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잭스

“후, 여자들이란.”

 잭스는 (안에 있는 그녀들이 듣지 못할 정도로 낮게)투덜거리며 병실 문을 쾅 닫고 나왔다. 사원이 싫으면 승려가 떠난다고, 결국 그녀들의 언쟁에 질린 그가 화장실을 간다는 핑계로 자리를 피한 것이었다. 하지만 화장실을 가고 싶은 마음 따윈 전혀 없는 잭스였다. 그는 아예 복도에서 죽치고 있다가 소나가 오면 우연히 만난 척 해서 들어갈 심산이었다. 아무리 베사리아와 레오나가 서로에게 으르렁거려도 소나 앞에서까지 그러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소나가 기다려지긴 했지만, 그와 동시에 한숨을 푹 쉬는 잭스였다. 

 그녀는 매일같이 방문해서 그에게 아브릴의 노래를 연주해주었다. 그게 작금의 상황에서 그 어떤 약이나 마법 치료보다도 잭스 속에 있는 푸른 불꽃을 다스리는 데에 가장 효과가 좋은 수단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연주다 뭐다 해서 이것저것 하는 통에 소나는 올 때마다 그의 병실에서 거의 한나절을 소모하곤 했다. 그녀도 그녀 나름의 생활이 있을 법일 텐데 이런 식으로 하루의 시간을 뺏는 게 미안한 잭스였다. 

 하지만 그의 한숨에는 미안함뿐만이 걱정도 섞여 있었다. 무엇이 걱정이냐면 소나가 걱정이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소나가 베사리아에게 물들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게 지금 그가 안고 있는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앞서 말했듯 소나는 올 때마다 그의 병실에서 거의 한나절을 소모하곤 했는데, 하루가 멀다 하고 그의 병실을 뻔질나게 드나드는 베사리아와 꽤 절친한 사이가 되어있었다. 바로 그게 걱정이었다. 잭스는 소나 같은 순수하디 순수한, 한 떨기 꽃 같은 아가씨가 베사리아에게 물들어버리는(?) 사태 따위는 결단코 바라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래저래 신세지고 있는 베사리아에게 오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그 전에 잭스가 그렇게 말해도 그녀가 귓등으로라도 듣기나 할지 의심스러웠다. 베사리아를 억제하리라고 기대했던 레오나도, 지금 저 꼴이고……. 그는 또 한 번 한숨을 푹 쉬었다. 어째 레오나도 이상하게 베사리아나 지금쯤 솔라리 신전에서 탱자탱자 놀고 있을 헬레나를 닮아가는 것 같아 골치가 아픈 잭스였다. 병실 문 안쪽에서는 여전히 베사리아와 레오나의 언쟁이 점점 더 크게(그리고 점점 더 유치한 주제로) 들려오고 있었다. 참으로 떠들썩한 나날들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요즘 들어 잭스는 인생에서 가장 떠들썩하다고 할 수 있을 법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여러 가지 의미로 말이다. 

 얼마 전에 일어난 협곡 사건에서 그는 에스트렐 일족이라는 과거의 망령들을 만나 문자 그대로 타죽을 뻔했다. 그 저주 받을 푸른 불꽃에 의해서 말이다. 애초에 써서는 안 되는 그것을 연속해서 두 번이나 썼으니 몸이 남아날 리가 없었다. 한 번 고삐가 풀리자 여태껏 꽤 잠잠하던 저주의 불꽃은 야생마처럼 날뛰며 그의 속을 헤집고 다녔다. 소나가 연주해주는 아브릴의 노래가 없었더라면 잿더미가 되어도 진즉에 되었을 터였다. 몸이 이 지경이 될 정도니 분명 수명에도 문제가 생겼겠지만…잭스는 거기에 대한 생각은 접어두기로 했다. 살아남은 것만 해도 운이 정말 좋은 것이었다. 

 사건의 여파가 끼친 영향은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잭스의 부상은 작은 문제에 속했다. 당장에 전쟁학회라는 거대한 조직이 지도상에서 문자 그대로 지워질 뻔 했으니 말이다. 대륙의 평화를 지키는 리그 시스템 역시 통째로 공중분해 될 뻔했고, 챔피언들은 죽거나 그놈들의 꼭두각시가 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을 뻔했다. 농담이 아니고 정말 운이 조금만 더 따라주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됐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이 무서운 것이었다. 그 생각이 들 때마다 누군가 심장을 옥죄는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지는 잭스였다.

