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더 민주적으로, 노동자 서민들의 삶의 질이 조금씩 더 높아지는 개혁적 방향으로 사회적 변화가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갈망. 그러나 현실을 바라보면 정말 우리 사회가 그렇게 바뀔수가

있기는 한 것일까? 싶은 회의감에 종종 빠져든다.

 

사회의 변화란 곧 사람들의 의식이 변화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할텐데, 사회적인 쟁점들에 

반응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살피다보면 사회의식이 진보적으로 변화하기는 커녕, 갈수록 보수지향

적인 퇴행만을 거듭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때때로 대중들가운데 선진적인 의식을 가진 사람들조차도 실망과 좌절에 빠져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변화를 기대하는 사람들의 갈망은 다양한 정치적 대안들을 찾아나선다.

이렇게 다양한 정치적 대안을 찾아나서는 가운데 사람들의 의식은 특정 쟁점들을 둘러싸고 때로는

진보적으로, 때로는 보수적으로 반응하며 혼재된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사람들의 의식은 어떻게 변화할 수 있는 것일까?

"가랭이가 찢어질 정도로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주머니를 털어갈 것이 뻔한 극우보수 정치를

정치적 대안으로 여기는 이유가 대체 뭘까?" 사회적인 쟁점들에 대해 대체로 진보적 입장을 가지는 

선진대중들 조차도 간혹 이런 자조섞인 불만을 터트리며 투덜거린다.

 

간혹 주목할만한 대중 투쟁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직접 대중행동에 나서는 사람들

이라고 해본들, 전체 인구 중에서 고작 1%도 넘지 못하고, 그 마저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한다.

 

그래서 민중총궐기에 몇명이나 모였는지에 촉각을 곤두세우다가, 1차엔 13만명이었는데 2차에는

오히려 훨씬 줄어든 4만명 수준이라는 것을 확인하고서는 이내 곧 실망과 좌절에 빠져든다.   

그리고 이런 실망과 좌절은, 사회 변화에 대한 수위와 폭 그리고 속도에 있어서 급진적인 변화는

더 이상 불가능한 것으로 여기며, 좀 더 온건하고 점진적인 변화 가능성에 더 크게 무게를 두는

쪽으로 기울어진다. 말하자면 대중들의 의식이 저렇게 후진적이니 더 이상 급진적인 혁명적 변화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다.

 

'억압과 착취가 있는 곳에 고통과 불만이 있고 고통과 불만이 있는 곳에 투쟁이 있다'

사람들의 의식이 변화하는 것에 대한 마르크스적 분석을 차용하자면 이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겠다.

그런데? 여기서 이런 의문이 발생한다.

 

마르크스적 분석에 따르자면, 살기 힘들어지는 것에 비례해서 대중의식도 급진화 되어야만 하는데,

현실은 오히려 정 반대인것 같아 보이기만 하다. 그러면 아직은 먹고 살만해서 그런가? 싶은 조급성

에서 플랜B라든지, 국개론같은 논리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지금보다 훨씬 더 삶의 처지가 더 열악

해져야지만 자신들의 계급적 처지에 대한 각성이 일어날것이고, 그때서야 비로소 진보지향적 태도를

가지게 될 것이라는 논리다. 이런 논리에 기반해 플랜B를 더 빠르게 촉진시키려고 극우보수 세력에

지지를 보냈다는 어이없는 궤변도 존재한다.

 

 

 

국개론과 플랜B - 스탈린식 교조적 경제결정론의 관점에 서있는 동전의 양면

대중들의 삶의 처지가 극단적으로 추락해서 고통과 분노가 임계점에 도달하게되면 자연발생적으로

진보적 의식변화가 이루어질까? 만약 그렇다면, 극우인종주의.애국주의에 열광하며 파시즘을 정치적

대안으로 선택했던 대중의식의 변화는 무엇으로 설명할것인가.

 

알다시피 파시즘은 세계적인 경제위기 상황에서 암울한 현실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수 없었던

노동자계급.중간계급 대중들의 광범한 지지를 얻으며 발흥했던 극우적인 정치적 경향이었다. 더불어

최근 일부 유럽 국가들에서 극우 민족주의 성향의 정치적 경향들이 득세하는 상황들은 또 무엇으로

설명할수 있을까?

