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위를 떠도는 거북 섬, 유랑도에서 태어나 삼촌 첸 스톰 스타우트의 모험을 동경하는 호기심 많은 판다렌 리리, 드디어 신비한 예지력을 지닌 진주와 함께 유랑도를 벗어나 모험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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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지하철이 막 위로 올라가려는데, 못생긴 녹색 고블린이 나한테 달려들지 뭐야!" 리 리 스톰스타우트는 열 손가락을 구부려 양손을 얹고 가까이에 대고, 잔뜩 과장된 표정으로 으르렁거리는 고블린 흉내를 냈다. 그러고 언덕에 벌러덩 누워 있는 다른 어린 판다렌들의 관심을 끌어보려고 무섭게 다가갔다.

어린 판다렌 하나가 반대쪽으로 등을 돌려 눕더니 시끄럽게 코를 골았다. 입가에서 침이 흘러나와 볼에 난 하얀 털을 적셨다. 어떤 아이는 인고 있던 책 너머로 잠깐 고개를 들어, 검은 털로 둘러싸인 눈으로 리 리를 흘긋 보고는 다시 시선을 책으로 돌렸다. 또 다른 아이는 대놓고 하품을 했다. 리 리 스톰스타우트의 이야기가 들리는 거리에 있는 아기 판다렌들은 하나같이 따분하다는 표정이었다. 리 리의 오빠 스싸이마저도 아예 작정한듯 리 리를 무시한 채 풀줄기를 뜯어 매듭을 짓고 있었다.

"–난 고블린 가슴팍을 정통으로 걷어찼어. 그랬더니 놈이 객실 밖으로 슝 날아가서 벽에 처박혀서는, 콰쾅, 하고 터져 버렸다니까!"
누군가가 헛기침을 했다.

"그래, 알고 보니 물약이 폭발한 거였어." 리 리가 목소리를 높이며 말을 바꾸었다. "아무튼 진짜 어마어마했다고!"

"그래, 리 리 누나, 다 알아." 아기 판다렌 하나가 멍하니 손가락으로 땅에 소용돌이 무늬를 그리며 말했다. "수백 번도 더 들은 얘기잖아."

"첸 아저씨, 아저씨가 이야기 하나 해주세요. 네?" 다른 아기 판다렌이 졸랐다.

"내가?" 커다란 목련나무 가지 아래 널찍한 천을 펼쳐 놓고 앉아 도기 잔을 정리하던 첸이 고개를 들었다. 가지 사이로 오후의 햇살이 쏟아져 소풍 나온 판다렌들의 폭신한 털 위에 황금빛 반점을 그리며 내려앉았다. 날씨가 워낙 쾌청하고 따뜻해서 거의 모든 판다렌이 셴진 수의 거대한 등딱지 꼭대기로 올라와 햇볕을 쪼이며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맹금의 봉우리에서 드워프 네 명이랑 누가 술을 많이 마시나 시합했던 얘기 듣고 싶어요!"

"야, 내가 먼저 얘기하고 있었잖아!" 리 리가 짜증이 나서 끼어들었다. "아이언포지에 갔을 때 마그니 국왕을 만났는데–"

아기 판다렌이 어이없다는 듯 눈을 굴렸다. "마그니 국왕 얘기는 이제 그만 좀 해! 우린 첸 아저씨 얘기를 듣고 싶다고!"

리 리가 씩씩거리며 눈을 부릅뜨고 반박하려는데 첸이 먼저 말했다.




"얘들아, 리 리도 재미난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단다. 그런데 판도완, 네 말 중에 잘못된 게 하나 있구나." 그리고 '다들 알지?'라고 말하듯 한쪽 눈을 찡긋했다. "드워프 네 명이 아니라 다섯 명이었어." 아기 판다렌들은 웃음을 터뜨렸지만 리 리는 여전히 도끼눈을 뜨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지 못했는지, 첸은 말을 이었다. "술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내가 예의가 없었구나."

"오늘 맥주 맛이 별로라 미안하구려." 첸은 어른 판다렌들의 잔을 채워주며 사과했다. "이 거북 위에도 양조 재료가 좀 더 다양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맛만 좋은 걸요, 첸." 장로 한 명이 정중하게 잔을 받으며 말했다. "최고의 양조사를 다시 모시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쁜 일입니다. 모두들 당신을 그리워했어요."

"과찬의 말씀을." 첸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저씨, 어서요. 빨리 이야기를 들려 주세요!" 아기 판다렌이 외쳤다.

"조금만 기다리렴. 부모님들께 마실 것부터 대접해야 하지 않겠니? 그런 다음에 너희들 마실 차가 준비되면 이야기를 시작하마."

리 리가 끼어들었다. "난 오우거한테 잡아먹힐 뻔한 적도 있어.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다 아는 얘기잖아! 조용히 좀 해 줄래?" 다른 아기 판다렌이 소리쳤다. "첸 아저씨가 처음 듣는 이야기를 해 주신다잖아."

"쳇, 알았어! 계속 우리 삼촌을 귀찮게 하겠다 이거지?" 리 리는 단념했다. 혹시나 이야기할 기회를 넘겨주지 않을까 기대에 찬 눈빛으로 첸을 바라보았으나, 첸은 이미 언덕 한 편으로 옮겨 가 대화에 심취해 있었다. 리 리는 작전을 바꿨다. "그래, 차라리 너희가 이야기를 한번 해볼래? 왜, 있잖아, 산등성이에 올라 꽃 따러 다니다가 붓글씨 시간에 빵점 맞은 얘기. 난 그 얘기가 제일로 재밌던데!"

아기 판다렌들이 여기저기서 불평을 늘어놓았고, 곧 말다툼으로 번질 기세였다.

다행히 첸이 적시에 끼어들어 말했다. "차 마실 사람?"

"저요, 저요!" 외치는 소리가 줄을 이었다. 첸의 말 한 마디에 모두들 자신을 외면했다고 느낀 리 리는 소풍 나온 무리에서 벗어나 산비탈 아래로 향했다. 그리고 판다렌들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자 한 차례 한숨을 내쉬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뭉게구름이 유유히 흘러가는 사이 태양이 고개를 내밀었다 감추었다를 반복하며 사방을 빛으로 가득 채웠다.

리 리는 발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화풀이로 길가의 자갈을 걷어차고, 내리막길을 데굴데굴 굴러가는 자갈을 따라 언덕을 내려갔다. 강인한 보와 함께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온 후, 리 리의 삶은 날이 갈수록 따분해지기만 했다. 아버지 촌 포는 딸이 무사히 돌아온 것에 안도하면서도 무섭게 화를 냈고, 첸이 보의 최후를 상세히 설명해 주자 그런 감정의 진폭은 더욱 커졌다.

보를 떠올릴 때마다 리 리의 마음은 무거워졌다. 첸은 보의 죽음이 리 리의 탓이 아니라고 몇 번이나 위로했고, 리 리도 머리로는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냉혹하고도 차분한 목소리가 끊임없이 속삭였다. 리 리가 셴진 수를 떠나겠다고 결심하지만 않았어도 보는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죄책감을 뒤로 하고 현실로 돌아온 리 리는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이 대도서관 쪽으로 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도서관이 자리잡은 우아한 사원을 바라보고 있자니 기운이 났다. 그곳은 늘 책이나 편지에 파묻혀 만사를 잊을 수 있는 리 리의 은신처였고, 지금 리 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그런 시간이었다. 리 리는 발걸음을 재촉해 열려 있는 정문을 들어섰다.

