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나

 그날 저녁.

 소나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상황이 좋지 않아요. 잭스의 몸 상태가 한계에 이른 것 같아요.]

 그녀가 가지고 온 황금 사과로 만든 파이는 레스타라 부인이고 하녀들이고 할 것 없이 그야말로 대호평이었다. 얇게 저며 구운 사과 사이로 흘러내리는 꿀처럼 달콤한 과즙에 아삭거리는 식감의 파이는 문자 그대로 천상의 맛이었다. 아니, 맛이라고 했다. 나이프와 포크를 든 소나는 여느 때와 같이 우아하게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지만,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몸만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선 병원에서 나오기 전 베사리아가 했던 말만이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아까 여기 레오나가 잭스에게 얼굴을 보여 달라고 했던 거, 실은 제가 몰래 부탁했던 거였어요. 저주의 활성화 정도를 측정해보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전혀 줄어들어 있지 않았어요. 소나 양의 음악으로 상태가 호전되었을 거라 생각했는데…제가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요. 상태가 호전되었던 게 아니라 그저 억누르고 있을 뿐이었어요. 제 판단 실수에요.]

 임시방편에 불과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에트왈도 소나의 음악은 그저 임시방편에 불과한 것이라 말했으니까. 하지만 이 정도로 효과가 없을 줄은 소나 자신도 생각지 못한 맹점이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그의 몸을 치료한 줄 알았는데, 어느 정도는……. 너무 안일했다. 너무 대놓고 잭스를 걱정하면 자존심 상해할까봐 몰래 하려고 했던 게 화근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미움을 받건 분노를 사건 그냥 그의 치료에 전력을 다하는 편이 나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소나였다.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었다.

 [일단 소나 양은 자택으로 돌아가 있어요. 너무 늦게 가면 부인이 걱정하실 테니까요. 잭스는 레오나가 지켜보고 있다가 무슨 일이 있으면 즉시 제게 알려주기로 했어요. 그렇게 되면 제가 순간이동으로 소나 양을 데리러 갈 테니까, 가능하면 잠이 들더라도 당장 움직일 수 있도록 준비를 해놔요…물론 그런 일이 아예 벌어지지 않는 게 가장 좋겠지만요.]

 소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손이 떨렸다. 무서웠다. 그저 무서울 뿐이었다. 부드러운 파이가 마치 끈끈한 고무 액처럼 그녀의 목구멍을 꽉 틀어막는 것 같았다. 결국 그녀는 절반도 먹지 않은 파이 조각이 담긴 접시를 밀어내고야 말았다.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체력을 좀 보충해두라고 했던 베사리아의 충고가 없었다면 그마저도 먹지 못했을 터였다.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는 그 순간이 마치 영겁처럼 길게 느껴졌다.

 “소나야, 무슨 일이니? 이렇게 많이 남기고선……. 혹시 입에 맞지 않는 거니? 다른 걸 만들라고 할까?”

 레스타라 부인의 걱정하는 소리가 그녀의 귀를 간질였다. 식탁이 세로로 길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레스타라 부인이 조금 더 가까이서 그녀의 얼굴을 봤더라면 한바탕 난리가 났을 테니까. 그 정도로 소나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핏기가 하나도 없어서, 마치 병자의 그것 같았다. 소나는 애써 부인과 눈을 맞추지 않으려 하면서 수화로 말했다. 그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아서 그래요. 레오나 씨와 담소를 나누다가 저는 먼저 좀 먹었거든요.]
 “어머, 그랬니? 그나저나 레오나 씨에게 뭐라도 감사 인사를 드리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이 귀한 걸 이렇게나 많이 주다니. 나중에 꼭 감사 인사를 하려무나, 소나야. 이건 정말 귀한 거란다.” 

 레오나가 준 게 아니라 잭스가 준 것이었지만, 소나는 구태여 그 말을 해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않았다. 가는 길에 만났을 때도 별말 하지 않았으니 신경도 안 쓰는 모양이었다. 하긴 지금 사태에서 그까짓 사과 따위가 중요할 리 없었다. 

 “호호, 그나저나 내 살아생전에 솔라리의 황금 사과로 파이를 만들어 먹다니! 전부 다 우리 딸 덕분이란다. 우리 귀여운 작은 새 덕분에 이 어미가 호강을 누리는구나.”

 레스타라 부인은 우아하게 웃으며 소나를 칭찬했다. 시중을 드는 하녀들도 밝게 웃고 있었다. 그녀가 이 저택에서 얼마나 사랑받는 존재인지 여실히 알 수 있는 광경이었다. 소나 역시 웃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웃지 못했다. 식탁 아래로 내려진 그녀의 손은, 떨림을 참기 위해 드레스 자락을 주름이 생기는 것 따위는 아랑곳 않고 꽉 잡고 있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지금 그녀는…….

