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엘은 눈을 떴다.

 

 

리치의 그릇된 욕망에 휘말려 괴물이 되어버린 마법사. 그것이 설산의 마녀의 정체였다.

 

 

마녀는 그저 가만히 메리엘을 바라보았다. 사실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설산의 마녀는 눈이 없으니까. 그래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

 

 

타일러스가 말했다.

 

 

끝났나? 이 녀석이 최초의 제물 맞던가?”

 

최초의 제물은 맞지만, 영혼은 없어요.”

 

 

엘미나의 영혼은 이미 악마가 가져가 버렸다. 설산의 마녀는 엘미나의 잔재일 뿐이다. 악마와 거래할 수도 없고, 설령 거래하더라도 영혼이 아직 남아 있을 가능성은 낮다.

 

 

그런가. 어쩔 수 없군.”

 

 

메리엘은 조심스럽게 설산의 마녀에게 다가갔다.

 

 

설산의 마녀에게 적의는 없는 듯했다. 메리엘은 그녀를 묶고 있는 쇠사슬에 손을 대 보았다.

 

 

마치 한 몸인 것처럼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어, 푸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

 

 

메리엘은 설산의 마녀를 올려다보았다. 혹시 대화가 가능하진 않을까.

 

 

당신이 겪은 아픔. 무슨 말을 해도 위로가 되지는 않겠지만... 이것 하나는 약속할게요.”

 

 

메리엘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반드시 원수를 갚아 드릴게요. 그러니까...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설산의 마녀는 조용히 메리엘을 바라보았다.

 

 

설산의 마녀가 날뛰던 모습을 기억하는 메리엘은 쇠사슬이 날아오지는 않을지 조마조마하며 그녀를 마주 보았다.

 

 

문득, 설산의 마녀가 눈물을 흘렸다.

 

 

수백 년의 억울함이 뺨을 타고 흘렀다. 이윽고, 눈물 한 방울이 맺혀 떨어졌다.

 

 

설산의 마녀는 메리엘을 바라보았다. 그것을 가져가라는 듯한 눈치였다.

 

 

무심코 눈물에 손을 댄 메리엘은 그것의 차가움에 놀라 급히 손을 떼었다. 메리엘은 그것을 천으로 감싸 조심스럽게 주워들었다.

 

 

얼음으로 이루어졌고, 보석처럼 빛나는 눈물. 이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틀림없이 보통 물건은 아니었다.

 

 

고마워요. 약속은 꼭 지킬게요.”

 

 

얼음 결정이 휘날렸다. 눈을 감았다 뜨자, 설산의 마녀는 사라진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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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오... 이건....”

 

 

샤모스는 흥미로워하며 얼음 눈물을 살펴보았다.

 

 

깊은 원한이 응축되어 있군. 이거라면 영혼 없이도 가능하겠어.”

 

정말 괜찮을까요?”

 

이게 제물이 만들어낸 게 맞다면 어차피 비슷한 작용을 하게 될 테니 상관없네. 흐흐...”

 

 

샤모스는 얼음 눈물을 메리엘에게 돌려주었다.

 

 

이걸 놈의 심장에 박아 넣게. 그럼, 놈은 불멸성을 잃게 될 거야...”

 

자네 말이 사실이었군. 좋아, 마침 이쪽도 준비를 끝낸 참이네. 급조된 주문이지만 효과는 확실할 거야.”

 

 

타일러스가 말했다.

 

 

로베이라가 리치를 무력화하면, 내가 끝장을 내겠네. 그 얼음 눈물도 내가 가지고 있는 게 낫겠군.”

 

. 차가우니 조심하세요.”

 

 

메리엘은 얼음 눈물을 타일러스에게 넘겼다.

 

아마 나설 일은 없겠지만, 만약을 대비해서 메리엘 자네는 후방에서 지원을 맡게.”

 

더 준비할 게 없다면 바로 이동하지.”

 

 

일행은 샤모스를 다시 독방에 가두고는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위층에서 자신들을 기다리던 하셀을 마주쳤다.

 

 

하셀이 말했다.

 

 

저도 데리고 가 주세요.”

 

하셀? 장례는 다 끝났어?”

 

.”

 

데리고 가 달라니, 어딜 말이야?”

 

하셀은 장로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리치가 형을 죽게 만든 원수라는 것도, 장로님들께서 놈을 처치하러 가실 거라는 것도 들었어요.”

 

알케스터 님께서 말씀해 주셨나 보군.”

 

 

하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요. 저도 함께 가게 해 주세요.”