도서관 안에서 나는 익숙한 잉크와 양피지 냄새가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리 리는 책꽂이에서 두꺼운 지도책 한 권과 모서리가 접히고 꾸깃꾸깃한 편지 한 묶음을 꺼내 푹신한 의자에 털썩 앉았다. 두루마리를 근처 책상 위에 올려놓은 다음, 책을 무릎 위에 얹고 손에 잡히는 대로 펼쳤다.

책장에 펼쳐진 것은 고상한 녹색과 갈색 잉크로 그린 '슬픔의 늪'이라는 지역의 고대 지도였다. 오래 전에 이 지도와 다른 지도들을 집에 있는 일기장에 공들여 베낀 적이 있었기에 외울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리 리는 두루마리를 올려둔 책상으로 몸을 숙이고 원하는 내용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졌다.




첸이 쓴 편지에는, 슬픔의 늪 남쪽 지역, 지금은 저주받은 땅이라 불리는 곳을 탐험할 때 겪은 일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세계를 갈라놓은 균열에서 사악한 마법이 스며나와 무성하던 초목을 말라 죽게 하고 황량한 붉은 토양만을 남겼다고 했다. 메디브라는 엄청난 힘의 마법사가 그 균열을 일으켰으며 그 배후에는 다른 세계의 오크가 개입했다는 설명도 있었다. 하지만 이 일에 대해서 그 이상의 상세한 내용은 없었고, 도서관에도 이 편지 외에 저주받은 땅이나 메디브를 언급한 자료는 없었다. 그 마법사는 셴진 수에서 태어난 리 리의 동족이 외부 세계를 탐험한다는 전통을 잃어버린 후에 태어난 것이 분명했다. 리 리는 지금 슬픔의 늪을 지도로 그린다면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첸의 편지는 몇 년 전에 작성된 것이고, 그가 돌아오면서 바깥 세상에 대한 소식은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리 리는 내키지 않는 손길로 두루마리를 다시 넘겼지만 더 이상 눈길을 잡아끄는 내용은 없었다. 편지 내용은 예전과 변함이 없었고 첸이 한때 목격했던 장면은 그대로 굳어져 잉크 자국만 바래져 가고 있었다. 리 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 단절된 유랑도의 삶 너머 바깥 세상은 판다렌과 관계 없이 지금도 바뀌고 있다는 것을.

책과 편지를 제자리에 돌려놓는 리 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마치 한참 배가 고프던 와중에 푸짐한 잔칫상에 앉았는데, 한 입 먹자마자 누가 상을 싹 치워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세상은 그 어떤 지도나 글로 표현하는 것보다 훨씬 넓고 아름다운데, 리 리는 그 세상이라는 수박의 겉만 핥아본 격이었다. 셴진 수 위에서 리 리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

"오늘 저녁은 특별식입니다! 닭고기 육수로 끓인 시금치 당근 수프, 양념을 친 생선찜, 그리고 밥은 기본!" 촌 포가 들뜬 목소리로 식탁에 앉은 리 리, 스싸이, 첸에게 말했다. "새롭게 시도한 수프니까 맛이 어떤지 평가해 주세요."

"말만 들어도 군침이 도는걸. 동생, 초대해 줘서 고마워." 첸이 대답했다.

촌 포는 자신 있게 차려낸 저녁 식탁을 뿌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의자에 앉았다. "다들 오늘 재미있었니? 날씨가 끝내줬는데. 나도 따라갔으면 좋았을 걸."

"아빤 워낙 바쁘잖아요." 스싸이가 생선 요리를 접시에 담으며 대답했다. "신나는 하루이긴 했어요!"

"나쁘지 않았어요." 리 리가 어깨를 으쓱했다.

스싸이가 놀리기 시작했다. "넌 아무도 네 이야기에 관심 없어서 삐쳤잖아. 첸 삼촌 얘기가 훨씬 더 재밌거든. 그렇죠, 삼촌?"

"음, 그게 말이다..." 수프를 뜨던 첸이 더듬거렸다. 리 리는 동생을 노려보며 밥을 잔뜩 떠서 입에 밀어 넣었다.

"첸 삼촌이 위대한 야수조련사 렉사르를 죽일 뻔한 이야기를 해 주셨어요!" 스싸이는 첸과 리 리가 거북해하는 것은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뭐라고?" 촌 포가 눈썹을 이마 끝까지 추켜올리며 말했다. "형님, 그런 얘기는 애들한테 들려주기엔 너무 잔인하잖아요?"

"어... 그게 말이다, 죽일 뻔했다는 건 좀 과장된 거야." 첸은 뒤통수를 긁적였다. "사실 핵심은, 그놈이 내 맥주를 조금 마셨는데 워낙 맛이 강하니까 내가 자기를 죽이려 했다고 뒤집어 씌웠다는 거지! 어때? 듣고 보니... 웃기지 않아?" 첸이 어색하게 웃었다.

촌 포는 여전히 냉랭한 표정이었다.

"그게 끝이 아니잖아요!" 스싸이가 우겼다. "둘이서 테라모어로 가서 프라우드무어 제독이랑 싸웠다고 하셨잖아요? 그리고–"

"그만해라!" 촌 포가 가로막았다. 그러고는 화난 눈빛으로 형을 쳐다봤다. "아이들한테 모범을 보여야지 이게 뭡니까, 형님? 리 리만 해도 형님 편지 때문에 애가 이상해졌잖아요!"

"아빠, 전 멀쩡해요." 리 리가 우물우물 말했다. "그리고 제 얘기를 하실 거면 다른 데서 하시든가. 다 들린다고요."

"형님이 하는 그런 얘기가 심각한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다고요."

"여기요. 저 좀 봐주실래요? 아, 참. 이럴 때 전 투명 마법이라도 걸린 듯 아빠 눈에 안 보이죠!"

식탁에 혼자 남은 스싸이는 수프에서 당근 조각을 건져 천천히 씹었다. 그리고 부엌을 한 번, 계단을 한 번 쳐다본 다음 꿀떡 삼켰다.

"판다엔하테 등따지가 어디 이냐?" 스싸이가 입 안에 음식을 가득 문 채 웅얼거렸다.
"바보, 그게 은유법이라는 거야."

"스싸이, 음식을 삼키고 말해야지! 리 리는 동생한테 그런 말 쓰지 말고!"

리 리는 아버지와 동생을 번갈아 쳐다봤다. "진짜 믿을 수가 없네요. 바깥 세상에 누가 사는지 궁금하지도 않으세요? 어떤 도시에 사는지 알고 싶지 않냐고요?"




"난 안 궁금한데. 너도 오우거한테 잡아먹힐 뻔 했다며." 스싸이가 음식을 꿀떡 삼키며 말했다. "삼촌 얘기가 재미있긴 하지만–"

"이런, 생선이 정말 맛있구나. 포야, 요리 만드느라 수고했어!" 첸이 어색하게 큰소리로 말했다.

