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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08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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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대해적 - 8. 시련━━━━━━━━━━━━━━━━━━━━━━━━━━━━━━━━━━━━━━━━━━━━━
「멍청하게 있지말고 생각을 해봐!」 리지가 언성을 높혔다. 빠른속도로 접근해오는 ‘앤 여왕의 복수’ 호를 말없이 응시하는 저지의 모습 에서 답답함을 느낀 것이였다. 그러나 그녀의 귓전을 자극하는 앙칼진 음성에도 저지는 묵묵 부답이 였다. 「…제기랄…」 결국 그녀또한 체념한듯 말꼬리를 흐렸다. 과연 ‘앤 여왕의 복수’ 였다. 거대한 범선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둘이 탄 쪽배를 당장에라도 뒤엎을 기세로 코앞까지 다가온 것이였다. 범선의 그림자가 어느덧 쪽배를 덮었다. ━촤악! 배의 전진을 막기 위해 닻이 떨어진다. 수면을 부수는 상당한 높이의 물결은 쪽배를 덮쳤다. 면전에 짭짜조름한 소금물이 적잖게 튀었으나 그건 신경 쓸게 아니였다. 저지와 리지의 고개는 자연히 올라 갔고, 둘은 선수루의 난간으로 고개를 내밀고 자신들을 향하는 수많은 시선과 마주했다. ━두극, 두극. ‘앤 여왕의 복수’ 호에서부터 거대한 발소리가 들려온다. 갑판을 짓밟을때마다 파도소리보다 크게 그 의 발소리가 울려퍼졌다. 자리에 있는 모두가 거대한 이 발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하지 않고도 알수 있 었다. 선수루의 난간을 가득메운 해적들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자연히 좌우로 갈라지며 길을 텄다. 「… ….」 거무죽죽한 피부에 인중부터 얼굴의 반을 덮고 있는 거칠게 자라난 무성한 검은수염. 어깨를 나란히 하고있는 여느 해적들과는 감히 비교 조차 할수 없는 거대한 체구와 장신은 분명 카리브의 악마 검은 수염 ‘에드워드 티치’ 였다. 그는 선수루의 난간에 두 손을 얹고 아래를 내려다 보며 쪽배에 붙어있는 저지와 리지 블랙의 모습을 침묵으로 지켜보고 있었지만, 주위에 있는 이들은 그의 숨소리가 갈 수록 거칠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크으…!」 정적은 오래가지 않았다. 험상궂은 그의 얼굴이 더욱 험악해졌고, 그의 표정이 일그러짐과 동시에 티 치는 허리춤에 차고있는 총을 뽑아 쪽배를 겨누었다. ━탕! 그리고 지체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모두가 총성에 놀라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금새 뜨여지는 그들의 시야에 보이는건 아무 변화없는 상황이였다. 누구보다 놀란건 쪽배의 둘이였다. 자신들을 향 해 쏜 총탄이 둘의 몸 어디도 꿰뚫지 않았었다. 다시 둘은 선수루를 올려다 보았다. ━탁! 티치가 총을 갑판에 던졌다. 빗나간게 아닌 의도한 사격 이였다. 그리고 그가 노린건 둘이 아닌 둘이 타고있던 쪽배 였다. 총탄이 뚫고간 쪽배의 밑바닥은 보기좋게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곳으로 해수는 거침없이 올라오고 있었다. 저 거침없이 치솟아 오르는 바닷물이 이 쪽배를 가라 앉히는데에는 그다지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잠시 그 광경을 보던 저지가 이윽고 고개를 올리며 티치를 향한다. 해를 등진지라 그의 형상 은 검은 그림자로뿐이 보이지 않았지만 상관 없었다. 「범선까지 동원하고… 장난이 심하군, 티치.」 