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 주세요.”

 

 

메리엘은 힘겹게 말하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메리엘을 에워싼 좀비 중 하나가 메리엘을 걷어찼다. 메리엘은 어떤 저항도 하지 못하고 나무토막처럼 쓰러졌다. 좀비들은 그런 메리엘을 비웃으며 낄낄댔다.

 

 

그런 모욕에도, 메리엘의 시선은 오직 한 곳을 향했다.

 

 

아아아악!”

 

으으... 으아아... 아아아...”

 

 

작은 구슬처럼 생긴 핏빛 보석. 좀비들은 납치해 온 마을 주민들을 차례차례 그 보석에게 먹였다. 보석은 거미가 사냥감의 체액을 빨아먹듯, 사람들의 피를 한 방울도 남김없이 짜내어 마셨다.

 

 

좀비가 주민들의 사지와 몸을 찢었다. 혈관이 끊어지고, 피가 쏟아졌다, 비명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피가 흐를수록 보석은 힘을 더해갔다. 탁하고 붉은 기운이 세차게 박동하며 강력한 마력을 뿜어내었다.

 

 

생명을 빼앗긴 마을 주민들의 시체는 쓰레기처럼 아무렇게나 던져졌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엘론은 뿌듯하다는 듯이 말했다.

 

 

좋아. 순조롭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되겠어.”

 

제발, 그만... 차라리 저를...”

 

너를 대신 바쳐달라고? 그건 안돼. 넌 최대한 멀쩡하게 놔두고 싶단 말이야. 그러니까 가만히 있어.”

 

엘론은 몸을 낮춰 메리엘을 바라보며 말했다.

 

 

곧 그분이 오실 거야. 얼마나 기쁘시겠어? 오랜 세월 잠들어 계시다가, 아주 오랜만에 깨어나시는 거니까. 그런 때 특별한 선물 하나 정도는 있어야겠지. 신성 마법사 정도면 그분께 괜찮은 선물이 될 거야.”

 

 

엘론은 그분을 위해 봉사할 수 있어 다행이라는 투로 말했다. 메리엘은 엘론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엘론의 입에서는 영광에 대한 말이 쏟아졌지만, 그 눈은 비어 있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텅 빈 공허.

 

 

메리엘은 엘론이 당한 것이 단순한 저주가 아님을 깨달았다. 이것은 일종의 세뇌였다. 그리고 한 명의 마법사로서, 메리엘은 한 사람을 이렇게 완전히 세뇌하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지 궁금했다.

 

 

만약 정말로 엘론을 세뇌한 것이 마법사의 짓이라면, 그는 분명 일반적인 수준을 벗어난 아득한 경지에 있음이 틀림없었다.

 

 

예상보다도 훨씬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런 자가 마을에 나타난다면, 분명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막아야... 하는데...’

 

 

하지만, 메리엘은 더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남지 않았다. 이대로 사람들이 죽는 걸 지켜보고, 흑마법사의 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메리엘은 더없는 절망을 느꼈다.

 

 

그때, 불쾌한 냄새가 훅 끼쳐왔다. 한 좀비가 메리엘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낄낄거리며 비웃던 표정 그대로였다. 처음에는 자신을 놀리기 위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잠시 후 메리엘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좀비의 목 밑으로는 아무것도 없었다.

 

 

좀비는 몸을 잃은 채 머리만 낡은 공처럼 덩그러니 굴러다니고 있었다. 엉뚱한 상상이 떠올랐다. 고개를 흔들며 웃다가, 썩은 목이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떨어져 버린 걸까?

 

 

뭐지?’

 

 

메리엘은 의아해하며 그 머리를 쳐다보았다.

 

 

뒤이어, 툭 툭 하는 소리가 몇 번 더 들렸다. 메리엘은 고개를 들었다.

 

 

커억...”

 

재능 있는 사냥꾼인 줄 알았더니, 내가 잘못 봤군. 엘론.”

 

 

메리엘은 환호성을 질렀다.

 

 

타일러스 님!”

 

 

홀연히 나타난 타일러스는 눈 깜짝할 사이에 주변의 좀비들을 전부 죽이고 엘론까지 제압했다. 타일러스는 시선을 엘론에게 고정한 채 말했다.

