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르테마르는 에이타스가 도착할 즈음에도 생각을 정리하지 못했다. 그가 성난태양 첨탑을 지나 대마법사가 도착하기로 예정된 전당에 도착했을 때, 부드러운 진홍빛 양모 옷을 든 할두런이 그를 멈춰 세웠다. 로르테마르는 옷을 받아 들고는 위로 들어올려 펼쳐보았다. 옷이 펼쳐지자, 화려한 황금 불사조 문양이 모습을 드러냈다. 실버문의 휘장이었다.


"싫네." 그가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그의 동료에게 의복을 넘겼다.


"입는 게 좋을 거야." 할두런이 강요했다.


"무슨 상관인가?" 그가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가며 답했다. "실버문을 섬기는 자는 누구든 입어야 해."


"이건 국가의 상징일세." 할두런이 그를 쫓아가며 말했다. "자네는 우리 국가의 지도자이니 참여해야 지."


"난 섭정일세." 로르테마르가 계속 걸어가며 말했다. "왕이 아니야."



사라 파인이 쓴 “태양의 그림자”는 2008년 세계 창작문 경연대회 당선작입니다. 경연대회에 선보였던 이야기는 Blizzard.com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 공식홈페이지 아제로스의 지도자들 : 태양의 그림자 - 바로가기




태양의 그림자



로르테마르의 책상은 수많은 종이 더미에 뒤덮여 빈 곳이 보이지 않았다. 보고서, 공문서, 주문서, 재고품 목록이 당장에라도 무너질 듯 위태위태하게 쌓여 있었지만, 정리정돈은 이미 포기한 지 오래였다. 대부분이 쿠엘다나스와 태양샘의 짧지만 처참했던 전쟁에 대한 내용이었지만 지금은 그 무엇도 그의 머릿속에 있지 않았다.



그의 손에는 봉투에서 꺼낸 편지 한 통이 들려 있었다. 그 봉투에는 달라란의 상징인 거대한 눈 모양의 보랏빛 봉랍이 찍혀있었는데, 그 눈이 마치 자신을 비난하듯 쳐다보고 있었기에, 그가 받고 폐기했던 다른 편지들을 떠오르게 했다. 로르테마르는 봉합을 뜯고 안에 있는 양피지를 깔끔히 빼냈고, 동일한 크기의 꼼꼼한 필적이 담긴 편지를 확인했다.



최근 대마법사 에이타스 선리버는 섭정 로르테마르 알현을 수 차례 요청해왔다. 하지만 로르테마르는 그때마다 그 요청을 정중히 거절했다. 쿠엘다나스에 있었던 일 이후로 그는 바깥 세상의 일을 잊기 위해 몸부림쳤으나, 그래 봤자 결국 세상 자체가 그에게 다가올 것임을 깨달았다.



로르테마르는 한숨을 쉬고 의자에 몸을 뉘였다. 이번 편지는 전의 것보다 훨씬 짧았다. 에이타스의 이번 편지에는 요청을 구하는 내용이 담겨있지 않았다. 단순히 날짜와 시간만이 적혀있을 뿐이었다. 로르테마르는 편지의 가장자리를 엄지손가락으로 잡고 조금씩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그는 에이타스가 무엇을 요청할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응해야 할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 * * * *






로르테마르는 에이타스가 도착할 즈음에도 생각을 정리하지 못했다. 그가 성난태양 첨탑을 지나 대마법사가 도착하기로 예정된 전당에 도착했을 때, 부드러운 진홍빛 양모 옷을 든 할두런이 그를 멈춰 세웠다. 로르테마르는 옷을 받아 들고는 위로 들어올려 펼쳐보았다. 옷이 펼쳐지자, 화려한 황금 불사조 문양이 모습을 드러냈다. 실버문의 휘장이었다.



"싫네." 그가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그의 동료에게 의복을 넘겼다.



"입는 게 좋을 거야." 할두런이 강요했다.



"무슨 상관인가?" 그가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가며 답했다. "실버문을 섬기는 자는 누구든 입어야 해."



"이건 국가의 상징일세." 할두런이 그를 쫓아가며 말했다. "자네는 우리 국가의 지도자이니 참여해야 지."



"난 섭정일세." 로르테마르가 계속 걸어가며 말했다. "왕이 아니야."



"그런건 중요치 않네, 로르테마르. 지금 꼴은 딱 순찰대원같군."



로르테마르가 걸음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난 순찰대원일세." 그의 의도보다 훨씬 날카로운 말투였다.



"전직 순찰대원이었지. 지금은 아니야." 할두런은 한숨을 쉬었다. "자네는 다시는 순찰대로 돌아갈 수 없네, 로르테마르. 그 사실은 우리 모두 알고 있어."



로르테마르는 머리를 숙인 채 크게 심호흡했다.



"이러다 늦겠네, 할두런."



그는 계속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자신을 뒤따라오는 할두런의 발소리를 들었다.



롬매스는 현관에서 지팡이에 크게 의지한 채 먼 벽을 멍하니 바라보며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로르테마르와 할두런이 들어오는 모습을 흘끗보고는 얼굴에 순간적인 불만의 기색을 보였으나, 이윽고 말 없이 몸을 돌렸다. 그가 할두런이 아닌 자신을 순찰대 사령관처럼 내세웠던 로르테마르의 행보에 격렬히 이의를 제기했던 때가 있었으나, 더는 아니었다. 롬매스가 곁에서 가시처럼 행세했던 때를 생각하며 로르테마르는 가슴속으로 안쓰러움을 느꼈다. 캘타스의 마지막 배신이 그의 가장 충직했던 대변자에게도 값을 치르게 한 것이다.



그들 앞의 공간이 빛을 내는 보랏빛이 되어 희미하게 반짝이기 시작했다. 틀림없이 비전 마법의 징후였다. 잠시 후 푸른빛을 띄는 허연 빛이 현관을 채우기 시작했고, 이윽고 에이타스가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로브를 털어 옷차림을 정돈했는데 로르테마르는 그 모습이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했다. 키린 토의 우아한 진보랏빛 마법매듭 의복은 그의 구릿빛 머리색과 어우러지지 않았고 그의 호리호리한 체구에 맞지도 않았다. 그가 보낸 편지와 어디선가 들은 소문에 따라 로르테마르는 그를 이상주의적이지만 예리하며, 달라란에서의 위치에 비해 너무 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나이 지긋한 신도레이 마법사 대부분이 숨을 거둔 상태였기에, 결과적으로 로르테마르는 에이타스의 야망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최소한 그들 중 누군가는 희망을 잃지 않아야 할 테니.



"고향에 온 걸 환영하오, 대마법사 선리버." 그가 말했다.



에이타스는 웃음기를 머금었다. "감사합니다. 테론 군주님." 그가 우아하게 머리를 숙이며 답했다. "제가 돌아올 걸 알고 계셨군요."



"그렇소." 로르테마르가 외교적인 어투로 답했다. "그대의 서신을 통해 방문 의도를 알았지. 이쪽으로 오시오. 내 조언자들이 그대의 항고를 들을 터이니."



보통 때였다면 로르테마르가 직접 모두를 이끌고 궁전의 북쪽 끝에 있는 으리으리한 회의장으로 갔을 터였다. 이런 경우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화려한 방이었다. 맑은 날이었고, 지평선은 유리 조각만큼이나 날카롭게 펼쳐져 있었다. 이곳에서도 쿠엘다나스 섬이 보였다. 로르테마르는 쿠엘다나스를 보고 싶지 않았기에 넓은 마당의 동쪽에 있는 실버문의 그늘진 둥근 지붕을 내려다보았다. 모두가 자리에 앉자 에이타스가 입을 열었다.



"전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여러분 모두 왜 키린 토가 노스렌드로 옮겨야만 했는지 아실 겁니다."



"물론이지, 말리고스 때문이었소." 로르테마르가 답했다. "그래, 원하는 게 무엇이오?"



에이타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푸른용군단의 힘과 그들이 우리에게 가하는 위협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큽니다. 쿠엘탈라스와 달라란의 마법사들이 전처럼 서로 힘을 합쳐야만 합니다."



"안 돼."



말에 에이타스는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고, 입가와 눈썹 사이에 주름이 잡혔다. 이의를 제기한 자는 로르테마르가 아니었다. 반박한 자를 돌아보며 에이타스가 입을 열었다. "전 섭정에게 물은 것입니다. 대마법학자님."



