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한 진주의 이끌림으로 첸과 리리가 당도한 곳은 티탄의 손길이 닿은 고대인의 도시 울둠, 데스윙과 알아키르에 의해 극심한 내전을 겪어야 했던 이곳에서 첸과 리리는 슬픈 사연을 지닌 형제를 만나게 된다. 서로 적이 될 수 밖에 없었던 두 형제, 그들을 바라보며 첸은 자신의 형제를 떠올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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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주전자에서 우러나오는 김이 향긋한 박하 향으로 공기를 뒤덮었다. 그 향기를 맡자 촌 포는 셴진 수가 북쪽을 향해 움직이던 때가 떠올랐다. 낮이 짧았고 기온이 쌀쌀했다. 한기를 견디기 위해 시우 리는 물을 끓여 차를 달였다. 두 판다렌은 앞발로 찻잔을 감싸고 외투를 두른 채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차를 따라주고 있는 사람은 시우 리가 아니라 그녀의 모친, 메이였다.

“매우 피곤해 보이는구나, 포.” 메이가 말했다.

촌 포는 찻잔을 들어올렸다가 다시 내려 놓았다. 메이가 앉아 있는 그곳에, 그가 예전에 리 리와 첸에게 험하게 굴었던 그날 저녁 리 리가 앉아 있었다. 그 다음 날 저녁, 리 리는 진주를 들고 몰래 떠났다. 그 후로 촌 포는 리 리에게서부터 짤막한 편지들밖에 받지 못했다. 그는 딸이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리 리가 걱정되는군요.” 촌 포가 말했다. “형님도 그렇고요.”

메이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녀의 얼굴 주위에서 회색 빛으로 변해가는 털은 단정하게 빗어 넘겨 땋아 내린 은빛 머리카락과 잘 어울렸다. 그녀가 촌 포를 바라보았을 때, 그는 순간 속이 타 들어가는 아픔을 느꼈다. 그녀의 눈동자는 시우 리의 것이면서 동시에 리 리의 것이었다.

“가족이 걱정되는 것은 당연하단다.” 메이가 말했다.

“제가 뭘 잘못한 거죠?” 촌 포가 내뱉듯이 말했다. 눈썹을 잠시 치켜 올린 후, 메이는 다시 차를 들었다.
“좀 더 자세히 말해보려무나.” 그녀가 말했다.

“제 자신이 너무 비참합니다. 가족은 파탄 났고, 이제 제 곁에 남은 건 아들뿐입니다. 딸은 저를 경멸하고요.” 그의 목소리 아래에서는 분노와 좌절이 끓고 있었다. 메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리 리는 너를 경멸하지 않는단다, 포.” 그녀가 말했다. “너는 잘못된 질문을 하고 있는 게야.”
“그럼 어떤 질문을 던져야 될까요?”

“너는 네 자신에게 육체가 죽는 것과 정신이 죽는 것 중에 무엇이 더 비극적인지 물어볼 필요가 있겠구나.”

촌 포가 눈을 끔벅이며 말했다. “네?”

찻잔을 내려놓으며 메이는 손을 포개었다.

***




“시우 리가 죽었을 때, 너는 아내를 잃었지. 나는 딸을 잃었고. 나는 네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고 있단다. 나도 겪어보았기 때문이지.”

촌 포는 갑자기 목이 메는 걸 느꼈다. 메이는 계속해서 말했다.

“내 딸은 낚싯배를 정말 좋아했지. 바다도 좋아했고. 낚시를 하며 느끼는 한가함과 침착함, 그리고 기대감 모두가 그 애에게 소중했단다. 물론, 위험도 즐겼지.”

메이는 촌 포의 어깨 너머로 무언가를 바라보는 듯했다. 마치 그곳에 있는 기억의 한 가닥을 잡은 것처럼, 그녀는 말을 이었다.

“나는 시우 리가 배를 돌보면서 즐거워하던 걸 보곤 했지. 배를 몰고 해안가를 떠나 넓은 바다를 향해 나아갈 때, 그 애는 영혼이 해방되는 것을 느꼈을 게야.”

흐려졌던 메이의 초점이 다시 잡혔다.

“그저 그 애를 더 오래 붙잡기 위해 그런 즐거움을 빼앗 수 있었겠니?”

촌 포는 찻잔을 바라보았다.

“보는 제 부탁 때문에 리 리를 따라갔고 결국 죽었습니다…”

“리 리나 첸이 보가 죽기 전에 남긴 말을 네게 전해주었니, 포?”

그는 다시 메이를 올려보았다. 예상치 못한 물음에 촌 포는 갑자기 초조해졌다.

“아니요.” 그가 대답했다.

“보가 남긴 마지막 말은 리 리와 함께 여행할 수 있어서 기뻤다는 것이었단다. 자신이 무언가를 깨우쳤다고 했지. 만약 이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다 해도 그는 똑같은 결정을 했을 게야.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았던 거야.”

메이의 말에 촌 포는 잠시 동안 머뭇거렸다.

“정말인가요?”

리 리와 첸 둘 다 내게 그리 말했단다. 난 그 둘이 거짓말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들도 보를 잃었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상심했으니 말이다.”

메이는 마디진 손을 뻗어 촌 포의 손을 덮어주었다.

“포, 리 리를 네 뜻대로 다루기는 힘들 게다. 너도 잘 알잖니. 벌써 두 번이나 네게 반항하지 않았니. 그 애는 너와 똑같은 모험가란다. 방랑벽은 우리 판다렌의 일부이고, 셴진 수는 그 상징과도 같지. 하지만 리 리는 언제까지나 너의 딸이란다. 그 애가 영영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너는 리 리를 잃은 게 아니라는 게지.”

“저는 그저 그 아이가 무사하기를 바랄 뿐이에요.” 촌 포가 눈을 감으며 말했다.

“리 리는 스스로를 지킬 만한 아이란다.” 메이가 답했다. “그리고 자기만의 행복 또한 찾을 수 있을 게야.”

황금빛 모래언덕들이 그녀의 발밑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날개라도 돋친 듯 신속하게 사막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서쪽으로 지는 태양을 오른편에 두고 리 리는 타나리스 남서쪽 외곽의 험난한 산맥을 내려갔다. 산기슭에 있는 작은 선인장 오아시스를 지나, 그녀는 바위가 갈라져서 생긴 좁은 길을 향해 달려갔다. 마치 어마어마하게 큰 도끼에 의해 쪼개진 것처럼 바위 사이의 통로는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네 개의 근엄하고 위풍당당한 조각상이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하나는 평범한 인간 여자 같았지만, 나머지 셋은 동물의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리 리가 조각상을 바라보자 그것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호의적인 모습으로 조각상들은 손을 내밀었다.

흥미를 느낀 리 리는 천천히 조각상들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자 돌연 석상들의 태도가 변했다. 그것들은 으르렁거리며 낫과도 같은 손톱이 달린 앙상한 손가락을 리 리를 향해 뻗었다. 리 리는 비명을 지르려 했다. 그러자 네 개의 조각상들은 하나로 합쳐져 리 리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러나 악의를 품은 것은 여전했다. 그 역시 그녀를 붙잡고 가두려 했다. 리 리는 도망치려 했으나 방금까지만 해도 가벼웠던 발걸음이 점차 흔들려 앞으로 휘청거렸다. 리 리는 넘어지면서 시간이 멈춘 것과도 같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을 느꼈다. 길바닥에 부딪히는 순간, 주변의 모든 것이 푸르게 변했다. 어느 새 폭풍이 휘몰아치는 바다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셴진 수에 버금갈 크기의 파도가 그녀를 이리저리 내팽개쳤다. 가라앉지 않기 위해 팔을 허우적거렸지만, 숨을 들이쉬는 게 고작이었다.

파도의 물마루에 올라타게 된 그녀는 저 멀리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리 리는 판다렌 하나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을 향해 힘겹게 바다를 가르며 헤엄쳐 오는 것을 보았다.

“엄마!” 리 리가 비명을 질렀다.

시우 리는 딸을 향해 소리쳤다. 리 리는 그녀를 향해 두 손을 뻗었으나, 파도가 곧 부서졌다. 리 리가 세찬 물살에 실려 앞으로 가자, 어머니의 얼굴이 성큼 다가왔다. 필멸자의 손으로 판 그 어떤 무덤보다도 더욱 무덤 같은 물살이 리 리를 뒤에서부터 짓눌렀다.

***




얼굴에 떨어지는 물줄기가 리 리를 악몽에서 깨웠다. 리 리는 일어서보려고 했으나 이내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바닥에 넘어졌다. 주위에서 잡동사니들이 나동그라졌다.

리 리?” 첸의 걱정에 찬 목소리를 듣고 그녀는 정신을 추스렸다. “괜찮니, 얘야?”

리 리는 눈을 비비며 제대로 자리에 앉았다. 환상과 현실을 힘겹게 구분하고 나서야 그녀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기억해냈다. 그녀는 타나리스를 가로질러 울둠으로 향하는 드워프 여행자들의 짐마차 안에 있었다.

