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나

 잭스의 병실에서 베사리아와 레오나의 조용한 전쟁이 발발하기 1시간 전, 소나의 방.

 “아가씨, 이 사파이어 목걸이는 어떠세요?”

 치장을 도와주고 있는 메이드가 방실방실 웃으며 보석함에서 목걸이 하나를 골라들었다. 그녀의 손에선 정교하게 커팅된 사파이어 목걸이가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최상등품의 물건이었다.

 “…….”

 하지만 소나는 목걸이를 받아 걸고 한참 동안 거울을 노려보더니, 이내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메이드는 그런 그녀의 태도에 굴하지 않기라도 한다는 것처럼 재차 목걸이 하나를 더 권했다.

 “그럼 이 조그마한 다이아몬드가 박힌 은 목걸이는 어떠세요? 이게 그 유명한 보석 세공사 올리비에가 이번에 낸 신작이래요! 아가씨가 하신다면 정말 예쁘실 거예요.”
 “…….”

 종전의 것보다 훨씬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메이드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뭔가 맘에 들지 않는지 소나는 별로 고민도 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목걸이를 고르다 말고 갑자기 발딱 일어난 소나는 전신 거울 앞으로 타박타박 걸어가 살짝살짝 몸을 틀었다. 이제는 옷도 무언가 맘에 들지 않는 구석이 생긴 모양이었다. 그녀의 머리색을 닮은 연푸른 치맛단이 바람에 흔들리는 들꽃처럼 하늘거렸지만, 정작 그 아름다운 움직임의 당사자인 소나는 고운 미간을 찌푸릴 뿐이었다.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장신구나 옷이 없을 리가 없는데도 말이다.
  
 최근 아가씨의 상태가 이상하다. 

 소나 옆에서 그 행동을 다 지켜보고 있는 레이디스 메이드(Lady`s maid), 조이 켐벨은 요즘 들어 그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벌써 몇 주째 소나의 이런 까칠한 행동은 계속되고 있었다.

 애초에 그녀는 까다롭게 자기주장을 펼치거나 고집을 부리는 유형의 아가씨가 아니었다. 구태여 그녀가 예민하게 구는 일을 꼽자면 에트왈이나 공연 같은 음악에 관한 것들뿐이었다. 그 외에는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흥미를 가지지도 않았다. 한창 소나 또래의 아가씨들이 열광하는 장신구나 멋진 귀족 자제, 연애, 옷 같은 주제의 이야기는 그녀에게 있어 먼 나라 이야기나 마찬가지였다. 다른 아가씨들은 그런 문제로 부모의 속을 썩이는데, 소나 같은 경우는 그런 문제에 조금도 관심을 가지지 않아 레스타라 부인의 속을 썩였다. 참으로 기묘한 불효(?)의 유형이 아닐 수 없었다. 

 얼핏 보기엔 소나는 시중 드는 입장에서야 무척이나 편한 성격처럼 여겨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마냥 그렇지만도 않았다. 어쨌든 그녀는 부벨르 공작가의 하나뿐인 영애였으니까. 당연히 치장이나 몸가짐에 서투름이 있어서는 안 될 법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말을 하지 못한다는 약간의 흠이 있지 않던가. 공작가의 위신이 깎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사랑스러운 아가씨가 어디 가서 흉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시중 드는 메이드들이 치장과 사교 그리고 예의범절 등에 통달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중에서 소나의 레이디스 메이드인 조이 켐벨은 그녀의 치장 담당이었다.

 ‘치장에 관심을 가지신 건 기쁘긴 하지만…….’

