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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9-22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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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와 마녀와 눈물 17
하셀은 균형을 잃고 얼굴부터 눈밭에 푹 파묻혔다. 재빨리 일어난 하셀은 눈을 털어내고 메리엘을 향해 마저 달려가려 했으나, 주위의 풍경을 보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리치도, 메리엘도 없었다. 애초에 이곳은 리치가 있던 숲조차 아니었다. 울창한 침엽수림, 깎아지른 절벽. 주변에서는 늑대 울음소리가 들렸다.
“뭐, 뭐야. 내가 왜 여기 있지?”
하셀은 산맥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도저히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리치가 뭔가 술수를 부린 건가?
하셀은 당황한 채 주변을 둘러보다, 근처에 떨어져 있던 벨을 발견했다.
벨은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었다. 하셀은 서둘러 벨에게 다가갔다.
날개가 엉망이 되긴 했지만, 다행히 숨은 붙어 있었다. 하셀은 벨의 날개에 포션을 부었다.
“삐이이...”
벨은 고통스러운 듯 움찔거렸지만, 이내 상태가 안정되었다. 하셀은 벨을 둘러메었다.
어서 메리엘에게 돌아가야 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려면 우선 이곳의 위치부터 알아야 한다. 그러려면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한다.
하셀은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는, 눈을 질끈 감은 채 가장 높은 나무를 골라서 타고 올라갔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꾹 참았다. 꼭대기에 도달한 하셀은 눈을 가늘게 떴다.
눈앞이 핑 돌 정도로 까마득한 절벽. 손에 힘이 절로 풀리는 느낌이었다. 하셀은 정신을 다잡고 나무 기둥을 붙잡았다.
시야의 대부분이 가려져 있어서 무언가를 찾기 힘들었다. 다행히 말라비틀어진 숲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셀은 집중해서 숲을 살폈다.
터무니없이 먼 거리였지만, 타고난 시력과 집중력은 그 거리에서도 사람의 형체를 구별할 수 있게 했다.
하셀은 메리엘을 찾아내었다.
메리엘은 팔과 다리에 검이 꽂힌 채 힘겹게 기어가고 있었다. 리치는 그 앞에서 즐거운 듯 웃고 있었다.
“……!”
로베이라와 타일러스도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시간이 없다. 최대한 빨리 가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하셀이 있는 절벽에서 메리엘이 있는 곳까지 가려면 최소한 몇 시간은 걸릴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이미 모든 일이 끝난 뒤에야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나무 아래로 내려온 하셀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삐이?”
정신을 차린 벨이 울음소리를 내었다. 그와 동시에 하셀의 머릿속에서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정신 나간 짓이고, 성공할 가능성도 낮지만, 지금 도움이 될 방법은 이것 하나뿐이었다.
하셀은 벨의 날개를 펴 보았다. 포션의 효과 덕분에 화상은 거의 다 나은 상태였다. 하셀은 벨을 붙잡고 말했다.
“벨. 좋은 생각이 있어.”
벨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셀은 절벽의 끄트머리를 가리켰다.
“저기서 뛰어내릴 거야. 날 붙잡고 날아줘.”
“삑?!”
벨은 말도 안 된다는 듯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알아. 미친 짓인 거. 나도 무서워. 그래도 해야 해. 이대로면 메리엘 씨도 죽을 거야. 그리고.”
하셀은 벨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형 복수 해야지. 안 그래?”
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가능하다면 리치가 있는 곳까지 가 줬으면 좋겠지만... 그건 힘들겠지. 잠깐만 버텨줘. 그러면 내가 알아서 할게.”
하셀은 확고했다. 하셀은 석궁을 들고, 천천히 심호흡하고는, 절벽 끝에 조금씩 다가섰다.
“삐익!”
벨이 말렸지만, 하셀은 듣지 않았다. 벨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혼자서라도 뛰어내리려는 듯했다.
하셀의 손끝이 떨렸다. 식은땀 때문에 자꾸만 석궁이 미끄러지려 했다.
하셀은 허공을 향해 한 발짝 내디뎠다.
그와 동시에, 벨의 발톱이 하셀을 붙잡았다.
―휘오오오…
벨은 날개를 펼치고 미끄러지듯 활공했다.
아찔한 부유감과 함께 하셀은 하늘을 날았다. 눈앞이 샛노랗게 변하고, 온 세상이 핑핑 도는 듯했다.
영혼이 몸을 떠나가는 느낌.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그래도, 해야 한다.
하셀은 애써 두려움을 떨쳐내고, 석궁을 눈가에 가져다 대었다. 목표는 리치의 붉은 보석이었다.
흔들리지 않게 석궁을 꽉 잡고, 시시각각 변하는 거리, 낙차,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가늠했다.
‘아직은 너무 멀어. 조금만 더 가까이……!‘
형이 죽은 건 슬프지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궁술을 배우고 사냥꾼이 된 그 순간부터,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형은 그렇게 죽지 않았다. 리치에게 놀아나, 그의 꼭두각시가 되어, 자신의 의지를 잃고 리치가 엘나스를 공격하는 데 앞잡이 노릇을 하게 만들었다.