 

 

늦어서 미안하네. 메리엘. 힘들겠지만 상황이 급하니 우선 질문 좀 하겠네. 전부 이 녀석이 한 짓이 맞나?”

 

 

메리엘은 급히 말했다.

 

 

, 엘론이 한 짓은 맞아요. 하지만 세뇌당했을 가능성이 높아요.”

 

세뇌?”

 

. 여러 정황상, 강력한 배후가 있는 것 같아요. 엘론의 저주와 세뇌를 해제하면 알아낼 수 있을 거예요. 조금 시간이 걸리겠지만, 제가 해볼게요.”

 

자네가? 할 수 있겠나?”

 

할 수 있을... 거예요. 아마도.”

 

 

메리엘의 자신 없는 목소리에 타일러스는 한숨을 쉬었다. 타일러스는 메리엘에게 포션을 주고는 말했다.

 

 

, 시간을 벌어주는 거야 어렵지 않네. 다른 방법도 없으니, 일단 시도해 보게.”

 

! 해볼게요! 잠깐, 시간을 벌어주신다고요? 이미 좀비들은 전부 해치우신 거 아닌가요?”

 

급히 오느라 남겨두고 온 것들이 있네. 그리고, 아무래도 위험한 녀석들은 전부 숨어 있었던 것 같군.”

 

 

타일러스는 검을 들어 한 방향을 가리켰다. 어디선가 나타난 좀비들이 타일러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다른 좀비들과 달리 고풍스러운 후드를 쓰고 있었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건만... 훼방꾼이 나타나다니.”

 

검사, 그자를 놓고 사라져라. 우리를 더 방해한다면 없애버리겠다.”

 

 

타일러스는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하찮은 언데드 주제에 날 협박하는 건가? 나도 경고하지. 더 이상 소란 피우지 말고 가만히 목이나 내밀게. 그러면 고통 없이 보내주겠네.”

 

 

좀비들은 대답 대신 무기를 꺼내었다. 거대한 망치와 메이스, 방패와 검. 메리엘은 그들의 무기를 보고는 이상함을 느꼈다. 무기의 종류나 그곳에 새겨진 문양. 일반적인 전사가 사용하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저건... 성기사의 무기 같은데?’

 

 

메리엘은 저 좀비들이 이전에 자신들을 퇴치하러 온 성기사를 죽이고 그 무기를 빼앗은 것이리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저들은 좀비들 중에서도 특출나게 강할 것이다. 메리엘은 타일러스를 걱정했다.

 

 

한 좀비가 말했다.

 

 

죽여라.”

 

 

그것을 시작으로, 좀비들이 타일러스에게 쇄도했다.

 

 

쇠와 쇠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맹렬하게 터졌다.

 

 

그것들은 다른 좀비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날렵했고, 한 몸처럼 유치적으로 움직였다. 치명적인 연계가 물 흐르듯 계속해서 이어졌다.

 

 

타일러스는 엘론을 붙든 채, 메리엘의 앞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으며 검 한 자루로 그 모든 공격을 흘려내었다. 한 손만으로 거대한 대검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모습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타일러스가 쉽게 쓰러지지 않자, 좀비들은 대신 메리엘을 노렸다. 타일러스는 단 하나의 공격도 닿지 않게 막아내었다.

 

 

그러나, 눈앞에서 육중한 금속이 빛을 뿌리고, 고막을 터뜨릴 것 같은 소음이 귓가에 메아리치는 상황은 메리엘의 혼을 흔들어놓기에 충분했다.

 

 

메리엘은 손바닥으로 자신의 양 뺨을 두드리며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집중해! 집중!’

 

 

눈을 감고, 오랜 기억을 떠올렸다.

 

 

엘리니아에서 마법을 배우는 동안 메리엘은 늘 시간이 남았다. 다른 학생이 공격 마법을 배우고 익힐 때 메리엘은 그러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메리엘은 다른 일에 몰두했다. 도서관에 틀어박힌 메리엘은 상급 마법서 몇 권을 몰래 탐독했다.

