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의 검. 장벽의 감시자. 판다리아를 위협하는 악에 맞선 유일한 방어세력..

그들은 음영파입니다.

계절이 일곱번 지나갈 때마다 음영파 수도원의 나무는 진홍빛으로 물든다고 합니다. 비밀에 휩싸인 음영파의 일원이 되고자 하는 이들이 시험을 치를 시기가 온 것입니다. 견디기 힘든 시련으로 알려진 붉은 꽃의 시험을 통과하는 극소수만이 자신을 음영파 수호자라고 칭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 영광에 대한 야망이 있다면, 또 누군가는 전투에 대한 포부를 가졌습니다.

판다렌 종족의 어느 젊은 도둑의 이야기입니다. 그에게 있어 붉은 꽃의 시험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벌을 받는 기간이자 속죄의 기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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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내내 이방인들을 따라다닌 열이는, 그들에게 돈이 있다고 확신했다. 그 자세, 옷차림, 자신 있게 마을을 휘젓고 다니는 모습만 봐도 알 수가 있었다. 표적의 재력을 판단하는 능력이야말로, 열이가 이 어려운 시절에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이방인은 넷이었다. 두꺼운 망토를 두른 것을 보면, 북쪽에서 온 여행자 같았다. 계절에 맞지 않는 그 차림에서부터 이미 그들이 이곳에 처음이라는 걸 알 수 있었지만, 그들이 선택한 안내인을 보면 더욱 그랬다. 시장 근처의 작고 더러운 연못가에서 낮잠 자는 것을 소일거리로 하는 늙은 진위 주정뱅이, 조구가 그들의 안내역이었다. 조구는 진위 중에서도 특히 마른 편이었고, 혀 꼬인 소리로 횡설수설하기가 일쑤였으며, 비늘도 듬성듬성 빠져 있었다. 왜 이 양반들이 하필 그를 안내인으로 택했는지 열이는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돈은 꽤 쏠쏠했던 모양이다. 조구가 저렇게 팔팔한 건 몇 년 새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그는 언덕골 시장의 보잘것없는 광경과 풍경이 옥룡사의 탑이라도 된다는 양 손짓을 하며 설명하고 있었다.


네 여행자들은 조용했고, 물고기 인간의 헛짓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 판다렌들은 보다 직접적으로, 또 조용히 목적지로 안내해줄 안내인을 바랐었고, 자신들의 선택을 이미 후회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열이는 골목길 담에 기대어 서서 생각을 하려 했다. 배가 아플 만큼 고파서 생각하기가 힘들었지만, 머리를 쓰지 않으면 이 상황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올해는 이곳 네 바람의 계곡에조차 흉년이 들었다. 농부들이 상품을 한층 더 철저히 지키고 있었고, 교역로 주변에도 어느 때보다 많은 경비병이 배치되어 있었다. 어제 이후로는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시장에서 과일장수가 끌던 수레에서 굴러 떨어진 복숭아 한 알, 아니, 수레가 그림자 속에 앉아 있던 열이의 곁을 덜커덕거리며 지나갈 때 굴러 떨어진 것처럼 보인 복숭아 한 알이었다. 열이는 예전에도 과일장수 김 원 기의 "부주의함" 덕을 본 적이 있었다. 그는 마음씨 좋은 과일장수에게 감사하고 싶었지만... 그의 물건을 훔치는 걸 그만둘 각오는 돼 있지 않았다. 아니면 어떻게 도둑이 입에 풀칠이라도 하겠는가?


도둑. 열이도 자기가 하는 일, 어쩔 수 없이 하고 있는 일이 자랑스럽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열이의 손을 꼭 쥐며 슬퍼하셨을 것이다.


누구도 계절을 바꿀 순 없다.


목표가 움직이고 있었다. 조구가 빙빙 도는 동작을 곁들인 거창하고 감격스러운 말투로 정직한 상인의 제단에 대한 긴 독백을 마친 참이었다. 손님들이 자기 이야기에 반응을 보이지 않고, 키 큰 타오룬 나무라도 되는 양 양팔을 들고 가만히 서 있는데도 팁을 줄 기미도 보이지 않자, 조구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이방인들이 뒤를 따랐는데, 한 명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열이는 그들이 농사꾼 연합 회관으로 가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 방향에서 중요한 건물이란 그뿐이었다. 열이는 씩 웃었다. 돈 많은 이방인들이 막강한 농사꾼 연합의 이사회와 이야기하러 온 것도 당연했다. 아마도 거래나 계약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겠지. 상인일까? 그렇다면 두둑하고 빵빵한 배에 넉넉한 망토를 두르고 있는 것도 설명이 된다. 열이가 착각한 게 아니라면, 금화가 잔뜩 든 큼직한 주머니를 가리고 있는 것이리라. 자세히 관찰하자, 여행자들이 허리 둘레에 어두운 색깔의 천을 두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역시 그렇다. 저 밑에 돈이 들어 있으리라. 손가락이 꼼지락거렸다.


일행이 포 다리를 건너고 있을 때 사건이 일어났다. 재고 관리인 남 아이언포우가 연어가 높게 쌓인 수레를 끌고 다리의 중앙에 이른 참이었다. 수레의 한쪽 바퀴가 빠져버렸고, 남이 다가오는 여행자들에게 손을 흔드는 사이 수레는 짐의 무게를 못 이기고 옆으로 쓰러졌다. 건장한 남이 놀라서 몸을 틀었고, 수레는 넘어지면서 밤새 건져 올린 생선이 다리로 쏟아졌다.


"안 돼! 안 돼!" 소리를 지르는 남의 수염이 그의 황망함을 드러내는 듯 떨렸다.


눈사태처럼 다릿널에 쏟아진 축축한 은색 생선들이 높은 난간에 막혀서는, 깜짝 놀란 조구와 그 손님들을 향해 똑바로 밀려갔다. 아직 술이 덜 깬 게 분명한 불쌍한 진위는 밀려오는 생선들을 보고는 남을 따라 "안 돼! 안 돼!" 하며 비명을 질렀고, 필사적으로 손을 내저으며 막아보려 했다. 죽은 연어들은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철썩, 하는 소리와 함께 일행은 파묻혔다. 열이는 축축한 생선으로 목욕을 한다는 생각에, 그리고 그 냄새에 얼굴을 찌푸렸다. 잠시 후 파도는 지나갔고, 남은 연어들은 다리 양쪽으로 미끄러져 아래의 개울에 떨어졌다. 몸을 숙이고 널을 붙잡은 채 몸을 가누고 있던 네 판다렌 상인은 서로를 부축해 일으키고 있었다. 조구는 생선들과 함께 개울에 빠져서는 아직 물 위로 나오지 않았다. 그건 사실 걱정스럽다기보다는 우스운 일이다. 그 주정뱅이는 진위니까, 땅 위보다 오히려 물속이 편할 것이다. 시장 쪽에서 고함과 웃음이 울려 퍼지는가 싶더니, 남 아이언포우의 식구들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 달려왔다.


열이는 지금이야말로 기회라고 생각했다.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빠져 나온 열이는 넘어진 수레 쪽으로 가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들었다. 열넷이라는 나이에 비해 작고 마른 체격과, 판다렌이라면 대부분 흰 털이 있는 곳에 회색 털이 난 열이는, 어렵지 않게 남의 눈에 띄지 않고 혼란 속에 스며들었다. 늘 그랬다. 열째 아들이라 해서 열이라는 이름이 붙은 가난한 순무 농부의 막내 아들에게는,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일종의 장기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큰 형들 다섯이 재산을 나누어 가졌지만, 힘겹게 꾸려 온 밭을 다섯으로 나눠서는 먹고 살기도 힘들었다. 어차피 모두 굶을 거라면 더 나눠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래서 나머지 다섯 형제에게는 밭에서 일을 하면서 함께 살거나... 집을 떠나는 선택이 주어졌다. 열이는 떠났고, 아마 형제들은 안도했을 것이다. 어린 판다렌이 그 밭에서 할 일이라곤 전혀 없었다. 열이는 가족들이 자기가 없는지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


바로 앞에서는 아이언포우 집안 사람들이 수레를 바로 세우려 하고 있었고, 사람들이 생선을 주워 바구니며 냄비, 앞치마의 앞섶에 모으고 있었다. 남은 고개를 숙인 채 네 이방인에게 다가가서 거듭 사과를 하고 있었다. 열이는 언덕골에 오자마자 끈적끈적한 환영을 받은 부유한 상인들이 화를 낼 줄만 알았다. 그런데 그들은 놀랍게도 웃고 있었다. 모자에서 생선 비늘을 털고 서로 어깨를 두드리며 우레 같은 소리로 웃는 바람에, 다리가 흔들릴 지경이었다. 여행자 하나가 목깃에서 커다란 생선을 한 마리 꺼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남에게 건넸다. 재고 관리인은 그들이 기분이 좋은 것을 보고 안심한 듯, 수습 작업을 감독하러 가버렸다. 연어 값이 비쌀 때이기도 했고, 수레가 그렇게 꽉 찬 것도 몇 달 만의 일이었다.


열이는 말 없이 다른 아이언포우 식구들과 함께 생선을 주우며 앞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여행자들 근처에 이르자, 발이 미끄러진 척하며 그 중 덩치가 가장 큰 자에게 부딪혔다. 상인이 돌아보았고, 열이는 헉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표적에게는 눈이 하나밖에 없었던 것이다. 긴 흉터가 얼굴을 가로질러 눈썹부터 턱까지 나 있었고, 검은 헝겊이 눈이 있어야 할 곳을 가리고 있었다. 상인은 이런 반응에 익숙한 듯이, 웃음을 짓고는 젖은 널에서는 발을 조심해야 한다고 주의를 주며 열이를 바로 세웠다. 강인하지만 친절한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작은 도둑은 그렇게 점잖은 이에게서 도둑질을 한다는 데 일말의 죄책감을 느꼈다.


하지만 훈훈한 생각을 한다고 꼬르륵거리던 배가 잠잠해지진 않아.


열이는 여느 촌 아이가 그랬을 법하게 쑥스러운 듯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는 그곳을 떠났다. 상인의 망토에서 슬쩍한 가죽 주머니를 꼬질꼬질한 윗옷 밑에 쑤셔 넣은 채였다. 열이는 어떤 재물을 훔쳤는지 빨리 보고 싶었다. 금화? 그렇게 무겁진 않은데. 보석? 어쩌면. 열이는 따뜻한 음식 몇 끼와 담요 한 장을 살 정도길 바랐다. 겨울이 곧 찾아올 테고, 추위가 걱정되었던 것이다. 어린 판다렌은 작은 생선도 몇 마리 챙겼지만, 과욕을 부리다가 일을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배가 또 꼬르륵거렸다.


열이는 시장 끝에 다다라, 소매에서 비늘을 털어 내는 척하면서 뒤쪽의 동태를 살폈다. 모두들 열이가 없어진 것은 눈치채지 못한 채, 생선들이 천천히 흐르는 물살에 휩쓸려 가버리기 전에 모으는 데 몰두해 있었다. 그는 옷 밑에서 주머니를 꺼내고는, 재빨리 입구에 묶인 가죽 끈을 풀고 내용물을 손에 쏟았다.


그건 금화도 아니고, 보석도 아니었다. 두루마리였다. 열이는 가슴이 철렁했다. 양 끝이 상아로 장식된 놋쇠 막대에 감긴 두루마리였다. 그는 그 섬세한 물건을 들어올려, 밀랍 봉인을 제거하고 혹시나 두루마리를 떼어낼 수 있는지 살펴보았다. 상아만이라도 팔 수 있을지 모르니까.


열이는 별 뜻 없이 두루마리를 훑어보며 글을 읽었다. 몇 년 전에 일곱이는 동생에게 글 읽는 법을 가르쳤다. 추수가 끝난 후 장부를 쓰는 데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였다. 열이는 금세 글을 깨우쳤고, 그 기술은 농산물 좌판의 주인이 한눈을 파는 사이 어느 주머니를 훔칠지 판단할 때 도움이 되었다. 글은 힘 있고 급한 필체로 쓰여 있었고, 글을 읽어 내려가던 열이의 텅 빈 배 속에서는 공포감이 자라기 시작했다.


네 바람의 계곡 농사꾼 연합의 장, 존경하는 하오한 머드클로 님께
안녕하십니까. 귀하의 농사일이 잘 되기를 기원하며, 한 가지 경고의 말씀을 전하고자 이 글을 씁니다. 저희 정보원이 야운골 부족 몇몇이 공격이라기보다는 피난에 가까운 양상으로 탕랑 평원에서 동쪽으로 이동하는 모습을 포착했습니다. 지난 몇 세기 동안 사마귀 무리가 들이닥칠 때면 볼 수 있었던 모습이지요. 사마귀 둥지의 수가 지나치게 불어나 강인한 야운골들조차도 도망치는 것이지요. 하오한 님, 지금은 우리 병력도 부족하며, 앞으로 있을 전쟁에 대비해 물자를 비축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올해 흉년이 든 것도, 여러분이 계곡을 비롯한 세상의 사람들을 먹일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저희 상황이 지급합니다. 이 믿음직한 수호자들 편에 여력이 닿는 한의 물자를 보내주십시오. 그들이 귀하께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내어주시는 물자가 무사히 도착하도록 만전을 기할 것입니다.


