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검의 형태로 빚어진 리치의 마법과 타일러스의 검이 충돌했다. 강력한 여파에 주변의 눈이 폭발하듯 비산했다. 맞닿은 두 검은 불꽃을 일으키며 격렬하게 진동했다.

 

 

제법이군.”

 

 

리치는 흥미로운 듯 말했다. 반면, 타일러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리치는 강력했다. 일대일로 붙는다 해도 승리를 장담하기 힘들 정도로. 그런 와중에 리치는 수많은 부하가 있었고, 타일러스는 사실상 혼자였다.

 

 

퍼억!

 

 

크윽!”

 

 

타일러스가 리치에 묶여 있는 동안, 그 수하들의 공격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리치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힘이지만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메리엘과 엘론에게 공격이 가지 못하도록 하느라 리치에게 집중할 수도 없었다. 이대로 간다면 결말은 뻔하다.

 

 

상황을 역전시키려면 전세를 뒤집을 일격이 필요했다. 타일러스는 힘을 그러모아 리치의 마법검을 쳐냈다.

 

 

잠깐이나마 리치의 견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 대가로 타일러스는 완전히 무방비해졌다. 리치의 수하들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타일러스의 급소를 노렸다.

 

 

타일러스의 계획대로였다. 일부러 빈틈을 노출한 다음, 리치와 그 수하가 그 빈틈을 공격하는 틈을 타 일망타진할 생각이었다.

 

 

뭄론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겠지만, 변수를 만들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타일러스는 정신을 집중하고, 검을 뒤로 끌어당겼다. 이윽고 검에서 성스러운 기운이 넘실거렸다.

 

 

꿍꿍이가 있나 보구나. 어디 한 번 해보거라.”

 

 

리치는 가소롭다는 듯 말했다. 그러자 세 개의 마법검이 한 번에 나타나 타일러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동시에 사방에서 리치의 수하들이 타일러스를 덮쳤다.

 

 

와라!”

 

 

타일러스는 필사의 의지를 담아 검을 올려 베었고, 그 궤적을 따라 검에 깃든 신성력이 반달 형태의 검기가 되어 쏘아졌다.

 

 

신성력은 거대한 망치를 들고 달려들던 수하를 무기째로 찢어발기고는 리치를 향해 똑바로 날아갔다.

 

 

촤악!

 

 

크윽!”

 

 

타일러스의 검기가 리치에게 적중함과 동시에, 리치의 마법이 타일러스를 꿰뚫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틀어 목숨은 지킬 수 있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이걸로 리치를 처치하지 못했다면 다음은 없다.

 

 

나는 여기까지인가. 저놈은 어떻게 됐지?’

 

 

타일러스는 긴장하며 리치를 바라보았다.

 

 

이게 전부인가?”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리치는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모습이었다. 타일러스는 실소했다.

 

 

언데드라고 해서 불멸하지는 않는다. 충분히 강한 물리력으로도 없앨 수 있고, 신성력은 특히 언데드에게 치명적이다.

 

 

방금 그 검기는 그릇된 존재를 멸하기 위한 팔라딘의 비전이었다. 신성력으로도 흠집조차 낼 수 없다면, 눈앞의 언데드는 정말로 신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타일러스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젠장, 도대체 뭐 하는 놈이야?”

 

네가 알 필요는 없다. 나름 재미있었다. 이제 그만 죽어라.”

 

 

수많은 검이 날아들었다. 타일러스는 대검을 방패처럼 들고는 리치를 노려보았다.

 

 

하다못해 공격이 통하지 않는 이유라도 알아낼 수 있다면...!’

 

 

검이 타일러스에게 쇄도했다. 대검은 방패의 역할을 훌륭히 해냈지만, 사방에서 날아드는 검을 모두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타일러스의 머리를 검이 꿰뚫기 직전, 주변이 진홍색으로 물들며 화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곧 어디선가 나타난 거센 불길이 해일처럼 리치와 그 수하들을 휩쓸었다.

 

 

불길이 좀비들을 뒤덮으며 리치의 공격은 자연스럽게 멈추었다. 타일러스는 검을 내렸다. 메리엘은 눈이 멀 것 같은 거대한 화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타일러스 님? 이건 무슨...”

 

... 타이밍 한 번 좋군. 걱정하지 말게. 아군이네.”

 

 

타일러스는 포션을 하나 꺼내어 마시며 한숨 돌렸다. 엘나스에서 이런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다.

 

 

그 꼬장꼬장한 녀석이 이렇게 반갑긴 오랜만이군.’

 

 

타일러스의 예상대로, 뒤이어 차갑고 엄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자리를 비웠더니 해충이 끓는군요.”

 

로베이라, 마침 잘 왔네. 다른 녀석들은?”

 

저밖에 없습니다. 필요한 자료를 가지러 잠깐 돌아온 것뿐이라. 그새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나도 잘 모르겠네만, 저기 로브를 입은 놈이 원흉 같네. 조사해 보세.”

 

알겠습니다.”

 

 

타일러스와 로베이라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한 소년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왔다.

 

 

!”

 

하셀? 왜 여기에?”

