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되고 싶어요.”

 

입에서 간절히 내뱉고 싶던 말은 결국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식도로 다시 꾸물꾸물 기어들어갔다. 주위에 있던 여우들은 하나둘씩 자리를 떠났다. 혼자 남은 아리는 달빛이 은은하게 내려쬐는 아이오니아의 풀숲에 몸을 뉘였다. 차가운 한기가 몰려들어왔다. 외로운 밤이었다.

 

-본능에 충실해. 그것이 우리가 사는 이유니까.

 

늙은 여우는 언젠가 그렇게 말했다. 아리는 생각했다. 나의 어머니도, 나의 할머니도, 그 위로, 그 위로.....그리고 내가 생각할 수 없는 태고의 선조들까지도. 모두 그렇게 살았겠지. 배가 고프면 자기보다 약한 동물을 사냥하고, 약삭빠르게 도망가고. 비겁하게 사는 존재.

 

‘이것은 탈이다. 나에게 씌워진 탈.’

 

탈이 언제 벗겨질지는 모른다. 어쩌면 자신 죽기 전이나, 사나운 짐승에게 잡아먹히기 전까지도 벗겨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욕망을 결코 버릴 수 없었다.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꿈이기에, 그녀는 그것을 지키고자 했다.

 

 

 

 

***

 

 

 

 

달빛이 내려쬐는 날 이후로 오랜 시간이 흘렀다. 세상은 수호군과 마법군단이 싸우던 양강 체제에서 벗어나, 힘을 숭상하는 녹서스와 정의를 수호하는 데마시아, 그리고 세상의 평화를 지키고자 하는 아이오니아가 마치 삼발이처럼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아리는 살아 있었다. 여우들의 무리에서 쫒겨나서, 혼자 힘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배가 고프면 다람쥐나 쥐를 잡아서 먹고, 사자나 호랑이 같은 맹수를 만나면 필사적으로 도망친다. 사람이 될 희망도, 꿈도, 의지도 버린 채 그녀는 하루하루를 본능적으로 버텨갔다.

 

 

“저건.......?”

 

 

우연히 먹이를 찾기위해서 분주히 돌아다니다 전쟁터를 지나게 될 때였다. 수백명의 군인들이 국지전을 벌인 곳이었다. 초원에는 피로 칠갑된 시체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고, 악취와 썩은내가 나는 이상야릇한 향기가 초원에 감돌았다. 아무리 본능에 충실한 여우라도 시체는 먹지 않는다. 그럼에도 아리는 초원을 가로질러, 생명의 향기가 느껴지는곳으로 질주했다. 본능에 이끌려 달려간 곳은 진한 자주색 로브를 걸친 부상자가 누워있는 언덕이었다. 아직 죽지는 않았다. 하지만 곧 죽을 것이다. 아리가 보기에도 가슴과 어깻죽지에 검상이 길게 남아있어서 살아남기에는 어려워 보였다.

 

 

“여우인가.......”

 

 

로브를 걸친 남자는 쿨럭대며 그렇게 말했다. 한움큼 피를 쏟아낸 남자는 그대로 주저앉더니, 다시 힘겹게 일어서서 지팡이를 쥐었다.

 

 

“너.......사람이 되고 싶으냐?”

 

번쩍, 멍하니 마법사를 쳐다보고 있던 아리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어떻게 짐승인 자신의 마음을 알아봤을까. 그런 의문을 갖기 전에, 아리는 입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그에게 필사적으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토로했다. 하지만 의미없는 울음소리만이 퍼져나갔다.

 

“아우우.........!”

“그래. 원을 들어주마.......”

 

마법사의 지팡이에서 붉은 불꽃이 타올랐다. 불꽃은 그대로 아리의 몸을 광선처럼 관통했고, 이윽고 번쩍 하는 빛이 아리를 휘감아 지나갔다. 형언할 수 없는 빛줄기를 맞으며 아리가 다시 눈을 떴을때, 마법사는 이미 숨을 거둔 후였다. 그때의 상황을 아리는 누군가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한처럼 밀려들던 수줍은 기쁨을 기억한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무언가 이상했다. 먼저 느껴진 건 자신을 복슬복슬하게 뒤덮고 있던 털들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미끈한 맨살이 채우고 있다는 것이었다. 성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대신 가지런히 정리된 음모가 수줍게 그녀를 감싸고 있었고, 봉긋하고 아름다운 타원형을 그리는 가슴이 솟아나 있었다. 꼬리도 바뀌었다. 하나였던 꼬리는 마법사의 농간인지 빛줄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홉 개나 돋아나 바람을 타고 넘실거렸다. 멍한 기분이 들었다. 몇분동안은 아무런 말도,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는 그녀였다.

 

“내가.........사람이 됐어!”