롬매스는 너무나도 씁쓸하게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단 기침에 가까운 소리였다. "그럼 섭정님께서 제가 답할 권한이 있는지 손수 결정해 주십시오."



"어떤 상황에서도 그대의 의견을 듣지 않을 이유는 없다고 보오." 로르테마르가 못마땅함을 최대한 감춘 채 말했다. "의견을 말하시오."



밝은 방이었음에도 롬매스의 눈이 반짝였다. 빛을 잃는 편이 마땅할 상황이었다. "정말 관대하시군요, 로르테마르 님." 그가 에이타스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뱀이 또아리를 트는 것 같았다. 낮고, 사나웠으며, 위협적이었다.



"혹시 그대가 떠나기 전에 모데라가 한마디 했소, 에이타스? 본인의 의견이 아닌 것 같군. 그대의 말 속에 그녀의 거짓된 외교가 묻어나오. 그녀였다면 감히 여기 직접 나타나진 못했을 테지. 그 정도 개념은 있을 테니. 그 세심한 배려에 감사라도 해야 할 판이오."



"모데라는 이 문제에 있어 저와 의견을 같이 합니다." 에이타스가 형식적으로 답했다. 롬매스가 던진 미끼를 물지 않을 참이었다.



"그녀가 의견을 같이 한다라." 롬매스가 생각에 잠기며 말했다. "그대가 그녀와 의견을 같이 하는 게 아니고? 그들은 그대를 보내 그들의 생각을 전달하려고 했을 테니 그대의 의견은 반도 반영되지 않았을 테지."



"적당히 하세요, 롬매스." 에이타스의 참을성이 무너졌다. "개인적인 감정 섞인 독설 말고 건설적인 말은 할 줄 모르십니까?"



"그댄 아무것도 모르오." 롬매스가 확신에 찬 차분한 어투로 말했다. "놈들은 과욕을 부렸소. 그 결과로 말리고스와 아서스 모두와 맞서게 됐지. 그리고 당연하지만, 겁에 질린 상태요. 그들에겐 자신들의 능력을 넘어선 존재의 도움이 필요하지. 그들이 비전에 관한 문제가 생길 때마다 누구에게 도움을 청했더라? 아, 그래, 우리에게 청했지. 키린 토의 일원들은 그대가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고 주장할 거요. 그건 그대의 능력이 매우 소중하기 때문이지. 하지만 그대가 불편한 존재가 되는 순간, 가차없이 버릴 거요." 그는 옆으로 고개를 젖혔다. 그의 길다란 귀 중 하나가 거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파르르 떨렸다. 그는 할두런을 바라보고는 곧 로르테마르로 시선을 돌렸다. "이분들에게 물어보시오. 이분들도 알고 있을 테니. 나만큼은 아닐 테지만."



에이타스는 멍하니 롬매스를 바라보았다. "쿠엘탈라스와 키린 토는 이천 년 넘게 동맹관계를 유지해왔습니다." 그가 말했다. "우리가 호드에 정식으로 합류한 후로 긴장감이 감돌긴 했지만..."



롬매스는 다시 웃었다. 이번에는 호탕한 웃음소리였다.



"호드에 합류한 후라..." 그가 번복했다. "난 그 부분이 앞 뒤가 안 맞는다고 생각하오. 그리고 대마법사 선리버, 그대는 우리가 왜 호드에 합류하게 되었는지 정확히 기억하시오?"



에이타스는 답하지 않았다. 다만 꿈쩍도 않은 채 롬매스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기념비적인 배신." 롬매스는 거의 속삭임에 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눈은 수십 년간 억누르지 못한 이글거리는 분노로 반짝거렸다. "달라란에서 있었던... 키린 토의 영원한 감시의 눈 바로 아래에서 행해졌던 바로 그 배신."



"그건 이 일과 아무 상관도?"



"이런 말을 하려는 건가?" 롬매스가 끼어들었다. "키린 토는 아무 것도 안 했다고. 미리 방지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막으려고도 하지도 않았다고. 그 대신..." 그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실버문만큼이나 오랫동안 집이라고 불러야만 했던 그 감옥에서 썩어버리게 버려두었다고. 우리의 대왕자가 인간의 삶보다도 긴 시간을 자신의 고향 땅이라 믿어야만 했던 그 도시에. 키린 토의 요청으로 사수한다며 목숨을 버려가며 싸웠던 바로 그 도시에. 우리가 교수형 집행인의 올가미에 걸려 발버둥치는 동안 벽 뒤에서 침묵한 채 보고만 있었다고. 그들의 도시를..."



"키린 토는 새로운 지도자의 다스림 아래 있습니다." 에이타스가 답했다. 로르테마르는 그가 젊은 대마법사 치고는 어조를 잘 조절한다고 느꼈다.



"그대도 알다시피 그건 거짓말이오." 롬매스가 말했다. "로닌이 그들의 우두머리이긴 하나, 아직 모데라와 앤자이럼이 의회에 남아있소. 가리토스가 우리에게 사형을 선고 했을 때 우릴 비웃으며 외면했던 바로 그자들이지. 지옥에서 썩거나 스컬지가 되어 아서스의 군대로 들어가 마땅한 자들이오." 그가 조롱했다.



"만에 하나라도 6인의 의회 중 그 누구도 아서스의 지배 아래 있게 되지는 않길 바랍시다, 롬매스." 할두런이 조용히 말했다.



"키린 토를 그렇게 멸시하면서도 잘도 꿰고 계시는군요, 대마법학자님." 에이타스가 말했다.



"그게 쿠엘탈라스의 대마법학자인 나와 그대의 차이지." 롬매스가 반박했다. "그리고 대마법학자로서, 절대로 내 마법사들이 키린 토의 이름 아래 싸우게 두진 않을 것이오. 절대로."



로르테마르는 입을 꼭 다문 채, 손가락으로 매끄러운 탁상 위를 초조하게 두드렸다. 도를 넘을 듯 말 듯 불안 불안했던 롬매스가 마침내 그 선을 넘은 것이다.



"그 정도면 충분하오." 로르테마르가 차갑게 말했다. "그대에겐 그런 최후 통첩을 할 권한이 없소. 노스렌드에 우리 병력을 파병할지 결정하는 건 내 몫이오. 내가 결정을 내리면 그대들은 따라야 할 것이오.



"이제." 그가 일어선채 말했다. "이 논의는 더 많은 언쟁을 불러오기만 할 거라는 게 확실해졌소. 만약 둘이 이런 식으로 계속 싸우고 싶다면 마음대로 하시오. 나는 더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소. 순찰대 사령관도 나와 같은 생각일 거요."



"남쪽에 볼 일이 있소." 그가 계속 말했다. "내일 떠날 것이오. 내가 그 계획을 취소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군. 여기 더 머무는 것은 환영하오, 대마법사. 하지만 난 며칠간 떠나 있을 것이오."



에이타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누가 봐도 분노를 숨기는 데 실패한 것 같았다. 로르테마르는 못마땅해하는 그의 모습에 만족해했다. 그는 떠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당신이 뭐라 하든 달라란으로 갈 자는 있을 겁니다, 섭정님." 방에 에이타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로르테마르는 잠시 멈추고 고개를 돌려 에이타스를 보았다. 에이타스는 말을 이었다. "실버문의 섭정을 대신하여 말할 기회를 허락해주십시오. 신도레이의 관심사가 보호될 수 있길 바라겠습니다."



롬매스는 대답 대신 콧방귀를 뀌었다. 로르테마르는 잠시 에이타스의 요청을 고려해보았으나, 생각해보면 이 젊은 엘프는 요청할 입장이 아니었다. 그들 모두 에이타스의 정치적 수완이 이 방의 다른 이들보다 훨씬 뛰어남을 알고 있었다.



"그대가 머물 방으로 안내할 하인을 부르겠소, 대마법사." 로르테마르가 말했다.





* * * * *






에이타스는 롬매스를 향해 인상을 찌푸리긴 했으나 적당히 품위를 갖춘 채 자리를 떠났다. 대마법학자 롬매스는 반대 의사를 확고하게 내세웠으나, 로르테마르는 에이타스가 사라지자마자 흔들리는 걸음걸이와 기력을 모두 소진한듯한 얼굴로 힘들어하는 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로르테마르는 조심스럽게 롬매스의 약한 모습을 담아두었다. 그 의지도 언젠가는 꺾일 수 있겠군.



