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게에는 유난히 '노력 강박증'에 사로잡힌 애들이 몇명 있다.

타인들에게는 독기에 가까운 노력과 결기로 세상을 살아갈 것을 요구하며, 단 한점의 도덕적 윤리적

흠결도 없는 자들만이 '사회비판'을 할 자격이 있으며,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은 오로지 '성공한 자들'

에게서만 나온다는 개똥 철학을 설파하는...

 

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하루 왠종일 지박령처럼 논게에 찰싹 들러붙어서 타인들의 삶을 평가질하는데

시간을 소비한다. 그들은 '개인의 노력' '패배자' '입진보'라는 키워드를 주로 사용하며, 이 단어들은

타인들의 삶을 깍아내리기 위한 수단으로 연동시키는 순환논리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안다...

강박증에 가까우리 만큼 똑같은 키워드들을 계속 순환적으로 강조하며, 왜 그토록 타인들의 삶을 깍아

내리려고 바둥바둥 애를 쓰는지.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그들 스스로 사로잡혀 있는 '노력 이데올로기'에

의한 강박적 억압을 해소하고자 하는 자기 본능적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논게에서의 꼰대질'

그것이 내면의 억압적 강박으로부터 일시적으로나마 벗어나는 방법인 것이다.

 

물론 이 글이 '노력 강박증'에 사로잡힌 논게의 몇몇 측은한 인생들을 겨냥하는 글만은 아니다.

세상 밖으로 나가보면 생각했던 것 보다 '노력 강박증'에 사로잡힌 청춘들이 많다는 것을 알수 있다.

물론 '노력 강박증'에 사로잡혀 있다고 한들, 그 강박증을 해소하는 방식이 모두 논게 지박령들과 같은

'꼰대질'을 통해서 해소하지는 않지만...

 

각설하고... 대체 '노력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불안정한 사회 경제적 기반에 발딛고 서있는 개개인들에게

어떤 정신적 강박과 스트레스를 강요하는지, 그리고 이런 강박에 사로잡히면 전반적인 가치관이 왜 보수

지향적이 되는지 설명해보겠다.

 

 

 

정신이상자가 되기를 권장하는 사회

유수연 - '스타강사' '독설여신'이라는 닉네임이 붙어있는 유명 영어학원 원장이며, TV특강을 통해서

인생 멘토링으로 유명세를 떨치기도 했던 여자다. 우물쭈물하는? 청춘들을 향해서 그녀는 거침없이

이렇게 독설을 날린다.

 

"3년 후에도 그렇게 살래?" "금수저를 물고 나오지 않은 이상 불평하지 말고, 세상을 고민할 시간에 필요한

스펙을 쌓기 위해 독기를 품고 노력해라" "니 앞에 초라하게 놓인 무능력한 현실을 시대탓과 사회탓으로 

소비하는 것은 인생을 방치한 패배자들의 남 탓일 뿐이다"

 

 

 

어디서 많이 봐 온 익숙한 문장 아닌가?

그렇다. 논게의 보수를 자처하는 몇몇 지박령들이 허구헌날 싸질러대는 문장들과 너무도 많이 닮아있다.

그러면 저 여자만 청춘들을 향해서 저런 독설을 퍼붙는가?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청춘들을

향해 미치라고 주문하고 있다.

 

 

 

 

 

10대부터 20대에 이르기까지 '공부'에 미치라고 주문하더니, 30대에게는 '다시 공부에 미쳐라'고 주문하고 있다.

이제 좀 쉴만할까 싶었더니 40대도 '다시 공부에 미쳐라'고 주문한다.

 

공부에 미쳐야 하고, 자기 계발에 미쳐야 하고, 창의력에 미쳐야 하고, 급기야 재테크. 내집마련. 펀드에 미쳐야

한단다. 신입사원도 미쳐야 하고, 심지어는 노년에는 창업에 미치란다. 미쳐야 이루고, 미쳐야 산다고 주문한다.

그러니까... 미치지 않고 평범하게 살면 루저 꼴을 면치 못한다는 말이고, 성공 가능성은 미쳐가는 정도는 비례한

다는 말인가?

 

 

 

 

그리고 또 한명의 멘토... 3억 5천만 원 전쟁'의 저자 이종룡

3억 5천만 원의 빚을 갚기 위해서 하루 2~3시간만 잠을 자고 신문배달, 목욕탕 청소 등 10여개의 알바를 뛰면서

극한의 생활을 했던 이종룡 씨. 그는 이런 사연으로 시사매거진 2580에 출연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었다.