“네.” 그녀가 중얼거렸다. 아직도 잠과 악몽의 후유증이 그녀의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 “나쁜 꿈을 꿨어요.” 순간적으로 어머니의 절박한 얼굴을 떠올리며 리 리는 몸서리쳤다.

“왠지 그런 것 같더구나. 자면서 계속 엎치락뒤치락하던걸. 그러다가 물주머니도 하나 엎지르고 말이지.” 첸은 물에 젖어 축축한 가죽 주머니를 들어올렸다. 리 리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누르며 뭔가 재치 있게 넘어갈 만한 말을 떠올리려 했지만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았다.

“무슨 꿈을 꿨기에?” 첸이 물었다. “말해줄 수 있니?”

“처음에는 진주가 가젯잔에서 보여준 환영처럼 시작했어요. 저는 타나리스를 지나가고 있었죠. 오아시스가 보였고, 조각상들이 있던 길까지 갔었는데…” 리 리가 말을 멈추었다. 첸은 침착하게 기다렸다.

“그 다음부터는 악몽으로 변했어요. 저는… 폭풍이 일고 있는 바다에 갇혔어요.” 그녀가 끝을 맺었다.

첸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괜찮단다, 리 리야.”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첸과 있으니 안심이 되었다.

캔버스 천을 젖히고 둘은 짐마차의 앞에 올라탔다. 펠예라는 검회색 머리의 여 드워프가 짐마차를 몰고 있었다. 타나리스의 끝없는 사막은 모든 방향으로 펼쳐져 있었다. 그 일률적인 광경에서 그나마 돋보이는 건 며칠 전 지평선에 나타난 남서쪽의 산맥뿐이었다. 사막의 끝에 다다르고 있다는 사실에 여행자들은 꾸준히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었다.

“좀 어떠니, 얘야?” 펠예가 리 리에게 다정하게 말했다. “별로 푹 잔 것 같지는 않던데.”

“악몽을 꿨다고 하네요.” 리 리가 뭐라 말을 하기 전에 첸이 대답했다.

“하긴, 사막의 열기는 사람을 정신적으로 피폐하게 만들죠.” 펠예가 답했다. 낙타의 고삐로 가볍게 허벅지를 치며그녀는 말을 이었다. “누구나 다 악몽이나 헛것에 시달리곤 하고요.”

리 리는 진주가 보여주는 환영이 헛것일 거라고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하지만 근래의 일들을 돌이켜보면서 점점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가젯잔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케이틀린의 인맥으로 손쉽게 배를 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 배로 첸과 리 리는 남쪽으로 나아가 판다리아를 찾아 항해를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유명한 해적의 소개에도 불구하고 선뜻 나서주는 선장이 없었다. 다시 한번 진주에게 앞으로의 향로를 묻자, 이번에는 타나리스를 가로질러 산 너머에 있는 울둠으로 가는 길 비춰주었다. 그리하여 첸과 리 리는 탐험가 연맹의 드워프들에게 동행을 부탁하여 울둠으로 향한 것이었다.

“하루 정도만 더 가면 외곽에 다다를 수 있을 거예요.” 긴 적막을 끊고 펠예가 말했다. “울둠에 가서는 뭘 할 예정이세요?”

“일단 도시로 가야겠죠.” 첸이 말했다.

“아하, 람카헨?”

“어, 네, 람카…헨요.” 서투른 발음으로 리 리는 대답했다. 도시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호숫가에 있는 곳 맞죠?”

“호숫가 북쪽에 있기는 하지.” 펠예가 대답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야.”

“톨비르 말씀이시군요.” 첸의 말에 펠예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그들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거든요. 당신은 좀 아시나요?”

“흠…” 생각에 잠깐 잠기며 펠예가 말했다. “톨비르는 켄타우로스처럼 생긴 종족이야. 말보다는 표범이나 고양이를 닮았지만.”

첸은 흥미가 동한다는 듯이 자세를 똑바로 하며 말했다. “정말 놀랍군요!”

“암, 그렇지요.” 그녀가 말했다. “저도 예전에 람카헨에 갔을 때 톨비르 몇 명과 만난 적이 있지요. 어쨌든, 톨비르들은 각자가 사는 도시의 이름을 딴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있어요. 람카헨 부족은 람카헨에 사는 식으로. 예전에는 두 부족이 더 있었어요. 네페르세트와 오르시스였는데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지요.”

“그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요?” 리 리가 물었다.




펠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쟁이 있었단다. 내전이었어. 이제 실상 남은 부족은 람카헨뿐이지.”

“정말 끔찍하군요.” 첸이 조용히 말했다.

“네, 그렇지요.” 펠예가 동의했다. “전쟁이 끝난 이후로 도시에 가본 적이 없군요. 그래서 요즘은 어떤지 잘 모르겠네요. 하지만 최근에 갔을 때를 돌이켜보면 분위기가 참 암담했던 걸로 기억해요. 아름다운 곳이지만 슬픔에 가득 차 있었죠.”

잔잔하게 흔들리는 짐마차 위에서 셋은 잠시 동안 침묵을 지켰다. 낙타가 모래언덕 하나를 올라가자 행렬의 대표인 달긴이 환호했다.

“저 아래 덤불나무 골짜기가 보입니다! 울둠에 거의 다 왔어요!”

달긴의 기대에 찬 목소리에 방금까지 이어졌던 침울한 분위기를 뒤로하고 리 리와 첸, 그리고 펠예 모두 미소를 지었다. 리 리는 형언할 수 없는 기대감이 온 몸을 휘감는 걸 느꼈다. 첸이 보내왔던 그 어떤 편지에도 울둠에 관해서는 쓰여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

협곡에 도착하자 행렬 전체가 들뜨기 시작했다. 모래가 점점 옅어지면서 지면이 단단해지기 시작했고 여행자들은 걸음을 부추겼다. 그들은 앞에 나타난 어느 황량한 산의 구릉에서 도로가 이어지는 걸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달긴은 힘껏 소리쳤다. “길을 찾았어요! 해가 지기 전에 야영지에 도달할 겁니다!”

그늘진 산기슭으로 행렬은 천천히 나아갔다. 저 위에서는 수호석상들이 지나가는 여행자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리 리가 환영에서 본 것들보다 더 큰 크기였다. 갑자기 그 때의 꿈이 떠오르며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조각상들은 움직이지 않은 채 그녀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낙타의 발굽들이 포장된 도로에 부딪혀 내는 소리가 먼 곳의 종소리처럼 메아리 치는 걸 들으며 리 리는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문득 그녀는 이런 곳을 지은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문화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다. 주위를 둘러보던 그녀는 첸을 보았다. 그 또한 리 리처럼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리우 랑이 여행을 하면서 느낀 기분이 이런 것이었을까? 리우 랑과 그 추종자들이 탐험하는 삶을 택한 것도 이 때문이었을까? 문득 리 리는 호기심 따위는 진작에 잊어버린 아버지를 떠올리며 밀려오는 슬픔을 참으려 노력했다.

***

통로를 나오자 다시 햇빛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길은 서쪽에 있는 웅장한 폐허로 이어져 있었다. 날개가 달린 거대한 톨비르 석상이 큰 검을 들고 무덤을 지키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느라 리 리는 짐마차가 갑자기 멈추었다는 것도 모를 뻔했다. 달긴의 고함이 그녀의 몽롱한 정신을 일깨웠다.

“당신들 왜 이러는 거요? 거기 들이밀고 있는 그것 좀 치우시오!”

리 리와 첸, 그리고 펠예는 경계심 어린 눈빛을 주고받았다. 리 리는 본능적으로 덮개가 덮인 짐마차 바로 안쪽에 기대어둔 지팡이를 움켜쥐려고 뒤로 손을 뻗었으나, 첸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다른 쪽 손으로 그는 폐허 쪽을 가리켰다. 리 리는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행렬을 향하여 키 큰 네발 생물들이 달려왔다. 그들은 황갈색, 갈색 혹은 칠흑 같은 검은색이었으며, 몸통은 인간이었으나 하체와 머리는 고양이와도 같았다. 리 리는 숨이 턱 막히는 걸 느꼈다. 톨비르다! 하지만 그녀의 흥분은 이내 사그라들었다. 그들은 성난, 그리고 무장한 톨비르였던 것이다.

“어이!” 달긴이 톨비르들에게 다가가며 소리쳤다. “우린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소!”

톨비르 일행의 우두머리처럼 보이는 자가 앞으로 나왔다. 가슴팍에 걸친 의복 때문에 다른 톨비르들에 비해 돋보였다. 한쪽 손으로는 가히 엄청난 크기의 창을 가볍게 들고 있었다. 그 톨비르는 달긴의 두 배만 한 크기였다. 리 리는 드워프의 용기에 감탄하였다. 그것이 용기가 아닌 무모함일지라도 말이다.