 

 

하셀의 목소리였다. 갑자기 나타난 하셀을 보며 메리엘은 당황했다.

 

 

메리엘은 다급히 소리쳤다.

 

 

오지 마! 하셀, 여기로 오면 안 돼!”

 

 

그러나 엘론의 상태를 봐버린 하셀에게 메리엘의 경고는 들리지 않았다. 하셀은 메리엘을 지나쳐 엘론에게 다가갔다.

 

 

엘론의 상태는 시체나 다름없었다. 창백하고, 피투성이가 된 데다, 두 눈이 있어야 할 자리는 좀비처럼 뻥 뚫려 있었다. 엘론을 내려다보는 하셀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했다.

 

 

형은... 설마... 죽은 건가요?”

 

엘론 씨는...”

 

 

메리엘은 말을 얼버무렸다.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엘론의 상태도 정확히 알 수 없었고, 살려낼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 사실을 그대로 전해야 할까?

 

무슨 말을 하려고 해도 혀 끝에 걸리는 느낌이었다. 짧은 시간 동안 메리엘은 수없이 갈등했다.

 

 

그때, 쓰러져 있던 엘론을 흘깃 살펴본 로베이라가 말했다.

 

 

언데드? 언데드가 왜 여기에도 있는 겁니까?”

 

 

하셀의 표정이 뻣뻣하게 굳었다.

 

 

잠깐만요, 그게 무슨 말씀...!”

 

자네도 알고 있을 텐데? 흑마법으로 억지로 숨을 붙여 놓았을 뿐이다. 섭리를 어기는 것임은 두말할 것도 없고, 본인에게도 큰 고통일 테지. 차라리 지금이라도 편하게 만들어 주는 게 나을 것 같군.”

 

 

로베이라의 손에서 불길이 일었다. 메리엘은 정색하며 로베이라의 앞을 막아섰다. 로베이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엘론에게 다가갔다.

 

 

타일러스가 제지했다.

 

 

로베이라, 잠깐. 그 녀석에게서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네. 저 흑마법사와 관련이 있는 것 같거든.”

 

 

로베이라는 잠깐 고민하고는, 한숨을 쉬며 물러났다.

 

 

알겠습니다.”

 

잘 생각했네.”

 

자네들은 여기 가만히 있게.”

 

 

로베이라는 메리엘을 지나쳐 타일러스의 옆에 섰다.

 

 

하셀이 충격을 받은 얼굴로 물었다.

 

 

메리엘 씨, 이게 다 무슨 말이죠? 언데드라뇨?”

 

“...저 흑마법사가 엘론 씨에게 언데드가 되는 저주를 걸었어.”

 

저주요? 고칠 수는 없는 건가요?”

 

그게 좀 복잡한데...”

 

 

숨기기는 힘들겠다고 판단한 메리엘은 사실대로 설명하려 했으나, 느긋하게 이야기하기엔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곧 불길이 사그라들며 리치의 모습이 드러났다. 하셀과 메리엘의 시선도 리치를 향했다.

 

 

리치는 그을린 자국 하나 없이 멀쩡했다. 다른 좀비들도 마찬가지였다. 리치가 펼친 광범위한 방어막 때문에 로베이라의 불은 좀비들에게 닿지 못했다.

 

 

리치가 조롱하듯 말했다.

 

 

대단하군. 자네도 장로...”

 

 

파지지직!

 

 

리치의 머리에 번개로 이루어진 창이 꽂혔다. 번개 창은 폭발적으로 에너지를 분출하며 리치를 태웠다. 잠시 후 창은 사라졌고, 리치는 피어오르는 연기 가운데서 조용히 말했다.

 

 

성격이 급하군.”

 

 

로베이라의 손에서 번개가 지직거리며 불꽃을 튀겼다. 로베이라는 혀를 차고는 말했다.

 

 

시끄럽다. 이야기는 네놈을 제압한 다음에 하지.”

 

얌전히 항복하는 게 좋을 거다. 로베이라는 가차 없거든. 아니면 덤벼보겠나?”

 

그것도 즐겁겠다만, 오늘은 이쯤 하지.”

 

 

리치는 스태프를 들어 올렸다. 붉은 보석이 스스로 날아올라 스태프의 고리 가운데에 자리 잡았다. 리치가 가볍게 스태프를 휘두르자 보석이 핏빛으로 빛나며 거대한 포탈이 열렸다.

 

 

원하는 건 이미 얻었다. 의미 없는 싸움을 할 필요는 없지.”

 

도망치는 건가?”

 

피차 좋지 않나? 정비할 시간이 필요할 텐데.”

 

아니, 여기서 반드시 네놈을 죽여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큭큭큭... 무리하지 마라. 어차피 네놈들은 나를 죽일 수 없다.”

 

 

거대한 포탈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포탈이 지나친 좀비들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누가 보내준다고 했나?”

 

 

로베이라는 타오르는 악마의 형상을 띤 불덩이를 날렸다. 리치는 굳이 막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불덩이는 리치를 난폭하게 집어삼켰다. 아지랑이가 이글거리는 것이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뜨거운 열기였다.