 레이디스 메이드로서 그녀의 일이 줄어드는 건 조금 아쉬웠지만 어쨌든 소나가 치장에 관심을 가진다는 건 환영할만한 일이었다. 소나의 문제는 치장 전반의 문제를 조이에게 전적으로 맡긴다는 데에 있었다. 이제 아이도 아니고, 언제까지나 조이의 손에 치장을 맡기는 것은 아무래도 모양새가 좀 그랬다. 스스로 겉모습을 가꿀 줄 알아야 하는 것도 귀족 영애의 소양이었다. 유서 깊은 부벨르 공작가의 무남독녀인 소나는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 치더라도 경우라는 게 있는 법이었다. 어디 귀족 자제들의 야유회나 공연의 일로 사람들 앞에 나서야 한다면 소나가 이러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소나가 가려는 곳은 바로 병원이었다. 그것도 환자들 위문 공연이나 그런 목적이 아니라 예전 협곡 사건 때의 후유증으로 인한 몸 검사를 목적으로 해서 말이다. 적어도 조이가 알기로는 그랬다. 대체 병원에 가는데 그렇게 치장에 신경 쓸 이유가 무엇이 있단 말인가? 그것도 몇 시간동안이나 말이다. 소나를 모시기 시작한 이후로 그녀가 음악 외의 일에 이렇게 집중하는 광경은 맹세코 처음 보는 조이였다. 그녀는 살짝 뒤로 시선을 돌려 방 안에 펼쳐진 참상을 바라봤다.

 욕조 세 개를 합친 것만큼이나 큰 소나의 침대 위에는 옷들이 작은 동산 규모로 쌓여 있었다. 공작가 영애의 옷들이니 당연히 그 하나하나가 전부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전부 다 소나에게 퇴짜를 맞은 비참한 신세에 불과한 옷들이었다. 이건 이래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저건 저래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처음에는 열심히 수화로 이유를 설명하던 소나는 지금 와서는 설명도 귀찮은 듯 아예 마음에 들지 않는 옷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침대에 던져버렸다. 

 장신구도 마찬가지였다. 보석함의 밑바닥을 뒤집어엎은 것처럼 화장대엔 온갖 종류의 목걸이며 반지가 수북하게 쌓여있었다. 그것도 옷 고르는 데만큼 시간이 걸렸으면 걸렸지 덜 걸리지는 않았다. 그 외에도 향수니, 머리 모양이니 하는 문제 역시 남아있었다. 공작가 영애의 치장이 고작 옷만으로 끝날 리가 없었다. 소나의 그러한 행동 변화에 소나의 시중 겸 교육을 맡은 메이드들 중에서 가장 편한 일을 맡고 있다는 조이는 요즘 들어 문자 그대로 피를 말리는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오늘도 소나와 조이 켐벨의 전쟁 아닌 전쟁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 전쟁은 병원에 가기로 약속한 시간이 아슬아슬 할 때가 돼서야 간신히 끝나게 되었다. 오늘도 말이다. 

 ‘혹시 병원의 의사 선생님들 중에 마음에 드는 분이라도 생기셨나? 으으, 그러면 어떡하지. 마님께 말씀드려야 할 것 같은데…….’

 조이는 소나를 따라 방문을 나서며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이미 며칠 전부터 레스타라 부인과 하녀장이 소나의 행동거지를 면밀하게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조이와 거의 비슷한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


 ‘향수 냄새가 너무 강하면 어쩌지? 옷차림은 너무 가벼워 보이지 않을까? 머리 모양은? 하아,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요즘 유행에 관심 좀 가져둘 걸.’

 방문을 나서면서부터 마차를 타고 병원에 가기까지, 소나의 머릿속을 온통 채운 생각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요즘 들어 그것밖에 생각하고 있지 않는 소나였다. 생전 옷차림이나 보석 따위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던 그녀였지만, 모종의 이유로 얼마 전부터 과하다 싶을 정도로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녀를 도와주는 조이의 기분을 알면서도 말이다. 타인의 감정을 들을 수 있는 그녀가 바로 옆에 있는 조이의 기분을 모를 리가 없었다. 

 ‘아냐, 잭스 님은 좀 더 수수한 걸 좋아하실 지도 몰라. 역시 너무 화려하게 입었나? 불편하게 생각하시면 어쩌지?’

 솔직히 말하자면 소나의 모습은 넋을 잃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지금까지 치장에 관심이 없었다 뿐이지 심미관 자체는 상당한 경지에 이른 그녀가 고심해서 꾸민 모습이 아름답지 않을 리가 없었다. 