“우리를 따라 람카헨까지 가줘야겠소.” 톨비르의 대표가 근엄하게 소리쳤다. “파오리스 폐하께 당신들의 정체를 밝히시오.”

“에이, 우리들은 그냥 주위를 둘러보는 중이오!” 달긴이 주장했다. “기록하고, 돌아다니고, 뭐 그런…”

“도시까지 우리와 함께 가야겠소.” 톨비르가 달긴의 말에 개의치 않고 다시 말했다. 달긴은 드워프어로 무언가 중얼거렸다. 그게 무슨 말일지 리 리는 자신만의 상상을 펼치며 키득거렸다. 톨비르들은 아무 말 없이 행렬을 호위하여 람카헨을 향해 나아갔다.

일행은 큰 강과 오아시스를 따라 도시로 향했다. 리 리는 주변의 광경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강가에 사는 생명의 다양성에 경탄했다. 강가에는 야자나무와 활엽수들이 우거져 개구리, 두꺼비, 도마뱀, 다리가 긴 새 등, 여러 동물에게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이런 아름다우면서도 가냘퍼 보이는 생태계가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에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갑작스럽게 삼림이 끊겼다. 네 개의 돌기둥이 하늘로 솟구쳐 있었고 그 너머에서는 매의 머리를 한 거대한 조각상 둘이 도시의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남쪽으로 펼쳐진 비르나알 호수가 타오르는 태양 아래에서 보석과도 같이 반짝였다.

람카헨에 도착한 것이었다. 톨비르들은 여행자들에게 수레를 바깥에 세워두라고 지시하고는, 그들을 우리에 몰아넣듯이 도시로 안내했다. 리 리는 자기보다 덩치가 훨씬 큰 톨비르들 곁을 걸으며 경계하듯이 지팡이를 휘둘렀지만, 톨비르들은 리 리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만약 지금처럼 호송 당하는 입장이 아니었다면 두 판다렌에게 람카헨은 참으로 매혹적인 곳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리 리는 깔끔하게 포장된 도로나 집집마다 걸려 있는 형형색색의 차양들을 보기에는 너무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첸 또한 리 리만큼이나 마음이 불편한 듯했다.

람카헨의 거리를 지나가면서 그들은 도시에 무언가 범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느꼈다. 톨비르 한 무리가 도시 중앙에서 성난 듯이 고함을 치고 있었다. 광장의 곳곳에서 경비원들은 군중 속에 위험하다고 판단되는 인물이 없는지 경계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첸이 소리 내어 말했다.

광장의 북쪽 끝에는 웅대한 건물이 자리잡고 있었다. 입구의 큰 계단이 높은 단으로 이어져 있었고, 그곳에는 묵직한 족쇄가 채워진 다섯 명의 톨비르가 있었다. 세 명의 톨비르가 그들을 호송하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은 얼굴 전체를 덮는 화려한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녀의 위치에서 정확히 볼 수는 없었지만, 리 리는 죄수들의 피부 색깔이 나머지 톨비르와는 약간 다르다고 생각했다.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그녀는 눈을 가늘게 찌푸렸다.

계단 위의 톨비르 한 명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압도하며 소리쳤다.

“파오리스 폐하께서 말씀하신다! 소란을 멈추고 경청하라!”

군중이 곧 조용해졌다. 가면을 쓴 톨비르, 파오리스 왕은 죄수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의 힘찬 음성이 광장에 울려 퍼졌다.

“너희, 살아남은 네페르세트들에게, 사악한 용 데스윙과 결탁한 죄를 묻는다. 육체의 저주를 역행하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데스윙과 그의 동맹인 바람의 정령 군주 알아키르에게 충성을 맹세한 죄를 묻는다. 또한, 그들이 너희에게 부여한 힘으로 동족들에게 전쟁을 선포하였으며…”

“첸 삼촌, 육체의 저주가 뭐죠?” 리 리가 속삭였다.

“나도 잘 모르겠구나.” 그가 답했다.

“티탄의 창조물들에게 일어난 현상이에요.” 그들의 옆에 있는 펠예가 조용히 대답했다. 놀란 두 판다렌은 눈을 끔뻑였다. “태초에 티탄들은 창조물을 만들 때 주로 바위를 사용했고, 그렇지 않더라도 기계적인 수단을 사용했어요. 그래야 긴 세월 동안 노화하거나 쇠퇴하지 않고 그들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티탄을 증오하는 사악한 존재들이 마법으로 이런 창조물들을 파괴하려 했어요. 그 과정에서 창조물들은 아제로스의 다른 생물들처럼 살로 만들어진 육신을 지니게 되었지요.”

“이런 걸 어떻게 다 아시죠?” 리 리가 소리를 낮추어 물어보았다. 펠예는 뭔가 씁쓸한 미소를 띄었다.

“우리 드워프도 그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란다.” 그녀가 말했다. “우리도 한때는 돌로 이루어진 티탄의 피조물이었거든.”

펠예가 육체의 저주에 관해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의 표정에서 드러났다. 리 리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으나, 가을 축제 당시 아이언포지에서 지냈던 때를 떠올리며, 드워프들이 과연 이전처럼 바위의 몸을 지닌 종족이었어도 지금처럼 활기차고 쾌활할 수 있었을까 생각했다. 그녀는 지금의 드워프들이 자신처럼 뼈와 살로 이루어진 존재라는 데 자기도 모르게 기쁨을 느꼈다.

“톨비르들도 그러면 티탄에 의해 창조되었군요.” 첸이 덧붙였다. 펠예가 고개를 끄덕였다.

계단 위에서는 파오리스 왕이 연설을 끝맺으려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나머지 반은 듣지 못한 것 같다고 리 리는 생각했다.

“…대의원회는 이 안건을 오늘 이 시간부터 내일까지 논의할 것이다. 그 다음 날, 너희의 운명이 결정된다. 자기 자신을 변호하고 싶다면 지금 이 시간에 하도록 하라!”




“죄수들은 죽어 마땅하다!” 무리의 누군가가 소리쳤다.

“배신자 놈들을 처벌하라!” 다른 목소리가 외쳤다.

“곧 숙의를 진행할 것이다.” 파오리스 왕이 들썩이는 군중을 향해 말했다. “이 안건에 관해 의견이 있는 시민들은 대의원회에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라.”

네페르세트 죄수들은 군중의 야유와 질타를 받으며 경비원들에게 끌려갔다. 파오리스 왕과 그의 무리는 장엄한 건물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군중은 느릿느릿하게 해산하기 시작했고, 그 와중에도 분노에 찬 중얼거림이 여기저기에서 들려왔다. 리 리와 첸, 그리고 드워프들을 호송하던 톨비르는 그들을 재촉해 화려한 계단을 올라 왕의 거처로 향했다.

여행자들은 파오리스 왕의 면전으로 끌려갔다. 불편한 침묵 속에서 잠깐 동안 일행들을 쭉 훑어본 왕은 입을 열었다.
“내 경비병들이 그대들을 데리고 온 것에는 이유가 있을 거요.” 그가 냉랭하게 말했다. “이 곳에서 뭘 하고 있었소?”
달긴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저희는 고고학자들입니다.” 그는 자랑스럽다는 듯 가슴을 약간 내밀었다. “아이언포지의 탐험가 연맹 소속이지요. 울둠의 고대 유적지에서 아직 알려지지 않은 지식을 탐구하기 위해 왔습니다.”

리 리는 분명 파오리스 왕이 눈을 굴리며 못마땅해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그거 쓰고 있는 가면 때문에 확신할 수는 없었다. 다만 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에 어떤 노움 원정대가 남쪽에 있는 폐허를 기웃거리다가 완전 정신이 나가버린 일례가 있었소.” 약간 불쾌감을 띈 어투로 그가 말했다. “최근에 있던 전쟁에서 당신들이 소중한 지원을 해준 것은 매우 감사하오만, 그대들은 어디까지나 우리 땅에서 외부인이라오. 묻어두는 편이 좋은 것도 있는 법이오. 당장은 내 도시에 머무는 것을 허락하겠으나, 호의를 저버리는 짓은 삼가기 바라오. 이만 가보도록 하시오.”

드워프들은 숨죽여 투덜거리며 바깥으로 나갔다. 리 리는 “학문의 ‘학’자도 모르는”이나 “꽉 막힌 늙다리들” 등의 구절들이 들리자, 웃지 않으려 애를 써야 했다. 첸은 뒤처져서 이 이국적인 건물의 구조와 장식을 넋을 놓고 보고 있었다. 리 리는 웃음 짓고는 그녀의 삼촌 옆에 가서 섰다.

머지않아 둘은 왕의 거처를 떠나기로 했다. 드워프들을 따라잡아 람카헨에 있을 숙박 시설이나 알아볼 생각이었다. 첸이 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순간, 톨비르 한 명이 허겁지겁 건물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파오리스 폐하—!” 황급히 들어온 톨비르가 소리쳤다. “폐하와 대의원회에게 고할 말씀이 있습니다.”

