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단편 소설 "태양의 피가 흐르면"을 소개합니다. 공식 커뮤니티 사이트의 목적지 판다리아에 추가된 새로운 이야기를 읽어보세요!


판다리아 대륙에 발을 디딘 후 이후 태양길잡이 데즈코에게는 갖가지 고난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습니다. 포악한 모구, 크라사랑 밀림의 늪지대, 호드를 두려워하는 판다렌 등등.. 데즈코는 많은 시련을 견뎌왔지만, 지금까지 지키고 치유하기 위해 노력한 판다리아의 대륙이 이제 데즈코의 갓 태어난 두 아들을 위험에 처하게 하였습니다.


과연 데즈코는 축복의 태양 안쉬를 섬기겠다는 신념을 지킬 수 있을까요? 아제로스의 가장 견고한 영웅이라도 궁지에 빠지면 언젠가는 한계를 느끼게 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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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즈코는 죽은 아내의 머리카락 타래를 붙잡고 의식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그 뒤로 두 달의 제단이 밤의 어둠 속에 침묵했다. 심지어 이곳에서 가장 붐비는 황금 정원도 조용했다. 데즈코는 그 점에 감사했다. 거대한 바위 단상은 온전히 그와 돈체이서 부족의 것이었다. 지금은 오직 하나에만 집중해야 할 시간이었다.


황금 정원 위로 따스한 바람이 불어와, 데즈코의 뿔과 손목, 가죽 조끼에 매달린 하얀 초원매 깃털과 대지의 색을 띤 작은 나무 부적을 흔들었다. 그는 의식을 위해 준비한 장식을 보며 다소 실망했다. 고향인 멀고어에 있었더라면 제대로 된 의식용 옷을 차려 입었을 터였다. 하지만 여기, 고향에서 이렇게 멀리 떨어진 낯선 판다리아에서는 간단히 구할 수 있는 재료들로 만족해야 했다.


레자도 이해할 거라고, 그는 혼잣말을 했다. 신경쓰지 않을 거라고.


데즈코는 고개를 저어 잡념을 떨치고, 황금 정원 너머로 영원꽃 골짜기의 달빛 비추는 언덕과 우거진 수풀을 바라봤다. 한밤중에도 이곳 풍경에는 보는 이를 사로잡는 힘이 있었다.


"변화의 도가니"라고 레자는 불렀었다. "황금빛 꽃으로 덮인, 평화에 대한 희망이 가득한 골짜기"라고.


여러 달 동안, 그녀는 꿈에서 이 골짜기를 봤다. 데즈코와 다른 타우렌들도 그 환영을 봤지만, 레자의 것이 가장 강했다. 그녀가 없었다면, 부족은 판다리아를 찾아내는 험난한 여행길도, 또 이 대륙의 심장부 깊이 숨은 골짜기를 찾아내는 과정도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 길은 험난했다. 맹렬한 폭풍이 몰아쳐 데즈코의 부족민들이 탄 배 세 척을 파괴했다. 모두 친구와 가족이었다. 마지막 배가 판다리아의 무더운 해안에 도착했을 때, 또 죽음이 찾아왔다. 레자가 임신을 했다는 사실은 그 암울한 상황에서 데즈코의 걱정을 더욱 키웠다. 결국 그의 아내는 열병에 걸렸고, 부족민들이 모두 애를 썼지만 치료할 수가 없었다. 레자는 이 모든 일을 언제나 강인하게 견뎌내며, 모든 선워커 부족민들에게 희망의 봉화가 되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아직 밤이지만, 곧 해가 떠오를 거예요. 가까이에서 느껴져요."


마침내 출산이 시작되었지만, 그 고통은 병마를 앓는 그녀에게 너무 큰 부담이었다. 그녀는 부족이 이 골짜기를 발견하기 몇 주 전에 죽었다. 고통이 끝나간다는 사실을 여전히 믿으면서. 그 끔찍했던 날은 데즈코의 기억에 남은 날카로운 이빨 자국처럼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열병이 아내의 핏줄에서 생명을 거둬들이던 순간, 그 때 그녀의 고통에 찬 마지막 비명도. 그녀를 죽음의 손아귀에서 구해내려는 그의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간 후, 결국 그녀의 장례식 장작불에서 피어오르던 연기와 불꽃까지...


"태양의 피가 흐릅니다!" 데즈코 뒤에서 다른 타우렌이 외치는 소리에 데즈코는 현재로 돌아왔다.


희미한 빛이 어둠을 밀어내며, 골짜기를 보랏빛과 금빛으로 물들였다. 동이 트기 전, 즉 태양의 다른 이름인 안쉬가 여전히 숨어 있지만 그 빛이 어떻게 해서인지 세계로 흘러드는 찰나의 순간이었다.


"아이들을 데려오시오." 데즈코는 동쪽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손짓을 했다.


레자의 조카인 날라가 두 아기 타우렌을 품에 안고 조용히 다가왔다. 의식을 위해 매어둔 깃털과 구슬이 아이들의 작은 뿔에서 흔들거렸다. 첫째는 레드혼, 둘째는 클라우드후프였다. 데즈코는 아내의 갈기 타래를 날라에게 건네고, 레자의 마지막 선물들을 품에 안아 들었다.


"시작하시오!" 데즈코가 명령했다. 아무런 망설임 없이, 뒤쪽에 앉아 있던 열두 명의 타우렌들이 작은 가죽 북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그 박자는 전투가 있기 전날 밤 전사의 심장처럼 빨리 뛰었다.


날라가 레자의 머리카락을 데즈코의 갈기에 묶자, 그는 자신의 아들들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속삭였다. "잘 보렴, 얘들아." 아이들은 너무 어려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할 테지만, 얘기해 줘야 할 것 같았다. 아이들은 하품을 하고 반쯤 뜬 눈으로 앞을 바라봤다.


"매일 아침, 안쉬가 피를 흘린단다." 데즈코가 말을 이었다. "자신의 빛을 희생해 우리에게 새벽이 오고 있음을 알려 주는 것이지. 하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야. 예에나에가 그를 돕는다. 바로 너희 어머니가 그랬었단다."


어제, 레자의 죽음 이후 처음으로 낮에 쌍둥이 달이 나타났다. 그녀의 영혼이 마침내 예에나에, 즉 "새벽을 알리는 이들"과 함께하게 되었다는 신호였다. 마침내 그녀도 다른 이들의 생명을 구하거나,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다가 목숨을 잃은 위대한 조상님들과 함께 앉은 것이다.


안쉬가 넘을 수 없는 산 위로 고개를 내밀자 북소리가 잦아들었다. 꿀빛으로 펼쳐진 들판에서 태양빛이 반짝였다. 키 큰 상아색 나무 위에서 황금 잎사귀가 바람결에 부스럭거렸다. 데즈코는 이곳에서의 일출을 여러 번 경험했지만, 이렇게 찬란한 안쉬의 빛은 여전히 놀라웠다. 안쉬의 시선은 골짜기에만 내려앉고, 다른 지역에는 여기서 반사된 빛만 닿는 것 같았다.


이곳의 아름다움은 어떤 면에서는 잔인하기도 했다. 데즈코와 그의 부족은 골짜기에 도착하면 상황이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호드의 정치는 한없이 그들을 성가시게 했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북부 지역에서 밀려온 수많은 피난민들이 음식과 쉴 곳을 찾아, 또 다툼을 피해 밤낮 없이 제단으로 찾아왔다.


그리고 바로 며칠 전, 그의 아들들은 알 수 없는 병에 걸렸고, 종일 울며 먹을 것을 거부했다. 데즈코와 날라는 대체 무슨 병인지라도 알아내려 했지만, 수확은 없었다. 그래도 안쉬의 은혜인지, 오늘 아침 레드혼과 클라우드후프는 괜찮아 보였다. 어쩌면 이 의식이 그들을 치유했을지 모른다고, 데즈코는 생각했다.


"저기 좀 보세요." 날라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골짜기를 가리켰다.


데즈코는 난간 너머를 내다봤다. 두 달의 제단으로 통하는, 흙과 돌로 잘 다져진 길 위에서 많은 형체들이 움직였다. 밝아오는 새벽빛에 그들의 그림자는 마치 죽 뻗은 팔처럼 땅 위로 늘어졌다.


"황금 연꽃이군." 다른 일행들과는 다른 한 명을 알아보고, 데즈코가 말했다. 힘센 모키모의 걸음걸이는 멀리서 봐도 확연히 드러났다. 다른 호젠들처럼, 그도 긴 근육질 팔이 거의 땅에 끌릴 듯 흔들며 걸었다. 데즈코는 다른 황금 연꽃들을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이 골짜기의 고대 수호자들이 이렇게 여럿 제단을 향해 다가온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 보통 그들은 이 지역 중앙에 있는 만남의 장소, 황금탑에 머무는 일이 많았다.


"그 소문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날라의 목소리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소문은 절대로 믿지 말거라." 데즈코가 답했다. 그도 그런 이야기를 들었었다. 골짜기의 보호자들이 비밀리에 회동하여, 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 이 지역의 여러 곳을 방문한다는 얘기였다. 황금 연꽃과 데즈코의 부족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하는 모키모라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설명해줄 수 있었겠지만, 그도 지금까지 일주일이 넘게 제단을 떠나 있었다. 그래도 데즈코는 걱정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황금 연꽃은 비밀스러운 집단이었지만, 믿음직한 동맹이기도 했다.


"알아요." 날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이들이 걱정이에요. 아픈 게 다 지나갔는지 아직 확실하지 않고요. 손님들 때문에 더 악화될 수도 있잖아요." 그녀는 레드혼의 볼을 쓰다듬었다. 레자가 세상을 떠난 이후로, 아내의 사촌은 열렬히 아이들을 보호했다. 데즈코는 그녀를 이해했다.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이 아이들은 그녀의 마지막 남은 가족이었다.


"황금 연꽃이 여기 있는 동안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가렴." 데즈코가 말을 이었다. "의식이 끝난 후에 말이야."
그 말과 함께, 그는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몸을 돌렸다. 사원의 무덤 같은 통로에서 일찍 일어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고, 황금 정원에서는 커다란 목소리와 묵직한 발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상인들은 낑낑대며 흔들거리는 가판대를 세웠고, 피난민들은 한 데 모여 음식을 나눴다. 데즈코를 따라 골짜기에 온 오크와 블러드 엘프, 그리고 호드의 다른 구성원들이 단상에서 함께 어울렸다.


