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개요


한국전쟁 개전 초기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경 폭음과 함께 한강 인도교 상판이 붕괴되었고


이에 종로 서 경찰 수십명을 포함한 80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사건.


개전 초기 급박한 상황이라 어쩔 수 없었던것 아닌가? 라는 말은 전후상황을 살펴보면 절대 나올 수가 없는 말인데


1. 이승만 정부의 절대 이해 할 수 없는 행동.



<서울시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요! 적은 패주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


국군의 총반격으로 적은 퇴각 중입니다. 우리 국군은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할 것입니다.


이 기회에 우리 국군은 적을 압록강까지 추격하여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달성하고야 말 것입니다.>

문제의 이 라디오 방송은 27일 밤 대전에서 녹음되어 방송된 것이다.


이승만은 이미 서울에서 한참 떨어진 대전으로 피신한 뒤 국민들에게는 서울을 사수하자라는 말과 함께


불리한 전세에 대해 함구해버렸고 이를 믿은 서울 시민들은 전황이 불리하여 인민군이 서울 턱밑까지 진격한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이미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피난을 가려했을때는 한강 교량 다수가 파괴되어 피난을 가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승만과 최측근 몇 명만 미리 서울을 빠져나갔고


부통령 이시영 같은 고위 인사들도 이승만이 도망갔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점이다.


부통령 이시영의 경우 북한에서 보내온 밀사가 접선을 시도하여


"이승만이 서울을 버리고 도망갔으니 부통령 선생께서 지금 대한민국 대통령 직을 승계하신 거 아닙니까? 


김일성 수상이 정상회담을 원하니 저랑 같이 갑시다." 라는 제안을 거절하고


바로 피난길에 올라 한강인도교 폭파 직전 새벽 1시경에 한강이남으로 건너 올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한강인도교 폭파 이후 수많은 고위인사, 국회의원, 이밖에 다수의 민간인들이 한강 이북에 고립.


향후 우리나라 수십년을 좌지우지했을 지도자급 인사,군인,경찰 등등이 납북되거나 살해당했고


(조소앙,김규식,안재홍 등등)


그나마 운좋게 납북이나 살해당하는것을 피한 사람들은 서울 수복이후 북한의 부역자라는 오해를 받기까지 했다.


(정정화 등등)


게다가 북괴군은 서울대학교 부속병원 학살 같은 만행까지 저질렀고 이승만 정부의 이해 할수 없는 짓거리때문에


우리나라는 개전초기 엄청난 인명손실을 치뤄내야 했다.


(서울대학교 부속병원 학살 사건 :


1950년 6월 28일 아침 북괴군 제9탱크여단 소속으로 추정되는 북괴군 병력 다수가 서울대학교 부속병원에 난입,

소위1인, 중사1인, 거동가능한 부상병으로 구성된 국군 1개 소대가 저항하였으나 전원 전사.

서부전선에서 부상당해 후방 서울로 후송된 국군 부상병, 그 가족들 등등 1000여명을 학살한 사건.)




2. 당시 우리나라 국군 주력 병력의 고립을 자초.


개전 초기 신성모 채병덕 같은 똥덩어리들의 개삽질에도 불구하고


서부전선에서는 백선엽의 1사단 유재흥의 7사단 등등 국군이 전투를 벌이고 있었는데


한강 교량이 다수 파괴되면서 서부전선 대다수의 국군병력이 사실상 고립되어 버리는 대참사를 초래하였다.


이들 병력은 한강교량이 파괴되버리면서 중화기는 포기하고 소화기만 들고 한강 도하를 시도하면서


적잖은 군수물자의 망실이 일어났으며 조속한 한강교량 파괴가 아군의 짓이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던 터라


사기저하까지 발생하였으며 결과적으로 사단 자체가 와해될 위기까지 처하게 되었다.





결론


이승만은 결과적으로는 위의 두가지 사실만으로도 욕을 바가지로 처먹어야 마땅함.