 그때로부터 고작 해봤자 1달 정도의 시간밖에 흐르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세간에선 소환사의 협곡에서의 사건 따위는 잊힌 지 오래였다. 가장 정확한 리그의 소식을 전해준다는 ‘저널 오브 저스티스’ 잡지에서조차 니달리나 잔나 같은 여성 챔피언들의 시시콜콜한 스캔들 이야기나 메인 기사로 내걸고 있는 실정이니 말 다한 셈이었다. 하지만 잭스는 알고 있었다. 이 사건은 각 도시국가의 수뇌부와 전쟁학회의 합작으로 세간의 눈이 미치지 않는 곳에 묻혔을 뿐, 문제 자체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는 것을 말이다. 당장에 그가 이곳 데마시아 왕립 병원에 있는 것만 해도 그 은폐공작의 중 하나라 할 수 있었다. 

 이미 여기서 할 수 있는 치료는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잭스의 퇴원 허가는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떨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국의 챔피언들을 구해준 보답이라는 명목 하에 조용한 귀족용 개인 병실에 틀어박혀 있는 신세였다. 솔직히 말해 말이 입원이지 사실상 구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 하나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잭스는 둔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별 말 않고 있는 이유는 소나나 베사리아, 레오나 등이 그를 위해 알게 모르게 열심히 노력해준다는 사실 하나 때문이었다. 고맙고도 미안한 일이었다. 사이만 좀 좋게 지내준다면 더욱 좋을 텐데……. 잭스는 한 번 더 무거운 한숨을 쉬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침대 시트를 두건처럼 푹 눌러 쓴 그의 모습은 그 큰 덩치와 함께 침대 시트와 환자복으로 만든 덩어리 같았다. 

 -잭스 님? 

 그때였다. 그의 머리를 울리는 거룩하기까지 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잭스는 고개를 돌렸다. 이제 막 계단을 올라온 소나가 양 손 가지런히 에트왈의 케이스를 들고 그를 보고 있었다. 조금 놀란 듯 그녀는 맑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아아, 미스 부벨르. 잘 와줬소.”

 잭스는 이제 살았다는 투로 그녀의 이름을 낮게 불렀다. 소나는 가지런히 모은 양손에 커다란 케이스를 들고 있다는 게 무색할 정도로 빠르게 다가오더니 염려가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잭스 님, 누워계셔야죠. 이렇게 아무도 없는 데서 갑자기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끙, 누가 들으면 내가 오늘내일하는 중환자인줄 알겠소. 걱정이 너무 과하오. 난 괜찮소.”

 잭스는 멋쩍은 걸 만회하려는 듯 허허 웃었지만 그래도 소나의 걱정스런 표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잭스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 그건 그렇고 오늘도 정말 잘 차려입고 왔구려, 미스 부벨르. 이거 내 눈이 다 호강할 지경이군.”
 -정말요? 잭스 님이 보기엔 어떠신가요? 너무 화려하진 않으세요?

 다행스럽게도 소나는 금방 바뀐 화제에 잘 따라와 줬다. 아무래도 잭스가 말을 돌렸다는 걸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런 그녀를 속인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다른 의미로 죄악감이 드는 잭스였다. 그런 잭스와는 별개로 소나는 얼굴이 발갛게 변한 채 고개를 푹 수그렸다.

 “전혀. 아주 아름답소. 어디 파티라도 약속되어 있소? 그렇담 이거 참 미안하게 됐군. 혹시 없는 시간 쪼개서 이곳에 온 건 아닌지 모르겠소.”
 -아니에요! 정말, 그런 거 아니에요, 잭스 님! 왜 이렇게 몰라주세요. 이건 잭스 님께 잘…….

 소나는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아니 실제로 소리를 내는 건 아니지만 일단 기분 상으로는 그랬다. 소나는 그까짓 파티보다 잭스 쪽이 몇 배, 몇 십 배나 더 중요했다. 이 모습은 오로지 그의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 싶어서 꾸미고 나온 것이었다. 물론 아름답다고 얘기해줘서 고맙지만, 조금 더 칭찬 받고 싶은 게 소나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기엔 너무 부끄러운 그녀였다. 정말 이 남자는 왜 이렇게 눈치가 없는 걸까!

 “미스 부벨르? 잘, 하고 뭐 말이오?”
 -…몰라요!
 “응?”

 결국 그 속상함은 분노로 변질되어 버렸다. 물론 그걸 알 리가 없는 잭스는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몰라요! 저 먼저 들어가 있을 테니 밖에 있든 들어오시든 마음대로 하세요!
 “아, 아니 잠깐…….”

 쾅!

 소나는 부루퉁한 얼굴로 잭스를 쏘아붙이더니 그대로 그를 지나쳐 병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모르긴 몰라도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게 분명했다. 분명하긴 한데, 문제는 그게 뭔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잭스는 두통이라도 생긴 것처럼 미간을 매만졌다. 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 평범하게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후우…….”