 오늘 그녀는 목과 소맷자락에 레이스 장식이 달린 블라우스에 연분홍빛 가디건을 걸치고 무릎까지 오는 옅은 자줏빛 치마를 입은 모습이었다. 치마 아래쪽에선 가죽 부츠가 단정하게 매듭지어져 그녀의 얇은 종아리를 감싸고 있었다. 머리는 단정하게 한 갈래로 하여, 금이 상감된 꽃 모양 머리장식으로 묶고 있었다. 마치 머리 위에 꽃망울이 피어있는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지나치게 화려하지도 않으면서 단조롭지도 않은, 소나의 매력을 한껏 풍기는 모습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심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자꾸만 손거울을 들여다보는 소나였다. 대체 무엇이 그녀를 이다지도 불안하게 만든다는 말인가. 그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하달까, 이제 말할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거론되고 있는 잭스가 바로 그 원인이었다. 

 아니, 조금만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잭스 주변에 있는 여성들이 원인이라 할 수 있었다.

 우선 전쟁학회의 상임의원이자 잭스의 오랜 친구이기도 한 베사리아 콜민예. 일단 30대 중반으로 알려진 그녀였지만 그 외모나 언행 그리고 사고방식 등 모든 걸 따져 봐도 잘해야 20대 중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여성이었다. 단순히 젊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여자인 소나 자신이 봐도 예쁘다는 생각이 들만큼 아름다웠다. 게다가 정말 매력적인 여성이기도 했다. 여러 가지 의미로 말이다.

 ‘의원님이 정말 부러워. 난 내세울 게 고작 해봐야 음악이 전부인데…….’  

 소나는 살짝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생각했다. 언제나 자신감 넘치는 베사리아의 태도는 소나에게 있어 선망의 대상이었다. 거기다 그녀는 잭스와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 아니던가. 잭스와 베사리아가 같이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면서도 가슴 한 구석이 왠지 모르게 미어지고 말았다. 베사리아가 잭스에게 친구 이상의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는 소나였다. 잭스에게 말할 때 그녀에게서 들렸던 감정의 소리는, 분명 상대방에 대한 걱정과 안도로 부드럽게 울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것은 분명 진심을 다해 상대방을 아끼는 사람이 아니면 낼 수 없는 감정의 소리였다.

 그리고 그런 감정의 소리를 내는 여성은 그녀 외에도 한 명 더 있었다. 바로 최근에 알게 된 레오나였다.

 협곡에서야 간간히 만난 적이 있었으나 실제로 바깥에서 만나긴 처음이었다. 사실 만날 일이 전혀 없는 사이였다. 데마시아에서 활동하는 소나가 솔라리 교단의 전사인 레오나와 만날 기회가 있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이번 협곡 사건의 부상자들을 위해 솔라리에서 특별히 파견한 사제단을 이끄는 그녀는 잭스의 병실에 자주 드나들었다. 더 놀라운 점은 잭스가 이미 그녀와 구면이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꽤 친밀한 느낌으로 말이다. 레오나는 보통 잭스를 부를 때 솔라리 고어로 된 존칭을 사용했기에 둘의 정확한 관계는 알 수 없었지만, 소나에겐 정황상 그 둘이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제지간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레오나 역시 무뚝뚝하다 뿐이지 속으로는 잭스에 대해 깊이 걱정하고 있었다. 잭스를 향한 그녀의 감정 역시 소나의 귀에는 똑똑히 들려왔으니까 말이다.

 소나는 그런 그녀를 볼 때마다 새삼 잭스의 과거가 궁금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우울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베사리아나 레오나나 전부 잭스와 과거를 공유하고 있었다. 소나가 모르는 잭스의 일면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소나가 잭스에 대해 아는 모습이라 해봤자 협곡에서의 모습과 그 후 병실에서의 모습이 전부였다. 