왕은 귀찮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뭘 말하고 싶은지는 이미 들었다, 멘림.”

“제발 부탁드립니다.” 멘림이 다시 말했다. “제발 제 이야기를 들어주십시오. 네페르세트 죄수들에게 자비를…”

“당연히 그대는 그렇게 말하겠지.” 대의원회 중 한 명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파오리스 왕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제지했다.

“멘림, 네가 죄수들의 처우에 관심이 많다는 것은 알고 있다. 어떤 결과가 되었든 대의원회는 정의를 실현할 것이다.”
“그들은 전쟁을 일으켜 패배하였습니다.” 거의 애원하듯이 멘림이 말했다. “그것만으로 부족하십니까? 기어이 피를 피로 응징하실 생각이십니까?”

방에 있던 또 다른 톨비르가 조용하지만 뚜렷하게 말했다. “물론.”

멘림에게 모두의 주의가 집중되었을 때 리 리와 첸은 서둘러 건물 밖으로 나갔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광장에서 머뭇거리고 있을 때, 계단 위에서 멘림이 내려왔다. 한 걸음씩 내려올 때마다 축 처진 팔이 힘없이 흐느적거렸다. 몹시 지쳐 보이는 그의 모습에 첸은 동정심을 느꼈다. 반사적으로 첸은 외로이 있는 톨비르에게 다가갔다.

“의도치 않게 당신이 왕에게 하는 말을 엿들었습니다.” 멘림에게 다가가면서 첸이 말했다. “전 당신이 정말 용감하다고 생각합니다. 해를 끼친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요.”

멘림은 첸의 말에 놀란 듯했다. 첫눈에 보아도 외지인처럼 보이는 두 판다렌을 보며, 그는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그 피폐했던 모습은 조금 나아져 있었다.

“제 이름은 첸 스톰스타우트입니다. 이 쪽은 제 조카인 리 리고요. 우리는 여기가 초행입니다. 당신의 고난에 언젠가 희소식이 전해지길 바라겠습니다.”

“제 이름은 멘림입니다.” 톨비르가 대답했다. “관심 어린 한 마디 감사합니다.” 잠시 동안 아무 말도 않던 그가 덧붙여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당신과 조카 분을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싶습니다.”
“그래 주신다니 영광입니다, 멘림.” 첸이 말했다.

비르나알 호수가 보이는 멘림의 집은 단층으로 된 검소한 곳이었다. 밤이 깊어지자 호수 건너편에 있는 마을들이 불을 밝히며 아름다운 광경을 만들어냈다.

“저기에 있는 도시는 어딘가요?” 저녁 식사 후에 멘림을 도와 설거지를 하던 리 리가 물었다. 강 건너편에는 주황색과 붉은색의 빛이 서로 어우러져 있었다.

“말아트예요. 오르시스와 가까웠죠. 오르시스가 아직 존재했을 때까지는요.”

“오르시스는 전쟁 중에 파괴되었나요?” 리 리가 물었다. 멘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아키르가 군대를 보내어 모래폭풍으로 도시를 묻어버렸죠.” 멘림이 한숨을 쉬었다. “오르시스와 네페르세트는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어요. 특히나 네페르세트는요.”

“그 곳에 가보신 적이 있으세요?”

“사실 그곳 출신이에요.” 멘림이 조용히 대답했다.

“아, 그렇군요.” 리리는 어색한 태도로 접시 하나를 수건으로 닦았다. “당신도 람카헨인가요?”

“지금은 그렇죠.” 멘림이 약간 뜸을 들이더니 대답했다. “하지만 전 한때 네페르세트의 일원이었습니다.” 본 이야기는 PDF로 보실 수 있습니다.

“아, 네.” 설거지를 계속하며 리 리가 말했다.

“저는…” 멘림의 목소리에서 잠깐이나마 강한 자부심이 묻어났지만, 그는 이내 얼굴을 찌푸렸다. “별로 제 이야기에 동요하지 않는군요.”

리 리가 눈을 깜빡였다. “그래야 하나요?”

멘림은 그녀를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다가 이내 생각을 정리하고 말했다. “당신이 제 혈통을 꼭 이상하게 생각하란 법은 없는 것 같군요.”

“멘림,” 리 리가 말을 꺼냈다. “저는 톨비르에 관해 문외한이라고 보셔도 돼요. 내전이 있었고, 네페르세트는 데스윙과 동맹을 맺었다는 정도만 알고 있죠.” 한때 용의 위상이었던 데스윙의 이름을 듣고 멘림은 순간 움찔했다. “하지만 당신이 죽음의 위상과 같은 편이라고는 보이지 않아요. 뭔가 ‘죽음’이랑 어울리지 않는다고나 할까요.”

리 리의 말에 멘림은 희미한 미소를 띄었다.




“위상처럼 거대하지도 않죠.” 그가 대답했다. 리 리는 피식 웃으며 눈을 굴렸다. 긴 숨을 들이쉬며 멘림이 말을 이었다.

“그러시다면, 제가 당신과 삼촌분께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도록 하죠.”

“저흰 이야기라면 사족을 못 쓰죠.” 리 리가 대답했다. 하지만 멘림은 쓴웃음을 띄며 말했다.

“과연 이런 이야기도 좋아하실까요?”

***

멘림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셋은 거실에 모였다. 첸과 리 리는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고, 멘림은 다리를 깔고 앉은 채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네페르세트는 이곳에서 남쪽에 있습니다. 그 곳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화려한 곳이었습니다. 람카헨보다 더 컸으니까요. 저와 제 남동생 바세트는 그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톨비르는 모두 종족의 역사에 밝습니다. 우리들이 티탄의 창조물인 것을 알고, 울둠과 그곳의 비밀들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 또한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는 기계처럼 수동적이지 않은, 개별적인 존재라고 믿었죠. 원래 티탄들은 우리들이 파수꾼의 역할을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바위로 우리 몸을 빚었습니다.”

“육체의 저주가 톨비르에게 처음 나타났을 때, 약해진 몸을 보며 다들 비통해했죠. 하지만 이를 되돌릴 방법이 없어 보였기에 우리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강한 육체를 잃어버린 것을 계속 애석해한 자들도 있었지요.”


“그리고 당신들도 아시다시피 위대한 용 데스윙이 다시 세상에 출현했습니다. 그는 바람의 군주 알아키르, 그리고 고대 신들을 회유했지요. 고대 신들이 바로 육체의 저주를 건 장본인이었지요.”

“고대 신들을 회유했다고요?” 첸이 희미하게 말했다. “믿을 수가 없네요…”

“믿으셔야 합니다.” 멘림이 심각하게 말했다. “데스윙이 이곳에 왔을 때, 톨비르에게 한 가지 거래를 제시했습니다. 자신을 따른다면 우리가 예전에 가지고 있던 바위의 모습을 돌려주겠다는 것이었죠. 저주를 역행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리 리와 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암흑 파라오 테칸이 지배하던 네페르세트는 이 제안을 두 손 들고 환영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무언가 불안했습니다.”

마음을 가다듬으며 멘림은 말했다.

“저는 다른 네페르세트들에게 이는 좋지 않은 생각이라고 설득하려 했습니다. 물론 우리의 본 모습을 되찾을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면 우리는 영원히 알아키르와 데스윙에게 빚을 지고 살게 됩니다. 오만한 우리 일족은 바위의 형상을 되찾으면 그들을 타도하고 독립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저처럼 망설이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만 갔지요. 제 동생인 바세트마저 절 믿지 않았었죠. 제발 다시 생각해보라고 부탁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동맹을 매우 열렬히 지지하는 축에 들었지요.

신변에 위협을 느낀 저는 람카헨으로 망명하여 파오리스 왕께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네페르세트가 본격적으로 다른 톨비르들에게 적대감을 표출했을 때, 저는 온 힘을 다해 그들을 막는 걸 도왔습니다.”

“남동생은 어떻게 됐습니까?” 첸이 조용히 물었다.

멘림은 잠시 답변을 늦추었다. 기름 램프에서 흘러나오는 주홍색 빛이 그의 지친 모습을 더욱 부각시켰다.
“그는 살아남았습니다.” 마침내 멘림이 대답했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오늘 보셨던 죄수 중 한 명이 제 동생입니다. 지금은 대의원회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죠.”

그날 밤, 첸은 잠자리에서 수면을 취하지 못한 채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낮게 코를 고는 것을 보니 리 리는 잠이 든 모양이지만, 그녀 또한 잠을 청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걸 첸은 알고 있었다. 거의 한 시간 동안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피로를 못 이겨 잠든 그녀였다.