 그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요즘 들어 소나의 새로운 면모를 하나 둘 발견하고 있는 잭스였다. 걱정스러워하다가 부끄러워하고, 그리고 갑자기 화낸다? 잭스의 사고회로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성격 전개였다. 어쨌든 소나가 왔으니 그 둘이 더 이상 말다툼을 하진 않을 터였다. 이제 남은 일은 소나의 연주를 감상하며 느긋하게 한 때를 보내는 일뿐이었다. 소나의 기분을 상하게 한 일이야 나중에 사과하면 될 일이었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착하고 순한 성품의 소유자였으니까, 솔직하게 사과하면 될 일이었다. 그래, 그러자. 잭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병실 문 앞에 섰다.

 그게 얼마나 거대한 착각인지도 모르고서 말이다.
   

***


 디리리링

 소나의 부드러운 연주가 병실 안을 조용히 울리고 있었다. 아브릴의 곡조였다. 매번 소나가 올 때마다 연주하는 곡이었지만 몇 번이나 들어도 질리지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곡이었다. 가지런히 앉아 에트왈을 어루만지듯 연주하는 소나는 마치 한 떨기 물망초 꽃처럼 단아했다. 하지만 한 송이 꽃이라 할 만한 여성은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곁에는 베사리아와 레오나가 앉아 있었으니 말이다. 

 소나가 청초한 한 떨기 꽃이라면 베사리아는 화사하게 핀 황금빛 크로커스였다. 자랑하는 황금빛 머리카락을 느슨하게 목 부근에서 묶은 그녀의 모습은 단출한 보라색 소환사 로브 차림마저도 지적으로 보이게 할 정도였다. 레오나 역시 꾸미지만 않았을 뿐, 앞서 말한 두 사람과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미인이었다. 앞선 두 사람에 비해 별 장식도 없는 하얀 사제복 차림이었지만, 고고한 그녀의 자태는 아스라이 지는 노을빛을 받는 목련과도 같았다. 

 여러 가지 의미로 한 번 보기도 힘든 미인들이 이렇게 한 자리에 모여 있다니 이것은 거의 기적이라 부를 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미인들이 여기 있는 이유가 고작해야 이 잭스라는 용병의 병문안 때문이고, 그마저도 적어도 한 명 이상은 푸대접(한 명이 누구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터였다)을 받고 있다는 충격적인 진상을 그녀들에게 호감을 품고 있는 남성들이 알게 된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잭스의 병실이 외따로 떨어져있기에 망정이지 이 사실이 새어나가기라도 한다면 그들의 피맺힌 저주를 받을 터였다. 물론 그 저주 뒤에는 어디 네놈이 내 처지가 되어보라며 주먹떡을 선사해주는 잭스를 만나게 되겠지만 말이다. 

 그만큼 잭스가 지금 처한 현실은 절박했다. 소나의 등장이 매우 이상한 방향으로 시너지 효과를 낸 탓이었다.  
 “어머나, 레오나 사제님. 그 얘기 들으셨어요? 글쎄 힘들게 없는 시간을 빼서 병문안을 와줬는데 손님을 내팽개치고 나가버린 환자 분이 있다는 소식 말이에요.”

 “네, 상임의원님. 저도 먼 곳에서 어렵게 온 미리암(Myriam, 제자라는 뜻의 솔라리 고어)을 내팽개치고 간 루암(Luam, 스승이라는 뜻의 솔라리 고어)의 얘기를 들었습니다.”
 -저도 신경 써서 왔는데 사람 맘도 몰라주는 환자 분의 얘기를 들었어요, 흥!
 “…….”

 안녕 평온한 한 때여. 잭스는 오늘 만나보지도 못한 그 ‘평온한 한 때’에게 작별의 인사를 건냈다.

 과연 소나의 등장으로 베사리아와 레오나의 말다툼‘은’ 멈췄다. 문제는 지금 서로에게 향하던 화살이 죄다 잭스를 향해 머리를 돌렸다는 점이었다. 소나의 연주와 더불어 베사리아와 레오나가 잭스를 향해 남 얘기 하듯 던지는 가벼운 조롱은 흡사 하모니를 연상하게 할 정도였다. 둘은 아까 싸웠다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잭스가 봐도 깜짝 놀랄 정도로 죽이 잘 맞았다. 그렇게 죽이 잘 맞으면서 대체 왜 싸웠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는 잭스였다. 거기에 소나까지 아까부터 무슨 심통이 났는지 병실에 들어오고 내내 퉁퉁 불어있으니……. 이거 참 잭스만 죽을 맛이었다. 실제로 병실 안을 울리는 목소리는 두 명분이었지만 잭스는 소나를 포함해 도합 세 명이나 되는 여성의 목소리 폭격을 받으며 병상에 찌그러져 있어야 했다. 그 풍채 좋은 잭스가 잔뜩 어깨를 움츠리고 있는 모습은 참으로 보기 힘든 장관이었다.

