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자르반

 “부벨르 부인, 부탁입니다. 제발…….”
 “다시 한 번 말씀드리죠.” 레스타라가 눈을 매처럼 번득이며 말했다. “안됩니다.”

 자르반 4세는 짜증 반 안타까움 반이 뒤섞인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실랑이만 벌써 10분 째였다. 

 콜민예 상임의원에게 대(對) 마법사 부대를 지원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데마시아로 돌아온 자르반을 기다리는 것은 바로 협곡에서 챔피언들이 역소환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전원 생존했다는 면에서는 기뻐할 일이었지만, 마냥 기뻐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협곡에 있었던 챔피언들은 문자 그대로 ‘목숨만 붙어서’ 돌아온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까. 자르반이 서둘러 왕립 마법학회 쪽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태가 상당히 안 좋은 쪽으로 치달아가고 있던 와중이었다. 

 쉬바나는 한쪽 어깻죽지가 박살난 채로 용 형상에서 돌아오지도 못한 채 길길이 날뛰며 소환실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있었다. 다른 쪽 챔피언들? 말할 것도 없었다. 럭산나는 무슨 짓을 당했는지 몰라도 마법을 지나칠 정도로 무리하게 사용해서 내장 쪽, 특히 심장이 완전히 맛이 간 상태였다. 하지만 그것도 베인의 상태에 비하면 약하다 할 수 있었다. 베인은 전신 골절이 된 것도 모자라 사지를 창으로 짓이겨 놓은 것처럼 끔찍한 중상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잭스야 소환된 곳이 다르니 그렇다 치고, 소나는…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쇠약해진 것 빼고는 큰 상처가 없었지만, 자르반이 쉬바나를 겨우 진정시키고 한숨 돌렸을 때엔 이미 부벨르 가문에서 소나만 쏙 빼서 데리고 간 상태였다. 결국 의식불명의 나머지 셋(그 중 한 명은 중태)을 제외하고 자르반이 도대체 협곡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정보를 들을 수 있는 상대는 소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전쟁학회로 향하기 전 부벨르 저택에 들려서 소나에게 정보를 얻으려고 한 것인데…….

 “난 왕자입니다. 계속 이런 식으로 무례하게 나온다면 아무리 공작부인이라 할지라도 묵과할 수 없습니다!”
 “이미 충분히 정중하게 대하고 있습니다, 자르반 왕자님. 소나 역시 방금 전에야 겨우 안정을 찾고 잠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다시 깨우는 것도 모자라 협곡에서 무슨 몹쓸 일을 겪었는지 물어보신다고요? 절대 안 됩니다.”
 “하지만…….”
 “그리고 이리 무례하게 찾아오시는 걸로도 모자라 무장까지 하고, 군사들까지 대동하고 오신다는 것은 대체 무슨 경우입니까! 왜 제가 계속 안 된다고 하면 힘으로라도 소나를 뺏어가려는 생각이십니까? 무례한 쪽은 왕자님이십니다. 데마시아 역사 상 그 어떤 왕족도 개인 군사들을 거느리고 부벨르 가문의 뜰을 짓밟은 적은 없습니다!”
 ‘아이고…….’

 …이런 식으로 슬쩍 위협을 가해도 부벨르 부인에게 씨알도 안 먹힌 채 철통 봉쇄를 당하고 있는 중이었다. 부벨르 가문이 어떤 가문이던가. 대대로 청렴결백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문화 예술 전반에 지원하는 것을 가문의 영예로 알았기에 귀족을 넘어 서민에게까지도 굉장히 좋은 이미지를 유지하고 있는 가문이었다. 영향력도 영향력이지만 부벨르 가문 자체도 굉장히 유서 깊은 가문이기에 아무리 왕자라 하더라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사실 부벨르 부인의 말에 틀린 것이 없기도 했다. 예고도 없이 갑자기 들이닥친 것도 자르반 쪽이었고 전쟁학회를 돕는단 명분을 가지고 대동시킨 레인저 부대도 부벨르 부인 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가는 길에 급히 들른다고 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렇다고 부벨르 부인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 하자니 지금 거느리고 있는 레인저 부대 자체가 군사 기밀에 해당하는지라……. 자르반은 골치가 딱딱 썩는 것을 느끼며 애꿎은 찻잔만 툭툭 건드렸다. 