 

 

미숙한 마법사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상급 마법. 아직 이해하기에도, 사용하기에도 버거운 마법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이론적인 부분은 대강이나마 알아낼 수 있었다.

 

 

그때 보았던 마법 중, 가장 인상적인 마법 한 가지가 있었다.

 

 

디스펠. 어떤 상태이상이라도 해제할 수 있는 마법. 언데드화 저주도 예외는 아니다. 그야말로 지금 가장 효과적인 마법이었다.

 

 

유일한 문제는, 메리엘은 한 번도 디스펠을 성공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메리엘은 기억 속 내용을 토대로 힘겹게 마나를 조작했다.

 

 

분명... 이렇게 하면...’

 

 

순간, 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메리엘의 머리에 격통이 일었다. 잘못된 경로로 흐른 마나가 역류하며 과부하를 일으켰다.

 

 

으윽!”

 

 

메리엘은 신음을 흘렸다.

 

 

마법은 섬세하다. 마법을 이루는 수많은 요소 가운데 하나라도 잘못되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운이 없다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메리엘은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주문을 시도했다. 암기했던 주문을 되뇌고, 모자란 부분은 경험과 지식으로 채웠다.

 

 

두 번째 시도. 메리엘은 오류를 일으킨 부분을 수정하고 다시 마법을 시전했다.

 

 

두 번째는 처음보다는 나았다. 희미한 마법진이 떠올랐다.

 

 

된 건가?”

 

 

놀란 메리엘은 그만 집중을 깨뜨릴 뻔했다. 메리엘은 심장이 떨어질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마법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마법진은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깜빡였다. 원래라면 짙은 황금빛과 함께 천사의 날개를 연상시키는 날개가 펼쳐져야 했다.

 

 

메리엘은 애타는 눈빛으로 마법진을 바라보았다.

 

 

마법진이 밝아졌다 어두워질 때마다 메리엘의 표정도 시시각각 변했다. 목은 타들어 가고 손에는 땀이 났다.

 

 

타일러스와 함께라면 좀비를 없애는 건 어렵지 않다. 엘론을 죽이는 것도. 하지만 그 뒤의 배후까지는 알아낼 수 없다. 그렇다면 언젠가 또 오늘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때는 장로가 있을 테니 대처할 수 있겠지만, 몇 명의 사람이 죽는 건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메리엘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지금 메리엘이 마법을 성공시키기만 한다면, 엘론을 살릴 수 있고, 누군지 모를 몇 명이 희생되는 일도 없다.

 

 

메리엘은 간절히 기도했다.

 

 

신이시여. 제발... 제발...’

 

 

신성 마법에 중요한 것은 지식보다는 간절한 마음이었을까. 기적처럼 메리엘의 마법진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 어어어! 됐다!”

 

 

조악하고 어설펐지만, 그 빛에는 분명 정화의 힘이 담겨 있었다. 메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서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프리스트의 마법을 성공시켰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기뻐할 틈은 없었다. 메리엘은 다급히 외쳤다.

 

 

타일러스 님! 됐어요! 엘론 씨를!”

 

 

타일러스는 엘론의 목을 놓고, 메리엘에게 던졌다. 엘론은 메리엘의 앞에 떨어졌다.

 

 

디스펠!”

 

 

메리엘이 외치자, 마법진에서 빛나는 날개가 펼쳐지며 엘론에게 정화의 빛이 쏟아졌다.

 

 

빛을 쏟아낸 마법진은 사라졌다.

 

 

엘론 씨?”

 

 

메리엘은 긴장한 채 엘론을 바라보았다. 엘론은 천천히 눈을 떴다.

 

 

으으... 머리야... 뭐야, 여긴 어디지? 너는?”

 

저예요. 메리엘.”

 

메리엘? 처음 듣는 이름인데.”

 

 

메리엘은 당황했다. 마법에 뭔가 문제가 있었나? 잠깐 고민한 메리엘은 어떻게 된 건지 이해했다.

 

 

설산에 갔을 때부터 세뇌되어 있던 상황이면, 그 이후에 일어난 일은 모르는 게 당연하다.

 

 

엘론은 바로 옆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좀비들과 타일러스를 발견하고는 기겁했다.