안쉬와 그 광휘가 산 위로 떠오르자, 북소리가 멈췄다.


데즈코는 잠시 평화를 느꼈다. 모든 고난이 마침내 오늘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 보았다. 어쩌면 레자가 언제나 이야기했던 새벽이 마침내 찾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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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즈코는 다른 경비병에게 황금 정원을 지키라고 지시하고, 손님을 맞을 준비를 했다. 그는 벌써 몇 주 째 제단에서 생활하면서 이곳의 사실상 지도자 역할을 했다. 거의 매일 그는 호드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터져나오는 다툼과 논쟁을 처리해야 했다. 그렇게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황금 연꽃에게 이곳이 얼마나 혼란스럽게 변했는지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들은 데즈코와 백성들을 이곳, 황금 연꽃이 수백 년 동안 지켜온 땅에 두 팔 벌려 맞이해 주었고, 그런 믿음에 보답하는 것이 타우렌으로서 자신의 책임이었다.


의식용 예복을 벗어던지고 방어구를 착용한 후, 데즈코는 돈체이서 경비병 네 명과 함께 황금 정원으로 통하는 거대한 반원형 계단에서 연꽃을 기다렸다. 계단 양쪽으로는 두 개의 황금 조각상이 서 있었다. 그 거대한 형체들은 무시무시한 표정과 함께 누구든 감히 올라오려는 자가 있으면 막아내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길고 날카로운 창을 겨눴다. 놈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데즈코의 피가 끓어올랐다.


그들은 모구였다. 한때 이 골짜기를 지배하고, 무시무시한 힘을 이용하여 증오와 탄압의 제국을 세웠던 잔인한 종족이었다. 데즈코는 그들 중 일부와 싸워 본 적이 있었다. 명예라고는 알지 못하는 무자비한 상대였다. 다행히, 그들의 제국은 이미 오래 전 사라졌다.


하지만 상황은 달라지고 있었다. 샤오티엔으로 알려진 모구 일족 중 하나가 이 골짜기에 침입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데즈코도 그들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는 보고를 여러 차례 들은 바 있었다. 계단에서 기다리는 동안, 그는 샤오티엔과 황금 연꽃 사이의 전쟁이 새로운 국면에 들어선 것은 아닐까 궁금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골짜기의 수호자들이 저렇게 많이 제단을 찾아올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손님들이 도착할 때까지, 이 질문은 그의 머리 속에 끈덕지게 들러붙었다. 데즈코는 시간을 들여 황금 정원을 정돈해 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찾아온 이들 중에 조화로운 즈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곳 판다리아에서, 황금 연꽃의 현명한 판다렌 지도자는 그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었다.


"우리가 방해라도 하는 건 아니었으면 좋겠소만. 이곳에 오는 동안 북소리를 들었소." 즈가 말했다. 데즈코는 그와 황금 연꽃의 다른 용사들을 정원 중앙에서 자라는 부자오 나무 그늘로 안내하는 중이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제 아내를 기리는 의식이 있었습니다만, 새벽녘에 끝났습니다."


"당신의 아내라, 그렇군." 즈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타우렌들은 모두 그렇게 고인을 기리는 것이오?"


"일부만 그렇습니다. 이 의식은 고대의 유산입니다. 선워커들이 되살리기 전에는, 거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유물이었지요. 이 의식은 우리 믿음과 잘 어울렸습니다."


"흥미롭군." 즈는 땋아내린 자신의 회색 수염을 쓰다듬었다. "당신의 일족에 대해 묻고 싶은 것이 많소. 우리 황금 연꽃과 유사한 점이 많거든. 언젠가 이 골짜기의 격동이 가라앉으면, 우리 함께 이야기를 나눕시다."


"저도 그러고 싶군요." 데즈코가 주위의 다른 연꽃들을 건너보며 말했다. 이 골짜기에 처음 왔을 때 그들 중 일부를 만나보긴 했지만, 아주 잠깐 뿐이었다. 낯익은 얼굴이 하나 보였다. 통통한 얼굴로 말투에 부드러운 판다렌, 자비로운 웡은 한때 이 제단에 오랜 기간 머물렀었다.






그리고 모키모가 있었다. 그 커다란 호젠은 나무와 강철로 이루어진 단단한 방어구를 여럿 입고, 머리는 뒤로 올려 묶은 짧은 꽁지머리였다. 하얗게 센 털이 둘러싼 길고 매끈한 얼굴에는 청록색 표식이 눈에 띄었다. 모키모는 황금 정원을 휘 둘러보고는, 종종 그러듯 호젠어로 뭔가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아이들은 어디 갔어?" 잠시 후에야 그 호젠은 데즈코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물었다.


"아쉽지만 아이들은 쉬어야 하네. 동 트기 전부터 깨어 있었으니까."


"알았어."모키모의 하얀 꼬리가 실망한 듯 축 늘어졌다.


"나중에 보자고." 데즈코는 다정하게 그 호젠의 등을 두드렸다. 하지만 아이들이 날라와 제단 안으로 들어간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예에나에 의식 이후에 아이들의 병세가 다시 나타나 데즈코는 무척 실망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모키모가 아이들 곁에 있을 때는 항상 뭔가 큰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호젠은 난폭한 종족으로, 변덕이 심하고 말썽을 좋아했다. 비록 모키모는 호젠이라기보다는 판다레에 가깝게 행동했지만, 어린 아이들은 그의 피 속에 담긴 호젠의 본성을 끌어내는 것 같았다.


"모키모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꼭 그 녀석 아이인 것 같다니까." 즈는 짓궂게 쿡쿡 웃었다. "그런데 나도 아이들이 잘 있는지 궁금하군. 모두 건강하오?"


"저..." 타우렌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는 그 병 때문에 즈를 걱정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특히 지금은 그게 얼마나 심각한 건지도 모르는 상태였으니까. "당연히 아주 잘 자라고 있습니다."


"알겠소." 즈는 잠시 깊이 생각에 잠기는 것 같았다. 그는 생각을 정리하기라도 하듯 고개를 젓고 데즈코를 바라봤다. "일을 시작하는 게 좋겠군. 당신도 여기서 무척 바쁘다는 걸 알고 있소. 그러니 더 이상 당신의 의무를 방해하고 싶지는 않소."


즈가 기다리던 황금 연꽃들에게 손짓을 하자, 그들은 행동을 개시했다. 몇몇은 서둘러 제단 입구 근처에 모여 있는 피난민들을 향했고, 다른 이들은 직접 가져온 커다란 나무 상자의 걸쇠를 벗겼다.


"제가 도와드릴 게 있다면, 부디 말씀해 주십시오." 데즈코가 말했다. 궁금증이 일었다.


"나도 그런 게 있었으면 좋겠소. 사실 우리가 여기 온 것은 천신님들의 명령에 따른 것이오."


데즈코는 애써 놀란 기색을 감췄다. 천신들이 저들을 여기로 보냈다고? 즈는 역사가 기록되기 시작된 이래로 위대한 네 영혼이 판다리아를 보살피고 있다는 이야기를 언젠가 한 적이 있었다. 데즈코가 보기에는 신과 흡사한 존재였다. 얼마 전 이 골짜기를 외부인들에게 개방한 것도 천신들이었다. 데즈코나 그의 타우렌 일족과 같은 이들이 황금 연꽃과 함께 이곳을 지킬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당신도 알다시피," 즈는 말을 이었다. "영원꽃 골짜기는 무척 크고, 우리 연꽃은 수가 적소. 샤오티엔이 이 땅에 침투한 지금, 나는 아무래도 그 수가 더욱 적어지지 않을까 두렵소. 그래서, 우린 새로운 황금 연꽃을 찾으러 여기 왔소."
"호드 중에도 기꺼이 힘을 보탤 이들이 많습니다." 데즈코가 말했다.


"아쉽지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오. 천신들이 우리를 이끈다오. 우리가 정확히 누굴 찾아야 하는지 알려주고... 아, 지금까지 그랬다는 말이오. 위대한 영혼들이 무척 심란해 하고 있소. 그분들의 전갈이 온통 뒤죽박죽이거든. 천신님들이 내게 말씀하시길, 수호자의 자격이 있는 이가 여기, 어느 곳도 아닌 바로 이 골짜기에 존재한다고 하셨소. 과거에는 우리가 이 지역 밖으로 나가서 새로운 수호자를 찾아야만 했었는데 말이오. 그제서야 난 왜 영혼들이 우릴 여기로 이끌었는지 깨달았소. 이 땅은 이제 수많은 다른 사람들의 고향이기도 하오."


"즈 사부님!" 황금 정원 반대편에서 웡이 소리쳤다. "준비됐습니다!"


웡 근처에 은 징이 하나 세워졌다. 네 천신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흑우 니우짜오, 옥룡 위론, 백호 쉬엔, 마지막으로 주학 츠지까지. 판다렌 피난민 몇 명이 징 앞에 모여 있었다.


"잠깐만 기다리게!" 즈가 대답하고 데즈코를 향해 돌아섰다. "이제 남은 건 간단한 시험을 하는 것 뿐이오. 오래 걸리진 않을 거요. 그 후에 다시 얘기합시다."


"저는-" 데즈코가 입을 열었지만, 즈는 이미 징을 향해 멀어진 후였다. 타우렌은 실망한 채 그를 바라봤다. 연꽃이 그에게 무언가 부탁을 해 올 줄 알았었다. 뭔가 도움을 요청할 줄 알았다. 호드는 전쟁을 계속하고 있었지만, 데즈코는 자신이 쓸모 없는 존재가 된 것은 아닐까 생각하던 중이었다. 그의 하루는 대부분 이 제단을 지키는 게 전부였다.
즈가 피난민들에게 말을 시작하자, 모키모가 어스렁거리며 다가왔다.


"아, 성공하면 좋겠는데." 호젠이 두 손을 꼭 맞잡으며 말했다. "지난 몇 주 동안 이 골짜기 구석구석 안 가 본 곳이 없어. 얼마나 많은 아이들에게 시험을 했었는지 기억도 못 하겠다고."


"아이들?" 데즈코가 물었다. 그제서야 징 옆에 선 피난민들이 모두 어린아이들을 품에 안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우리 단원들은 다들 무척 어릴 때 선택돼. 내가 아이였을 때, 즈가 비취 숲의 우리 마을로 찾아와서 내게 새 삶을 줬어. 하지만 이제 황금 연꽃을 찾아내려먼 다른 방법을 써야 해. 삼 일 전에, 우린 노래하는 징을 울렸어. 그게 천신들과 관련이 있는 아이들을 모두 부르거든. 뭐, 일단 옛날 기록에서 그러더라고. 바로 얼마 전부터 이 시험은 다시 시작됐어."