 

 

불타는 모습 그대로, 리치는 태연히 말했다.

 

 

말하지 않았나. 네놈들은 나를 죽일 수 없다고.”

 

 

로베이라는 어울리지 않게 당황했다.

 

 

저게... 무슨?”

 

제길, 마법도 통하지 않는군. 저놈, 아무래도 공격이 통하지 않는 것 같네.”

 

그게 가능하단 말입니까?”

 

 

모든 좀비가 사라지고, 홀로 남은 리치가 말했다.

 

 

걱정 마라. 곧 다시 보게 될 테니. 그 전에 선물을 하나 주지. 좋은 시간 되길 바라마.”

 

 

리치는 손가락을 한 번 튕겼다. 포탈이 리치를 삼키며 리치까지 사라졌고, 고요한 적막이 흘렀다.

 

 

로베이라가 침음을 내며 말했다.

 

비상사태로군요. 시급히 대책을 마련해야겠습니다.”

 

좋은 생각이라도 있나?”

 

제게는 없지만, 다른 이는 가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혹시 그 녀석 말인가?”

 

 

로베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타일러스는 미심쩍어하며 말했다.

 

 

설령 그 녀석에게 방법이 있더라도, 순순히 알려주겠나?”

억지로라도 말하게 만들어야지요. 그런데 마지막에 놈이 말한 선물이란 무엇일까요?”

 

 

그때, 쓰러져 있던 엘론이 괴로운 듯 신음했다.

 

 

으으...”

 

?”

 

 

하셀은 엘론의 곁으로 달려갔다. 로베이라는 엘론의 모습을 보고 무언가를 눈치채고는 탄식했다.

 

 

이런, 설마 선물이란 게 이걸 말한 건가...?”

 

 

하셀이 걱정하며 물었다.

 

 

, 괜찮아?”

 

하셀? 하셀이냐...?”

 

엘론이 말할 때마다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엘론의 상태를 살펴본 로베이라가 말했다.

 

 

자네, 그의 가족인가? 유감이다. 언데드화 저주가 해제되어 시간이 많지 않으니, 나눌 이야기가 있으면 지금 하게.”

 

? 무슨 말씀이세요? 저주가 해제되면 좋은 거 아닌가요? 시간이 없다니, 대체 무슨...”

 

 

로베이라는 단호하게 말했다.

 

 

설명은 나중에. 네 형은 곧 죽을 거다. 안타깝지만, 마음 단단히 먹어라. 이대로 마지막 기회를 놓칠 셈인가?”

 

 

하셀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로베이라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엘론이 웅얼거리자, 하셀은 급히 귀를 기울였다.

 

 

춥다... 왜 앞이 안보이지?”

 

?”

 

여기까지구나. 존나 열심히 살았는데... 씨발...”

 

 

엘론의 눈구멍에서 피와 고름이 섞인 액체가 흘렀다.

 

 

여기까지라니, 헛소리하지 마. 다들 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느껴져... 더 이상 내 생명이 남지 않았다는 게. 참 더러운 기분이구만... 하셀,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엘론은 힘겹게 말을 이었다.

 

 

넌 절대... 위험한 짓 하지 마라. 그냥, 안전하게... 오래 오래 살아라. 내 말 알겠지? 넌 쓸데없이 오지랖이 넓으니까... 걱정이 된다. 똑똑하고 재능도 있는 놈이... 네 인생이나 좀 잘 챙겨라... 부탁이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좀 일어나봐...”

 

 

엘론은 메리엘을 향해 말했다.

 

 

마법사. 아까 그놈에 대해서 물어봤었지. 미안하지만 나도 아는 건 없어. 다만... 놈들의 본거지가 어딘지는 알아. 리치가 처음 일어났던... 거대한 비석이 세워진 무덤. 그 일대에 놈들이 있었어.”

 

비석... 말인가요?”

 

그래.”

 

 

로베이라가 말했다.

 

 

미안하지만 조금만 더 자세히 알려주게.”

 

그곳에는... 인공적인 구조물이 있었어. 동굴 같은 곳으로 통하는 출입구... 같아 보였어.”

 

그걸로 충분하네. 고맙네.”

 

 

엘론의 숨이 가빠졌다. 엘론은 마지막 힘을 짜내어 한마디를 남겼다.

 

 

하셀, 미안... 하다. 혼자 두고 가서.”

 

 

엘론의 숨소리가 점차 사그라들었다. 하셀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흐느꼈다.

 

 

장난치는 거지?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잖아. 도대체 왜?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야? ?”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정말로 이렇게 죽는 건가? 이렇게 갑자기? 이렇게 허무하게? 어릴 때부터 부모를 대신해 가장 역할을 해준 것에 아무런 보답도 못 했는데?

 

 

메리엘 씨, 로베이라 님. 제발, 제발 부탁이에요. 뭐든지 할 테니까, 어떻게든 좀 해주세요...”

 

미안... 미안. 하셀. 미안해...”

 

안 돼. 이럴 순 없어. 제발요...”

 

 

엘론의 숨이 멎었다. 하셀은 비명 같은 울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