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글로아 해는 세나콘왕국과 자렐린왕국 및 키젤왕국, 비용공국과 여러 식민지에 접해있을 뿐만 아니라 제국해로 들어가는 시글로아 해협의 바깥 쪽 바다였기에 예로부터 교역의 중심 통로로 발전해왔다. 로자레일 일행은 사흘 전에 세나콘의 라모기 항을 출발하여 자렐린 본국의 데르시아로 향하는 길이었다. 보아륀에서 잔뜩 구입한 설탕과 사탕수수를 라모기에 팔아, 금화 4닢의 이익을 남긴 로자레일은 라모기에서 현미와 라임을 구입하였다. 추수철이기에 채 5골드가 되지 않는 가격으로 캐러벨의 짐칸을 모두 채울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상업용으로 개조한 캐러벨이나 카락을 사고 싶었지만, 수중에 가지고 있는 107골드 45실버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이외에도 라모기 항을 떠날 때 말론이 쥐어준 금화 50닢이 들어있는 주머니가 있었지만, 그것은 혹시 데무트를 만나거든 데무트를 해방시켜줄 자금이라고 여겨 건드리지 않기로 한 로자레일이었다.

 

“앞으로 마렐 씨에게 교역품의 구입과 판매를 맡기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선장님.”

 

캐러벨의 선장실에서 로자레일이 마렐이라 불린 청년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마렐 시르트, 24살의 나이로 부모의 빚을 갚기 위해 게르미날의 밑에서 일하던 자였다. 마렐은 금화 100닢을 빌려준 일로 종형제들이 감독관을 붙여야 한다고 주장하자, 게르미날이 회계와 물건정리 같은 서류업무를 맡기라며 붙여준 사람이었다. 24살의 나이에 비해 어려보이는 얼굴이었는데, 키도 크지 않고, 체형도 마른편이어서 상당히 유약해 보이는 인물이었다. 게르미날의 말로는 상당한 수준의 역량을 보여서 포목점의 운영을 맡을 예정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마렐 씨가 일단은 감독관이기는 하지만 말을 편하게 했으면 합니다만.”

 

“물론입니다.”

 

마렐도 명목상으로는 감독관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로자레일의 회계사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게르미날과 말론의 배려에 감복한 로자레일은 데무트의 수색에도 나름 신경을 쓸 것을 속으로 다짐하기도 했다.

 

“선장님!”

 

선장실의 문 밖에서 한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선장실의 문이 살짝 열리며 한스가 머리를 들이밀고 선장실의 분위기를 살피더니 이내 활짝 문을 열고 당당히 걸어들어온다. 요정을 처음 본 한스는 애나벨을 만지려다가 된통 당한 이후로 애나벨을 무서워했다. 물론 그런 애나벨을 부리는 것처럼 보이는 로자레일에게 더욱 깍듯이 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일로 보고를 드리러 왔습니다, 헤헤.”

 

“애나벨은 렉스와 함께 있으니까 안심하고. 아무튼 그들은 어떻던가?”

 

로자레일은 연신 두리번거리며 애나벨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피는 한스를 안심시켜 주었다. 렉스는 귀족꼬마의 이름이었다.

 

“에, 그게... 시키는 일은 잘 하는데, 여전히 아무런 말도 않습니다.”

 

한스가 머리를 긁적이며 죄송하다는 투로 말했다.

 

“일단은 나둬. 항구에 도착했을 때는 선원실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자네가 잘 감시하도록 하고.”

“예, 알겠습니다요.”

 

한스가 꾸벅 인사를 하고 선장실을 나갔다. 요즘 한스는 원래 하던 일 외에도 포로 4명을 돌보는 일도 맡아서 하고 있었다. 그 포로들은 로자레일을 골치 아프게 하고 있었는데,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여 항구에서 선원실에 가두는 조치를 취한 일에 대하여 크게 불만을 가지고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행이라면 렉스가 애나벨과 어울리면서 차차 로자레일에게도 마음을 열고 있다는 것이었다.

 

“알지 모르지만, 이 배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해적선이었지.”

 

“예, 대충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로자레일이 한스와 대화하는 동안 조용히 기립해 있던 마렐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마렐은 그 설명을 모두 듣고도 1년만 이 배를 타면 모든 빚을 탕감해 주겠다는 게르미날의 제안을 덜컥 승낙한 것이다. 마렐은 자신보다 어린 나이임에도 해적들을 수하로 두고 요정을 부리는 로자레일에 대하여 경외심을 가지고 어려워했다.

 

“혹시나 그들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혹하지 않도록 마음 단단히 먹게.”