 

 

하셀이 원하는 건 분명했다. 복수. 그걸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보였다.

 

 

로베이라는 고개를 저었다.

 

 

마음은 이해하네만, 자네는 약하네. 괜히 나서지 말고 우리에게 맡기게.”

 

그래, 하셀. 엘론 씨도 네가 안전하게 오래 살길 바랐잖아. 위험한 짓은 하지 마.”

 

제가 마음 편히 살아가려면, 놈이 죽는 걸 제 눈으로 봐야만 해요. 발목 잡을 짓은 안 할게요.”

 

 

타일러스는 하셀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고는 말했다.

 

 

그래. 자네 또한 한 명의 자유로운 모험가. 누구도 자네의 앞길을 막을 권리는 없지.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는 각오만 있다면 따라와도 좋네.”

 

타일러스 님. 그건...”

 

알잖나. 로베이라. 모험가란 그런 존재란 걸. 그리고, 몰래 쫓아오기라도 한다면 막을 방도가 없네. 처음부터 동행하는 게 나을 것 같군.”

 

 

로베이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좋네. 대신 메리엘의 옆에 붙어 있게. 돌발행동은 용납하지 않겠네.”

 

감사합니다.”

 

이만 가지.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어.”

 

 

로베이라는 관저 앞마당에 서서 말했다.

 

 

여기 모여서 서게.”

 

 

네 사람은 로베이라 근처에 옹기종기 모였다.

 

 

일단 서긴 했는데...”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게.”

 

?”

 

 

로베이라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럼, 그 먼 길을 느긋하게 뛰어서 갈 생각이었나? 폐광 입구가 보였다고 했으니, 리치가 어디 있는지는 대충 알겠군. 그 근처로 이동할 테니, 정신 바짝 차리게. 곧바로 전투가 시작될지도 모르네.”

 

 

로베이라는 마법으로 일행의 발 아래에 빛나는 포탈을 열었다. 다음 순간, 네 사람은 죽은 나무가 가득한 숲에서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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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보석 속에서 수많은 생명력이 꿈틀거렸다.

 

 

저마다의 삶을 영위했을, 수많은 가능성을 지녔을 생명.

 

 

리치는 그들을 억누르고 짓이겼다. 곡식을 가루 내어 반죽하듯, 더 활용하기 편하도록.

 

 

그 행동에 아무런 거리낌도 없었다.

 

 

이 영혼들도 생전에 수많은 생명을 먹었을 것이다. 이제 이들이 먹힐 차례가 왔을 뿐이다.

 

 

포식자는 피식자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는다. 강자는 먹고, 약자는 먹힌다. 타인의 생명력을 빼앗는 것에 거리낄 이유 따윈 없다. 하찮은 벌레마저도 알고 있는 진리다.

 

 

문득 오랜 원한이 되살아났다.

 

 

그 진리를 정한 것이 신이거늘. 어째서 신은 내게 벌을 내렸단 말인가?

 

 

역겨운 이중잣대, 위선이다.

 

 

사람을 먹는 게 죄라면, 수많은 몬스터에게도 천벌을 내렸어야 한다. 그렇다면 동족을 먹는 게 죄일까? 짐승은 약하게 태어난 새끼를 잡아먹는다. 짐승에게 천벌이 내려졌단 말은 들어본 적 없다.

 

 

자신이 신의 뜻을 따르던 프리스트였기 때문에?

 

 

리치는 과거의 자신을 증오했다. 신 따위의 헛소리를 주워 담지만 않았다면 이 꼴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모든 것을 바로잡아야만 한다.

 

 

이번 엘나스 침공은 시작에 불과하다. 더는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리치는 생명력을 갈무리하는 데 집중했다. 그때, 기이한 변화가 일어났다.

 

 

한 생명력이 거칠게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미련한 발악을...!”

 

 

리치는 어렵지 않게 그것을 제압했다. 그러나 이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하나둘씩 광분하는 생명력이 늘어나더니, 이윽고 모든 생명력이 날뛰었다. 혼란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단순한 발악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리치를 없애기 위해 공격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리치는 온 힘을 기울여 가까스로 혼란을 통제했다. 조금이라도 실수했다간 이것들이 온몸을 헤집을 상황이었다. 기껏 모은 생명력을 그대로 잃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또다시 의식을 잃고 긴 잠에 빠지게 될지도 몰랐다.

 

 

리치는 당황했다.

 

 

이미 죽어 기억과 자아는 희미한 흔적밖에 남지 않은 것들이, 어떻게 이런 일을 벌일 수 있단 말인가?

