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버렸다.



3년간 어쩌면 어느 순간만은 현실의 나보다 더 사랑했던 내 본캐 기공사를, 나는 버렸다.



근거리와 원거리를 오가는 공격, 무기라는 걸 들고 때리는 것이 아닌, 내면의 기를 이용해서 싸우는 그 모습이 너무 멋져보였습니다. ‘로스트아크’라는 게임만의 매력에 끌려서 시작했다기 보다는 캐릭터가 너무 멋져보였습니다. 저는 멀리서 섬열파와 풍뢰일광포를 날리며 딜을 했고, 천하섬멸옥을 맞추어 큰 데미지 딜링을 하는 기공사가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나와 같이 플레이하는 사람도 처음엔 꽤 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칼엘리고스가 태어나 포효하고, 욘 대륙에 모험을 떠나던 시기에, 많은 기공사 게시판 유저분들이 연구를 거듭한 끝에 어떠한 빌드들이 정립이 되었고, 저와 같은 플레이를 하는 기공사는 점차 사라졌습니다. 원하는 바를 하고자 했지만, 흐름을 거부하는 것은 제 성향이 아니었기에, 그렇게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게 ‘20초 안에 모든 데미지를  최대한 우겨넣기’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래도 좋았습니다. 제가 원해서 시작했던 캐릭터의 모습이었고, 어렵기도 하고 가끔은 불합리하게도 느껴졌던 그러한 제약들에 스트레스 받아도, 제 기공사는 현실의 제 모습 같았습니다. 여러 제약이 있지만, 그 안에서 노력해서 해답을 찾아서 무엇인가를 성취하는 그 기쁨은, 현실의 저에게도 자극이 되었습니다. 로스트아크를 즐기며, 기공사의 레벨이 올라가고 성장하면서,  현생의 저 역시도 이루고자 하는 답을 찾아 지금까지 이루어 왔습니다.

하지만 그 시간이 저에게 길었던 것일까요? 어느 순간 지쳐버린 제 모습을 보았습니다. ‘20초 안에 모든 데미지를 우겨넣기’를 극한으로 해내야만, 여러 사람들과 함께하는 컨텐츠에서 흔히 말하는 ‘1인분’을 할 수 있었고, 더하여 천하섬멸옥까지 맞춰야만 했으니까요. 천하섬멸옥이 아무 숫자를 표현하지 않는 순간마다, 마이크를 켠 저는 한숨과 탄식, 짜증, 분노를 표현하였고 시간이 지나자, 같이 게임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 저는 ‘신경질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지인에게 ‘또 원기옥 안 맞아서 화난건 아니지?ㅋㅋ’ 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내색하진 않았지만 저에게는 충격이었고, 많은 생각이 스쳐갔습니다.

그렇게 화를 줄여보고자, 다른 직업을 플레이해봤습니다. 그냥 대충 키웠던 배럭인 초심배마와 유산스카를 해보았습니다. 어제 이전까지는 아이템 레벨과 장신구, 보석 등 다 볼품없었지만, 제 기공사와 똑 같은 수준으로 둘다 맞춰보았습니다. 큰 돈을 쓰진 않는 제 성향이라 몇 달간 모았던 재료들과 골드로 오랜 시간 정성들여 세팅을 해봤습니다. 그리고 제 기공사가 하던 똑같은 컨텐츠를 어제 플레이했고, 그 모습을 찍어보고 녹화해서 다시 보았습니다.

너무 편했습니다. 튼튼하고 재빠르고, 타격감도 있고, 단발의 큰 데미지 숫자는 볼 수 없었지만, 오히려 숫자에 집중안하고 캐릭터의 모습에 집중하게 되더라구요. 모코코를 입고 뇌명각을 쓰며 날아가는 제 배마는 왜이렇게 귀엽게 느껴지던지.. 웃음이 절로 났습니다. 그러면서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3년간 도대체 뭘 했던 걸까요?’

저는 인벤에서 주목받는 글을 쓰지도 않았고, 기공사 게시판에 글을 많이 쓰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매일 인벤의 여러 글들을 읽어보고, 제가 느끼던 불편한 제약들에 대한 해답을 찾아보고자 했습니다. 제약을 최소화하고, 사라지지 않는 제약들에서 어떻게든 노력하여 극복하고자 했던 많은 연구글과 뉴비 및 일반 유저들의 궁금증에 좋은 조언해주시던 글과 댓글들 저도 다 읽어봤습니다.

로아를 하면서도 항상 반대쪽 모니터엔 기공사 인벤을 켜놓고, 게임을 했었고, 매일 출근전에 새벽에 몰래 일어나서 수련장에서 열심히 스킬 사이클도 적고, 노트에 혼자만의 스킬트리를 구상하고 연구하고.. ㅎㅎ 교통사고로 게임을 오랫동안 못하는 와중에도 기공사 게시판은 항상 들어와서 여러 글들을 읽어보며 지내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지금껏 받았던 스트레스와 제약들이 너무 저를 지치게 해서, 이제 또 다른 저였던 기공사를 내려놓고자 합니다.

혼자만의 긴 글이라 죄송합니다만, 이렇게라도 글을 써보는 이유는 제가 느꼈던 불편함들을 곧 다가오는 패치에서 개선해줬으면 하는 바램도 있고, 저만큼이나 애정을 가지고 기공사를 플레이 하고 연구하시는 기공게 여러분들께 감사를 표하고자 쓴 것도 있습니다.

봄이 다가와야하는데, 아직은 많이 쌀쌀하고 코로나는 더 심해지는 요즘입니다. 다들 건강하시고 즐겁고 재미있는 아크라시아 생활 되세요!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