과거였다면 로르테마르는 분명 다른 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비열하다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그의 방 창가에 홀로 앉아 오후의 논쟁을 곰곰이 생각했다. 그는 첨탑의 정원을 바라보다 무의식적으로 두 손 사이에 긴 커튼을 잡고 비틀었다. 에이타스의 결연한 목소리가 머리 속을 울리고 있었다. 당신이 뭐라 하든 달라란으로 갈 자는 있을 겁니다. 로르테마르는 그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롬매스의 경멸감에 동의하고 있었다. 섭정으로서 자신을 키린 토의 옷으로 은폐하고 그들의 문장이 찍힌 옷을 입고 있는 몸으로서 어떻게 에이타스를 믿을 것인가? 에이타스는 마력 전쟁에서 헌신적으로 싸웠다. 그 점은 확실했다.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을 설득시킬 셈인가? 또한 섭정으로서 그를 따르는 자들이 그 모호한 세력에 흡수된다면 그들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인가?



로르테마르의 무의식적이고 거친 행동에 커튼이 팽팽해지다가, 이내 뜯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 * * * *






"모르겠네." 그날 저녁, 할두런은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는 아직까지 창가에 말 없이 앉아 여명을 응시하고 있는 섭정을 발견했다. 한 번 흘끗 쳐다봤을 뿐인데 그는 자연스럽게 술 선반으로 가서 옛 친구를 위해 잔 하나를 가득 채워왔다.



"그는 순수한 의도로 제안한 것 같아." 할두런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런 순수한 의도를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네. 이제 우리 쪽 사람들의 말조차 못 믿을 판인데."



로르테마르는 술잔을 다시 채우기 위해 일어서서 선반으로 갔다. "만약 그에게 우리를 대표할 권한을 준다면... 그가 원하던 원치 않던 내가 주지 않을 뭔가를 약속할 것 같아 걱정되네." 로르테마르는 잠시 멈추고는 훌륭하게 조각된 천장을 바라보았다. "또 만약 충분한 수의 신도레이가 그를 따라 달라란으로 간다면, 사실상 그가 그들의 지도자가 될 건 뻔하지. 하지만 왕, 아니 실버문의 권한도 없이 그렇게 행세하는 건 원치 않네."



"롬매스가 꽉 막힌 성격이 아니었음 좋았을 걸." 생각에 잠긴 할두런이 말했다. "그는 달라란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네. 스스로 대마법사의 칭호도 따냈고... 키린 토와 충분한 경험을 갖고 있고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가에 충분한 충성심을 갖고 있으니 믿을 수 있다고 보이네. 에이타스를 대처하기에 적합할 거야."



로르테마르는 할두런의 말에 희미하게 웃었다. "자네가 롬매스에 대해 좋게 말하다니, 살다 보니 별걸 다 보는군."



"난 므우루와의 건을 한번도 승인한 적 없네, 혈기사의 형태도 그렇고." 할두런은 인정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그를 의심할 이유도 없고 말이야. 만약 그가 우릴 배신할 거라면 예전에 했겠지. 켈타스의 그때..." 할두런의 목구멍 밖으로 말이 나오려다 들어갔다. 그리고 한동안 둘 다 말이 없었다.



"음."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랬겠지."



"그래, 어떻게 생각하나?" 로르테마르가 주제를 바꾸고 창가의 자리로 돌아갔다."



"에이타스와 달라란 건은 어떻게 처리하지?"



"에이타스는 자신을 키린 토의 일원으로 생각하네." 할두런이 답했다. "그리고 저 어깨덧옷을 걸치고 싶어하는 이들도 수두룩해. 만약 키린 토가 블러드 엘프를 인정하려 한다면 그걸 막을 순 없을 걸세."



"그렇지, 막을 수 없네." 로르테마르가 답했다. 그는 잠시 침묵했다. "하지만 예감상 마력 전쟁에 대한 공식적인 관여는 삼가는 편이 좋을 것 같네. 에이타스는 우리에게 주기적으로 보고해야 할 거야. 그리고 그에게 확고한 제한을 두어야겠지. 그 편에 서는 자는 쿠엘탈라스가 아닌 키린 토의 깃발 아래 있게 될거야."



할두런은 입 한구석을 삐쭉 올려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로르테마르는 친구의 눈에서 우울함을 읽지 못한 척 애썼다. "아침에 원정순찰대가 되겠다는 말은 왜 한 건가? 매일 왕처럼 말하고 다니지 않나, 로르테마르." 할두런이 말했다.



그 위치에서 할두런은 잔을 꽉 쥐는 로르테마르의 손가락을 볼 수 없었다.





* * * * *






며칠 뒤 로르테마르는 붉은매타조위에 오른 채, 동부 역병지대의 북쪽 구릉지를 향했다. 그는 잠시 멈추고 대지를 바라보았다. 그는 엘프였으나, 그보단 순찰자였다. 열린 숲의 자식이자 금색 잎과 투명한 물의 자식... 동부 로데론의 갈라지고 거품이 낀 토양과 말라 빠진 나무들이 그의 가슴을 뒤틀어 메스꺼움을 느끼게 했다. 그의 백성들이 경계를 멀리했다면 쿠엘탈라스 또한 같은 운명을 맞았으리라.



로르테마르는 뒤를 돌아보았다. 할두런과 롬매스의 고집으로 세 원정순찰대 근위병들이 그를 호위하고 있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할두런이 말했다. "가면 안 된다고 봅니다. 에이타스가 왔을 때 전 섭정님이 이 어리석은 생각을 포기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 말은 안 들으실 것 같군요. 그래도 호위병은 데려가십시오.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습니다." 롬매스는 혈기사 몇 명을 보내려 했다. 뻔한 결정이었다. "그들은 환영 받지 못할 거요." 로르테마르가 지적했다. "나도 그렇겠지만..." 그가 조용히 덧붙였다. 다행히 롬매스는 로르테마르의 말에 토를 달지는 않았다.



산등성이에 오른 그는 마침내 그가 보고자 하는 조망에 도착했다. 얼핏 봤을 때는 그저 툭 튀어나온 바위투성이의 벽면처럼 보였지만 그는 그의 본 모습을 알고 있었다. 그는 탈 것의 머리를 확 돌려 길을 고르고는 속도를 높였다. 이미 정찰병들이 그들을 발견했기에 숨어서 갈 이유가 없었다.



그의 생각대로 구불구불한 길을 반쯤 올라갔을 때 두 사람의 형체가 돌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검을 맞부딪치고 길을 막아섰다. 역병지대의 음산한 고요 속에서 검의 울림이 맹렬히 퍼졌다.



"누구시길래 감히 쿠엘리시엔 오두막을 찾았는가?" 정찰병 중 한 명이 물었다.



로르테마르는 평온히 그를 내려다보았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아라. 내가 누군지 알지 않는가."



다른 정찰병이 그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그렇다고 당신의 방문을 환영한다는 건 아니지, 테론 군주."



로르테마르는 등에 매고 있던 두 개의 검을 풀어냈다. 그 모습에 놀란 쿠엘리시엔 정찰병은 손가락 관절이 하얗게 되도록 무기를 꼭 쥐었다. 로르테마르는 그 중 한 명이 손가락을 살짝 움직이는 걸 보았다. 아마 이 근처에 숨어있는 무수히 많은 정찰병들에게 보내는 신호이리라. 섭정은 조용히 검을 바닥에 내려놓고 활과 화살통을 옆에 내렸다. 그는 호위병들에게도 무기를 버리라는 신호를 보냈고, 호위병들이 무기를 버리자 눈썹을 치켜 올렸다.



"이 정도면 내 순수한 의도를 증명할 수 있겠나?"



첫 번째 리시엔 정찰병이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여기 왔는지 말해봐라."



"순찰대장 호크스피어와 대여사제 스카이콜러에게 전할 소식이 있다." 그가 말했다. "켈타스..." 그는 목을 가다듬고 말을 마쳤다. "켈타스 왕자에 관한 소식이다."