 [오늘은 좀 피곤하네요. 먼저 올라가 봐도 될까요, 어머니?]

 토할 것만 같았다.

 “그래, 올라가보려무나.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조이 편으로 따뜻한 우유라도 한 잔 올려줄까?”
 [아니에요,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단순히 피로가 좀 겹친 것뿐이에요.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어머니. 모두들 잘 자요.]

 소나는 수화로 그렇게 말하고선 자리를 떴다. 일단 혼자 있고 싶었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과는 지금 자신의 고민을 도저히 나눌 수가 없었으니까. 그저 오늘 밤에 잭스가 무사하기를, 제발 긴급한 상황이 터지질 않길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소나였다.   

***

 식당 문 너머로 계단을 오르는 소나의 뒷모습을 보며 레스타라 부인은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이번 협곡 사건으로 다친 챔피언들을 위해 솔라리에서 특별히 사제단을 파견했다고 했죠? 솔라리의 챔피언 레오나가 그 사제단을 이끌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설마 그 배타적인 타곤 산 일족에게 선물을 받아 올 정도로 친해지다니……. 저 아이는 정말 의외의 곳에서 친구를 만들어 오는군요. 제 또래 아이들과 좀 사귀어 보라고 파티나 무도회에 보내면 그렇게 질색을 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말이죠.”
 “친구를 사귀신 거야 저도 기쁩니다만, 아가씨께서 저렇게 불안해하는 모습은 처음 봅니다. 신변에 무슨 문제가 생기신 건 아닐까요.”

  하녀장이 옆에서 조용히 말하자 레스타라 부인은 작게 한숨을 쉬며 애꿎은 황금 사과 파이만 콕콕 찔렀다. 소나는 자신이 잘 숨겼다고 생각했겠지만, 아니었다. 당연히 숨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레스타라 부인이나 하녀장은 소나를 갓난아기 때부터 직접 기른 장본인들이고, 아무리 나이가 어린 하녀라 해도 소나를 보고 지낸 시간이 몇 년은 넘었다. 그녀가 모종의 일로 고민하고 있다는 건 얼굴을 보자마자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요, 무슨 문제가 생겨도 단단히 생겼겠죠. 저 아이가 저토록 괴로워하는 모습은 저도 처음 보니까요. 그 섬세한 성격이 이럴 때는 독이 되는군요.”
 “하지만 마님, 그렇다면 왜 일부러 모르는 척을 하신 겁니까? 아가씨께서 저리 불안해하시는데.”
 “나라고 왜 안 하고 싶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들에게 상담할만한 일이었으면 소나가 먼저 말을 꺼냈을 겁니다. 소나는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에요. 벌써 약혼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입니다. 언제까지고 품 안에서 키울 수만은 없는 노릇이잖아요. 그 애도 스스로 고민을 해보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 봐야죠. 음악 외에는 요만큼도 관심이 없는 애니 그게 좀 걱정이긴 하지만…….”

 물론 그건 지금 레스타라 부인이 소나가 당면한 문제가 어떤 것인지 몰랐기에 가능한 발언이었다. 만약 소나의 고민이 잭스라는 챔피언 때문이고, 그 잭스가 지금 저승으로 가는 배에 한 발을 걸치고 있을 정도로 위독한 상황이란 걸 알았다면 이렇게 모르는 척은 하지 않았을 터였다. 여러 가지 이유로 말이다. 부인이나 하녀장이 아는 건 소나에게 관심 있는 이성이 생겼다, 정도였다.

 “혹시 이성 문제로 고민하고 계신 건 아닌지 싶습니다만.”
 “차라리 잘 된 일이죠. 좀 극약 처방이긴 하겠지만, 그렇게라도 소나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배워야 합니다. 요즘 소나가 병원에 자주 다니고 있죠? 지금까지를 통틀어서 소나가 몸이 아프다고 거짓말까지 하면서 누구를 만나러 간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습니까?”
 “아뇨. 그런 적 없습니다. 애초에 거짓말을 못 하시는 분이죠, 아가씨는.”

 협곡 사건이 물론 큰 사건이기는 했지만 소나는 그 협곡 사건의 피해자들 중에서도 가장 상처가 적었다. 기껏해야 타박상에 탈진 정도가 전부였으니 말이다. 이미 소나가 의식불명 상태일 때 저택에 데리고 오자마자 최고의 의료진과 마법사들을 불러 온갖 검사란 검사는 다 해 본 레스타라 부인이었다. 다른 상처 따윈 없었고, 그 정도는 길게 잡아도 일주일이면 낫고도 남았다. 