「입닥쳐! 다음에는 네놈의 머리다!」 티치의 벽력같은 호통소리에는 조금의 여유도 느낄 수 없었다. ‘어떤 이유’에서 그는 지금 크게 분노 한것이 분명했다. ‘앤 여왕의 복수’ 호가 돛을 펼때부터 뇌리를 스친 짐작이였지만 역시 ‘에드워드 티 치’ 가 저지와 리지의 ‘거래’ 에 대해서 냄새를 맡았던가 아니면 이미 알고 있는것이 분명했다. 능청스럽던 저지 또한 이번만큼은 표정을 굳히지 않을 수 없었다. 해적들의 ‘철칙’ 에 있어 왕실이나 국가와의 거래는 억지 스러울지 몰라도 비겁과 배신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비겁자’ 와 ‘배신자’ 에 있 어서는 교수대보다 무자비한것이 바로 해적들이였다. 「… ….」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했던가. 저지는 자신의 이 그다지 유쾌하지도 않은 삶의 굵직굵직한 순간을 떠 올리기 위해 머릿속으로 고뇌했지만 막상 떠오르는 것이라곤 지금 이 상황에 대한 우려 뿐이였다. 일 전에도 저 악마 같은 해적, 에드워드 티치가 영지로 망명한 비겁자와 배신자들을 귀신처럼 잡아와 나 소에서 처단하는 것을 몇번 본적이 있었다. 때문에 ‘카리브의 악마’ 와 동시에 나소의 해적들 사이에서는 ‘지옥의 사냥개’ 라는 멋진 별명도 가지 고 있는 티치였다. 그렇게 따지면 티치의 저 거대한 몸집은 사실 그의 내면에 은닉된 민첩과 기민, 그 리고 눈치를 숨기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봐, 티치! 우리에게 이러는 이유가 뭐지!」 어느정도 체념한 저지와는 달리 리지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서든 피해보려는 속셈이였다. 그리고 그 녀는 어쩌면 의미없을지도 모르는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그녀 또한 곧있어 후회할테지. 무슨 이유로 티치가 범선까지 이끌고 이렇게 우리를 쫓아왔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머잖아 일그러지는 리지 블랙 의 얼굴을 본 저지는 다시 시선을 거둔다. 「‘이러는 이유’ 가 궁금한가! 리지 블랙!」 갑판 위에서 거대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것은 마치 신이 불온한 인간을 호통 치듯 웅장했고 장 엄했다. 그의 괴성에 리지는 움츠려든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꼿꼿히 갑판 위의 ‘에드워드 티치’ 로 추정되는 검은 인영을 향하고 있었다. 「‘이러는 이유’ 가 궁금하냐고 물었다! 리지 블랙!」 다시묻는 티치의 목소리는 보다 커졌고, 이번에는 신이 불온한 개미를 호통치듯 더욱 웅장했다. 리지 가 힘겹게 말꼬리를 이었다. 「그… 그래.」 ━쾅! 그 순간이였다. 리지의 대답… 사실은 아주 작은 목소리였기에 갑판 위까지 들리진 않았으나 티치는 그녀의 입술이 떼어지는것을 포착하고 힘껏난간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좌중을 압도하는 티치의 카리 스마에 이를 지켜보는 모두가 마른침을 삼켰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지, 리지 블랙!」 이것은 호통의 목소리로 하는 ‘호소’ 와 흡사했다. 그녀의 표정이 더욱 굳는다. 「난 네 부친이신 ‘드레이크 블랙’ 선장을 내 동경의 대상으로 삼고 존경하며, 늘 그 처럼 되기위해 노 력했다! 결국 네 부친의 밑으로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그와 친우 였던 변절자 ‘호니 골드’ 밑에도 있었 고 그로부터 독립하여 내 해적선을 가지고 온갖 역경을 이겨내며 지금의 내가 되었다!」 이때부터 쪽배의 둘은 의아심을 품었다. 에드워드 티치는 비겁자, 배신자 속칭 ‘변절자’들을 처단하는 데 있어서 아무 말도 않고 손짓 하나로 그들의 생사를 달리 하는 그런 자였다. 