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한 진주가 이끄는대로 유랑도를 떠나 아이언포지와 스톰윈드, 무법항을 방문한 리리와 첸 스톰스타우트, 무법항에서 예기치않은 난관에 봉착하게 되는데...

동부왕국에서 펼쳐지는 첸과 리리의 흥미진진한 모험, 그 여정을 함께 따라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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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만 여쭤볼게요. 마그니 국왕님이 돌로 변해 버리셔서 지금 만날 수 없다는 건가요?"


광활하게 펼쳐진 드워프의 지하 도시, 아이언포지에서 세 망치의 의회 앞에 선 리 리 스톰스타우트는 온몸을 꼿꼿이 세우고, 지팡이를 단단히 쥐고, 턱을 삐죽 내밀어 잔뜩 분노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잖아요."

"정말이라니까!" 단상 중앙에 있던 드워프가 대답했다. "원한다면 구 아이언포지로 가서 직접 봐! 대격변이 있기 얼마 전에, 우리 형이 대지와 소통하는 의식을 했었거든." 무라딘 브론즈비어드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다 그 꼴이 되었지."

"세 망치의 의회를 거짓말쟁이라고 부르다니, 꽤나 건방진 꼬맹이구나." 모이라 타우릿산이 왠지 섬뜩한 느낌을 주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 행동을 보고 너희 종족이 어떤 녀석들인지 알 수 있다면... 뭐, 아직까지 너희와 만나지 못했었다는 게 별로 아쉽지는 않구나."

"내가 하고 싶은 말이네요, 아줌마." 리 리는 나지막이 혼잣말을 하고는, 의회의 세 대표 모두에게 다시 말했다. "절 도와주실 수 없다는 얘기겠지요?"

무라딘은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안 되겠어. 마그니 형이 뭐라고 약속했었는지도 모르고, 이제 확인할 수도 없으니까. 그리고 너에 대해서는 아직 우리가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거든."

"좋아요. 그럼 저는 그냥 가봐야겠네요." 리 리는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

"어린 아가씨가... 예의는 지켜야지." 모이라가 충고했다. 리 리는 잠시 멈춰서더니, 빙글 부드럽게 뒤로 돌아 한 손을 배에 대고 과장된 몸짓으로 허리 숙여 인사했다.

"오, 위대하신 세 망치의 의회시여, 구렁이 담 넘어가듯 책임을 회피하시는 솜씨가 가히 존경할만 하군요. 돌로 변해버린 마그니 국왕님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여러분의 꼴불견을 직접 보게 된 것은 정말 크나큰 영광이었습니다."

모이라는 무섭게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지만, 혀를 내두르며 껄껄 웃는 폴스타트 와일드해머의 웃음 소리에 묻혔다. 무라딘이 가까스로 두 드워프를 진정시켰을 때는, 리 리가 이미 왕실을 떠난 지 오래였다.

***

드워프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유쾌한 성품은, 의회 앞에서가 아니라 부싯돌 선술집에서 잘 드러났다. 술집을 가득 채운 손님들은 함께 웃음을 터뜨리며 술잔을 기울였다. 하지만 리 리는 혼자 구석 탁자에 앉아 있었다.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모습이었지만, 다른 이들은 그녀가 혼자서 부루퉁한 표정으로 에일 맥주를 마실 수 있게 내버려 뒀다.




"세 망치의 의회를 만나보지도 않고 학을 돌려보낸 건 멍청한 짓이었나 봐. 물론, 아이언포지의 국왕이 바위로 변해버렸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지만."

이렇게 중얼거린 리 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맥주를 홀짝이다가, 멍하니 나무 탁자에 팔꿈치를 괴고 손으로 의미 없는 무늬를 그렸다. 홀로 생각에 잠긴 그녀는 머리 위에 그림자가 드리울 때까지, 누군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리 리는 고개를 들지도 않았다. "좀 꺼져 줄래요? 제가 좀 바빠서요."
쿡쿡 웃는 소리는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삼촌과 같이 한 잔 할 시간도 없이 바쁘단 말이니? 정말 서운하구나."
리 리는 벌떡 일어나 빙글 뒤로 돌았다. 커다란 배낭을 짊어지고 지팡이를 든 첸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첸 삼촌!" 리 리가 첸을 얼싸안으며 말했다. "어, 못된 말을 해서 죄송해요."

첸은 다정하게 조카를 안아주며 소탈하게 웃고는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괜찮아. 그런데, 내가 왜 왔는지는 알겠지?"

리 리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았다. "아빠가 절 데려오라고 하셨겠죠."

"그랬지. 하지만 난 그럴 생각이 없어. 네 편지를 읽고 보니, 완요가 가져온 진주가 사라졌더구나."

리 리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려고 애를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첸은 꾸짖듯이 눈살을 조금 찌푸렸다.

"안 그랬니?"

빠져나갈 곳이 없음을 깨달은 리 리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아이언포지를 향해 떠나기 전에 진주 속에서 본 환영에 대해 설명했다.

첸은 생각에 잠겨 자신의 음료를 홀짝였다. "전에도 얘기한 적이 있었으니까, 나는 네가 판다리아를 찾아 떠났을 거라고 확신했단다. 그런데, 그 진주가 정말로 환영을 보여줬다고?"

리 리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진주를 가져온 거예요. 아무 이유 없이 환영을 보여준 건 아닐 테니까요!"

첸은 조카를 힐끗 바라봤다. "나는 완요가 멀록에게서 빼앗은 마법 진주의 힘을 믿을 생각은 없지만, 네 판단 만큼은 믿는단다, 리 리야."

"당연하죠, 첸 삼촌!"

"좋아, 그럼 이제 뭘 해야 하지?"

리 리는 안절부절 못했다. "저, 생각대로 일이 풀리지 않았어요. 그래서, 어, 사실 다음 계획이라고 할 게 없어요."

첸은 싱긋 웃었다. "진주가 환영을 보여준다고 하지 않았었니?"

리 리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쩍!" 소리가 나게 후려쳤다. "그랬죠.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요?" 그녀는 남은 에일맥주를 단숨에 비우고 벌떡 일어섰다. "어서 가요! 진주는 제 방에 있어요."

***

리 리는 침대가에 앉아 커다란 보석을 두 손에 들고, 차분하게 반짝이는 빛이 자신을 최면 상태로 이끌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진주의 창백한 광택을 보며 눈을 깜빡이다가 살며시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부두 끝에서 찬란한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항구의 중앙에는 커다란 섬이 솟아나고, 그 꼭대기에는 외팔 고블린의 빛바랜 화강암 석상이 서 있었다. 리 리는 제자리에서 빙글 돌아 주위를 둘러봤다.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목조 건물들이 항구를 따라 줄을 지어 반원을 그렸다. 건물들 사이로 짙은 초록색 야자나무 잎과 빽빽이 들어선 밀림이 눈에 들어왔다.

"뭐가 보였니?"

첸의 목소리가 리 리를 아이언포지의 현실로 되돌렸다. 그녀는 진주를 침대 곁의 여행 배낭에 다시 올려놓고, 조심스럽게 천으로 덮었다.




"무법항이요."

"뭐?" 첸은 그녀 옆에 털썩 앉았다. "확실하니? 그럼 스톰윈드를 통해서 내려가는 게 낫겠지?"