 

차가운 바람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하지만 기쁨이 더 앞섰다. 그토록 꿈꾸던 사람이 되었고, 더 이상 본능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기쁨도 잠시, 아리의 몸속에서 동그란 구슬 하나가 꿈틀거리며 올라왔다. 생명의 정기를 가득 품고 있는 구슬 한 개가 방금 죽은 마법사의 시체에 깃든 생명의 정기를 빨아냈다. 완전히 흡수를 마친 구슬은 이내 초록빛으로 빛났다. 그날 밤 털이 없어 추운 밤에 외롭게 떨며 밤을 지새던 그녀는 구슬의 초록빛이 사라지면 다시 여우의 몸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사람으로 살기 위해선, 남의 정기를 계속 빨아들여야 해.’

 

 

무턱대고 사람을 죽여서 정기를 빼앗을수는 없으니, 아리는 다른 방법을 고민해보기로 했다.

 

***

 

 

 

“야, 잠깐만.....어흑!”

 

 

“이제 겨우 두 번 가셨으면서.....아잉.”

 

침대에 누운 남자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아리의 가슴을 움켜잡았다. 무척이나 부드럽고 탄력있는 유방이었다. 찌걱대는 소리와 함께 둘의 소리는 점점 더 거칠어졌다.

 

“너, 진짜 최고다.”

“당신도 이정도면 상당한걸요, 우후훗.”

“잠깐만,이젠 진짜 무리야. 그만하자.”

“에이, 너무하시네요.”

 

땀에 흠쩍 젖은 남자는 아리를 밀쳐냈다. 곧바로 기분이 불쾌해진 그녀는 몸을 모로 하고 누워있는 남자에게 정기의 구슬을 날렸다.

 

“이, 이봐! 뭘 하는거야?”

 

아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젠 빌어도 소용 없거든?”

“으아악!”

 

구슬은 남자의 탄력있는 몸에서 뿜어져나오는 정기를 모조리 꾸역꾸역 빨아들였다. 모든 정기를 빨린 남자는 그대로 침대에서 떨어져 다시 일어나지 않았고, 몸은 팔십 먹은 노인네처럼 쭈글쭈글해졌다. 살아는 있지만 평생 노인의 몸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아리는 몸 곳곳에 묻은 찐득거리는 정액을 물로 비벼 닦고는 옷을 입었다.

 

“이제 오십명이라. 얼마만큼이나 더 해야될까나.”

 

진분홍색 차이나 드레스 안주머니에서 작은 저금통 하나를 꺼낸 그녀는 동전 한 닢을 떨어뜨렸다. 동전은 정확히 오십개가 들어 있었다. 다시 저금통을 주머니에 넣은 그녀는 구슬을 손으로 이리저리 굴리면서 여관을 유유히 빠져나왔다.

 

***

 

 

아이오니아는 물론, 데마시아와 녹서스에도 사람을 잡아먹는 요녀가 있다는 소문이 사람들 사이에서 퍼져나갔다. 엄청난 미모와 몸매를 활용하여 남자를 유혹한 다음, 모든 정기와 정력을 빨아들인다는 기괴한 소문이었다. 마을 남자들은 소문에 두려워하면서도, 한번으로는 그런 여자를 한번 안아본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사람을 잡아먹는 요녀가 있다고 하더군.”

“침대에서 꼼짝을 못하게 한다는거야.”

“꼬리도 아홉 개나 달려있다는 데?”

“그래도 한번만 만져봤으면.......”

 

평소에는 꼬리를 숨기고 다니던 아리도, 이상한 소문이 떠돌자 마을에 더 남아있기가 어려워졌다.

 

“어디로 가야하나.........?”

 

그렇게 아리는 아이오니아에서 녹서스로, 녹서스에서 데마시아로, 데마시아에서 다시 빌지워터 시로 떠돌아다니며 남자를 사냥하고, 정기를 얻고, 저금통의 동전을 채우며 반여우가 아닌 완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 힘썼다. 저금통의 동전이 백개가 되고 나서야, 아리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젠 완벽하게 사람이 될 수 있겠네요.”

“시끄러, 넌 미친년이야! 이 괴물!”

 

방금 아리에게 생명의 정기를 흡수당한 젊은 남자가 소리쳤다. 아리는 평소에도 그런 소리에 별로 아랑곳하지 않았지만, 오늘만은 달랐다. 정기를 달라고 요동치는 구슬을 잠재운 다음, 그녀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저도 인간이 되고 싶어요. 여러분들과 함께 살고 싶단 말이에요.”

“헛소리..,,,쿨럭......하지마. 이 괴물아.”

“제가 그렇게 미우신가요?”

“죽여버릴꺼야. 날 이렇게 만들다니...어흑흑.”

“.........미안해요.”