 그런데 소나가 일부러 통원 치료까지 자처하며 일과도 내팽개치고 병원에 들락날락 하다니! 그것도 누가 봐도 반할 정도로 우아하게 꾸미고서는 말이다. 소나의 레이디스 메이드인 조이 켐벨의 말에 따르면 갑자기 치장에 유난히도 신경을 쓰게 되었다는데, 그 모든 게 가리키는 말은 단 하나밖에 있을 리가 없었다. 바로 소나에게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즉 드디어 소나도 이성에 대해 눈을 떴다는 뜻이었다.  

 “알아볼까요?”

 하녀장이 그녀의 옆에 서서 담담하게 말했다. 부벨르 가문은 데마시아에서 가장 유서 깊은 귀족 가문 중 하나였고, 그 영향력이 알게 모르게 정말 상당했다. 데마시아 왕립 병원이라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당장에 그곳에서 부벨르 교육 재단의 원조를 받고 의사를 하고 있는 사람만 꼽아 봐도 수십 명이 넘었다. 조금만 언질을 준다면 병원에서 소나가 무엇을 하는지 정도는 우습게 파악이 될 터였다. 하지만 레스타라 부인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딸이 누구에게 관심이 있을지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걸 알아보는 과정에서 소나가 마음의 상처를 입기라도 한다면 안될 말이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전 소나가 이 일에 대해 스스로 얘기를 꺼낼 때까지 관여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전 제 딸의 안목을 믿어요. 그 애가 골랐으면 분명 훌륭한 인물일 겁니다. 그리고 소나는 사교성이 부족하다 뿐이지 은근히 고집도 있고 결단력도 있는 아이니 마음에 든 사람을 쉬이 놓치지는 않을 겁니다.”

 훌륭한 인물…그녀들의 대화를 한쪽에서 본의 아니게 훔쳐듣고 있는 조이 켐벨의 가슴이 뜨끔뜨끔했다. 그녀가 소나를 슬쩍 떠봤을 때는 훌륭한 인물이라기보다는 여자관계 나쁜 남자처럼 느껴졌는데…….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조이였다. 하지만 조이 켐벨도, 레스타라 부인과 하녀장도 미묘하게 진실에선 어긋나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세상에 소나가 만나러 가는 인물이 이번 사건과 연루된 챔피언 잭스일 거라고는 아예 고려조차 하지 않고 있는 세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것 말고 다른 방향으로 부벨르 가문의 힘을 좀 써야 할 건 사실입니다. 협곡 사건의 피해자 중 한 명인 럭산나 크라운가드 양이 깨어나 어제 진술을 했다고 합니다. 모든 내용을 알 수 없어 유감이긴 하지만, 어쨌든 관계자의 말로는 협곡이 정체불명의 검은 무리들에게 습격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그것도 협곡의 시스템을 장악할 정도로 조직적이고 철저하게 준비를 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목적 중 하나가…바로 우리 딸이었다고 합니다.”

 레스타라 부인은 주먹을 꽉 쥐고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절대로, 그 누구도 내 딸에게 상처 입히는 건 용납할 수 없습니다. 저 아이가 행복하게 지내는 것이야말로 제 평생의 소원이자 하나뿐인 소망이에요. 그런데 그 소망이 그런 해괴망측한 놈들에 의해 무너질 뻔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하녀장, 부벨르 가문의 모든 힘을 이용해 소나를 노리는 그 극악무도한 것들에 대해 알아보세요. 그리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소나의 주변 안전도 철저하게 지켜 놓으세요. 비용 따윈 상관 없습니다. 내 딸의 안전과 그깟 돈 따위를 비교할 수는 없으니까요.”
 “아가씨는 우리 모두의 보물이십니다. 저 역시 무엇보다도 소나 아가씨를 소중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명을 수행하겠습니다, 마님. 반드시 아가씨를 지켜 보이겠습니다.”
 “좋아요, 믿겠습니다. 하녀장.” 

 레스타라 부인의 말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 정도로 하녀장에 대한 신뢰는 두터웠다. 아주 오래 전부터 그녀의 시중을 들어오다 하녀장의 직위까지 맡은 여인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부인은 다시 한 번 소나가 올라간 계단 쪽을 보고서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걸음을 옮겼다. 지금이라도 당장 소나에게 가서 그녀를 껴안고 위로해주고 싶은 게 그녀의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혼자 서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마음속으로 되뇌며 애써 마음을 잡는 레스타라 부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녀라 해도 미처 파악하지 못한 게 있었다. 그녀는 협곡 사건을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소나가 당면한 문제가 단순히 인간관계나 이성 문제 따위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크고 무거운 문제라는 걸,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