 “그러니까 미안하다고 하지 않았소.”
 “미안하다고요? 어머, 이거 보세요, 레오나 사제님. 매번 이렇게 스리슬쩍 말로 넘어가려고 한다니까요. 신경 안 쓰는 척 하면서 조금만 눈을 떼면 제일 위험한 곳에 고개를 들이밀고 있고, 매번 일이 끝나면 으깨진 감자 꼴이 돼서 골골거리고. 문제에요, 문제.”
 “으깨진 감자라니, 그 무슨…….”
 “충분히 공감할 수 있습니다, 상임의원님. 그러고 보니 루암께서 예전에 솔라리에 머무실 때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과연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싶기도 하군요.”
 -게다가 이번 협곡 사건 때의 챔피언 분들 중에서도 정말 목숨이 위험하셨던 분은 잭스 님 뿐이셨어요.
 “…….”

 불가항력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란 것인가. 잭스는 지금 신화 속에 나오는 헤카톤케일(머리가 오십, 팔이 백 개 달렸다고 하는 거인)과 맞서는 심정이었다. 우아함을 잃지 않고 쉴 새 없이 몰아붙이는 세 명의 여인에게 그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베사리아가 운을 떼면 그걸 레오나가 멋지게 받아치고, 소나가 옆에서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어주는 식이었다. 다들 뭔가 쌓인 게 많은 모양인지 그에 대한 불평은 마르지 않는 샘처럼 펑펑 솟아나고 있었다. 

 ‘대체 내가 뭘 얼마나 그렇게 잘못했다는 거요?’

 솔직히 잭스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심정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사력을 다해 참았다. 그건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었으니까. 이럴 때의 대처 방안은 그저 나죽었소 하고 비는 게 답이란 걸 그간의 경험을 통해 잘 아는 그였다. 

 “알겠소. 내가 졌소.” 결국 그는 두 손을 들어 올리며 항복 선언을 했다. “내가 다 잘못 했소. 사과의 뜻으로 내가 해줄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소원 하나씩 들어줄 테니 제발 마음들 푸시오.”

 아무래도 그게 정답인 모양이었다. 

 뭔가 고압적이고 불만에 가득 찼던 세 여인의 태도가 갑자기 확 달라졌다. 베사리아는 팔짱을 풀고 씨익 미소를 지었고, 레오나는 갑자기 의외의 일격이라도 맞은 것처럼 말문이 탁 막힌 표정을 지었다. 그 중에서 소나의 변화가 가장 풍부했다. 그녀는 불만에 퉁퉁 불어 있다가 소원이라는 말에 잭스를 멍하니 쳐다보더니, 마치 서서히 달궈지는 철판처럼 얼굴이 달아올라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면서도 에트왈을 연주하는 그녀의 손은 흐트러짐 하나 없이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으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그 광경을 보는 잭스는 혹시 소나의 손에는 뇌가 하나씩 더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품을 정도였다. 

 “소원…말입니까.”
 -저기, 그런 뜻으로 말한 건…하지만, 잭스 님께서 그렇게 해주신다면, 저기, 전…….
 “그래요? 그럼 이거 차요.”

 그의 발언에 가장 먼저 반응한 여인은 아니나 다를까 베사리아였다. 아니 오히려 그 대답을 유도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의 행동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잭스는 어안이 벙벙할 정도였다. 그녀는 잭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로브 안주머니에서 둥그스름한 무언가를 꺼내더니 그의 손목에 찰칵하고 끼워버렸다. 뭔가 이상한 문자가 새겨져있다는 사실만 제외한다면 종이를 둥글게 이어 붙여 만든 것 같은 팔찌였다. 근데 종이 치고는 질감이 말랑말랑한 것이 참으로 괴이쩍었다. 머리에 깊게 눌러 덮은 침대 시트 안쪽에서 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거 무슨 일이 있어도 빼면 안 돼요, 알았죠? 뺐다간 가만 안 둘 거예요.”
 “…이게 뭐요?”
 “보면 몰라요? 팔찌잖아요. 그냥 그렇게만 알아 둬요. 설명하기 귀찮아요.”
 “하지만…….”
 “아, 뭐든지 하나 들어준다면서요. 왜요, 설마 제가 거기에 독이라도 발라 놨을까봐요? 그런 거 없으니 그냥 아무 말 말고 차고 있으란 말이에요.”
 “끄응, 이게 소원이란 말이오? 이거 뭔가 무지막지한 걸 바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나오니 오히려 더 수상쩍군.”
 “흥, 맘대로 생각해요.”