이건 상인이 쓴 글이 아니다.


믿음직한 수호자라고? 이 여행자들은 장사를 하러 온 게 아니었다. 글의 끝에 있는 문양에 눈길이 간 열이는 숨이 턱 막혔다. 원의 양쪽에 곡선으로 줄무늬를 그려 으르렁거리는 백호의 얼굴을 나타낸 단순한 문양이었다.
음영파다!


갑자기 다리 쪽이 어수선해졌다. 열이는 재빨리 두루마리를 옷 밑에 넣고 돌아섰다. 물에서 나온 조구가 고함을 치며... 열이를 가리키고 있었다.


"도둑이야! 우리 사람 좋은 주인님들한테서 물건을 훔쳤어! 도둑이야! 도둑!"


처음에는 흥분한 진위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아무도 몰랐다. 열이를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술에 취해 헛소리를 한다며 조구를 비웃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열이가 부딪혔던 덩치 큰 판다렌이 주머니 속을 더듬더니, 동료들에게 빠르게 손짓을 했다. 그들의 망토가 젖혀지더니 무기가 드러났다. 검, 창, 칼 등이 햇빛을 받아 위험한 빛을 냈다. 역시 뭔가 숨기고 있긴 했던 것이다. 열이의 생각이 반은 맞았다.


튈 시간이다.


* * * * * *



열이는 낮은 소리로 욕지거리를 하며, 뒤돌아서 시장을 향해 뛰었다.


벌써 뒤에서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 전사들은 정말 빨랐다. 쌩 하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났고, 열이가 몸을 숙이자마자 창 하나가 눈앞의 좌판을 받치고 있는 기둥에 날아가 꽂혔다. 좌판의 주인이 비명을 지르고는 들고 있던 국 냄비를 놓쳤다. 뜨거운 국물이 바로 옆에서 요리 재료를 팔던 성마른 호젠의 얼굴에 튀었다. 원숭이는 화가 나서 길길이 뛰며 열이에게 국자를 던졌고, 열이는 빙빙 돌며 날아오는 국자를 피하면서 탈출할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열이는 국 상인의 좌판에 걸린 냄비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았다. 양쪽에서 음영파 둘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몸을 돌려도 갈 곳이 없었다.


달리며 가슴에 손을 뻗자, 쾅쾅거리는 심장이 느껴졌다. 아직은 멀쩡하구나. 발을 디딜 때마다 두루마리가 흔들리면서, 상아 장식이 뼈가 앙상한 가슴에 부딪혔다. 마치 열이를 뒤쫓는 자들에게 신호라도 보내는 듯했다.


벌써 뒤에서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 전사들은 정말 빨랐다. 쌩 하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났고, 열이가 몸을 숙이자마자 창 하나가 눈앞의 좌판을 받치고 있는 기둥에 날아가 꽂혔다. 좌판의 주인이 비명을 지르고는 들고 있던 국 냄비를 놓쳤다. 뜨거운 국물이 바로 옆에서 요리 재료를 팔던 성마른 호젠의 얼굴에 튀었다. 원숭이는 화가 나서 길길이 뛰며 열이에게 국자를 던졌고, 열이는 빙빙 돌며 날아오는 국자를 피하면서 탈출할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열이는 국 상인의 좌판에 걸린 냄비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았다. 양쪽에서 음영파 둘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몸을 돌려도 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그러지 않았다. 열이는 뛰어올라서, 눈앞의 기둥에 박혀 있던 음영파 창대에 한쪽 발을 디디고 섰다. 튼튼한 대나무가 몸무게를 지탱해주기를 기도하며, 열이는 몸을 웅크려 창대를 구부린 다음 튀어 올라 좌판 너머로 날았다. 두 음영파 대원은 늦은 오후의 햇빛을 받으며 눈만 끔벅일 따름이었다.


무기 참 잘 만들었네. 내 생각이 적어도 하나는 맞았어. 저 여행자들, 부자는 부자야.


그는 시장 뒤편의 잔디밭에 착지해서 굴렀다. 사방에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추적자들을 따돌리지 못한 것이다. 두 음영파 대원은 열이의 곡예에 별로 놀라지도 않은 듯, 좌판을 돌아서 쫓아오고 있었다. 열이는 탁 트인 전원 지역에서는 더 강하고 더 빠른 판다렌들에게서 도망칠 가망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시내에 있는 동안 따돌려야 한다. 다시금 욕지거리를 하면서, 그는 시장 변두리로부터 마을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마을은 언덕 바로 위에 있었는데, 게으른 순무 여관에 이르렀을 즈음에는 음영파가 열이를 거의 따라잡은 상태였다. 열이가 문을 박차고 들어가자, 여관주인 레이 란이 비명을 지르더니 들고 있던 선반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열이는 자기가 서두르는 바람에 고급 스톰스타우트 맥주가 쏟아져 버렸다는 생각에 움찔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뒤에 있던 첫 번째 음영파 대원이 바닥의 거품에 미끄러져서, 간신히 일어서고 있었던 여관주인과 함께 넘어졌다. 두 번째 추적자는 동료를 뛰어넘더니 주방 쪽으로 열이를 쫓아왔다. 그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열이의 귀에도 들릴 정도였다. 아무래도 촌뜨기 도둑이 음영파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큰 문제를 일으킨 게 분명했다.


열이는 주방으로 뛰어들어 갔고, 양념장인 진 자오가 너무 놀란 나머지 들고 있던 물건을 공중에 던지고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열이는 몸을 던져 진 자오의 다리 사이로 미끄러진 후 계속 달려 계단을 올라갔다. 뒤에서는 주방 바닥을 울리는 음영파 추적자의 발소리가 들려왔고, 화가 난 양념장인이 물건이 엉망이 되었다며 짜증을 내고 "상스러운 깡패"에게 당했다며 격분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계단 꼭대기에 이른 열이는, 복도를 따라 달리면서 문을 하나씩 열려고 해보았다. 이곳은 여관 직원의 숙소였는데, 당연하게도 문은 모두 잠겨 있었다. 열이는 욕을 뱉었다. 자물쇠를 딸 시간은 없었다.


마지막 문도 잠겨 있었다. 냄새로 보아 열이는 그곳이 덴 덴의 방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덴 덴은 여관의 호젠 바텐더다. 원숭이치고 나쁜 녀석은 아니고, 국자를 던진 사촌보다는 훨씬 붙임성도 있었다. 한번은 열이가 김 원 기의 수레에서 훔쳐낸 게 뻔한 석류 한 알과 스톰스타우트 맥주 한 잔을 바꾸어 준 적도 있었는데, 열이는 그 아량에 늘 감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방은 숙소라기보다는 쓰레기장에 가까울 정도로 악취가 풍기는 소굴이었다. 빨지 않은 침구, 씨앗 더미, 과일 껍질이 가득 든 통, 그리고... 떡이 진 털로 만든 여자 호젠 인형 같은 것이 널려 있었다. 열이는 콧잔등을 찌푸리고는, 창문을 찾으려고 방 건너편의 벽 쪽에 쌓인 쓰레기 더미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마침내 손가락 사이로 빛 한 줄기가 새어 들어왔다. 해냈다!


"벽에서 떨어져라, 도둑!"


목소리는 화가 나 있었지만 강경했다. 열이는, 자기 등을 겨눈 창끝을 거의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양손을 든 채 천천히 뒤로 돌아서며, 억지로 웃음을 지으려 했다. 세 음영파 대원이 문간에 서 있었고, 그중 하나는 맥주를 뚝뚝 흘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들. 언덕골에 잘 오셨어요. 저는 어머니가 아프셔서 약을 찾으러 왔는데..."


"입 다물어라, 꼬맹이!" 맥주에 젖은 전사가 검을 휘두르며 말했다. 그는 맥주 때문인지, 사랑스러운 여관주인에게 예의와는 거리가 먼 모습으로 부딪혔기 때문인지 기분이 언짢았다. 열이는 입을 다물기로 했다.


열이가 시장에서 탈출할 수 있게 창을 빌려주었던 다른 음영파 한 명이, 화난 동료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목에 붉은 스카프를 맨 판다렌이었는데, 나머지 둘이 갈라서며 길을 비켜 주었다. 좌판에 꽂혔던 창을 들고 있었지만, 열이는 이 전사는 무기가 없어도 족히 누군가 죽일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확신에 찬 동작, 손등에 난 흉터, 그리고 강렬한 황금색 눈빛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꼬마 도둑아, 넌 무척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다. 여기 내 친구는 네가 우리 서신을 가로채 사마귀에게 전하려고 온 첩자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나는 네가 그냥 바보일 뿐이고, 별 생각 없이 일을 저질렀다가 예상보다 더 큰 위험에 처했을 뿐이라 생각한다."


말을 마친 음영파는 다가와서 손을 내밀었다.


"어서. 우리 사부님께서 밑에서 기다리고 계신다. 훔친 두루마리를 내놓거라. 갑자기 움직이진 말고. 그랬다간 여기 타오롱이 널 코에서 꼬리까지 꿰뚫어 버릴 테니까. 당장 내 말대로 한다면, 너를 바로 농사꾼 연합 회관에 데려다 주겠다. 거기서 재판을 받을 수 있게 말이다. 아마 곡물창고에서의 노역형을 선고받겠지."


열이는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는 옷 아래로 천천히 손을 넣어 두루마리를 꺼냈다. 그는 그것을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음영파에게 건네기 시작했다가, 멈췄다.


"그럼... 다른 안은 없는 건가요?"


붉은 스카프를 맨 전사가 얼굴을 찌푸렸다. 표정이 차가워져 있었다.


"물론 내가 베푼 자비를 거절하고, 타오롱의 의심이 옳았음을 확인해줄 수도 있겠지. 그러면 우리는 당장 두루마리와 함께 네 목숨까지 빼앗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널 그냥 죽일 거라 생각하진 마라. 음영파가 목숨을 빼앗는다는 것은, 그 목숨이 온전히 우리 것이 된다는 뜻이다. 우린 우선 널 묶은 다음 눈과 발을 제거하고,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손가락 두 개만 남기겠다. 그 다음에는 탈것에 묶어 쿤라이 봉우리 꼭대기에 있는 수도원으로 후송할 것이다. 그곳에 도착하면, 널 얼음이 덮인 바위산에 버리고, 우리 진실탐구자들을 기다리게 할 거다."


그때 맥주에 절은 타오롱이라는 음영파가 히죽 웃더니 검을 살짝 비틀었다. 열이가 어느 쪽을 택하기를 바라는지 뻔히 보였다.


"음영파 진실탐구자들이 앞서 눈을 제거한 것은 우리 선물 중에 가장 가벼운 것이었음을 알게 해줄 것이다. 그들은 네가 어쩌다가 샤에 씌었고 샤의 꿍꿍이에 대해 뭘 알고 있는지 알아낸 다음, 그 죗값으로 너를 협곡에 던져 버릴지 결정할 것이다."


열이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는, 공포감을 숨기려는 듯이 두루마리를 얼굴 앞으로 들어올렸다.


"그 안도 마음에 들진 않네요."


붉은 스카프는 엄한 웃음을 지으며 다시 손을 내밀었다. 열이는 두루마리를 입으로 가져간 후 마주 웃어 보였다.


"저는 세 번째 안이 마음에 드네요."


그러고는 두루마리를 훅 불었다. 진 자오에게서 슬쩍한 속불나 후춧가루가, 문간을 막고 서 있던 판다렌들의 얼굴 주위에서 빨간 구름 모양으로 피어올랐고, 놀람과 고통의 비명 소리가 작은 방을 가득 채웠다. 쿵, 와지끈 하는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눈부신 햇빛이 비쳤다. 열이는 사라진 후였다.


음영파는 쉽게 당황하는 이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잠시 욕지거리를 지껄이며 따가운 안개 속에서 허우적거린 후, 방 밖의 복도로 빠져나가 기운을 마음을 가다듬었다. 붉은 스카프가 후춧가루로 가장 큰 타격을 받아서, 눈꺼풀이 새빨갛게 부어올라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하오롱에게 부서진 창문 쪽으로 자기를 데려가서, 밖의 광경을 이야기해 달라고 지시했다.


화가 난 걸로도 모자라 이제 분통까지 터진 타오롱은 동료를 데리고 창문 쪽으로 갔다. 그러고는 오후의 햇빛에 눈물이 고인 눈을 깜박이며, 창문 아래의 지붕을 따라 대나무 기둥들이 쪼개진 모습을 설명했다. 지붕 가장자리에 있는 타오룬 나무의 가지가 부러지고, 그 아래 덤불이 짓눌린 흔적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또... 느릿느릿 마을을 지나 습지로 흘러드는 강줄기를 묘사했다. 몸을 숨길 곳이 수도 없이 많다. 도둑은 사라지고 없었다.


"당장은 목숨을 건졌지만, 그것도 우리가 찾을 때까지다." 붉은 스카프가 콧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코를 훔치며 말했다. "그러면 이 건방진 도둑 녀석도 음영파의 자비가 어디까지인지 알게 되겠지."