 솔직히 레오나가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소나는 자신이 잭스에게 있어 어느 정도는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레오나를 대하는 태도나 베사리아를 대하는 태도를 보니 전혀 아닌 것 같았다. 잭스는 기본적으로 무뚝뚝하면서 상냥했지만 그들에게는 좀 더 마음을 터놓는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소나에게는 아니었다. 그녀는 잭스와 자신 사이에 있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엷은 막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불안했다. 그리고 그 불안감이 소나가 뒤늦게 치장에 신경을 쓰게 된 이유였다. 어떻게든 잭스와의 접점을 더 늘려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소나의 모습은 애틋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소나는 다른 사람들에겐 비밀로 하고 잭스가 좋아하는 와인 관련 잡지까지 몰래 구해서 읽을 정도였다. 

 “아가씨, 그렇게 울상 지으면 예쁜 얼굴이 다 망가져버려요.”

 너무 생각이 표정에 드러났던 것일까, 결국 옆에서 보다 못한 조이가 소나의 손을 잡으며 다정하게 달래주었다. 걱정을 끼쳐 미안하고 또 신경써줘서 고맙기도 해서 소나는 그런 조이를 향해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선 수화로 그녀에게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요, 조이. 이제 괜찮아요.]
 “괜찮기는요.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신걸요. 뭔가 걱정거리라도 있으세요?”
 [걱정거리라뇨. 그런 거 전혀 없어요.]

 소나의 손은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당연히 씨알도 먹히지 않을 거짓말이었다. 세상에 그렇게 우울한 표정을 보이고선 무슨 걱정거리가 없다는 말인가. 소나는 너무 마음 씀씀이가 상냥해서 감히 자신의 고민을 함부로 남에게 털어놓지 못한다는 게 단점이었다. 그래서 조이는 그녀의 마음을 슬쩍 떠보기로 결심했다. 

 “아가씨의 표정을 보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걸요. 뭔가 고민이 있으시죠? 가령…….” 조이는 손가락으로 턱을 짚으며 생각하는 척 하며 말했다. “호감이 가는 분이 생겼다거나.”

 조이는 분명 떠보기 위해 툭 내던진 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아니에요, 아니 아니에요 조이! 안 그래요! 절대 그런 일 아니에요! 호감이라뇨! 물론 잭스 님께 호감…어머나, 내가 무슨 말을! 참, 나는 말을 못하지…….’

 소나가 연애에 있어서는 그녀의 예상 이상으로 숙맥이라는 것을 말이다. 

 소나는 어찌나 당황했던지 수화로 얘기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새빨개진 얼굴로 열심히 손사래만 치고 있었다. 수화가 아니면 그녀의 말을 들을 수 없는 조이는 그저 그 광경을 멍한 눈빛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옛말에 이르길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 했던가. 조이는 지금 이 순간 그 말의 의미를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조금 진정한 듯 손사래 치는 건 멈춘 소나였지만, 얼굴은 새빨개진 채 그대로였다.

 “아가씨, 정말 호감 가는 분이…….”
 [아니에요!]

 소나는 거의 바람 소리가 일 정도로 손을 휘둘러 극구 부정을 표했다. 자기가 혼자 생각할 때는 몰랐는데, 남에게 누구 좋아하는 사람 있냐고 들으니 미칠 정도로 부끄러워지는 소나였다. 이때만큼은 자신이 말을 못한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만약에 방금 전에 얼떨결에 한 말이 입 밖으로 나왔다면…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조이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그녀는 그다지 입이 무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만약의 경우 레스타라 부인의 귀에 잭스의 이름이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그날로 끝장이었다. 뼛속까지 귀족인 양어머니 레스타라 부인이 잭스의 존재를 인정해줄 리가 만무했으니까. 최악의 경우 잭스와의 만남 자체가 금지당할 지도 몰랐다. 그 상황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고 싶은 게 소나의 심정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조이의 말을 극구 부인했다. 소나의 눈빛은 절대 말해주지 않겠다는 듯 문자 그대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정말 없어요.]
 “아, 알겠어요.”
 [정말로, 정말로 없어요.]
 “으으, 죄송해요 아가씨. 괜한 거 물어봐서 죄송해요. 알겠으니까 그런 무서운 표정 짓지 말아 주세요…….”

