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꿈을 꿨다.

꿈 속의 나는 팔척(2m40cm)에 달하는 무신도를 들고 이름 모를 판타지 세계 속 괴물들을 처치하고있었다.


'남들이 안다면 주책맞다고 하겠지.'


나이를 먹으면 꿈을 꾸는 것조차 일상에 부는 바람일 정도로 드문데 어찌된일인지 모르겠다.

확실한건 내가 검은사막의 매력에 푹 빠졌다는 사실이다.


'바로 접속할까?'


거실에서 마누라가 짓는 구수한 된장냄새가 풍긴다.

고개를 저었다.


'아냐, 일상이 망가지지 않도록 조절해야 해.'


게임에 빠져 하루 루틴이 망가짐은 곧 건강의 악화로 이어진다.

전날 느끼지 않았나. 겨우 게임에 압도되어 세차게 뛰던 가슴을.

그래도 좋았다.

지루한 일상에 새로운 활력이란 생명연장에 도움이 되니까.


"여보~. 아침 드세요~."


마누라의 나긋나긋해진 목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왠지 모르게 몸이 가벼운건 기분 탓일까?


"커험. 임자.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보이?"

"그른가아? 누구씨가 결혼기념일을 제대로 챙겨줘서 겠지. 호홋"


철렁.

가슴이 내려앉았다.


'뭔 소리지? 내가 언제 챙겼다고...'


두뇌를 필사적으로 돌리자 맞아 떨어지는 것이 하나있었다.

구찌백... 11월 10일...

공교롭게도 마누라에게 구찌백을 선물한 날짜가 결혼기념일이었다.


"커허험! 그... 그럼! 내 어찌 임자와 맺어진 날을 잊겠나!"


순간 날카로워지는 마누라의 눈빛.


"말을 제대로 하는 것을 보이 당황하네?"

"아... 아니! 내...가... 언제... 더듬... 더듬...었...다고오...!"

"흐음... 뭐, 기분은 좋으니 넘어갈게요."


역시 임자다.

이후 밥이 코로넘어가는지 입으로 넘어가는지 몰랐다.

함께 살아온 세월 어언 50년.

반세기에 달하는 이 시간동안 참으로 많이 의지했다.

얼굴만봐도 서로를 안다고? 마누라는 방에서 들리는 내 기침소리만 들어도 모든 것을 안다.


'무서워...'


그래도 사랑하기에 함께 할 수 있는거다.


*


아침 산책과 요가를 마친 뒤 마누라가 친구들을 만나러 떠나는 시간.

오후 1시.

지금부터 6시까지는 온전히 내 시간이다.

"헤...이... 빅스비..."

-네?

"오...후 여섯...시... 알람..."

-11월 16일 오후 6시 알람을 등록했어요. 앞으로 4시간 48분뒤에 알려드릴게요.

"고...맙다..."


이제 접속을 해볼까?

아니다.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검은사막 인벤을 통한 정보 확인!

과거에는 넷상의 커뮤니티가 발전하지 못해 게임잡지나 혈맹원을 통해 알음알음 정보를 얻은 반면, 요즘은 클릭 몇번이면 쉽게 얻을 수 있다.

검은 사막도 예외가 아니었다.

업무 외에는 사용 할 일 없었던 스마트폰. 처음으로 인벤 어플을 깔았다.


"팁...과 노하...우."


그곳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사냥은 요즘말로 pve라고 칭했고, pk보다 pvp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했다.

게다가 새로이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검은 사막은 무려 '생활'이라는 컨텐츠가 있다는 것.

몇시간이고 반복되는 사냥이 지겨운 유저들을 위해, 다른 사람과의 경쟁이 싫은 이들을 위해 준비한 컨텐츠로 보였다.


'즐기는 법은 다양 한 법이니...'


엔 씨불롬들과 다르게 펄어비스는 다양한 유저를 존중하려 애쓴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내겐... 해...당 없다...!"


리니지 경력 20년의 데컨서버 싸울아비.

그게 나 zi존검사니까.

여러 정보글을 긁어 모았다.

업무용 엑셀 시트에 정리한 정보 글을 프린터로 인쇄해 제본까지 마치니 신입사원으로 돌아간 기분이 든다.


'총 285장. 꽤 괜찮군.'


입문용 뉴비(초보유저)가 봐야할 A to Z 부터

각성 직후 무엇을 해야 할까? 까지.

시작부터 엔드까지 모든 정보를 망라했다.

아뿔싸. 시계를 보니 오후 4시다.


'오랜만에 집중했어.'


마누라가 곧 도착하면 저녁을 먹고 산책을 나가야하니 주어진 시간은 두시간 남짓이었다.