그는 물러서서 동료들에게 말했다.


"우리 사냥감은 이 볼품없는 언덕 너머의 평지로 도망쳤다. 샤의 하수인이 우리 손아귀를 빠져나갔다, 형제들. 우리가 누군가?"


"우리는 그림자 속의 칼입니다."


"우리가 쉬어야 하는가?"


"우리는 머뭇거리지 않습니다!"


음영파 대원들은 냉정하게, 그러나 열정적으로, 또 확신을 담아 이 진언을 속삭였다. 그러고는 두말없이 계단을 내려가 여관을 빠져나간 후, 저 아래 시장의 인파 속에 섞여 들었다.


열이는 창문 위의 지붕에서 그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는 지붕의 이엉에 바짝 붙은 채 덜덜 떨고 있었다. 음영파는 열이가 창문으로 밀어낸 술통에 속아 창문 위쪽을 확인하지 않은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 사방에 탈로가 있는데, 어떤 바보가 자진해서 지붕 위에 갇히겠는가?


너무 작아서 멀리 도망칠 수 없는 바보겠지.


일단 빠져 나오긴 했지만, 쉬지 않는 노련한 전사들에게 쫓기는 신세다. 그 목소리에 담긴 확신은 무서울 정도였다. 그 강렬함. 그렇게 자신감에 찬 목소리를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공포 뒤로, 뭔가 다른 감정이 느껴졌다.


존경심일까?


또 하늘에서 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열이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낮은 목소리로 매에게 대답했다.


"넌 운 좋은 줄 알아야 돼. 이 사람들 같은 사냥꾼인 데다, 갈 길을 스스로 정하고 그 길을 끝까지 따를 수 있으니까..."
그는 동경에 가득 차 말끝을 흐렸다. 나 같은 도둑에게 그런 삶은 꿈에 지나지 않겠지.


* * * * * *



"그 녀석 이름은 하얀깃이다." 낮으면서 묘하게 익숙한 목소리가 말했다. "사냥감보다야 사냥꾼인 편이 낫지, 꼬마 도둑. 하지만 사냥감이 되어 본 사냥꾼이 더 빨리 목표를 잡는 법이다."


열이는 홱 돌다가 균형을 잃을 뻔했다. 외눈의 상인, 아니 외눈의 음영파가 위쪽 지붕에 앉아 있었다. 그의 무릎 위로는 긴 창이 놓여 있었다. 매가 또 한 번 울더니 날개를 퍼덕거리며 내려와 덩치 큰 판다렌의 어깨에 앉았다. 열이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저 창... 창은 열이를 두 동강 낼 수 있을 만큼 컸다. 게다가 저녁 바람처럼 빠르고 사뿐하게 여관 지붕에 내려앉을 수 있는 노장이 휘두른다면? 붉은 스카프가 사부님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가?





이렇게 죽는구나.


음영파 사부는 얼굴을 찌푸렸다.


"네가 내 물건을 가지고 있다. 돌려받고 싶구나."


열이는 입을 떡 벌린 채 옷섶을 더듬어 두루마리를 꺼냈다. 그는 남아 있는 후춧가루를 털어 내려고 두루마리를 흔들었다. 약간의 붉은 가루가 흩어지면서 바람에 실려 불행히도 열이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그는 한심하게도 비명을 지르고는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인 채로.


이방인은 몸을 굽혀 두루마리를 집어서는, 넉넉한 장포에 넣었다.


"이름이 무엇이냐, 꼬마 도둑아?"


열이는 눈이 맑아질 때까지 눈을 깜박이고는, 또 기침을 했다.


"열이라고 합니다."


"열 개 할 때 열 말이냐?"


"네. 아버지가 다섯째 아들 후로 재미있는 이름이 바닥나셨대요."


"그래, 열이야. 음영파의 전령에게서 물건을 훔치면 어떤 벌을 받는지 내 부하에게 대충 들었을 것이다. 넌 그가 준 기회를 말 그대로 면전에서 날려 버리더구나."


열이는 자기 눈이 미덥지 않았지만, 음영파 사부의 입가에서 웃음기를 본 것 같았다.


"나는 펑처럼 마음이 약하진 않지만, 그건 내가 장벽에 너무 오래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샤와 싸우다 보면, 아니 샤와 가까이만 있어도, 삶의 평온한 일면에는 무심해지지. 바로 그것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열이는 이 덩치 크고 창을 든 전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또 그 샤라는 게 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서 고개를 끄덕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기 목숨이 위태롭다는 걸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음영파 사부는 외눈으로 열이를 내려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열이는 그 뚫어질 듯한 눈빛에 주눅이 들었다. 그는 창을 힐끗 쳐다봤다. 무겁고 넓은 날이 달린 창을 음영파 사부는 아주 가볍게 들고 있었다. 전사의 손이 창 자루를 꽉 쥐자, 열이는 벌벌 떨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는 눈을 감았다.


"후추투성이 두루마리의 열이야, 내가 세 번째 안, 그리고 네 번째 안을 제시하겠다."


열이는 얼떨떨한 눈으로 위를 바라보았다. 음영파 사부가 일어서더니, 손가락 하나를 열이의 가슴에 댔다.


"나는 네게 자비를 베풀어, 충직한 펑이 이야기한 벌을 주지 않고 지금 여기서 바로 죽여줄 수 있다. 빠르고 고통 없는 죽음일 것이다. 네가 눈도 깜박하기 전에 내 창날이 목을 파고들 테니까."


그리고 어느새, 팔 길이의 금속이 열이의 턱 밑에서 차가운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몇 초 후에, 바람이 창의 움직임을 따라왔다. 열이는 덜덜 떨고 있었고, 그 작은 움직임 때문에 창날에 닿은 곳에서 따뜻한 피가 흘러 나왔다. 피는 열이의 목에 가만히 겨누어져 있는 창대를 타고 흘렀다. 음영파가 말을 계속했다.


"마지막 안, 더 잔인한 안은, 붉은 꽃의 시험을 치르는 것이다."


열이의 눈썹이 질문이라도 하는 듯이 치켜 올라갔고, 음영파는 한숨을 내쉬며 창을 내렸다.


"이름에 속지 마라. 우리 수도원의 성스러운 나무는 일곱 계절마다 불타는 듯이 붉은 꽃을 피운다. 그것을 신호로 시험이 시작되지. 이는 고통스럽고 혹독한 시험으로, 우리 음영파에 들어오고자 한다면 이 시험을 거쳐야만 한다. 시험을 치르는 이들은 대개 목숨을 잃고,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큰 고통을 겪지."


전사는 창을 치우더니, 빠른 동작으로 망토 뒤에 숨겼다.


"그러나," 그가 계곡 저편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시험을 통과해서 음영파 생도가 된다면, 우리 전갈을 가로챈 데 대한 벌은 받지 않아도 된다."


열이는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음영파가 된다고? 나같이 보잘것없는 아이가? 한낱 도둑이? 한낱 꼬맹이가? 농부의 열째 아들이? 그는 적당한 말을 찾느라 애썼다.


"하지만 어떻게 제가 펑처럼, 또... 아저씨처럼 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전사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너는 재빠르다. 발도 빠르고 손도 빠르고 머리도 빠르지. 음영파에게는 힘이 있어야 하지만, 힘은 기르면 된다. 우리의 적은 재빠르다. 사나움으로 샤에 필적할 전사도 필요하지만, 샤의 공격을 피하고 얼굴에 후춧가루를 날리고 샤를 따돌릴 전사도 필요하지."


열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희망 비슷한 것이 작은 도둑의 작은 가슴 속에서 꿈틀거렸다.


내가 그럴 수 있을까...?


덩치 큰 판다렌이 허리춤에 손을 가져가더니 반지 하나를 꺼냈다. 상아를 솜씨 좋게 조각한 단순한 반지를 보고, 열이는 두루마리 양 끝의 장식을 떠올렸다. 음영파의 상징인 으르렁거리는 호랑이 문양이, 북방의 얼음처럼 반짝이는 은으로 반지 윗면에 상감되어 있었다.


"결정을 내린 것 같구나. 이 반지를 가지고 있어라. 세 달 후에 음영파 수도원 문에 도달해야 한다. 그 반지는 백호의 이빨로 만든 것이다. 그 반지가 있으면 수도원 문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다. 하지만 네가 문에 무사히 도달하느냐는 오직 네 솜씨에 달려 있어. 쿤라이 봉우리는 위험한 곳이고, 지금처럼 추운 계절에는 더하니까."


"혼자 와야 한다. 무기도, 갑옷도 가져오지 마라. 아무런 도움이 안 될 터이니." 그는 열이의 꼬질꼬질한 옷자락을 움켜쥐더니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따뜻한 옷은 구해야겠구나."


열이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고, 음영파는 옷자락을 놓았다. 그러고는 한층 굳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시험이 시작될 때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내 마지막 제안을 거절한 것으로 생각하겠다. 그때는 음영파가 네 목숨을 빼앗을 것이다. 말해 두겠는데, 펑이 얘기한 벌은 그나마 많이 자제한 것이었다. 내 말이 이해되느냐, 열이야?"


열이는 이해가 되었는지 알 수도 없었고, 더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근육이 얼얼하고 뻐근했던 것이다. 전사는 그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다.


"나는 우 카오의 우두머리 누롱이다. 세 달 후에 보자꾸나, 꼬마 도둑아."


누롱은 하얀깃에게 뭔가 속삭였고, 매는 푸드덕거리며 저녁 하늘로 사라졌다. 열이는 몸을 돌려서, 매가 다른 전사들을 따라 북동쪽의 늪지 쪽으로 날아가는 모습을 보았다. 도둑은 마침내 목소리를 되찾았다.


"세 달이라. 제가 세 달 안에 세상에서 제일 높은 산을 오를 수 있을까요? 아니, 거기까지 갈 수나 있을까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열이는 어깨 너머를 보고는, 지붕 위에 혼자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음영파는 사라지고 없었다.


* * * * * *



징 소리가 또 한 번 경내에 울려 퍼졌다. 열이는 흔들리는 나무다리 위에 똑바로 서 있으려고 애쓰며, 지원자들 사이에서 되도록 당당해 보이려고 했다.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물론, 겨울의 눈밭에서 강렬하게 이글거리는 붉은 꽃 아래 모인 여남은 명의 젊은 지원자 중에 열이가 가장 덩치가 작았다. 열이보다 세 살은 어려 보이는, 빈안 마을 출신의 '비뚤어진 우'라는 못생긴 소년조차도, 그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고 진짜 전사처럼 갑옷을 걸치고 있었다. 열이가 우를 올려다보자, 우가 그를 쏘아보았다. 지원자 중 누구도, 열이 같은 꾀죄죄한 꼬맹이와 경쟁하게 된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가 시험을 치르는 것 자체가 모욕적이라는 듯이.





열이는 언짢은 얼굴로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그에게는 여기까지 오는 것 자체도 시험이었고, 이 덩치만 큰 부잣집 아이들이 자기처럼 힘든 길을 왔는지 의심스러웠다. 백 걸음의 길을 기어 올라야 했고, 고대의 통로에서 굶주린 사우록 옆을 살금살금 지나야 했고, 쿤라이 산의 무시무시하게 가파르고 구불구불한 길을 올라야 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좁은 산길에서 떨어져 까마득한 아래에 있는 돌에 부딪힐까 봐 불안에 떨어야 했다. 그것도 얼어 죽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지만.


열이는 바람에 나부끼는 망토를 바짝 당겨 둘렀다. 네 바람의 계곡에서는, 추운 날이라고 해야 비가 약간 내리거나 탁 트인 곳에 나가지 못할 만큼의 바람이 부는 정도였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추위는 살인적이다. 열이는 누롱의 조언에 따라, 추레한 담요 한 장과 동전 몇 닢을 여행자용 망토로 바꾸었다. 누덕누덕 기운 짤막한 천 쪼가리가 비바람을 막아주고 온기를 준 데다, 심지어는 거대한 설인들이 쿵쿵거리며 지나갈 때 산 그림자에 숨을 수 있게 해주어 그의 목숨을 구했다. 챙이 넓고 상한 과일 냄새가 나는 그의 모자는 덴 덴의 선물이었다. 열이가 언덕골에서 쫓겨나기 전 자기 방의 상태(아니면 털로 만든 인형)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이 고맙다며 준 것이었다. 그 모자는 열이의 어깨가 눈비에 젖지 않게 해주었고,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을 때는 접시 역할을 했으며, 덩치 큰 찬의 말에 따르면 열이를 쪼글쪼글한 버섯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덩치 큰 찬은 교역 마을인 맥주통 쉼터에서 온 지원자였다. 그는 부유한 연금술사의 아들로, 거만하기 짝이 없었고 열이가 열 명 정도 모인 것만큼 덩치가 컸다. 그는 그루멀 수행원을 잔뜩 거느리고 왔는데, 그들은 수도원 경내에 들어오지 못했다. 열이는 정상에 올라왔을 때 비단 천막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야영지를 지나온 기억이 났다. 지글지글 익는 고기 냄새에 자기도 모르게 입에 침이 고였었다.


내가 기운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그리고 동상이 조금만 덜 심했다면, 야영지에서 남는 음식을 좀 줄여줬을 텐데. 어차피 찬에게는 필요 없을 테니까.