"네, 그럴 거예요. 분명히 무법항이었어요." 그녀는 끙 소리를 내며 뒤로 털썩 누워 한 팔로 얼굴을 가렸다. "무법항은 너무 먼데!"

첸은 조용히 혀를 쯧쯧 차며 벽을 응시하다가, 손뼉을 치며 벌떡 일어났다.

"리 리야, 가자꾸나. 꽤 걸어야 할 것 같으니까. 삶은 모험이란다. 기억하지?"

리 리는 팔을 아주 조금 들어올려 첸을 빼꼼 쳐다봤다. 장난꾸러기처럼 두 눈을 반짝이며 그녀를 내려다보는 삼촌을 보니, 갑자기 두 다리를 걷어차서 넘어뜨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첸이 모르게 공격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생각하는 것 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그녀는 일어나며 말했다. "어서 가요."

***

둘은 깊은굴 지하철을 타고 남쪽 스톰윈드로 향했다. 리 리가 아제로스에 처음 왔을 때, 보와 함께했던 첫 번째 여행길을 거꾸로 따라가는 셈이었다. 보와 함께 들렀던 곳을 다시 밟으려니 그의 빈 자리가 더 크게 느껴져, 이번 여행은 그렇게 즐겁지 않았다. 지하철에서 리 리와 보는 고블린 하나와 전투를 벌였었는데, 알고 보니 그 녀석은 보의 목숨을 빼앗은 나가, 오크와 한 패였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리 리 자신과 보에게 닥쳐왔던 위험을 더 일찍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많은 것이 달라졌으리라.

리 리는 억지로 이 생각을 떨쳐 버렸다. 변하지 않을 일을 되새길 필요는 없었다.

한편, 스톰윈드는 무척 많이 변해 있었다.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다. 지하철이 도착한 드워프 지구의 새로운 건축물 외에도, 검게 그을린 지붕들과 불타버린 건물들, 높은 탑들이 무너지고 남은 흉벽이 눈에 띄었다. 온 도시에서 불에 탄 흔적을 감출 수 없었다. 첸은 서성거리는 상인을 한쪽으로 불러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물었다.
상인은 눈살을 찌푸리고 둘을 바라보며 말했다.

"데스윙이 그랬죠."

첸은 대답을 재촉했다. "그 커다란 용, 데스윙 말인가요?"

"그래요." 상인은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지만, 어딘가에 숨어 있었던 모양이에요. 거, 배운 양반들이 다들 그럽디다. 어쨌든, 그 놈이 갑자기 나타나서는 공원을 불태우고 이 도시 반쪽을 박살내 버렸죠." 그 기억을 떠올리며 그는 몸을 덜덜 떨었다. "제 생에 가장 무서운 날이었다니까요. 그 커다란 괴물이 하늘에서 불의 비를 쏟아내는데... 세상이 끝나기라도 하는 줄 알았어요."

"감사합니다." 첸은 시간을 내준 데 대한 감사의 뜻으로, 상인이 팔고 있던 미끼를 샀다.

"내 일지에서 용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겠지, 리 리?" 다시 걸어가면서 첸이 말했다. "전에 셴진 수에도 끔찍한 해일이 밀어닥친 적이 있었는데, 그게 아마 데스윙이 이 세계로 돌아온 때였던 모양이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 봤다. 리 리는 삼촌이 전설 속의 옛 위상이 머리 위로 지나가길 바라기라도 하는 건지 궁금했다.

리 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용들에 대해 조금 알고는 있었지만, 분명히 첸은 더 많은 걸 알고 있으리라. 그래서인지, 데스윙에 대한 소식은 삼촌에게 큰 걱정거리를 안긴 것 같았다.

그들은 스톰윈드에서 며칠 더 머물며 여행에 필요한 보급품을 챙겼다. 남쪽으로 먼 길을 가야 할 터였고, 무법항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대도시도 하나 없었다. 필요한 것을 모두 마련한 후, 두 판다렌은 북적거리는 도시를 떠나 탁 트인 길에 올라섰다.

스톰윈드는 막대한 피해를 겪었지만, 엘윈 숲은 크게 영향을 받지 않은 모양이었다. 리 리가 길을 따라가는 동안 그다지 이상해 보이는 것도 없었다. 하지만, 가시덤불 골짜기는 전혀 달랐다. 밀림의 좁지만 잘 다져진 오솔길을 터벅터벅 밟아가는 동안, 숲의 일부가 썩어버린 모습에서부터 얼라이언스와 호드가 각각 새로이 구축한 요새들에 이르기까지, 주위에는 데스윙의 귀환이 만들어낸 흔적들이 즐비했다. 오솔길 자체도 무척 위험하게 변해 있었다. 그런 길을 헤치고 무법항에 접어들었을 때의 기분은 반가움 이상이었다.

스팀휘들 무역회사가 운영하고, 가시덤불 곶 끝자락에 도사린 이 작은 도시는 아제로스의 모든 떳떳하지 못한 자들의 고향이었다. 대도시의 엄정한 법 집행에서 벗어나려는 극악무도한 범죄자들과 퀭한 눈의 모험가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확천금을 벌어들이려고 무법항을 찾았다. 리 리와 첸은 안도와 기쁨을 느끼며, 이 범죄 도시의 삐걱거리는 나무 통로에 올라섰다.




"난 여행을 정말 사랑하지만, 오늘 밤에는 침대 위에서 자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구나." 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리 리는 무법항이야말로 삼촌이 아제로스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임을 알고 있었다.

"이쪽 지역 도로는 정비를 좀 해야 할 것 같은데요." 리 리는 투덜거렸다. "표지판이라도 하나 세우면 큰일 난대요? '경고: 이 길을 따라가면 거대한 죽음의 소용돌이에 휘말립니다.'라고요!"

첸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데스윙이 정말로 이 대지를 뒤흔든 모양이구나."

"그래도 무법항은 괜찮아 보여요."

"고블린이 이곳을 포기하게 하려면, 거대한 죽음의 소용돌이가 수십 개는 필요할 거다." 첸은 한쪽 눈을 찡긋하며 다시 웃었다. "이리 오렴, 리 리야. 여기서 파는 끔찍한 고블린 그로그주는 평생 한 번쯤은 맛 볼만 하단다."

***

뱃사공의 선술집은 건축가의 눈을 사로잡을 만한 구조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황폐함"의 상징에 가까웠다. 마치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폐허 같은 이 선술집은 손님의 수가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을 초과할 때마다 별다른 고민 없이 한 층을 더 쌓아 올리고, 구석자리에 추가 침실을 마련하는 식으로 오랜 시간 확장되어 왔다. 무법항에서, 건물 소유주는 안전과 안정성에 대해 별로 고민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결국 소비자의 책임이니까.

따라서, 이 악명 높은 선술집은 정직한 여행객들에게는 그다지 이상적인 목적지가 아니었지만, 어두운 구석을 떠도는 잡범이나 방탕한 선원 등, 정상 범위를 다소 벗어난 사회 구성원들에게는 안식처와 같았다. 눈에 띄지 않게 남을 감시할 수 있는 장소가 무척 많았으니까.