"삼 일 전이라..." 데즈코가 혼잣말을 했다. 레드혼과 클라우드후프가 아프기 시작한 게 언제였는지 떠올려 봤다. 아마
삼 일 전이었을 것이다. 아니 그 전이었던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징이 울리면 무슨 일이 일어나지?" 그는 모키모에게 물었다.


"몰라. 아무도 몰라. 아이가 좀 불안해 한다던가. 꼭 무슨 병에 걸린 것처럼. 어떤 아이가 잠재력이 있는지 보여주는 거야. 그 후에 징을 두 번째로 울리는 건 그렇게 영향을 받은 아이를 달래주기 위한 거래. 그러면서 선택을 받은 아이를 확인하는 거지. 그 뒤에는 천신들께서 어떤 신호를 보낼 거래."


데즈코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그의 주둥이에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병에 걸린 것처럼...'


연꽃 중 한 명이 즈에게 강철 타구봉을 건넸다. 장로는 앞발로 타구봉을 붙잡고 징을 내리쳤다. 은 원반은 진동하며 앞뒤로 흔들렸지만,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적어도 데즈코와 다른 이들은 들을 수 없었다. 판다렌 부부나 그 아이들도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천신들로부터의 신호도 없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군." 아이들을 떠올리자 안도감이 데즈코를 감쌌다. ‘아니, 어째서 그 아이들에게 뭔가 일어날 거라고 생각한 걸까?’ 황금 연꽃은 판다리아의 종족들로 구성되어 있다. 진위와 판다렌, 호젠, 모두 수천 년 동안 이 땅에 묶여 살아온 존재들인 것이다. 그의 아이들은 타우렌이었다. 외지인이었다.


"아무 일도..." 모키모는 고개를 숙였다. 다른 연꽃들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려는 듯 주위를 둘러봤다. 즈는 허망한 표정으로 타구봉을 손 안에서 빙빙 돌렸다.


데즈코는 그들을 보며 일말의 슬픔을 느꼈다. 황금 연꽃은 너무 오랫동안 평화 속에서 살아왔다. 그리고 지금, 전쟁은 눈 앞까지 다가왔다. 지금까지 그들을 이끌었던 천신들은-


군중 속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징이 격하게 떨렸다. 원반의 중앙으로부터 거미줄 같은 금이 퍼져나가고, 곧이어 은으로 된 그 유물은 산산이 조각나 황금 정원 위로 떨어져 내렸다. 황금빛과 푸른빛이 감도는 빛의 구체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 구체는 서서히 뒤틀리고 커지면서 거대한 학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 생물은 목을 앞으로 쭉 뻗으며 몸 전체에 난 노란색, 빨간색, 흰색 깃털을 흔들었다.






"츠지 님." 즈가 차분히 말했다. 그와 다른 황금 연꽃들은 하나가 되어 고개를 숙였다.


"부름에 답하노라." 주학의 화신은 초자연적으로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키가 데즈코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그 천신은 아기 판다렌들을 차례로 둘러봤다.


"여기엔 없구나." 마침내 그가 말했다. 천신의 머리가 산 옆으로 튀어나온 제단의 금빛 정면을 향해 솟아올랐다. 갑자기 그는 그 거대한 관문을 통과해 들어갔다. 군중은 잠시 머뭇거리다 주학의 뒤를 따라 달렸다.


데즈코도 걸음을 서둘렀다. 머릿속에는 레드혼과 클라우드후프 생각 뿐이었다. 그는 제단의 아치형 통로를 지나 여름의 쉼터로 달렸다. 날라가 아이들을 요새 동쪽에 자리잡은 이 여관으로 데려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츠지도 마찬가지였다.


공포스럽게도 주학은 이미 그곳에 도착한 뒤였고, 나무와 종이를 이용해 접을 수 있게 만든 칸막이로 나뉜 이 여관의 "객실" 중 하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날라가 그 안에서, 두 개의 작은 요람을 지키려는 듯 당당히 서 있었다.


"넌 어미가 아니구나." 츠지가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데즈코는 천신 곁을 스치고 지나가, 날라의 어깨에 손을 얹고 진정시켰다. 레드혼과 클라우드후프는 요람 안에서 고개를 들고 위를 쳐다봤다. 둘은 며칠 만에 배실배실 웃으며 츠지를 향해 팔을 뻗었다.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군요." 목소리를 차분하게 하는 데만도 데즈코는 온 힘을 쏟아야 했다.


"네가 아비구나." 천신의 눈이 데즈코에게 고정되었다. 두 눈은 마치 두 개의 태양처럼 활활 잔인하게 타올랐다. 타우렌은 주학이 그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며 그의 생각과 기억을 뒤적이고 있음을 느꼈다. "어미는 세상을 떠났군. 아이들을 낳다가 목숨을 잃었어. 하지만 그 죽음으로, 그녀는 두 개의 생명을 남겼다."


츠지는 고개를 숙였다. "너는 아이들을 클라우드후프와 레드혼이라고 부르지만, 그건 진짜 이름이 아니다."


"진짜 이름이 아니라고?" 모키모가 칸막이 주위로 몰려든 피난민들과 황금 연꽃, 호드들의 사이를 뚫고 앞으로 나섰다.


"아니야." 데즈코가 깜짝 놀란 시선으로 주학을 바라봤다. 레드혼과 클라우드후프는 젖먹이 때의 이름이었다. 그 부족의 흔치 않은 전통 중 하나였다. 시간이 지나면 진짜 이름을 받게 된다. 하나는 판다리아의 해안 밀림에서 목숨을 잃은 옛 친구의 이름, 또 하나는 그의 부족을 도운 새로운 친구의 이름이 될 것이다.


"쌍둥이일 것임은 알지 못했다." 츠지의 화신이 즈를 향해 돌아섰다. "한 명만 골짜기를 지키면 된다."


"알겠습니다." 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장로의 차분한 얼굴이 무너져 내리고 감출 수 없는 충격이 떠올라 있었다. 그의 눈이 데즈코의 눈과 마주쳤다. "외지 아이들이라니... 이건 예상하지 못했소, 친구." 황금 연꽃의 지도자가 말했다. "물론 그런 생각을 떠올린 적은 있었지만, 정말 가능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지."


"제 아들입니다." 데즈코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이해해 보려고 애썼다. 이 모든 사건들이 너무 빠르게 펼쳐지고 있었다. "지금 하시는 말씀은-"


"네가 이렇게 멀리 떠나와 지키려 하는 것을 지키기 위함이다." 주학이 답했다. "네 아내의 꿈을 지키기 위함이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골짜기를 위해 희생하기 위함이다. 둘이라서 다행이구나. 하나는 골짜기를 돕고, 다른 하나는 네 곁에 머물 것이다. 남은 건 선택뿐이다." 츠지의 화신이 마치 연기처럼 사라졌다.


"기다려요!" 데즈코가 소리쳤다.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주학은 사라졌다. 황금 연꽃은 축하의 박수를 쳤다. 그들 뒤로, 피난민들이 아이들을 향해 다가갔다. 그 얼굴들이 하나로 뒤섞이며 흐릿해졌다. 날라는 레드혼을 향해 손을 뻗던 판다렌을 떠밀어 칸막이와 함께 나뒹굴게 했다.


누군가 데즈코의 등을 찰싹 때렸다. 방어하듯 빙글 돌아선 그의 눈에 모키모의 활짝 웃는 얼굴이 보였다. "정말 멋진 날이야!" 그 호젠은 군중의 소음 위로 소리를 질렀다. "오늘이 이렇게 대단한 날이 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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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뿐이다…


츠지의 말이 몇 시간 동안 쉬지 않는 망령처럼 데즈코를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무심코 거닐던 발길이 그를 황금 정원으로 이끌었을 때는 안쉬가 서쪽 하늘 아래로 사라진 지도 이미 오랜 뒤였다.


레드혼과 클라우드후프는 두 개의 바구니 안에서 각각 곤히 잠을 잤다. 바구니 하나는 데즈코의 등에, 하나는 가슴에 매달려 있었는데, 아이들이 태어난 후 그가 직접 만든 것이었다. 두 바구니는 그의 어깨에 걸린 긴 밧줄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판다리아를 가로지르는 동안, 이 바구니는 무척 유용했다. 아이들을 곁에 두고도 방패와 철퇴를 항상 사용할 수 있었으니까. 이 땅은 너무도 많은 위험으로 가득 차 있어, 그는 아이들에게서 잠시라도 눈을 떼기를 거부했다.


'이제 내 무기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군.' 황금 정원을 둘러보며 그가 생각했다. 늦은 밤 시간이라 단상은 거의 비어 있었다. 오크 몇몇이 부자오 나무 아래 쭈그리고 앉아, 등불 하나를 놓고 숫돌로 칼을 갈고 있었다. 제단의 입구 근처에 길게 흘러내리는 로브를 입은 블러드 엘프들이 이 골짜기의 마법이 지닌 성질에 대해 열띤 토론을 했다. 평소 같았으면 데즈코는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겠지만, 오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나쳤다.


"황금 같은 기회라고, 내 생각엔 말이지." 오크 중 하나가 동료에게 귓속말로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골짜기에는 힘이 있어. 그래서 우리가 온 거 아냐. 그래, 얼라이언스도 여기 왔어. 지금은 양 측이 같은 지점에 서 있어. 하지만 연꽃에 호드가 들어간다면..."


"멍청한 소리 하지 마," 다른 누군가가 답했다. "거기 들어간 녀석은 호드의 일원이라고 할 수 없어. 그 아이에게는 호드가 아무 의미도 없을 거야. 모키모를 봐. 우리가 만나 본 어떤 호젠하고도 다르잖아. 황금 연꽃이 그의 정체성을 빼앗았어. 그 자신을 없애버렸다고."


데즈코는 그 이야기가 들리지 않는 곳으로 멀어져 갔다. 그 논쟁은 벌써 백 번은 더 들었던 얘기다. 오늘 하루는 마치 꿈처럼 지나갔다. 아니, 오히려 '악몽'에 가까웠다. 그의 기억 속에 남은 건 파편뿐이었다. 황금 연꽃이 그를 축하하고, 나타났던 것과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호드의 다른 구성원들과 끝없는 회의가 이어졌고, 피난민들은 마치 아이들이 신성한 상징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끝없이 몰려들어 그들을 바라보려 했다.