리치는 형의 손을 더럽혔다. 다시 없을 모욕이다.
형을 도구로 전락시키고, 수많은 엘나스 사람들을 죽이고, 메리엘 씨마저 죽이려 드는 괴물.
절대 용서할 수 없다.
그 순간, 목표와 자기 자신만을 남기고, 그 외의 모든 것이 일시에 사라졌다.
바람 소리도, 살을 에는 추위도, 어깨를 쥐고 있는 벨의 발톱도, 석궁을 쥐고 있는 손의 촉감도. 모든 것이 사라졌다.
기이한 감각이었으나, 하셀은 자각조차 하지 못했다.
석궁으로부터 붉은 보석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작은 실선이 이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 길을 따라 화살이 날아가, 보석에 박히는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하셀의 마나가 일점으로 모였다. 하셀은 방아쇠를 당겼다. 걸쇠가 시위를 놓고, 시위가 품고 있던 힘이 일시에 해방되며, 치명적인 위력의 화살이 쏘아졌다.
―타앙!
화살은 바람을 가르며 날아갔다.
단 한 발의 화살을 쏘았을 뿐인데, 왜인지 극심한 탈력감이 밀려들었다.
’한 발로는 부족해.‘
하셀은 정신을 다잡고 다음 화살을 쏘려 했다. 하지만, 두 번째 화살이 발사되는 일은 없었다.
―휘이잉!
돌연 세찬 바람이 불었다. 하셀의 몸이 흔들리며, 벨은 그만 하셀을 놓치고 말았다.
“으아아아악!”
하셀은 그대로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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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벌레 같은 꼴이구나.”
리치는 꿈틀거리며 바닥을 기는 메리엘을 비웃었다.
“기도라도 해보지 그러나? 분명 신은 지켜보고 있을 터. 혹시 구해줄지 어떻게 알겠나?”
메리엘은 기도하는 대신, 온 힘을 다해 비석을 향해 움직였다. 리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했다.
“자네도 알고 있군. 그럴 일은 없다는 걸.”
리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이러니하군. 신성 마법사조차 신을 믿지 않는다니. 그럴 만도 하지. 어린 클레릭이 이렇게 고통받는데도 도와줄 기미조차 없으니, 참으로 매정하지 않나? 신은 개인의 고통이나 죄 따위에는 관심 없다. 단지 종이 자신을 거스르는 것을 혐오할 뿐. 그런 자를 신이라 할 수 있나?”
메리엘은 제자리에 멈추었다. 리치는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했다. 시간을 벌기 위해서 어울려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저와 신앙에 관한 이야기라도 하고 싶으신 건가요? 많은 전사와 마법사들이 그분의 이름으로 약자를 돕고 죄인을 처단하죠. 그것은 신께서 행한 일이라고 볼 수 있지 않나?”
“놈은 힘이 있다. 그런데도 직접 나서지 않는 위선자에 불과하지.”
“그분은 위대하시지만, 어디까지나 수많은 신들 중 하나. 전지하지도, 전능하지도 않으세요. 드넓은 세상을 그분 혼자서 전부 돌볼 순 없어요. 그렇기에 우리에게 힘을 나눠주시는 거죠.”
“나는 언데드가 되고서도 너보다 막강한 신성력을 지니고 있다. 왜 너에게 더 큰 힘을 내려 나를 벌하게 하지 않나?”
“그건... 제 자격이 모자랐을 뿐이에요.”
리치는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그러한가. 아둔한 마법사여. 이런 상황에서도 신을 두둔하는 게냐?”
리치는 검을 소환하여 메리엘의 목에 겨누었다.
“이건 어떤가. 놈을 모욕해 보아라. 그럼 살려주마.”
메리엘은 답하지 않았다. 리치는 다시 말했다.
“한마디만 하면 된다. 약속은 지키겠다. 목숨이 아깝지 않은 건가?”
메리엘은 리치를 노려보며, 단어 하나하나 힘주어 말했다.
“저는 당신처럼 나약하지 않아요.”
순간, 리치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리치는 격노하여 외쳤다.
“건방진…! 좋다. 이만 죽어라. 네놈의 생명력은 내가 잘 써주마!”
리치의 검이 메리엘의 목 위로 떨어졌다. 도망칠 방법은 없었다. 메리엘은 눈을 감았다.
―까앙!
그때,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 한 대가 리치의 붉은 보석에 직격했다. 그 충격으로 보석에 작은 금이 생겨났다.
“으으으... 아아아아!”
그리고,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반발이 일었다.
보석 속의 생명력들은 거의 통제를 벗어날 정도로 미친 듯이 날뛰었다. 리치는 고통스러워하며 비명을 질렀다.
그토록 원하던 빈틈이 생겨났다. 메리엘은 멀리 떨어진 스태프 대신, 옷 속에 숨겨놓은 비상용 완드를 꺼내었다.
―파앗!
