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는 디펜스 코리아 입니다..

서양 중세 전쟁사에 대한 글을 읽다 보니 재미있는게 있어서 올려 드립니다.

글쓴이는 Princeps 님이십니다.

첫 번째 테마 : 와인

“와인은 전쟁에 관심이 없지만, 전쟁은 와인에 관심이 있다.“

트로츠키의 유명한 경구를 잠깐 변형시킨 저 말은, 15초전 필자가 생각해낸 말이지만, 그 속에 담겨있는 진리는 적지 않다.
알려진(그리고 발견된) 가장 오래된 와인은 기원전 5천년 이집트에서 생산된 그것이다. 그것은 밀폐된 토기에 담겨 있으며, 나일강을 따라 운송되다가 침몰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7천년의 시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와인으로서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7천년전 와인에는 포도즙뿐만 아니라 송진, 꿀, 기타 향료가 발견된다. 서유럽의 와인과 달리 송진을 첨가하고 꿀을 넣는 와인은 오늘날에도 그리스 지방의 와인으로 계승되고 있다.

로마인들은 맥주를 와인보다 독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수많은 ‘교양있는’ 로마인들은 ‘독한’ 맥주에 ‘쩔어’있는 ‘야만적인’ 게르만인들 때문에 와인산업이 후퇴할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게르만인들로 인해 와인이 후퇴했다는 증거는 없다.

비잔티움 제국은 서로마제국과는 많이 달랐다. 서로마제국이 비실대는동안, 비잔티움은 번영했고, 포도농사를 포함한 농업 역시 발달했다. 그리스 주변의 섬들은 여전히 독보적인 와인 생산지였고, 4세기부터 그리스와 투르크는 머스켓 포도로 스위트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다. 북유럽에서는 이 와인을 ‘로마니아’라고 부른다. 탁월한 에게해 주변의 와인은 요리와 질병 치료에도 쓰였다. 또한 새로운 용도로 개발되기도 했는데, 리넨을 와인과 소금물에 담갔다 말리면 갑옷을 대신할 만큼 단단하게 굳는다는 사실이 발견된 것이다. 그때부터 콘스탄티노플의 군대는 와인으로 몸의 안팎을 무장하고 전장으로 떠났다.

프랑스는 와인과 포도 생산에 이상적인 기후였다. 로마제국 붕괴 이후 와인 수요를 폭발적으로 늘린 것은 교회였다. 교회는 대규모의 포도밭을 소유했으며, 와인생산과 소비의 중심이었다. 오늘날 가장 유명한 와인중 하나인 보르도 와인이 국제 와인의 중심으로 떠오른 것은 13세기이다. 사자왕 리처드의 뒤를 이은 영국의 존(무지왕 존)은 1203년에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면서 보르도가 전함과 기타 군수물자를 조달한 대가로 가스코뉴 와인에 부과되었던 세금을 낮추어 주었다.

1204년 라 로셀과 포아투 지방의 항의로 존 왕은 이들에게도 보르도 지방과 똑같은 혜택을 주었다. 그러나 카스티야의 공격에 저항한 대가로 존 왕이 보르도 와인을 주문했다. 결국 1224년, 영국령이었던 라 로셀이 프랑스에 항복하면서 가스코뉴 와인의 독주가 시작되었다.

중세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와인을 즐겼지만, 대중의 술은 맥주였다. 로렌과 같은 와인 생산지에서도 맥주가 대중적인 술이었을 정도였다. 14세기 영국 에일의 가격은 도시에서 2겔런에 1페니였지만, 프랑스나 에스파냐 와인은 1겔런당 6펜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와인은 군수품에 반드시 포함되었고, 군은 전시 와인보유고를 주시했다. 1066년 노르만족의 잉글렌드 정복때도 무기와 와인을 가득 싣고 영국 해협을 건너는 배가 등장한다. 1470년 로렌 공작이 샤텔 쉬르 모젤을 포위공격했을 때에는 와인 91베럴(4만3천리터)이 그곳으로 운송되었다.

와인은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기호품이라기보다는 주식이었고, 약이었다. 전장의 식수는 오염되기 십상이었다. 이 때 와인은 박테리아를 소독하는 수단이었다(당티푸스는 와인에 약하다). 프랑스 군만 와인을 받은 것은 아니다. 맥주가 일상적이었던 잉글랜드의 군대도 전장에서는 와인을 받았다. 1316년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2세는 스코틀랜드에서 전투중인 병사들을 위해 4천베럴의 와인을 주문했다. 스코틀랜드의 복수 또한 잔혹한 것이어서 1543년에 스코틀랜드군은 헨리 8세의 1년치와인을 싣고 가던 선박 16척을 나포했다.

17세기 유럽에서 빈번한 전쟁은 프랑스 와인에게 타격을 주었다. 알자스의 암메르 슈비르에서는 전쟁중에 13제곱키로미터에 달하는 포도밭이 불과 2제곱키로미터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독일의 포도밭이 폐허로 변하고, 프랑스 와인이 수입이 금지되자 영국의 와인시장은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점령했다.