그게 바로 케이틀린이 좋아하는 여가 활동이었다. 2층이라기보다는 1.5층에 가까운 곳, 아래층이 훤히 보이는 자리에서 그녀는 선술집 손님들이 오가는 모습을 눈에 띄지 않게 지켜볼 수 있었다.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기회를 노리며.
무법항에는 워낙 특이한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하지만, 판다렌 두 명이 당당히 걸어 들어와 카운터에 있는 스킨들에게 술값을 턱 하니 내려놓는 모습은 케이틀린도 깜짝 놀랄 일이었다. 그 종족에 대한 말은 익히 들어봤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둘에게는 무언가 그녀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면이 있었다. 손에 든 지팡이와 짊어진 배낭을 보면 여행객이 분명했다. 그녀는 두 판다렌이 에일맥주 한 통씩을 들고 구석진 자리로 향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계단을 따라 살금살금 다가갔다. 이 매력적인 이방인들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 싶었다.

***

첸은 금속제 머그잔을 양 손으로 부드럽게 돌리며, 맥주가 소용돌이치는 모습을 지켜봤다.

"기억했던 것만큼 끔찍한 맛이구나."

"판다렌 맥주는 마치 화약 같은 맛이 나잖아요." 리 리가 말했다. "그런데 고블린들은 진짜 화약으로 맥주를 빚나 봐요."

첸은 생각에 잠겨 자신의 볼을 두드렸다.

"리 리야, 그 진주에 대해 또 기억나는 게 없니?"

리 리는 입에 가져가던 머그잔을 중간에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나가가 말해준 건 삼촌과 아빠한테 전부 알려드렸어요. 완요의 말을 들어보면, 그게 맞았던 것 같고요."

"그래, 너 역시 우리 얘기를 엿듣고 있었구나."

리 리는 삼촌을 노려봤다. "야비한 함정을 파셨네요!"

"네, 그래요. 제가 좀 엿들었어요." 씩씩거리며 리 리가 말했다. "그게 어때서요?"

"그 진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단다. 그저 어떤 나가가 애타게 그 진주를 차지하려 했고, 그게 환영을 보여준다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모르는데... 우린 그 환영을 따라 여기까지 왔구나."

리 리는 첸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았지만, 그녀의 본능은 진주를 믿으라고 했다.

"잘 모르겠어요." 그녀는 솔직히 인정했다. "진주가 위험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악하다는 느낌은 안 들어요. 그렇게 으스스한 점은 전혀 없다고요."

"마법과 관련된 일이라면 자신의 본능을 믿는 것도 의미가 있지. 하지만, 나가는 친절하거나 사려 깊은 종족은 아냐. 나가가 이걸 원했다면, 틀림없이 뭔가 파괴적인 힘이 담겨 있을거야." 리 리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을 보고, 그는 한 마디 덧붙였다. "그냥 널 지켜주고 싶은 거란다, 포가 원했던 대로."

리 리는 머그잔을 필요 이상으로 강하게 탁자에 내려놓고, 벽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첸은 부드럽게 이야기를 풀어보려 했다.

"리 리야, 아직도 화났니?"

"무법항에 뛰어들어 빠져 죽거나 그러지는 않을 거예요."

첸은 이 문제로 조카를 괴롭히지는 말자고 생각했다.

"네가 강하다는 건 알고 있어. 아이가 아니라는 것도. 네 아버지는 그냥 널 걱정하는 것 뿐이란다."

"아빠는 낚싯배를 타는 것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고요. 엄마한테 일어난 일 때문이겠죠. 아빠 말만 듣고 산다면, 전 집에 콕 박혀서 평생 정원 손질이나 요리처럼 재미 없는 일만 하게 될 거예요." 리 리는 몸을 기울여 첸을 향해 다가갔다. "진주가 제게 환영을 보여줬어요. 이제 이건 제 임무가 됐고, 이번 일을 잘 마치면 아빠도 절 구속하려고 했던 게 잘못이었다는 걸 깨닫게 될 거예요."

"아빠들이란 참, 다들 그렇게 딸을 귀찮게 하죠. 안 그래요?"

첸과 리 리는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봤다. 이 말을 한 사람은 해칠 의도가 없다는 표시로 두 손을 들어올렸다.

"끼어들어서 미안해요. 술집에 손님이 워낙 바글거려서 이리저리 치이다 보니, 그쪽 말이 다 들리더라고요." 그녀는 빈 의자를 잡아당겨 리 리 옆에 앉았다. 얼굴빛이 창백한 인간 여성은 자기 가방을 탁자 옆에 내려놓고, 우아한 몸짓으로 한쪽 발을 무릎에 올렸다. 두 팔은 의자 뒤로 늘어뜨린 채였다.

"케이틀린이에요. 이 근처에서는 검술의 달인 케이틀린이라고 부르죠." 그녀는 적갈색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솔직히 꽤나 거창한 이름이긴 한데, 그 울림이 좋더라고요. 그렇지 않나요?"

"사나운 이름이네요." 리 리가 말했고, 케이틀린은 호탕하게 웃었다.

"영리하시네요!"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그쪽 말이 들렸어요. 솔직히 말해, 저도 모르게 말이 튀어 나오더라고요. 당신 이야기가 너무 익숙해서요."

"익숙하다고요?"

"저도 비슷한 일을 겪었으니까요." 케이틀린이 천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살짝 꼰 다리를 톡톡 두들기면서였다. "우리 아빠도 고지식한 영감쟁이 학자거든요. 저한테도 그런 길을 가길 원하셨죠. 저는 그런 생활을 견딜 수가 없었어요. 아빠는 제가 아빠가 원하는 일 말고 다른 일을 하는 걸 견디지 못하셨고요. 그래서 전 떠났어요. 벌써 오래 전 일이지만, 제가 내린 최고의 결정이었던 것 같아요."

"아버지와 좋은 관계로 남지 못했다니, 정말 안타깝습니다." 첸이 정중하게 말했다.

케이틀린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빠 잘못이라고요. 정말이에요. 제 말을 들어주려고만 했더라도, 그렇게 떠나진 않았을 거예요." 그녀는 곁눈질로 리 리를 바라보고는, 손을 내려 탁자 밑 종아리를 긁었다. 리 리는 생각에 잠겨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자신의 에일맥주를 강렬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저기요," 케이틀린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리 리에게 말했다. "버릇없이 끼어들어서 미안해요. 기운을 좀 차리게 해주고 싶었어요. 당신 자신이 원하는 걸 찾으세요. 당신만의 삶을 사시라고요! 아버지가 그걸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건 당신 문제가 아니잖아요."

"제 문제로 만들고 싶어 하시니까 문제죠." 리 리는 투덜거렸다. 첸은 눈을 가늘게 떴다.

"촌 포도 달라질 거다, 리 리야."

"그럴지도 모르죠. 안 그럴지도 모르고요." 케이틀린이 답했다. "우리 아빠는 변하지 않았어요. 그래도 전 제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요." 그녀는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당신도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무법항에서 즐거운 시간 보내요." 그녀는 둘에게 친근하게 손을 흔들며 선술집의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오지랖 넓은 아가씨군." 첸이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리 리는 의자에서 자세를 바꾸다가, 에일맥주를 한 입에 마시고 그 맛에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그래도 제 맘을 이해하는 것 같아요. 저랑 똑 같은 일을 겪었으니까요."