 조이가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푹 숙이자 그제야 아차 싶은 소나였다. 저번에 화가 난다고 조이에게 물건을 집어던진 일도 있고 해서 가능하면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말하지 않자니 조이가 우울해하고……. 소나는 고민하다가 대번에 표정이 밝아져 조이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가씨?”
 [있잖아요, 조이. 사실은 제가 아니라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제 절친한 친구 분이 이성 문제로 고민하고 있거든요.]
 “…….”

 조이의 표정이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표정으로 바뀌는 것도 모른 채, 소나는 열심히 손을 놀려 수화를 하고 있었다.

 [그 분께서 제게 상담을 해오셨는데 실은 제가 어떻게 답변을 해드려야 할지 몰라서요. 그렇다고 저도 그런 쪽으로 자세히 아는 바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래서 아까 그렇게 걱정하던 거였어요.]

 완벽해, 소나는 수화로 그렇게 말하고선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조이를 바라봤다. 그녀 입장에선 조이의 기분을 상하지도 않게 하고 자신의 고민에 대해 조언도 구하는 일석이조의 방법을 생각해낸 것만 같아 내심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는 소나였다. 

 하지만 조이 입장에선 아니올시다였다. 세상에 친구 문제라니, 진부하기로는 세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속이 드러나 보이는 거짓말이 소나의 입에서 나올 줄이야!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웠던지 조이는 허벅지를 꼬집어가며 웃음을 참아야만 했다.

 “그럼 제가 도와드릴 수 있겠네요. 제가 이래봬도 연애에는 조금 경험이 있거든요.”
 [저, 정말요?]

 정말 ‘조금’ 경험이 있는 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낯 간지러운 연애 소설 몇 권을 읽은 것도 경험이라 할 수 있다면 말이다. 

 “물론이죠. 그러니 한 번 말해보세요. 친구 분이 신경 쓰는 그 이성 분은 어떤 분이신가요?”

 소나는 안심한 눈빛으로(그녀는 자신의 거짓말이 들켰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잭스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실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해보기는 처음이라 그녀의 수화는 꽤나 중구난방이었다.

 [그 분은, 음, 심지가 아주 굳은 분이세요. 겉보기에는 거칠고 무뚝뚝해 보이기도 하지만, 알고 보면 거기에는 상대방에 대한 깊은 배려가 담겨 있답니다. 그리고 싸움도 굉장히 잘하세요.]
 “어머, 군인 가문 쪽의 자제 분이신가 봐요.”
 [네? 네! 맞아요. 아마 그쪽일 거예요.]
 “그럼 아가씨 친구 분은 그 분과 친밀한 사이가 되길 원하시는 건가요?”
 [네……. 실은 그 분과는 어느 정도 친분이 있어요, 아니 있다고 했어요. 그런데 고민이, 그 분의 주위에 굉장히 매력적인 여성이 두 분이나 계시거든요. 심지어 한 여성분은 그 분과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였어요. 나머지 한 분 역시 상당한 친분이 있는 것처럼 보였고요. 거기서 조금 고민이라고 했어요. 그 분과 좀 더 친해지고 싶은데 다른 두 여성분과는 달리 저…아니 제 친구 분은 그 분을 알게 된지 얼마 되지 않았거든요.]

 자신을 ‘절친한 친구’로 위장해서 말하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닌 모양인지, 소나는 수화 중간마다 자꾸 주어를 자신 쪽으로 돌릴 뻔했다. 그만큼 그녀는 거짓말에 재능이 없었다. 조이에겐 이미 들킨 마당이라 딱히 상관도 없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거짓말에 온 정신을 쏟고 있는 나머지 소나는 조이의 표정이 점점 딱딱해지고 있다는 걸 눈치 채지 못했다.