이제 혼자가 되어 기뻤다. 그의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했고, 그는 몇 시간 전에 조언자들과 날라까지 자리를 비키게 했다. 데즈코는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아름답게 시작했던 오늘 하루가 이렇게 혼란을 향해 소용돌이치다니, 정말 믿을 수 없었다.


데즈코는 자신의 수정 철퇴와 뾰족한 방패를 황금 정원의 옻칠한 나무 난간에 걸쳐 놓았다. 그의 앞에는 검은 땅 위로 여기저기서 횃불과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다섯 개의 신성한 웅덩이가 멀리서 으스스한 푸른빛으로 빛났다. 모키모는 그 호수들이 바로 이 골짜기의 힘의 근원이자 생명선이라고 종종 말하곤 했다. 어쩌면 데즈코와 그의 부족민들도 그것을 지키고, 또 어떻게든 그것을 사용하기 위해 이곳으로 이끌려 온 것인지도 모른다.






총 여섯 개의 웅덩이가 있었지만, 하나는 모구샨 궁전 깊은 곳에 숨어 있어 그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그 거대한 요새의 정면이 희미하게 보였다. 한때 모구 제국의 권좌였던 그곳은 영원꽃 골짜기의 동쪽 산맥에 조각되어 있다.


황금 연꽃이 이 골짜기의 옛 지배자의 석상과 건물들을 왜 허물어버리지 않는지 항상 궁금했다. 모구가 돌아올 이유를 주기라도 하는 양 저렇게 내버려 두는 이유가 궁금했다. 한때 모키모에게 그 이유에 대해 물어봤었을 때, 그는 이렇게 답했다. "모구는 이 골짜기가 자신들을 섬긴다고 생각했어. 황금 연꽃은 우리가 이 골짜기를 섬긴다고 생각하고. 저 석상들은 오만과 허영의 상징물로 남겨둔 거야."


그 때, 데즈코는 그 지혜를 놀랍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 말이 공허해 보였다. 행동하지 않는 것에 대한 변명일 뿐이다. 천신이 그렇게 강력하다면, 어째서 모구 침략자들을 없애버리지 않는가? 레자가 생각했던 것처럼 이 골짜기가 희망과 평화에 꼭 필요한 장소라면, 어째서 이 땅에 차오르는 힘이 황금 연꽃을 도와 이 전쟁을 빠른 시간 내에 끝내지 않는 걸까?


데즈코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질문과 불확실성이 너무 많다.


"아름다운 밤 아냐?" 누군가 물었다.


돌아서는 타우렌을 향해 모키모가 천천히 다가왔다.


"돌아왔군." 데즈코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 호젠은 시험 이후에 다른 황금 연꽃들과 함께 사라져, 그를 홀로 오늘의 사건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었다. 모키모는 그가 필요할 때는 단 한 번도 곁에 없었던 것만 같았다.


"지금 막 왔지." 호젠은 데즈코 곁의 난간에 기대섰다. "즈가 같이 가자고 했어. 전투에서 돌아온 황금 연꽃들을 만나는 자리였고.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샤오티엔 모구가 이 골짜기에 들어왔어. 네가 수호자들을 보지 못한 게 다행이야. 절망에 가깝게... 너무 두려워하고 있었어."


"그거 안타깝군." 모구가 승리하고 있다는 소식에 데즈코는 자신의 걱정을 잠시 미뤄야 했다.


"하지만 주학 님과 네 아이들에 대해 얘기하니까… 다들 변했어! 슬픔이 한 순간에 기쁨으로, 절망이 희망으로 변했다고!" 모키모는 짧고 튼튼한 다리로 펄쩍펄쩍 뛰었다.


"아직 어린 아이들이야." 데즈코가 말했다. "전쟁의 양상을 바꿀 순 없어."


"우리 황금 연꽃은 내일을 위해 살고 죽어. 주학 님은 우리에게 미래를 약속하셨고. 우리에게 새 세대의 수호자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셨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으셨을 거야." 모키모는 윗옷에서 작은 나무 조각을 꺼내 데즈코 앞의 난간에 내려놓았다. "자, 이건 다른 단원이 지니고 있던 거야. 어제 죽은 녀석이지. 아무래도 이걸 네게 주는 게, 그 녀석을 기리는 가장 좋은 방법일 것 같아."


데즈코는 그 물건을 살펴봤다. 섬세하게 조각한 주학이었다.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의 글자가 츠지의 부리부터 발끝까지 빙글빙글 새겨져 있었다. 작은 나무 조각에 불과했지만, 그를 불안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거기 새겨진 말은 이런 뜻이야. '운명은 바람이다, 언제나 변화하는. 삶은 구름이다, 한 순간에 사라지는. 골짜기는 하늘이다, 영원히 머무는.' 황금 연꽃의 옛 속담이지. 가장 끔찍한 때라도 언제나 희망이 있다는 걸 일깨워 줘. 죽은 뒤에라도 우리의 투쟁은 계속된다는 걸 알려주고. 너라면 좋아할 줄 알았는데… 항상 네 부인과 그이가 본 새벽에 대해 얘기했잖아."


"모키모, 내가 널 돕고 싶다는 걸 알지? 하지만 난…" 그는 호젠의 얼굴에 나타난 기쁜 표정을 보고 말을 삼켜야 했다. 모키모의 꿈을 짓밟을 순 없다. 아니, 이 수호자가 그의 뜻을 이해할 지도 알 수 없었다. 황금 연꽃은 데즈코가 선택을 할지 그렇지 않을지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듯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여기는 모양이다.


"지금은 얘기할 필요 없어." 모키모가 말했다. "난 여기 있어선 안 돼. 즈 님이 네가 생각하고 선택할 시간을 보내기 전까지, 나한테 말도 걸지 말라고 했거든. 난 그냥 이 선물을 주고 싶었어. 고맙다는 얘기도 하고." 호젠은 난간에서 물러났다. "가야겠어. 탑에서도 날 찾고 있을 거야."


모키모는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데즈코는 츠지 조각을 집어 올렸다. '선택뿐이다.' 천신의 목소리가 그의 머리를 가득 채웠다. '무엇을 선택하란 말입니까?' 그는 소리치고 싶었다. 황금 연꽃은 그의 아이들을 구원자라고 생각했다. 그가 이를 거부하고 골짜기에 머문다면, 자신의 아들들은 이 땅의 흉터가 될 것이다. 깨어진 꿈을 계속해서 떠올리게 하는 흉터.


데즈코는 조각을 다시 내려놓고, 클라우드후프와 레드혼을 바구니에서 꺼냈다. 그는 둘을 품에 꼭 안고, 앞으로 다가올 시간 속에서 그들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선워커의 도리를 배우고, 그와 함께 안쉬와 대지모신을 섬기는 의식을 이끌고, 죽음을 마주한 레자의 용기에 대해 경청하고…


"레자…" 데즈코가 속삭였다. 이 모든 일을 헤쳐갈 수 있게 그녀가 자신의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또 그녀라면 무엇을 했을지 생각했다. 갑자기 아내가 죽기 직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 사랑…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우리 아이를… 지켜 주세요…' 그녀는 쌍둥이를 낳게 될 것임은 알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마지막 바람은 데즈코에게 더욱 강하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그의 선택은 명확해졌다.


"그렇게 하겠소." 그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날라!" 데즈코가 소리쳐 부르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어둠 속에 머물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앞서 자리를 비켜달라고 했지만, 날라에 대해 잘 알았기에 그녀가 자신을 따라왔을 거라는 사실도 알았다.


레자의 사촌이 부자오 나무 뒤에서 나타났다. "황금 연꽃은 도무지 이해를 못하지요?"


"그들 잘못이 아냐."


"어떻게 하죠?" 날라는 난간에 다가서며 물었다.


"우린..." 데즈코가 말했다. "아니, 난 네게 이 제단을 맡기겠다."


"뭐라고요?" 날라는 입을 헤벌리고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언제까지요?"


데즈코는 츠지 조각상을 마지막으로 바라봤다.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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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혼과 클라우드후프가 바구니에 포근하게 잠들고, 데즈코가 제단을 떠난 것은 새벽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날라와 헤어지는 일은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결국에는 그녀도 이해했다. 그녀도 선워커였으니, 세상 모든 일에는 단 하나의 진정한 길이, 오직 하나의 옳은 결정만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가족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보다 진정한 길이 있을까? 가족을 하나로 모으는 것보다?


날라가 걱정하는 것은 사실 데즈코와 함께 가며 아이들을 돌보고 싶다는 바람의 표출이었지만, 지금 그녀는 제단에 더 필요했다. 이곳이 무너져 내리는 걸 막을 수 있는 다른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 날라는 레자처럼 강직해야 할 때와 유연해야 할 때를 알았다. 그녀는 타고난 지도자였다.


그 외에, 데즈코는 동료들에게서 가능한 한 거리를 두었다. 이것은 그의, 오직 그만의 선택이었다. 황금 연꽃이 어떻게 반응할지, 또 그보다 더 중요한 주학이 어떻게 반응할지는 알지 못했다. 그는 이 골짜기에서 호드의 지위를 흔들리게 하는 것만은 원하지 않았다. 최근 여러 사건들이 있었지만, 이 땅은 여전히 동족의 미래를 의미했다.


데즈코는 모키모가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떠난다는 사실이 부끄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가슴은 아팠지만, 단호한 결별이 모두를 위한 최선이었다. 그게 황금 연꽃에게도 더 받아들이기 쉬울 터였다.


오전 중에 그는 먼 거리를 걸었다. 탁 트인 도로를 벗어나, 북부의 언덕을 통과했다. 밤이 오기 전에 골짜기의 밖으로 이어지는 위대한 천신회의 관문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정오쯤, 그는 작은 언덕 아래에 도착하여 아이들을 땅에 내려 놓았다. 그리고 약초 껍질과 야크 우유를 꺼내 날라가 가르쳐준 대로 끓였다. 날라는 그에게 멀고어에 도착해서 아이들을 보살필 타우렌 여성을 만날 때까지, 이 음료가 둘을 건강하게 지켜줄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이들이 이 음료를 얼마나 싫어할지에 대해서는 경고하지 않았었다. 한 모금 마시자 마자, 그의 아들은 둘 다 울음을 터뜨리며 더 먹기를 거부했다.