 수상쩍다는 듯 의문을 표하는 잭스를 가볍게 찍어 누른 베사리아는 소나의 연주에 맞춰 가볍게 휘파람을 부르며 안락의자에 몸을 묻고선 예의 그 잡지를 펴들었다. 소원이랍시고 팔찌를 차 줘서 그런 건지, 놀릴 만큼 놀려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이제야 기분이 풀린 모양이었다. 한시름 덜었다고 생각한 잭스는 다음으로 소나와 레오나를 돌아봤다. 그런데 둘의 태도가 좀 이상했다. 갑자기 조용해져서는, 아니 소나는 원래 조용했지만, 뭐랄까 묘하게 부끄러워하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그, 제 소원도 들어주시는 겁니까, 루암?”
 “못해줄 것도 없지 않느냐. 네 성격에 무슨 억지를 부릴 것 같지도 않고.”
 “하지만 죄송해서…….”
 “…방금 전까지 우리가 각자 딴 세상에 있다 왔다 보구나. 내 앞에서 그렇게 빈정거려놓고서는 이제 와서 죄송이라니. 됐으니 말해 보거라. 마땅히 생각나는 게 없으면 나중으로 미루던가.” 

 잭스는 시큰둥하게 말했다. 사실 그는 그녀가 빈정거렸다 해도 그 상황이 곤란했을 뿐이지 딱히 화가 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그는 그런 걸로 화를 내는 위인이 아니었다. 단지 레오나가 헬레나나 베사리아에게 물들어가는 것 같아 조금, 아주 조금 가슴이 아팠을 뿐이었다.

 “있습니다, 하지만, 아니, 그…….”

 레오나는 우물쭈물 말을 못하며 잭스의 눈치만 살살 봤다. 도대체 뭐 얼마나 대단한 소원이 있기에 저러나 싶을 정도였다. 잭스는 말할 것도 없고 베사리아 역시 잡지를 보는 척 하며 그녀를 힐끗힐끗 보고 있었다. 소나는 호기심 반, 흥미 반이 섞인 듯한 초롱초롱한(그러니까 시선을 받는 입장에선 상당히 부담스러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결국 따가운 시선을 견디다 못했는지 레오나는 질끈 눈을 감고 입을 열었다.

 “저, 저……. 루암의 얼굴을 보고 싶습니다!”
 “내 얼굴?” 고작 그 말을 하려고 이 난리를 쳤냐는 듯 잭스는 멍청한 기분을 느끼며 말했다. “이상한 말을 하는구나, 레오나. 애초에 보여줄 거면 뭐하러 내가 이렇게 얼굴을 숨기겠느냐?”
 “하지만 여기 베사리아 상임의원님과 소나 양에겐 보여주지 않으셨습니까!” 레오나가 분하다는 표정으로 열변을 토했다. “상임의원님께 루암의 머리가 어떤 상태인지는 들었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왜 보여주지 않으시는 겁니까? 저는 미덥지 못하다는 의미이십니까?” 
 “아니, 그런 건…….”
 “섭섭합니다, 루암.”
 “…….”

 레오나가 침울한 표정을 짓자 괜히 죄 지은 기분이 드는 잭스였다. 하지만 그때는 불가항력이지 않았는가. 못 보여줄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 괴상망측한 도깨비불 같은 머리를 타인 앞에 꺼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기억에서 사라질 정도로 오래 전부터 이 머리를 잘 숨겨왔다. 가장 최근에 맨드레이크와 베사리아, 소나에게 보인 게 거의 최초일 지경이니 말 다한 셈이었다. 그는 이 모습을 아는 사람이 느는 걸 원치 않았다. 그에게도 숨기고 싶은 비밀 하나 정도는 있을 법 하지 않는가. 하지만 약속한 것도 있으니 한 입으로 두말하기도 뭐하고, 어려운 일인가 하면 그냥 머리에 덮어 쓴 침대 시트만 벗으면 되는 문제니 그것도 그렇고…결국 그는 낮게 한숨을 쉬며 시트를 벗었다. 어깨 위로 도깨비불에 휩싸인 듯한 그의 머리가 다시 드러났다.

 “이런 모습이셨군요.”
 “왜, 실망스러우냐?”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레오나가 미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람은 겉모습보다 내면이 더욱 중요한 법입니다.”
 “그래. 난 사람이 아니지만 말이다.”
 “좀 전에 제가 가볍게 농을 좀 했기로서니 마음에 담아두고 계셨던 겁니까? 후후, 역시 루암은 재미난 분입니다.”
 “가볍게? 그 가벼운 농담 한 번만 더 하면 난  신경쇠약으로 말라비틀어질게다. 자, 이제 구경은 충분히 했겠지?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인 줄 알거라. 당연한 얘기지만 내 모습에 대해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고. 특히 헬레나에겐 더욱 더 말이다.”