 “이미 곁에 여자가 있는 분이시라고요? 두 명이나? 그것도 꽤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처럼 보인다고요?”
 [네. 서로 말하는 것도 그렇고, 제게는…아니 제 친구에게는 적당한 선을 지키며 예의를 갖추는데 그 여성분들에게는 그런 선이 없는 느낌이었어요. 좀 더 편하게 대하는 것 같았어요. 그 미묘한 한 겹의 차이가…쓸쓸하고요. 그게 불안했어요. 혹시 나는 그 분에게 있어 그냥 아는 사람에 불과한 걸까, 그런 생각이 자꾸 들어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면 가슴 한 쪽이 아려요. 그렇게 생각되기는 싫어요.]
 “…그러니까 아가씨 친구 분은 자기도 그 여성분들처럼 그분과 가까운 사이가 되고 싶다는 거네요, 그렇죠? 단순히 친구 사이가 아니라 그보다는 좀 더 깊은 사이를 전제로 해서 말이에요.”
 […네.]

 조이의 물음에 잠깐 망설이긴 했지만 그녀는 똑바로 대답하며 손을 움직이길 멈췄다. 그녀가 이야기하는 그 분은 당연히 잭스였다. 두 여성분은 베사리아와 레오나였고. 끝에 이르러서는 친구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 이야기처럼 말하고 있는 소나였지만, 워낙에 이야기에 집중해서 그런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아가씨, 제 생각으로는…….”
 [네, 말해줘요 조이. 어떤 식으로 조언을 해 줄 수 있을까요?] 

 그리고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 조이는,

 “그 분은 안 돼요.”

 딱 잘라 말하며 둥실둥실 뜨려고 하던 소나의 기분을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그 말을 하는 그녀의 표정과 감정의 소리가 어찌나 단호했던지 소나가 저도 모르게 움찔 몸을 떨 정도였다.

 [왜요?]
 “왜냐뇨, 아가씨……. 정말 모르시겠어요?” 

 조이는 그것도 모르냐는 투로 물었지만, 소나는 정말 그것도 몰랐기에 그저 눈만 깜빡거릴 뿐이었다. 조이의 표정은 꽤나 심각했다. 그녀는 소나의 순수한 면을 좋아했지만,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런 성격은 독이 될 때도 많았다. 지금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솔직히 조이는 아가씨의 사랑 이야기라고 해서 달콤 쌉싸름한 짝사랑 얘기라도 들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이게 웬걸, 주변에 여자가 둘이나 있는 남자에게 마음을 줬다는 소리를 들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소나가 그런 복잡한 치정관계에 끼어드는 것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고 싶은 그녀였다. 대체 이 소나 부벨르라는 공작가의 영애가 뭐가 부족하다고 여자를 둘이나 꿰차고 있는 사람과 친분을 다져야 한다는 말인가? 세상에는 그보다 훨씬, 훨씬 더 나은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주변에 여자가 많은 분치고 좋은 분은 찾기 힘들어요. 분명 여자관계가 복잡할 거예요. 아는 여성분이 더 있을지도 모르고요. 그런 경우에는 당연히, 당연히 여자관계를 그렇게 복잡하게 만든 남성분의 잘못이 커요. 하지만 그런 상황이 되면 그 분 주변의 여자들이 서로 최후의 한 명이 되려고 서로 싸운단 말이에요.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 줄 아세요? 그런 데에 엮이면 큰일 나요, 아가씨.”
 [하지만…….]

 소나는 수화를 하려다 이내 멈췄다. 자세하게 설명하지 못한 게 실책이라면 실책이었다. 생각해보니 조이는 소나가 말한 ‘그 분’을 데마시아 군인 가문의 자제 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데마시아의 귀족이 여성과 ‘오랫동안 친분을 유지했다’라는 것은, 대개 그렇고 그런 관계를 돌려 말할 때 사용하는 표현이었다.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잠자리 친구를 두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제야 아차 싶은 소나였다. 실수였다. 말할 때는 오직 잭스와의 관계에만 정신이 팔려 생각하지 못했던 맹점이었다. 하지만 그의 정체를 밝히지 않으면서 협곡에서의 일을 말하지 않고 그 오해를 풀만한 말재간이 소나에겐 없었다. 그녀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우물쭈물 거리는 사이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조이가 다정하게 말을 건냈다.