첸은 그녀를 힐끗 봤다. "그랬겠지. 위층으로 가자꾸나."

리 리는 지팡이를 들고 배낭을 한쪽 어깨에 짊어진 채, 첸을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 방은 2층에 있었는데, 작고 삐딱하게 기운 창은 무법항의 장대한 풍경마저도 싸구려처럼 보이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리 리는 삐걱거리는 낡은 침대에 털썩 앉았다. 낮잠을 푹 자고 싶었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으려고 가방을 끌어당겼다. 가방 위쪽이 이상하게 허전했다. 뭔가 없어진 것 같았다. 갑자기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맹렬하게 가방을 열고, 평소에 진주를 감싸고 다니던 망토를 끌어냈다. 텅 빈 망토는 축 늘어졌다. 희망이 없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가방의 내용물을 여기저기 흩어 놓았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믿고 싶지가 않았다.

"첸 삼촌!" 분노에 가득찬 그녀가 소리쳤다. "진주가! 진주가 없어졌어요! 그 여자, 그 껄렁한 인간 여자... 이름이 뭐였죠? 목절단 캐시였나요?"

"케이틀린 말이냐?"

"네, 그 여자가 훔쳐갔나 봐요!"

둘은 아래층으로 달려 내려갔다. 역겨운 느낌에 배 한 쪽이 서서히 뭉치는 것 같았다. 그녀와 첸은 점점 더 다급하게 인파 속에서 케이틀린을 찾았다. 리 리는 그녀와 같은 부류가 아직까지 선술집에 남아 있을 가능성은 없음을 잘 알았지만, 포기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술집 안을 배회했다. 술집 안을 세 바퀴 돌았을 때, 스킨들이라는 투실투실한 고블린이 카운터에서 동전을 세다 말고 그녀에게 물었다.

"뭘 찾고 있니, 꼬마야?"

리 리가 대답하기 첸이 끼어들었다.

"저기, 조금 전에 우리와 얘기했던 아가씨를 보셨습니까? 금발에 서른 살 정도로, 자기 이름이 검술의 달인 케이틀린이라고 하더군요. 그 여자를 찾아야 합니다."

스킨들은 자신의 커다란 귓볼을 잡아당기며 시간을 끌었다. 첸은 카운터에 동전을 몇 개 놓았다. 여관주인은 활짝 웃고 동전을 주머니에 넣었다.

"케이틀린은 검은바다 해적단원이야. 스팀휘들 무역회사를 위해 일하지. 해적선 넵튤론의 신부호 선장이기도 하고." 리 리의 얼굴 표정을 보고, 스킨들은 덧붙였다. "문제를 일으키지는 마. 여기 무법항에서 칼을 제일 잘 쓰는 해적이니까. 머리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녀 편에 서야 해. 그 누구라도 말이야."

"충고해 줘서 고맙군요." 첸은 스킨들에게 동전을 하나 더 던졌다.

"별말씀을." 스킨들은 금화를 정수리께로 집어들고는 한 눈을 찡긋했다. "말은 돈이 하는 거니까. 듣는 방법만 알면 되지."

"가자." 첸은 리 리에게 말하며, 성큼성큼 선술집을 나섰다.

***

둘은 곧바로 부두로 향했다. 넵튤론의 신부호를 찾기는 어렵지 않았고, 리 리와 첸은 곧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케이틀린은 배 갑판에 화물을 싣는 일을 지휘하고 있었다. 두 판다렌은 배에 올라 그녀에게 다가갔다.

"아, 이런, 이게 누구신가?" 그녀는 당당하게 엉덩이에 손을 올리고, 만족한 듯 짓궂은 미소를 띠었다. 앞서 보여줬던 친근한 태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우리가 왜 왔는지 당신도 알 것 같군." 첸이 말했다.

"야 이 도둑아!" 리 리가 으르렁댔다. "우리 진주를 훔쳐갔잖아!"

"그렇게 화 낼 필요는 없잖아." 손가락을 살랑살랑 흔들며 케이틀린이 대답했다. "그래, 맞아. 내가 좀 가져왔지. 공공 장소에서 희귀한 마법 유물에 대해 얘기할 때는 좀 더 조심해야 할 거야. 특히 이쪽 지역에서는 말이야."

"케이틀린은 말을 이었다. "뭐 썩 좋은 행동이 아니었다는 건 알아. 하지만 나도 매달 이자는 갚아야 하고, 또 스팀휘들 무역회사는 썩 너그러운 채권자가 아니라서 말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어... 그래도 나는 정정당당한 걸 좋아하는 여자니까... 그리고 당신들 둘을 처음 본 순간부터 마음에 들었기도 하고. 자, 그러니까... 여기 배 보여?" 케이틀린은 자신의 주위를 가리켰다. "배 어딘가에 진주가 있어. 찾아낼 수만 있다면, 가져가도 좋아." 그녀의 웃음이 활짝 커졌다. "하지만 경고하는데, 우리 친구들은 좀 폭력적인 편이야. 게다가 이방인들을 별로 안 좋아한다고."

갑자기 리 리와 첸은 음험하게 미소짓는 얼굴들에 둘러싸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태평하게 묵묵히 일하던 남자와 여자들이었다. 또, 갑자기 모두의 주먹에서 발톱처럼 무기들이 튀어나왔다. 첸은 얼굴을 찡그렸고, 리 리는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너흰 정말 용감하거나, 아니면 꽤나 멍청하구나." 케이틀린이 말했다.

"너 판다렌하고 싸워본 적 없지?" 리 리가 맞받아쳤다.

케이틀린도 무기를 꺼내들었다. 자신의 팔뚝만큼 긴 단검이었다.

"다른 녀석들하고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은데." 그녀가 답했다.

리 리는 케이틀린을 향해 달려들었다. 첸은 그동안 달려드는 선원들을 막아냈다. 케이틀린은 단검으로 능숙하게 리 리의 지팡이를 막아내다가, 상대의 복부를 향해 찔러 들어왔다. 리 리는 케이틀린의 손목을 걷어차 이 공격을 막아냈고, 단검은 그녀의 손을 벗어나 날아갔다. 케이틀린이 깜짝 놀라 순간적으로 눈이 커졌다. 아마 이제야 상대가 어떤 존재인지를 깨달은 모양이었다.

케이틀린은 단검을 향해 몸을 날렸다. 리 리는 그 뒤를 쫓으며 다른 해적에게 마법 가루를 한 줌 뿌렸다. 다른 배에서 이 배로 뛰어든 해적이었다. 가루는 작고 화가 잔뜩 난 새 떼로 변해 해적의 눈을 마구 쪼아댔다. 그는 욕설을 퍼부으며 비틀거리다가, 밧줄에 부딪혀 쓰러졌다.

첸의 지팡이도 번개 같은 속도로 주위를 맴돌며, 서툰 해적들을 불시에 습격해 나동그라지게 했다. 유난히 덩치가 큰 오크 하나는 가슴팍을 걷어차인 뒤 중심을 잃고, 난간 너머 부두로 떨어졌다. 첸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이보다 불리했던 싸움도 얼마든지 이겨낸 적이 있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종소리가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리 리는 지원군을 요청하는 소리가 아니기만을 바랐다.
선원 중 하나가 소리쳤다. "붉은해적단이다! 놈들이 공격해 온다!"