 

 

저 괴물들은 또 뭐고? 세상에, 이게 다 무슨 일이야? 미치겠네, 진짜.”

 

다 설명해 드릴게요. 우선,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게 뭔가요?”

 

마지막? ... 사냥 중이었어. 늑대를 한 마리 잡았지.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웬 사람이 쓰러져 있는 걸 봤고... 그 뒤에는...”

 

엘론은 머리를 부여잡고는 두서없이 말을 쏟아냈다.

 

 

기억나. 누군가한테 납치당해서 끌려갔어. 쓰러져 있던 그 사람이었어. 어디였지? 기분 나쁜 곳이었어. 썩은 나무가 많았어. 거기서 좀비들을 봤어. 그리고 그들의 주인을 봤어.”

 

주인이요?”

 

 

엘론이 세뇌당했을 때 말했던 위대한 분을 뜻하는 게 틀림없었다.

 

 

그 주인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말해주세요.”

 

 

뭔가 말하려던 엘론은 완전히 공포에 질렸다. 그리고 메리엘은 엘론에게서 뭔가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발견했다. 저주가 풀리면서 생기가 돌아야 할 엘론의 얼굴은, 오히려 전보다 더 창백해졌다.

 

 

단순히 공포 때문에 그렇다고 하기에는 지나쳤다. 이상함을 느낀 메리엘은 엘론을 진정시키려 했다.

 

잠깐, 엘론 씨. 우선 진정하세요.”

 

그건... 그건...”

 

 

엘론의 목소리가 괴상해졌다. 수많은 벌레가 기어다니는 것 같은 기이한 소리. 창백하던 엘론의 피부는 이제 청록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명백히 정상이 아니었다. 메리엘은 다급히 엘론의 어깨를 붙잡았다.

 

 

엘론 씨! 괜찮으세요?”

 

 

엘론은 고개를 들었다. 메리엘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엘론의 눈은 검게 썩어 있었다. 엘론은 한 마디를 더 내뱉으려 했으나, 대신 피를 왈칵 쏟아내고는 쓰러졌다.

 

 

메리엘은 힐을 시전했으나,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왜지? 저주는 사라졌는데?’

 

 

이해할 수 없었다. 힐에 피해를 받지 않으니 저주가 풀린 건 확실하다.

 

 

언데드화 저주에 걸려 있는 동안에는 멀쩡했는데, 그런데 저주를 해제하니 오히려 상태가 악화했다.

 

 

어떻게든 이유를 알아내야 했다. 시간이 없었다. 엘론은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보였다.

 

 

그때, 타일러스가 소리쳤다.

 

 

잠깐, 설마 지금 피가 흐른 건가!”

 

? 피가 왜... !”

 

 

디스펠을 준비하고, 엘론의 상태를 고민하느라 잠깐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메리엘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엘론이 쏟아낸 피는 순식간에 붉은 보석으로 흘렀다. 미처 손쓸 새도 없이, 보석은 엘론의 피를 먹어 치웠다.

 

 

보석의 박동이 멈췄다.

 

 

동시에, 포탈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거대하던 포탈은 작아지고 작아졌다. 사람 하나가 통과할 수 있을 정도까지.

 

 

아아... 드디어.”

 

 

좀비들은 일제히 물러나, 보석과 포탈을 호위하듯 그 옆에 다가가 섰다.

 

 

타일러스는 침음을 흘렸다.

 

 

이런...”

 

 

포탈이 완성되었다. 압축된 포탈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해졌다. 그러한 포탈이 필요한 이유는 한가지 뿐이었다. 무언가 강력한 존재가 포탈을 타고 이곳으로 오려 하고 있었다.

 

 

포탈이 격하게 요동쳤다. 그와 동시에 좀비들은 무릎을 꿇고 도열했다.

 

 

이윽고 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 자리의 모두가 서늘한 죽음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썩은 살이나마 남아있는 다른 좀비들과 달리 완전한 백골이 되어 있었고, 그마저도 탁하게 빛바랜 상태였다. 아주 오래된 언데드임이 틀림없었다. 십자가가 새겨진 로브를 쓰고 있었고, 한 손에는 스태프, 다른 한 손에는 펼쳐진 책을 들고 있었다.