 

“예...”

 

포로들의 처지를 알고 있는 마렐은 포로들이 불쌍했지만 로자레일이 그들을 가혹하게 대한다거나 목숨을 빼앗아 가지는 않을 것 같았기에 조금은 주저하면서도 알겠다고 대답했다. 마음이 여려 보이는데다가 갓 배에 탄 마렐이었기에 포로들이 울면서 부탁을 하면 풀어줄지도 몰라 미리 당부를 하는 것이다.

 

“컥...”

 

그 때 갑자기 로자레일이 괴로워하며 목을 움켜쥐었다.

 

“선장님! 선장님, 왜 그러십니까?”

 

“나...나...가...”

 

“예? 선장님! 선장님!”

 

“나가라고! 어..어..서!”

 

로자레일은 본인이 바닥에 쓰러지자 상태를 살피기 위해 가까이 다가온 마렐을 밀쳐내며 소리쳤다. 그 바람에 마렐은 뒤로 넘어져 버렸지만, 노려보는 로자레일의 눈빛에서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은 마렐은 서둘러 선장실을 빠져나갔다.

 

마렐이 선장실을 빠져나가자 로자레일은 얼른 물병의 물을 마셨다. 그럼에도 타는 듯한 갈증이 멈추지 않았다. 로자레일은 선장실의 창문을 열고 바다를 보았다. 바다가 그를 유혹하고 있었다. 바다로 뛰어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로자레일은 정신을 집중했다. 저번처럼 바다 속으로 뛰어든다면 분명 이 갈증을 해소할 수는 있겠지만, 저번과는 달리 지금은 대낮이었으므로 자신의 비밀이 들통 날 우려가 있었다.

 

그러나 참을 수 없는 두통과 갈증이 그를 괴롭혔다. 눈앞에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창문을 넘어서 뛰어들기만 하면 실컷 바닷물을 마실 수 있을 것이다.

 

“크윽...”

 

로자레일은 손을 뻗었다. 뛰어든다면 자신이 괴물이라는 것이 밝혀질 것이 분명하고 그렇다고 이 고통을 참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선장실에 마련되어있는 로프를 이용하여 내려갔다오면 될 일이었지만, 고통 속에서 원초적 본능만을 갈구하고 있는 로자레일은 그것을 참는 것만으로도 정신적 한계를 넘어설 지경이었기에 로프를 이용할 생각은 전혀 할 수 없었다. 그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괴로워하며 바다를 향해 손을 뻗은 로자레일에게 파도가 크게 일렁이며 날아온 것이다.

 

“꿀꺽, 꿀꺽.”

 

로자레일은 본인이 지금 무슨 일을 한 것인지 알지 못하는 듯 그저 바닷물을 마시기만 했다. 그러자 로자레일에게 변화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제야 어느정도 정신을 차린 로자레일은 변화가 진행되고 있는 와중 임에도 물병에 입을 데고 물을 마셨다. 로자레일은 아예 물이 들어 있는 오크통의 수도를 열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귀 뒤쪽이 벌어지고 손가락 사이에 갈퀴가 생기는듯하더니 이내 벌어진 곳이 아물고 갈퀴가 사라졌다.

 

깨나 많은 물을 들이 마신 로자레일은 그제야 진정이 되었는지 매무새를 정리했다. 앞섶은 이미 물에 절어 있기에 입고 있던 셔츠는 벗고 새 셔츠를 꺼내어 갈아입었다.

 

새 셔츠로 갈아입은 로자레일은 선장실의 한 편에 세워져있는 청동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았다. 바닷물에 젖어있는 머리카락을 제외하면 평상시 그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 로자레일은 발작이 찾아왔을 때 바닷물을 먹고 재빨리 다시 물을 마시면 괜찮아지거나, 담수를 많이 마시면 괜찮아지는 것이 아닐까하고 두 가지 경우를 조심스럽게 추측해 보았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기에, 오늘부터는 바닷물을 일정량 가지고 다니기로 마음을 먹은 로자레일이었다.

 

“아...”

 

창가에 기대어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발작에 대하여 이런저런 고민에 잠겨있던 로자레일은 자신이 놓치고 있던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로자레일이 바닷물을 부렸다는 것이었다. 로자레일은 침착하게 마음을 가다듬고 바다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바다는 파도의 일반적인 움직임만을 보일 뿐, 특별한 징후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도 자신이 파도의 움직임을 잘못 본 것이라고 생각한 로자레일은 스스로를 멍청이라고 자책하며 의자에 앉아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로자레일의 뒤로 파도가 순간 크게 솟아오른 것은 누구도 눈치 채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