"우리도 공격하고 있다고!" 리 리가 소리치며, 다른 해적의 명치를 지팡이로 가격했다.

하지만 다른 선원들은 모두 그 즉시 그녀와 첸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배 위의 자기 자리를 찾아 달렸다. 리 리는 몸을 빙글 돌려 목을 길게 빼고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확인하려고 애썼다. 눈에 띄게 밝은 붉은색 윗옷을 입고 무섭게 무장한 해적들이 부두 주위의 온갖 은신처에서 몰려나와 무법항의 고블린 투사들을 습격하고 검은바다 해적단의 배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닻줄을 잘라!" 케이틀린의 목소리가 소란을 뚫고 쩌렁쩌렁 울렸다. "당장 여길 빠져나가! 나머지는 배를 지켜! 화물을 보호해야 해!"

붉은해적단원 하나가 뱃전을 뛰어넘어 넵튤론의 신부호 위, 리 리 앞에 뛰어들어 커틀라스를 휘둘렀다. 그녀가 해적의 갈비뼈를 걷어차자, 그는 애처롭게도 부두에 거꾸로 떨어졌다. 사방에서 검은바다 해적단원들이 케이틀린의 명령에 따라 밧줄을 잘라내면서 상대 해적들에게 저항하고 있었다. 부두의 무법항 투사들도 붉은해적단을 막아내려고 애를 썼지만, 허를 찔린 건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첸이 리 리의 곁에 다가왔다.

"할 수 있을 때 떠나야겠다, 리 리야."

"진주 없이는 가지 않을래요!" 그녀는 딱 잘라 말했다. "이 배 어딘가에 있다잖아요! 찾아내야 해요!"

배가 움찔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케이틀린의 선원들이 닻줄을 잘라내는 데 성공하자, 거대한 화물선이 곶 바깥으로 밀려나기 시작한 것이다. 배 측면을 따라 난 구멍에서 노가 나타났다. 리 리는 갑판 아래에도 그녀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선원들이 있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넵튤론의 신부호는 울컥거리며 무법항을 빠져나갔다.




"어서 가!" 케이틀린이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아직 붉은해적단원 한 명과 결투를 벌이는 중이었으며, 단검으로 상대의 검을 연신 막아내느라 눈코 뜰 새도 없었다. 둘은 얼마간 격렬하게 칼을 부딪혔지만, 결국 케이틀린이 상대를 발로 차 배 측면으로 떨어뜨렸고, 그 불쌍한 해적은 바다 위로 추락했다. 그녀는 달려가서 배의 키를 잡고 화물선을 이끌었다.

만을 벗어나자 바람이 밀려왔고, 기다란 가시덤불 곶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갑판 아래에서는 노가 다시 사라지고, 돛이 바람을 받아 부풀어 올라 배를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리 리는 마음을 놓아야 할지 걱정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와 첸은 두 해적 진영 간의 전면전에서 살아 남기는 했다. 하지만, 이제 케이틀린의 배에 사로잡힌 신세였다. 도망칠 곳은 바다 뿐이었다. 뒤쪽으로 무법항이 빠르게 작아지는 가운데, 리 리는 적의 기습이라는 위기가 지나간 지금, 케이틀린과 선원들이 자신과 첸에게 다시 달려들기까지 남은 시간이 얼마나 있을지 생각했다.

케이틀린이 갑자기 욕설을 퍼부었다. 어찌나 저속한 말이었는지, 리 리의 얼굴이 붉어질 정도였다.

무법항 해역 밖, 항구의 대포 사거리를 조금 벗어난 곳에서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완전 무장한 함선 세 척이었다. 폭넓은 검은색과 붉은색 줄무늬로 장식된 돛과 휘날리는 깃발은 붉은해적단의 것이었다. 케이틀린은 다시 한 번 욕설을 퍼부었다. 다른 선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첸은 안절부절못하며 불안하게 움직였다. 넵튤론의 신부호는 함정을 향해 뛰어든 것과 마찬가지였다.

"대포 준비!" 케이틀린이 소리쳤다. "모두 방어 태세로! 목숨을 걸고 싸워라!"

"우리도 마찬가지군." 첸이 음울하게 말했다.

배가 사거리에 접어들자마자, 붉은해적단은 사격을 개시했다. 포탄은 대부분 배에 미치지 못하고 바다에 떨어졌지만, 그래도 일부는 넵튤론의 신부호에 적중했다. 충격을 받아 갑판은 요동쳤고, 나무 파편이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리 리와 첸은 몸을 날리고 팔로 머리를 감쌌다.

"미칠 것 같아요." 리 리가 으르렁댔다. "공격을 받으면서도 반격하지 못하다니."

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전은 그런 면에서 아주 답답하단다."

케이틀린과 선원들도 마침내 함포로 반격을 시작했고, 적의 함선에 포탄을 적중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적함들은 넵튤론의 신부호를 향해 똑바로 다가오고 있었다. 선원들이 함포를 재장전할 때쯤이면, 배에는 붉은해적단원들이 물밀듯이 들이닥칠 것이었다.


"무기를 들어!" 적함이 다가오는 모습을 보며 케이틀린이 소리쳤다. "잊기 힘든 전투를 보여주자!"

다가온 붉은해적단 함선과 넵튤론의 신부호 측면이 부딪히며 배가 거칠게 흔들렸다. 상대 함선의 선원들은 모두 온갖 종류의 도검류 무기들을 꺼내 들고 난간을 넘어 들이닥쳤다. 넵튤론의 신부호 선원들도 사납게 싸웠지만, 숫적으로 너무 열세였다.

케이틀린은 두 명의 상대와 동시에 맞섰다. 한 쪽 귀가 뭉텅이로 잘려나간 고블린과, 케이틀린과 마찬가지로 기다란 단검을 휘두르는 훤칠하고 유연한 여자 나이트 엘프였다. 둘의 공격에 밀린 케이틀린은 갑판을 따라 점점 밑으로 내려가다가, 결국 리 리와 등을 마주했다. 리 리는 재빨리 측면으로 돌아, 지팡이로 나이트 엘프의 다리를 후려쳐 상대를 쓰러뜨렸다. 나이트 엘프는 얼굴을 바닥에 쳐박고 코피를 쏟았다.

"이제 내 진주 훔쳐간 게 좀 미안하겠네." 리 리가 말했다.

"별로 그렇진 않은데." 케이틀린이 대수롭지 않게 답하며, 자신에게 무모하게 달려든 노움 하나의 배를 갈랐다. "너희가 날 찾아오지 않았다고 해도, 그냥 전투에 참여할 선원이 둘 줄어든 것 뿐이지, 뭐. "

리 리는 발끈하며 맞받아치려 했지만, 그 순간 붉은해적단원이 다가오는 바람에 전투에 집중해야 했다. 그녀는 발로 차고, 몸을 숙이고, 지팡이를 사용하여 적을 쓰러뜨리고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여기 저기로 마법 가루를 던져, 벌떼와 작은 새들, 이빨이 날카로운 각다귀들을 보내 해적들을 공격했다. 하지만 붉은해적단의 공습은 멈출 기색이 없었다. 적의 수는 너무 많았고, 해적 하나가 쓰러지면 다른 하나가 그 자리를 채웠다.