 그래, 솔직히 말하면 자르반도 원래는 그냥 지원하는 시늉 정도로만 끝내고 학회 측에 생색만 내려고 했었다. 하지만 돌아온 챔피언들의 상태에서 유추할 수 있는 상황이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다. 협곡 내부에서 각 진영의 챔피언들이 서로 치고 받고 싸웠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안 해본 것도 아니었지만, 그럴 가능성은 한없이 적었다. 챔피언들은 누구보다 그들 자신의 입장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데마시아와 녹서스가 앙숙지간이라 해도 전쟁학회의 심기를 거스르면서까지 서로를 죽일 듯 공격할 이유는 없었다. 왜 하겠는가? 이득보다 잃는 것이 훨씬 큰 행동을……. 여기선 스웨인이 까발린 정보가 진짜라고밖에 믿을 길이 없었다. 분하긴 하지만, 전쟁학회와 챔피언들이 모종의 조직으로부터 습격 받아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을…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자르반은 속으로 침음성을 삼켰다.

 그는 혼란스러웠다. 챔피언들은 그 국가의 대표였다. 그들을 상처 입힌다는 것은 국가 자체에 대한 공격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챔피언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상처 입히고(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자르반이 협곡 내부 사정을 자세히 알 리가 없었다) 전쟁학회를 어려움에 처하게 만드는 무리가 존재한다니? 이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진짜 전투가 일어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하나의 정보가 얼마나 소중한지 모를 정도로 자르반은 바보가 아니었다. 

 결국 자르반은 강행돌파를 마음먹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


 #. 소나  

  
 “아가씨!”

 …머리가 울렸다.

 세상에 방에서 층계까지 오는게 이토록 힘든 일인 줄 소나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몸이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웠고 능력이 제대로 제어가 안 되는지 온갖 감정이 시끄럽게 뒤섞여 들리고 있었다. 꼭 저마다 다른 악기가 다른 소절을 있는 힘껏 연주하는 걸 듣고 있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물에 빠진 듯 둥둥 떠 있는 느낌…결국 소나는 층계를 반쯤 내려오다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사실 반이나 내려온 것도 용한 일이었다.

 털썩

 “아가씨, 괜찮으세요? 아아, 몸이 불덩이에요……!” 

 하지만 천만다행으로 누군가가 부축해 준 덕에 소나는 데굴데굴 구르는 대참사만큼은 면할 수가 있었다. 저택의 하녀 중 한 명인 조이가 그녀를 부축하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소나야!”
 ‘어머니…….’

 부벨르 부인은 전속력으로 뛰어왔는지 숨을 할딱이며 소나를 끌어안았다. 거기엔 방에서 들었던 분노의 소리 따위는 없었다. 걱정과 안도, 그리고 자신이 소리질러서 딸을 깨우게 했다는 죄책감……. 조이의 마음도 그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에 대한 헌신과 크디 큰 사랑이었다. 소나는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뻤지만, 지금은 할 일이 있었다. 

 “소란을 피워서 미안하구나, 시끄러웠지? 이 어미가 금방 정리하마. 하녀장! 소나를 방으로 부축해줘요, 천천히. 그리고 조이 당신은 소나가 진정될 때까지 옆에 있어줘요.”  
 “네, 마님. 아가씨 이쪽으로…아가씨?”
 ‘미안해요 조이. 하지만 자르반 왕자님께 할 말이 있어요.’

 소나는 부축하려는 하녀들을 애써 내치며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부벨르 부인이 황급히 소나를 막아서려 했지만 걸어서 못가면 기어서라도 가겠다는 그녀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결국 부인 역시 옆에서 소나를 부축해 줄 수밖에 없었다. 소나가 목소리와 특히 타인의 감정에 무척 예민하다는 사실을 잘 아는(물론 소나가 타인의 감정을 ‘들을’ 수 있다곤 상상도 못했지만) 부벨르 부인은 소나를 다시 방으로 되돌려 보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대신 그 안타까운 감정과 소나에 대한 사랑은 모조리 분노의 원동력이 되어, 소나가 응접실에 도착할 때 즈음해서는 그 분노가 모조리 자르반 4세를 향해 퍼부어지고 있었다. 엉거주춤하게 일어났다가 다시 자리에 앉은 자르반만 죽을 맛이었다. 부벨르 부인이야 그렇다 쳐도 세상에 하녀들에게까지 ‘우리 속의 돼지를 보는’ 듯한 눈총을 받다니……. 이럴 때 가렌이나 쉬바나라도 곁에 있었으면 든든했으련만. 그러나 가렌은 럭스 간호나 하라고 보내버린 뒤였고 쉬바나는 의식불명이었다. 집사인 신 짜오 역시 그의 다른 일처리들을 메꾸느라 정신이 없을 터였다. 새삼 그들이 빈자리가 뼈저리게 느껴지는 자르반이었다. 

 “소나야, 여기 앉으렴. 조이, 통역하세요.”
 “알겠습니다.”

