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에야 세칭 일류대학을 나왔다고 한들 취업에나 조금 도움이 될까, 앞으로 물려받을 재산의 크기로 수저의 색깔이 정해지고 그것이 사회적 서열로 이어지는 시대이지만 80년대 말 혁진이 연세대학교를 졸업할 때만해도 자본의 축적이 고도화되기 이전이어서 한 개인에게 명문대 졸업장이 갖는 의미는 상당했던 것이다.


그런 그가 어떠한 연유에서 정보기관에 자신의 적을 두기로 결정했는지 지금으로선 알기 어렵다. 다만 지난 이십 년 간 그가 첩보원으로 쌓아온 결과물은 상당한 것이여서, 결국 이번 정기인사 때 반공 제3차장에 취임하게 된 것이다.


정권이 바뀌어 남북간의 기류에도 훈풍이 불면서 전임 차장들이 인사에서 물을 먹는 등 반공부서의 입김이 예전같지 않다고는 하나 여전히 국정원 내의 최중요 요직으로 꼽히는 반공 제3차장 자리를 그가 차지했다는 것은 혁진이 철저한 이너 써클 내의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박 차장님. 최근 한 커뮤니티에서 공산주의를 언급하는 비율이 급증했습니다."


이 년차 강 수사관의 주례 보고였다.


"어디?"


"희오스 인벤입니다."


"거긴 신경 쓸 필요 없네."


"네?"


강 수사관이 되물었다. 내심 자신이 공이라도 세운 줄 알았을테지.






"이전에도 몇 번 보고를 받았는데, 조사해보니 희오스라는 게임 내의 형편없는 레벨링 시스템을 공산주의에 빗대서 표현 할 뿐 특별한 대공 용의점은 없었네. 거기다 구성원들은 하나같이 사회적으로 낙오된 자들뿐이어서 어떠한 행동력도 없더군."


"그렇습니까..."


"쉽게말해 찌질이들이라는 거야. 그보다 자네 취미가 리그오브레전드였나?"


"네. 차장님께서도 리그오브레전드를 즐긴다고 들었습니다만."


"뭐 그야, 워낙 대세니까."


"괜찮으시다면 언제 한 번 같이 하시죠."


강 수사관이 머쓱하게 보고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 날 밤, 흑석동의 한 피시방


사실 강 수사관의 은밀한 취미는 바로 희오스였던 것이다. 


"뭐야..... 요즘도 피시방에서 희오스를 하는 사람이 있네.."


뜻밖에도 구석진 자리에서 희오스를 하고 있던 사내는 바로 반공 제3차장 박 혁진이었던 것이다.






"차장님... 설마 박 차장님이십니까?"


"자네... 강 수사관?"


"취미가 리그오브레전드인걸로 알고 있었습니다만.."


강 수사관이 말끝을 흐렸다.






"그러는 자네는, 보나마나 리그오브레전드나 하러 왔겠지?"


"사실... 저도 희오스 하러 왔습니다."


"자네도 취미가 리그오브레전드라고 하지 않았나?"








"그게.... 차장님께서는 인싸인 것 같아서.."


강 수사관이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뭐야?"



"인싸들은 희오스 같은 건 안하잖습니까....... 전 그저 차장님께 잘 보이고 싶어서.... 그래서 그랬던겁니다."








두 사람은 흑석동의 한 모텔에서 뜨거운 반공의 열정을 불태운다.


"며....멸공의... 횃불 아래.... 목숨을..... 건다......... 하앜........"


"저... 저는... 공산당이 싫어요........ 흐읏..."


게임은 공산주의 게임 희오스를 할 지언정, 두 첩보원의 반공 정신만은 진심이었음을 온 몸으로 확인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