정찰병들은 순간 멈칫했다. 한 명이 다른 이들을 힐끔 바라보긴 했으나, 그들의 깨끗한 파란 눈은 절대 로르테마르를 떠나지 않았다. 결국 정찰병 중 한 명이 머리로 산등성이 쪽을 가리켰다.



"그럼 좋다." 그가 말했다. "어떻게 할지는 순찰대장님이 정하시겠지. 따라와."



다른 정찰병이 손가락을 까닥하자 로르테마르의 예상대로 바위의 협곡과 틈 사이에서 예닐곱 명의 리시엔 정찰병이 튀어나와 그와 호위병들이 바닥에 내려놓은 무기들을 수거했다. 로르테마르는 그들을 뒤따랐다.



오솔길의 꼭대기에 가까워지자 커다란 돌과 마른 덤불 근처에 자리잡은 쿠엘리시엔 오두막이 모습을 드러냈다. 원목 판자벽은 색이 바래고 무뎌져 있었다. 필히 역병의 여파 때문이리라. 또한 역병순찰대원들은 썩어가는 잎으로 빛을 은폐하고 있었다. 오두막이 눈에 들어오자, 로르테마르의 속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는 온통 녹색이던 이곳과, 자신에게 성난 칼을 드리워지는 대신, 밝은 환호가 반겨주던 시절을 외면하려 애썼다. 이미 지난 날의 이야기이다.



그는 자신의 매타조를 정찰병 중 한 명에게 건냈다. 그녀는 매타조를 넘겨받으며 그에게 의심 섞인 시선을 남겼다. 로르테마르가 보고 있을 때, 오솔길에서 그를 멈춰 세웠던 정찰병 중 하나가 몇 년 만에 보는 두 엘프와 함께 오두막에 도착했다.



"로르테마르 테론 님." 대여사제 오로라 스카이콜러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살짝 불친절함이 느껴졌다. "여기까지 오시다니 깜짝 놀랐습니다."



"용기가 가상하시군." 렌타르 호크스피어가 삐딱하게 말 했다. "감히 이곳에 얼굴을 드러내다니. 내겐 당신을 벌집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궁수들이 수십 명 있소."



예상은 했었지만 그의 말에 가시가 돋쳐있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천천히 떴다.



"소식이 있소." 그가 짧게 말했다. "그대들이 알아야 하오."



"편지를 보낼 수도 있었을 텐데?" 렌타르가 비꼬듯 말했다.



"읽기는 했을 것 같소?" 로르테마르가 답했다. 그리고 오로라의 입술 구석에 잡히기 시작한 작은 주름과 렌타르의 목에서 흘러나오던 으르렁대는 소리가 깊어져 그가 예상하는 답변을 대신했다. "하찮은 일로 이 먼 길을 온 게 아니오." 결국 그가 입을 열었다. "부디 내 말을 들어주시오."



렌타르와 오로라는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곤 고개를 돌려 오두막으로 향했고, 로르테마르는 하이 엘프들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며 그들을 따랐다.



동부 왕국의 원정순찰대 전초기지도 결코 풍족하지 않았으나, 쿠엘리시엔의 생활은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수많은 벽들에 검에 베인듯한 깊은 자국이 남아 있었고 바닥에 난 검은 얼룩은 분명 핏자국이었다. 그래도 엘프들의 오두막 관리 상태는 자랑할 만한 수준이었다. 커튼은 비록 헤지긴 했으나 꼼꼼한 바느질로 잘 마감되어 있었으며, 동부 로데론의 고대 지도도 벽에 잘 고정되어 있었다. 우아한 필체의 지도가 그려진 노란색 양피지 위에는 잉크 자욱 하나 떨어져 있지 않았다. 이것들을 보아하니 로르테마르의 속이 이상한 기분으로 울렁이기 시작했다. 마치 잊고 있던 옛 애인의 연애 편지를 발견한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원정순찰대의 삶을 살았으나 그 때의 삶이 먼 과거처럼 느껴졌다. 마치 꿈이었던 것처럼.



"여기요." 렌타르가 엄지손가락으로 작은 방의 문을 가리키고는 문을 밀어 쾅 하고 열어젖히며 말했다. "들어오면 닫으시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로르테마르에게 말했다.



로르테마르는 오로라와 마주하고 앉았다. 렌타르는 좁은 탁자 위에 있던 피 묻은 가죽 방어구를 치우고는 그녀 옆에 앉았다. 그리고 그 행위는 로르테마르에게 실소를 흘리게 할 뻔했다. 그들은 자신을 법정의 재판장 같은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할 말이 있다고 했지. 렌타르의 목소리가 잠적을 깼다. "한 번 해보시오."



"몇 주 전에 성난태양의 병력 대다수가 우리에게 돌아왔소."



렌타르와 오로라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커졌다. 그 반응은 로르테마르를 조금 우쭐하게 만들었으나, 결국 공허한 만족감일 뿐이었다.



"태양샘의 이름으로..." 오로라가 차분히 말했다. "그런 일이 있었다니 믿을 수가 없군요."



"그렇다면." 렌타르의 눈이 기묘하게도 반짝거렸다. 로르테마르는 그 모습에 롬매스를 떠올렸다. "공식적으로 사과하라는 왕자의 명령을 받고 온 거요?"



"그럴 수도 있었겠지." 로르테마르가 답했다. "만약 그가 살아 있었다면 말이오."



만약 그의 앞에 있는 두 하이 엘프가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고 한다면 지금은 그와 비교도 할 수 없었다. 둘 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제길, 어서 설명해보시오." 렌타르가 재촉했다.



로르테마르는 크게 한숨을 쉬고는 최근에 일어난 사건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 이야기를 처음부터 설명하는 게 이렇게 고통스러운 일이 될 거라곤 예측하지 못했다. 특히 이들은 자신을 철저히 경멸하는 자들 아닌가? 그는 목청 밖으로 한마디, 때로는 힘겹게, 말을 뱉어냈다. 방 저편으로 내뱉듯 토해내야만 했다. 이야기가 끝나자, 그는 잠에서 깨어난 듯 눈을 깜박였다.



"결국 태양샘이 우리에게 돌아왔군요." 오로라가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창 밖으로 돌렸다.



"그렇소." 로르테마르가 답했다.



역병지대 특유의 죽은듯한 침묵이 그들 사이에 퍼졌다. 로르테마르는 머리를 숙이고 잠시 상황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마지막 전투가 쿠엘다나스에서 펼쳐졌을 때 태양샘은 다시금 그 위엄과 긍지를 되찾았다. 그는 지금 렌타르와 오로라의 얼굴에 보이는 마비된 표정으로 태양샘을 바라보곤 했었다. 벌개진 얼굴에 기쁨 따윈 없었다. 그들은 이 대가가 이렇게 클지 꿈도 꾸지 못했다.



오로라의 목소리가 그를 깨웠다. "최근에 왜 마력 금단 현상이 완화됐는지 알 것 같군요. 따로 찾을... 필요가 없었어요."



"태양샘의 마법은 과거와는 다르오." 로르테마르가 말했다. "바꾸는 데 시간이 좀 걸릴 수도 있소."



"네, 좀 걸리겠지요." 오로라는 손을 뻗어 로르테마르가 못 보는 무언가를 잡는 듯한 시늉을 했다. 그리고는 마치 긴 매듭을 매는 듯 손가락 사이에서 묶었다. "저는 빛의 여사제입니다. 이 마법을 잘 알지요."



"훌륭한 선물이었지." 로르테마르는 자신에게 하는 말을 들었고, 오로라는 옆에 있던 그를 흘끗 보았다. 그는 자신의 바닥난 신념이 들켰으리라 생각했다.



"만약 왕자가 죽었다면." 렌타르가 말했다. "쿠엘탈라스의 왕은 누가 될 예정이오?"



"켈타스는 스스로 아나스테리안이 쿠엘탈라스의 마지막 왕이 될 거라고 언급했었소. 지금 왕관의 주인은 없소."



렌타르는 눈을 가늘게 떴다. "만약 누군가 주인이 되려 한다면?"



"그럴 권한을 가진 자는 모두 죽었소."



렌타르는 로르테마르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그는 렌타르의 응시에 격렬히 맞섰다. 렌타르 호크스피어는 이것만은 의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오로라가 다시 말했다. "이 이야기를 하러 온 거였군요."