"'오우거한테 잡아먹힐 뻔 했다고'?" 촌 포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양손으로 식탁을 짚고 몸을 숙여 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동생 겁주려고 그런 이야기를 지어낸 거니?"


"아니에요!" 리 리가 분해서 소리를 질렀다. "지어낸 게 아니에요! 제 말은... 그러니까... 오우거한테 잡힌 적이 있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잡아먹힐 뻔했다는 건 약간 과장되기는 했지만–"

"듣기 싫다!" 촌 포가 고함을 쳤다.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아무 일도 없었다더니 지금 와서 그렇게 쉽게 오우거한테 잡혔다는 말이 나오냐! 너 지금도 그 말도 안 되는 바깥 세상 이야기에 푹 빠져 있는 거니? 보가 죽었는데도 아무것도 깨달은 게 없어?"

촌 포의 말에 모두가, 스싸이까지도 얼어붙은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리 리는 고개를 떨구고 접시만 응시했다. 죄책감이라는 칼날이 심장을 찌르는 듯하여 눈이 제대로 떠지지 않았다.

"얘야, 그건 리 리 잘못이 아니었어." 첸이 침착하게 말했다.

"물론 아니죠." 촌 포가 리 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수긍했다. "하지만 저 애가 집을 나가지만 않았어도 그런 일은 없었을 겁니다."

리 리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자신도 지금까지 그 생각을 대체 몇 번이나 했던가? 수치심과 분노에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절대 안 울 거야. 절대, 절대...

"리 리를 찾으라고 보를 보낸 건 너였잖니."

"형님,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첸은 한숨을 쉬었다. "만약에 그랬다면 어땠을까, 하면서 후회하는 건 시간 낭비야. 너나 리 리나 미래의 일을 예측할 수는 없었던 것 뿐이다."

"과연 그럴까요?" 촌 포는 분노의 화살을 형에게 돌렸다. "여기 셴진 수에 얌전히 있었다면 그런 일이 벌어졌겠어요? 우리 고향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그래?"이번에는 첸이 단호하게 가로막았다. "시우 리한테도 그랬던가?"

리 리와 스싸이의 어머니 이름이 나오자 식탁 분위기는 더더욱 어색해졌다. 촌 포는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세차게 저었다

"게다가 말이야." 첸은 가차 없이 말을 이었다. "완요도 오랫동안 행방불명이잖아. 살아 있을 확률은 거의 없어."

"그래서요?" 촌 포가 고개를 들고 첸을 똑바로 바라보며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고기 잡으러 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배가 있다는 거야. 완요나... 어... 제수씨가 탔던 배처럼. 그렇게 사라진 경우가 한둘이었니? 얘야, 그렇게 안전하기만 한 곳은 없어. 누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촌 포는 천천히,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화난 표정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아빠." 리 리가 가만히 말해 보았다. "나가서 세상을 보고 싶어요. 조심할–"
"그 따위 생각은 꿈도 꾸지 말아!" 촌 포가 주먹으로 식탁을 내리치자 도자기 접시들이 덜그럭거렸다. "세상은 위험천만한 곳이다. 방금 네가 그렇게 존경하는 첸 삼촌께서 말씀해 주신 거 못 들었니? 넌 아직 어린애야. 너도 보처럼 되고 싶어? 아니면 너희 엄마처럼 될래?"

"그게 애한테 할 소리야!" 첸이 매섭게 질책했지만 이미 리 리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으며 뛰쳐나간 뒤였다. 곧이어 이층에서 방문을 쾅 닫는 소리가 들렸다.

첸은 식탁 맞은편의 촌 포를 묵묵히 응시했다. 촌 포는 당당하게 팔짱을 끼고 앉은 자세였다. 꾹 다문 입가는 해볼 테면 해보라는 기세였다.

"사랑하는 동생아, 나랑 얘기 좀 할까?" 첸은 최대한 정중한 목소리로, 부엌 한 켠으로 가자고 손짓했다.

"얼마든지." 촌 포는 험악한 태도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고 첸이 그 뒤를 바짝 따라갔다.

식탁에 혼자 남은 스싸이는 수프에서 당근 조각을 건져 천천히 씹었다. 그리고 부엌을 한 번, 계단을 한 번 쳐다본 다음 꿀떡 삼켰다.

"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 스싸이는 혼자 종알거리고는 접시에 음식을 더 퍼담았다.

***

첸은 촌 포를 문 밖으로 떠밀다시피 해 집 뒤편 현관으로 내몰았다, "리 리한테 너무하잖아? 여행하고 싶어 하는 게 뭐 그리 나쁘다고 애한테 그런 심한 소리를 퍼부어!"

"위험하다니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촌 포가 대답했다. "형이 뭐라 하든 여기 있는 것보다는 위험하잖아! 시우 리와 완요는 사고일 수도 있지만, 보는 살해당한 게 맞잖아! 리 리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거야?"

"바깥 세상에 나가면 다 그렇게 된다는 식으로 말하지 마! 그 애가 알고 그랬던 것도 아니잖아! 놈들은 판다리아의 진주인지 뭔지를 찾고 있었고 완요가 그걸 찾아냈다고 생각했던 거야. 같은 판다렌이라는 이유만으로 리 리가 행방을 알 거라고 생각해 공격한 거라고! 오크는 날 쫓고 있었던 건데 하필이면 보와 리 리가 잡힌 거지. 내가 조금만 더 빨리 갔더라면..."

"형 말대로라면 적들은 아무 판다렌이나 다 잡아들인다는 거 아냐." 실외등 아래를 서성거리는 촌 포의 얼굴은 주황색 불빛에 물들어 더욱 화가 나 보였다. "리 리에게 가장 안전한 곳은 바로 여기라고!"

첸은 고개를 저었다.

"그 애가 원하지 않는데 억지로 잡아 둘 순 없어. 이미 한 번 겪어 봤잖아. 자식을 평생 끼고 살 순 없어. 그래 봤자 네 의도와 상관없이 반발심만 키울 뿐이야."

"내 자식을 형이 나보다 더 잘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촌 포가 비아냥거렸다.

"그게 아니야, 촌 포. 난 그저 리 리가 어떤 기분인지 설명하려는 것뿐이라고. 내가 그 나이 때 우리 부모님께서 하신 말씀이 귀에나 들어온 줄 알아? 도대체 무슨 근거로 네가 그 애 마음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선택은 그 애가 하는 거라고."

"그래서 잘못된 선택을 하겠지. 위험한 상황에 무턱대고 뛰어들고, 가족도 등지고, 자기 할 일은 팽개치는 그런 선택..." 촌 포는 리 리가 저지를 잘못을 손가락으로 하나씩 꼽기 시작했다. "그러다 잊을 만하면 편지 한 통 보내 살아 있다는 소식이나 전할 거고–

첸은 당혹감에 얼굴을 찌푸렸다.

"결혼해서 화목한 가정을 꾸릴 생각은 아예 안 할 테고–"

"포, 그 애가 그렇게 될지 어떻게 알아?" 첸이 영문을 몰라 물었다.