지원자들이 갑자기 조용해져서 뒤를 돌아보자, 사부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다리 건너편, 명상의 숲이 얼어붙은 호수와 만나는 곳에 서 있었다. 세 명의 사부는 석상처럼 움직임 없이 서서, 기대에 부푼 여남은 명의 수습생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아침 해가 눈부신 데다 수도원 경내에 안개가 자욱했기에 그 셋 중에 누롱 사부가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열이는 자기가 왔다는 걸 보여주고, 목숨을 확실히 보전하고 싶었다. 그는 세 달의 집행 유예 기간 중 마지막 날에 도착한 것이다. 음영파 문지기 옆을 뛰어 지나갈 때는 숨이 턱에 닿아 있었다. 문지기는 열이가 반지를 보여주자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 위에서 매의 울음소리가 들려와, 열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올려다보았다.


"그냥 시작하지." 비뚤어진 우가 숨죽여 말했다. "꽃이 지금보다 더 붉어지진 않을 것 같은데." 열이는 우가 긴장해서 투덜대는 거라고 생각했다. 지원자들은 모두 발을 꼼지락거리거나 손목을 비틀거나 입술을 깨물거나 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덩치 큰 찬조차도 굵은 손목에 찬 황금 팔찌를 무심코 돌리고 있었다. 평범한 판다렌이었다면 목걸이로 쓸 수도 있을 만큼 크고 화려한 물건이었다.


저 팔찌 괜찮은걸.


사부 한 명이 앞으로 나섰고, 열이는 얼굴을 찌푸렸다. 누롱 사부가 아니라, 엄한 얼굴을 하고 회색 털을 귀 뒤로 넘긴 여성 판다렌이었다. 음영파 사부는 한 손을 들더니 말을 시작했다. 그 근엄한 목소리가 얼음처럼 차가운 호수 너머까지 울려 퍼졌다.


"수습생들이여, 붉은 꽃의 시험에 참가한 것을 환영합니다. 여러분은 이 땅 방방곡곡에서 우리 대원들에 의해 후보자로 선택되었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세월 동안 있었던 일이고, 앞으로도 늘 있을 일이지요."


"저는 옴니아 유파의 야리아 세이지위스퍼 사부입니다. 우리 유파는 음영파의 지혜, 지식, 신성한 전통을 유지하는 임무를 맡고 있지요. 여러분을 맞이하고 정해진 날 모습을 보인 용기를 칭찬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붉은 꽃의 시험은 결의의 시험, 힘의 시험, 정신력의 시험이라는 세 가지로 이루어집니다. 이 모든 시험에서, 음영파의 기치 아래 모일 자격이 없는 이에게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지막 말과 함께 세찬 바람이 일더니, 마침내는 사방의 봉우리로부터 수도원을 향해 맹수처럼 달려드는 돌풍이 되었다. 다리가 흔들리면서 붉은 꽃잎이 핏방울처럼 공중에 휘날렸고, 열이는 사슬 난간을 붙든 손에 힘을 주었다. 비뚤어진 우가 겁을 집어먹은 열이를 보고 낄낄거리고 있을 때 세이지위스퍼 사부가 다시 말을 시작했다.


"지금이 여러분을 이곳으로 인도한 길을 떠날 마지막 기회입니다. 여러분 중에 시험을 치를 자신이 없거나 의혹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입문의 다리에서 내려가 집으로 돌아가기 바랍니다. 그런 결정을 내린다고 해서 불명예스러운 것은 아니나, 다시는 이 수도원의 경내에 들어오지 못할 것입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는, 누군가 목을 가다듬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낮게 양해를 구하는 소리와 뭔가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나더니, 판다렌 하나, 아니 둘이 다리를 떠났다. 남쪽 섬에서 온 키 큰 나무꾼과 돌밭에서 온 모범생처럼 생긴 소녀였다. 둘 다 고개를 숙인 채 자리를 떴다. 열이는 그 둘을 따라가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냐. 아냐, 그러고 싶지 않아.


그는 머릿속에 불쑥 떠오른 생각에 깜짝 놀랐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 반쯤 얼어붙은 호수 위에서 흔들리고 있는 게, 실은 기쁘단 말인가?


뭐, 기쁜 건 아냐. 하지만... 뭔가 해볼 기회 같단 말이야. 뭔가가 될 기회. 누구도 계절을 바꿀 순 없다지만, 행운의 바람을 외면하진 않겠어.


열이는 망토에 불어닥치는 차가운 바람에 몸서리쳤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세이지위스퍼 사부는 두 판다렌이 안뜰에서 호송되어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제 붉은 꽃의 시험이 시작됩니다. 여러분 중에 음영파 대원이 있습니다. 적어도 우린 그러길 바라지요. 몇 세기 동안 우리의 수는 줄어들었고, 적은 대담해졌습니다. 판다리아를 둘러싼 안개가 걷히고 백호사에서는 불길한 징조가 나타났습니다. 최근 몇 달 동안 우리 해안에는 새로운 위협이 도래했고, 이 대륙에서 가장 신성한 장소마저 포위되고, 오염되고, 파괴되었습니다. 현자들이 우리 앞에 놓인 어두운 나날들에 대해 노래합니다."


열이는 세이지위스퍼 사부가 ‘새로운 위협’이라고 한 것이 무엇일지 궁금했다. 아무래도 그가 네 바람의 계곡을 떠난 후에 뭔가 중요한, 그리고 무서운 일들이 일어난 것이 분명했다. 열이는 여기까지 오는 길에 행인들이 낯선 땅에서 온 기이한 야수들과 이방인들에 대해 수근대는 것을 들었던 기억이 났다. 당시에는 북쪽으로 가는 여정에서 살아남는 것에만 집중하느라 이런 이야기들을 겁쟁이들의 엄살이라고 무시했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조금 더 주의 깊게 들을걸...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세이지위스퍼 사부는 한 발짝 나서서, 꽉 움켜쥔 주먹을 치켜들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준비가 되지 않은 일반인을 대충 모아둔 오합지졸이 아닙니다. 우리는 음영파입니다. 우리는 항상 적보다 머릿수가 적었으나, 음영파의 칼날 하나는 병졸 열을 상대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사마귀를 쓰러뜨리고, 야운골을 물리치고, 샤를 막아 냅니다. 앞으로도 늘 그럴 터이고요."


세이지위스퍼 사부는 호수 건너편, 수도원의 반대쪽을 가리켰다. 흰 스카프를 두른 음영파 생도 두 명이 작은 호랑이 모양의 화로를 가져와 놓고 있었다.


"저 불타는 호랑이가 여러분의 결의를 시험할 것입니다. 호랑이의 배 속에 든 석탄 아래, 음영파의 인장이 새겨진 은화 여섯 개가 묻혀 있습니다. 호랑이의 입에 손을 넣어 뜨거운 은화를 꺼낸 다음 숲으로 가져오십시오."


남은 지원자 열 명은 초조하게 서로를 쳐다보았다. 크라사랑에서 온 다리가 긴 소녀가 선수를 치려고 다리 끝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몇 초 후, 그녀는 먼저 호숫가에 가려고 서로 밀쳐 대는 지원자들의 팔에 붙들렸다. 다리가 심하게 흔들려서, 열이는 사슬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결의를 시험하는데 달리기 시합을 한다고? 아직 말하지 않은 게 있어


세이지위스퍼 사부는 가려고 등을 돌렸다. 나머지 두 사부는 이미 숲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세이지위스퍼 사부가 어깨 너머로 외쳤다.


"은화는 여섯 개뿐이고, 여러분은 열 명입니다. 빠르게 헤엄치는 게 좋을 거예요."


헤엄이라고?


철컹 하는 소리와 함께 다리의 반을 지탱하고 있던 사슬이 고정 장치에서 떨어지면서, 지원자들은 밑의 호수로 떨어져 빙판을 뚫고 물에 빠졌다. 그들은 비명과 고함을 지르며 물 위로 떠올랐다. 헤엄을 못 친다고 비명을 지르는 목소리도 들려왔다. 몇 초 동안 끔찍한 혼란이 그들을 덮쳤고, 겁에 질려 다른 사람에게 매달리는 이가 있는가 하면, 차디찬 물속에 끌려 들어가지 않으려고 욕을 하며 주먹을 휘둘러 대는 이도 있었다. 거창한 갑옷을 차려 입었던 지원자들은 다시 떠오르지 않았다. 그나마 빠른 사람들은 무거운 장비를 벗어 버리고 빠르게 팔을 저으며 호수를 건너기 시작했다. 얼음장 같은 물에 오래 있을수록 죽음에 가까워진다는 걸 알았던 것이다.


열이는 끊어지지 않은 쪽의 사슬을 붙잡고 그들의 머리 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긴장해서 사슬을 꼭 잡고 있었던 덕분에 다른 수습생들과 함께 물에 빠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뒤처지고 있었다. 그는 몸을 끌어올려 다리 위로 올라가서는, 다리 위를 기어 건너편으로 가거나 호숫가를 달려 화로가 있는 곳까지 갈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렇게 쉽게 빠져나가게 하진 않겠지.


그의 걱정은 곧 현실이 되었다. 흰 스카프를 맨 생도 한 명이 나머지 고정 장치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더니 사슬을 떼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음영파가 되려면 호수에 한 번은 빠져야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열이는 설령 차디찬 물에 빠지고도 죽지 않고 시험을 통과하더라도, 보잘것없는 젖은 망토에 불어닥치는 바람 때문에 결국 죽고 말 거라고 생각했다. 다른 수습생들과 달리 덩치도 작고 가진 것도 없는 만큼, 몸이 젖어서는 안 된다.


열이는 사슬을 잡은 손을 바꾸어 가며 사슬이 가장 낮게 드리운 곳, 그리고 그 밑에 매달려 있는 다릿널을 향해 내려갔다. 다리는 한쪽을 떨어뜨렸다가 시험이 끝나면 쉽게 다시 붙일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기발한걸. 일곱 계절마다 다리를 새로 만들 필요가 없으니 말이야.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번에는 그 일곱 번째 계절이 한겨울에 찾아왔다. 즉, 호수 대부분을 덮고 있는 빙판이 두껍다는 말이다. 어쩌면 꼬맹이 하나는 지탱할 수 있을지 몰라. 음영파 생도가 일을 거의 마쳤는지, 사슬이 느슨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열이는 매달려 있던 곳 바로 아래 얼음장이 있는 걸 힐끗 보고, 발차기를 해서 다리를 통째로 흔들기 시작했다. 추진력을 얻기 위해서였다.


나머지 사슬이 철컹 하며 끊어졌을 때, 열이는 높이 떠 있었다. 그는 양팔을 펼친 채 공중제비를 해서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얼음 위에 양발을 디디고 섰다. 그러고는 잠시 동안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가 나지는 않을까 해서 귀를 쫑긋하고 서 있었다. 조용했다.


* * * * * *



그는 다른 얼음장을 찾아 주위를 살피다가, 조금 떨어진 곳에 떠 있는 얼음장 하나를 발견했다. 열이는 그 사이를 뛰어넘다가 미끄러져 물에 빠질 뻔했다. 그의 추진력 때문에 얼음장이 목적지 쪽으로 조금 떠밀려 갔지만, 양팔을 미친 듯이 휘둘러 균형을 잡아야 했다. 호수 위에는 온통 얼음장이 떠 있었지만, 이렇게 느릿느릿 불안하게 가다가는 경주에 지고, 물에 빠지고, 결국은 산기슭의 얕은 무덤에 묻히는 신세가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는 얼음장에서 뛰어올라 옆의 조금 더 작은 얼음장에 내려앉은 후, 굳이 균형을 잡으려 애쓰지 않고 몸을 앞으로 기울인 후 공중에 붕 떠서 다음 얼음장에 내려앉았다. 열이는 그렇게 돌멩이처럼 수면 위를 폴짝폴짝 뛰어서, 곧 헤엄치고 있는 지원자들을 지나쳐서 반대쪽 호숫가에 다가갔다.


물가에는 여섯 개의 사슬이 있었다. 물에서 나온 6미터 길이의 서리 덮인 쇠사슬이 화로가 놓여 있는 절벽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냥 타고 오르기도 힘들 텐데, 물에 젖은 데다 추위로 손이 곱은 판다렌에게는 더욱 힘들 것이다. 진정 결의의 시험이라 할 만했다.


불행히도, 얼음장은 점점 작아지고 있었고 점점 드문드문해지고 있었다. 열이의 발은 수면 위를 뛰느라 젖어 있었고, 발가락에 감각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사슬 주위의 물에는 얼음장이 전혀 없었다. 두 번만 더 뛰면 호수에 빠질 것이다. 둘러 갈 방법이 없다.


둘러 갈 필요는 없지. 시장에서처럼, 위로 가면 돼.