 

물론 사람들의 의식을 규정하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물질적 조건이라는 사실은

진실이다. 그러나 이것을 교조적인 경제결정론적 관점에서 해석하다보니 국개론이나 플랜B와 같은

이율배반적인 궤변들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물질적 조건'에서 이 '물질적 조건'이라는 것이 단지 경제적인 처지만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니다... 만약 그렇게 이해한다면 그건 기계론적인 스탈린주의 유물론의 전형이고, 교조적

경제결정론자들의 해석이다. 사람들의 의식에 개입하는 실로 다양한 장치들... 기득권 지배집단들의

이데올로기를 확장 재생산해내는 언론들, 각 정치집단들간의 세력 균형, 교육.문화... 등등등... 흔히

상부구조라 일컷는 부분들까지도 사람들의 의식을 규정짓는 '물질적 조건'들의 영역이다. 그리하여

'당대의 지배적인 사상은 지배자들의 사상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이렇게 '사람들의 의식을 규정하는 물질적인 조건'을 확장시켜놓고 바라보면, 가난한 사람들이 극우

적인 정치 경향을 지지하게 되는 이유와, 대중들의 삶의 처지는 더욱 열악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 전반에 걸쳐 우익적 컨센서스가 득세하게 되는지를 알수있다.

 

 

 

대안 세력의 부재가 대중의식의 보수화를 불러온다.

대공황이라는 세계적인 경제위기 상황에서, 끝이 어딘지를 모르고 추락하는 대중들의 삶.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상 가장 추악하고 반인륜적인 정치적 경향이었던 파시즘에 대중들이 열광했던 이유는

바로 파시즘을 끌어내릴 정치적 대안 세력이 부재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례들은 역설적으로 플랜B와

같은 기대가 얼마나 멍청하고 위험한 기대인가를 일깨워준다. 

 

이같은 파시즘의 맹아적 현상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도 종종 발현된다.

예컨대, 지배계급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불행의 책임을 사회진보세력 혹은 노동자계급을 향해

돌린다. 민중총궐기를 두고 전방위적으로 선동하는 폭력시위 프레임 확장을 보면 대번에 알수있다.

 

세월호 참사때는 과도한 세월호 추도 분위기 때문에 중간상인들의 영업이익이 떨어졌다며 이간질

시켰다... (세월호 참사관련 추모 플랭카드를 훼손하던 중간상인들의 모습을 상기해보라)

경제위기의 책임을 민주노총에게 돌리며, 파업만 없었다면 벌써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을 것이라고

말한다. 대기업노동자을 이기주의에 빠진 노동귀족이라 선동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겪는 고통은

연공서열 철밥통 정규직 노동자들 때문이라고 선동한다.

 

그리고 노동계급 내의 후진적 대중들의 의식에는 지배계급이 확산시키는 이데올로기들이 그대로

투영된다. (심지어는 선진적 대중들 일부에게 조차도)

 

이렇게 전방위적으로 이루어지는 지배계급의 희생양 찾기가 대중들의 의식에 얼마만큼 투영되고

대중의식을 지배하는가의 문제는, 이에 맞서는 세력이 얼마나 존재하느냐와 반비례해서 직결된다.

이것은 단지 주류정치권력에 대한 비판세력이 그 사회에 양적으로 얼마나 많이 존재하느냐에 따라

지배계급 사상이 대중의식에 투영되는 정도가 달라질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당대를 지배하는 지배적인 사상은 결국 지배계급의 사상'이라고 했던 것처럼, 지배계급의 사상을

뛰어넘어 정치적 대안을 제시하는 세력의 유무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가지 더 언급하자면

보수야당이 지배계급의 사상을 뛰어넘어서, 지배계급의 사상이 대중의식에 투영되는 것을 막아주고

대중의식의 보수지향적 회귀를 막아주기를 기대하는 것이 과연 현실적인가를 생각해보면, 그것은

무망한 기대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지배계급의 일부에게 지배계급의 사상을 뛰어넘어주기를 기대

하다니 말이다. 현재의 보수야당은 기득권 지배계급이 위기에 처할 때를 위해 대비하는 보험, 즉

지배계급의 플랜B일 뿐이다.

 

 

 

 

글이 너무 길어지는 것아서 1차적으로 여기서 줄인다.

(글을 쓸때마다 항상 말하는거지만 너무 길어지면 스크롤먼저 내리고 세줄요약을 외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게 걱정이다)

 

2부에선 위의 문제의식과 연결시켜서 그러면 대체 대중의식의 보수화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

일까에 대해서 이어가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