촌 포는 형의 말을 못 들은 것 같았다.
"자기 동생 결혼식에 코빼기도 비치지 않을 테고–"

"스싸이가 누구랑 결혼하는데?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첸은 말을 끝맺지 못하고 말꼬리를 흐렸다. 깨달은 바가 있어서였다. 첸은 현관 울타리 너머 깔린 어둠을 주시했다. 머릿속에 갖가지 생각이 밀려들어오는 바람에 갑자기 정신이 멍해졌다. 촌 포는 형은 아랑곳하지 않고 리 리가 앞으로 저지를 문제를 열거하고 있었다.

"나 때문이구나." 첸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렇지, 촌 포?"

촌 포는 갑자기 입을 다물고 제자리에 얼어붙은 채 형의 눈길을 피했다.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두었던 원망을 쏟아낸 동생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는 동안 시간은 고통스럽게 흘렀다.

"이 얘기는 여기서 끝내."

촌 포는 발을 쿵쿵 구르며 집 안으로 들어가 문을 쾅 하고 닫았다..

***

리 리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리저리 뒤척였지만 아버지의 가시 돋친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결국 하늘이 밝아오며 동틀녘이 되었고, 리 리는 포기하고 침대에서 나와 옷을 입었다.

옷장 위에는 예전에 보가 균형 잡기와 전투 태세를 연마할 때 물을 채워 지팡이 끝에 매달아 놓던 것과 비슷한 모양의 점토 단지가 있었다. 리 리는 단지를 들고 손에서 뒤집어 그 익숙한 무게를 느껴본 다음 허리띠 안에 쑤셔 넣고, 몰래 집을 빠져나갔다.

이 시간의 셴진 수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발밑에서 이슬방울이 후두둑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어스레한 빛 아래 나뭇가지 사이에 걸친 거미줄이 섬세하게 반짝이는 레이스처럼 보였다. 리 리는 포석 틈을 비집고 피어난 형형색색의 꽃을 따서 서투른 솜씨로 꽃다발 두 개를 만들었다."




장벽과 사자 수호자가 지키고 있는 길목 너머로 장대한 지팡이의 숲이 펼쳐졌다. 판다렌이 저 아름다운 숲 속으로 들어가려면 먼저 단 한 번의 전투로 수호자를 꺾어야 했고, 리 리는 몇 년 전에 이미 승리한 적이 있었다. 수호자가 머리를 숙이자 리 리도 답례로 정중하게 절을 했고, 수호자는 한쪽으로 비켜서 길을 터주었다. 오랜만에 찾는 숲이지만 예전과 마찬가지로 깨끗했다. 몇몇 정원사들이 정성스럽게 돌보는 덕분이었다. 잠시 후 동이 트면 정원사들이 몰려와 밤새 제단 곳곳에 흐트러진 잔해를 치우느라 여념이 없겠지만 지금은 리 리 혼자였고, 그 사실에 안도감이 느껴졌다.

리 리와 스싸이의 어머니 시우 리는 남매가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낚시를 하다가 물에 빠져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많지 않아 슬픔을 느낄 일이 거의 없었지만, 가끔씩은 어머니가 없다는 사실이 심장이 저미는 아픔으로 다가왔다. 리 리는 스톰스타우트 가문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꽃다발 하나를 올려놓았다.

"엄마, 보고 싶어요." 리 리의 숨결이 아침 공기에 스며들었다. "아빠는 이해를 못해요. 앞으로도 그렇겠죠. 첸 삼촌도 아빠 화를 돋우지 않으려고만 하고요." 숲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리 리는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렸다. "엄마가 살아 있었다면 절 이해해 줬겠죠? 전 평생 여기서 살 순 없어요. 그럴 수 없다고요."

리 리는 잔디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양팔로 다리를 안았다. 무릎 사이에 고개를 파묻고 언덕 꼭대기의 커다란 나무에서 아침 노래를 지저귀는 새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한참 명상에 잠겨 있다 보니 다리가 뻣뻣해졌다. 리 리는 벌떡 일어나 어머니께 마지막 인사를 했고, 줄지어 늘어선 기념비를 지나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보 가문의 제단은 언덕 위 널따랗게 펼쳐진 나무 그늘 아래 있었다. 아버지의 말이 아플 정도로 생생하게 떠오르면서 뭉클한 무언가가 목구멍으로 치올랐다.

'보가 죽었는데도 아무것도 깨달은 게 없어?'

리 리는 제단 앞에 점토 단지를 올려놓고 남은 꽃다발을 그 안에 담았다. 그리고 무릎을 꿇었다.
"보, 보가 다시 살아날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거야. 아니, 처음부터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았을 거야. 그 흉악한 나가와 오크가 절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피신했을 거라고."

"아니, 애초에 집을 떠나지도 않았겠지."

그 사실을 인정한 순간 리 리의 뺨에 눈물이 흘러내려 털을 촉촉히 적셨다.
"난 떠나야만 했어. 여기 있으면 미쳐버릴 것 같아. 내가 못돼먹은 거겠지. 아빠도 그렇게 생각하시니까. 하지만 바깥 세상이 아무리 위험해도 여기서 평생을 썩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해. 너에 대한 기억을 하찮게 생각하는 건 아니야, 보. 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싶을 뿐이야. 정말 미안해." 목이 메어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아무에게도 상처를 줄 생각은 없었어." 리 리는 어머니의 제단에서 한 것처럼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망자를 위한 기도를 낭송했다.

"평화롭게 잠들기를 바랄게." 기도를 마친 리 리는 일어나 장밋빛 황금색으로 물든 새벽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동쪽 지평선에 주황빛 태양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옷에 묻은 흙을 털며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자 마음이 아팠지만 집에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아직 이른 시간이지만 첸 삼촌은 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작은 오두막의 문을 네 번째 두드리자 첸이 나왔다.

"리 리?"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어서 들어오렴! 일단 아침부터 먹자꾸나."

오두막 안으로 들어온 리 리는 부엌 식탁에 자리를 잡았고, 첸은 분주하게 아침을 준비했다.

"첸 삼촌, 아침부터 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귀찮기는! 전혀 아니야." 찬장 문 뒤에서 말하는지라 첸의 목소리는 들릴락 말락 했다. "최신 양조법 연구를 시작할까 하던 참이야. 여긴 재료가 다양하지 않아서 아쉽지만, 결과는 두고 봐야지."

첸이 화로에서 죽을 끓이는 동안 리 리는 아무 말 없이 앉아 멍하니 옷소매만 만지작거렸다.

"어젯밤 일 때문에 아직 마음이 안 좋구나?" 첸이 긴 작대기로 죽을 저으며 물었다.

"전 정말로 보가 다치는 걸 원치 않았어요." 리 리가 식탁에 시선을 고정한 채 중얼거렸다.

"그래, 안다, 리 리. 아빠도 알고 있을 거야. 다만..."

"아빤 바보예요." 리 리가 불쑥 말했다.

