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되면 낮보다 항해하는 것이 더욱 힘들어 진다. 앞도 잘 안보일 뿐더러 지도상의 위치를 가늠하는 것도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는 아까 전투가 일어난 곳에서 북쪽으로만 쭉 올라왔기 때문에 그와 반대방향으로 내려가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1시간의 항해 끝에 아까 교전이 일어났던 지역에 도착했다. 낮보다 많은 배들과 파편이 바다 위를 수놓고 있었다. 
아까와 같은 장소에서 이얀 토마스의 배로 추정되는 카락과 갤리들이 붙어있었다. 갤리 중 하나는 침몰해서 두 대만이 카락을 감싸고 있었지만 누가 승리했는지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안이 승리해서 배를 수리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갤리가 승리해서 카락의 전리품을 챙기고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선원들에게 조용히 해야한다고 당부한 뒤 조심하며 카락을 향해 다가갔다. 배를 옆으로 대고 갈고리를 걸어 고정시킨 뒤 노를 젓는 선원을 제외하고 모두 카락에 탑승하라고 명령했다. 아그네스는 이 배가 분명히 이안 토마스의 배가 확실하다고 말해주었다. 그녀도 우리와 함께 카락에 타고 싶어 했지만 밧줄을 타지 못했으므로 배 안에 남기로 했다. 이번 만큼은 자기가 짐이 될 거라는 걸 알기에 아쉬워 하면서도 수긍해주었다. 

배 안은 마치 메뚜기 떼가 지나간 밀밭처럼 적막했다.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오직 시체만이 사방에 넘쳐날 뿐이었다.

“끔찍하군.”

배 안까지 탐색을 마친 선원이 돌아와서 아무도 없다고 보고 했다. 대포와 탄약이 그대로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약탈 당한 것은 아니고 죽어 있는 사람 모두가 투르크 군이었기 때문에 생존자들이 배를 버리고 떠나버렸으리라 짐작했다. 나는 대포를 배에 싣으라고 명령한 뒤 함선으로 돌아왔다. 아그네스는 나에게 정말로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어보았다.

“이안은?”

“죽었어. 산탄포에 맞아서 갈가리 찢겨졌지.”

진지하게 대답하자 그녀는 충격에 휩싸인 듯 했다. 눈의 동공이 확 움츠러들더니 눈가가 촉촉해지며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았다. 
생각없이 내뱉은 농담에 이렇게까지 심각하게 반응할 줄은 몰랐으므로 당황해하며 농담이라고 말하자 그녀는 내 얼굴에 따귀를 날렸다. 그것은 귀가 멍멍거릴 정도로 아팠다. 이런 소란 때문에 대포를 옮기던 선원들의 시선이 모두 나와 아그네스에게로 쏠렸다. 나는 부끄러워서 차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어떻게 사람 목숨을 가지고 장난을 칠 수가 있어?”

그 물음에 내 서투른 장난을 진심으로 반성했다. 그것보다 선원들이 가만히 우리 둘을 보는 것이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몇 번이나 그녀에게 미안하다고 고개 숙여 사과했다. 그런데 이 망할 것의 계집이 갑자기 눈물을 주륵 흘리는 것이 아닌가? 소리 내서 우는 것이 아니고 그냥 순수하게 눈물을 흘리는데 정말로 화가 나서 날 죽여버리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이렇게까지 하긴 싫었지만 그녀에게 무릎을 꿇고 제발 울지 말라고 간청했다. 그녀도 우는 모습은 보여주기 싫은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울음을 참으려고 노력했다. 그러자 그녀의 하얗고 예쁜 눈 주위가 금세 분홍색으로 달아올랐다. 

“그럼 살아 있는 거야?”

이렇게 아그네스가 물어보자 나는 다행이라 생각하고 안심하며 대답했다.
  
“이안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아직은 몰라. 배에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살아있다면 가까운 아테네로 향했겠지.”

“당장 아테네로 가. 안 그러면 죽여버릴 거야.”