 

 

타격이 있는 거 같긴 한데, 생각보다 잘 버티는군. 곧바로 쓰러질 거라고 하지 않았나? 샤모스가 거짓말을 한 건가?”

 

그럴 수도 있습니다만, 놈이 알지 못하는 변수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리치는 내면에서 벗어나 눈앞의 존재들을 바라보았다.

 

 

장로와 모험가들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놈들이 어떻게 여기에...”

 

 

분명 수하들이 경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을 뚫고 여기까지 온 거지?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의문이 있었다.

 

 

무슨 짓을 한 거냐.”

 

힘들어 보이는군. 리치.”

 

 

양손에 거대한 마법진을 펼친 로베이라가 말했다.

 

 

네놈을 없앨 방법을 찾아왔다. 마음에 드나?”

 

말도 안 되는...”

 

 

이 마법의 취약점을 꿰뚫어 본 것도 모자라 이렇게 빠르게 그 약점을 파고들 마법을 준비해 왔단 말인가?

 

 

천재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그런 건 불가능하다. 어떻게...

 

 

그러고 보니, 방금 얼핏 들었던 그 이름. 설마...!

 

 

샤모스가 알려준 건가. 놈이 아직 살아 있었나...!”

 

그래. 네놈은 이제 끝이다.”

 

 

타일러스가 검을 들고 리치에게 다가갔다.

 

 

큭큭큭...”

 

뭐가 그리 우습지?”

 

 

리치는 미소를 띤 채 말했다.

 

 

샤모스와 협력한 것은 놀랍다만, 나도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 샤모스의 마법은 본래 생명력을 술자의 몸 안에 가둔다. 그랬다면 나도 지금쯤 의식을 잃었겠지.”

 

 

리치는 스태프의 붉은 보석을 보이며 말을 이었다.

 

 

나 역시 그 취약점을 알았다. 그래서 이런 매개체를 통해 생명력을 외부에 담는 방법을 개발했지. 그래서 네놈들이 생명력을 날뛰게 만들어도 그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붉은 보석이 빛났다.

 

 

허튼짓을!”

 

 

타일러스는 마나를 불러 모아 검을 내리치려 했다. 그러나 실패하고 말았다. 타일러스의 마나는 완전히 잠들었다.

 

 

타일러스는 당황했다.

 

 

이게 무슨...?”

 

 

다시 시도해 봐도 마나가 모이지 않았다. 스킬을 사용할 수 없었다.

 

 

리치가 외쳤다.

 

 

침입자다! 놈들을 처리해라!”

 

 

리치의 부름에 좀비들이 몰려왔다. 성기사 좀비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타일러스는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타일러스는 얼음 눈물을 메리엘에게 던졌다.

 

 

타일러스 님?”

 

메리엘, 하셀. 잘 듣게. 로베이라는 생명력을 날뛰게 만드느라 다른 일을 할 수 없네. 리치의 수하들은 내가 맡을 테니, 자네들이 리치를 처치해야 하네. 놈은 약해졌으니 가능할 걸세.”

 

 

리치가 직접 타일러스를 없애려 하지 않는 것이 근거다. 스킬을 쓸 수 없게 된 지금, 타일러스는 현저히 약해졌다. 리치는 그런 상태의 타일러스도 쉽게 처리할 수 없는 상태이다.

 

 

자네들은 할 수 있네!”

 

 

타일러스는 그리 말하고는 좀비 군단을 향해 홀로 달려갔다. 로베이라가 말했다.

 

 

미안하군. 허나 타일러스 님의 말이 맞네. 리치는 분명 매우 약해졌어. 지금이라면 분명 공격이 통할 거야.”

 

 

하셀은 입가를 일그러뜨리며 미소 비슷한 것을 지었다.

 

 

저는 더 좋아요. 제 손으로 원수를 갚을 기회니까요.”

 

 

메리엘은 결심을 굳혔다.

 

 

리치의 과거를 봤어요. 저도, 리치를 절대 용서할 수 없어요.”

 

 

두 사람은 각자의 무기를 쥐고 리치의 앞에 섰다. 리치는 경고했다.

 

 

방해하지 마라. 장로들이 날 끝내지 못한 시점에서 네놈들의 패배다. 멀리 도망치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거다.”

 

 

도망치는 이는 없었다. 리치는 성서를 펼치고 스태프를 치켜들었다.

 

 

어리석은 놈들. 좋다. 그리도 원한다면 죽여 주마.”

 

 

리치가 스태프를 땅에 내려찍었고, 전투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