겨왔으며, 그들의 고향은 야운골에 의해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불쌍한 난민들이 가지고 나올 수 있는 짐은 모두 챙겨 나오려고 했다지만, 대부분 등에 멘 옷가지 몇 벌이 전부였다. 운이 좋은 이들만 야크 한두 마리나 집안의 가보, 또 며칠 동안 연명할 수 있을 정도의 음식을 가져올 수 있었다.

나는 단 둘이서 이동하던 난민들을 만났다. 부웨이라는 판다렌과 그의 아들 작은 푸였다. 그들은 입을 굳게 닫고 있었지만, 내가 스톰스타우트 특유의 매력을 한껏 발휘하자,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부웨이와 그의 어린 아들은 쿤라이 봉우리에서 모든 것을 잃었다고 한다... 다른 가족들도 포함해서. 이제 그들은 안개내림 마을로 가고 있다. 쿤라이에서 쫓겨난 판다렌들이 영원꽃 골짜기에서 주로 정착하는 곳이었다.

부웨이와 그의 아들 작은 푸는 다른 난민들과 같이 영원꽃 골짜기는 평화로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누군들 그러지 않았겠는가? 며칠 전만 해도 이 골짜기는 수천 년 동안 판다리아의 다른 지역과 단절된 곳이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천신들이 계속해서 영원꽃 골짜기를 수호해왔다. 전설적인 존재인 천신들은 특별한 관리자들을 엄선해 황금 연꽃이라는 단체를 만들었고, 이들이 천신을 도와 영원꽃 골짜기를 지켰다. 내가 만났던 판다렌들은 그 성스러운 단체의 일원이 되는 것이 정말 커다란 명예라고 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어느 날 신처럼 생긴 생물이 불쑥 나타나서는 내게 친구와 가족들을 떠나서 여생을 비밀에 싸인 골짜기에서 보내야 한다고 강요한다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나는 왜 난민들이 영원꽃 골짜기로 향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곳엔 수호자인 천신과 그들을 돕는 황금 연꽃이 주둔하고 있으니 아마도 이곳이 판다리아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리라.

아니, 지금까지는 그랬다.





부웨이는 영원꽃 골짜기가 한때는 모구 제국의 중심지였다고 했다. 최근 이 커다란 골칫덩이들이 골짜기 안쪽으로 들어가는 길을 찾아냈고, 자신들의 옛 영토를 되찾으려고 하는 모양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골짜기를 모구가 지배했다는 걸 믿고 싶지 않았지만, 사방엔 놈들의 모습을 한 동상이 천지였다!

모구가 나타났다는 소식이 돌았지만, 부웨이와 그의 아들 작은 푸는 날이 갈수록 기운을 차렸다. 그게 내 덕분이라면 좋았겠지만, 사실 모두 내 애완동물인 띠너구리 스싸이 때문이었다. 스싸이는 쿤라이 봉우리를 벗어나자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던 문제를 이겨냈다. 그렇지만 만일을 위해 나는 부웨이와 푸에게 스싸이가 예민하게 굴 때 간식과 장난감으로 달래는 법을 가르쳐줬다. 그들은 오랫동안 스싸이와 함께 놀았다. 귀여운 띠너구리와 함께하면서 모든 것을 잃었던 슬픔에서 잠시나마 벗어났을 게 틀림없다. 특히 작은 푸가 그랬다. 그 아이는 스싸이를 데리고 놀 때만큼은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푸는 스싸이를 돌보는 데 도사가 됐다.

마침내 안개내림 마을에 도착했을 때, 그 마을이 얼마나 거대하고 또 얼마나 활기찬지 나는 깜짝 놀랄 지경이었다. 마을 거리에 깔린 돌은 오래되어 많이 닳은 것처럼 보였지만, 건물들은 대부분 새로 지어진 것 같았다. 부웨이 말로는 안개내림 마을은 황금 연꽃 소유의 건물 몇 개만 있던 작은 마을이었는데, 쿤라이에서 온 판다렌들이 빠르게 마을을 확장했다고 한다.

난민들은 잠시라도 편히 쉬는 법 없이, 수다와 웃음소리, 노랫소리로 마을 곳곳을 가득 채웠다. 난민들이 가져온 수레는 대부분 부숴서 임시 탁자와 시장 가판대로 다시 만들어졌다. 나머지 조각들은 녹색 물고기 카레가 담긴 커다란 냄비를 끓일 장작이나 땅콩 양념을 바른 닭을 굽는 꼬치로 쓰였다. 나는 이따금 유랑도에서 봤던 것과 똑같은 혼령을 봤다. 이 작은 말썽꾸러기들은 지붕 위에서 난민들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어느 순간 시야에서 사라지곤 했다.