열이는 손을 위로 뻗어, 재빨리 챙 넓은 모자에 달린 끈을 풀었다. 그리고 마지막 얼음장에서 뛰는 순간, 모자를 벗고 허리를 굽힌 다음 저 밑에서 그를 기다리는 차디찬 물을 향해 모자를 던졌다. 모자는 물 위에 떨어졌고, 그 순간 열이는 한 발로 모자 위를 디뎠다. 그리고 그 도약의 힘으로, 모자 위에 한 발로 서서 균형을 잡은 채 물 위를 미끄러져 갔다. 모자 챙이 워낙 넓었기에 호수 위에 몇 초 동안 떠 있을 수 있었고, 이번에는 뛰어서 물에서 나오는 사슬에 매달렸다.


쪼글쪼글한 버섯의 장점 중 하나지.


열이는 최대한 빨리 사슬을 타고 올랐다. 꼬마 판다렌은 호수를 건너 달리느라 몸이 다 풀린 상태였고, 무거운 것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는 절벽을 기어오른 다음 이글거리는 화로를 향해 빠르게 뛰었다.


화로는 교묘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으르렁거리는 호랑이 모양으로, 주황색으로 빛나는 석탄을 바탕으로 비스듬한 쇠막대들이 검은 줄무늬를 이루게 되어 있었다. 열이는 이를 악물고는, 쩍 벌어진 호랑이의 입에 손을 넣어 하얗게 달아오른 은화를 꺼냈다. 도둑이라서 동전을 재빨리 잡는 데는 도가 터 있었기에, 달아오른 은화를 근처의 눈더미로 가져가는 동안 손바닥에 물집이 잡히고 털이 일부 그슬리고 손끝을 데는 데 그쳤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딱딱하게 굳은 눈 속에 손을 파묻었다.


눈이 고마운 건 처음이네!


뒤에서 사슬이 찰랑거리는 소리에 열이는 돌아보았다. 다음 수습생이 온 것이다. 크라사랑에서 온 소녀가 절벽을 기어오르더니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화로 발치에 쓰러졌다.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열이를 올려다보고는 공처럼 몸을 웅크렸다.


"너-너-너무 추-추-추워!" 소녀는 거칠고 낮은 목소리로 푸념했다.


열이는 소녀 뒤쪽을 바라보았다. 다른 수습생들이 도착했는지 사슬 세 개가 흔들리고 있었다.


열이가 무사히 숲에 도착하자, 세이지위스퍼 사부가 중앙의 정자에 차분히 앉아 있었다. 덩치가 가장 작은 수습생이 제일 먼저 나타난 걸 보고 놀랐을 것 같았지만, 딱히 그런 내색은 하지 않았다. 세이지위스퍼 사부는 그저 손을 내밀었고, 열이가 은화를 그 손바닥에 떨어뜨리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열이에게 정자 한쪽에서 기다리라고 손짓을 했다.


다음으로 도착한 사람은 크라사랑 출신의 소녀가 아니라, 열이가 전에 보지 못했던 건장하고 털이 긴 소년이었다. 흠뻑 젖은 몸에서는 아직도 물이 뚝뚝 떨어졌고, 호랑이의 입에 들어갔다 나온 오른쪽 팔에서는 김이 났다. 은화를 찾는 데 오래 걸린 모양이었다. 손목 주위의 털이 군데군데 타서 없어졌고, 손에는 쓰라려 보이는 화상도 몇 군데 있었다.


어쨌든 그 아이는 성공했고, 조용히 열이 옆에 와서 섰다. 작은 도둑은 경쟁자의 얼굴에서 결의가 보인다고 생각했다. 진짜 전사는 저렇게 고통을 이겨내는 거구나, 하고 열이는 감탄했다.


얘는 당당하게 시험을 통과했어. 나는 꼼수를 썼을 뿐이고.


아까 느꼈던 승리감은 무의미했다. 그는 여전히 도둑일 뿐이었다.


다음으로는, 크라사랑 출신의 소녀가 추위에 이를 덜거덕거리며 도착했다. 열이는 남쪽 지방 밀림의 찜통 같은 더위에 익숙한 사람에게 얼음장 같은 물이 얼마나 낯설고 고통스러웠을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나마 소녀의 팔은 아까 그 소년보다는 상태가 좋았다. 열이는 밀림에서 살아남으려면 손이 빨라야 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폭발하는 듯한 재채기 소리가 들리더니, 덩치 큰 찬이 쿵쿵거리며 숲으로 들어왔다. 그 몰골을 묘사하기에, 그저 흠뻑 젖었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물에 빠졌을 때 용케도 사치스러운 망토는 벗은 모양이지만, 나머지 옷가지는 젖어서 철벅거리며 얼음처럼 찬 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물은 그의 코와 턱과 배에서도 흘러내려, 찬이 세이지위스퍼 사부 앞에 가서 서자 그 커다란 발 주위에 고였다. 그가 너무 심하게 젖어 있어서, 열이는 덩치 큰 찬이 화로에서 돌아올 때 다른 사람들처럼 호숫가를 돌아온 게 아니라 헤엄을 쳐 온 걸까 생각했다. 세이지위스퍼 사부가 또 손을 내밀었다.


덩치 큰 찬이 손을 들자, 그때까지만 해도 열이가 서 있던 옆쪽에서는 안 보였던 뭔가가 눈에 들어왔다. 찬의 손이 웬 쇳덩이에 물려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쇠붙이로 만든 호랑이였다.


덩치 큰 판다렌은 부들부들 떨더니 음영파 사부에게 절을 했다.


"은화를 잡은 채로는 호랑이에서 손을 뺄 수가 없었습니다, 사부님. 호랑이 입이 너무 작고 뜨거워서..." 덩치 큰 찬은 차분한 눈으로 세이지위스퍼 사부를 올려다보았다. "... 그래서 화로를 가지고 다시 호수에 뛰어들었습니다."


찬이 또 한 번 재채기를 하자, 그 쩌렁쩌렁한 소리가 숲을 뒤흔들었다. 더 많은 붉은 꽃잎이 나풀나풀 바닥으로 떨어졌고, 열이는 다른 수습생들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찬을 바라보고 있는 걸 보았다.


올 때도 헤엄을 친 게 맞구나. 쇠 호랑이까지 가지고 말이야.


덩치 큰 찬은 팔을 들더니 화로를 발치의 바닥돌에 내려쳤다. 이미 찬물 때문에 약해져 있었던 화로는 쉽게 부서졌다. 찬은 은화 세 개를 세이지위스퍼 사부의 손에 떨어뜨렸다.


"제 뒤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열이는 물에 빠졌거나, 꽁꽁 얼었거나, 찬이 화로를 가져와서 시험을 포기한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궁금했다.


세이지위스퍼 사부는 일어서더니 수습생들에게 따라오라고 손짓을 했다. 모두들 사부를 따라가며 옷에서 물을 짜고 있었던 덩치 큰 찬과 멀찌감치 떨어져서 걸었다. 찬은 또 한 번 재채기를 하고는, 열이가 자기 뒤를 따라오면서 폴짝폴짝 뛰어 물웅덩이를 피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잘하던걸, 꼬맹이. 모자를 타는 게 힘의 시험에도 도움이 되는지 보자고."


털이 긴 소년이 웃음을 터뜨렸고, 열이는 그냥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덩치 큰 찬을 지나쳐 앞으로 나아가면서, 찬의 한쪽 팔을 툭 쳤다.


"축축함의 시험이 없어서 안 됐네. 그 커다란 바지가 호수 물을 반은 먹었겠는데 말이야."


덩치 큰 찬은 으르렁대더니 작은 판다렌에게 주먹을 휘둘렀지만, 그런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던 그는 쉽게 주먹을 피했다. 이제 크라사랑에서 온 소녀도 웃고 있었고, 열이는 짐짓 주먹에서 물을 털어내는 시늉을 해 보였다. 커다란 판다렌은 얼굴을 찌푸리고는 또 재채기를 했다. 단열 효과가 있는 지방 덩어리도, 얼음 같은 물에 그렇게 흠뻑 젖으면 별로 효과가 없는 모양이었다.


세이지위스퍼 사부는 네 수습생들을 데리고 육중한 대문을 통과해 수련 도장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돌기둥으로 둘러싸인 대련장이 있었다. 열이는 그곳의 역사를 느낄 수 있었다. 몇 세기 동안 계속된 수련과 수양이 공기에 스며 있는 듯했던 것이다. 음영파 사부는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하고는 조용히 숲으로 돌아갔고, 수습생들은 초조하게 도장을 둘러보며 다음 시험은 어떤 것일까 생각했다.


열이는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대련장 한가운데에 육중한 종이 세 개 놓여 있었던 것이다. 키는 어른 판다렌만 하고 둘레는 덩치 큰 찬만 한 고대의 종에는, 강력한 힘을 지닌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열이는 이걸 들고 가야 하는 건 아니기를 빌며 종에 다가갔다.


그때 수습생들의 뒤편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음영파에 걸맞은 결의를 보여 주었구나. 이제 너희의 힘을 보여 다오."


* * * * * *



뒤를 돌아본 열이는 헉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문에는 열이가 이제껏 본 사람 중에 가장 덩치가 큰 판다렌 전사가 서 있었다. 덩치 큰 찬보다 머리 세 개쯤은 가뿐히 크고 어깨도 훨씬 넓은 이 판다렌은 온몸이 근육으로 울퉁불퉁했다. 털은 거의 순백색이었고, 두 눈은 수습생들을 무시무시한 속도로 훑어보며 강점과 약점을 간파했다.


열이는 금세라도 폭발할 것 같은 힘의 결정체 앞에 서 있는 느낌이 들어 부들부들 떨었다.





"나는 검은경비병 유파의 완 스노우드리프트 사부다. 음영파의 전사는 내게 보고하고, 나는 타란 주 맹주님께 보고하지. 나는 우리 장벽을 지키는 전사들을 낱낱이 알고 있으며, 하나하나와 검을 겨루어 보았다. 너희가 살아서 시험을 통과해 음영파가 된다면 나와 검을 마주할 날이 올 것이다. 진정 상대를 알고 싶다면 싸워 봐야 하는 법이니까."


여기까지 말한 스노우드리프트 사부는 거대한 주먹을 불끈 쥐었고, 손마디가 꺾이는 소리가 도장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열이는 우거지상을 했다.


"하지만 오늘은 그날이 아니다. 너희는 어리고 미숙하다. 수습생은 무기가 아니고, 가열로에 들어가기를 기다리는 쇳덩이다. 쇳덩이는 먼저 힘을 증명해야 날붙이가 될 수 있지."


사부는 종 세 개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소리 없이 성큼성큼 걷는 모습에, 열이는 어슬렁거리는 호랑이를 떠올렸다.
"너희 앞에 있는 것은 성스러운 유물이다. 몇 세기 전, 시간의 시험을 이겨낼 수 있도록 마법과 야금술로 빚어진 물건이지. 하나하나가, 울렸을 때 완벽한 하나의 음을 내도록 조율되어 있다."


사부는 손마디로 자기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종을 두드렸고, 종은 둔탁한 소리를 냈다.


"훌륭하지 않느냐?" 스노우드리프트 사부는 웃음을 지었다. "이 종은 바닥에서 들어 올려 세게 치지 않으면 울리지 않지. 그것도 종에 깃든 마법의 힘이다."


열이는 얼굴을 찌푸렸다. 거대 종을 들어 올리는 건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리고 방금 종 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린 건가? 쉭쉭거리는 소리?


스노우드리프트 사부가 말을 계속했다. "종 안에는 서로 다른 종류의 죽음이 숨어 있다. 훔치는 죽음, 숨는 죽음, 구하는 죽음이지. 나는 숲에 가서 기다리다가, 종 세 개가 모두 울리면 돌아오겠다. 살아남아서 힘을 증명하는 이는 다음 시험을 치를 수 있다."


그때 덩치 큰 찬이 재채기를 했고, 음영파 사부는 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찬에게 손짓을 했다.


"일곱 번째 계절이 이번에는 유난히 춥구나. 또 다들 지쳐 있겠지. 이제 시작하자꾸나."


스노우드리프트 사부는 재빠른 동작으로 뒤돌아서더니 뒤에 있던 종을 걷어찼다. 종은 공중을 날아 대련장 반대편의 기둥에 부딪혔다. 기둥이 쪼개지면서, 작은 돌 조각이 바닥에 우수수 떨어졌다. 종은 아무런 손상도 입지 않고 바닥을 굴렀다.


스노우드리프트 사부는 다시 문 쪽으로 걸어갔고, 수습생들은 경외감에 사로잡힌 채 말 없이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너희가 잘 싸우기를 바라진 않는다." 그가 외쳤다. "하지만 싸워 보기는 하겠지."


문이 닫히고, 철컥 소리를 내며 자물쇠가 잠겼다.


"저기 봐!" 털이 긴 소년이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외쳤다.


뒤를 돌아본 열이는 헉하고 숨을 삼켰다. 종이 있었던 곳에 거대한 뱀이 똬리를 틀고 있었던 것이다. 뱀은 근육질의 목을 들어올리더니, 수습생들 위로 몸을 일으켰다.


"대나무 비단뱀이야!" 소녀가 소리쳤다. "물러서! 곧 공격할-"


뱀은 녹색 번갯불처럼 공격해 왔다. 털이 긴 소년을 바닥에 넘어뜨리고 그의 어깨 깊숙이 송곳니를 박은 것이다. 소년은 비명을 지르며 비늘이 덮인 뱀의 머리를 때리려고 했지만, 뱀은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며 그의 몸을 강하게 죄었다. 나머지 세 수습생은 뱀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나서 숨을 곳을 찾았다. 무기도 없고 훈련도 안 된 젊은이 넷이서 어떻게 이렇게 무시무시한 괴물을 꺾을 수 있겠는가?