시간이 없다.

클라이언트를 실행하니 40대에 처음 시작한 리니지의 마성에 빠져 밤낮 못이룬 그 시절의 두근거림이 몰려왔다.


'열정을 불태웠었지.'


처음 혈맹에 가입하고, 많은 이들을 만났으며, 그들과 함께 공성전을 치루던 나날.

그건 잊지 못할 추억이자 자극이며, 지금까지 이어지는 인연이었다.


'그러고보니 다들 어찌 지내려나...'


게임은 접었지만, 새해나 명절에 안부인사가 오기도했다.

그 수도 줄어 연락하는 인원도 이제는 너댓명 남짓.

그래도 누군가 모임을 제안하면 다들 거절하지 않을게 뻔했다.


'같이하면 좋으련만...'


잡생각을 하다보니 어느새 게임이 실행되고 전날 만들어둔 닉네임 zi존검사인 무사 캐릭터가 날 반겼다.


"크흐..."


캐릭터 창만 보고있어도 멋진 나의 캐릭터. 내 분신이다.

접속 버튼을 누르자 짧은 로딩 화면이 지나고... 

드디어 게임이 시작됐다.


*


인트로 영상이 지나자 캐릭터는 왠 작은 움막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압도적인 주변풍경은 현실보다 멋졌고, 캐릭터의 비틀거리는 움직임은 감탄을 자아냈다.

마치 실제처럼.

하지만 zi존검사는 분노했다.


"거...적...떼기를... 입고... 있...느냐...!"


비틀비틀 흔들리는 화면 속 캐릭터는 허여멀건 거적떼기를 입고 있는게 아닌가?

참을 수 없었다.

아무리 1레벨이라지만 나 zi존검사다.

검은사막 인벤에 대문짝만하게 걸려있던 그 멋진 캐릭터들의 이미지를 분명 봤다.

그리고 댓글에서 펄옷펄옷이라 말하던 사실과 현금 이야기가 오가는 것을 떠올렸다.


'분명 치장템이 있다.'


285페이지에 달하는 가이드 중 2페이지를 펼쳤다.


-검은사막의 단축키와 조작키-

'esc를 누르면 모든 이용 가능한 기능이 나온다. 진주 모양의 아이콘을 클릭하면 캐쉬상점에 진입가능.'


당장 esc를 누르고 진주모양을 찾았다.

펄상점.

반려동물부터 모험가를 지원해주는 메이드, 캐릭터의 인벤토리 칸과 무게, 게다가 강화에 필요한 재료까지 없는 것이 없었다.


"훗... 게...임은... 이...래야지..."


무엇이든 초기 투자비용이 많이 드는 법이다.


'일단 가볍게 천만원만 넣을까? 아니야. 편하게 하려면 2천은 질러야...'


리니지로 인해 무너진 현질관념.

하지만 그는 깨닫지 못했다.

첫 게임이 리니지였고, 그게 당연한 것인 줄 알았으니까.

게다가 그 직후 만난 게임이 롤이다.

무료게임=질병. 이라는 공식이 성립한 70대 린저씨의 알고리즘은 한계가없었다.

다행히 그의 폭주를 막은 펄어비스의 시스템이 있었으니...


-한도를 초과하여 충전하실 수 없습니다.
-한도 변경을 원하신다면 홈페이지를 통하여...


"뭣...?!"


겨우 50만원을 넣었을 뿐인데?

70대 린저씨는 당황스러운 사태에 당황감을 감추지 못했다.


"어...찌... 나의... 소비력...을... 억...제 한단 말이냐!"


갈!

홈페이지에 당장 접속해 한참을 뒤적거렸다.

그 시간이 무려 1시간 20분.

현재시각 5시 40분이다.

마누라의 발소리가 들리는 듯 조급해진 zi존검사는 최후의 방법을 꺼내들었다.

-뚜르르...

달칵.

-예. 아버지.

"아이디 zizon52, 비밀번호 *****. 검은사막 홈페이지 들어가서 결제 한도 늘려놔라."

-예? 아버지 검은사막 하세요?

"빨리!"

-잠시만요.


휴대폰 너머로 타닥타닥 소리가 들려온다.


-아버지. 이거 월 한도인데 얼마로 해드려요?

"1억."

-예에?!

"늬 엄마한테는 비밀이다."


그때... 등 줄기가 오싹해지며 뒤에서 일갈이 들려왔다.


"이 우라질 양반아!!!!!"

-아버지. 전 모르는 일입니다.


뚝.

꺼진 스마트폰이 잠시 검어지더니 빅스비가 말했다.

-오후 6시에요. 오후 6시. 오후 6시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