 잭스가 투덜거리며 다시 침대 시트로 머리를 싸맸다. 좀 곤란한 소원이긴 했지만 레오나가 이런 식으로 떼를 쓰는 건 정말 드문 일이기에 특별히 들어줬던 것이었다. 레오나도 스승을 곤란하게 했음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기에 미안함이 가득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기분이 풀린 모습이었다. 어찌되었건 그녀의 기분이 풀렸으니 한시름 놓는 잭스였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루암. 몸조리 잘 하십시오. 퇴원은 언제쯤으로 생각하고 계십니까?”
 “마음 같아서야 하루라도 빨리 하고 싶지만 여의치가 않구나. 너도 느꼈겠지만 내 퇴원에 이 나라 높으신 분들의 입김이 좀 부는 것 같아서 말이야.”
 “루암께 무례하게 굴은 일도 있고 하니 제가 가능한 범위까지 힘을 좀 써보겠습니다.”
 “그래주면 나야 고맙지. 하지만 무리는 하지 말거라.”

 잭스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유쾌하게 말했다. 그의 칭찬을 들은 레오나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리고 그의 칭찬을 듣고 눈에 띄게 표정이 찌그러지는 사람도 있었다. 베사리아였다.

 “아니 잭스, 나도 당신 퇴원을 위해 뒤에서 은근히 힘쓰고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내가 레오나처럼 말했을 땐 쓸데없는 짓이나 한다며 툴툴거렸잖아요! 대체 뭐에요, 이 취급 차이?”
 “지금까지 병문안을 핑계로 반나절동안 여기서 죽치고 있다가 맨드레이크에게 잡혀간 게 세 번, 여기까지 와서 서류 작업을 한 게 네 번, 자질구레한 물품들 가져다 놓느라 날 일꾼처럼 부려먹었던 게 두 번이나 되오. 취급의 차이가 생기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 같은데.”
 “그걸 다 기억하고 있어요? 흥, 남자가 좀스럽기는. 내가 여기 두 번 다시 오나 봐요! 바쁜 시간 내서 와줘도 고마운 줄도 모르고!”
 “살펴 가시오. 배웅은 하지 않으리다.”

 베사리아가 성을 내며 자리에서 발딱 일어났지만 잭스의 목소리는 여전히 느긋했다. 저래놓고 다음날 시미치 뚝 떼고 나타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굳이 말은 안했지만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는 말도 한 너댓 번은 들은 그였다. 그런 잭스를 바라보며 소나는 부드럽게 웃었다. 말은 저렇게 하고 있지만 여기 있는 그 누구에게서도 어두운 감정은 조금도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잭스의 감정은 여전히 들을 수 없는 그녀였지만, 이제 그런 것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잭스의 기분을 파악하기 위해 애쓰는 그녀였다. 그리고 그 노력은 근래 들어 꽤 결실을 맺고 있는 중이었다. 

 “흥, 소나 양도 오래 있지 말아요. 고마운 줄을 모른다니까요.”
 “쉬십시오, 루암. 그리고 부벨르 양, 연주 정말 잘 들었습니다. 다음에 또 들려주십시오.”

 잭스는 휘적휘적 손을 흔들었고 소나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 그녀들을 배웅했다. 연주를 마치고 깨끗한 천으로 에트왈을 닦는 중이라 같이 나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윽고 문이 닫혔고, 둘만 있기에는 꽤 넓은 병실에 그녀와 잭스만이 남겨졌다. 창밖으로 오후의 산들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기분 좋은 바람이었다. 그녀가 감정을 들을 수 없는 유일한 인물인 잭스 곁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이 고요함, 소나는 이 고요함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이 고요함을 공유할 수 있는 인물이 잭스라는 점이 더욱 더 기뻤다. 에트왈을 닦는 그녀의 두 뺨에 기분 좋은 홍조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미스 부벨르는 아직 내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았구려.”
 -네?
 “아까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거면 소원 하나 들어준다고 했지 않았소. 뭔가 바라는 게 있는 것처럼 보이던데.”
 -아, 아뇨! 저는……. 
 “그렇게 말하지 마시오. 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미스 부벨르의 소원만큼은 꼭 들어 줄 생각이었소. 이래저래 신세를 많이 지고 있으니 영 마음이 편치가 않아서 말이지. 그것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해주면 고맙겠소. 자, 뭐든 말해보시오.”

 뭐든, 이라는 말에 소나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갑자기 잭스가 그 강인한 팔뚝으로 자신을 꽉 껴안아주거나, 뺨을 가만가만 만져준다거나 하는 상상이 머릿속을 마구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이 얼마나 기쁜…아니 망측한 생각인지! 소나는 잭스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이런 생각을 들킨다면 분명 가벼운 여자라고 여겨질 게 뻔했다. 하지만 잭스는 그저 자기가 너무 강압적으로 말해서 소나가 당황해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눈치 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을 뿐이었다.