 “아가씨, 아가씨는…아니, 아가씨의 친구 분께 이렇게 전해주세요. 분명 또 좋은 사람이 있을 거라고요. 세상에 멋진 남성분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런 분과 사귀시면 나중에 크게 후회하시게 돼요. 틀림없어요. 겉으로 보이기에는 멋져보일지도 모르지만, 여자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 치고 절대 좋은 사람은 없어요. 아가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귀족 분들은 뭐랄까…하여튼 그래요.”
 ‘아니에요. 잭스 님은 그런 분이 아니세요.’

 소나는 그 말에 반박하고 싶었다. 잭스가 그런 성격이 아니란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는 거칠지만 상냥했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는 끝까지 관철할 정도로 굳센 의지와 신념이 있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비록 인간이 아니라는 부분이 있기는 했지만, 이제껏 소나가 만나 본 귀족 남성들보다 훨씬 더 귀족적이고 인간다운 그였다. 협곡에서 소나는 그걸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로 느낄 수 있었다. 그 느낌을 지금 조이에게 전하지 못하는 게 분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이에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지금 그녀는 진심으로 소나를 걱정하며 말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진심이 자기 맘에 들지 않는다 해서 화를 내는 건 너무나도 옹졸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조이의 오해를 풀 만한 좋은 해결책도 아니었다. 그렇게 잠시 침묵이 흘렀다. 조이는 소나를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소나는 그 눈빛을 피한 채 손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딸랑딸랑

 시간은 그녀들의 침묵과 상관없이 흘렀다. 마부가 흔드는 벨 소리와 함께 마차는 멈춰섰다. 마침내 왕립 병원 앞에 도착한 듯 싶었다. 하지만 소나는 조이에게 손을 붙잡힌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런 소나를 보며 조이는 부디 그녀가 고개를 끄덕여주길 바랐다. 하지만 소나는 그런 그녀의 기대를 배신하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가씨…….”

 조이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소나를 불렀지만, 그녀는 애써 조이의 시선을 외면하며 손을 빼고는 마차에서 내렸다. 세련되고 웅장한 데마시아 왕립 병원이 그녀 앞에 우뚝 서있었다. 거리는 초여름의 활기로 가득 찬 듯 시끌벅적했다. 하지만 조이와 소나 사이에는 마치 공간을 잘라낸 듯한 무거운 침묵만이 맴돌 뿐이었다.

 [조언은 고마워요. 하지만 미안해요, 조이. 제가 설명을 제대로 못했어요. 그 분은 조이가 생각하는 그런 분이 아니에요. 다는 말할 수 없지만, 정말 좋은 분이세요.]

 소나가 천천히 수화로 말했다. 그녀의 손끝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조이가 믿어주길 바랐다. 하지만 조이에게서 들려오는 의혹의 감정은 그 정도를 더해갈 뿐이었다. 아무래도 그냥 소나가 생전 처음으로 이성에게 호감을 가져서 그에 관한 거라면 뭐든지 다 좋게 보이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조이의 그 태도에 갑자기 화가 치솟는 소나였다. 그녀는 발치에 놔뒀던 에트왈이 든 케이스를 들고 냉큼 마차에서 내려버렸다.  

 [오늘은 안 따라와도 돼요. 1시간 뒤에 다시 여기로 와 주세요.]

 그녀는 일방적으로 통보하듯 재빨리 손을 놀렸다. 

 “아가씨!”

 조이가 뭐라 말하려고 했지만, 소나는 그것을 무시하고 병원으로 들어갔다. 등 뒤로 조이의 애틋한 감정이 슬프게 들려오고 있었다. 그녀에게 미안했다. 그녀를 또 한 번 슬프게 한 죄책감이 소나의 가슴을 콕콕 찌르고 있었다. 그녀가 소나를 생각하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잘못은 잭스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소나에게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에 대해 숨기려고 했던 것부터 잘못이었을 지도 몰랐다.   

 후회와 설렘,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소나는 잭스의 병실로 향했다. 상황이 어찌되었건 지금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 혼란스러운 가운데 소나가 바라는 것은 그것 하나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