리 리는 상황이 좋지 않음을 서서히 깨달았다. 그녀와 첸은 어깨를 맞대고 함께 싸우고 있었지만, 역부족임을 알았다. 넵튤론의 신부호 선원들은 모두 케이틀린과 리 리, 첸과 함께 갑판 중앙에 모여 있었다. 무기를 바깥쪽으로 하고, 거친 숨소리로 땀과 피를 비오듯 흘리며, 사방이 적에게 포위된 채 서 있었다. 리 리는 이를 악물었다.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폭풍 전야와 같은 살육전 직전의 침묵을 깨고, 나무 갑판이 텅텅 울리는 소리가 지속적으로, 운율에 맞게 들렸다. 붉은해적단원들의 머리 위에 선장의 모자가 둥실 떠올랐다. 모자의 주인은 주위의 해적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그가 해적들 틈을 헤치고 무리의 맨 앞으로 나서자, 리 리는 적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거대한 체격의 드레나이로, 발굽은 저녁 식사용 접시만큼이나 컸다. 얼굴의 촉수는 붉은색 외투 앞으로 흘러내려, 마치 끈적끈적한 푸른색 문어 다리 같았다. 오른쪽 눈을 안대로 가린 그는 왼손에 리 리가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커다란 커틀라스를 들고 있었다.

"일지에는 드레나이가 평화를 사랑하는 영적인 종족이라고 쓰셨잖아요!" 리 리가 첸에게 투덜거렸다.
"이 녀석은 만나지 못했었구나." 첸이 속삭이며 답했다.

"이런, 이런." 드레나이의 독특한 억양이 거만하게 혀 위를 굴렀다. 이 정도면 검은바다 해적단에서 한 놈 정도는 걸려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유명한 케이틀린 룬위버 양이 이렇게 납시다니... 이 얼마나 운 좋은 일이야? 아, 정말,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네 이름 맞잖아, 안 그래? 널 만나다니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음? 낯익은 이름인데." 첸이 중얼거렸다. "어디서 들어봤더라?"

"레빌가즈 남작이 널 그렇게 아낀다던데, 케이틀린. 꽤나 유명한 검사라면서." 드레나이 선장이 말을 이었다. "뭐, 지금은 재정적인 문제가 좀 있는 것 같던데, 그런 거라면 내가 도와줄 수 있지."

"너 따위와 한 패가 되느니, 무역회사에 빚 대신 내 심장을 갚아주겠어." 케이틀린이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네놈은 대체 누군데? 여기부터 톱니항까지, 붉은해적단이라면 내가 모르는 놈은 없을 텐데."

드레나이 선장은 과장된 몸짓으로 화려하게 모자를 벗었다.

"선장 코슬로프, 이렇게 인사드립니다.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이지만, 붉은해적단을 지휘하게 된 지가 얼마 되지 않았거든. 오늘의 성과를 바탕으로 미루어 짐작해 보면, 내 전임자들보다는 출세길이 훨씬 탄탄할 모양이야. "

눈이 멀 듯이 밝은 쪽빛 섬광이 멀리 무법항 쪽에서 번쩍였다. 코슬로프 선장은 빙글 돌아 빛이 번쩍인 곳을 살폈지만,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헛기침을 하고 다시 케이틀린 쪽으로 돌아섰다.

"너를 비롯해 여기 선원들에게 선택권을 주지." 코슬로프가 말을 이었다. "항복하거나, 죽거나. 간단하지?"

"넌 아직 이긴 게 아냐." 위압적인 몸짓으로 단검을 들어올리며, 케이틀린이 딱 잘라 말했다.

"죽는 쪽을 선택한 걸로 알겠다."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코슬로프가 답했다. 그는 팔을 들어 공격 신호를 내리려 했다.

마치 총성 같은 폭발하고 갈라지는 소리가 배 주위를 가득 채웠다. 모두들 허둥지둥 몸을 숨겼다. 넵튤론의 신부호 선체가 물 밖으로 솟아나오면서, 함선 전체가 진동했다. 배가 기울어지는 통에 리 리는 균형을 잃고 갑판에서 우아하게 미끄러져 내려가다가, 의식 잃은 붉은해적단원에 걸려 넘어졌다. 그녀는 뱃전에 콰당 넘어졌지만, 배가 안정되자 다시 일어섰다.

넵튤론의 신부호와 붉은해적단의 함선 세 척을 둘러싼 바다가 온통 얼어붙어 있었다.

리 리는 눈을 깜빡였다. 동쪽으로는 가시덤불 해안이 보였다. 야자수와 초목으로 뒤덮인 밀림이었다. 이곳은 열대 기후의 바다였다.

"이게 대체 무슨 난리지?" 코슬로프 선장이 소리쳤다.

"나도 그게 알고 싶은데." 리 리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너보고 항복하라는 난리지." 남자 목소리가 배 위를 쩌렁쩌렁 울렸다.

모두가 당황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보라색 로브를 입은 네 명의 형체가 얼음 위를 빠르게 움직여 배를 향해 다가왔다. 적갈색 머리에 피부가 창백한 중년 남성을 선두로, 네 명은 넵튤론의 신부호 난간을 손쉽게 넘어 갑판 위에 올라섰다.

"넌 뭐냐" 코슬로프가 분노를 쏟아내며 물었다.

"아빠?" 목소리에 현실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면,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대한 놀라움이 가득한 케이틀린의 목소리는 지금 나타난 네 명을 모두 사라지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앞장선 마법사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하! 당신이 앤자이럼 룬위버로군." 코슬로프가 조롱하듯 말했다. "거 참 감동적인 가족 상봉인걸. 미안하지만, 같이 저승으로 보내줄게. 모두 죽여버려!"

"아, 정말 그럴 수 있겠어?" 앤자이럼이 말했다.

붉은해적단은 돌격했다.

그건 전투라고 부르기도 민망했다. 리 리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궤멸"이라는 말 뿐이었다. 네 마법사는 범접할 수 없는 존재였다. 손을 가볍게 흔드는 것만으로 그들은 비전 마력탄을 사방으로 쏘아 보냈다. 응축된 비전의 힘이 어찌나 강력한지, 리 리의 팔에 있는 털들이 온통 곤두설 정도였다.

붉은해적단은 강력한 마법사들에게 손도 대지 못했다. 해적들은 갑판과 돛대에 처박혔고, 난간 너머로 날아가 얼음 위를 미끄러졌다. 분별력이 있는 해적들은 앞다투어 모두 도망쳤다. 미끄러지고 넘어지며 자신의 배로 돌아가서 갑판 아래에 숨어 폭풍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넵튤론의 신부호 주위 하늘은 화려한 불꽃놀이가 벌어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다채로운 빛이 수없이 폭발하고 앤자이럼과 동료들을 공격하려는 자들에게 쏟아져 내렸다.

리 리는 갑판의 상자에 기대 앉아, 만족스럽게 유쾌한 광경을 지켜봤다. 이거야말로 멋진 마법이었다!