"... 고집이 세서 그래." 첸은 지난 밤 현관에서의 대화가 떠올라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아빠를 화나게 하고 싶진 않아요." 리 리가 말했다. 첸은 리 리 앞에 죽 한 그릇을 놓고 식탁 반대편에 앉았다. "그렇지만 여기 있으면 비참하다는 기분이 들어요."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인생은 모험이잖아요! 아니, 모험이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제 삶은 그렇지가 않아요."리 리는 잠깐 주저하다가 숟가락을 죽그릇에 찔러넣었다. "여기에서는 그렇지가 않다고요."

첸은 리 리의 어깨를 토닥였다. "괜찮아, 리 리."

"첸 삼촌, 저랑 같이 가요."

"뭐라고?"

"언젠가 같이 모험을 떠나자고 얘기했던 거 기억하시죠? 지금 가면 돼요! 삼촌과 같이 간다면 안전하잖아요. 그 정도는 아빠도 알 거라고요. 같이 세상을 보러 가요!"

첸은 입을 벌렸으나 말을 하지 않고 망설였다. 리 리는 간절한 눈빛으로 삼촌의 얼굴을 살폈지만, 잠시 후 삼촌에게서 원하는 답을 듣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삼촌도 아빠와 같은 생각이신 거죠?"

"조카야, 그게 아니란다." 첸이 말했다. "너나 너희 아빠 둘 다 일리가 있어. 그런데 난 말이다..." 첸은 소박한 집안을 둘러보았다. 화로 위에 주렁주렁 걸린 냄비, 그릇과 두루마리와 장식품을 잔뜩 얹은 선반들, 안락한 가구... 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난 여기 있는 게 행복해. 평생 돌아다니느라 내 집이란 걸 가져 본 적이 없거든. 이건 새로운 경험이야. 지금 이 생활이 나한테는 모험이란 거지."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리 리는 죽을 한 모금 삼키고는 반쯤 비운 그릇을 밀쳐버렸다. 유일하게 자신을 이해해 주었던 사람인데 모험을 포기하다니, 배신감마저 들었다.

"리 리, 넌 아직 어려서 세상을 보는 관점이 나랑은 많이 다를 게다–"

"으, 점점 아빠랑 똑같은 소릴 하시네요. 위대한 모험가 첸 스톰스타우트가 언제부터 이렇게 시시해졌죠?" 마지막은 비난 같았다.

"모든 건 변하기 마련이니까." 첸의 태도는 너무나 침착하고 차분해서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여행은 할 만큼 했다. 이제 뭔가 다른 걸 해 봐야지."

"전 아직 멀었어요." 리 리는 맞받아쳤다. "전 절대 삼촌과 아빠 말대로 살지 않을 거예요! 여기서 그냥 나이나 먹고 할망구가 되어선 하루 종일 차나 끓이고 날씨 얘기나 하라고요? 제 삶을 그런 식으로 낭비하고 싶지 않아요!"

"리 리, 그 정도는 아니란 거 알잖니."

"듣고 싶지 않아요. 삼촌도 아빠 편만 들잖아요!" 리 리는 튀어 오르듯 일어서더니 쏜살같이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첸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턱을 괴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스톰스타우트 집안은 하여간... 고집불통이지."

***

철퍽. 돌이 수면을 때리자 바닷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철퍽. 철퍽. 철퍽. 돌을 몇 개 더 던졌지만 화가 풀리지 않았다. 리 리는 체념하고 씩씩거리며 주저앉았다.

이곳은 셴진 수에서 리 리가 즐겨 찾는 장소 중 하나였다. 거북 등딱지 앞쪽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다리를 늘어뜨리면 그 아래로 셴진 수의 널따란 목이 물 속에 잠겨 있는 것이 보이고, 저 멀리로는 파란색과 회색 수평선에서 바다와 하늘이 만나며 어울렸다. 옛날 옛적에는, 유명한 여행가 리우 랑이 셴진 수의 등에 거주지를 마련하여 용감무쌍한 판다렌들과 함께 아제로스 구석구석으로 모험과 지식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하지만 그 호기심 많던 판다렌들도 점차 현실에 안주해 버렸고, 그때의 기억은 역사책의 기록으로만 남았다.




"정말 마음에 안 들어." 리 리가 입을 열었다. "보와 내가 위험에 처하기 전까지는 괜찮은 여행이었어. 이게 옳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단 말이야. 여기 처박혀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고. 아, 미안. 셴진 수 너한텐 아무 유감 없어." 리 리는 거북 등딱지를 위로하듯 토닥거렸다. "하지만 저 너머에는 보고 배울 게 엄청 많다고!

스톰윈드와 아이언포지만 해도 그래. 이 세상의 모든 지도와 편지를 다 본다고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거야. 마그니 국왕께서 정말 친절하게 대해 주셨는데! 친히 거처도 구경시켜 주셨지. 보답으로 나도 뭔가 보여 드리고 싶은데 그럴 만한 게 없잖아. 첸 삼촌은 여기에 머무르겠다고 하셨어. 마음대로 하시라지. 셴진 수, 미안한데 난 널 좋아하긴 하지만 내가 살 곳이 여기라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어. 과연 내가 평생 살고 싶은 장소가 있기는 한 걸까?"

답을 바라고 던진 질문이 아니었기에, 거대한 거북이 대답이라도 하려는 듯 뒤척이며 바다에 물거품을 일으키자 리 리는 깜짝 놀랐다. 셴진 수가 움직인 것이 정말로 의사 소통을 하려는 의도였는지 잠시 궁금했지만, 곧 우연의 일치에 불과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너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리 리는 한숨을 쉬었다. "적어도 우리 가족보다는 도움이 됐을 텐데." 낙담한 리 리는 고개를 떨구고 무릎에 손을 포갰다.

그때 바닥이 격렬하게 흔들리는 바람에 리 리는 옆으로 넘어져 어깨를 찧었다. 깜짝 놀란 리 리는 똑바로 앉으려 했지만 거대한 거북이 또 다시 몸을 흔들었고, 이번에는 뒤로 자빠져야 했다. 쿵쿵 뛰는 심장을 부여안고 바닥에 바싹 엎드렸지만, 셴진 수는 폭풍을 만난 배처럼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등딱지 가장자리로 내던져진 리 리는 손에 잡히는 대로 붙들고 버텨보려고 애썼다. 발 아래에서 바닷물이 서서히 갈라지더니 셴진 수의 거대한 목 양쪽으로 폭포처럼 떨어졌다. 거북이 머리를 들어올렸다.

리 리는 거대한 거북이 울타리를 뛰어넘으려는 소처럼 자세를 가다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거북의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들렸다기보다는 고막을 온통 진동시켰다. 그러더니 셴진 수는 온몸의 힘을 모아... 기침을 했다!

리 리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거대한 거북은 뱃고동처럼 깊고 낮은 소리를 냈고, 갑작스런 움직임 때문에 리 리는 또 한 번 등딱지 위로 내팽개쳐졌다. 이번에는 머리를 호되게 부딪히는 바람에 눈앞에 별이 보였다. 리 리는 머리를 감싸 쥐고 겨우 몸을 굴려 등딱지 가장자리에서 멀어졌다. 흔들림이 차차 줄어들더니 잔잔한 진동 정도로 가라앉았다가 사라졌다. 다시 셴진 수가 평정을 찾은 모양이었다.