 

 

신에게 저주받은 존재가 있다면 저런 모습일까? 메리엘은 그토록 불길한 마력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실재하고 있었고, 심지어 이전에 겪어본 적도 있었다.

 

 

설산의 마녀를 무찌른 뒤에 보았던 환영. 그 마지막 장면에서 프리스트가 내뿜던 검붉은 마력과 눈앞의 언데드의 마력이 거의 흡사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리치 님.”

 

 

좀비들은 머리를 숙였다.

 

 

리치는 천천히 허공을 날아 좀비들을 지나쳐, 타일러스와 메리엘의 앞에 당도했다.

 

 

타일러스는 리치를 막아서며 말했다.

 

 

멈춰라. 언데드.”

 

 

리치의 시선이 타일러스에게 향했다. 그것이 입을 열자, 눈보다 차가운 숨결이 흘러나왔다.

 

 

너는 누구지?”

 

타일러스. 전사의 장로다.”

 

그렇군. 당대의 장로였나.”

 

 

리치는 뒤이어 메리엘과 쓰러진 엘론을 바라보며 말했다.

 

 

넌 프리스트인가? 보아하니 그것의 언데드화를 해제한 것 같다만... 아직 더 배워야겠구나. 이리도 어설픈 디스펠이라니. 한심하군.”

 

 

짓누르는 듯한 마력 때문에 고개를 들기 어려웠다. 메리엘은 안간힘을 써서 리치의 시선을 마주했다. 반드시 해야 할 질문이 있었다.

 

 

그쪽이... 엘론 씨를 이렇게 만든 건가요?”

 

그렇다.”

 

 

메리엘은 힘겹게 일어서서는, 리치를 노려보며 말했다.

 

 

어째서죠?”

 

 

리치는 간단히 답했다.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게 전부인가요?”

 

아이야. 감히 내게 설명을 요구하는 게냐?”

 

 

타일러스가 위협하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야 할 거다. 죽기 싫다면.”

 

 

리치는 가소롭다는 듯 가볍게 웃었다.

 

 

기세는 제법이구나. 좋다. 말해주지.”

 

 

리치는 지팡이를 들어 뒤편의 좀비들을 가리켰다.

 

 

저들이 보이나? 저들은 잠들어 있던 나의 마력에 이끌려 언데드가 된 자들이다. 뜻하지 않게 우연히 언데드가 된 저들에게 주어진 것은 끝없는 추위와 고통뿐이었다.”

 

그렇다면 너를 증오해야 하는 것 아닌가? 내 눈에는 너를 따르는 것처럼 보이는데.”

 

한때는 그랬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런 감정은 순간일 뿐이다. 죽은 자에게 가장 혐오스러운 존재는 자신을 죽인 이가 아니라, 모든 산 자다.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지.”

 

 

메리엘도 마법을 배우며 들어 본 이야기였다. 죽고서도 안식을 찾지 못한 자들은 대부분 산 자를 질투하기 마련이며, 그렇기에 유령이나 언데드는 언제나 경계해야 할 존재다.

 

 

끝날 줄 모르는 고통 끝에 저들에게 남은 것은, 산 자에 대한 증오와 질시뿐이다. 그래서 저들은 나를 불렀다. 이 저주받은 운명에서 구원해 달라고. 삶이라는 축복을 누리는 자들의 온기를 빼앗아 나누어 달라고. 나는 그 부름에 응했다.”

 

 

타일러스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좀도둑이나 할 법한 소리로군. 그래서? 그게 엘론과 무슨 상관이지?”

 

나는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다. 다시 일어나기 위해서는 인간의 생명이 필요했지. 저 소년은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장소에 있었고, 제물로 선택되었다.”

 

 

리치의 말이 이어졌다.

 

 

나는 소년의 생명력을 마시고 오랜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그 껍데기를 언데드로 되살렸다. 엘나스를 치고 그 숨결을 취하기 위해, 인간들 사이에 섞여 들어가 동향을 살피고 길을 열 존재가 필요했다.”