"그렇소." 로르테마르가 답했다.



"그렇다면 이제 떠나도 좋소." 렌타르가 말했다.



로르테마르는 눈을 감았다. 이 말을 하기가 제일 힘들리라. "할 말이 하나 더 있소."



"더 있다고?" 렌타르의 목소리에는 힘이 빠져있었다. "뭐요?"



"성난태양이 우리에게 돌아온 이후로..." 로르테마르가 운을 띄었다. "유령의 땅에서 우리 입지는 더... 안전해졌소. 원정순찰대도 약간은 여유가 생긴 상태요. 그들이, 아니 내가 보급품을 보내주겠소."



로르테마르는 자신을 싫어하는 자들의 조롱에 완벽하게 적응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런 그도 렌타르가 실소 후에 불러올 날카로운 독설은 예측하지 못했다. 심지어 늘 평온하고 조절된 오로라의 얼굴도, 렌타르의 거침없는 경멸감의 표시에 붉어졌다.



"우리는 여기 5년간 썩어 있었다. 바로 네놈들의 명에 따라 고향에서 쫓겨났지. 흡혈귀처럼 살아있는 것에서 마력을 빨아먹길 거부했기 때문이다." 렌타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 팔로 탁자를 쾅 하고 짚었다. 그는 분노에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와서 도움을 베풀겠다고? 그 많은 고통을 겪게 해놓고선, 이제서야 나타나? 자신을 순찰자라고 부르는 빌어먹을 인간이 호드에 합류한 뒤 우리에게 뭘 해줬지? 내가 장님으로 보이나, 로르테마르? 내 당장 너를 죽여야겠다. 내 너를 죽이고 그 머리를 실바나스에게 보내리라!"



렌타르의 폭탄 발언에도 로르테마르는 직접 들은 단어 하나를 붙잡고 늘어졌 다. 순찰자... 그가 순찰자라고 했다. 그냥 순찰자도 아닌 인간 순찰자. 로르테마르가 아는 한에서, 그런 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



"내 들은 바로는." 그는 천천히 운을 띄었다. "나타노스 매리스는 스컬지에 죽었다던데."



오로라와 렌타르 둘 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도자기 인형처럼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였다. 로르테마르가 이 대면을 위해 도착한 이후 처음으로, 그는 자신의 심장박동 소리를 귀로 들을 수 있었다. 목에 걸린 덩어리는 삼키기 힘들었다.



오로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죽은 건 사실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로르테마르는 오로라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여기 뭔가 더 있다. 방 구석의 그림자처럼 뭔가가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떠나기 전에는 알 수 있으리라.



"그는 스컬지가 되지 않았어요." 그녀가 말했다.



"실바나스는 늘 그에게 이상한 긍지를 갖고 있었소." 렌타르가 시선을 떨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서스가 그의 의지를 뺏기 전에 그를 데려간 건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었지."



"'우리는 밴시 여왕의 용사다.'" 그가 회상하며 말했다. "그들이 여기 처음 왔을 때 한 말이오. '너희는 그의 것을 가지고 있다.'" 렌타르는 로르테마르 쪽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우리는 매리스를 원정순찰대원으로 받아준다는 상세한 내용이 담긴 기록부의 사본을 갖고 있었소. 그들은 그걸 무력으로 가져갔고, 순찰대원들을 마구잡이로 죽였지. 그들은 호드였소, 로르테마르. 실바나스가 이끄는 포세이큰이 속한 단체 말이요. 당신네들의 동맹."



로르테마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떨지 않는 목소리로 말할 자신이 없었다.



"난 한 때 순찰대 사령관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기꺼이 바쳤을 사람이오." 렌타르의 목소리에는 견디기 힘든 씁쓸함이 묻어났다. "우린 이제 그녀도, 당신들도 섬기지 않소."



"렌타르." 로르테마르가 말했다. "우린 서로 다르지만, 나였다면 절대-"



렌타르는 웃음을 터뜨려 그의 말을 잘랐다.



"당신들은 우릴 여기로 보내놓고 잊은척했소. 우리가 불편했겠지. 그래 놓고 감히 우리가 고통스러웠단 이야기에 놀란 척 하다니. 이 세상에 당신에게 어울리는 저주는 없소, 로르테마르. 난 트랜퀼리엔에 누구의 병력이 눌러앉아 있는지 알고 있소, 섭정. 당신의 코 앞에서 얼마나 많은 신도레이 정찰병들을 죽였을지 궁금하군. 악마와 거래하려 한다면 하시오. 자업자득하길 빌겠소."



"이제 가시오." 그가 조용히 말했다. "보급품을 보내려면 보내보시오. 전달한 자의 심장을 당신네 휘장으로 싸서 돌려보낼 터이니."



로르테마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그들은 그에 대한 경계를 풀자, 그 주위의 벽 역시 그 견고함을 잃은 듯했다. 그는 오로라가 턱을 꼿꼿이 세운 채 일어서서 도전적인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모습을 보았다. 렌타르나 그녀 모두 아무 말이 없었다. 마치 그들의 증오가 로르테마르를 방 밖으로 밀어내는 것 같았다.



로르테마르는 그들과 싸울 이유가 없었다. 물론 싸울 수도 있었다. 속죄의 뜻으로 손목을 내놓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손에 침만 뱉을 것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그들을 탓할 수 없었다. 그가 포기하지 않았던 속죄할 수 있으리란 희망을 역병지대의 황폐함이 덮어버렸다. 마치 산 것들과 꿈들에 그랬듯이. 둘 사이의 다리는 오래 전에 불타버렸다. 그가 자신의 손으로 불을 붙인 것이다.



그의 세 호의병은 방 앞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활 시위를 끝까지 당긴 쿠엘도레이 정찰병들에게 둘러 싸여 있었다.



정원에는 쿠엘리시엔 정찰병이 붉은매타조의 고삐를 잡고 있었고, 다른 정찰병들은 무기를 가져왔다. 로르테마르는 물건을 받아 들고 신속히 안장 위로 올렸다. 그리고 서서 지켜보고 있는 렌타르와 오로라로 몸을 돌렸다. 그는 충동적으로 뭔가를 말하려 했다. 그들 사이로 벌어진 틈에 다리를 놓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하고자 했던 어떤 말이든 입 밖으로 나가기도 전에 말라버리고 바스러져 먼지가 되었다. 그는 붉은매타조로 돌아갔다. 뒤돌아보지 않은 채.





* * * * *






몇 시간 뒤 그들이 탈라시엔 고개 위를 올랐을 때, 눈이 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황급히 쿠엘탈라스의 남쪽 경계선을 분리하는 관문을 지나갔다. 관문은 마치 바위 속을 뛰쳐나오는 듯 그 금빛 하얀색 자태를 드러내고는 이윽고 호박석과 구슬의 폭포수가 되어 바닥으로 스며들었다. 아서스가 놓은 관문이었다. 그가 버린 다른 건물들처럼. 스컬지의 검은 깃발이 그들의 머리 위에서, 관문 꼭대기에서 산바람에 기세 좋게 휘날리고 있었다.



"테론 군주님" 그의 호위병 중 한 명이 불렀다. "이 날씨에는 망토를 입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로르테마르는 답하지 않았다. 지금 느끼는 이상으로 얼어붙을 순 없을터이니. 눈발이 그의 얼굴 피부를 훑고 지나갔다.





* * * * *






할두런과 롬매스는 실버문에서 로르테마르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었다. 에이타스도 로르테마르만큼이나 비통한 얼굴로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할두런이 그를 보고 물었다. "어땠소?" 로르테마르는 말 없이 고개를 저었다. 할두런은 "뻔한 결과 아닌가?"라고 하는 듯 눈썹을 치켜 올렸다. 롬매스는 그의 눈을 보지 못했다.



"어떻게 반응하던가요?" 에이타스가 물었다. 로르테마르는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5년 전, 난 그들을 고향에서 쫓아냈고, 그들은 오늘날 쿠엘탈라스의 그 누구만큼이나 힘겨운 싸움을 계속해왔소." 그가 답했다. "어떻게 대했을 것 같소?"



에이타스가 움찔했다.