 소나가 자리에 앉고 부벨르 부인이 하녀들을 향해 눈짓하자 그 즉시 소나에 대한 편의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소나의 고집을 꺾을 수 없으니 최대한 빨리 대화를 끝내겠다는 의지가 그녀에게서 물씬물씬 풍겨나오고 있었다. 한 하녀가 딱 시원한 정도의 반쯤 녹은 얼음주머니로 소나의 목덜미에 얼음찜질을 해주는가 하면 ‘*소나 식 수화’에 능통한 하녀 조이가 옆에 앉아 그녀의 손짓을 통역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게다가 나머지 하녀는 소나가 일어나 있는 틈에 약을 먹이려고 시럽 형태의 해열제에 좀 더 먹기 좋게 이것저것 섞고 있었다. 소나는 이런 어머니나 하녀들의 배려가 고맙긴 했지만, 솔직히…….

 ‘제발, 모두들……. 이러시면 저 부끄러워서 죽을 것 같단 말이에요…….’

 죽을 정도로 부끄러웠다. 

 그녀의 얼굴이 빨간 이유는 비단 열 때문만은 아니었다. 세상에 어린애도 아니고 남 보는 앞에서 이런 식으로 취급받다니, 소나는 애써 자르반의 감정의 소리를 듣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헛수고였다. 그에게서 들려오는 ‘신기한 생물을 보는 듯한’ 기묘한 감정의 소리가 들려오자 소나는 차마 자르반의 눈을 볼 수가 없어서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부벨르 부인은 그걸 소나가 무리하느라 진이 빠져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지, 자르반을 향해 한층 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녀가 통역해드릴겁니다. 끝나는 즉시 가주시면 감사하겠군요.” 부벨르 부인은 우아하게 화를 내며, 뒷말을 이갈리는 소리로 내뱉었다. “왕자님.”
 “무, 물론 그럴겁니다. 협조 감사합니다, 미스 부벨르. 제가 찾아온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당신에게서 협곡 내부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듣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겁니까?”

 소나는 심호흡을 하고 수화로 말하기 시작했다. 손끝이 떨려서 잘 움직이지 못했지만, 조이는 고맙게도 그녀의 수화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실시간으로 번역해줬다. 베인에게 습격 받았던 일, 챔피언들을 조종하며 그녀를 습격해 온 검은 무리들…소나의 수화를 통역해주는 조이의 입에서 깜짝 놀랄 정보가 술술 쏟아져 나왔다. 물론 소나도 미주알고주알 다 얘기해주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했으므로, 뺄 부분은 빼거나 적당히 얼버무려서 수화로 표현했다. 가령 카타리나에게 습격 받았다는 이야기라던가……. 그런 걸 얘기해봤자 카타리나 씨의 입장만 나빠질 뿐이었다. 

 “네가 그런 모진 고생을 했다니…….”  
 “갑자기 연결이 끊겼고 챔피언들이 조종당했다라…….” 자르반이 애써 부벨르 부인을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허나 이상하지 않습니까, 미스 부벨르? 분명히 협곡 안에 있는 모든 챔피언들이 조종당했다고 말씀하셨지요?”

 소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서 의문이란 이름의 뎅뎅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뭐가 이상하다는 건지 소나는 알 수 없었다.

 “그럼 왜 당신과, 그…챔피언 잭스는 조종당하지 않은겁니까? 분명 협곡의 모든 챔피언이 조종당했다면, 광역 정신 제어 마법이라든지 그런 종류의 무언가가 쓰인 것일텐데. 그것도 협곡 전역에 걸쳐 퍼져 있는 전쟁학회의 수많은 보호 마법을 무력화시킬 정도로 강력한 것으로. 전 특정 몇몇 사람만 피해가는 광역 마법에 대해선 들어본 적 없습니다.”
 
 ‘그건 잭스 님과 제 소환 마법이 서로 엉켜서…….’

 소나의 손놀림이 점점 더 빨라졌다. 그에게서 밤안개처럼 낮고 거무스름하게 의심의 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 의심을 하는건지 소나는 알 수 없었다. 적당히 가릴 사실은 가렸어도 결코 거짓말을 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르반 4세에게서 들려오는 의심의 소리는 점점 커져가기만 했다.

 “하지만 미스 부벨르.” 자르반 4세가 조용히 말했다. “소환 마법같이 소환사와 챔피언, 즉 개인과 개인을 단단히 결속하는 그런 종류의 마법은 끊어지는 일은 있어도 서로 엉키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합니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났다가는 정신 붕괴만으로는 끝나지 않을거라고 왕실 대마법사에게서 언뜻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단언한 자가, 흠…그 잭스였다는 말씀이시죠.”