코슬로프 선장도 그렇게 어리석지만은 않았다. 마법사들이 놀라운 비전 마력을 선보이자 마자, 그는 현장에 오래 머물지 않고 달아나 버렸다. 뱃전을 훌쩍 뛰어넘어, 자신의 패배를 한탄하며 얼음 위를 달렸다.

마지막 붉은해적단원이 자신의 배로 돌아간 후, 네 마법사가 함께 손을 들어 올리자, 함선 네 척을 가두고 있던 얼음이 녹아 사라졌다. 리 리는 붉은해적단원들이 자신들의 함선 위에서 바삐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모두들 돛을 활짝 펴서 넵튤론의 신부호와 거리를 벌리려고 했다. 남은 선원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주위를 살폈고, 묘한 침묵이 배 위로 내려앉았다.

케이틀린 룬위버는 아버지와 다른 마법사들 앞에 섰다. 인간 여마법사 하나와 유쾌한 모습의 여자 노움, 키 큰 남자 하이 엘프 마법사였다.

"난... 어..." 케이틀린은 입을 열었지만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결국, 그녀는 한숨을 쉰 후 다시 시작했다. "고마워요. 어... 우리 목숨을 구해주셔서요."

"어떻게 아셨어요?" 케이틀린이 물었다. "여기 계시지도 않았잖아요."

이 말을 들은 앤자이럼이 짓궂게 웃었다. "내가 조금 알아보니, 무법항의 공용어는 돈이더구나. 그래서 뭔가 일이 터졌을 때 내게 귀띔해 주는 '친구들'을 조금 사귀어 두었거든. 함정이 짜였다는 말을 얼핏 들었던 적이 있는데, 오늘 일을 알게 되었을 때는 너무 늦은 게 아닌가 걱정을 많이 했단다. "

케이틀린이 눈썹을 잔뜩 치켜 뜨며 대답했다. "아, 그래요."

"이름이 귀에 익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첸이 케이틀린과 마법사들에게 다가서며 끼어들었다. "룬위버라는 이름을 어디선가 들었던 적이 있거든요." 그는 앤자이럼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키린 토의 대마법사님이시죠?"

대마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첸을 바라봤다. "당신들에 대한 책은 읽어 봤지만, 이렇게 판다렌을 직접 만나본 건 처음이군. 내 딸의 선원이오?"

첸은 이를 보이며 활짝 웃었다. "아닙니다. 제 조카와 저는 따님의 범죄 피해자입니다."

케이틀린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의 얼굴에는 엄마 몰래 과자를 꺼내 먹다가 들킨 소녀의 표정과 분노가 적절히 섞여 있었다. 앤자이럼이 날카로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봤다.
"케이틀린!"
"아, 정말 넵튤론이시여!" 그녀는 두 팔을 들어올리며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이건 아니잖아요. 전 해적이라고요, 아빠! 가끔은 도둑질도 해요! 업무의 일부라고요! 그런 눈으로 절 보지 마세요. 대마법사로서 아빠가 한 일들이 모두 완벽하게 도덕적이었다고는 하지 않으시겠죠?"

"아, 정말 넵튤론이시여!" 그녀는 두 팔을 들어올리며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이건 아니잖아요. 전 해적이라고요, 아빠! 가끔은 도둑질도 해요! 업무의 일부라고요! 그런 눈으로 절 보지 마세요. 대마법사로서 아빠가 한 일들이 모두 완벽하게 도덕적이었다고는 하지 않으시겠죠?"

"그건 따님 말이 맞네요, 앤자이럼 님." 그녀가 말했다.

그는 과장된 몸짓으로 한숨을 쉬었다. "내가 이길 가능성은 없겠지, 모데라?"

"힘들 것 같은데요!"




"그럼... 어디," 앤자이럼이 말을 이었다. "이번 일에만 한정해 보면, 아마도 스팀휘들 무역회사에서 네게 쓸 데 없는 싸움을 의뢰했고, 그걸 거부한 탓에 생긴 빚을 갚으려고 이분들의 물건을 훔친 거겠지?"

"아빠, 대체 어떻게-" 케이틀린은 말을 삼켰다. "묻지 않을게요. 네, 맞아요."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 앤자이럼은 널찍한 로브 소매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거의 주먹만큼 커다랗고 빛나는 보석을 꺼냈다. "이건 마력이 깃든 보석이란다. 이 정도면 빚을 탕감할 수 있지 않을까?"

케이틀린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탐욕의 빛이 떠올랐다. 그녀는 손바닥을 내밀었다. "물론이죠. 마력 깃든 보석을 찾는 사람이 꽤 많거든요. 어떤 힘이 담겼는데요?"

"아마 착용하는 사람의 주문 시전을 도와줄 거다."

케이틀린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마 그럴 거라고요?"

"이걸 만든 마법사는 당시 학생이었는데, 솔직히 말해 솜씨가 아주 좋은 편은 아니었어.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하려고 이걸 만들었지. 아, 그래도 시험은 망쳤지만 말이야."

앤자이럼의 동료 마법사 세 명이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케이틀린은 의심스러운 눈길로 아버지를 바라봤다.
"학생들 중 한 명에게서 이걸 압수한 건가요?"

"아냐." 안지렘이 답하기 전에 모데라가 말했다. "물론 그런 보석을 사용하려는 학생들이 무척 많았겠지만."
앤자이럼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거 아빠가 만들었죠?" 케이틀린은 의문이 풀렸다는 표정이었다.

앤자이럼이 헛기침을 했다. 왠지 부끄러운 듯이 보였다. "그래. 어, 아까 말했듯이, 별 도움은 되지 않았단다. 부정행위를 해서 성공하는 법은 없지. 난 마법이란 걸 무척 힘들게 배워야 했어."

조금 전 아버지가 했던 것과 똑같이, 케이틀린이 눈살을 찌푸렸다.

"진짜 마력이 깃들어 있긴 한가요?"

"아, 진짜 그렇긴 해. 딱히 잘 깃들었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절반 정도만 제대로 동작할 거다." 앤자이럼은 잠시 말을 멈췄다. "물건을 팔 때 그 부분은 밝히지 않는 게 좋겠다."

여전히 키득키득 웃으며 모데라가 다시 말했다. "딸이 누구 닮았는지 알겠네요."

앤자이럼은 한숨을 푹 내쉬고, 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네가 조금 더... 일반적인 직업을 택하길 바랐었다는 사실을 숨기지는 않겠다." 얼굴이 부드럽게 풀어지며 아버지가 말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너는 내 딸이다. 내가 그걸 잊는 일은 없을 거다."

"아유, 닭살 돋게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케이틀린은 투덜거렸지만, 얼굴은 웃고 있었다.

앤자이럼은 케이틀린에게서 물러나 주문을 시전했다. 딸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 손을 흔들고, 아버지와 나머지 마법사들은 사라졌다.

***

무법항에 다시 정박해서, 리 리와 첸은 넵튤론의 신부호에 있는 케이틀린의 숙소에서 그녀와 마주 앉았다. 케이틀린은 서랍 속에서 상자를 꺼내 리 리에게 내밀었다.

"당신 물건이야. 정말 미-" 케이틀린은 말을 끊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젠장, 아빠 때문에 말이 헛나오네." 한숨을 쉬고, "자, 이걸로 빚을 갚을 필요는 없어졌으니, 돌려줄게."