리 리는 또 바닥이 흔들릴까 봐 조심하며 팔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한 손으로 머리의 아픈 부위를 눌러 보았다. 상당히 욱신거리는 것이 오늘 밤쯤에는 혹이 생길 게 분명했다. 리 리는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거북이 왜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했는지 궁금해졌다. 셴진 수가 어쩌다가 고래라도 집어삼킨 걸까?

리 리는 조심조심 머리를 문지르며 바다 쪽을 바라보았다. 셴진 수 주변에 온통 하얀 거품을 머금은 소용돌이가 일고 있는 것을 보니 적어도 이 모든 일이 상상의 산물은 아니었다. 여전히 눈앞이 어질어질했지만 리 리는 천천히 일어섰다.

리 리는 눈을 깜박거렸다. 잘못 본 걸까? 멀리 바다 위로 주변 바다 빛깔과 구분되는 하얀색의 무언가가 보였다. 파도 거품이라기엔 너무 선명했고, 그보다는 작은 낚싯배의 돛 같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보니 확실히 배였다. 파도를 타고 넘실대는 뱃머리에는 판다렌 문양이 뚜렷했다.

배가 서서히 다가왔다. 돛대가 부러져 한쪽 돛이 아무런 구실도 못하고 질질 끌리는 바람에 선장은 있는 힘을 다해 노를 저어 배를 몰고 있었다. 육지가 몇십 미터밖에 남지 않자 선장은 자세를 바로잡고 낡아빠진 밀짚모자를 눌러썼다. 그리고 이편의 리 리를 향해 마구 손을 저었다.

"이봐! 안녕!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이렇게 햇살이 눈부신 날을 마지막으로 본 게 대체 언제였는지 몰라. 하늘은 또 왜 이리 파란 거야! 냄새도 너무나 상쾌한데. 생선 비린내랑은 차원이 달라!"

알 수 없는 소리에 리 리는 할 말을 잃었다. 이마를 찌푸리고 당혹스러운 채 가만히 보고 있는 동안 낚싯배는 미끄러지듯 다가와 부드럽게 해안에 상륙했다. 어부는 뱃전 위로 폴짝 뛰어올라 다시 한 번 손을 흔들고는 활짝 웃었다. 리 리는 너무 놀라 입이 떡 벌어졌다. 망치로 두들기는 것 같던 머리의 통증도 잠시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오랜 세월 종적을 감추었던 어부 완요가 돌아온 것이다.

***

"그럼 지금까지 쭉 셴진 수 안에 있었단 말인가?"

"네!" 완요가 명랑하게 대답했다. "거북이 절 삼켰는데, 굳이 밖으로 나갈 이유가 없더라고요."

리 리는 문에 귀를 바짝 갖다 댔다. 하지만 너무 세게 밀어붙였는지 머리가 다시 욱신거리는 바람에 움찔했고, 어쩔 수 없이 조금 물러났다. 이렇게 되면 장로들이 완요와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었지만 무리해서 엿들었다가는 지독한 두통에 시달릴 게 뻔했다. 나무 문틈 사이로 누군가 혀를 차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늙고 고루한 판다렌이 머리를 저으며 쯧쯧거리는 모습이 눈앞에 떠오르는 바람에 리 리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꾹 참았다.

"어찌 됐든 문제는-" 리 리는 메이 할머니의 목소리라는 걸 금세 알아차렸다. "자네가 가지고 온 이 물건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전 모르겠어요." 완요가 어깨를 으쓱하는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뭐 수정 구슬 같은 거겠죠? 어디 가면 물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을지 항상 알려 줬으니까요. 그러다가 결국 거북 뱃속에 들어가게 됐지만 말이에요!"

누군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만 콧방귀와 낄낄 웃는 소리가 뒤따르는 것으로 보아 무례한 말이었음이 분명했다.

"수정 구슬 같이 생기지도 않았고, 내가 봤던 마법 유물하고도 전혀 달라." 목소리의 주인공은 촌 포였다. 리 리는 약간 긴장했다. 심장이 갑자기 쿵쿵거렸다. 회의를 엿듣는 것을 아버지에게 들키면 불같이 화를 낼 것이 뻔했다.

이어서 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 의견을 묻는다면, 엄청나게 큰 진주 같군." 날이 서 있는 말투로 짐작하건대, 첸은 한때 나가 세이렌 자하라가 완요가 가지고 있다고 확신했던 판다리아의 진주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럼 자하라의 말이 맞았다는 건가?

"멀록한테 얻었다면 믿으시겠어요?" 완요가 다시 웃었다. "만약에 진주라면 마법이 깃든 진주가 틀림없어요. 낛싯감이 많은 곳을 알려 주는 진주는 머리털 나고 처음 보니까요." 완요는 잠시 말을 끊었다. "게다가 제 손에 들어오자마자 그 정신 나간 여자 나가가 나타났으니, 분명히 특별한 물건이겠죠?"

리 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완요는 자하라를 말하는 게 확실했다.


"정신 나간 여자 나가라고?" 촌 포가 물었다. "리 리가 그 비슷한 얘기를 한 적이 있는데... 좀 더 자세히 말해 주겠어?"

"밤낚시를 하러 갔는데, 제 그물에 멀록이 걸렸어요. 죽기 직전이었는데, 그 진주를 저한테 주더라고요. 그런데 진주를 받자마자 물에서 나가가 나타나더니 번개를 내리쳐서 제 돛대를 부러뜨렸어요! 더 얼쩡댔다간 죽겠다 싶던 찰나에, 바다에 사는 제 친구, 커다란 물고기가 도와줘서 도망칠 수 있었죠. 아마도 몇 년 전에 제가 놔주었던 작은 물고기들이 자라서 은혜를 갚은 거겠죠."

"셴진 수 뱃속엔 그때 들어간 건가?" 첸의 목소리였다.

"맞아요. 사실 물고기들이 절 어디로 데려가는지 신경 쓰지도 않았어요. 그 비늘투성이 마녀만 따돌릴 수 있다면 어디로 가든 상관없었죠. 그러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물고기들은 사라졌고 제 앞에 거대한 거북이 있더라고요. 그리고 단숨에 절 삼켜 버렸죠."

"완요, 한 가지만 더 묻지." 촌 포가 말했다. "그 안에... 그렇게 오래 있다가 왜 이제 와서, 그것도 하필 오늘 나오기로 한 거지?"

"진주가 그러라고 했어요."

"뭐?"

"오늘도 언제나처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진주를 들여다봤는데, 이번에는 고기 잡는 게 아니라 마을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여 주더라고요. 그걸 보고 '아, 갈 때가 됐구나' 싶었죠. 그래서 배에 올라탔더니, 셴진 수가 저를 뱉어 냈어요."

촌 포의 한숨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문 밖에 있는 리 리에게까지 들렸다. "그랬단 말이지, 완요. 알겠네. 이제 이 물건의 정체가 무엇인지 밝혀 내는 일만 남았군. 일단 대도서관에 보관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다들 찬성하십니까?"