"베레사 윈드러너는 키린 토의 새 지도자와 결혼했습니다. 그녀는 나와 내 사람들을 눈엣가시로 여기지요. 전 기대했습니다… 그래도 당신은 정찰병이었으니까… 에이타스가 으쓱하며 말했다. "당신이라면 그 차이를 좁혀줄 수 있을 거라 믿었습니다. 그러지는 못했지만."



로르테마르는 베레사의 이름이 언급되자 얼굴을 찌푸렸다. "제대로 예상하지 못했군." 그가 중얼거렸다.





* * * * *






오후에 그는 할두런과 영원노래 와인을 마시며 쿠엘리시엔에서 있었던 상세한 일을 설명했다.



"당연히 자네를 경멸하는 태도로 대할 수 밖에 없지. 자네가 제일 잘 알지 않는가?" 순찰대 사령관이 그를 질책했다. "솔직히 말해서, 거기 왜 가려 했는지도 모르겠네."



"자네라도 갔을 걸세." 로르테마르가 답했다. 할두런은 눈살을 찌푸렸다.



"자넨 날 너무 잘 알아." 할두런은 의자 앉은 채 몸을 굽히며 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태양샘 건에 대해 모르고 있었네." 로르테마르가 말했다. "거기 가길 잘 했어."



"여기서 누굴 설득하려는 건가?" 어리벙벙해진 할두런이 물었다.



"할두런." 로르테마르가 빠르게 말했다. "나타노스 매리스를 기억하나?"



"물론." 그가 불쾌하다는 듯 말했다. "그래서 그게 왜?"



"오로라가 말해줬네. 그가 언데드가 되어 살아났다고 하더군." 로르테마르가 답했다. "실바나스가 그를 수하에 두려고 살려낸 것 같네. 그는 밴시 여왕의 용사로 알려져 있네."



할두런은 등을 의자에 늬우고 다리를 쭉 뻗은 채 두 손으로 깍지를 끼고 머리를 받쳤다. "재미있군." 그가 말했다. "실바나스는 언제나 그를 추켜세웠었지. 나를 포함해 인간을 원정순찰대와 훈련 받게 할 수 없다는 자들의 말은 죄다 무시하고 말이야."



"쿠엘리시엔의 순찰병은 밴시 여왕의 용사라는 자의 호드 단체의 공격을 받았다더군." 로르테마르가 뱉어냈다. 그리고 책상 위에 놓여있던 잔의 와인을 한번에 마셔버렸다.



할두런이 앉은 의자의 앞발이 바닥을 쿵하고 찍었다.



"왜 그가 쿠엘리시엔을 공격했을까?"



로르테마르는 어깨를 으쓱했다. "쿠엘리시엔은 그를 원정순찰대원으로 받아들인다는 실바나스의 마지막 말이 담겨 있는 탈라시엔 기록부를 갖고 있었네. 그는 그걸 원했던 것 같아."



"그것 때문에 자기 부하들을 보내 공격했다는 거야? 고작 책 하나 때문에?" 할두런의 목소리에는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실려 있었다.



"난 그렇게 들었네."



"거짓말이 아니라는 게 확실한가?"



"나도 같은 생각이었네." 로르테마르가 털어놓았다. "하지만 만약 렌타르 호크스피어가 뭔가 숨기고 있었다면, 원칙에 의거한 선택이었을 거야."



"그리고 오로라가 거짓말을 하는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지." 할두런이 덧붙였다. 그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실바나스가 이 사실을 알 것 같나?"



로르테마르가 머리를 저었다. "모르겠네."



"만약 안 다고 해도, 신경이라도 쓸 것 같나?"



그건 로르테마르가 두려워하던 질문이었다. "그것도 모르겠어. 만약 모른다 한들 어쩌겠나?" 그는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그들은 그녀의 순찰병이었어."



"자네가 추방하기 전에는 자네의 병사들이었지." 할두런이 조용히 말했다.



"사실 네 병사들이었어." 로르테마르가 쏘아붙였다. 그는 순간 분노로 발끈했지만 곧 어깨를 늘어뜨렸다. 렌타르의 말이 유령처럼 머리 속을 배회했다. 당신들은 우릴 여기로 보내놓고 잊은척했소. 우리가 불편했겠지. 그래 놓고 감히 우리가 고통스러웠다는 이야기에 놀란 척 하다니?



"그들의 죽은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네." 로르테마르가 자신의 목소리로 변명을 듣길 괴로워하며 힘겹게 말했다.. "하지만 나라가 분단되게 둘 순 없었어…"



그의 어깨에 얹혀진 손의 무게가 그의 머리를 들게 했다.



"알아." 할두런이 자신 앞의 잔을 다시 채우며 말했다. "정신차리게." 그의 목소리는 무뚝뚝했다. 하지만 친절하지 않았다. "포세이큰을 믿는 데는 위험이 따를 거란 걸 알고 있었네. 하지만 그들 말고 누가 쿠엘탈라스를 위해 싸워준다 했나?"



로르테마르는 잔을 들었다. 오후의 햇살이 잔을 통과하자 와인의 색이 거친 붉은빛으로 바뀌었다. 마치 역병지대의 흙처럼.





* * * * *






로르테마르는 책상 위를 손가락으로 따닥따닥 치며 지루하게 에이타스와의 수많은 회의에서 적은 기록을 세고 있었다. 오늘이나 내일 중 이 대마법사에게 확답을 줄 생각이었다. 그는 엄지 손가락과 집게 손가락으로 두 눈 사이의 콧대를 잡고는 탁자 위의 와인을 바라보았다. 문을 두드리는 똑똑 소리가 그의 생각을 방해했다.



"뭔가?" 그가 답했다.



급사가 급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그에게 보고했다.



"테론 군주님, 전당에 손님이 와 계십니다."



로르테마르는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상황에서 할두런과 롬매스가 직접 와도 될 일이었다. 에이타스도 있었다.



"지금은 바쁘오." 그가 단호하게 답했다.



"군주님." 급사가 말했다. "밴시 여왕님은 기다리지 않으실 겁니다."



로르테마르는 뱃속 깊은 곳으로 심장이 가라앉는 걸 느꼈다. 그는 벌떡 일어섰다.



"그렇지." 그가 조용히 말했다. "당연히 기다리지 않겠지. 날 인도하시오."



급사는 고개를 돌렸지만 섭정을 불쾌한 시선으로 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로르테마르는 급사를 따라가며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전당으로 걸어가는 몇 분 동안 로르테마르는 생각을 정리했다. 쿠엘탈라스를 다스리는 몇 년 동안, 실제 행동으로 조치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권위의 장막 아래 자신을 가렸을 뿐. 그는 자신의 극적인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실바나스 앞에 서려면 그가 가진 모든 결의를 끌어내야 할 테니.



걸어가고 있으려니 할두런과 롬매스가 조용히 로르테마르와 합류했다. 순찰대장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롬매스는 좀 더 초연한 얼굴이었으나, 로르테마르와 할두런과는 다르게 그의 공포는 남의 일이었고 자신과는 상관 없어 보였다. 그들에게 실바나스의 운명은, 마치 그녀를 볼 때마다 옛 상처를 후벼 파서 다시 피를 흘리는 듯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 고통은 아직 무뎌지지 않았다.



그녀가 서 있던 전당은 신기하게도 그 빛을 잃어가는 듯 했다. 흐려지거나 무뎌졌다기보단 마치 그녀 주위에서는 태양 빛의 기세가 그녀가 차지한 공간 속에서 그 기운을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실바나스의 눈의 뿜어내는 하얀 광채가 그녀의 새하얀 피부 빛을 그나마 바라게 했다. 그녀의 왕실근위병이 뼈대 앙상한 손으로 그녀 옆에 있는 검은빛 칼을 꽉 쥐고 있었다.



전당으로 들어서는 로르테마르 귀에 들리는 건 자신의 발 소리뿐이었다. 하지만 그 소리마저도 밴시 여왕의 존재에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흐려지는 듯 했다.



"실버문에는 무슨 일이십니까, 실바나스 님?" 그가 물었다.



"막 오그리마에서 돌아오는 길이오." 그녀가 말했다. 그녀가 입을 움직일 때마다 목소리가 벽을 긁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로르테마르는 그녀 입가의 피부가 탈피한 뱀 껍질이 벗겨지듯 금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서스가 겁도 없이 호드의 중심지를 공격했소."