 -죄송해요, 잭스 님. 아무래도 지금은 못 정하겠어요…….

 결국 소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잭스에게 사과하고 말았다. 당장 생각나는 게 없어서 정하지 못한 게 아니라, 생각나는 게 너무 많아서였다. 이 중에서 하나만이라니 그거야말로 너무 어려운 문제였다. 만약 소나가 베사리아의 성격을 조금만 더 닮았더라면 이 기회에 잭스를 휘어잡았겠지만, 그러기에는 그녀는 너무 순진하고 착했고 거기다 이성에 대한 판단력이 한없이 0에 수렴했다. 소나가 너무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자 보다 못한 잭스가 구명삭을 던져줬다.

 “그럼 나중에 말해도 되오. 내가 나중에 딴소리 할 정도로 속 좁은 성격은 아니니 안심해도 된다오, 미스 부벨르.”
 -아, 고맙습니다. 잭스 님!
 “이런 거 가지고 무슨 고맙다고 그러시오.” 잭스가 피식 실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미스 부벨르도 슬슬 돌아가는 게 좋을 듯싶소. 몸 상태도 과히 나쁘지 않는데 너무 시간을 뺏는 것 같아 미안하구려.”
 -아, 아니에요 잭스 님! 시간을 뺏는다니 그런 말씀 하지 말아 주세요. 이건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인 걸요.

 사실 엄밀히 말하면 잭스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이 문병을 위해 소나는 하루 일과의 대부분을 나중으로 미뤄야 했으니 말이다. 대륙에 유명세를 떨치는 음악가로서, 그리고 공작 가문의 영애로서 그녀가 해야 할 일은 정말 많았다. 하지만 그런 것들 모두 이 남자를 보러 오는 일 앞에서는 한낱 티끌보다도 더 무의미한 것들이었다. 과연 사랑을 알아가는 소녀의 저돌적인 마음가짐은 경이로울 정도였다.

 “그래,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긴 하구려. 하지만 하루 이틀만 더 기다려보고 그래도 퇴원이 안 떨어지면 내가 직접 데마시아 왕궁에라도 찾아갈 생각이오. 이 이상 우리에 갇힌 동물 꼴은 사양하고 싶으니 말이지. 지금 베사리아에게 폐를 끼치는 것도 미안한데 레오나에게까지 손을 벌리게 되다니. 후, 하여간 높은 놈들의 체면놀음에 관련되면 매번 골치가 아파진단 말이지.”
 -저도 어떻게 알아볼까요? 저도 부벨르 공작가의 여식이니, 아주 힘이 없는 건…….
 “절대 안 되오, 미스 부벨르.” 잭스가 그녀의 말을 딱 자르며 말했다. “그대가 나와 관련되었다고 질 나쁜 소문이라도 퍼지면 어쩌려고 그러시오? 내가 아무리 리그의 챔피언이라고는 하나 나 같은 용병이 데마시아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는 잘 알고 있잖소. 이렇게 병문안을 와 주고 연주를 해주는 것만으로도 그대는 충분히 위험을 무릅쓰고 있는데, 이 이상 그대에게 폐를 끼칠 수는 없소. 그대처럼 많은 대중 앞에 서는 사람은 늘 행동에 조심해야 한다오.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잭스는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소나의 얼굴은 조금 뚱해졌다. 마치 아이 취급을 받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얼추 유추할 수 있는 잭스의 나이를 생각해본다면 소나는 정말 어린애에 가까웠다. 허나 잭스가 그렇게 느낀다고 소나까지 동일하게 느끼고 있을 리는 없었다. 소나는 잭스에게 아이가 아닌 한 명의 여성으로 다가가고 싶었다. 그래서 그의 말에 대답하는 그녀의 목소리엔 조금 날이 서있었다.

 -잭스 님, 전 아이가 아니에요. 저도 제가 선택하고 판단할 정도의 나이는 됐어요.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니라오. 기분 상했으면 내 사과하리다, 미스 부벨르.”

 안다, 왜 모르겠는가. 그가 자신을 걱정해서 그렇게 말한다는 것을. 소나는 방금 내뱉은 자신의 말을 후회했다. 부벨르 공작가의 힘을 빌리겠다니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그건 소나의 힘이 아니라 양어머니 레스타라 부벨르 부인의 힘이었다. 베사리아도 레오나처럼 본인의 노력으로 얻은 지위와 힘이 아니었다. 잭스가 그걸 모르고 사과를 한 걸까? 소나는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비록 여성의 마음에 무딘 그였지만 그것만 제외한다면 다른 데서는 전부 머리 회전이 빠른 잭스였다.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가타부타 따지지 않고 머리를 숙여 준 것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소나는 부끄러움에 절로 얼굴이 화끈거렸다. 잭스에게 괜한 심술을 부린 것 같아 너무 미안했다. 