크라사랑 소녀는 혼잣말로 욕을 하고 있었는데, 옆에 있는 열이에게도 그 화난 속삭임이 들렸다.


"이런 뱀 따위 나도 죽일 줄 안다고. 내 창만 있었어도. 왜 창을 못 들고 오게 한 거지? 창만 있으면 쟤를 구할 수 있는데!"


구하는 죽음.


"찬!" 열이가 소리쳤다. "저 종 중에 무기가 든 종이 있을 거야! 빨리, 밑을 봐 줘!"


덩치 큰 판다렌은 미쳤냐는 듯이 열이를 바라보았다.


"시도는 좋았어, 꼬맹이. 그런데 내가 저길 갈 것 같냐?"


찬은 남은 종 두 개를 가리켰다. 뱀과 그 사냥감 바로 뒤에 있는 종들은, 뱀의 공격 범위 내에 있었다.


"게다가 무기가 있는지 없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 뱀이 또 있을지도 모르잖아!"


털이 긴 소년은 이제 발버둥을 치지 않았고, 뱀은 소년을 한 번 더 흔들더니 똬리를 풀고 다시 몸을 꼿꼿이 세웠다. 몸이 에메랄드빛 비늘로 덮여 있었고, 눈은 차가운 검은색이었다. 긴 송곳니에서 피와 더러운 침이 흘러내려 돌바닥에 고였다. 열이는 바닥에 죽어 있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어깨에 눈물 모양의 붉은 자국이 두 개 나 있었다. 열이는 그 자국의 크기에 놀랐다.


훔치는 죽음... 독, 혹은 늪지의 유독한 액체. 작디작은 문을 통해 몸속에 들어와서 영혼을 빼어 간다.


도둑.


뱀은 이제 크라사랑 소녀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그녀는 대련장의 뒷벽으로 밀려 몸을 피할 곳이 없는 상태였다.


열이는 나머지 둘이 죽으면 자기도 시험을 통과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혼자서는 종을 들어 올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열이에게는 그 둘이 필요했다. 그건 묘한 깨달음이었다.


"찬, 날 믿어. 안 그러면 우린 다 죽어. 저 뱀이 '훔치는 죽음'이야. 종 하나에 '구하는 죽음'이 들어 있다고 했지? 그게 무기일 거야. 우리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죽음의 도구 말이야."


열이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양팔을 휘두르며 괴물을 향해 뛰었다. 뱀은 쉭쉭거리며 소녀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내가 뱀의 주의를 끌어서 종에서 떨어뜨릴게!" 열이가 소리쳤다. "종을 두드리고 안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지 들어 봐."


뱀이 열이를 쫓기 시작해서, 그는 뒤돌아서 뛰어야 했다. 기둥 사이로 몸을 피할 수 있을지도? 뒤를 돌아보니, 찬과 소년은 뱀이 열이를 쫓는 틈을 타 이미 종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뱀이 생각보다 빨라서, 아무래도 늦지 않게 기둥에 도달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스노우드리프트 사부가 걷어찬 종이 바로 앞에 가로누워 있었고, 작은 도둑은 뱀 아가리가 발꿈치에 와 닿기 직전에 종의 청동 몸체 뒤로 몸을 던졌다.


열이는 몸을 돌려 뱀을 살폈다. 뱀은 열이보다 키가 한참 컸고, 그에 비하면 종은 너무 작아서 엄폐물 구실을 못할 것 같았다. 뱀이 다시 공격을 해 왔고, 열이는 스쳐 지나가는 비늘과 송곳니 아래로 간신히 몸을 웅크렸다. 미끄러져 오는 괴물 뒤로, 덩치 큰 찬이 종 하나를 두드리고 밀림에서 온 소녀가 긴장한 표정으로 종에 귀를 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때 열이는 자신의 계획에 큰 허점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경쟁자 두 명이 무장할 기회를 준 것이다. 그 둘은 열이가 뱀에게 죽고 경쟁자가 하나 줄어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뱀을 처치할 수 있게 되었다.


덩치 큰 찬이 이쪽을 보고 열이에게 씩 웃어 보이더니, 작별 인사를 하듯 손을 흔들었다. 그는 종 하나를 끌어안더니 넘어뜨리기 시작했다.


열이는 이가 갈렸지만, 둘을 탓할 수는 없었다. 이 시험에서 중요한 건 생존이지 사교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 둘이 자기 시체를 밟고 음영파에 들어가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종의 아귀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서, 거대 뱀 바로 앞에 섰다. 뱀은 이 대담한 움직임에 놀랐는지, 잠시 움찔하더니 성난 듯 쉭쉭거렸다.


도둑인 열이는 상대를 관찰해서 '단서', 즉 상대가 곧 공격하려 한다는 걸 보여주는 특징적인 표정이나 몸짓, 또는 동작을 포착하는 법을 알았다. 거리에서 열이의 목숨을 수도 없이 구한 기술이었다.


뱀에게도 단서가 있었다. 열이는 괴물이 털이 긴 소년을 공격하는 모습과 자기를 공격하는 모습을 관찰했다. 뱀은 희생자가 죽기 직전에 느끼는 공포를 맛보기라도 하는 듯, 공격하기 바로 전에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버릇이 있었다. 열이는 다리를 굽힌 채, 뱀이 몸을 흔드는 모습을 최면에라도 걸린 듯 바라보며 혀가 날름거리기를 기다렸다. 지금이다!


열이가 몸을 위로 솟구치는 순간, 뱀이 방금 그가 있던 곳을 공격했다. 뱀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열이가 방금 있던 곳은 떡 벌어진 고대 종의 아귀였고, 뱀의 머리는 무거운 청동종에 부딪히면서 낭랑하고 아름다운 소리를 냈다.


하나.


열이는 괴물의 등에 내려선 후 몸을 굴려서, 종에서 머리를 빼내려 애쓰며 버르적거리는 뱀의 몸뚱이를 피했다.


* * * * * *



열이가 다른 두 수습생에게 다가갔을 때는, 크라사랑 소녀가 거칠게 웃으며 종 아래에서 창을 꺼내던 참이었다. 열이는 밑에 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보려고 쪼그려 앉았다. 날카로운 무기들이 바닥에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검, 곤봉, 도끼, 그리고 단검. 열이는 급히 넘어가고 있는 종 아래에서 무기를 꺼낸 후, 단검을 골라잡았다. 그러고는 위로 손을 뻗어, 단검의 무거운 칼자루로 온 힘을 다해 종의 옆면을 쳤다. 맑은 소리가 도장에 울려 퍼졌다.


둘.


덩치 큰 찬이 이제 더 버틸 수가 없다며 자기 무기도 챙기라고 구시렁거렸다.


"여기!" 열이가 도끼를 바닥에 미끄러뜨리며 말했다.


"늦었잖아." 찬이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조심해!"


그 말과 함께 그는 종을 놓았다. 종이 바닥에 철그렁 떨어지자, 밑에서 공기가 뿜어져 나왔다.


덩치 큰 찬은 웃음을 지으며 도끼를 들었다. 크라사랑 소녀도 창을 꼬나들며 마주 웃음을 지어 보였다.


"드디어 기다리던 부분이군." 덩치 큰 찬이 말했다. "뱀에게 우리 손으로 죽음을 선사해 주자고."


그때 종 안에서 웅웅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해 봐!"


덩치 큰 찬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고,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꼬맹인 어딨어?"


크라사랑 소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있을 데라곤 한 군데밖에 없잖아." 그녀가 말했다.


덩치 큰 찬은 매끄럽고 튼튼하고 아주 단단한 종의 표면을 마구 두드렸다.


"가문 대대로 저주 받아라, 이 치사한 꼬맹아! 부끄럽지도 않아? 대체 어떤 겁쟁이가 이런 짓을 해?"


"아직 살아 있는 겁쟁이지, 찬. 잘 들어. 뱀이 곧 종에서 빠져나올 거야. 게다가 생각보다 동작이 빠르다고. 녀석의 혀를 잘 봐. 공격하기 전에 혀를 날름거릴 테니까."


열이는 종의 시원한 벽에 등을 기댄 채 두 수습생이 이 도둑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었다. 결국은 뱀이 대신 결정을 해 주었다. 고함치는 소리, 도발하는 소리, 성이 나 쉭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비명과 포효가 그 뒤를 이었다.


휴, 저 밖에 있지 않은 게 천만다행인걸.


열이는 수습생들이 이제 무장을 했으니 밀림에 빠삭한 소녀와 힘이 장사인 찬만 있어도 뱀을 처치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고함치는 소리가 몇 번 들리더니, 또 쉭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 다음 뭔가가 바닥에 쿵 떨어지더니, 오랜 정적이 이어졌다. 그러더니 누군가 종을 탕탕탕 두드렸다.


"비단뱀아, 너니?" 열이가 대답했다.


덩치 큰 찬의 목소리는 피곤에 절어 있었고 분노로 끓고 있었다.


"뱀은 몇 동강이 나서 도장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꼬맹아. 난 이제 페이링이랑 같이 세 번째 종을 넘어뜨리고 시험을 마칠 거다. 넌 그 작은 금속 동굴 안에서 썩게 내버려둘 거고. 혹시 또 알아? 내가 음영파가 된 다음 다시 와서 종 안에 뱀을 한 마리 더 넣어 줄지 말야."


크라사랑 소녀(이름이 페이링인 모양이다)가 그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훌륭하군. 수습생들을 무장시켜서 목숨을 구해 주고도 미움을 샀으니 말이야.


열이는 그런 일이 익숙했다. 아버지에게, 형들에게, 또 거리의 다른 소매치기들에게 많이 당한 일이었다. 이 수습생들이라고 다를 게 뭐 있겠어?


누구도 계절을 바꿀 순 없어.


열이는 종을 두드렸다.


"덩치 큰 찬, 손목을 확인해 봐. 아무래도 너 뭔가 떨어뜨린 것 같아."


몇 초 더 정적이 이어지더니 분노에 찬 고함이 들려왔다.


"이 도둑놈! 이 막돼먹은 놈! 호젠 꽁무니나 쫓아다니고 뿌리나 파먹는 놈!"


욕설은 이런 식으로 한참 계속되었고, 마침내 둔탁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덩치 큰 찬이 종에 등을 대고 털썩 주저앉은 것이다.


"그 팔찌는 우리 어머니의 선물이란 말이다, 이 나쁜 녀석아. 냉큼 기어 나와서 팔찌를 돌려줘."


끙 하는 소리, 재채기 소리와 함께 종이 위로 기울기 시작했다. 열이가 굴러 나오자 세 번째 종에 등이 닿았다. 페이링은 바닥에 앉아서 창에 묻은 피를 닦고 있었다. 그녀는 열이를 올려다보더니, 짐짓 경례를 붙여 보이고는 다시 창을 만지기 시작했다. 열이는 어리둥절했다. 장난으로라도 누가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경의의 표시인가.


덩치 큰 찬은 종을 내려놓고는 뒤돌아섰다. 그는 심하게 숨을 헐떡이며 몸을 떨고 있어서, 도끼를 드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 전투에서 부상을 입어서, 바지의 한쪽 다리가 피투성이였고 찢어져 있었다. 돌바닥에 끌려 다닌 모양이었다. 다리에 상처를 입고 얼음물에서 헤엄을 친 데다 종까지 여러 번 들어 올린 탓에, 감기에 걸린 것 같았다. 하지만 덩치 큰 찬은 분노의 힘에 의지해 앞으로 나아갔다.


"팔찌를 내놔, 꼬맹이." 찬은 쌕쌕거리며 말했다. 그는 방금 내려놓은 종에 도끼를 내동댕이쳤고, 도끼가 종에 부딪히면서 튄 불꽃에 열이는 움찔했다.


"진정해, 찬. 네 보물 여기 있잖아-"


"당장 내놔!"


찬의 고함 소리에, 세 번째 종을 중심으로 바닥에서 물결처럼 진동이 퍼져 나가 찬을 넘어뜨렸다. 이것이 열이의 속임수라 생각한 찬은 으르렁거리며 무릎을 바닥에 대고 일어섰다.


"더러운 꼬맹이 같으니. 아무도 덩치 큰 찬의 물건을 훔칠 수 없어!"


페이링이 종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찬은 그제야 그 소리를 들었는지, 눈썹을 추켜올린 채 돌아보았다.


종이 흔들리고 있었다. 사방으로 요동치고 있었던 것이다. 뭔가 부딪히는 소리, 금속이 휘어지는 소리, 그리고 끓는 듯이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 쩍하고 갈라지는 소리가 대련장을 뒤흔들었다. 세 번째 종이 가운데에서 두 쪽으로 갈라진 것이다. 어슴푸레한 검은색 발톱이 두꺼운 구리 벽을 가르는 순간, 몇 세기 동안 종을 보호했던 고대의 마법이 백열하며 소용돌이치는 에너지에 휩싸여 힘을 잃은 것이다. 두 쪽이 난 종은 쨍그랑하며 바닥에 넘어졌다. 안에서는, 칠흑의 불꽃과 연기가 한데 뭉쳐 꿈틀거리고 있었다.