 

왜였을까. 아리는 그날 처음으로 남자를 죽이지 않았다. 저금통의 동전이 백개나 돼서 한 명쯤은 살려두어도 괜찮았던걸까. 그렇지는 않았다. 백명이건 천명이건 관계를 맺고 난 후에 남자는 모두 생명을 빼앗는다. 설사 빼앗지 않더라도 거의 초죽음으로 만드는 것이 그녀가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그날 처음으로 ‘눈물’이라는 것도 그녀는 흘려보았다. 이제껏 본능이라는 틀을 깨고 인간이 되고 싶었지만, 정작 인간이 된 후에도 그녀는 계속 본능적으로 인간을 탐하고 생명을 탐했던 것이다.

 

“난 바보였어.”

 

여우 시절에 살았던 아이오니아 남부 음험한 숲 속에서 아리는 그렇게 혼잣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한참을 번뇌속에서 고민하다, 아리는 마침내 답을 얻었다.

 

‘전쟁학회로 가자.’

 

이 시대 최고의 마법사들이 모여있다는 전쟁 학회, 그들이 가진 마력이라면 인간도 여우도 아닌 아리를 구제해줄 것이다. 대신 댓가가 따르겠지만, 그 정도는 사람을 매번 죽이고 그날 살아갈 인간의 힘을 얻는것보다는 훨씬 나으리라고 아리는 생각했다.

 

전쟁학회를 찾아가는건 의외로 쉬웠다. 아리의 미모에 낚인 부자 상인은 친절하게 그녀를 전쟁학회 본부로 데려다주었고, 아리는 고마움의 표시로 진한 키스를 그에게 해준 다음 학회의 소환사들을 만났다.

 

“네가 그 바로 유명한 요녀구나.”

“여긴 무슨 일이지?”

 

어두운 색깔의 두건을 뒤집어쓴 상급 소환사 두 명이 아리에게 그렇게 물었다. 아리는 지금까지의 일들을 그들에게 설명했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마법사가 자신의 힘을 모두 사용해 자신을 인간으로 만들어준 것, 하지만 인간의 모습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구슬로 남자의 정기를 빨아들여야 되는 것, 그래서 ‘남자사냥’을 계속하다 회한을 느낀 것..........

담담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들은 소환사가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우리의 힘이 필요하다 이 말이냐?”

“맞아요. 당신들의 힘이 필요해요.”

 

검붉은색 로브를 입은 소환사가 말했다.

 

“무언가를 얻으려면 댓가가 필요하다는것쯤은 여우인 너도 알고 있겠지.”

 

아리가 살짝 가슴이 파인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며 답했다.

 

“절 완벽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신다면, 기꺼이 하겠어요.”

 

소환사는 들고 있던 지팡이를 강하게 탕 하고 내리치더니, 마법지도를 소환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녹서스, 아이오니아, 데마시아, 빌지워터........그리고 다양한 도시들과 국가들. 우리 전쟁학회는 군웅할거 시대를 겪고 나서 다시는 이런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일으키지 말자고 맹세했지. 하지만 인간의 마음이란 건 그렇지가 않아. 마음속 깊은 곳에서 피를 갈구하고 있지.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리그’를 만들었다.”

 

아리는 귀를 쫑긋 세우며 이야기를 계속 들었다.

 

“다양한 국적을 가진 영웅들이 한 자리에 모여 실력을 겨룬다. 그 승패가 기록된 점수판은 나라의 부강함을 알려주는 지표가 되기도 하지. 그런 리그는 매년 열리고, 사람들은 전쟁을 하는 대신 리그를 관람하며 갈증을 해소하지.”

 

“피를 적게 보는 해결방법이군요.”

 

소환사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가 빠르군. 하지만 아직은 리그가 시작된지 얼마 안 돼서, 리그에 참가할 영웅들이 부족한 실정이야. 네가 그 리그에 나가서 싸워준다면 우리는 너에게 완벽한 인간이 되기 위해 필요한 마력을 제공하지. 어때, 할 텐가?”

 

 

생각만해도 아리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제껏 자신이 쌓은 정기들과 마력들은 시험해보지 않았지만, 상당히 강력할 것이다. 게다가 잊고 있었던 여우의 본능도 나름 평화롭게 해결 할 수 있고, 그들 말을 들어보면 리그에는 남자 영웅도 꽤 많은 것 같았다. 리그에 참가만 해도 자신을 완벽한 인간으로 만들어준다니, 아리에게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은 없었다.

 

“리그에 참가하죠.”

 

“좋아. 자네는 이제부터 리그의 심판이 되었네. 축하하네, 구미호.”

 

늙은 소환사가 손을 내밀었다. 아리는 수줍게 입을 가리고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정식으로 인가를 받고 본부 정문을 나오면서, 아리는 지금까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저금통을 꺼냈다.

 

 

“안녕.”

 

 

 

아리가 힘껏 저금통을 던졌다.

 

 

 

 

이제는 필요 없게 된 그 저금통은, 하늘에 길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고 있다.

 

 

 

처음으로 인간이 되기를 소망했던 그 만월의 밤처럼 맑은 달빛이 그녀의 어깨를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여우가 뛰놀기에 더없이 좋은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