그 말이 실로 무서웠기 때문에 이얀의 배에서 고급 패드로 대포를 내리는 작업을 도중에 관두고 곧장 아테네로 향했다. 아테네 근방에는 유명한 여해적 크산티페가 거점을 삼아 순회하는 곳이였으므로 걱정이 되었지만 그 보다 더 걱정되는 건 선원들이 날 한층 더 바보취급 한다는 것이었다. 전투가 끝나고 지급한 럼과 맥주를 마시고 취한 선원들이 날 놀리는 노래를 불렀기 때문이다. 사내 대장부 뺨치는 여동생에게 계집애 같은 오빠가 벌벌 긴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 치욕을 참을 수가 없어서 선장실에 쳐박히고 싶었지만 이미 잔뜩 화가 난 아그네스가 들어가버린 상태였다. 내가 아무리 문을 두들겨도 열어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결국, 피할 곳이 없게 되어버리자 나를 놀리는데 재미가 들린 선원들과 합류해서 진창으로 술을 마셔댔다. 코가 삐뚤어지듯 취하자 선원들은 ‘아그네스는 이제껏 본 적 없는 최고의 여자다, ‘내가 당신이었어도 그녀를 당해낼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라며 칭찬하고 이해 해주었다. 덕분에 기분이 좋아져서 창고에 있던 술과 음식을 모두 꺼내어 먹으라고 명령했다.

"오늘 밤을 즐기지 않으면 벌을 내리겠다." 

 선원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노를 젓던 당번들까지도 내가 먹인 술에 취해버렸다. 
이후에 선원들과 함께 베니스의 뱃노래를 불렀고 함께 춤을 췄으며 머스켓 공이로 예비 돛의 조각에 불을 붙이는 내기까지 했다. 흥겹게 놀면서 다리에 힘이 풀릴 때까지 마시고 또 마신 다음, 기억이 끊겨버리고 말았다.


순간, 차가운 것이 내 얼굴에 닿는 것이 느껴저서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에서 깼다.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었고 주변에 수많은 배들이 보였다. 눈 앞에는 동상처럼 서 있는 아그네스가 날 화가난 듯 내려보며 바가지를 들고 서 있었다. 그녀가 물을 뿌렸나보다.

“일어나. 아테네야.”

그녀의 얼굴을 아무 말 없이 계속 쳐다보고 있자 수줍게 미소 지었기 때문에 그새 화가 다 풀렸구나 생각했다.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더니.
그래서 그녀가 건낸 손을 잡고 기분 좋게 일어났다. 일어나자 순간 머리가 빙글빙글 돌며 거북함을 느꼈다. 아그네스는 애써 나와 시선을 피하며 가죽으로 된 물통을 건내주었다. 어제 일 때문인지 날 보는 게 민망한 듯 보였다. 상관 없이 물을 모두 비울 때까지 꿀꺽거리며 마셨다. 어느 상인이 말했던가. 음주 뒤에 마시는 한 잔의 물은 천금의 가치가 있다고. 
배들을 보기 위해 갑판의 난간으로 섰다. 아테네 항구를 빠져나오는 수 많은 갤리들은 모두 베니스의 동맹항의 것들이었다. 어제의 전투는 베니스가 승리 한 것이다. 
우리 배와 아주 가까이 있던 배에선 숙녀들이 떼거지로 갑판에 몰려나와 나를 보며 환호성을 쳤다. 나를 손가락질 하며 손을 흔들길래 나도 그녀들에게 손을 흔들었더니 꺌꺌거리며 웃었다. 그랬더니 우리 배의 갑판에서 날 보던 선원들도 하하 거리며 웃었다. 그래서 무척 기분이 좋았다.
유난히 바닷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마치 옷이 없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아래를 살펴보니 바지를 입고 있지 않았다.

“어?”

순간 믿을 수가 없어서 다시 보니 윗옷, 아래옷 모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있었다. 나는 다물어지지 않는 입을 애써 닫고서 아그네스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뚱한 표정을 지으며 옷을 던지듯 건내주었다. 난 그것을 필사적으로 잡고서 중요부위를 가렸다. 그러자 얼굴이 새빨개진 아그네스가 화를 내며 말했다.

“술을 먹었으면 차라리 개가 되란 말이야. 다비드 동상이 되지 말고.”

이렇게 말한 뒤 기가 죽은 듯이 쑥쓰러워 하는 아그네스의 모습과 나의 얼빠진 표정을 보며 선원들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렇게 묻자 선원 중 한 명이 말했다.

“어제 머스켓으로 불 붙이기 내기를 했습니다. 거기서 함장님께서 지셨고요.”

기억이 날 듯 말 듯…, 하다가 기억이 돌아왔다.
화끈하게 벗고서 노래도 부르고 춤까지 췄다. 내가 소란을 피우는 바람에 함장실에서 나온 아그네스가 벗고 있는 나를 보고 꺄악 소리 지른 것까지 기억이 났다.
어느새 얼굴이 귀까지 새빨개진 나는 곧장 함장실로 들어가서 옷을 입었다. 문 밖에서 선원들이 날 놀리며 웃는 소리 때문에 난 그만 울음이 나올 뻔했지만 꾹 참았다. 그리고 속으로 되새겼다.
나는 함장이다.
나는 함장이다...
나는 함장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