아냐, 이건 살아 있어. 괴물이야.


그것은 악몽으로 빚어진 듯했고, 육신을 얻은 그림자 같았다. 열이는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는 몸서리를 쳤다. 그 끔찍한 존재는 호랑이의 시체 위에 웅크리고 있었다. 열이는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알았다.


저 호랑이가 원래 우리 상대였던 거야. 숨는 죽음, 살며시 다가오는 사냥꾼. 이 괴물이 아니야.


그는 누롱 사부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적, '샤'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다는 걸 기억해 냈다. 뭐라고 하셨더라?


"샤와 가까이만 있어도, 삶의 평온한 일면에는 무심해지지."


그는 덩치 큰 찬과 페이링에게 기어가서 그들을 '샤'라는 것으로부터 끌어내려 했다. 둘은 공포로 얼어붙어 있었는데, 그들의 공포가 커짐에 따라 괴물도 커지고 있었다. 그것은 이제 겁에 질린 두 수습생의 호흡에 따라 고동치고 있었다. 샤는 벌써 셋의 덩치를 합친 것보다 더 컸으며, 한 순간 한 순간 새로운 발톱과 촉수가 돋아나고 있었다. 샤가 그들의 공포를 빨아들이는 동안은 공격을 할 것 같지 않았지만, 이 상황이 오래 가지 않으리라는 걸 열이는 알았다.


"너희 둘! 날 봐!"


둘은 공포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전투 훈련은 받았지만, 그처럼 악으로 끓어오르는 적을 만난 적은 없었다. 싸우는 법을 아는 것과 두려움을 아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열이는 두려움을 알았다. 그는 단검을 뽑아서 두 사람 앞에 들어 보였다.


"잘 들어! 우리는 겁 먹은 어린애가 아냐. 우린 음영파야. 우린 얼음 호수를 건넜고, 불타는 은화를 가져갔고, 잠행하는 죽음을 처치했어. 이건 시험이야. 우리 가치를 증명하고 악을 사냥하는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기회라고. 우린 할 수 있어."


나머지 둘은 열이의 말에서 용기를 얻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열이는 옷섶에 손을 넣어 황금 팔찌를 꺼냈다.


"받아. 네 물건을 훔쳐서 미안해, 찬. 내가 네 화를 돋워서 이 괴물을 키운 거야."


덩치 큰 찬은 열이의 어깨 너머를 보고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괴물이 줄어들었어. 네가 사과하는 순간에 말이야."


그에 대답이라도 하듯, 샤에게서 줄기 하나가 솟구쳐 나오더니 대련장 바닥을 기어 그들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열이는 얼굴을 찌푸렸다.


* * * * * *



이런.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었나 봐.


두 수습생이 휘청거리며 샤에게서 뒷걸음을 치자, 열이가 그들을 일으켜 세웠다. 그는 페이링에게 귀엣말로 빠르게 지시를 내렸고, 그녀는 또 경례를 붙이고는 괴물의 옆쪽으로 돌아갔다. 사냥감이 흩어지자 샤가 으르렁거렸지만, 결국은 정면에 있는 두 판다렌에게 집중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열이는 후퇴하면서, 마른 망토를 벗어 아직도 털이 덜 마른 찬에게 내밀었다.


"이것도 받아 둬. 다리를 묶어서 지혈을 해."


덩치 큰 찬은 잠깐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작은 도둑에게 커다란 손을 내밀었다. 덩치 큰 판다렌의 손아귀는 약하고 축축했다.


"난 지금 너무 겁이 나, 꼬맹이. 이건 악몽이라고. 하지만 너라면 방법을 찾아낼 거라 믿어. 돌멩이처럼 폴짝폴짝 뛰어 호수를 건넜을 때처럼 말이지. 팔찌는 네가 가져. 우리 어머니라도 네게 그럴 자격이 있다고 하실 거야."


열이는 팔찌를 다시 옷섶에 넣고는 찬의 손을 꼭 쥐었다.


"두려움을 억눌러. 내가 괴물한테 다가갈 테니까, 그 옆으로 돌아가. 공격하지는 말고."


열이는 찬의 손을 놓고는 돌아서서 샤를 마주했다.


"그리고 내 이름은 열이야."


덩치 큰 찬은 어두운 웃음을 짓고는 망토를 다리에 묶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괴물이 으르렁대며 덩치 큰 판다렌을 쫓기 시작해서, 열이는 재빨리 단검을 뽑고 샤를 향해 뛰었다. 샤는 수많은 발톱과 촉수를 쳐든 채 열이를 상대하려고 돌아섰다. 작은 도둑은 그 끔찍한 모습을 차분하게 바라보았다. 아니, 적어도 차분해 보이기를 바랐다.


"여기는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다, 괴물아."


샤는 어슴푸레한 촉수들을 금세라도 내리칠 태세로 들고 다가왔다.


"이 수도원은 명상과 집중의 공간이다. 네가 수도원 경내를 침입한 건 중대한-"


샤가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열이를 내리쳤다. 굵기가 나뭇가지만 한 촉수 두 개가 기괴한 채찍처럼 공기를 갈랐다. 아무리 열이라도 이 공격은 피할 수가 없었고, 촉수에 맞은 그는 도장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아, 진짜 아프네.


열이는 고통스럽게 다시 일어섰다. 갈비뼈가 한 대 부러졌고, 입가에서는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용케 단검은 놓치지 않았기에, 다가오는 샤를 향해 안쓰러운 모습으로 단검을 들었다.


"나는 일곱 살 때부터 고아였어. 살아남기 위해서 하수도에서 자고 토깽 떼와 싸웠어. 도둑이나 암살자들과 같이 저녁 비를 맞으며 잠을 청했다고."


샤가 으르렁거리더니 다시 공격해 왔다. 열이는 또 나동그라졌고, 단검이 짤그랑거리며 돌바닥 저쪽에 떨어졌다. 갈비뼈가 또 부러졌군. 일어설 수는 있을까? 하지만 일어서야만 했다. 그는 끙 하는 신음 소리와 함께 비틀비틀 일어섰다. 얼굴 한쪽에서 피가 마구 흘러내리고 있었다.


"내가 맞아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바로 지난 계절에 나는 쓰레기를 훔쳤다고 푸줏간 주인한테 맞았고, 대장간 가열로에서 손을 녹였다고 대장장이한테 맞았지."


굵은 촉수가 뻗어 나와 열이를 휘감더니 숨도 못 쉴 정도로 꽉 죄었다. 샤는 열이를 이빨이 들쭉날쭉한 입 쪽으로 당겼다. 단검을 떨어뜨렸기에, 열이는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한쪽 팔로 옷섶을 뒤졌다. 차갑고 단단한 덩치 큰 찬의 팔찌가 손에 닿았다.


"나는 평생 굶주림과 고통,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살았어." 열이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너 따윈 무섭지 않아."


열이가 샤를 향해 손을 움직이는가 싶더니, 찬의 긴 황금 팔찌가 공중을 갈랐다. 팔찌는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괴물의 번뜩이는 눈을 꿰뚫었다. 샤는 비명을 지르더니, 고통스럽다는 듯 촉수를 흔들며 열이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열이는 피를 토하며 무릎으로 기었다. 샤는 이제 열이보다 살짝 큰 정도였다.


"지금이야, 페이링!" 그는 괴물의 절규 위로 목소리가 전해지길 바라며 소리쳤다. 그러자 크라사랑에서 온 소녀가 창을 뻗은 채 어둠 속에서 뛰어 나왔다. 그녀는 관성을 이용해 샤를 창으로 찔렀다. 몸부림치던 괴물은 창에 찔려, 열이 옆을 지나 덩치 큰 찬이 있는 곳까지 밀려났다. 찬은 첫 번째 종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찬, 종을!" 열이가 일어서려고 애쓰며 소리쳤다. 그는 덩치 큰 판다렌 청년에게 마지막으로 힘을 쓸 기운이 남아 있기를 기도했다.


덩치 큰 찬은 열이의 계획을 짐작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쭈그리고 앉아 무릎을 굽히고 종을 껴안았다. 그리고 커다란 포효와 함께, 종을 번쩍 들어 올렸다.


페이링은 전력으로 질주해 허우적거리는 샤를 덩치 큰 찬 쪽으로 밀었다. 괴물은 고통으로 정신이 나간 듯, 촉수와 발톱을 무턱대고 난폭하게 휘두르고 있었다. 샤는 그러다가 소녀를 쳤고, 그러자 소녀의 어깨와 팔에서 피가 났다.


그녀는 고함을 내지르며 창을, 그리고 샤를 종 안으로 밀어 넣었다. 덩치 큰 찬은 그 충격으로 휘청거리며 뒷걸음질치고는, 으르렁거리며 종을 쾅 내려놓았다. 그 무게에 바닥에 금이 갔다.


종의 테 밑에 깔린 촉수들이 격하게 꿈틀거렸고, 그에 따라 종이 마구 흔들렸다. 덩치 큰 찬은 허리띠에서 도끼를 뽑아 무서운 표정으로 촉수를 자르기 시작했다. 페이링도 그를 도와서 촉수를 밟아 눌렀고, 그러면 도끼가 번뜩이며 떨어져 바닥에 부딪혔다.


열이는 옆구리를 부여잡고는 휘청거리며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이제 우리가 감정을 억누르기만 하면 이렇게 종에 가둬 둘 수 있을 거야."


페이링이 예의 그 거친 웃음소리를 냈다.


"그건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그녀가 말했다.


열이와 덩치 큰 찬은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종이 잠잠해진 것이다. 바닥에 간 금 사이에서 거무스름한 액체가 부글거리며 연기를 뿜고 있었다. 열이는 피가 눈에 들어가지 않게 눈썹에서 피를 훔쳤다.


"이제 저 세 번째 종의 파편을 치자. 우리가 힘의 시험을 통과한 것 같아."


* * * * * *



세이지위스퍼 사부와 스노우드리프트 사부는 얼어붙은 호수를 내려다보는 단상에 서서 차분한 표정으로 조용히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열이는 음영파는 말싸움도 이렇게 하는군, 하고 생각했다. 샤와 싸워 보니 이해가 되었다. 작은 도둑은 몸을 기울여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들으려고 애썼지만, 사부들의 말은 차가운 바람 소리에 묻혀 흩어져 들리지 않았다. 그런 자세를 하고 있자니 아직 다 낫지 않은 갈비뼈가 아파 왔다. 열이는 움찔하고는 다시 궁둥이를 붙이고 앉았다.


수도원 안에서 샤가 발견된 사건으로 불안감이 조성되어 있었고, 수습생들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여러 번 질문을 받았다. 음영파 대원들이 일의 내막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열이는 의무실에서 기다리는 동안, 세 번째 종 안에 있던 호랑이는 파이어바우 변두리마을에서 보내온 공물이지만 정작 그 마을 사람들은 선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열이는 생도들이 사마귀의 책략이라느니 모구의 음모라느니 소곤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어찌 됐든, 누군가가 붉은 꽃의 시험을 망치고 음영파의 성스러운 전통을 더럽히려 한 것이다. 열이의 추측에 따르면, 상황은 훨씬 나빠질 수도 있었다. 샤가 수습생들을 모두 죽였다면, 수도원 안에 쉽게 숨어들었을 테고 가장 취약한 곳으로부터 음영파를 타락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시험이 있을 때마다 수습생들이 죽어 나가니까.


그 말인즉슨, 열이와 페이링과 덩치 큰 찬은 영웅이라는 말이다.


열이는 옆에 무릎을 꿇고 있는 페이링을 힐끗 보았다. 그녀는 생도복을 입고 있었는데, 흰 스카프 때문에 귀 근처의 곱슬곱슬한 흰 털이 눈에 띄었다. 크라사랑에서 온 소녀는 옆에 무릎을 꿇고 있는 덩치에게 웃음을 짓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덩치 큰 찬도 생도복을 입고 있었지만, 목에는 스카프 대신 더럽고 해진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작은 도둑은 못 말리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덩치 큰 찬은 음영파로 활동하는 동안 경의의 표시로 열이의 망토를 두르고 있기로 맹세했던 것이다.


우리가 정말 음영파라면 말이지.


그게 바로 세 사람이 그곳에 불려 온 이유였다. 그들이 음영파에 들어올 자격을 증명했느냐 아니냐에 대해 논란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심문이 모두 끝난 후에, 열이와 덩치 큰 찬, 페이링이 의무실에서 상처를 회복하는 동안 스노우드리프트 사부가 찾아왔었다. 사부는 상급 생도에게도 치르게 하지 않았을 시험에서 용케도 살아남았다며 그들을 칭찬했다. 그는 수습생들의 힘이 자랑스럽다고, 또 시험을 더 치를 필요가 없을 거라고 말했다. 세 사람이 모두 회복되고 준비가 되면 도장에서 훈련을 시작할 수 있을 거라고도 말했다. 그런 다음 흰 스카프를 두른 생도들이 스노우드리프트 사부 뒤에 나타나서, 절을 하면서 세 수습생에게 생도복을 내밀었던 것이다.