안개내림 마을을 찾은 건 아주 즐거운 경험이었지만, 난 영원꽃 골짜기의 다른 곳도 탐험해보고 싶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마을을 떠났다. 부웨이와 푸는 잠에 빠져 있었다. 푸는 팔에 스싸이를 꼬옥 안은 채 웃고 있었다. 원래 그 띠너구리를 데려갈 생각이었지만, 이놈 덕분에 푸가 너무 행복해 하니 어쩔 수가 없었다. 푸가 겪은 지난 일들을 생각해 보면, 스싸이를 아이에게 줘야 할 것 같았다. 게다가 난 허구한 날 옷이나 음식, 내가 마시는 차에서 이 띠너구리 털을 떼어내는 일에 진력이 나던 참이었다. 아니, 사실... 아이처럼 훌쩍이지 않으려고 애쓰며 부웨이와 푸에게 작별 편지를 남기는 동안, 그렇게 나 자신을 타일러야 했다. 편지를 남겨 놓고 나는 마을을 떠났다.





동이 막 트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아니 무언가가 골짜기를 거니는 내 뒤를 따라왔다. 직감적으로 느낀 것이었지만, 실제로 그 존재를 눈치챈 것은 공기 중에 향냄새처럼 풍기는 낯선 악취 때문이었다. 이 냄새를 맡으니 크라사랑 밀림에 있던 리샨과 다른 낚시꾼들이 떠올랐다. 꿉꿉한 털 냄새, 그리고 생선 조각 냄새가 한데 섞인 악취였으니까. 나는 냄새를 쫓아서 커다란 바위 뒤에 숨어 있던 추적자를 잡았다. 처음 봤을 땐 우리 메이 할머니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할머니처럼 털이 북슬북슬하진 않았다.

그루멀이었다. 예전에 쿤라이에서 이 기묘한 생물체를 본 적이 있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루멀은 산 타기의 명수이며, 엄청난 후각을 가진 추적자다. 그들은 험준한 산맥을 돌아다녀서 미신에 집착하며, “복덩이”라고 부르는 동전이나 토끼발 같은 부적을 가지고 다니는 습관이 있었다. 그루멀들은 가장 소중히 여기는 복덩이에게는 이름까지 따로 지어주곤 했다. 새로 만난 이 그루멀에게서 악취가 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듯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물고기 꼬리’라고 해요!” 그루멀이 말했다. “첸 스톰스타우트 님께서 당신을 찾으라고 절 보내셨는데, 정말 힘들었어요. 당신이 리 리인지 확인하느라 며칠을 따라만 다녔으니까요. 당신 냄새가 충분하지 않아요. 아무래도 복덩이를 더 좋은 것으로 바꾸셔야겠어요.”

“그냥 내가 누군지 물어보지 그랬어?” 난 이렇게 물었다.

“그루멀은 항상 그 무엇보다 코를 믿어요.”

그루멀은 내게 첸 아저씨가 보낸 두루마리를 건넸다. 양피지에 물든 맥주 얼룩과 매운 두부 조각 사이로, 나는 첸 아저씨가 마침내 그 묵직한 엉덩이를 일으켜 양조장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공포의 황무지라는 애매모호한 이름을 가진 지역에 있는, 일종의 임시 거주지인 일몰 양조정원에서 스톰스타우트 가문의 판다렌들을 더 찾아냈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리고 편지 마지막에는 “리 리야,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장벽 밖으로 넘어가지 마라! 그곳은 보통 위험한 곳이 아니란다. 경비탑에 도착하거든 그냥 거기 있으려무나.”라고 쓰여 있었다.

허락 없이 내가 여기저기를 돌아다녔어도 첸 삼촌이 전혀 꾸짖지 않으신다는 사실이 신경 쓰였다. 내 잘못도 그냥 넘어가시려고 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공포의 황무지에서 무언가 큰일이 생긴 모양이다. 영원꽃 골짜기를 떠나기는 정말 싫었지만, 아무래도 첸 아저씨에게 내 도움이 무척 필요한 것 같았다. 게다가 뭐... 장벽 위를 걷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어서요, 서두르세요!” 전령 '물고기 꼬리'는 용의 척추가 영원꽃 골짜기를 가로지르는 서쪽을 가리켰다. “제가 장벽까지 안내해드릴게요. 하지만 서두르셔야 해요. 마침 동풍이 불고 있거든요. 동풍이 불면 운이 좋고 여행길이 안전해져요!”

멀리서 바라봐도 용의 척추는 거대했다. 그 장벽을 처음 본 건 네 바람의 계곡에서였다. 그때부터 계속, 나는 판다리아를 높은 곳에서 죽 훑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자, 마침내 그 날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