"그렇게 나쁘지 않은데." 데즈코는 투덜거리며 혼합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 탁하고 견딜 수 없을 만큼 쓴 음료 때문에 기침이 터져 나왔다. 레드혼과 클라우드후프의 울음이 곧 웃음으로 바뀌었다.


"어른을 공경하지 않는 건 현명하지 못한 일이란다, 얘들아." 데즈코가 유쾌하게 으르렁거렸다.


데즈코가 아이들에게 다시 마실 것을 주려고 할 때,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판다렌이 가득 탄, 야크가 끄는 수레 세 대가 언덕 위로 나타났다. 야크는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며 힝힝거렸다.


"모구가!" 수레가 데즈코 옆을 지나 질주할 때, 판다렌 한 명이 소리쳤다. "관문에 나타났어요!"


'말도 안 돼.' 데즈코는 서둘러 아이들을 바구니에 태웠다. 그리고 방패를 높이 들고 천천히 언덕을 올라갔다. 꼭대기에서 그를 덮쳐 온 바람은, 연기와 전투의 냄새를 가득 품고 있었다.


멀리 위대한 천신회의 관문은 여기저기 불탔고, 암청색 피부의 샤오티엔들이 골짜기의 입구를 뒤덮었다. 가벼운 방어구 차림의 형체들, 바로 황금 연꽃들이 다가오는 모구를 향해 달려갔다. 포성이 천둥처럼 골짜기를 갈랐다. 황금 연꽃 수호자 한 무리가 화염과 피의 격류 속에 사라졌다. 다른 전사들은 황급히 후퇴했지만, 모구가 그 뒤를 따라붙어 낙오자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데즈코는 작은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었다. 갈 길이 막혀 있었다. 그는 뒤로 돌아 언덕을 내려갔다. 서쪽에 다른 관문이 있다고 들었지만, 열려 있는지 확실하지 않았다. 어쩌면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 지역민들에게만 알려진 비밀스러운 산길이나 동굴 같은...


확실한 것은 제단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뿐이었다. 선택을 한 이상, 그는 이제 그곳의 일원이 아니었다. '네 선택을 믿어라, 언제나 강인하게.'


피난민들 중 한 명이 언덕 아래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턱 아래로 성긴 수염이 길게 늘어진 늙은 판다렌이었다. "그쪽에는 죽음뿐이오."


"그렇게 보이는군요. 어디로 가십니까?" 데즈코가 물었다.


"안개내림 마을이오. 우리는 대부분 가족과 헤어졌소. 그곳에 사람들이 모여든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난 손주들을 찾고 있소. 바람이 당신을 어디로 데려가고 있소?"


데즈코는 안개내림 마을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고 있는 바를 떠올렸다. 피난민들이 모여 만들어진 작은 야영지로, 골짜기의 남서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곳에서 데즈코는 다른 관문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길마저 막혀 버렸다고 해도, 적어도 제단에서 멀어져 있을 수 있는 시간을 벌어 줄 것이다. 어쩌면 그 사이 황금 연꽃이 샤오티엔을 물리치고 위대한 천신회의 관문을 되찾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들에게 그럴 힘이 있다면.


"안개내림 마을입니다." 데즈코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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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즈코와 피난민들은 자신들과 모구 사이에 이 지역 중앙에 솟은 쌍둥이 산을 두고 골짜기의 동부를 가로질렀다. 부상당한 고령의 판다렌 때문에 여정이 달팽이 걸음 같았지만, 데즈코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혼자서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을 즐겼다. 유일한 걱정거리는 황금 연꽃을 만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지만, 그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둘째 날 밤이 되기 직전, 일행은 골짜기의 남쪽 끝에 있는, 안개내림 마을로 통하는 산길에 도착했다. 신성한 웅덩이는 저무는 햇빛을 받아 남쪽, 동쪽, 서쪽에서 빛났다. 이렇게 호수에 가까이 있으니, 대기는 손에 만져질 것만 같은 기이한 힘으로 떨렸다. 데즈코가 멀리 떨어진 호수를 감상하고 있을 때, 일행이 멈춰섰다.


"앞에 뭔가 있어요!" 피난민들의 앞쪽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데즈코는 피로와 싸우며 일행 뒤편의 자기 자리로부터 인파를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여행 기간 내내 그는 잠도 거의 자지 못했다. 피난민들은 심성은 착했지만, 군사 훈련을 전혀 받지 않은 이들이었다. 그는 그들을 믿을 수 없었고, 밤에도 단 몇 시간 조차 아이들을 무방비로 내버려 두지 못했다.


선두 수레 곁에 한 무리의 피난민들이 모여 심각하게 말을 나누고 있었다. 저 멀리, 커다란 모닥불이 산길 초입에서 타오르며 통로를 막은 것이 보였다.


"저게 누군지 알겠습니까?" 그는 모여 있는 판다렌들에게 물었다.


"알아볼 이를 보냈습니다." 지저분한 옷을 입은 젊은 피난민이 답했다. 그는 곁에 선 일행에게 앞발을 흔들었다. "모구라는 얘기도 있지만, 놈들은 저렇게 뻔히 보이는 곳에 불을 피우지는 않습니다."


"네가 언제 그렇게 모구에 대해 잘 알게 된 건데?" 다른 판다렌이 따졌다. "샤오티엔 공격대가 골짜기 전체에서 살금살금 돌아다니면서 눈에 띄는 사람들은 모두 죽이고 유령처럼 사라진대. 저 불은 우릴 유인하는 함정일지도 몰라."


불편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모구가 이렇게 골짜기 깊은 곳까지 진출하지는 못했을 거라고 생각하며, 데즈코는 꼬리를 앞뒤로 흔들면서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정찰을 갔던 이는 잠시 후 돌아왔다. 그는 손을 흔들어 일행을 부르며 말했다. "안전해요!"


데즈코 주위의 판다렌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다른 피난민들인가요?" 그는 멀리에 있는 피난민에게 소리쳤다. 모구를 제외하더라도 걱정이 되는 적이 또 하나 있었다. 바로 얼라이언스였다. 호드의 숙적은 골짜기의 이쪽 지역에 두 달의 제단과 유사한 요새를 세웠다. 데즈코는 얼라이언스의 지도자들 중 하나인 안두인 린 왕자와 친분을 맺었는데, 그와 마찬가지로 왕자도 갈등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희망과 평화에 대한 약속에 이끌려 이 골짜기를 찾아왔다. 그래도 타우렌은 그런 유대 관계가 얼마나 의미가 있을지 알지 못했다. 얼라이언스에는 호드와 마찬가지로 미친 전쟁광들이 가득했다.


"아뇨," 앞장선 피난민이 답했다. 데즈코는 그가 희미하게 웃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황금 연꽃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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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아! 먹어! 쉬어!" 모키모는 두 팔을 들고 외쳤다.


거대한 불길이 호젠의 뒤에서 으르렁거렸다. 불 위에 걸린 무쇠 솥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가까이에서 자비로운 웡은 가마솥에서 밥을 퍼서 네 천신이 새겨진 매끈한 나무 공기에 담았다. 데즈코가 앞서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던 판다렌이 가죽 여행 가방에서 물잔을 꺼냈다. 그는 타우렌도 드워프처럼 보이게 할 만큼 거대했으며, 역시 커다란 검은색 방어구를 차려입고 있었다. 위로 올려 묶은 갈색 머리와 수염을 제외하면, 그의 외투는 순백색이었다.


굶주리고 지친 피난민들은 데즈코를 스쳐 지나 모닥불로 서둘러 다가갔다. 구수한 음식 냄새가 바람에 실려 오자 그의 배가 꼬르륵거렸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황금 연꽃이 여기 왔다는 것이 그를 불편하게 했다. 지금쯤 그들도 데즈코의 선택에 대해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를 떠나게 내버려두고, 그 선택을 짊어지고 살게 해 주는 것이 명예로운 일일 터였다.


하지만 그들은 그를 따라왔다.


"데즈코!" 모키모가 손짓했다. "어서 와! 배 많이 고프지!?"


데즈코는 귀를 쫑긋 세우고 코웃음을 쳤다. 아무렇지도 않은 그 목소리가 오히려 언짢았다. 모키모의 말투는, 여기 골짜기의 한 가운데에서 자신을 만나는 것이 전혀 놀랍지 않은 일이라는 것만 같았다.


아무런 대답 없이 타우렌은 야영지에서 몇 걸음 떨어진 빈 자리를 골라 앉았다. 머지 않아 직접 불을 피워 밤 공기를 덥힐 수 있었다. 그는 클라우드후프와 레드혼을 바구니에서 꺼내 야크 젖 혼합물을 먹이기 시작했다. 이제는 수유도 많이 쉬워졌다. 아이들도 그 음료를 좋아하기 시작한 덕분이었다.


젖을 다 먹이자 모키모가 데즈코의 모닥불에 다가왔다. "더 빨리 오려고 했는데, 피난민들이 배가 많이 고팠나봐." 호젠이 말했다. "너와 아이들이 무사하다니, 천신들께 감사드려야겠어. 우린 걱정 많이 했어" 그는 쪼그리고 앉아 레드혼과 클라우드후프를 향해 활짝 웃었다. 아이들은 키득대며 호젠의 볼에 난 하얀 털을 만지작거렸다.


"웡은 기억할 테고," 모키모는 피난민들과 어울리고 있던 두 명의 동료를 가리켰다. "큰 친구는 루크야. 인사치레는 잘 못하지만 지나칠 정도로 올곧은 녀석이지. 상냥한 친구지만, 무시무시한 적이기도 해. 너라면 좋아할 것 같은데. 우리랑 함께 앉지 그래? 우리 쪽에 자리가 많-"


"날 따라왔군." 데즈코가 말했다.


"뭐... 그렇진 않아." 모키모가 답했다. "우린 네가 어디로 갈지 예상했거든. 위대한 천신회의 관문이 막혔으니, 이 골짜기에서 갈 만한 곳은 사실 별로 많지 않아."


"난 선택을 했어, 모키모." 데즈코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직접 네게 말하지 못한 건 잘못이었어. 그 점은 미안해. 하지만 날 따라온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 내 아이들은 멀고어에 있는 집으로 가야 해. 둘이 함께. 이게 내 결정이야."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제단의 다른 이들은 이 일과 아무 상관이 없어."


