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더 이상 널 내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아.’

‘그동안 좋았잖아, 그렇지?’

‘그러니 이제는, 내가 네 주인이 될 차례야.’

 소나는 온몸이 땀으로 젖은 채 허리를 일으켰다. 이불자락을 꼭 붙잡고 있는 손은 조금도 멈추지 않고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망치로 두들겨 맞기라도 한 듯 머리는 계속해서 욱신거렸고, 긴장으로 잔뜩 위축된 심장은 마치 터질 것처럼 쿵쾅댔다.

 두통은 조금도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안개 속에 둘러쌓인 것처럼 시야가 뿌얬다. 눈을 감은 것만 못한 상황에서 소나는 손으로 주변을 더듬었다. 가까스로 램프의 줄을 찾아낸 소나는 얼마 없는 기력으로 줄을 잡아당겼다. 그제서야 방 안이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했다.

 주변은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언제나 똑같은 위치에 놓여있는 가구들, 그리고 책들. 소나는 천천히 손으로 가슴팍을 꾹 눌렀다. 무언가가 얹힌 듯 그저 답답했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진정할 수 있었던 소나는 곰곰히 그녀가 꾼 꿈에 대해 생각에 잠겼다.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성별이 뭐였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단 한 가지 기억나는 것은 있었다. 불안에 떠는 그 어떤 존재라도 편안하게 만들 것 같은 온화함과, 강철마저도 베어버릴 것 같은 날카로움이, 공포가 그 목소리 안에서 공존하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일까. 무언가를 경고하려고한 것일까, 아니면 단순한 악몽이었던 것일까. 그도 아니라면 그저, 스쳐 지나가는 하나의 꿈이었던 것일까.

 소나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작 꿈 하나에 이렇게 휘둘리다니, 그저 기우일 뿐일텐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소나는 양팔로 그녀의 몸을 감싸안았다. 여전히 꺼림칙함이 가시지를 않았다.  

 힐긋 창밖을 바라봤으나 밖은 이제 막 동이 트려 하고 있었다. 평소보다 이른 시각에 일어나게 된 것도 꿈 때문이라 생각하니 꺼림칙함이 배가 되었다. 

 그러나 소나는 도리도리 고개를 내저었다. 이 이상 생각해봤자 쓸데없는 짓일 것이다. 하나의 기우라 여기고 넘기면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침대 밑으로 막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쾅

 갑작스레 들려오는 소란에 소나는 흠칫 놀라 앞을 바라봤다. 시녀 한 명이 허리를 숙인 채 연신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굉장히 급하게 이 곳을 찾아온 것 같았다.

“아, 아가씨. 큰일입니다.”

 소나는 탁자 위에 놓여있는 물병을 조심스레 집어선 시녀에게 건넸다. 시녀는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물병을 받아들고는 하루종일 물 한 방울 마시지 못한 사람처럼 물을 마셨다.

 진정이 좀 됬는지 시녀는 아까보다 훨씬 일정해진 호흡으로 소나의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소나는 무슨 일이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트왈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시녀의 입에서 나온 말에, 소나의 얼굴은 더없이 창백해지고 말았다.


* * * * *


“쯧.”

 야스오는 술병을 거꾸로 들어 탈탈 흔들었다. 겨우 나온 한 방울이 그의 입안으로 사라지자, 야스오는 들고 있던 병을 허리충에 다시 휘감았다. 

“여긴 어디야.”

 사방이 전부 나무에 둘러쌓여 있다보니 도저히 어디로 가야할지 알지 못했다. 야스오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정면을 응시하다 그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로 가든 길은 나올 것이고, 그 길을 가다보면 다른 무언가가 또 나올테니까. 그러다보면 언젠가 양조장도 나오지 않을까.

 울창한 숲을 거니는 기분은 상당히 상쾌했다. 나뭇잎들 사이로 부서져 들어오는 햇빛도, 간간히 들려오는 새들의 울음소리도 술이 다 떨어져 가라앉아버린 그의 기분이 더 이상 가라앉지 않도록 해주었다.

“이봐! 거기 잠깐!”

 야스오는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들려오는 방향이 어디인지는 진작에 알고 있었다. 기척을 숨길 줄도 모르는 허접한 도적떼이지만, 그의 손은 이미 검의 손잡이에 향해있었다.

“당신, 어디에서 오는 길이지?”

 건들거리는 걸음걸이에 대놓고 어깨에 둘러메고 있는 커다란 칼. 단순히 저가 위협적인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허세였다. 야스오는 상대해줘야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지만, 간만에 만나게 된 사람들이었기에 최대한 친절하게 대해주리라 생각했다.

“알아서 뭐하려고.”

 최대한 친절하게 대해줬다고 생각했는데, 상대는 아닌 모양이었다. 제각기 다른 욕설을 내뱉으며 저들이 가진 무기를 들고 크게 휘두르기 시작했다. 

“임마. 어디서 굴러들어온 뼈다귀인지는 모르겠는데. 우리가 시푸 도적단이라는걸 모르지는 않겠지?”
“그건 또 뭐지.”

 한낱 도적 주제에 시푸라는 거창한 이름까지 붙여가며 활동한댄다. 야스오는 기가 막혀 헛웃음마저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 거창한 ‘시푸 도적단’은 정말로 마음에 상처를 입은 모양이었다.

“원래라면 가진 것만 뺏고 보내려고 했는데, 오늘이 네놈 제삿날인줄 알아라.”

 저들의 뒤쪽에서 궁수들이 활을 준비하는 것이 보였다. 그래도 도적단 주제에 제법 규모가 갖춰졌나보군.

 야스오는 천천히 몸을 풀며 허리춤의 검집을 꺼내들었다. 어차피 죽일 생각은 없었기에 야스오는 검집 채로 도적들을 겨눴다. 잠깐 장단에 맞춰주는 것도, 저들에게 있어서 훗날 크나큰 교훈이 되겠지.

 상대를 봐가면서 개기라는, 뭐 그런 교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