 

 

어떤 죽음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생전과 똑같은 외형과 기억을 보존한 언데드. 가족과 클레릭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공들여 만들어진, 리치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한 꼭두각시. 그것이 엘론의 상태였다.

 

 

맡은 역할을 꽤 잘 수행했으니, 상이라도 내릴 생각이었건만. 아쉽게 됐군. 언데드화 저주가 풀렸으니 곧 본래 운명대로 시체로 돌아갈 것이다.”

 

 

리치의 말대로 엘론의 몸은 점차 핏기가 사라지며 차가워지고 있었다. 메리엘은 분노로 손을 떨었다.

 

 

당신, 제정신이 아니군요. 신이 두렵지도 않은 건가요?”

 

우습구나. 나는 이미 신의 분노를 산 지 오래된 몸이다. 무엇을 더 두려워하겠는가?”

 

그렇다면 오히려

 

이쯤 하지. 오랜만의 대화라 즐겁긴 했지만, 더 시간을 낭비할 생각은 없다.”

 

 

리치가 붉은 마법진을 그려내자, 메리엘의 머리 위로 빛나는 검이 떠올랐다. 리치가 손짓하자 그것은 메리엘을 향해 내리꽂혔다.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우선 네 생명부터 바치거라.”

 

어림없다!”

 

 

타일러스는 메리엘을 밀치고 리치의 마법검을 쳐내었다.

 

 

까앙!

 

 

!”

 

 

검을 통해 느껴지는 묵직한 충격에 타일러스의 얼굴에 긴장감이 스쳤다. 리치는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막았나? 과연, 제법이구나.”

 

네 마음대로 되지는 않을 거다.”

 

 

타일러스는 자세를 다잡고는 리치를 노려보았다.

 

 

리치는 차갑게 웃으며 타일러스를 비웃었다.

 

 

글쎄, 혼자서는 힘들지 않겠나?”

 

 

타일러스는 혀를 찼다. 리치의 말이 정곡을 찔렀기 때문이다. 상대의 수준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했건만. 홀로 적진 한가운데에서 메리엘, 가능하다면 엘론까지 지켜야 했다.

 

 

이렇게 긴장하는 것도 오랜만이군.’

 

 

리치의 마력이 주변 공간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어디, 당대 장로의 수준을 보여주겠나?”

 

얼마든지.”

 

 

다음 순간, 리치의 마법과 타일러스의 검이 격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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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게 다 무슨 일이지...”

 

 

바위 뒤에 숨어서 조심스럽게 고개만 내밀고 있던 하셀은 번개가 치는 것 같은 서슬 퍼런 굉음에 깜짝 놀라 몸을 숙였다.

 

 

타일러스가 좀비들을 베어 내며 만들어진 길이 사라지기 전에, 하셀은 재빨리 타일러스의 뒤를 쫓아 달렸다. 걸음이 느린 좀비들은 하셀을 붙잡지 못했고, 하셀은 무사히 타일러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타일러스는 네 마리의 좀비와 싸우고 있었다. 타일러스와 합을 주고 받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강력한 듯해 보였다.

 

 

그 뒤에는 예상대로 메리엘이 있었고, 심지어 엘론까지 있었다.

 

 

엘론의 상태는 나빠 보였다. 쓰러진 엘론 곁에서 메리엘이 어떤 마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마도 타일러스가 지켜 주는 동안 메리엘이 엘론을 치료하려는 듯해 보였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당장 달려가고 싶었지만, 타일러스에게 방해가 될까 봐 함부로 나설 수 없었다.

 

 

좀비들의 주의는 모두 타일러스에게 향해 있었기에, 하셀은 들킬 염려 없이 상황을 지켜볼 수 있었다. 거리가 멀어서 소리는 잘 들을 수 없었지만, 타고난 시력 덕분에 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이변이 일어났다.

 

 

메리엘이 준비하던 마법을 시전하자 엘론은 정신을 차리는 듯했다. 하셀은 안심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갑자기 엘론이 피를 토했다.