"날라도 그렇게 말했어. 즈도 만나봤는데, 네가 떠나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된대."


데즈코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상대방이 어떻게든 저항할 것으로 예상했던 것이다. "바로 며칠 전에 내 아들들이 황금 연꽃에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얘기하더니."


"난 기뻤어. 다른 황금 연꽃도 모두 그랬지. 하지만 이건 내가 결정할 문제가 아냐. 모두 네 몫이라고."


"그럼 여긴 왜 온 건데?"


"네 아이들은 선택을 받았어. 이제 츠지와, 그리고 이 골짜기와 하나인 거야. 황금 연꽃은 언제나 이 땅을 보호하기로 맹세했어. 네 아이들이 이곳을 떠날 때가지 우리가 지켜줄 거야. 하지만 네가 왜 떠나려 하는 건지는 모르겠어. 이렇게 멀리 여길 찾아온 게, 여기서 머물기 위한 건 줄 알았거든."


"그렇지... 아니, 그랬었지." 데즈코는 고개를 숙였다. "츠지께서 내게 혼자서 모구와의 싸움에 뛰어들라고 하셨더라도, 나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그 명에 따랐을 거야. 무엇이라도 했을 거라고. 하지만 이건..." 그는 모키모를 올려다 봤다. "이건 내가 여기 온 이유가 아냐."


"그걸 어떻게 알아?"


"아냐." 데즈코가 말했다. 분노가 서서히 차올랐다. 이제 무슨 일인지 알 것 같았다. 모키모는 그를 설득하고 있었다. 즈는 호젠과 다른 이들을 보내 떠나려는 그를 설득하려고 한 것이 틀림 없었다.


"벌써 너무 많은 것을 잃었어." 타우렌은 말을 이었다. "나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려고 여기 온 게 아냐. 내 부족은 평화를 약속받았어. 희망을 약속받았지. 우린... 나는 기대했던 걸 하나도 찾지 못했어." 타우렌은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자기도 알지 못한 채 발굽을 딛고 일어선 상태였다. 다른 모닥불 곁의 웡과 루크, 피난민들은 모두 조용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키모는 침묵을 지켰다. "기대라는 건... 위험한 거야." 그는 막대기로 불을 쑤셨다. "처음 황금 연꽃에 들어왔을 때 나는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어. 하지만 한 해, 또 한 해가 지나가면서 이곳을 싫어하게 됐지. 모든 것이 너무 이상하고 혼란스러웠어. 집에 가고 싶었어. 뭐, 언젠가 한 번은 정말 그러려고 했지. 하지만 내가 골짜기에서 몰래 빠져나가려는 데 즈가 나를 붙잡았어. 그래도 나를 꾸짖지는 않았어. 그냥 이해해 줬지. 사실, 내 가족을 볼 수 있게 데려다 주겠다고 약속도 했어. 공무가 아닌 이상 황금 연꽃이 이 골짜기를 떠나는 일은 많지 않아. 그는 내게 큰 은혜를 베풀었던 거야.


"약속했던 날이 되고, 우린 비취 숲의 안개 낀 언덕에 있는 우리 마을을 찾아갔어. 나는 두렵기도 하고 흥분되기도 했어. 정말 오랜만에 가족을 만나는 거였거든." 모키모는 머리를 묶고 있던 청록색 띠를 풀어 데즈코에게 보여줬다. 특이한 물건은 아니었다. 오랜 세월 써서 낡아버린 소박한 가죽 띠였다. "우리 엄마 거였어. 옛날에 우리 집이었던 오두막의 잔해에서 찾았지. 마을 전체가 파괴되어 있었어. 모든 주민들은 다 죽고. 너도 알다시피 호젠 부족들은 전쟁을 많이 하거든."


"안타깝군." 흥분했던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데즈코가 말했다.


"왜? 선택 받지 않았다면 난 지금 살아 있지 않을 거야. 우린 삶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몰라.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일에 저항할 필요는 없어. 기대를 떠나보내는 순간이 바로 네가 정말 자유로워지는 순간이야.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골짜기를 섬기고, 바람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든, 나 자신보다 더 위대한 삶을 살았다는 걸 깨닫는 거야. 그 정도면 충분해."


모키모는 자리에서 일어나 먼지를 털었다. "제단으로 돌아가자. 내가 할 말은 그게 전부야. 왜 여기서 아이들을 위험하게 해? 지금 골짜기에는 안전한 곳이 없어. 전혀 없다고."


데즈코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깜박거리며 모양을 바꾸는 불꽃을 바라봤다. 언제나 움직이는, 결코 안정되지 않는, 판다리아의 많은 것처럼 예측할 수 없는 그것을. 변하지 않는 것은 그 자신, 그의 선택뿐이었다. 그는 해안의 밀림과 북부의 산맥, 그리고 다른 많은 지역을 지나 아이들과 함께 여기까지 왔다. 이 대륙의 어두운 구석에 도사린 모구를 비롯하여 무시무시한 적들과 맞섰다. 지금까지 항상 그는 아이들을 보호했다.


제단은 난공불락의 요새가 아니었다. 사실, 데즈코는 마음 한 구석에서 황금 연꽃이 그를 설득할 기회를 잡기 위해 그곳으로 이끄는 것이 아닐까 의심했다. 그는 궁지에 몰렸다. 함정에 빠졌다.


데즈코는 고개를 저었다. "이 땅이 위험하다는 말은 옳아. 하지만 내 아이들에게는 안전한 곳이 있어. 바로 내 곁이야. 여기 머물게 하겠어. 우릴 따라오고 싶다면, 그렇게 해. 하지만 우리 목적지는 안개내림 마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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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즈코가 깨어났을 때, 하늘은 아직 어두웠다.


그는 팔꿈치를 괴고 몸을 일으켰다. 잠이 들었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그는 밤새 보초를 설 계획이었지만, 긴 여행은 대가를 요구했다.


가까운 곳에 있던 야크가 공포에 질려 히힝 울며 발굽으로 땅을 쳤다.


데즈코의 생각이 레드혼과 클라우드후프에 미쳤다. 그들은 안전하게 불가의 이불 위에서 조용히 자고 있었다. 그는 아이들을 조심스럽게 바구니에 담고, 자신의 몸에 묶었다.


야영지 다른 곳에서도 몇몇 피난민들이 천천히 지친 눈을 부비며 일어났다. 모키모, 웡, 루크는 멀리 떨어진 모닥불 곁에 움직이지 않고 서서 어둠 속을 내다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데즈코가 그들 곁으로 다가서며 물었다.


모키모는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며 속삭였다. "루크가 뭔가를 봤어."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루크의 목에서 새어나왔다. 그의 앞발이 날카로운 쐐기로 장식된 거대한 강철 철퇴를 단단히 붙잡았다. "루크 바위 싫어한다." 그 하얀 판다렌이 불쑥 내뱉었다.


"왜 싫은데?" 웡이 물었다.


"가만히 있질 않으니까." 루크는 이를 드러냈다. "나쁜 바위. 멍청한 바위."


데즈코는 불을 등지고 서서 눈이 어둠에 익게 했다. 서서히 주변 환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이 지나가려는 산길 한 쪽은 가파른 언덕이었다. 다양한 크기의 돌덩이들이 언덕 옆에 흩어져 있었다. 이상해 보이는 점은 없었다. 모두 그저-
언덕에서 뭔가 움직였다. 순간적이었지만 데즈코도 봤다.


"웡." 모키모가 말했다. "피난민들을 깨워. 조용히. 수레를 야크에 묶고."


웡은 고개를 끄덕이고 서둘러 달려갔다.


데즈코의 눈은 산 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가 본 것이 진짜인지, 아니면 상상력의 산물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그 순간 무언가 다시 움직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멈추지 않았다.


"뛰어." 모키모는 데즈코를 향해 돌아섰다. "뛰어!"


열 개의 거대한 바위가 산사태처럼 언덕을 굴러 내려왔다.


아니, 구르는 게 아니었다. 모두 '달리고' 있었다.


루크가 두 팔을 들고 고함을 치는 순간 바위가 산 측면에서 뛰어 올랐다. 덩치 큰 개 같은 몸과 으르렁거리는 얼굴이 모닥불에 드러났다.


"기렌." 데즈코가 흠칫 숨을 들이쉬었다.






야수들은 야영지를 향해 달렸다. 그들의 화강암 피부는 기이하고 부자연스러운 형태로 꿈틀거렸다. 그들은 모구의 사냥개로, 그 주인과 마찬가지로 살아 움직이는 잔인한 바위 생물이었다.


야크는 뒷다리로 벌떡 일어섰다. 두 마리만 수레에 묶여 있었다. 웡은 고삐를 붙잡고 녀석들이 날뛰지 않게 애썼다. 야영지 여기저기서 피난민들이 황급히 일어났고, 나무 조각에 불을 붙여 횃불로 사용했다. 레드혼과 클라우드후프도 깜짝 놀라 울었다.


기렌들은 공격하지 않고, 야영지를 둘러싸면서 넓은 반원을 만들었다. 그렇게 피난민과 골짜기 북부 사이에 방벽을 만들었지만, 산길만은 열어 두었다.


"안개내림 마을로 가는 길은 안전해!" 웡이 소리쳤다. "모두 저쪽으로-"


"가만히 있어!" 상황을 이해한 데즈코가 소리쳤다. "놈들이 우릴 저 길로 몰아넣으려고 하는 거야."


"그 말이 맞아." 모키모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데즈코 곁으로 성큼 다가왔다. 기렌은 허공을 물어뜯으며 야영지에 서서히 다가왔지만, 공격을 시작하지는 않았다. "북쪽으로 가야 해. 이 골짜기 가운데로."


"루크가 길을 낸다." 흰 판다렌이 야크가 묶이지 않은 수레를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나무 등걸만한 그의 팔도 부들부들 떨렸다. 귀가 멀 듯 커다란 고함 소리와 함께 그는 수레를 던졌다. 기렌 방어선의 중심에서 수레는 산산이 조각나며, 야수들이 좌우로 피하게 만들었다.


"지금이야!" 데즈코가 손짓했다.


피난민들은 앞으로 돌진했다. 기렌이 사방에서 다가왔다. 루크의 철퇴가 뛰어오른 기렌 하나에 적중했다. 네 마리가 데즈코에게 달려들었다. 그가 안쉬에게 기도를 올리자, 주위의 차가운 공기에 힘이 흘렀다. 따스하고 환한, 마치 밤이 낮이 된 듯한 힘이었다.