와인은 노동자들에게 필수품이었다. 16세기에 2500명의 노동자를 고용하여 유럽 최대규모를 자랑하던 무기공장의 가장 큰 지출내용은 1위가 선박건조용 목재대금이었고, 2위가 와인이다. 무기공장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들은 물 탄 와인을 하루에 평균 2리터씩 지급받았다. 무기공장의 노동자들은 와인이 없으면 일을 하지 않았고, 감독관들은 와인 수급에 최선을 다해야 했다. 1년 예산의 2퍼센트가 무기공장 노동자들에게 지급하는 와인대금으로 쓰였다. 1550년대 노동자 한사람이 마시는 와인은 2.5리터였지만, 1615년에는 3.2리터로, 1630년대에는 5리터로 증가했다. 1696년에는 인건비의 10%가 와인대금이었다.

물론 이들 와인은 물을 섞은 것이었다. 와인과 물의 비율이 2 대 1이었다. 이러한 와인의 알콜 도수는 4도 정도에 불과했다. 베네치아 공화국을 위해 일하는 모든 노동자들이 와인을 지급받았지만, 가장 큰 특혜는 무기공장 노동자들의 몫이었다. 날마다 와인을 마시는 것은 물론이고, 선박 한척이 진수될 때마다 팀원들은 희석되지 않은 와인 4리터를 받았다. 감독관들은 임금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와인을 보너스로 받았는데, 이들에게 지급된 양은 연간 450~1800리터였다.

18세기에 영국 해군은 군인과 조선소 노동자들에게 럼-펀치의 형태로-을 지급했다. 이것은 프랑스 첩자들에게 종종 이용되었는데, 그들은 펀치가 나오는 시간을 노렸다.

1679년에 드디어 영국은 프랑스 와인의 수입을 허가했지만, 1703년 전쟁으로 다시 영국 시장은 문을 닫았다. 프랑스의 와인 생산업자들은 교묘한 방법으로 와인을 수출했는데, 영국의 사략선에 ‘일부러’ 나포된 것이다. 물론 와인 판매로 인해 생긴 수익금은 사략선과 와인업자가 나눠가졌다.

1789년에 시작되어 1815년 나폴레옹이 패배할 때까지 지속된 프랑스의 혁명전쟁은 와인의 혁명전쟁이었다. 1793년에 프랑스 군인은 80만 명에서 100만명에 달했다. 이들에게 와인을 지급하는 것은 새로운 프랑스 정부의 일이었다. 유럽대륙을 집어삼킨 나폴레옹은 대륙 봉쇄령을 내렸다. 곧바로 영국과 유럽대륙 사이에 와인 무역은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소비자인 영국보다는 공급자인 대륙의 타격이 컸다.

포르투갈 와인은 영국시장에서 제일 잘나가는 상품이었다. 나폴레옹은 그의 칙령을 무시한 이들에게 철퇴를 가했다.  나폴레옹은 1807년, 도루 강 인근의 포르투갈 와인 생산지에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포도밭은 군대에게 접근이 어려웠고, 포르투갈 군은 도지대의 포도밭에서 프랑스군에게 포격을 가했다.

20세기에 들어서야 와인이 알코올이라는 것이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은 와인에게 있어서도 세계대전이었다. 에국심이 투철한 랑그 도크의 양조업자들은 군 병원에 2천만리터의 와인을 기증했다. 그러나 알코올의 효과를 두고 논란이 일어났고, 유럽의 군대는 와인으로 실험을 했다. 실험결과 와인이 사격에 미친 영향은 미비했는데, 이것은 섭취한 와인의 양이 적었기 때문이다. 프랑스군당국은 심지어 와인과 맥주를 마신 병사를 비교하여, 와인이 전투에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1914년 병사들에게 와인은 0.25리터 배급되었지만, 1916년에는 0.5리터로 늘어났다. 1918년에는 장교의 재량에 따라 0.25리터 추가 지급이 이루어졌다. 여기에 0.25리터의 와인을 할인된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는 프랑스의 병사들은 하루에 1리터까지 합법적으로 마실 수 있었다. 최전방에 배치된 프랑스 군이 1917년 한해 동안 소비한 와인은 120억 리터였다.

프랑스 군에 지급되는 와인은 남성적이라 알려진 레드와인 뿐이었다. 값싼 와인을 가르키는 영어 속어 plonk는 오스트레일리아 군이 만들었는데, 이것은 화이트 와인을 가르키는 뱅 븡랑이 와전된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 군은 화이트 와인을 마셨다.

나치는 술에 취한 것을 부도덕한 것으로 간주했지만, 와인의 생산을 전면금지하지는 않았다. 프랑스에 주둔한 독일군은 오브리옹 지방의 와인을 몰수하고 독일 화폐로 대금을 지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