 

모든 일상을 포기하고 생리적 수면 욕구는 각성제로 버티고, 하루 컵라면 세개로 살아가는 생활이 10년째 이루어

졌고, 그는 끝내 3억 5천만 원의 빚을 다 갚았다. 이종룡 씨의 삶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의 모범이자 희망이 되었

으며, 다소라도 여유를 부리려는 우리 자신을 채찍질하는 도구로 자리매김했다.

급기야 그는 자기 계발의 당당한 증인으로 TV특강에까지 출연하여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는 인물로 제시되었다.

 

 

 

그는 방송 프로그램에 나와 10여 년 동안 하루 2-3시간만 잠을 잔 채, 열 개의 알바를 하는 자신의 삶을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그러면서 강변하기를 사업에 실패하고, 빚에 허덕이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고도 했었다.

 

 

 

그리고 일년 후...

 

 

 

과연 이종룡 씨는 빚에 허덕이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을까?

2008년 빚을 다 갚고 난 이종룡 씨에게 남은 것은 재산 0 원과, 병든 몸이었다. 빚을 다 갚고나니 돈이 한푼도

없었기 때문에 또 다시 극한의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일년 후... 투병을 하다가 죽었다.

 

우리는 이종룡 씨의 극한의 삶을 돌이켜보며 한가지 사실을 확인할수 있다.

정상적인 가정 생활을 하며 평범한 삶을 살아서는 10년을 노력해도 허름한 내 집 한채도 가질 수 없다는 사실.

이종룡씨처럼 10년을 하루 두세시간만 자고, 컵라면만 먹으며, 하루 열아홉 시간 정도의 노동을 하며 살아야만

3억5천만 원이 모인다는 사실. 그리고 그렇게 살다가는 죽는다는 사실....

 

과연 이종룡씨와 같은 극단적인 비정상적 삶을 본받아야 할 귀감으로 띄우는 이 사회가 정상적인 사회인가?

아니다. 정상적인 사회라면 이종룡씨의 극단적인 생활이 소개되었을 때, 부채 문제, 빈곤 문제 등 다양한 각도

에서 사회적 이슈가 제기되고, 빚 문제에 대한 강박적 일중독을 앓고 있는 이종룡 씨에 대한 긴급 구제가 이뤄

졌어야 했다.

 

그러나 노력에 대한 강박과 광기에 휩싸여 있는 한국 사회에서는 이종룡 씨를 추켜세우며 사회적 귀감으로 만들

어 노력 이데올로기의 희생물로 쓰고자 했을 뿐, 정작 그의 삶이 행복한 삶인지에 대해서는 어떠한 관심 조차도

없었다.

 

 

 

  

빚을 다 갚았으니 행복했을까? 빚을 다 갚고나서 다시 0원에서 시작했던, 그리고 또 다시 극한의 비정상적인

삶을 지속해야만 했던 그의 삶은... 과연 우리가 귀감으로 삼아야 할 행복한 삶의 지표일 수 있었을까?

 

 

스탈린 시대의 노동 영웅, 그리고 자본주의 한국의 노력 영웅

스탈린 시대 탄광 노동자들의 6시간 기준 1인 평균 석탄 채굴량은 6.5톤 이었단다. 그러나 같은 시간 동안에 무려

102톤을 채굴한 노동자가 있었다. 14배가 넘는 양이다. 이후 계속 기록을 갱신하더니 175톤의 기록을 갱신하였고,

나중에는 227톤의 신기록을 보유하게 되었단다.

 

이사람은 단박에 노동영웅으로 떠오르며 귀감으로 선전되었고, 이후 스탈린 정부에서는 그 노동자의 이름을 딴

운동이 선동되었다. 이름하여 '스타하노프 운동'이다. 물론 이 기록은 조작이었다는 것이 후일 드러나게 되었지만,

스탈린 독재 정부하에서 뿐만 아니라, 비슷한 시기 대개의 독재 정부들이 노동력 착취의 일환으로 비슷한 맥락의

권위주의적 집체 운동들을 강제하였다.

 

북한에서도 천리마 운동, 새벽별 보기 운동 같은 것들이 대대적으로 펼쳐졌는데, 비슷한 시기 남한에서도 새마을

운동이 펼쳐졌던 것은 우연의 일치이기만 할까? 