촌 포의 질문에 대다수가 웅얼웅얼 찬성의 뜻을 표했고, 장로들은 이제 일상적인 문제를 의논하기 시작했다.

리 리는 허둥지둥 문에서 떨어져 밖으로 나간 다음 산울타리를 따라 몸을 낮춰 걸어간 끝에 다섯 새벽 사원에서 멀어졌다. 머릿속은 방금 엿들은 이야기를 생각하느라 분주했다. 판다리아의 진주라는 커다란 마법 진주라고? 리 리는 나무에 기대 앉아 손가락으로 턱을 톡톡 두들겼다. 자하라는 진주가 강력한 고대 유물이라고 했지만, 리 리는 그냥 전설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아버지와 첸 삼촌은 지금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잔디 위로 그림자가 길어지자 리 리는 벌떡 일어나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을 테니 평소대로 행동하면 되겠지만, 리 리의 머리는 수십 가지 생각으로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

밤이 깊어지자 리 리는 살금살금 계단을 내려와 까치발을 들고 거실을 통과한 뒤 출입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지금 리 리에게 중요한 일은 단 하나, 진주를 두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이었다.

대도서관은 문을 닫는 일이 없었다. 복도를 통과할 때 벽에 걸린 마법등이 친절하게도 리 리가 지나가는 길을 밝혀 주었다. 리 리는 진주가 도서관에서 가장 값진 수집품과 함께 진열되어 있으리라 추측하고 곧장 전시실로 향했다.

리 리의 짐작대로 진주는 전시실 한가운데의 나무 받침대 위, 유리 진열장 안에서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리 리는 조심스럽게 진열장을 들어올려 옆으로 치웠다.

진주는 리 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커서 거의 수박만한 크기였다. 유백색 윤기가 흐르는 표면에 어둑한 불빛이 내려앉아 만화경처럼 파스텔 톤의 무지갯빛으로 반사되고 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 아름다움에 흠뻑 빠진 리 리는 저도 모르게 진주를 두 손으로 살포시 잡아 얼굴에 바싹 댔다. 표면은 따스했고 무언가 에너지를 품고 있는지 희미하게 진동했다. 완요가 말한 대로 마법의 힘이 분명했다.

"완요에게 고기를 잡으러 어디로 갈지 알려 주었다지?" 리 리는 진주에 대고 속삭였다. "나한테는 뭘 보여줄 거니?"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진주가 일렁거리는 빛을 내기 시작했다. 표면에 여러 가지 색이 나타나 소용돌이쳤다. 리 리는 눈꺼풀이 무거워져 눈을 감아 버렸다. 다시 눈을 뜨자 주위에는 은회색 안개가 자욱이 깔려 있었고 손에는 더 이상 진주가 없었다. 마치 꿈과 생시의 중간 지점을 떠도는 느낌이었다. 이게 과연 현실일까?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발 아래 아득히 먼 곳에 분홍색 꽃이 만발한 나무가 늘어선 구릉지가 펼쳐졌다. 리 리는 허공에 뜬 채 허우적거렸다. 당장이라도 땅으로 곤두박질칠 것 같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서서히 마음이 가라앉자 리 리는 목을 길게 빼고 좌우를 살폈다. 흥분해서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진주가 리 리에게 환영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었다.

장면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북적거리는 마을이었다. 거리마다 물건을 팔러 다니거나 바쁜 일상을 보내는 판다렌들이 가득했다. 리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는 이도 하나 없고 낯익은 물건도 하나 없기 때문이었다. 집과 건물의 생김새는 셴진 수의 것들과 비슷했지만 뭔가 이상했다. 도로며 풍경이며 모든 것이 낯설었다. 비슷하지만 달랐다.

환영은 계속 바뀌었다. 하늘 높이 솟은 눈 덮인 산악 지대의 비탈에 삼나무와 다른 침엽수들이 빽빽이 들어차 거대한 숲을 이루었다. 해안가 모래사장에는 갈매기와 바다오리가 날아다녔다. 사방에 판다렌의 흔적이 만연했다. 산비탈에 자리 잡은 대사원에서 도로를 따라 세운 표지판까지, 여기가 어디인지는 몰라도 오랫동안 판다렌이 살던 곳이라는 사실은 틀림없었다.




리 리는 느릿느릿 더 높이 올라갔다. 이 땅의 중심을 향해 은빛 안개가 피어오르더니 바다까지 퍼져 나갔고, 점점 짙어지다가 결국 발 아래 땅을 완전히 가려 버렸다. 리 리는 공중에 뜬 채 안개 너머 멀리 서쪽 지평선 위로 해가 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붉은 빛을 띤 황금색 노을이 수면에 비쳐 반짝였고, 동쪽 하늘에는 이미 아제로스의 두 개의 달과 함께 별이 빛나고 있었다. 달은 둘 다 보름달이었다.

갑자기 몇 년 전에 지리학 수업에서 배웠던 내용이 생각났다. 남쪽 바다 어딘가에 일 년 열두 달 안개가 덮여 있어 배를 타고 가는 자체가 불가능한 땅이 있다고 했다. 셴진 수는 그곳을 기피했다.

산악 지대와 삼림, 들판이 어우러져 있고, 남쪽 바다의 안개에 가려진 미지의 땅. 그곳에 판다렌 종족이 살고 있다면...
판다리아다!.

그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자마자 풍경이 흐려지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났다. 눈을 깜박거렸지만 하늘은 온데간데없고, 공중을 떠다니는 기분도 더는 느낄 수 없었다. 리 리는 다시 대도서관 안에 우두커니 서서 커다란 진주를 손에 들고 은은한 빛을 발하는 표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판다리아... 전설 속 판다렌의 고향이자 리우 랑과 모험가들이 활기 넘치는 삶을 찾아 셴진 수를 타고 떠나온 곳. 그곳이 아직 남아 있다는 말인가? 거대한 거북 위에서 사는 판다렌 대부분은 이미 오래 전 판다리아가 전쟁으로 파괴되었거나, 질병, 아니면... 무엇이든 재난 때문에 없어졌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판다리아를 본 사람이 없다는 게 말이 되는가?

리 리는 손에 든 진주를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비밀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마법의 힘은 실로 대단하다.

"찾아야겠어." 리 리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러니까 나한테 보인 거야. 완요도, 장로들도, 아빠나 첸 삼촌도 아닌 오직 나, 나한테만 보였잖아."

진주 표면에 다시 한 번 색깔의 소용돌이가 떠올랐다. 리 리는 그것을 좋은 징조로 받아들였다.
"너도 같이 가야겠어." 리 리는 진주를 한쪽 겨드랑이에 꼈다. 좀 거추장스럽지만 지금은 진주가 들어갈 만한 주머니나 여행 배낭이 없었다. 황급히 도서관을 빠져나온 리 리는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준비할 것은 많고 시간은 없었다. 환영 속에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처음 첸 삼촌을 찾으려고 길을 떠났을 때는 비록 그 목표를 이루긴 했지만 보가 희생되는 크나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 심장이 터질 듯이 쿵쾅거렸다. 다시는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어. 리 리는 다짐했다.