하지만 첸은 도통 잘 수가 없었다. 그는 왜 멘림이 다른 톨비르들의 반대를 무릅쓰고도 네페르세트 죄수들에게 자비를 보여줄 것을 청하는지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첸은 문득 촌 포가 그런 일을 당했으면 어땠을지 생각해보았다. 동생이 바세트의 악행에 버금가는 일을 저질렀다 해도 반드시 구할 것이라는 게 첸의 결론이었다. 멘림의 입장을 돌이켜볼수록 첸은 가슴 한 켠이 아려왔다. 동생을 죽음으로부터 구할 자가 자신뿐이라는 부담감은 가히 압도적이리라. 결국 첸은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의 탁자에 앉았다. 강한 동요와 극심한 피로가 동시에 느껴졌다.

“당신도 잠이 오지 않는 모양이군요.” 멘림의 조용한 목소리가 첸의 주의를 끌었다. 그가 방 안으로 들어오는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그런 거구임에도 집고양이만큼이나 조용히 걸을 수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바닥이 별로 잠을 청하기에 좋지 않은 점 사과 드리겠습니다.” 멘림이 말했다. 첸은 고개를 단호하게 가로저었다.

“이곳보다 훨씬 열악한 곳에서도 자보았습니다. 저녁 식사 후에 당신이 말씀하신 일을 생각하느라 깨 있었을 뿐입니다.”

멘림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그렇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모두들 제 사정을 알고 있지요. 한때는 다들 측은하게 저를 바라봤지만 전쟁은 가장 동정 어린 마음마저도 굳어버리게 만들더군요.”

“저 또한 동생이 있습니다.” 첸이 답했다. “리 리의 아버지죠. 늘사이가 좋은 건 아니었지만, 전쟁에서 서로를 대치할 것이라는 생각은 해보지도 못했습니다.”

멘림은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기나긴 시간 동안 대의원회에 청원을 해왔습니다. 일방적인 자비를 원하는 자는 거의 없었지만, 죄수들이 죄를 뉘우친다면 고려해보겠다는 사람들은 몇몇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바세트에게 누차 말했지만 아직까지 그는 회개할 마음이 없는 것 같습니다.” 목소리가 갈라지면서 멘림은 귀를 눕히고 고개를 숙였다.

“저는 그 무엇보다 가족을 사랑합니다.” 그가 말했다. “저는 언제나 본보기가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제가 바세트보다 나이가 많기 때문에 보람찬 삶이란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간섭을 하고 싶진 않았습니다. 그래서 동생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으려고 애썼고, 대신 동생이 제게 조언을 구하러 올 때면 전 솔직하게 의견을 말했습니다. 그러던 도중, 그가 데스윙의 충실한 종복이 되었을 때… 저는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은 당신 때문이 아닙니다.” 첸이 말했다. “당신의 삶을 사는 건 오직 당신뿐입니다. 냉정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바세트도 그랬을 겁니다. 그는 자기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었겠지요.”

“그럴 수도 있겠군요.” 멘림이 답했다. 첸을 돌아보지 않은 채 그는 말했다. “다시 잠자리에 들어야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안녕히 주무십시오.” 첸이 말했다. 그 말이 아무런 위안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다만 그는 멘림과 그의 형제를 돕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다음 날, 리 리가 일어나기 전에 첸은 네페스레트 죄수들이 어디에 수감되어 있는지를 찾아 다녔다. 그가 말을 꺼낼 때마다 톨비르들은 적대적인 시선을 보내왔지만, 무표정한 오크 하나가 전날에 리 리와 첸이 들어왔던 동쪽 문을 가리켰다. 그들이 지나쳐 온 경사로가 지하에 있는 감옥으로 내려가는 길이었던 것이다. 첸은 오크에게 감사를 표하고 길을 떠났다.

기둥에 묶인 자칼 두 마리가 경사로를 지키고 있었다. 잠깐 자리에 멈춰 선 첸은 자칼들을 보며 이 상황에 조금이나마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한 개인이 무슨 일을 해낼 수 있을지 의문스럽기도 했다. 곧 그는 한 명의 사람이 위대한 일을 해낸 적도 많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심호흡을 한 후, 첸은 통로를 내려갔다. 끝에는 람카헨 경비병이 문을 가로막고 있었다.

기둥에 묶인 자칼 두 마리가 경사로를 지키고 있었다. 잠깐 자리에 멈춰 선 첸은 자칼들을 보며 이 상황에 조금이나마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한 개인이 무슨 일을 해낼 수 있을지 의문스럽기도 했다.

“무슨 일이오?” 톨비르는 첸의 키만 한 창을 휘두르며 물었다.

“에, 그 네페르세트 죄수들을 만나려고 왔습니다.” 첸이 말했다.

“무엇 때문에?” 문지기가 그를 추궁했다.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첸이 대답했다. “그들이 뭘 하였는지 알고 싶습니다.”

문지기는 날카로운 눈으로 첸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특이하게 생겼군.” 그가 말했다. “톨비르와는 무관한 게 분명하군. 죄수들을 만나고 싶다면 만날 순 있지만, 조건이 있소. 가지고 있는 소지품을 모두 여기 두고 가시오. 안으로 들어가면 당신을 인도해줄 경비병이 한 명 더 있을 거요.”

첸은 고개를 끄덕이며 지팡이와 배낭을 내려놓았다. “감사합니다.” 말을 마친 첸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건물 구조를 보아, 이 지하 구조물은 애초에 감옥으로 설계된 곳은 아닌 듯했다. 단지 필요에 의해 급히 개조한 흔적이 보였다. 문지기의 말대로 다른 경비병이 그 곳에 있었다. 네페르세트와 수상한 대화를 하지 않도록 감시하는 역할 같았다.

네페르세트들은 바위로 된 벽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 감방의 서툰 만듦새를 보니 임시방편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첸은 문득 대의원회가 과연 무슨 의도로 이들을 장기간 감금해 두었는지가 궁금해졌다.

“그대들 중 바세트가 어느 분이죠?” 첸이 말했다.

“저놈이오.” 람카헨 경비병이 답하며 오른편에 있는 우리를 가리켰다.

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멘림의 동생에게 다가갔다.

침침한 불빛에 적응한 그는 바세트와 다른 죄수들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정말로 그들은 바위로 된 몸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외모는 살아있는 생물이라기보다 골렘에 가까웠다.

“당신이 바세트인가요?” 첸이 물었다.

“무슨 상관이오?” 네페르세트가 내뱉듯이 대답했다. 냉정하고 분노에 찬 그의 눈매는 멘림과는 판이하게 다른 분위기를 보였다.

“질문에 대답해!” 경비병이 으르렁거리며 창끝으로 우리의 창살을 후려갈겼다. 쇠붙이가 서로 충돌하는 굉음이 지하 감옥에 울려 퍼졌다.

냉소만 보내며 바세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작은 우리 안을 어슬렁거리며 첸을 향해 이빨을 드러낼 뿐이었다. 경비병이 다시 한 번 창살을 강타했다.

“당신의 형, 멘림을 대신해서 왔어요.” 첸이 말했다.

그를 보며 눈을 깜빡인 바세트는 곧 조롱이 가득 찬 웃음을 지었다.

“아하, 그것 때문에 아까운 시간을 내서 이 어두컴컴한 곳에 있는 우리 패배자들을 만나러 왔군! 아마 멘림은 내가 이성적인 판단을 해 달라고 당신에게 부탁했겠지?”

“사실, 그는 내가 여기 왔다는 사실조차 몰라요.” 첸이 말했다. 바세트는 또 한 번 웃었다.

“더 가관이군그래! 그놈이 당신의 마음을 움직여 스스로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하게 만들었군. 자기 손을 더럽히지 않고! 정말 걸작이야.”

첸은 한쪽으로 고개를 기울여 바세트를 노려보았다. 이런 식으로 직접 부딪혀 봤자 조롱이나 살 뿐이라는 결론을 내린 그는 바세트의 주의를 끌기 위해 다른 방법으로 접근했다.

“확실히 여기는 더럽긴 하군요.” 첸이 말했다. “댁들은 한동안 제대로 씻지도 못했을 테지요. 그나마 돌덩어리여서인지 생각보다 악취는 나지 않는 것 같군요.”

첸의 옆에 서 있던 경비병은 그 말에 약간 기분이 상한 듯했지만, 어쨌든 피식거리며 웃었다. 허를 찔린 듯한 표정의 바세트를 앞에 두고 첸은 털에 붙은 오물을 털어버리는 시늉을 했다. 그러고는 팔을 꼰 채로 바세트를 바라보며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거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그래, 살덩어리인 네놈들은 다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지. 내 형에게도 좀 전해주겠나? 그리고 그 고귀한 척하며 징징대는 얼굴을 똑똑히 보라고. 아마도 한숨을 푹푹 내쉬고 슬픔이 가득한 눈에는 ‘오, 바세트, 네게 정말 실망했단다’라고 쓰여 있을 테지. 그럼 그 자식 보고—“

곧이어 바세트가 온갖 욕설을 퍼붓는 걸 보며 첸은 맹세코 그런 말들은 전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경비병마저도 약간 움츠러든 것 같은 눈치였다.