 

예컨대 북한의 '천 삽 뜨고 하늘보기 운동' 같은 것들을 상상해보자. 상상만해도 이 얼마나 조악하고 유치하며

기괴스러운가. 그러나 수십년 전 독재 국가들에서 강제되었던 '노동영웅'과 자본주의 한국의 '노력 영웅' 이종룡

씨의 삶이 서로 다르다고 말 할수 있겠는가?

 

다만, 구소련이나 북한과도 같은 폐쇄적인 국가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멍청한 놈들은 이들 체제를 공산주의라

칭하지만 원래는 폐쇄적인 국가자본주의가 맞다) 국가 권력이 강압적 캠페인을 주도한다면, 한국 사회에서의

노력 이데올로기는 마치 상품 광고와도 같이, 자기 계발이라는 이름으로,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서 마치 자발적인

의지인것 처럼 진행된다.

 

 

 

 

우리는 얼마나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일까?

인간은 24시간 1년 열 두 달 내내 전력 질주할 수 없다. 기계조차도 쉬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명문대 진학을 위해 10대의 삶을 포기하고, 취업을 위해 20대의 삶을 포기하고, 결혼과 주택

구입을 위해 30대 삶을 포기하고, 노후와 자녀를 위해 40대의 삶을 포기해야 하며, 황혼에서 노력하라고 다그쳐

대는 온갖 자기 계발서들을 보면, 스탈린과 김일성도 혀를 내두를 지경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수없이 많은 '노력 이데올로기'들에 의해 강제된다.

그리하여 종국에는 하나의 내면화된 규범으로 작동하여 스스로를 강박하는 기준이 되어버린다.

더우기 세계적인 장기적 불황 국면이 종용하는 자신의 삶과 미래에 대한 불투명한 전망 속에서, 청춘들은 이러한

노력 이데올로기에 속절없이 굴복한다.

 

노력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규범적 기준에 자신을 비추고 끊임없이 자아비판을 하게된다.

이것은 마치 다이어트 강박증에 걸린 사람이 거식증에 걸려가는 과정과도 비슷하다.

 

도저히 정상인이라면 도달할 수 없는 신체 싸이즈를 목표로 설정해놓고 극단적이고 비상식적인 식단을 짠다.

그러나 식욕이 존재하는 동물인 이상 무엇인가를 먹어야 하고, 원하는 목표치의 체중에 도달하지 못하면 식욕에

굴복한 자신의 나태함을 끊임없이 자학한다. 결국 먹은걸 토해내고 급기야는 먹기를 거부한다.

철저하게 자기 파괴적이고 퇴행적인 과정을 거친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다.

 

과연 어디까지 노력해야 성공을 하거나 실패자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러나 그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열정' '도전' '젊음' 이라는 단어로 포장된 출구 없는 무한 경쟁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감정의 동물이다. 사회적 감정이라는 것이 또한 존재한다. 

때문에 끊임없이 누군가와 비교하고 비교 대상에 비해 성취가 낮은 자신을 끊임없이 스스로 감시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과정은 스트레스와 분노를 만들어낸다.

 

해소되지 않는 분노는 어딘가 해소할 수 있는 출구를 향하게 마련이다.

몇몇 논게에 들러붙은 자칭 보수들은, 타인들의 삶을 깍아 내리는 것을 통해서 자신의 삶에 대한 강박적 불안감의 

출구를 찾는다. '패배자들'에 대한 자의적 기준을 세워놓고 그들의 게으름과 나태함을 향해 마음껏 비웃는다.

 

'위너'와 '루저'로 갈라진 사회 집단에서 그 자신은 열심히 노력중인'위너'를 지향하는 인간상 쯤으로 설정한다.

그리고 타인들을 향해, 너희들은 그 나태함과 남탓으로 인하여 결국 루저가 될 것이라고 공격하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강박에 사로잡힌 자신의 불안정한 삶과 그로인해 불안에 떨고있는 스스로의 영혼을

비추는 거울일 뿐이다.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억누르는 노력 이데올로기의 강박을 해소하든 정작 중요한 것은, 현실을 '부정적'

으로 인식하지 않고서는 사회적 의제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이고, 현실에 순응하며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개인들의

노력만을 강조하는 삶의 태도로는 결국 그 자신의 불쌍한 삶도 고칠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남탓 사회탓 하는 '입진보들'을 입에 달고 살면서 타인들의 삶을 깍아내리는데 한치의 망설임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뒤집어보면 그건 결국 자신의 불확실한 미래와 삶에 대한 두려움에서 일종의 자기 방어 기제가 작동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불쌍한 인생들이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