그는 팔뚝에서 방패를 풀고, 그 뾰족한 강철판을 기렌에게 던졌다. 빛나는 방패는 빙글빙글 회전하며 첫 번째 야수에게 적중했고, 그 머리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 충격으로 생물은 다른 기렌 하나에 충돌하며, 그 기렌을 반으로 쪼갰다.


남은 두 마리는 상처 없이 계속 다가왔다. 모키모가 긴 두 팔로 그들을 향해 달려들어, 기렌 중 한 마리를 발로 걷어찼다. 마지막 기렌이 데즈코에게 달려들었고, 충돌 직전에 데즈코는 옆으로 돌며 빈 손으로 가슴을 감싸 가까스로 클라우드후프를 보호했다.


뭔가 찢어졌다. 데즈코는 어깨에 걸린 무게가 줄어드는 것을 느꼈다. 기렌이 밧줄을 끊은 것이다.


타우렌은 떨어지는 클라우드후프의 바구니를 붙잡았다. 그는 철퇴를 높이 들고 빙글 돌았지만, 기렌은 이미 산길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밧줄을 물고 다른 바구니 하나를 끌면서. 그 안의 레드혼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타우렌은 울고 있는 아들을 향해 달렸다. 그의 발굽이 땅에 깊은 자국을 냈다. 모키모가 그의 뒤로 달려들고, 그의 팔을 강하게 붙잡아 멈춰 세웠다.


"내가 데려올게." 호젠이 말했다. "클라우드후프를 데리고 피난민들 쪽으로 가."


"레드혼을 버릴 순 없어!" 데즈코가 모키모에게 붙잡힌 팔을 빼냈다.


"그럼 내게 클라우드후프를 줘. 안전한 데로 데려갈게." 호젠이 사정했다.


데즈코는 망설이며 머뭇거렸다. 기렌에 쫓긴 피난민들은 갈팡질팡 달아나고 있었다. 야수 두 마리가 루크와 한데 엉켜 땅바닥에서 씨름하고 있었다. 그는 앞발로 놈들의 머리를 미친듯이 두들겼다.


"어디로?!" 타우렌은 소리쳤다. "내가 말했지만-"


등골이 서늘한 비명이 산길 쪽에서 터져나왔다.


데즈코는 모키모를 밀쳐내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달렸다. 클라우드후프의 바구니를 팔에 꼭 품은 채로. 그는 소리 죽여 안쉬에게 기도하며, 빛의 방패를 그려 다가오는 전투에서 클라우드후프를 지키려 했다.


그 어두운 길로 다가가던 타우렌은 모키모가 자신의 뒤를 쫓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온 신경이 멀리서 들려오는 레드혼의 울음 소리에 쏠려 있었다. 앞쪽에서 불빛이 깜박였다. 희미한 주황 빛이 산 측면을 따라 사그라지며 흘러내렸다. 그는 빛을 따라갔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천둥처럼 그의 귀를 꽉 채웠다.


길을 달려 올라가다가, 데즈코는 아들을 발견했다.


레드혼은 샤오티엔의 거대하고 날카로운 손에 들려 흔들리고 있었다. 섬세한 가죽 치마를 제외하면, 그 근육질의 거한은 아무런 방어구도 몸에 두르지 않았다. 암청색 바위 같은 피부는 다른 손에 들린 횃불빛으로 빛났다. 기렌은 모구 앞 조금 떨어진 곳에서, 두터운 방어구를 입고 날이 긴 창을 든 두 명의 샤오티엔과 함께 앉아 있었다.


모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데즈코도 말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이성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종족이 아니었다. 그들의 행동은 명예를 아는 이들이라면 모두 따르는 논리를 거부했다. 그들은 그저 데즈코를 노려볼 뿐이었다. 지휘관으로 보이는 샤오티엔은 레드혼을 공중으로 쳐들며 타우렌에게 다가오라고 지시했다.


그는 도전을 받아들였다.


"데즈코!" 모키모가 길 초입에서 소리쳤지만, 타우렌은 그를 무시했다. 그의 귀에 들어오는 소리는 레드혼과 클라우드후프의 울음과, 먼 곳에서 들리는 아내의 애원하는 목소리 뿐이었다.


'내 사랑…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우리 아이를… 지켜 주세요…'


방어구를 입은 모구와 기렌이 앞으로 달려나왔다. 데즈코는 철퇴로 개를 공격하여 머리를 부숴버렸다. 그 공격으로 빛의 파동이 폭발하며 샤오티엔 중 하나를 향해 퍼져 나갔다. 그 모구는 옆으로 피했지만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안쉬의 빛에 감싸인 그의 몸 절반이 먼지가 되어 무너져 내렸다.


앞쪽에서, 모구 지도자가 빛을 피하기 위해 손으로 눈을 가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횃불을 땅에 집어 던졌다. 그 거수는 치마에서 짧은 칼을 뽑았다. 검붉고 긴 촉수가 무기에서 꿈틀거리며 뻗어 나와, 강철의 검 주위를 맴돌았다.


샤오티엔이 검을 든 팔을 들어올리고 레드혼을 내리칠 준비를 하는 모습을, 데즈코는 공포에 휩싸인 채 바라봤다.


횃불이 약해졌다… 어둠이 길에 내려앉았다. 머리 위로 그림자가 움직였다. 모키모가 하늘을 갈랐다. 방어구를 입은 마지막 모구가 데즈코의 앞으로 뛰어들어 그의 시야를 가렸다. 샤오티엔은 손에서 창을 회전시키고 타우렌을 향해 휘둘렀다. 그는 묵직한 창날은 피했지만, 그 자루는 그의 손목에 부딪히며 부러졌고, 그 바람에 그의 철퇴가 날아갔다. 모구는 앞으로 달려들어 데즈코에게 강하게 충돌해 그를 쓰러뜨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버티고 서서 머리로 그 거수의 얼굴에 박치기를 했다. 샤오티엔은 혼란에 빠져 옆으로 쓰러졌다.


데즈코는 무릎을 꿇었다. 이마에서 솟아난 피가 눈으로 흘러들어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미친 듯이 무기를 찾았다. 무엇이라도. 그의 손이 죽은 기렌에 닿았다.


데즈코는 야수의 뒷다리를 붙잡고 일어서, 체중을 실어 앞으로 몸을 던지며 회전했다. 온 몸의 근육이 강철처럼 단단해졌다. 산길은 조용했다. 울음 소리도 모두 그쳤다.


"레드혼!' 그는 소리치며 한 손으로 기렌을 휘둘러 모구의 가슴방어구를 깨트렸다. 거한은 뒤로 날아가 땅에 쓰러진 뒤 움직이지 않았다.


그림자가 앞쪽에서 흔들렸다. 데즈코는 재빨리 다가갔다. 그는 자신의 왼팔 아래로 클라우드후프의 바구니가 안전하게 흔들리는 걸 느꼈다. 타우렌은 앞이 보일 때까지 눈앞의 피를 닦아냈다. 모키모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모구 지휘관은 그 근처에 쓰러진 채, 자신의 칼날이 그의 바위 머리를 뚫고 튀어나와 있었다.


"어디 있지?" 데즈코가 물었다.


"여기야." 모키모의 목소리는 축축하고 거칠었다. 그의 목에 난 깊은 상처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는 레드혼을 든 팔을 뻗었다. 아이는 눈을 감고 있었고, 피로 덮여 있었는데, 그 피의 일부는 아이의 것이었다.


아들을 향해 손을 뻗기 전, 데즈코는 안쉬에게 아들의 상처를 치료해 줄 것을 간청했다. 노란색 빛이 환하게 아들을 감쌌지만, 빛이 사라진 후에도 아이는 눈을 뜨지 않았다.


"안 돼…" 데즈코는 분노에 가득 차 이를 갈았다. 그는 아무 힘도 없었다. 아무 쓸모도 없었다. 레자가 죽었을 때처럼. 그는 아내를 구하려고, 그녀를 그의 삶에서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썼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무 소용도 없었다.


"모구의 칼에 맞았어." 모키모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독이 발라져 있었나 봐. 그게 너무 강해서 너도 아이나… 내 상처를 치료할 수 없었을 거야. 하지만 희망은 있어." 모키모는 힘없이 데즈코의 손을 붙잡아 레드혼의 가슴에 가져갔다.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희미하고 조용하지만 분명히 있었다. "아이는 살아 있어."


"난 도와줄 수 없어..." 데즈코가 절망하여 주먹으로 땅바닥을 내리쳤다.


"다른 방법이 있어." 모키모는 천천히 일어났다. 그는 잠시 좌우로 비틀거리며 쓰러질 뻔했다. "신성한 호수가 있잖아. 아이에게 생명이 남아 있는 한, 이 골짜기의 물이-"


그의 목소리가 잦아들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클라우드후프." 호젠이 말했다.


데즈코가 자신의 팔 아래 안전하게 품은 아이를 내려다봤다.


"혹시…?" 모키모의 눈가에 눈물이 솟았다. "아, 안 돼…"


아이의 바구니는 엉망이 되어 있었다. 클라우드후프는 데즈코의 팔에 걸쳐진 채, 부러지고 부서지고 말았다. 타우렌은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팔의 힘을 풀고 아이를 품에 안았다. 그는 얼어붙은 채 자신의 아들을 쓰다듬었다. 현실은 마치 칼날처럼 그의 심장을 꿰뚫었다.


레드혼에게만 신경을 쓰느라, 그는 클라우드후프가 세상을 떠나는 순간을 보지 못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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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이야!" 모키모가 소리쳤다. 놀랍게도 그 호젠은 부상을 이겨내고 움직일 기운을 냈다. 그는 모구의 횃불을 공중에 광적으로 휘두르며 데즈코를 불렀다. 타우렌은 그 뒤를 따랐다. 한 손에는 조심스럽게 레드혼을 안고, 다른 손으로는 클라우드후프의 유해를 들고 있었다.


호젠 뒤로 커다란 호수가 밤의 어둠 속에서 부드럽게 빛났다. 섬세한 나무 아치가 그 주위를 둘러싸고, 신성한 물 주변에 놓인 납작한 돌판들로 이어졌다. 골짜기의 가장 남쪽, 공격이 일어났던 장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호수였다.