“—라고밖에 해줄 말이 없군. 형과 그 고상한 우월감에 대해서는.”

“당연한 얘기죠.” 첸이 대뜸 거짓말을 했다.

“어차피 멘림은 헛수고를 하는 거야.” 바세트가 계속해서 말했다. “혹시라도 대의원회가 놈의 구역질 나는 상소를 받아들인다고 해도, 나는 거절하겠다. 그를 만날 바에 차라리 나는 여기에 있는 진짜 가족들과 함께 최후를 맞이하겠어.”

그렇게 말을 끝맺고 바세트는 돌아서서 벽을 바라보았다. 첸은 굳이 그를 다시 부르려 하지 않았다. 여기선 더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이제 가보겠습니다.” 첸이 말하자 경비병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안내했다.




햇빛이 뜨겁게 내리쬐고 있었다. 바깥의 밝기에 적응하기 위해 첸은 몇 초 동안 눈을 깜빡였다. 간수 하나가 문을 닫았고, 다른 하나가 첸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알고 싶어하던 걸 얻었기를 바라오.” 그가 말했다. “하지만 이 죄수들에게서 큰 배움을 얻기를 기대하진 마시오. 그들은 전부 광신도일 뿐이니까.”

놓고 갔던 소지품을 챙기면서 첸은 감옥에서의 대화를 되새겼다. “광신도”라는 명칭이 바세트에게 어느 정도 적절하기는 했지만, 그는 한 번도 데스윙이나 권력에 관련된 말을 꺼내지 않았다. 단지 그는 형에 대한 지독한 증오를 품고 있을 뿐이었다.

“배울 만큼 배웠습니다.” 첸이 말했다. 경사로를 올라가며 그는 뒤엉킨 생각을 정리하려 노력했다.

“이야, 조카를 쏙 빼놓고 놀러 가신 분이시네!” 리 리가 한 마디 했다. 그녀는 멘림의 집 바깥에 있는 야자수 그늘에서 첸을 기다리고 있었다. 셴진 수에서 가져온 지도를 들여다보며 그녀는 가본 곳들을 표시하고 울둠처럼 기록되지 않은 곳들을 추가해 넣었다.

“얼마나 일찍 일어나신 거예요?” 그녀가 계속해서 말했다. “휴가 중인데 왜 그리 부지런하세요?”

조카의 농담에 첸은 웃으려고 했으나,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리 리는 그의 우울한 기분을 금세 눈치챘다.

“무슨 일이세요?” 그녀가 물었다.

“감옥에 있는 멘림의 동생을 만나러 갔단다.” 그가 말했다.

“이른 아침에 참도 산뜻한 대화를 나누셨겠네요.”

첸은 대답을 미룬 채 비르나알 호수를 바라보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멘림의 슬픔과 바세트의 독설이 뒤엉켜 있었다.
“첸 삼촌?” 리 리가 그의 손목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왜 감옥에 가셨어요?” 그녀의 눈에는 첸을 위하는 진심이 서려 있었다. 첸은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나도 잘 모르겠구나.” 리 리를 놓아주며 첸이 털어놓았다. “굳이 말하자면 대체 어떤 곡절이 있으면 바세트 같은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인지 알고 싶었나 보지.”

“바세트는 그의 형을 경멸하더구나.” 그가 말했다. “멘림의 이름을 말했더니 … 뭐,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았단다.”

첸은 야자수의 밑둥에 기대었다.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바세트는 다른 네페르세트 죄수들을 ‘진짜’ 가족이라고 말했지. 멘림을 최대한 멀리하고 싶은 거야. 하지만 난 그 이유를 아직도 모르겠단다. 어제 들은 것처럼 멘림은 자신의 동생을 그렇게나 아끼는데 말이지.”

리는 얼굴을 찡그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첸은 계속해서 말했다.

“바세트는 어떻게 그를 그렇게나 싫어할 수 있지? 도대체 그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멘림이 떠났잖아요.” 리 리가 조용히 말했다.

“그랬지.” 첸이 대답했다. “데스윙이랑 연관되기 싫어했잖니.”

“아뇨, 그 전에요.” 리 리가 고개를 흔들었다. “삼촌이 없으실 때, 멘림이랑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멘림이 바세트의 형이잖아요. 멘림은 나이가 들고부터는 사제들과 함께 티탄의 장치들을 관리했대요. 거의 종일 밖에 나가 있었죠. 그래서 바세트를 잘 보지도 못했던 모양이에요.”

첸은 의아해하며 리 리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어떻다는 거니?”

“그래서… 바세트가 불만에 가득 찬 거죠, 아마도요.” 리 리가 중얼거렸다. “형이 자길 버렸고, 제멋대로 대한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데스윙이랑은 아무 관련도 없죠. 그는 단지 소속감을 느끼고 싶었던 거예요.”

“바세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네가 어떻게 아니?” 첸이 물음을 던졌다.

리 리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첸은 리 리가 이러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무언가 자기 자신과 다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왜냐면 삼촌에 관해서 보가 그렇게 말했거든요.”

“뭐라고?”

괴로운 표정이었지만, 리 리는 계속 말했다. “아빠가 보를 저랑 같이 보냈잖아요. 그 때 보가 말했는데…” 리 리가 말끝을 흐렸다.

“뭐라고 말했기에?” 첸이 물었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보는 삼촌이 우리보다 맥주랑 모험을 더 좋아해서 떠났다고 했어요.”

“그렇지 않아!” 첸이 발끈했다.




“저도 알아요!” 리 리가 소리쳤다. “첸 삼촌, 전 삼촌의 편지를 날마다 읽었잖아요! 하지만 보는 그렇게 느꼈나 봐요. 아주 오랫동안요. 보는 삼촌에게 화가 나 있었어요.”

첸은 고개를 푹 숙였다. 리 리가 진주를 들고 도망가기 전날 밤, 촌 포와 싸우던 일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생각났다. 촌 포의 눈에 비친 고통, 그리고 그의 목소리에 담긴 분노와 고뇌가 생생히 느껴졌다.

“해변에서 보가 죽어가면서 하던 말이 기억나는구나. 그 당시에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었지. 모든 게 너무나도 빨리 일어났어.” 첸이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눈치챘어야 했는데. 촌 포도 그런 기분이었겠지. 아직도 그럴 테고.”

리 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판다렌의 머리 위에서는 나뭇잎들이 따스한 바람에 흔들리며바스락거렸다.
“무슨 일을 해야 될지 이제 알겠구나.” 첸이 말했다.

어이없는 일이지만, 첸은 습관적으로 차를 권할 뻔했다. 대신 그는 엉거주춤한 채로 서서는 손을 어디다 둘지 고민했다. 앞에 포개어도 보고 옆에 늘어뜨려도 봤다가, 결국 등 뒤로 깍지를 꼈다.

멘림은 집 앞에 있는 첸과 리 리를 바라보았다. 그의 잔잔한 갈색 눈에서는 의아함이 엿보였다.

“아침에 당신의 동생을 보러 갔었습니다.” 첸이 말문을 열었다. “이야기를 좀 나누려고요.”

멘림은 뒤돌아서서 방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꼬리를 휘두르며 그가 말했다. “뭐라고 하던가요?”

“매우 화가 나 있더군요.” 첸이 말했다. 멘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첸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지금 하려는 조언을 멘림이 잘 받아들일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에게 사과하십시오.”

멘림이 몸을 홱 돌렸다. “제가 사과하라고요? 데스윙과 손을 잡은 건 제 동생입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첸이 말했다. “하지만… 제 생각에 바세트는 당신이 애초부터 자신에게 관심이 없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어찌 그런 생각을? 저는—”

“멘림.” 첸이 끼어들었다. 자신이 듣기에도 그의 목소리는 무거웠다. “잘잘못은 나중에 따져도 됩니다. 하지만 그가 죄를 뉘우치고 사면을 받기를 원한다면 당신이 사과해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멘림이 물었다.

“왜냐하면 저도 소중한 사람들을 두고 떠났기 때문이죠. 제 동생을 비롯한,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말입니다.” 촌 포와 보에 대한 추억이 그의 머리 속에 떠올랐다. “그리고… 그 때문에 많은 걸 감당해야 했지요.”

멘림은 다시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마침내 걸음을 멈추고는 두 판다렌을 바라보았다.

“알겠습니다.” 그가 말했다. “시도는 해보겠습니다. 바세트에게 사과하도록 하죠.” 별로 내키지는 않았는지 그는 굳은 얼굴을 풀지 않았다.

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밝은 모습을 보이려 애썼다. “분명 결심하신 것을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

멘림은 대답을 하지 않은 채로 밖으로 나갔다.

“뭔가 마음이 놓이는구나.” 첸이 말했다.

리 리는 자신의 손을 보며 말했다. “그러게요, 첸 삼촌.”