로르테마르의 입이 말랐다. 불안감이 파도처럼 가슴에 벅차 올랐다. 실바나스는 잠시 말을 멈추고 로르테마르의 얼굴을 노려보며 반응을 살폈다. 그는 이를 꽉 물었지만 침묵을 지켰다.



"공격은 성공적으로 막아냈소." 그가 말했다. "하지만 아서스는 그저 우릴 가지고 노는 것뿐이었소. 놈에게 전쟁을 안겨줘야 하오. 대족장 스랄이 마침내 우리가 오래 전부터 인지해온 사실을 직감한 듯 하오." 그녀의 눈이 위험한 열망으로 반짝였다. "호드는 전쟁을 준비하고 있소. 그리고 로르테마르, 신도레이 역시 호드의 일부분이지."



그녀의 말이 마치 돌처럼 그를 강타했다. 그녀가 뭘 원하는지 알았다. 이런 날이 언젠가는 올 줄 알았다. 그는 전당의 거대한 공간 속에 삼켜진듯 했다. 그는 답할 수 없었다.



"로르테마르." 성급함 섞인 실바나스의 말이 그의 주위를 감싼 적막을 깼다. "아서스를 쳐부수러 가야하오. 마침내 놈을 끝장 내는 거요."



천천히 로르테마르는 머리를 저었다.



"대족장 스랄님과 여왕님이 노스렌드로의 여정에 합류를 요청하다니 감사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전력 부족에 허덕이는 상태입니다. 이미 키린 토에게서도 비슷한 요청을 받았지만, 우리 병력을 북쪽으로 보내겠다는 확답은 드릴 수 없습니다, 쿠엘탈라스에서의 일 이후…"



"이건 요청이 아니오, 로르테마르." 그녀가 끼어들었다. 그녀의 눈이 분노로 붉어졌다. "그대는 병력을 보낼 것이며. 포세이큰과 함께 싸울 것이오."



"실바나스 님." 로르테마르가 조용히 말했다. "우린 막 내전을 겪은 상태입니다. 내보낼 병력이 있겠습니까?"



"애초에 쿠엘탈라스 건의 책임을 진 쪽이 어딘지 모르시오? 지금 누구 탓을 하려는 거지?" 그녀가 대답을 기대하는 듯 그의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 답이 없자, 말을 계속했다. "최소한 내 잘못은 아니오. 내 복수는 묵살되지 않을 거고, 결국 내가 원하는 만큼의 신도레이 정찰병과 마법사, 혈기사를 보내게 될 거요."



"그들을 넘길 순 없습니다, 실바나스 님."



그녀의 얇은 입술이 곡선을 그리며 비웃음을 머금었다.



"얻어맞은 개처럼 여기 숨어 있으려면 마음대로 하시오, 로르테마르. 하지만 거기서 얻을 게 있다고 생각한다면 어리석은 거요. 몸에 난 상처를 핥고 있다고 해서 아서스가 그대를 무시할 거라 생각하시오? 그리고 내가 그런 겁쟁이 같은 행위를 용납할 거라 믿소? 경고하겠소. 그대 그리고 포세이큰과 함께 놈들에 맞서지 않으려는 모든 이들에게. 포세이큰에 반항하는 자는 오래가지 못할 거요.



"한동안 나와 우리 포세이큰들은 이 땅의 수호자였소. 그대가 호드에서 역할을 하나 맡는다면 그건 바로 내 결정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오. 그대는 노스렌드에서 우릴 보좌할 것이오. 안 한다면 쿠엘탈라스에서의 지원을 끊는 수 밖에 없소."



역병지대 근처 남쪽, 스컬지가 죽음의 흉터 전역을 날뛰는 곳에서 그들은 실바나스의 병력 없인 버틸 수 없을 것이었다. 오로라와 렌타르에게 유령의 땅에서 그들의 위치가 조금 나아졌다고 했을 때 그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탈라시안 병력 혼자서 막아낼 수 있다는 것은 너무 순진한 생각이었다. 포세이큰이 없다면 트랜퀼리엔은 무너질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쿠엘리시엔을 떠나온 지 두 번째로, 호크스피어의 말이 머리 속을 울렸다.



우린 이제 그녀를 섬기지 않소.



만약 로르테마르가 스스로에게 정직했다면 그가 그 사실을 늘 인지하고 있었단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피로에 찌든 병사들을 보내 노스렌드에서 죽음을 맞게 하거나 쿠엘탈라스를 스컬지에 잃을 위험을 감수하거나..." 멀리서 로르테마르는 자신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롬매스와 비슷한 소리였다. "우리에게 선택권은 없어 보이는군요, 실바나스 님."



밴시 여왕은 그를 냉철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2주 뒤, 언더시티에 그쪽 병력을 징집시키시오, 로르테마르." 그녀가 답했다. "이번 일은 넘어갈 테니."



"알겠습니다, 여군주님."



그녀는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



"어떻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로르테마르는 절망적인 분노에 빠진 롬매스의 목소리를 무감각한 놀라움으로 받아들였다. 대마법학자는 아직도 실바나스가 협상을 받아들일 자로 생각하는 듯했다.



"이건 협박입니다!" 지팡이를 잡은 손에 힘을 너무 꽉 쥐어 주먹이 하얗게 변한 채 롬매스가 말했다. "애초에 우릴 변론하고 도우려 했던 자는 바로 당신이었습니다. 당신 의지로 선택한 일이었습니다! 어떻게 우리 땅을 인질로 잡아두고도 우리편이라 할 수 있습니까?"



실바나스는 잠시 생각했다. 그가 자신보다 컸음에도 내려다보는 듯 했다.



"제안을 강요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소." 그녀가 말했다. "그쪽이 선택한 일이지.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은 우리의 가장 위협적인 큰 적을 쓰러뜨릴 의지와 힘 뿐이요."



롬매스는 더 없는 분노를 안은 채 그녀를 응시했다. 하지만 로르테마르가 그보다 빨리 입을 열었다.



"더 논의하고 싶은 게 남으셨습니까, 실바나스 님?" 그는 자신의 귀로도 목소리에서 의지와 열의가 사라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논의라. 작은 목소리가 자신을 비웃었다. 꼭 밴시 여왕과 더 말할 게 있기라도 한 것 같군.



"없소, 할 말은 여기까지요, 로르테마르."



"쇼렐러란, 실바나스님," 그가 말했다. 그녀의 눈이 탈라시안식 인사에 빛을 뿜어냈다. 그녀는 더 말하지 않았다. 로르테마르는 관심을 없는 얼굴로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단지 눈을 둘 데가 없어서였다. 그는 얼어붙은 잔디 한 포기처럼 무력해진 느낌이었다.



로르테마르는 고개를 돌리고 에이타스를 확인했다. 그리고 그가 회의 중간에 나타났다는 사실을 깨닫고 역겨움을 느꼈다. 이 굴욕을 대마법사가 목격했다는 사실이 머리를 아프게 했다. 하지만 그에게 자존심을 따질 체력은 남아있지 않았다. 비록 멍한 상태였음에도, 그의 머리 속은 이미 해야 할 일을 그리고 있었다. 그는 전쟁에 익숙했다. 할두런은 경비대장 선브랜드와 부관 돈러너를 부를 것이다. 롬매스는 마법사들에게 알릴 것이었다. 또한 혈기사도 맡고 있으니 리아드린에게도 소식을 전하겠지. 에이타스는 실력을 증명할 기회가 생긴 셈이겠고. 로르테마르는 마치 꿈이라도 꾸는 듯 전당의 복도를 맴돌았다.



"로르테마르 님!"



그는 자신을 부른 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억지로 듣는 척, 억지로 관심 갖는 척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너무나도 절실히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가 혼자 있고 싶었다. 해야 할 일, 아무 생각이 필요 없는 일들로 자신을 바쁘게 하고, 여기서 일어난 일을 잊으려 했다.



늘 그랬듯, 롬매스는 그를 보내지 않을 참이었다.



"로르테마르 님." 그는 섭정을 붙잡자 다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설마 진심으로… 우리는 그럴…"



"그대도 그녀의 말을 들었잖소, 롬매스." 로르테마르가 말을 끊었다. "노스렌드에 가지 않으면 포세이큰의 지원을 잃게 되오. 나머지 호드의 안녕을 위해서도 가야만 하오." 그는 자리를 떠나기 위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쿠엘다나스의 병사들은 아직 대부분 진료소에 있습니다!" 롬매스는 계속해서 말했다. "게다가 아직 죽은 자에게 마땅한 장례도 치뤄주지 못했습니다. 태양샘의 이름으로,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로르테마르!"