그런 티치가 무슨 이유 로 이처럼 서론을 늘어놓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여전히 둘이 위험에 처한건 사실이였다. 「근데 왜 그런지 아나!」 티치가 묻는다. 물론 대답따윌 기대한 물음은 아니였다. 리지는 뭐라도 말을잇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 었다. 잠시 정적을 유지하던 티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돈과 명예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내가 그렇게 되기 위한건 오로지 한 이유 때문이였다!」 그때였다. 티치가 주먹을 쥔뒤 검지 손가락 하나만을 피며 문득 쪽배를 가리킨다. 「… ….」 좀더 정확히 보자면 그가 가리키는건 바로 ‘리지 블랙’ 이였다. 그녀 또한 티치의 지목을 알아챈 것일 까, 대답 대신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바로 너 때문이였다….」 그리고 흐려지는 말꼬리… 눈치 빠른 저지는 그 순간 직감했다. 이는 ‘거래’ 때문이 아닌 다른 이유, 어 쩌면 좀더 사소한 이유에 그의 격한 감정이 빚어낸 상황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리 된다면 살길을 만들 수도 있었다. 저지가 궁리하는 사이 티치는 말을 잇는다. 「이 세상의 수만은 진귀한 보석으로 창고를 가득 채우고, 빛나는 금화들로 산을 쌓아 올려도! 함께 그 것을 쓸 이가 없다면 아무 소용 없지. 난 이제껏 수많은 여자를 안아봤고 수많은 여자를 만나봤지만 그 걸로는 내 매마른 마음을 조금도 적셔줄 수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에드워드 티치…?」 「내가 원하는건 황금도 보석도 아닌 함께 이것을 누릴 ‘동반자’ 다! 그리고 넌, 내가 본 최고의 여자이 고 푸석한 모래밭과 같은 내 마음의 호수가 되어줄 존재란 말이다!」 일이 극단적으로 재밌게 흘러간다. 저지는 속으로 무릎팤을 치며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직감하였다. 리지, 그녀 또한 어서빨리 눈치를 챘으면 좋겠지만 여전히 그녀의 시선은 휘둥그레 어처구니 없다는 모 습이였다. 「너의 마음을 얻기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였다! 허나 너는 그것을 아랑곳 않고, 내 마음을 짓밟았지! 하 지만 난 참을수 있었다! 그래, 천하의 ‘리지 블랙’의 마음을 얻는데 이정도 시련정도는 기꺼히 감수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제서야 리지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줄 깨달았다. 더불어 그녀가 일을 마치고 나소에 정박하 여 머무를때마다 매일 아침 그녀의 머리맡이나 건물 밖에 놓여져 있던 조잡한 꽃다발을 떠올렸다. 누군 가 자신을 업신 여기고 장난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발견하는 즉시 짓밟고 찢어 발기며 아무데나 던져 버 리던 ‘그것’ 들을 말이다. 「그…그 꽃다발 설마…」 「그래! 이 내가 사랑을 담아 만든것이다! 때마다 너는 그것을 짓밟으며 내 마음도 짓밟았지! 하지만 늘 너를 위해 새로운 꽃다발을 만들며 내 사랑을 언젠가는 너또한 알아주리라 믿었다. 헌데…!」 티치의 표정이 다시금 오만상으로 일그러졌다. 그의 시선은 어느덧 저지에게로 향했다. 그의 꼴보기싫 은 낯짝만 봤을 뿐인데 자연히 티치의 어금니가 갈린다. 「하필…하필이면 저딴 형편없는 놈따위와 내 전부였던 네가 엮이다니!」 「무, 무슨소리야!」 「도대체 이 배를 타고 저놈이랑 어디에 가서 뭘 하려던 생각이였지, 리지! 