***

멘림은 해가 지고 한참 뒤에야 돌아왔다. 주인이 없을 때 집 안에 있기가 꺼려져서 첸과 리 리는 배낭과 지팡이를 방파제에 기대어 두고 물가에서 기다렸다.

멘림이 돌아왔을 때 리 리는 첸의 어깨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 천천히 걸어오는 멘림을 향해 첸은 손을 흔들어 보았으나, 톨비르는 그의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잠시 동안 첸의 눈을 바라보더니 다시 걷기 시작했다.

첸은 팔을 내렸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구나.” 그가 말했다. 그러고는 리 리를 살살 흔들어 깨웠다.

“아, 뭔 일이에요, 삼촌?” 그녀가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오늘 밤은 멘림의 집에서 지내기 힘들 것 같구나.” 그가 말했다. “어서 가자꾸나. 여관이라도 찾아 봐야겠다.”

“최소한 거기서는 바닥 말고 침대에서 자겠네요.” 리 리가 짐을 챙기며 중얼거렸다.

“그래. 언제나 밝은 쪽을 봐야지.” 첸이 말했다. 순간 첸은 파오리스 왕과 대면한 이후 드워프들을 따라 곧장 밖으로 나갔으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그러면 두 판다렌은 멘림을 만나지도 않았을 테고, 행렬과 함께 지내며 웃고 떠들었을 테니 말이다.

마침내 묵을 곳을 구했을 때 너무나 지쳐 있던 그들은 깊은 잠에 빠졌다. 아침에 둘이 깨어났을 때는 밖에서 수백 명의 목소리가 수군대고 있었다. 자리에서 급히 일어난 둘은 옷을 갖춰 입고 무슨 일인지 알아보러 밖으로 향했다.
거리에는 람카헨 시민들이 가득했다. 광장 중앙으로 몰려든 그들은 왕과 대의원회가 있던 건물을 기대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첸이 물었다. 리 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시간이 다 되었네요.”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대의원회가 죄수들의 처분을 발표 하려나 봐요.”

첸의 가슴이 방망이질을 쳤다. 리 리는 삼촌을 보며 말했다.

“좀 더 잘 보이는 곳으로 가죠.”

첸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인파를 비집고 다니다가 마침내 광장의 남서쪽에 있는 거대한 해시계 옆에 자리 잡았다. 근처에 상자 한 무더기가 위태롭게 쌓여 있었는데, 톨비르가 앉기엔 좁았으나 판다렌 둘이 앉기엔 적절했다. 꼭대기로 올라간 첸과 리 리의 눈에 장엄한 홀의 정면이 한 눈에 보였다.

얼마 후 람카헨 경비병 한 무리가 네페르세트 죄수 다섯을 끌고 왔다. 그들은 쇠사슬로 목과 손목, 그리고 발목이 서로 엮여 있었다. 족쇄의 날카로운 마찰음은 군중들의 야유 소리에 파묻혔다. 바세트를 알아본 첸은 초조한 마음에 침을 꿀꺽 삼켰다.

파오리스 왕이 죄수들 앞에 서서 두 팔을 들어올렸다. 관중들의 소리가 멎었다.

“람카헨의 시민들이여!” 그가 외쳤다. “대의원회가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발표하기 이전에 우리는 죄수들에게 군중 앞에서 마지막 변을 할 기회를 주기로 했노라. 그 변을 들으면 여러분도 우리가 내린 결론을 존중하게 될 것이다. 최대한 공정한 판결을 내리기 위해 오랫동안 심사숙고한 우리들과, 온 시민이 뜻을 함께하기를.”

사람들은 환호로 답했지만, 첸은 그중에 흉포한 몇몇은 왕의 말에 불만을 가지고 있음을 느꼈다. 파오리스가 옆으로 비켜서자 경비병이 첫 죄수를 내보냈다. 좌우를 한 번씩 돌아본 죄인은 모인 관중의 규모를 짐작하는 듯했다. 그가 입을 열어 말했다.

“내 이름은 난테렛이다.” 첫 수감자가 말했다. “그리고 나는 우리 동족이 맺은 동맹을 변함없이 지지한다!”

관중은 귀가 먹을 듯한 소리로 답했다. 분노와 증오로 가득 찬 고함이었다. 첸은 목이 막혀 오는 걸 느꼈다.
“단 한 가지 후회가 있다면,” 난테렛이 비명을 지르듯 말을 이었다.

“추잡한 너희 람카헨 놈들을 조금이라도 더 죽이지 못한 것이다!” 계단에 침을 뱉으며 그는 말을 마쳤다. 경비병이 신속하게 그를 제자리로 밀어 넣었다. 파오리스 왕이 다시금 관중에게 조용히 할 것을 명했고 람카헨들은 이내 목소리를 낮추며 다음 죄수를 기다렸다.

한 명씩 네페르세트 죄수들은 앞으로 나와 자신의 뜻을 말했다. 둘째와 셋째 포로들은 난테렛의 말을 거의 그대로 되풀이했다. 네 번째인 바세트의 차례가 되자 첸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마지막 한 가닥의 희망을 놓지 않았다.

“나는 내가 내린 결정이 자랑스럽다!” 목소리를 한껏 높이며 그가 소리쳤다. “내게 후회란 없다! 나는 내 형제들과 뜻을 같이한다!” 첸은 바세트가 굳이 한 단어를 강조하자 움찔했다. 리 리는 손을 들어 첸의 손을 감싸주었다. 관중은 바세트에게 고함을 지르며 계단 위로 온갖 오물을 던져 댔다. 반쯤 먹은 석류가 바세트의 뺨을 후려쳤다. 그의 턱 밑으로 검붉은 색의 과즙이 뚝뚝 떨어졌다.

마지막 네페르세트가 말을 마쳤다. 첸은 거의 듣지 못했지만 그 역시도 다른 사람들과 별반 다른 말은 하지 않은 것 같았다.

파오리스 왕이 다시 앞으로 나와 두 팔을 들었다.

“네페르세트들에게 분명 기회가 주어졌다. 하지만 저들은 불경스러운 데스윙과 알아키르와 손 잡은 것에 대해서 전혀 뉘우치지 않았노라! 저들은 힘에 눈이 멀어 수천 명을 학살한 것에 대해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이것은 톨비르에 대한 전면적인 배신이니라!”

“대의원회는 만장일치로 결정을 내렸다.” 파오리스 왕이 말을 이었다. “저들에게 사형을 선고하노라.”

관중이 환호했다.

리 리는 헉, 하며 손으로 입을 막았다. 첸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멘림을 찾으러 가자꾸나.” 그가 말했다.

리 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가요.”

***




어느 시점이 지나자, 람카헨 거리의 넘쳐나는 인파 속에서 한 명의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첸과 리 리는 꾸준히 멘림을 찾아 다녔다. 긴 수색 끝에 만난 어느 톨비르가 그의 행방을 알려주었다. 그는 도시의 북쪽에 있는 분수대 곁에 앉아 있었다. 첸과 리 리가 다가오는 것을 알아채고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첸이 멘림의 곁에 앉으며 말했다. “정말 유감입니다, 멘림.”

멘림은 얼굴이 굳어지며 첸을 외면했다. “녀석은 전혀 죄를 뉘우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지었을 뿐입니다.”

멘림의 냉담한 반응에 리 리와 첸은 당황스러워했다. 하지만 첸은 대의원회의 판결 때문에 충격을 받아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도,” 첸이 말했다. “당신은 동생을 지극히 아낀다는 걸 압니다. 참으로 받아들이기가 힘드시겠군요.”

세 명은 앉은 채로 침묵을 지켰다. 분수대에서 떨어지는 물소리만이 적막을 방해할 뿐이었다.

“괜찮으시다면,” 첸이 점잖게 말을 꺼냈다. “어제 바세트가 어땠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아는 그대로였습니다.” 멘림이 딱 잘라 말했다. “썩어빠지고 이기적인 배신자 그대로였죠.”

“당신이 미안하다고 하니까 뭐라고 하던가요?” 첸이 말을 이었다.

갑자기 멘림은 일어나서 자리를 피했다. 몇 걸음을 걷고 나서 멈춘 그는 뒤돌아 섰다.

“댁이 뭔데 참견이오?!” 갑자기 그가 소리쳤다. “댁이 뭔데 내 삶에 불쑥 들어와서 나보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요? 내가 바세트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도대체 내가 왜! 그 놈이야말로 범죄자이며 이단자이고, 나는 녀석의 목숨을 구하려고 온갖 고생을 다 했단 말이오! 은혜라고는 도통 모르는 그 돌덩어리 놈이 나에게 용서를 구하려고 빌지는 못할 망정! 그에 비하면 나는 성인군자요.”

“난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소. 바세트에게도 그렇게 말했고. 어디 감히 나를 탓하려고 하는 거요? 내 인생에서 당장 꺼지시오.” 멘림이 으르렁거렸다. 첸과 리 리를 내버려둔 채로 그는 도시 속으로 사라졌다.

