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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9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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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플라잉 더치맨17세기의 판화를 보면 바다에는 고전적인 네레이드,트리톤,디아나 신이 떠돌아다니는 것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1542년도 지리학 뭔스터 판에 나오는 아시아 지도에는 괴물종족들과 식인종이 등장하고요. 폭우풍의 곶을 돌아 반드시 돌아와야 하는 네덜란드인의 선장이 있었는데 그는 악마와 계약을 맺었다고 합니다.(주사위 던지기)그 대가로 그는 최후의 심판일까지 바다곳곳을 떠돌아다녀야 하는 운명을 부여받았습니다. 바로 7년에 한번 육지에 상륙할 수 있다는 조건이었죠. 그리고 그를 사랑하고 헌신하는 여인을 만나야만 구원을 얻고 죽음의 안식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전설에 몇가지 해상 사고 이야기가 섞이면서 점차 이야기가 발전해 갔었는데,1690년 페프홀테 플라잉(Vergulde VIamingh)호가 남아프리카의 테이블 만에서 증발하듯 사라진 사건이었다고 합니다.실제로 목격한 항해자가 있었다는데... 알려진 본명은 없더군요. 어쨋든 이 배의 이름이 유사한 발음의 VIiegende VIamingh(떠다니는 플라잉 호)가 되었다가 영국식 발음으로 FIying FIgemingh(떠다니는 네덜란드인)으로 변화되었다가 다시 FIying Dutchman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하네요. 그리고 19세기 많은 작가들이 이 전설을 각색하여 시와 소설을 썼고 최종적으로 바그너가 오페라 작품을 써서 더욱 유명해 졌습니다. 선단은 암스테르담을 떠나 남서쪽 방면으로 출항했다. 초반 항해는 아주 매끄럽게 진행되었다. 4월19에 카나리아 제도를 지나갔고 4월26일에 베르데 제도의 마요섬에 상륙했다. 그러나 이 다음부터 사정이 아주 안 좋아졌다. 6월4일이 되어서야 적도를 넘었고 6월27에 브라질 해안을 보았다. 그들이 얻은 정보를 통해 포르투갈 선박들이 이 지점에서 방향을 전환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도 똑같이 방향을 바꾸었다. 이때까지의 항해 일수는 이미 87일이나 되었다. 벌써 괴혈병 문제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고, 이제 북반구 선원들에게 익숙한 별자리가 사라졌으므로 항해가 쉅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포르투갈 인들에게 얻은 정보대로 검은색과 흰색 깃털이 박혀 있는 새들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수준의 정보에 기대여 그들은 아프리카 남해안을 향해 갔다. 8월2일에 육지를 보게 되었을 때 선원들은 환성을 질렀다. 그리고 그곳 사람들에게 말편자와 나이프를 주고 소와 양 몇마리를 얻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병자들을 치료할 수는 없었으므로 물자 보급 및 휴식 장소로 알려진 마다가스카르 섬을 빨리 찿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 역풍과 역률를 만나 배는 몇 번이고 뒤로 물러났다. 그래서 희망봉을 지나고 나서 무려 2달 지나서야 마다가스타르 섬 남서쪽 성오거스턴 만에 닻을 내릴 수 있었다. 이 때까지 모두 71명이 사망했다. 선원들은 이곳에 시체를 묻고 이 지역을 홀란드의 묘지라고 명명했다. 여건이 나쁘게 돌아가자 선원들 사이에 분란이 끊이지 않았다. 배 한 척의 선장이 사망하자 그 후임자를 정하는 문제 때문에 싸움이 일어났다. 회사 측의 지시 서한을 공개한 결과 특정 인물이 후임으로 정해졌지만, 선원들 중에 반대하는 사람이 많아서 분쟁이 계속되었다. 이런 종류의 문제는 언제나 있었고 해결하는 것도 쉅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거친사람들이 좁은 공간에 갇혀서 살아가다 보니 스트레스가 워낙 심해서 평화롭게 문제를 해결하는 분위기가 조정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러는 사이에 인도양을 항해하는 데에 유리한 몬순을 놓쳐 버렸다. 인도양 항해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는 항해 일정이 몬순에 의해 완전히 정해져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시기을 놓치자 이들은 풍향이 바뀌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결국 4개월을 허비한 다음에야 수마트라에 갈 수 있었다. 이때까지도 선원들 간의 분란이 채 정리되지 않았으므로, 선단 위원회는 이제 목표지점에서 거의 도착했기 때문에 확실하게 문제를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분쟁의 대상이 되는 한 사람을 소환하여 심리를 벌었다. 그를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지만 최종적인 결론은 이 사람을 귀국할 때 까지 쇠로 만든 우리에 가둔다는 것이었다. 이런 극단적인 조치는 문제를 잠시 진정시키는 효과는 있었지만 오래 가지는 못했다. 선상 질서는 여전히 엉망이었다. 드디어 목적지인 반탐에 도착했을때 그나마 다행으로 이곳 국왕이 이들을 환대했다. 이때는 네덜란드를 떠난지 거의 15개월이 지난 뒤였다. 그러나 동남아시아에 도착하고서도 이들의 행로는 아주 험란하였다. 일부 선원들이 현지인들에게 붙잡혀서 포로 생활을 하다가 신속금을 내고 간신히 풀려나기도 하고, 반대로 그들이 지나가던 정크 선원을 공격해서 노략질을 하기도 했다. 또 어떤 지방을 포격하여 영주를 살해했기 때문에 상륙을 하지 못하고 더 먼 곳으로 달아다기도 했다. 그 와중에 어느 곳으로 갈 것인가를 놓고 방향을 잡지 못해서 늘 선원들 간의 싸움이 벌어졌으며 급기야는 독살 사건도 일어났다. 자바섬에 이르렀을 때에는 원래 출발했던 당시의 인원 248명 가운데 94명만이 생존해 있었다. 그동안 강한 햇볕을 쐬며 열대 바다를 항해한 배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선재의 이음매에는 엄지손가락만 한 구멍들이 생겼고 배 바닥에는 삿갓조개와 해초가 붙어서 길게 자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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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함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