그 다음 날은, 세이지위스퍼 사부가 생도 한 무리를 데리고 찾아왔다. 그녀는 수습생들의 용기에 감사하면서도, 전통에 따르면 세 가지 시험을 치러야 하므로 붉은 꽃의 시험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샤의 침입은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소중한 전투 훈련이 되었으며 힘의 시험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그것이 정신력의 시험은 아니었다고 세이지위스퍼 사부는 강조했다. 이번의 일곱 번째 계절이 하필이면 매우 추운 겨울철이라는 이유만으로, 결의의 시험 중에 호수에서 얼어버린 이들을 봐줄 수는 없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런 후 그녀의 생도들이 열이와 덩치 큰 찬, 페이링의 생도복을 벗기고는 절을 하고 떠났다. 다음 날에는 스노우드리프트 사부가 생도복을 돌려주었다. 이런 일이 일주일 동안 계속되었다.


그래서 셋이 지금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이다. 두 사부는 뒤돌아서더니 수습생들이 무릎을 꿇고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세이지위스퍼 사부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우리끼리 의견이 맞지 않아 미안합니다, 젊은 판다렌들이여. 스노우드리프트 사부도 미안해할 것입니다. 전통을 따르지 않으면 이런 일이 생기는 법이지요. 혼란 말입니다."


덩치 큰 음영파 사부는 고개를 숙여 그 말을 긍정하고는, 큰 얼굴에 옅은 웃음기를 띤 채 그녀에게 이야기를 계속하라고 손짓했다.


"저희는 아침 내내 전통과 실용에 대해 상세히 토론한 끝에, 마침내 합의에 이르렀습니다. 결론은... 우리가 그 결정을 내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말을 한 세이지위스퍼 사부는 뒤로 물러났고, 스노우드리프트 사부가 대신 나섰다.


"너희 수습생들이 세 번째 시험을 치러야 하는지는, 세 번째 시험을 책임지고 있는 음영파가 판단할 것이다. 불행히도 그는 너희가 샤와 대적한 직후에 이곳을 떠났지. 그것이 그의 임무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혐오스러운 적에 관련된 문제는 우 카오의 사부인 그의 소관이다."


아침 공기를 가르고 매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열이는 슬며시 웃음 지었다. 익히 아는 소리였던 것이다.


"기다려주어 고맙습니다, 사부들."


누롱 사부가 테라스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장화에는 눈이 무겁게 들러붙어 있었고, 망토에는 여행이 남긴 얼룩이 있었다. 열이는 그의 소매에 검붉은 자국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누롱은 한 손에 커다란 석궁을 들고 있었고, 한 손에는 자루를 들고 있었다. 열이가 몇 달 전에 지붕 위에서 본 창이 그의 등에 매여 있었다. 누롱 사부는 자루를 스노우드리프트 사부와 세이지위스퍼 사부의 발치에 던졌다.


자루가 바닥에 떨어져 열리면서, 머리 세 개가 굴러 나와 돌바닥에 나뒹굴었다. 처음에 열이는 그것이 두개골인 줄 알았지만, 곧 툭 튀어나온 곤충 눈과 톱니 모양의 턱에 눈이 갔다.


사마귀다.


머리의 눈에는 석궁 화살이 하나씩 박혀 있었는데, 세이지위스퍼 사부는 학구적인 호기심이 담긴 표정으로 그 역겨운 물건을 하나 들어올렸다.


"파이어바우 외곽에 숨겨져 있는 사마귀 소굴에서 이 암살자들을 발견했습니다." 누롱 사부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열이가 기억하는 그대로 차분하고 낮았다. "놈들이 죽기 전에 알아낼 수 있었던 건 거의 없습니다. 사마귀 첩자들은 아무리 고문을 해도 자백을 하지 않으니까요. 그래도 확실하게 하려고 다리를 모두 잘랐습니다."


스노우드리프트 사부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먼 쪽의 벽에 기대어 서 있던 생도 한 명에게 손을 흔들었다. 흰 스카프를 맨 조수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더니, 절을 하며 세이지위스퍼 사부가 내미는 머리를 받아 든 후 머리들을 다시 자루에 담았다.


"이제 공격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겠군요. 아니면 적어도 강력한 증거가 있는 셈이지요." 세이지위스퍼 사부가 말했다. "슬픈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장벽에 대한 전술이 바뀌지는 않을 것입니다. 가능한 곳에서는 방어를 강화하겠지만, 우리는 아직도 머릿수에서 밀립니다."


그 말에 누롱 사부가 웃음을 짓더니 처음으로 수습생들을 내려다보았다.


"적어도 음영파에는 유능한 신입 대원이 셋 있지 않습니까. 아니, 곧 생기겠지요. 이들이 마지막 시험을 통과할 수 있다면 말입니다."


스노우드리프트 사부는 얼굴을 찌푸린 채 목을 가다듬더니 말했다. "저는 당신이야말로 누구보다도 더, 이 수습생들이 침투한 샤를 쓰러뜨릴 때 보여준 용기에 감탄하리라 생각했습니다. 음영파의 정신을 증명할 방법이 달리 있습니까?"


누롱 사부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물론 감탄했습니다. 제가 들은 바에 따르면, 이 수습생들이 용기와 힘... 게다가 놀라운 꾀를 보여 주었다고 하더군요." 여기까지 말한 그는 열이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고, 열이는 어색하게 눈을 깜박이다가 고개를 수그렸다.


"하지만 전통에 따르면 시험은 세 가지여야 하고, 수습생들은 그 세 가지 시험은 치러야만 음영파가 될 수 있지요."


* * * * * *



세이지위스퍼 사부는 차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이 정도면 그녀로서는 웃음에 가장 가까운 표정일지도 모른다. 누롱 사부가 세 젊은 판다렌 앞에 와서 서자, 그녀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외눈의 음영파는 팔을 꼬았다.


"수습생들, 일어서거라."


열이, 페이링, 덩치 큰 찬은 일어섰다.





"나는 우 카오 문파의 누롱 사부다. 우 카오는 정찰병, 사냥꾼, 첩자, 암살자로 이루어져 있지. 우리는 그림자에 숨어 죽음을 선사하고, 괴물들이 밤을 두려워하도록 만든다."


"너희는 모두 첫 번째 시험을 치러, 결의의 징표를 얻었다. 손바닥을 보거라. 우리의 징표가 있을 것이다."


세 수습생은 각자 손바닥을 내려다보고는, 갓 아문 둥근 흉터를 보았다. 흉터는 은화에 찍힌 문양과 같은 형태였다. 호랑이 얼굴 모양이었던 것이다. 열이는 덩치 큰 찬의 얼굴에 떠오른 웃음을 보았다.


좋기도 하겠지. 세 개나 있으니까.


누롱 사부는 말을 이었다. "너희는 모두 두 번째 시험을 치러, 힘의 징표를 얻었다. 처음보다 더 많은 흉터가 생겼지만, 만일 우리의 일원이 된다면 수없이 많은 흉터가 생길 것이다."


열이는 이마에 감은 붕대를 만지고는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는 우리의 노련한 전사들만 감히 상대할 수 있는 적을 쓰러뜨렸다. 너희는 샤의 끔찍함을 목도했고, 그 괴물이 너희의 가슴과 머리에 불어넣는 어둠을 느꼈다. 비록 용기와 힘을 발휘해 살아남았지만, 너희는 이 전투에서 생각보다 큰 대가를 치렀다. 우리가 훈련이 덜 된 전사를 그런 적에게 보내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다."


"전투가 시작된 순간부터, 샤는 너희를 알게 되었고 너희에게 흔적을 남겼다. 샤가 남긴 흔적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이 시간부터, 샤와의 싸움은 매번 더 힘들어지고 더 끔찍해질 것이다. 샤가 이제 너희를 알기 때문이다. 너희의 정신을 알고, 약점을 알고, 두려움을 안다."


그 말에 열이는 진짜로 두려움이 느껴진다는 걸 깨달았다. 어느 때보다도 큰 두려움이었다. 누롱 사부의 말이 맞았다. 그에게 샤의 흔적이 남은 것이다. 열이는 몸서리가 나는 것을 애써 참고, 상처 받은 눈길로 사부들을 바라보았다.


사부들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누롱 사부는 외눈을 감았다.


"너희는 이제부터 세 번째, 그리고 마지막 시험을 치를 것이다."


"샤는 우리 땅의 모든 공포, 증오, 악의 힘이 응집된 존재다. 자비를 모르며 지치지 않는 적이지. 놈들은 사마귀를 조종하고, 야운골과 우리 민족을 이간질한다. 음영파인 우리의 임무는 샤를 말살하는 것이다. 샤가 판다리아에 가져올 악에 맞서는 유일한 방어선이자 마지막 방어선이지."


"음영파의 맹세를 하는 순간, 너희는 스스로의 의지로 샤와 다시 싸우기를 택하는 것이다. 평생 계속될 싸움이지. 우리는 너희에게 샤를 없애는 방법을 알려줄 것이고, 너희가 놈들의 두려움에 맞설 수 있게 너희를 무장시킬 것이나,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두려움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 시험은 이것이다. 음영파의 맹세를 해라. 이 모든 것을 알고, 그 모든 흉터를 지니고도, 우리와 함께하겠느냐?"


열이는 갑자기 뼛속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오한을 느꼈다.


샤를 다시 상대하라고? 우린... 겨우 살아남았잖아. 게다가 이제 샤가 나를 안다고? 절대 다시는 못해. 돌바닥 위에서 만신창이가 된 채 두려움을 바라볼 수는 없어.


테라스에 감겨드는 가벼운 바람에, 열이는 몸서리를 쳤다. 얼음 같은 산바람 때문에 갈비뼈가 시렸다. 열이는 손바닥에 난 작고 둥근 흉터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는 고향인 언덕골의 길거리로 돌아갈까 생각해 보았다.


그곳의 삶도 그다지 나쁘지 않았는걸. 어쨌든 살아남았잖아? 도둑으로 그럭저럭 살았지.


도둑.


저 위의 푸른 하늘에서 하얀깃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열이는 그 칭호가 이제는 자기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너무 시시한 칭호다.


누구도 계절을 바꿀 순 없어.


열이는 누롱 사부 앞에 서서 손을 꼭 쥐었다.


"맹세를 하고 음영파가 되겠습니다, 누롱 사부님."


페이링이 열이 옆에 섰고, 덩치 큰 찬도 그 옆에 섰다.


"저도 맹세를 하겠습니다, 누롱 사부님."


"저도요."


세이지위스퍼 사부는 못마땅한 얼굴을 하더니, 한 발자국 앞으로 나와 누롱 사부의 넓은 어깨에 손을 얹었다.


"하지만 자격을 증명하는 시험으로 음영파의 맹세를 할 순 없어요! 맹세는 시험을 통과한 후에만 할 수 있잖아요. 이건 몇 세기에 걸친 전통에 정면으로-"


"내 임무에 대해서 가르치려 들지 마십시오, 야리아!"


누롱 사부의 힘 있는 말이 테라스에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에는 노기가 아닌, 무서운 경고가 서려 있었다. 세이지위스퍼 사부는 무표정한 얼굴로 물러섰다.


"전통에 따르면 우 카오 사부가 마지막 시험을 주관하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했을 뿐입니다. 이 수습생들은, 앞날에 어떤 공포가 기다리는지 잘 알면서도 민족을 위해 봉사하기를 택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암울한 시기에 음영파에게 꼭 필요한 용기와 정신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하얀깃이 테라스로 날아 들더니 주인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너희는 마지막 시험을 통과했다, 젊은 판다렌. 해 질 녘에 입문의 다리에서 타란 주 맹주님께 맹세를 바칠 것이다. 걱정할 거 없다. 이번엔 호수에 빠뜨리지 않을 테니까."


나머지 두 사부가 생도들을 거느리고 테라스를 빠져나갔다. 열이는 세이지위스퍼 사부가 자신의 눈길을 피한다고 생각했다. 저분은 항상 저렇게 완고한 걸까, 생각하니 그 밑에서 훈련받을 것이 썩 기껍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건 나중 일이다.


오늘 난 음영파가 됐다.


그는 절을 하고는 페이링과 덩치 큰 찬을 따라나섰다. 그들은 숙소에 짐을 풀러 가는 참이었다. 열이는 자기 침대가 생긴다는 생각에 들떠 있었다. 이왕이면 새로 사귄 친구들 옆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후추투성이 두루마리의 열이여야, 너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뒤돌아보자, 누롱 사부가 테라스 끝의 돌 의자에 앉아 있었다. 외눈의 음영파는 여행으로 지쳤는지 벽에 기대어 있었다. 열이는 고개를 공손하게 숙이고 다가갔다.


"네, 사부님."


누롱 사부는 지친 외눈으로 열이를 바라보더니 한쪽 손을 뻗었다.


"네가 내 물건을 가지고 있구나. 돌려받고 싶다."


열이는 옷섶에 손을 넣으며 웃었다.


"죄송합니다, 사부님. 누구도 계절을 바꿀 순 없듯이... 오랜 버릇도 고치기가 힘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