첸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숙여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리 리는 그를 부드럽게 안아주었다.

“삼촌은 최선을 다했어요.” 그녀가 말했다. “모든 걸 다 해결할 수는 없는 법이죠.”

첸의 머리 속에서 책임감과 좌절감, 그리고 죄책감이 한데 뒤엉키기 시작했다. 이렇게나 비참한 기분을 느낀 것은 살아생전 처음인 것 같았다.

바위의 몸을 지닌 네페르세트를 죽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대의원회는 죄수들을 짓이겨 죽이도록 지시했다. 집행을 위해 온갖 도르래와 추로 이루어진 기계가 제작되었다. 경비병 몇 명이 도르래를 움직이면 거대한 암석이 위로 올라간다. 그 상태에서 잠금장치를 풀면 암석은 땅으로 곤두박질쳐 밑에 있는 것을 무엇이든 분쇄해버릴 것이다. 리 리는 그보다 더 잔인한 장치를 상상하기가 힘들었다.

거의 모든 람카헨 시민들이 기계가 세워진 물가의 공터에 모였다. 리 리와 첸은 어느 집의 차양 위에 자리를 잡았다. 형이 거행되기 전까지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솔직한 심정으로 첸과 리 리 모두 처형 장면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첸은 이 사건을 보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느꼈고, 리 리는 한사코 첸 곁에 있겠다고 한 것이었다.

오후가 되자 람카헨 경비병들은 수감자들을 데리고 거리로 나왔다. 관중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죄수들을 규탄하고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그 광경을 보며 리 리는 속이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처형에는 격식이랄 것이 거의 없었다. 경비병이 네페르세트 한 명을 데리고 나와, 지정된 위치로 그를 끌고 가서 땅에 결박했다. 그러면 다른 경비병들이 기계를 작동시켰다. 리 리는 존중의 의미로 집행 장면을 보려고 노력했으나,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눈을 꼭 감은 채 소리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짐작했다. 도르래가 끼익거리며 암석을 들어올렸고, 그것이 떨어지며 내는 공기의 마찰음이 곧이어 닥칠 참사를 예고했다. 갑작스러운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죄수는 최후를 맞이했다. 그러고는 다음 형을 집행하기 위해 잔해를 쓸어내는 기척이 들려왔다.

첸은 그녀의 어깨를 꼭 부여잡으며 손을 떨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는 처형 장면을 직접 보았지만, 눈을 감았던 리 리가 조금은 부러웠다. 이 순간을 꼭 보아야 한다는 이유 모를 감정 때문에 그는 집행을 지켜보았다. 바세트는 네 번째 차례였다. 그 또한 다른 자들과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숨을 거두었다. 모든 게 한 순간에 일어났지만, 첸에게는 그 시간이 마치 천 년과도 같았다. 그는 오늘 일어난 일들이 자신을 영원히 괴롭힐 걸 알고 있었다.

***




숨을 쉬고 심장이 뛰고 있었지만, 첸은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앉고 있는 차양이 무너졌어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이성의 끈을 반쯤 놓고서 첸은 호수를 하염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첸 삼촌,” 리 리가 부드럽게 그를 불렀다.

“왜 그러니, 리 리?” 첸이 답했다. 그녀의 얼굴에서 초췌함이 묻어났다.

“여… 여기를 어서 떠나요. 왜 진주가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한지 모르겠어요. 비참함밖에 느껴지지 않아요.”

“아, 그래.” 리 리의 말을 들으며 첸 또한 람카헨에서 벗어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리 리가 말했다. “하지만 이곳만 아니라면 어디든 괜찮을 것 같아요.”

“나도 그렇구나.” 첸이 말했다. “휴식을 취한 다음에 아침에 떠나자꾸나.”

차양에서 내려온 그들은 여관으로 돌아갔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 누군가가 그늘에서 걸어나왔다. 멘림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첸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말을 꺼내기 전에 멘림은 잠시 머뭇거렸다.

“사과를 드리러 왔습니다.” 그가 말했다.

첸과 리 리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당신이 옳았습니다.” 멘림이 말을 이었다. “당신이 옳았고, 당신의 조언을 들었어야 했습니다. 당신이 말한 대로 했어야 했습니다. 제가—”

“좀 많이 늦은 것 같지 않습니까?” 첸이 말을 잘랐다.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저… 저도 그러려고 했습니다. 바세트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려 했어요… 하지만 그는 저를 원망하기만 해서 너무나 화가 났어요… 따져 보면 그게 전부 제 잘못인 건 아닌데...”

“어우, 그만 좀 하세요.” 리 리가 말했다.

“전 그를 구하려고 했습니다!” 멘림이 소리쳤다. “모두를 구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대의원회에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몇 번이고—”

“물론 그를 구하고 싶었겠지요.” 첸이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의 자존심을 굽히지 않는 선에서 말입니다.”

멘림은 눈을 크게 뜨고 두 판다렌을 쳐다보았다. “저는 실패했습니다.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바위가 떨어지는 순간 깨달았습니다. 제 동생이… 하나뿐인 제 동생이…” 멘림은 목소리가 갈라지더니 이내 흐느끼기 시작했다. “제 고향… 제 지인들… 제 동생… 뭐가 잘못된 겁니까?”

극심한 피로감에 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멘림과 톨비르 모두가 끔찍한 고통을 당한 것은 사실이다. 바세트와 다른 네페르세트들이 악랄한 일을 저지른 것도 사실이다. 바세트가 멘림에게 분개할 만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리고 형과 아우가 무슨 말을 나누었든 바세트는 그날 오후 맞이한 운명을 피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첸은 그 둘을 거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가 무슨 말을 해주길 바라는 겁니까?” 첸이 무겁게 말했다. “저와 제 조카는 당신을 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바세트의 죄를 용서하지도 못합니다. 우리는 그 누구에게 어떤 것도 해주지 못합니다.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는 법입니다.”

멘림은 흐르는 눈물을 팔로 훔치며 마음을 추슬렀다. “알고 있습니다.” 그가 조용히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감사합니다. 저를 도와주려 해주셔서.” 그는 숨을 들이쉬었다.

“리 리,” 멘림이 다시 말을 시작했다. “어제 삼촌이 없었을 때, 앞으로의 여정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잖아요. 이런 뒤숭숭한 일을 겪고 계속 람카헨에 남고 싶지는 않을 테지요. “

“그건 확실해요.” 리 리가 말했다.

“비르나알 강을 따라 남쪽으로 가보세요. 강어귀쯤 가면 잃어버린 도시가 보일 겁니다. 한때 네페르세트의 중심지였지만 전쟁에 휩쓸려 버림받은 도시지요. 우리 가족은 거기에 작은 배를 하나 가지고 있었어요. 제가 알기로는 아직도 거기 있을 테고요.”

멘림은 큰 철제 열쇠를 꺼냈다. “이건 배를 묶어둔 사슬의 열쇠예요. 가져가세요. 그편이 울둠을 빠져나가기 더 쉬울 거예요. 남쪽으로 향하는 물살은 나쁘지 않을 것이고, 알아키르가 패배한 지금 바람도 잔잔할 테지요.” 그가 말했다. 부디 잘 써주세요.”

리 리는 손을 뻗어 그에게서 열쇠를 받았다.

“고마워요.”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멘림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모든 일들을 우리가 극복할 수 있을지 걱정이군요. 어쩌면 톨비르의 시대는 막을 내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지금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겠습니다. 두 분의 여행에 행운이 가득하길. 당신들이 원하는 바를 꼭 이루길 기원하겠습니다.” 그가 말을 마쳤다. 본 이야기는 PDF로 보실 수 있습니다.

멘림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모든 일들을 우리가 극복할 수 있을지 걱정이군요. 어쩌면 톨비르의 시대는 막을 내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지금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겠습니다. 두 분의 여행에 행운이 가득하길. 당신들이 원하는 바를 꼭 이루길 기원하겠습니다.” 그가 말을 마쳤다.

“그대의 평안을 빌겠습니다, 멘림.” 첸이 부드럽게 말했다.

멘림은 뒤돌아서 홀로 집으로 돌아갔다.

리 리와 첸은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무거운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 준비를 했다. 아침에 곧바로 출발하기 위해 짐을 점검하던 첸은 리 리가 바닥에 매끄러운 종이 한 장을 펼쳐두고 앉아 있는 걸 보았다.
“뭐 하는 거니?” 첸이 물었다.

“집에 편지를 한 통 쓰려고요.” 그녀가 답했다. “요 근래에 연락을 자주 못해서요.” 그녀는 첸을 올려다보았다. 문득 첸도 무언가 떠올랐다.

“나도 한 통 써야겠구나.” 그가 말했다.

리 리는 가방에서 종이와 철필을 꺼내어 건네주었다. 방의 다른 쪽에 자리 잡은 첸은 빈 종이를 앞에다 놓았다.
촌 포에게, 그는 이렇게 편지를 시작했다.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