단숨에 비석까지 텔레포트한 뒤, 메리엘은 무덤을 파헤쳤다. 얼어 있긴 했지만, 흙은 단단하게 다져져 있지 않았다. 최근에 이미 헤집어진 적이 있는 듯했다.
손끝이 찢어져 피가 흐르는 것도 무시한 채 흙을 파다 보니, 쇠사슬로 봉인된 상자 하나를 찾을 수 있었다.
“에너지 볼트.”
메리엘은 쇠사슬을 깨부수고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새카맣게 변질된 심장이 맥동하고 있었다.
메리엘은 주저하지 않고 얼음 눈물을 들어 올렸다.
“안돼! 멈춰라!”
리치의 고함이 들렸다. 메리엘은 주저 없이 얼음 눈물의 날카로운 부분을 심장에 찔러 넣었다.
그 순간, 리치는 환영을 보았다.
금발의 아름다운 마법사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언젠가 보았던 자였다. 리치는 기억을 더듬어 그 여자가 누군지 떠올렸다.
“엘미나…!”
엘미나는 피 흐르는 눈을 리치에게 고정했다.
“내가 말했지. 메데르.”
“도대체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엘미나의 입꼬리가 쭉 올라갔다.
“반드시 복수하겠다고.”
심장에 새겨진 리치의 마법이 산산이 부서졌다. 리치의 심장은 힘을 잃고 그저 썩은 고깃덩어리가 되었다.
“끄어어어어억!!”
리치의 마법은 완전히 깨졌다. 통제할 수단을 잃자, 보석에 모은 생명력도 연기처럼 흩어졌다.
“안돼, 안돼!!”
한순간에 리치는 불멸성을 잃고 필멸자로 전락했다.
리치는 분노로 이성을 잃었다.
“네놈들 따위가 감히!!”
리치의 마력이 요동쳤다.
“이대로 끝인 줄 알았더냐? 네놈의 영혼을 제물로 다시 악마와 계약하고, 남은 육신은 토막 내어 늑대 먹이로 던져주겠다.”
아직 흡수하지 못한 생명력과 불멸성은 사라졌지만, 리치 본인의 신성력과 흡수한 마력은 건재했다.
로베이라는 얼음 눈물의 반동으로 아직 마법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리치는 남아있는 모든 힘을 끌어올렸다.
“너만은 반드시 죽여주마. 하찮은 견습 마법사 주제에 날 막을 수 있을 것 같나!”
메리엘은 조용히 읊조렸다.
“글쎄요.”
평소 같았다면, 혼자 남은 시점에서 이미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다. 자신은 공격 마법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니까.
메리엘은 피투성이가 되었던 동기의 모습을 떠올렸다.
처음 마법의 길에 입문한 뒤 있었던 실습. 그때 에너지 볼트를 사용하다가 동기 한 명을 죽일 뻔했다.
그 사건이 트라우마가 되어 공격 마법을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되었다. 클레릭의 길을 택한 건, 공격 마법을 쓰기 싫어서 도망친 것뿐이다.
그래서일까. 힐이나 버프를 걸 줄만 알았지, 그동안 신성 마법사의 마음가짐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생명을 해치기 싫다는 건 핑계에 불과했다. 돌이켜보면, 그저 외면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다. 3차 전직 시험을 포기한 뒤 타일러스가 해주었던 말. 지금이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누군가를 보호하고자 한다면 손에 피를 묻힐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
메리엘은 리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당신은 사사로운 목적을 위해 생명을 함부로 대했죠.”
어렴풋이 남아있는 이론을 바탕으로, 한 번도 사용한 적 없는 마법을 그려냈다.
“모두를 대신해서, 제가 당신을 벌하겠어요.”
동기를 죽일 뻔한 그날, 메리엘의 마법에는 문제가 없었다. 단지, 뛰어난 공격 마법의 재능 때문에 미처 예측하지 못한 위력이 발현되었을 뿐이다.
메리엘은 그동안 묻어두었던 재능을 마음껏 드러내었다.
메리엘의 주변에 수십 개의 성스러운 활과 화살이 떠올랐다.
“홀리 애로우.”
찬란한 잔상을 흩뿌리며 일제히 화살이 발사되었다.
화살은 광휘를 두른 채 떨어지는 별처럼 날아가, 리치의 죄를 철저하게 응징했다.
―퍼버버벅!
화살의 비가 끝없이 이어졌다. 로브가 찢어지고, 뼈가 부서지며, 리치는 조금씩 죽음에 가까워졌다.
메리엘은 모든 마나를 쏟아부어 화살을 빚어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마법이 멈추었다.
“아... 아아...”
전신에 금이 간 리치는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뼛조각이 후드득 떨어졌다.
“아, 안돼... 이렇게 허무하게...”
쉰 목소리로 애원하며, 리치는 구걸하듯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부서져 내리기 시작한 손은 그 무엇도 잡지 못했다.
“안돼... 난... 나는... 죽고 싶지 않아...”
리치는 천천히 재로 변하여 바람에 흩어졌다.
영생을 얻고자 한 프리스트의 추한 말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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