도대체 저따위 형편 없는 놈 이 나보다 어디가 좋다고 이러는거야! 대답해보라고, 리지!」 리지가 표정을 구기며 옆의 저지를 힐끗보니, 그는 고개를 푹 숙인채 있었다. 하지만, 그의 긴 머리칼들 사이로 보이는 입가는 옅은 조소를 띄고 있었다. 「대답해! 리지!」 저지가 짓는 조소의 뜻을 알아챈걸까. 그녀는 마음을 가다듬더니 눈을 감고 차분히 말문을 열었다.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지, 에드워드 티치?」 「…뭐!?」 「내가 누굴 사랑하든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냐고 묻는것이다!」 「… ….」 단순히 둘이 어떠한 이유로 쪽배에 탔을 것이다, 그 이유는 결코 사랑이나 그런 복잡한 감정 때문이 아 닐것이다 하고 속으로 내심 바라던 티치의 바램을 산산히 부숴버리는 리지의 반론 이였다. 상황은 바뀌 었다. 살길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였다. 하지만, 리지로서도 이는 큰 희생이 아닐 수 없었다. 「소…소문이라고 믿었…」 「소문이면 어떻고 사실이면 어떻지? 나소의 얼간이들이 뭐라고 지껄이건 지금 네 눈으로 보는 이 상황 이 바로 ‘진실’ 이야!」 그녀가 본연의 패기를 되찾아간다. 반면, 티치의 표정은 분노에서 우울하게 급변하고 있었다. 「난 저지… 아니, ‘에단 테일러’ 를 사랑해. 그와 난 내 아버지 ‘드레이크 블랙’ 이 허락한 사이야! 네가 그토록 동경하고, 그토록 닮고 싶어있던 드레이크 블랙 말이야!」 여전히 저지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그의 잇몸은 드러날 정도로 미소가 번져 있었다. 그로서는 아주 재밌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천하의 ‘검은 수염’ 이 생긴것과는 다른 그런 순정파라니…. 게다가 아비 의 이름까지 들먹이며 이 희대의 사기를 성사시키려는 리지의 노력까지 모든게 즐길 수 있는 요소였다. 여러말이 오갔다. 어떤 말들이 오갔는지는 기억도 안나지만 아무튼 손발이 오그라 들면서도 스릴 넘치 고 재밌는 이야기였을것이다. 그때문에 여전히 자신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있질 않은가? 저지가 다시 대 화에 경청하자 리지는 쐐기를 박는 중이였다. 「이런 나마저도 진심으로 생각한다면 더이상 무례를 범하지 말고 당장 돌아가.」 언제부터였는가, 티치는 고개를 떨군채 묵묵히 있었다. 너무나도 잔인하고, 너무나도 차가운 리지의 말 에 티치는 정신마저 혼미했다. 상인들에게는 ‘악마의 눈’ 이라고 불리우는 티치의 눈은 초점없이 심각하 게 흔들리고 있었고 당장에라도 뜨거운 무언가가 흐를것 같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티치가 서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벅차오르는 감정을 애써 머금은듯 눈물은 흐르지 않았지만 그의 동공가는 여느때보다 붉을 실선으로 가득했다. 두렵게만 느껴지던 티치가 이제는 안타깝 게 느껴졌다. 「…돌아간다.」 「서, 선장!」 「…쪽배도 하나 버리고 가….」 이 이상의 말은 없었다. 그는 몸을 돌려 비틀비틀 선장실로 향했고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해적들은 난 간 아래로 고개를 내밀며 저지와 리지를 한번씩 번갈아본뒤 다시 고개를 짚어넣고 선장의 명을 따랐다. 다가온것처럼 멀어지는 뒷모습도 빠른 ‘앤 여왕의 복수’ 호였다. 어느덧 물이 반쯤 차올라 당장에라도 침 몰할것 같던 쪽배에서 ‘앤 여왕의 복수’ 호가 버리고 간 다른 쪽배로 건너 탄 저지와 리지는 긴 한숨을 몰 아쉬며 푸른 하늘을 응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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