 소나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자르반에게서 흘러나오는 의심의 목표는 바로 잭스였던 것이었다. 그녀의 의도와는 상황이 너무 다르게 흘러가자 소나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다시 조이를 향해 수화를 했다. 하지만 그녀가 몇 번이나 같은 손짓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말엔 조이가 통역을 해주지 않았다. 통역 대신에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소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굳이 통역 없이도 그녀의 수화를 읽을 수 있는 부벨르 부인이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안 된다, 절대로! 절대로 안 된다, 소나야!”
 “아니 갑자기 무슨…….”
 “전쟁학회에 데려다 달라니,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니! 넌 지금 쉬어야 한다, 얘야. 자, 가자. 방으로, 어서!”

 자르반은 멍청한 표정으로 소나를 바라봤다. 설마 저 아가씨가 자신들을 따라 전쟁학회로 가겠다고 한 것인가? 대답은 당연히 ‘안 된다’ 였다. 가서 진짜 전투가 벌어질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것은 협곡 안에서 펼쳐지는 대리 전쟁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한 번 죽으면 진짜로 죽을 수도 있었다. 자신도 지금 갈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는 와중에 소나 같은 ‘짐’을 동행시킨다는 것은 완전 어불성설이었다.

 “미스 부벨르, 마음은 알겠지만 그럴 순 없습니다. 거기서 전투가 일어날 지도 모르는데 미스 부벨르를 동행시킬 순 없습니다. 그 문제는 제게 맡겨두시고 쉬십시오. 사태 파악에 도움을 준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자르반이 딱 잘라 말하자 소나는 절망했다. 좀 더 잘 설명했어야 하는건데, 좀 더 제대로 설명해도 따라갈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를 일이었는데! 자르반이 말은 그렇게 했어도 소나는 그에게서 흘러나는 감정의 소리로 훨씬 더 자세하게 그의 의중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의심과…그리고 무시였다. ‘네가 가봤자 뭘 할 수 있냐’라는 뜻의 무시.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것은 사실이었다. 마음만 앞섰을 뿐, 실제로 그녀가 가본다고 한들 짐이 되었으면 되었지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간다고 뭘 할 수가 있겠는가. 잭스가 어디 있는 줄 알고 찾는단 말인가. 찾는다면? 찾는다면 뭘 어떻게 할 것인가. 너는 약하다, 아무 쓸모도 없다, 그런 어두운 울림이 소나 안에서 메아리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나는 가고 싶었다. 도움이 안 되도 좋으니, 가서 짐짝 취급을 당해도 좋으니, 가고 싶었다. 지금 가지 않으면, 잭스의 곁으로 가지 않으면 정말로 그가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이대로 그와의 관계를 끊기는 싫었다. 그와 좋지 않은 관계로, 이렇게 마무리도 안 된 기분으로 그를 떠나보내기 싫었다. 

 지금 잭스를 향한 소나의 기분은 완전히 엉망진창이었다. 목숨을 구해 준 은혜를 입었다는 점에서는 감사를, 아무 이유도 없이 그녀를 싫어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불편함을, 마지막까지 그녀를 챙겨줬다는 점에 대해서는 호의를, 그리고 계약 조건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그녀에게서 챔피언 박탈 맹세까지 뜯어낸 것에 대해선…증오를 느끼고 있었다. 그 좋고 싫은 기분이 엉망으로 섞여 있어서 잭스라는 용병은 소나에게 있어 동경과 증오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감정의 종착지는, 결국…만나고 싶다는 하나의 생각이었다. 

 “적당히 하렴, 소나! 얘기까지는 할 수 있게 허락했지만 이 이상은 안 된다! 하녀장, 이번에야말로 소나를 책임지고 방까지 돌려보내세요. 왕자님도 그만 일어나시지요. 이만하면 충분합니다.”
 “그러죠. 이거 실례했습니다.”

 결국 그녀의 안절부절 못하는 태도가 부벨르 부인의 남은 참을성의 심지를 다 태워버린 모양이었다. 소나는 가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쳤지만 그 가녀린 몸으로 몸부림을 쳐봤자 하녀 두 명을 떨쳐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안 돼……. 안 돼!’

 쾅!

 큰 소리가 나자 소나는 깜짝 놀라 혹시 자기가 몸부림치다가 누굴 친 것은 아닌지 주변을 둘려봤다. 다행스럽게도 그녀가 누굴 친 것이 아니라,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바로 바깥쪽으로 통하는 응접실 문이. 문을 연 자는 군인이었다. 아마 자르반이 데리고 온 군사들 중 한 명이리라. 하지만 자르반을 비롯해 여기 있는 그 누구도 저 군인이 들어온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가 다급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유도. 그가 서둘러 왕자를 향해 군례를 올리자 왕자가 근엄하게 말했다.