대통령이 잡혔으면 우리나라 망하는거 아니야? 이런 소리가 나올 수도 있으나


적어도 대전에서 서울 사수 같은 개소리를 떠들 게 아니라  대책을 수립하고 한강교량 폭파를 감행했어야 맞음.


하지만 그는 대전에서 서울 사수를 떠들며 대다수 국민들을 기만하였고 생각조차 안한 게 티나는 한강교량 조기폭파로


아군까지 위기상황에 빠지게 만들었으니 이는 어떤 변명도 불가능한 상황.


게다가 신성모 , 채병덕 같은 두 똥덩어리들을 계속 국방요직으로 안고 가려다 생긴 대참사라


더더욱 이승만의 잘못이라 할 수 있다.





번외


위와 같은 상황만 봐도 한국전쟁 개전 초기 굉장히 절망적인 상황이었으나


폐기물이 존재하면 영웅도 반드시 존재한다 라는 우리나라 역사의 유구한 밸런스패치에 따라


위인들이 등장하여 한국전쟁 초기 불리했던 전세를 반등시킨 인물들이 있었고 그 분들의 활약 덕분에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존재 할 수가 있었는데 그 중 몇 분의 업적을 알아보도록 합시다.



<김홍일 장군 1898.9.23. ~ 1980.8.8>


독립운동가 출신, 윤봉길 의사의 의거 지원 및 중화민국군 장성 출신. 사단급 야전경험 풍부함


이런 경력에도 불구하고 한직에 머물러 계시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채병덕을 찾아가 시흥지구전투사령관이라는 임시보직을 받아오게 되는데


이것이 결과적으로는 신의 한 수가 되었다.


사령관 부임 당시 전용차 1대 부관 1명 휘하병력 없음 이라는 눈물나는 상황이었는데 김홍일 장군은 정복을 차려입고


패잔병, 철수병력 등등을 규합, 단시간에 국군 혼성 사단을 편성해내고 한강 이남에 방어선을 구축하게 되는데...


6월 28일 한강 이북까지 진격했던 북괴군을 우주방어로 7월3일까지 방어해냈고


한강이남 방어선이 무너지자 7월5일부터 벌어진 진천,안성,평택 방면 전투에서 7월10일까지 북괴군의 진격을 저지해낸다.


개전 초기 거진 2주동안 북괴군 주력의 발을 묶어버리면서 국군 , 유엔군에게 아주 귀중한 시간을 벌어주었다는 평가에는


아무 이견이 없을정도.




<김종오 장군 1921~1966>



일본 학도병 소위 출신.


49년 5월 춘천 방면에 주둔하던 강태무 표무원이 휘하 국군 다수를 데리고 월북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그 빈 자리에 부임한것이 김종오 장군. 이후 두각을 나타내 개전 직전에 6사단장까지 진급.


개전 당시 강원도 중동부 접수 및 서울 우측 방면에 합류하려는 김광협의 북괴군 2군단을


25일부터 30일까지 인제,춘천,홍천 방면에서 막아냈고


그 결과 6사단은 400여명 사상자 발생, 북괴군 2군단 최소 2000여명 사상자 발생이라는 전과를 올렸고


북괴군에게 묵직한 카운터 펀치를 날림.


물론 전력상 역부족으로 남쪽으로 후퇴하긴 하였으나 북괴군 2군단의 계획을 저지하는데는 어느정도 성공함으로


결과적으로 한강 이남 방어전 성공에도 영향을 미치게 됨.


북한 2군단의 삽질에 빡친 김일성은 2군단장 김광협 포함 휘하 사단장들을 경질.


6사단은 열세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으로 북괴 2군단을 최대한 저지해 개전 초기 전황에 영향을 미침.



<이성가(이정일) 장군 1922~1975>


광복군 출신.


개전 초기 8사단장으로 동부전선 강릉방면에서 25일부터 28일까지 열세에도 불구하고 북괴군 남하를 저지.


빠른 소개령 및 계엄령등의 대처로 아군 및 민간인들의 피해를 최소화.




진짜 결론


이승만은 어떻게 해도 실드가 안되는 권력욕에 미친 노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