"우리에겐 선택권이 없소, 롬매스. 아직도 모르겠소? 실바나스의 말 대로 하지 않으면 엘렌다르 강 남쪽의 쿠엘탈라스 전부를 잃게 될 거요!"



"그럼 포기하십시오!" 롬매스가 외쳤다. 그리고 로르테마르는 충격에 얼어붙었다. 천천히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렸고, 자신 만큼이나 놀란 할두런의 얼굴을 발견했다.



"포기하라고?" 그가 언성을 높였다. "얼마나 많은 엘프… 신도레이와 쿠엘도레이 엘프들이 그 땅을 지키기 위해 죽었는지 아시오? 얼마나 더 죽어가고 있는지? 그런데 그냥 보내주라고? 지금 제정신이오?"



"그들도 그대가 자신들을 희생시켜 괴물의 꼭두각시가 될 바에야 차라리 목숨을 포기하고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할 겁니다!"



로르테마르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롬매스는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분노나 경멸 어린 눈이 아니었다. 그답지않은 거칠고 충격적인 수준의 절망감 때문이었다. 로르테마르의 섭정으로서의 재직 기간 중 롬매스와 수 없이 논쟁했으나 롬매스는 한 번도 평정이나 냉정을 잃지 않았었다. 이제 그는 흥분상태였다. 그가 눈을 돌리자, 로르테마르는 주위에 작은 군중이 몰려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소란을 일으킬 생각이 없었다.



"그녀의 협박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롬매스가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로르테마르는 그가 지독한 공포를 부정하기 위해 애쓰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섭정님을 이용할 뿐입니다."



로르테마르는 분노에 주먹을 꽉 쥐었다. "쿠엘탈라스의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뭐든 하겠소." 그가 말했다. "비록 그 대가가 이용당하는 것이라 해도 말이요. 그리고 그댄 내 명령을 따를 것이요. 내 말 알아듣겠소?"



"이 위험한 장난을 얼마나 더 이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필요한 만큼." 로르테마르가 단호하게 답했다. 롬매스는 완고함의 한계에 부딪쳤지만, 섭정의 단호함을 꺾을 순 없었다. 그는 똑바로 서서 롬매스를 내려다보았다. 롬매스는 잠시 뒤쪽을 바라보더니 몸 전체의 힘을 뺐다. 그리곤 눈을 감았다.



"신도레이의 또 다른 지도자 중 한 명이 굉장히 비슷한 말을 했었지요, 로르테마르 님." 그가 먼 곳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 때는 그와 논쟁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때는 그가 옳다고 생각했지요." 로르테마르는 피가 얼어붙는 듯했다.



"우린 그를 쿠엘다나스에 묻었습니다." 롬매스가 말하곤 크게 한 숨을 쉬었다. "여군주 리아드린과 마법학자 아스탈로르에게 그대의 결정을 전하겠습니다, 섭정이시여. 그들이 준비되면 보고하겠습니다." 그는 어깨를 늘어뜨린 채 다른 말 없이 떠났다.



거의 생각하기 힘들었던 로르테마르는 멍한 상태로 대마법학자의 희미해지는 형체가 구석으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로르테마르 님." 할두런의 조용한 목소리가 넋이 나갔던 그를 깨웠다. 그는 그를 이상한 눈으로 보고 있는 순찰대장 친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마치 그를 처음 보는 것 같은 눈이었다. 로르테마르는 그를 잡고 흔들고 싶었다. 자신을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소리치며.



"섭정님,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할두런이 물었다. 격식 갖춘 그의 말투가 로르테마르의 힘을 빼놓았다.



"원정순찰대 산장과 원정순찰대 초소에 전하시오." 그가 답했다. "어떻게 결정되었는지."



할두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마지막, 읽을 수 없는 시선을 날리며.



로르테마르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가 어둡게 인상을 찌푸리자, 신하들과 궁전 경비병은 총총거리며 각자에게 맡겨진 임무를 하러 돌아갔다. 복도에 남은 유일한 사람은 에이타스 선리버였다. 자신을 봐달라는 것이었을까?



"만약 노스렌드로 갈 거라면 키린 토도 지원하실..."



"망할 키린 토 건은 제발 어떻게든 하시오.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니니." 로르테마르가 콱 쏘아붙였다. "하지만 수많은 신도레이 병력이 곧 북쪽을 향하는 걸 본다면, 많은 이들이 그대의 문 앞에 줄을 서겠지. 그들은 알아서 하시오, 에이타스. 이제 롬매스를 찾아가시오. 아마 그 편이 그대에게 훨씬 더 이득일 거요." 로르테마르의 경멸감이 마침내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기뻐할 일이군, 대마법사."



에이타스는 고개를 저었다. "노스렌드에서 당신의 지원을 원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섭정이시여. 하지만 이런 조건에서는 아니었습니다. 본인의 의지로 동의하길 원했지 실바나스 때문에는..."



"내 의지는 변하지 않을 것이오. 고맙소." 로르테마르는 그의 말을 다시 끊었다. 에이타스의 말에 담긴 가시에 쓰라림을 느끼면서... "그리고 쿠엘탈라스의 지배는 내 의지로서 이루어질 것이오."



"물론이지요, 군주님." 에이타스가 회유의 표시로 살짝 허리를 굽히며 답했다 하지만 그가 머리를 들어올리자, 로르테마르는 그의 눈에 사과하는 마음이 전혀 담겨있지 않음을 느꼈다. 로르테마르는 끓어오르는 마음을 안고 몸을 돌려 그에게서 떠났다. 에이타스는 빨간색 그리고 황금색으로 된 납빛 깃발 아래 홀로 서 있었다.





* * * * *






섭정의 일지, 83장



내가 정치계에 입문한 이후로 마지막으로 누군가에게 뻔뻔스런 거짓말을 했던 게 언제인지 기억나지도 않는다. 하지만 난 에이타스에게 거짓말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나도 알고, 그도 알고 있다. 내 말을 들은 누구라도 그 사실은 눈치챌 것이다. 내 의지는 거의 없었다. 난 권력을 가진 척 할 순 있다. 하지만 결국엔, 그 모든 게 연기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 무엇도 진심이 아니었다.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스스로 희생양이 되어, 아무것도 달성하지 않거나, 다른 이들을 희생양으로 만들어 그 동안 내가 싸워온 모든 것의 본질에 다가갈 수도 있다. 만약 내가 한 번이라도 다른 논리로 내 선택을 합리화하였다면, 난 분명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한 셈이리라. 호크스피어의 말이 맞았다. 난 악마와 거래했다. 하지만 우리가 그 수준으로 절망적이지 않았다면 태양샘은 절대 회복되지 못했을 것이다. 호크스피어와 오로라는 편안히 잠을 청할 수 있을 것이다. 본인들은 절대 윤리와 타협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테니. 하지만 만약 그들이 타협한 자들의 결과로 번영하게 되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들이야말로 나만큼 스스로를 속인 것이리라.



여기서 난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사실을 믿는 데 가까워졌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마법학자의 정원이 남긴 잔해는 영영 날 괴롭힐 것이다. 그 생각으로 시험 당했던 내 운명을 떠올리게 할 테니. 이게 내가 걷는 길이다. 필요에 의해 내가 내릴 결정에 어떻게든 변호할 수 없음을 마침내 깨달은 내가 걷는 길이다. 그 진실은 절대 중재될 수 없다. 하지만 가끔 난 양 측에 그들을 두고 거의 이해할 수 거라 믿는다. 만약 내가 켈타스나 그 이전의 아나스테리안이 자신의 차례에 배운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이 진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였으리라.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각자의 영광이나 권리를 안고 모든 일이 우리 가슴에 남은 주어진 길을 최대한 위엄 있게 걸어가는 것뿐. 그리고 모든 일이 끝났을 때, 우리 자신의 가슴에 무언가 남아 있길 기도하는 수 밖에 없다. 태양샘의 이름으로, 내 자신에게도 의지라는 게 조금은 남아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