 

 

놀란 하셀은 좀비의 존재도 잊고 뛰쳐나가려 했으나, 한 걸음을 떼기도 전에 제자리에서 못 박힌 듯 꼼짝도 하지 못했다. 붉은 포탈을 타고 모습을 드러낸 한 존재. 멀리서도 느껴지는 불온한 마력. 그 자가 나타나자 모든 좀비들은 왕을 맞이하는 신하처럼 자세를 낮추었다. 하셀은 분명 저자가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일 거라 짐작했다.

 

 

그자는 메리엘과 타일러스와 짧은 대화를 주고받은 뒤 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하셀은 바위 뒤에 숨어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쩌지...”

 

 

불리한 상황이었다. 흑마법사의 뒤에는 수많은 부하가 있는 반면, 타일러스의 뒤에는 만신창이가 된 메리엘과, 살아 있기는 한 건지 의심스러운 엘론이 있을 뿐이었다.

 

 

타일러스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메리엘과 엘론을 지키면서 동시에 흑마법사를 처치할 수는 없다. 리치를 처리하기 위해 자리를 비우면 곧바로 흑마법사의 수하들이 메리엘과 엘론을 죽일 테니까.

 

 

흑마법사는 조바심을 내지 않았다. 즐거운 듯 여유로운 태도를 고수하며 타일러스를 서서히 옥죄었다. 뾰족한 해결책은 보이지 않았다.

 

 

장로님이 한 분이라도 더 계셨더라면...”

 

누군가 도와야 했다. 그리고, 지금 나설 수 있는 건 하셀밖에 없었다. 하지만 하셀은 그러지 못했다.

 

 

뭐라도... 해야 하는데...”

 

 

확신할 수 있었다. 저곳에 가봤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거라는 걸. 단 한 마리의 좀비도 어쩌지 못해 숨어서 여기까지 왔는데, 수백 마리의 좀비를 손가락 하나로 부리는 자를 상대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흑마법사의 마법은 설산의 마녀보다도 더욱 강력해 보였다. 하셀 따위는 벌레를 잡듯 간단하게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두려움에 하셀은 한 발짝도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일단 돌아가자. 알케스터 님에게 알리는 거야.’

 

 

용기와 만용은 다르다. 그정도 냉정함은 가지고 있었다. 무슨 짓을 해도, 타일러스의 발목만 잡게 될 뿐이다. 그리 생각하며 하셀은 몸을 돌리려 했다.

 

 

그때,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흑마법사와 타일러스가 팽팽하게 균형을 이루는 동안, 흑마법사의 수하들이 달려들었다.

 

 

안 돼!”

 

 

육중한 메이스가 타일러스의 머리를 후려쳤다. 수하들은 끊임없이 타일러스를 갉아내었다. 당장 쓰러지지는 않았지만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타일러스가 쓰러지면 메리엘과 엘론도 죽은 거나 마찬가지다. 그 뒤는 바로 엘나스의 차례가 될 것이다. 어쩌면 흑마법사는 타일러스를 좀비로 만들어서 부릴지도 모른다.

 

 

당장 돌아가서 알려야 한다. 그게 맞는 일이고, 가장 현명한 선택이다.

 

분명 그렇지만, 도저히 발을 뗄 수가 없었다.

 

 

그들이 죽을 위기에 처한 걸 보고서도 도망칠 수는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민하던 하셀은, 이내 결심했다.

 

 

하셀은 흑마법사를 바라보았다. 조금이라도 타격을 줄 수 있다면, 압박이 약해진 틈을 타서 타일러스가 기적을 보여줄지도 모른다.

 

 

희박한 가능성이었고, 무모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지만, 가능성이 있다면 하셀은 걸어 보고 싶었다.

 

결단을 내린 하셀은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때, 누군가의 손길이 하셀의 어깨를 눌렀다. 하셀은 주의를 끌어선 안 된다는 것마저 잊고 비명을 지를 뻔했다.

 

 

가만히 있게. 자네가 나설 자리가 아니네.”

 

 

어디선가 들어 본 적 있는 목소리였다. 하셀은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하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곳에는 하셀보다 훨씬 더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서 있었다.

 

 

마법사의 장로, 로베이라가 흑마법사를 노려보며 말했다.

 

 

저건 내가 해결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