 “아직 이야기 중이네, 부대장.”
 “죄송합니다 왕자님. 하지만 긴급한 사항이라.”
 “으음, 이미 골치 썩일 일은 충분히 겪었는데 말이야.” 자르반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나가면서 이야기하지. 부벨르 부인, 오늘 정말로 실례가 많았습니다. 나중에 정식으로 사과드리죠.”
 “아닙니다 왕자님. 멀리 나가지 못하는 점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소나! 손님 앞이란다, 어쩜 이렇게 철딱서니가 없는 건지……!”

 부벨르 부인은 그렇게 말하며 소나를 거의 질질 끌다시피 해서 방으로 데려가려 했다. 아무래도 절대 물러서지 않으려는 소나의 고집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틀림없었다. 

 “아니, 뭐……? 잠깐만, 부벨르 부인! 잠깐만 멈춰주십시오!”

 하지만 그런 그녀를 멈춰 세우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자르반이었다. 부대장이란 군인에게서 뭐라고 귓속말을 들은 그의 얼굴이 이상할 정도로 딱딱해져 있었다. 그는 무슨 일인가 싶어 멈춰선 부벨르 부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더니, 잠시 소강상태로 몸부림을 멈춘 소나에게 몸을 기울였다. 그녀의 얼굴은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지만 자르반도, 소나도 그걸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 자르반은 방금 전해들은 사건 때문에, 소나는 자르반에게서 들려오는 음울한 소리의 심각함 때문에.

 “미스 부벨르, 맡겨 달라고 큰소리 쳤는데…이렇게 빨리 사과드려야 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소나는 멍한 눈빛으로 자르반을 바라봤다. 우는 눈보다 열 배는 더 부담스러운 눈빛이었지만, 자르반은 그 사실을 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 역시 챔피언이었고, 이 일에 아주 관련이 없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녀는 알 권리가 있었다.

 “전쟁학회 주변의 외적 침입 방지용 보호 시스템이 전부 가동되었다는 보고가 막 들어왔습니다.” 자르반은 침음성을 삼키며 말했다. “게다가 왕립 마법원에서 전쟁학회로 통하는 차원문도…알 수 없는 이유로 닫혔다고 합니다. 다른 국가 쪽도 알아보기야 하겠습니다만, 아마…….”

 그가 다음 말을 잇는 그 순간, 소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서 거의 부벨르 부인에게 매달리다시피 주르륵 미끄러져 주저앉고 말았다.

 “도움을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미스 부벨르.”

 소나의 눈에 깊디깊은 절망이 서렸다. 마침내 우려하던 상황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었다. 잭스와의 거리가 한없이 멀어지고 있었다. 자신이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이 참혹한 현실에, 소나는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흐느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었지만…….

 그녀의 입 밖으로는, 단 한 줌의 목소리도 새어나오지 않고 있었다.





--------------------------------------------------------------------------------------------------


메모

 소나 식 수화: 소나가 독창적으로 만들어 낸 수화 방식. 보통 세간에서 소나는 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일상생활을 그것만으로 하기엔 한계가 있는 법이다. 그래서 소나는 지휘자의 지휘법에서 영감을 얻어 하나의 수화를 만들어 냈는데, 그게 바로 소나 식 수화다. 그녀가 저택에 들어오고 본격적으로 음악을 배운 지 불과 한 달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지금에 와서야 물론 보통 수화도 가능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써온 것이 이쪽이라 소나는 이쪽을 더 선호하는 편이다. 부벨르 부인이나 저택의 하녀들은 그녀의 수화에 익숙해져서 충분히 그녀만의 수화를 해독하고 1대 1 대화를 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러있다. 그 중에서도 단연 뛰어난 사람은 물론 양어머니인 레스타라 부벨르, 그 다음으로는 소나의 전속 하녀인 조이 캠벨이 있다.

-------------------------------------------------------------------------------------------------------


잡담

0. 세상에 내가 일주일만에 두 개를 올리다니 이건 기적이야

1. 클라이막스를 향해...두근두근

2. 부벨르 부인 드디어 등장! 레스타라라고 할려다가 그냥 부벨르 부인으로 통일함.

3. 자반고등어왕자니뮤ㅠㅠ

4. 다음 편은 전쟁학회 내부 이야기! 클라이막스를 향해...(2)

5. 재밌으면 감상이나 덧글이나 하여간 땡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