 -성질 부려서 죄송해요, 잭스 님.
 “괜찮소. 나도 너무 주제넘게 말한 게 없잖아 있었으니.”

 소나는 잭스 몰래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바보 같으니. 그토록 잭스와의 미묘한 벽을 허물기 위해 노력했는데, 이렇게 한 순간 참지 못하고 성질을 부려서 제 스스로 벽을 세우게 만들어버렸다. 잭스와의 만남을 위해 애써 고른 옷이며 장신구가 전부 쓸모없게 여겨졌다. 그의 마음에 들고 싶어서 가능한 한 멋을 내 본건데, 이러면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별로 꾸밈이 없는 베사리아나 레오나를 떠올리자 더 침울해지는 소나였다. 마치 본인에게 자신이 없어서 치장으로 부족한 자신감을 채우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 둘을 비교 대상으로 넣는 건 약간 미묘했다. 그 둘은 어디까지나 일하는 도중 땡땡이나 다름없이 잭스를 찾아온 것이니까. 허나 거기까지 생각하기엔 소나는 좀 순진했다. 

 -쉬시는 데 너무 오래 있어서 죄송해요. 저도 이제 그만 가 볼게요.

 마침 에트왈을 닦는 일이 다 끝난 게 좋은 핑계였다. 소나는 애써 밝은 목소리를 내려 노력하며 잭스를 바라봤다. 어찌되었든 그를 보고 이렇게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앞으로 얼마나 있을지 모르지 않는가. 그가 아이오니아로 간다면 소나 역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특별한 상황이 아닌 이상 만날 기회는 사라질 터였다. 에스트렐이라는 정체불명의 공동의 적이 있긴 했지만 소나는 모르는 게 너무 많았고 안다 해도 그녀가 딱히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그녀를 노리는 적의 이름이 에스트렐이라는 것도 모르는 상태였다. 

 솔직히 궁금했다. 왜 궁금하지 않겠는가. 그 검은 무리는 누구며, 왜 자신을 습격했고 왜 잭스에게 그토록 강한 적개심을 보였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잭스의 몸속에 있는 그 ‘푸른 불꽃’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궁금하긴 마찬가지였다. 그 외에도 궁금하고 물어보고 싶은 건 잔뜩 있었다. 하지만 잭스의 몸이 회복되는 동안만은 가능하면 그에게 악영향을 줄 수 있는 화제는 꺼내고 싶지 않은 소나였기에, 그녀는 그런 호기심을 꾹 눌러 참았다. 언젠가 그가 말해줄 것이라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서 말이다. 그 마음을 되새기며 소나는 조용히 일어섰다.

 “와줘서 고마웠소. 아, 가는 길에 사과 좀 가져가시오. 솔라리에서 나는 황금 사과인데 아마 못 먹어봤을 거요. 가끔 약용으로 나오는 거 빼면 외부로 잘 내보내지를 않는지라……. 레오나에게 고마울 따름이지. 양이 많지는 않지만 가져가서 저택 사람들과 맛이라도 보시오.”

 잭스는 그냥 보내기가 뭐한지 커다란 바구니 한가득 담겨 있는 사과를 몇 개만 빼놓고 그녀에게 내밀었다. 언뜻 듣기로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라고 하던데……. 좋아하는 걸 별 망설임도 없이 다 내어주는 잭스의 마음 씀씀이에 고맙고도 미안한 소나였다. 

 -고마워요, 잭스 님. 감사히 잘 먹을게요. 아, 누워 계세요. 
 “하지만 혼자 들고 가기는 꽤 무거울 텐데.”
 -이 정도면 저 혼자도 충분히 들고 갈 수 있어요. 게다가 하녀 한 명에 마부도 같이 온 걸요. 손은 충분하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하긴 공작가 아가씨가 혼자 다닐 리는 없지. 내 미처 생각을 못했구려.” 잭스가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살펴 가시오, 미스 부벨르.”

 소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잭스의 병실을 나왔다. 에트왈의 케이스에 사과 바구니까지 들어 좀 묵직하긴 했지만 기분은 좋았다. 잭스에게 무언가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쁨이 가슴속에서 찰랑거리는 그녀였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1층으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녀는 곧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간 줄 알았던 베사리아와 레오나가 복도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나 양, 잠시만 시간 좀 내주시겠어요? 중요한 얘기가 있어요”

 그렇게 말하는 베사리아의 표정은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 레오나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들에게서 전례 없던 불안함과 공포, 그리고 다급함이 어지럽게 섞여서 들려오자 소나의 표정도 대번에 딱딱해졌다. 그런 소나를 향해 베사리아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표정은 침착했다.

 “잭스가 위독해요.” 

 하지만 그 말을 내뱉는 베사리아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