***

여벌 옷가지, 메모를 적고 지도를 베껴 둔 일기장, 부엌에서 슬쩍한 식량, 쓸모가 있을 듯한 각종 잡동사니, 마지막으로 진주. 진주는 조심조심 망토로 싸서 소지품을 넣은 배낭 맨 위쪽에 간수했다. 이 정도면 여행을 시작하는 데는 충분했다. 리 리는 여러 모로 쓸모가 있을, 마력 깃든 가루가 담긴 작은 주머니의 끈을 조였다. 마지막으로 방 안을 둘러보며 잊은 것이 있는지 확인한 후, 옷장 서랍에서 학 호루라기를 꺼내 첸 삼촌이 선물로 준 드레나이 구슬 목걸이와 함께 목에 걸었다. 그러고는 행운을 비는 의식을 치르듯 손가락으로 두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이제 하나만 더." 리 리가 조용히 말했다.

이전에도 아버지한테 이런 편지를 썼기 때문인지 펜을 잡자 글에 막힘이 없었다.

아빠, 그리고 첸 삼촌께이 편지를 읽으실 때쯤이면 전 이미 아이언포지로 가고 있을 거예요. 항상 말씀드렸지만, 셴진 수는 제가 있을 곳이 아니에요.첸 삼촌, 삼촌을 찾는 일은 엄청난 수수께끼를 푸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이번에 제가 풀어야 할 수수께끼는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중요해요. 완요의 진주가 제게 그 방법을 보여 줬어요. 지금부터 그 길을 가겠어요. 이번에는 아무도 다치지 않을 거예요. 약속할게요. 다시 만날 때는 제가 얼마나 대단한 발견을 했는지 다들 놀라실 거예요!리 리 드림.

***

마을 중심부에서 멀어지자 리 리는 호루라기를 입에 물고 날카롭고 또렷한 신호를 보냈다. 1분이 채 지나지 않아 우아한 날갯짓 소리가 들리더니 리 리의 오랜 친구, 학이 날아와 땅에 내려앉았다. 학은 한쪽으로 머리를 기울여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눈동자로 리 리를 살폈고, 리 리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너도 분명히 아빠와 같은 말을 하려는 거겠지. 하지만 언젠가 세상이 이리로 오겠거니 하면서 멍하니 기다리는 건 싫어. 게다가 할 일도 있어."

학은 목을 구부리고 비웃는 듯한 소리를 내더니 날개를 퍼덕이며 길고 가는 다리로 껑충댔다.




"그래, 마음대로 웃어 봐." 리 리가 눈살을 찌푸렸다. 학은 기분이 좋은 듯 끼루룩거렸고, 몸을 낮추어 리 리가 등에 올라탈 수 있게 했다. 리 리가 자리를 잡자 학은 순식간에 공중으로 솟구치며 힘차게 날개를 퍼덕였다.
"판다리아는 남쪽에 있어." 리 리가 바람 때문에 목청을 높였다. 그리고 학의 목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며 말했다. "안개가 자욱한 곳에 숨겨져 있대."

학이 갑자기 속력을 내는 바람에 리 리는 바다로 떨어질 뻔했다. "끼루룩?"

"방금 뭐였어? 죽을 뻔했잖아?" 리 리는 학의 깃털을 꽉 붙잡았다. 갑작스레 움직였기 때문인지 머리 상처가 다시 아프기 시작했다. "네가 날 거기까지 데려다 줄 거라고 기대 안 해! 그러려면 보급품과 식량이 며칠 분은 더 필요하단 말야."

학은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끼루루룩?"

"비행선으로 갈 거야" 리 리는 씩 웃었다. "내가 아는 분한테 부탁할 거야. 전에도 태워주셨으니까."
"끼루룩끼루룩?"

"아이언포지! 마그니 국왕 말이야! 계속 그 이상한 소리 낼 거야? 그럴 힘이 있으면 더 빨리 날아!"

"이게 다 형 때문이야!"

촌 포는 리 리가 쓴 편지를 첸의 얼굴 앞에서 마구 흔들어댔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눈에 핏발이 섰다. 첸은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걔는 어릴 때부터 '첸 삼촌,, 이거 해 줘요.', '첸 삼촌, 저거 해 줘요.'하며 형 뒤만 따라다녔지. 그것도 모자라 '첸 삼촌 따라서 세상 구경을 하고 싶어요'같은 소리나 하고!" 마루를 서성거리는 촌 포의 발걸음 하나하나에서 분노가 묻어났다. "그 애가 망상을 그만두게 할 방법이 전혀 없었던 거야... 그래. 리 리가 형 편지 대신 연애 소설만 읽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거야. 이게 다 형이 쓴 편지 탓이라고!"

첸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촌 포가 이성을 잃은 상태이니만큼, 첸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동생이 떠들어대도록 내버려 두었다. 한편으로는 저 장광설에서 딸에 대한 비난이 더 큰지 아니면 형을 향한 원망이 더 큰지 궁금하기도 했다.

"... 무책임하게 애 머릿속에 엉터리 희망이나 불어넣고 말이야. 여기에 없는 게 뭐가 있다고 바깥에까지 나가서 찾겠다는 거야?"

'쓸 만한 양조 재료가 없잖아.' 첸은 동생의 머리 너머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간신히 참았다. 갑자기 촌 포가 화난 얼굴을 불쑥 들이미는 바람에 첸은 깜짝 놀랐다.


"형은 정말 아무 할 말이 없는 거야?"

"촌 포, 이 상황에 내가 무슨 말을 하겠니? 내가 리 리한테 떠나라고 한 것도 아니잖아."

"떠나라고 말한 거나 다름없지!" 촌 포가 고함을 질렀다. "직접 하지는 않았더라도 그 비슷한 소리를 몇 년 동안이나 한 거 아냐! 리 리는 형을 숭배하다시피 하잖아. 그러니 거대한 수수께끼인지 뭔지를 풀겠다는 말도 안 되는 탐험을 떠난 거고. 그러니까 형이 가서 걔를 데려와. 그 뭐냐..." 촌 포는 리 리의 편지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 아이언포지라는 데로 가서."

첸의 입장에서도 조카딸이 걱정되기는 했다. 혼자서 여행을 하기에는 너무 어렸고, 자신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예전에 리 리와 이야기를 나눴던 중요한 수수께끼의 장소라면 판다리아가 분명했다. 하지만 첸 자신도 판다리아가 있는지 확신하지 못하는데... 더 큰 문제는 리 리가 진주를 가져간 것이었다. 이전에 나가가 리 리를 추적했던 것도 바로 그 진주 때문이 아니었던가. 위험천만한 여정이 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게다가, 스톰윈드 호박을 입수하면 환상적인 맥주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알겠어, 포. 내가 찾으러 가지." 첸이 대답했다. "하지만 리 리도 이제 클 만큼 컸어. 오기 싫다는데 강제로 끌고 올 순 없다고."

촌 포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 앤 아직 어린애야."

첸은 고개를 저었다.

"날이 갈수록 어린애에서 멀어지잖아. 아무튼 최대한 빨리 떠날게."

"빠를수록 좋지." 촌 포가 팔짱을 꼈다. "이번에는 리 리가 무슨 사고를 치고 돌아올지 누가 알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