리 리는 헛기침을 했고, 첸은 팔짱을 꼈다.

"알았어, 알았다고. 애초에 몰래 가져오지 말았어야 했어. 정말 안타까워."

"좀 낫네." 리 리는 명랑하게 말하며 상자를 받아들었다. 상자 안을 들여다 보니, 벨벳에 싸인 진주가 조용히 빛났다. 만족한 리 리는 상자를 가방에 넣었다.

케이틀린은 조금 불편해 보였다. "네 진주를 훔친 데 대한 보상이랄까... 또 붉은해적단과의 싸움에서 도움을 주기도 했으니, 감사의 표시로 내가 한 가지 제안을 할게."

"둘이 남쪽으로 가려는 걸 알고 있어. 여기 무법항이 습격을 받아 온통 뒤죽박죽이 됐으니, 여객선들이 다시 운항을 시작하기까지 시간이 꽤 걸릴 거야. 난 빚을 정리하러 가젯잔으로 가서 무역회사 대표부를 만나야 하는데, 원한다면 무료로 태워 줄게. 거기 연줄이 좀 있으니까, 아마 당신들을 도와줄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거야."

"좋아, 나쁘지 않네!" 리 리가 말했다. "우리 물건을 슬쩍한 일에 대해 정말 죄책감을 많이 느끼는 모양이구나. 그렇지?"




"성질 긁지 마." 케이틀린은 담담하게 말했다. "어때?"

"난 좋아." 리 리가 답했다. "가젯잔에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거든. 삼촌은 어때요?"

"마지막으로 해적선을 타본 것도 꽤 오래 전이구나." 첸이 말했다. "한 번 더 타보고 싶은걸."

"함선을 수리하는데 하루에서 이틀 정도 걸릴 거야." 케이틀린이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리 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리 리는 기꺼이 손을 맞잡았다.

"그 때 보자고."

***

가젯잔으로 향하는 뱃길은 무척 수월했다. 바다에 다시 오르고 보니 리 리는 왠지 안절부절못하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배 위에서의 삶은 셴진 수 위에서의 삶과 매우 달랐지만. 그녀의 마음은 앤자이럼 룬위버와 소원해진 그 딸이 재회하는 장면을 계속해서 떠올렸다. 그 모습을 머릿속으로 계속해서 굴려보느라, 왠지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목적지가 가까워오자, 리 리는 배의 키 쪽으로 다가갔다. 케이틀린은 키를 단단히 잡고 가젯잔으로 향하고 있었다.
"밤이 되면 도착할 거야." 다가오는 리 리에게 케이틀린이 말했다.

리 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기," 잠시 머뭇거린 그녀는 말을 이었다. "물어볼 게 있어."

케이틀린이 궁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뭔데?"

리 리는 가방을 내려놓고 진주를 꺼냈다. "이걸 잠깐 들고 정신을 집중해 봐. 그리고 나한테 뭐가 보였는지 알려줘."

케이틀린은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진주를 받아 들었다. 그녀는 셴진 수의 대도서관에서 리 리가 그랬던 것처럼, 두 손으로 진주를 감싸 쥐었다. 케이틀린의 눈이 초점을 잃었고, 그녀는 부드럽게 오르내리는 배의 갑판에서 조용히 진주 표면을 바라봤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그녀는 눈을 깜박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리 리의 어깨 너머로 먼 곳을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뭐가 보였어?" 케이틀린에게서 진주를 받아들고 조심스럽게 가방에 넣으면서 리 리가 물었다.

케이틀린은 리 리를 향해 눈을 돌렸다. "진주가 미래를 보여준다는 걸 알고 있었어?"

리 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환영을 보여주기는 하는데, 사실인지 아닌지는 나도 몰라."

"함선의 키를 잡고 있는 내 모습을 봤어." 케이틀린이 말했다. "사실, 이 녀석하고 크게 다르지는 않았어. 하지만 왠지 내 배라는 걸 알겠더라고. 합법적인 내 배." 그렇게 덧붙이고, 그녀는 리 리를 돌아봤다. "검은바다 해적단도, 스팀휘들 무역회사도 아닌..." 그녀는 잠시 침묵했다. "내 배." 조용히 말하고, 그녀는 생각에 잠겨 입을 열지 않았다. 리 리는 배낭을 들어올려 어깨에 멨다. 계단을 내려오며 케이틀린을 흘긋 보자, 그녀는 잔잔한 미소를 띠며 푸른 바다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

"함선의 키를 잡고 있는 내 모습을 봤어." 케이틀린이 말했다. "사실, 이 녀석하고 크게 다르지는 않았어. 하지만 왠지 내 배라는 걸 알겠더라고. 합법적인 내 배." 그렇게 덧붙이고, 그녀는 리 리를 돌아봤다.

"오늘따라 말이 없구나, 리 리." 첸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일 있니?"

리 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깍지 낀 두 손을 머리 뒤에 받치고 그물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첸 삼촌, 그 마법사가 우릴 붉은해적단에게서 구해줬을 때... 좀 이상하지 않았어요?"

"뭐? 그 강력한 키린 토의 네 마법사가 무법항에 순간이동하여 갑자기 나타나, 배에 훌쩍 올라 타더니 우리 적을 싹 쓸어버린 것 말이냐? 전혀. 아주 평범한 일이었던 것 같구나."

"하. 하. 재미있기도 하네요." 리 리가 말했다. 첸이 싱긋 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 마법사가 케이틀린에게, 그녀가 언제까지고 자기 딸이라는 사실을 절대 잊지 않을 거라고 한 거 말이에요. 무슨 일이 있어도 상관 없다고 했었죠."

"그게 왜 이상하니, 리 리야?" 첸의 목소리가 조용히 잦아들었다.

그게..." 미처 예상하지 못했지만, 리 리의 목이 메어 왔다. "그게 정말일까요?" 리 리가 미처 억누르기 전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우리 아빠도 나에 대해 그렇게 생각할까? 아니면 내가 틀려먹은 아이라고 생각할까?' 벌떡 몸을 일으킨 탓에 균형이 흐트러졌고, 그녀는 하마터면 그물침대에서 떨어질 뻔 했다.

첸은 그녀를 붙잡아 안심시킨 후, 무릎을 꿇고 꼭 껴안았다. 리 리는 시선을 피하며, 눈 한쪽을 닦았다. "먼지가 좀 많네요." 그녀는 웅얼거렸다.

첸은 그녀를 붙잡아 안심시킨 후, 무릎을 꿇고 꼭 껴안았다. 리 리는 시선을 피하며, 눈 한쪽을 닦았다. "먼지가 좀 많네요." 그녀는 웅얼거렸다.

"난 그렇게 믿고 있단다." 첸이 말했다.

첸의 품에 안긴 리 리의 얼굴에 눈물이 흘러 내렸다. 두 볼의 털 위에 촉촉한 눈물길이 생겼다.

"고마워요, 첸 삼촌." 속삭이는 듯한 대답.

첸은 말을 이었다. "촌 포는 너를 그 누구보다 사랑한단다. 내 목숨을 걸고 말할 수 있어."

리 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얼굴을 삼촌의 어깨에 묻었다. 밤은 부드럽게 가젯잔과 타나리스 사막에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