데즈코는 힘겹게 모키모를 따라잡았다. 그의 머리속에서는 지금까지 수도 없이 앞서의 전투가 반복되고 있었다. 연이은 사건들을 회상하며, 클라우드후프가 언제 이렇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내려고 했다. 언제였을까? 모구가 그에게 충돌하여 거의 쓰러질 뻔했을 때일까? 아니면 그가 직접 한 짓일까?


내가 아들을 저렇게 했을까?


타우렌은 구역질을 느끼며 쓰러졌다. "안쉬여, 제 잘못입니다. 틀림 없습니다."


"일어나!" 모키모가 횃불 밑둥으로 데즈코의 머리를 때렸다. 그 충격은 타우렌의 정신을 되돌려 놓았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피에 흠뻑 젖은 호젠을 찾았다.


"아이는 떠났어. 어떻게 그렇게 됐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어." 모키모가 말했다. "이제 중요한 건 레드혼이야."
데즈코는 힘겹게 발굽을 딛고 일어나 모키모를 따라 웅덩이 가장자리로 갔다.


"모구는 이 물을 나쁜 일에 썼지만, 좋은 일도 생길 수 있어." 호젠이 말했다. "이 호수는 각각 서로 다른 감정을 품고 있어. 용기... 평화..." 모키모는 호수에 걸어 들어서며 얼굴을 찌푸렸다.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물을 흐렸다. "이건 희망의 웅덩이야."


"내가... 내가 뭘 해야 하지?" 타우렌이 물었다. 그가 나타나자 호수의 힘을 받아 환하게 빛나는 물고기가 여럿 도망쳤다.


"레드혼을 이리 줘."


데즈코는 아무 망설임 없이 아들을 건넸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아무 것도 없었다. 타우렌이 할 수 있는 건 모키모가 조심스럽게, 사랑을 가득 담아 레드혼을 목까지 물 속에 담그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뿐이었다.


그 모습은 놀라웠다. 모키모는 마치 자신의 아이를 돌보듯 그의 아들을 안았다. 그 호젠은 레드혼에게 미약하지만 다시 한 번 생명의 기회를 주기 위해 가늠할 수 없이 큰 위험을 무릅썼다. 전투를 돌이켜 보면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는 명백했다. 모키모는 모구의 검과 아들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 무기가 레드혼에게 상처를 입히긴 했지만, 데즈코는 친구가 아니었다면 아들은 이미 이 세상 타우렌이 아닐 것임을 알았다.


"이리 와." 모키모는 힘겹게 손을 흔들었다. 그는 정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클라우드후프는... 호숫가에 잠시 내려놔..."


머뭇거리며 데즈코는 클라우드후프의 유해를 호숫가에 내려놓고 물 속으로 들어섰다.


"손으로... 물을 떠서..." 모키모가 말했다. "레드혼에게 부어."


쿵쿵 뛰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데즈코는 그 말을 따랐다. 그는 물이 아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게 했다. 모키모도 똑같이 했다. 빛나는 물의 구슬이 레드혼의 코를 따라 흘러내렸다. 하지만 아이에게 아무 효과도 없는 것 같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데즈코는 물을 더 떠올렸지만, 모키모가 그 손을 잡았다.


"골짜기의 힘을... 기다려." 호젠이 얕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걸 통제할 순 없어. 넌 그냥... 희망을 가져야 해. 레자가 그랬던 것처럼 믿어. 그녀가 죽음을 직면했을 때... 절망했어?"


"아니." 데즈코는 두 눈을 꽉 감았다. 그녀는 언제나 믿었다. 언제나 강했다. 레자가 여기 있어야 했다. 그가 아니라. 그녀가 있었더라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


열기의 파도가 데즈코를 덮쳐 와 그는 눈을 떴다.반투명한 츠지의 모습이 마치 땅 위를 걷는 것처럼 물 위를 걸었다. 호수 위로 그의 발톱이 닿는 곳에서 황금빛 파문이 번졌다. 걸음을 걸을 때마다 마치 아주 작은 종이 울리는 것처럼 희미한 소리가 퍼졌다.


천신이 날개를 활짝 펼치자, 갑작스러운 바람이 타우렌과 호젠에게 물을 끼얹었다. 모키모는 똑바로 일어나 자신의 목을 만졌다. 상처가 모두 아물어 있었다.


츠지는 몸을 숙여 물을 통해 부리를 레드혼의 가슴에 댔다. 데즈코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기다렸다. 시간은 영원까지 늘어지는 듯했다. 그리고 그가 최악의 상황을 염려하기 시작했을 때, 아들이 움직였다. 데즈코는 믿기지 않는 시선으로 아이를 바라봤다. 레드혼이 눈을 뜨고 아빠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데즈코를 향해 두 손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데즈코가 아이를 품에 꼭 안았다. 그제서야 클라우드후프를 떠올린 그는 웅덩이 가장자리를 향해, 차갑게 식은 아들을 내려놓은 곳을 향해 돌아섰다. "제 아이가, 주학이시여, 혹시 무슨 방법이-"


츠지를 향해 돌아서던 그는 말을 다 끝맺지 못했다. 주학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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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렌 죽었다. 피난민들은 웡이랑 있어." 루크는 거대한 앞발로 가슴을 쳤다. 그는 츠지가 나타난 직후에 웅덩이에 도착했다. 클라우드후프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된 후, 그 거대한 판다렌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다. 데즈코는 아들의 죽음이 루크에게 그렇게 큰 영향을 미칠 줄은 몰랐었다. 아이들을 그렇게 여러 번 본 것 같지도 않았는데.


하지만 그랬다. 황금 연꽃은 그들을 정말 많이 아꼈다. 데즈코는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가 아는 거라곤 그들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뿐이었다. 정확히 말할 순 없지만, 아이들은 그들에게 가족과 같았다.


"좋아!" 모키모가 루크에게 말했고, 그들은 데즈코를 향해 돌아섰다. "지금은 제단으로 돌아가는 게 제일이야. 네가 떠나고 싶어 하는 건 알지만, 준비를 해야 해. 뭐가 필요하든 말이야. 너와 레드혼이 집으로 돌아갈 길을 찾아줄게."


‘집.’ 데즈코는 멀고어의 따스한 햇빛이 내리쬐는, 부족의 작은 거주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와 레자가 떠나왔을 때, 그들은 그곳을 다시 볼 수 있을지 궁금해 했다. 그는 그럴 수 있을 거라고 믿었지만, 아내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꿈에서 보는 땅을 자신의 집인 것처럼 이야기했다. 그들이 언제나 속해 있었지만 아직 알지 못하는 그런 집. 그는 마침내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이해했다. 그는 이 골짜기의 힘을 목격했다. 그 자신 뿐 아니라,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에 영향을 미치는, 그런 잠재력을 느꼈다.


"떠나지 않겠어." 데즈코가 말했다.


"정말?"


"다른 일이 있어." 데즈코가 덧붙였다. 그는 품에 안은 레드혼을 내려다봤다. "혹시 아직도..." 그는 입을 뗐지만 말을 잇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는 아이를 모키모에게 내밀었다.


"그럴 필요 없어." 모키모가 고개를 저었다. 츠지 님이 자기가 하신 일에 대한 대가로 뭔가를 원하실 거라고 생각한다면, 잘못 생각한 거야. 선물은 공짜로 주어지는 거라고.


"데려가." 데즈코가 애원했다. "이게 우리가 온 이유야. 그래." 그는 생각했다. ‘안쉬의 이끌림으로. 그걸 더 일찍 깨닫지 못하다니, 내가 정말 어리석었어.’ 그들은 골짜기를 찾아, 그곳을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보기 위해, 그 안에 살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그 일부가 되는 것… 골짜기와 하나가 되는 것은 감히 거기에 비교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네가 그렇게 얘기하면..." 모키모가 말했다. "정말 원하는 거라면, 그래야지."


"그래." 데즈코가 답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을까? 공식적인 절차 같은 거 말이야."


"우린..." 모키모가 고개를 숙였다. "그래, 의식이 있어. 내가 아이를 즈에게 데려갈 거고, 즈가 츠지에게 데려가서 인정을 받을 거야. 그곳에는 황금 연꽃만이 참석할 수 있어. 미안해."


"아니, 이해가 되는군." 데즈코의 목소리가 목에 걸렸다. "그러면, 이제 가."


"지금이 아니어도 괜찮아." 호젠이 말했다. "우선 제단으로 돌아가도 돼."


"가. 내 마음이 바뀌기 전에."


"의식이 끝나면 너도 볼 수 있어." 모키모가 레드혼을 품에 안으며 덧붙였다. "앞으로 몇 년 간은 훈련을 하느라 바쁘겠지만, 여기 골짜기에 있을 거야."


"황금 연꽃의 일원."


"그리고 네 아들이지." 호젠이 말했다. "항상 그럴 거야. 하지만 이제 그 이상의 존재기도 하고."


모키모는 데즈코의 가슴에 묶인 바구니 속에 있는 클라우드후프를 쳐다봤다. 타우렌은 바구니의 남은 부분을 고쳐 밧줄로 자신의 목에 묶어 두었다. "그 아이는?" 호젠이 물었다.


"화장 장작을 세우고 새벽에 불을 붙이겠어. 안쉬가 내 아들이 떠나는 길을 살필 수 있게." 데즈코가 답했다. "내가… 혼자 하는게 좋을 것 같군."


모키모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말 없이, 그는 루크에게 손짓을 했다. 그들이 떠나려는 찰나, 뭔가 떠올린 데즈코가 그들을 불렀다.


"잠깐." 타우렌은 자신의 머리에 있던 레자의 머리 타래를 풀었다. 그는 그 타래를 레드혼의 갈기에 묶고, 몸을 숙여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 후, 루크와 모키모는 떠났다. 데즈코는 장작거리를 모으며 앞날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제단에서 자신의 책무를 계속할 것이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날라와 다른 이들에게 이야기할 생각은 없었다. 그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그들이 클라우드후프를 잃은 것을 용서해 줄까? 아니, 그 자신이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을까? 아닐지도 모른다. 그럴 만한 일이다. 이 모든 것은 그의 선택이었다. 끔찍하고 잘못된 선택.


장례식이 시작되기 전, 데즈코는 자리에 앉아 쉬었다. 밖은 아직 어두웠고, 곧 새벽이 다가올 것 같았다. 그 기운이 느껴졌다. 그게 정확히 언제인지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여기가 우리 집이란다." 데즈코가 소리내어 말했다. 품에 안은 클라우드후프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그는 고개를 돌려 동쪽을 바라봤다. 곧 예에나에가 나타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