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베 때부터 하다가 잠시 접고, 요새 다시 한번 기웃거리며 추가된 컨텐츠, 퀘스트들을 접하고 있다.

 물론 현 트오세가 지닌 문제점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들 잘 알고 있다.

 기록적인 버그, 조정 불가능한 밸런스, 유저 엿먹이는 경제 시스템 등등등....

 그런데 이런 문제가 없었다고 가정하더라도, 난 트리 오브 세이비어가 애초에 중박 이상 칠 수 없었다고 본다.

 바로 스토리와 캐릭터의 부재 때문이다.

 왱? 여신과 마족의 대립, 계시자와 함께하는 npc등 많지 않냐고?

 간혹, 트오세가 스토리가 좋다는 분들도 있지만, 스토리가 좋을진 몰라도 그 좋은 스토리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

 우선 다음 장면들을 봐보자.








 
"아제로스를 위하여!"








"내 목숨을 아이어에" 




 블리자드와 인연이 없는 사람이라면 와우 사례를 들어 미안하다.

 하지만 적어도 제라툴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리라 믿는다.

 "my life for aiur"
 
 위 대사는 스타1 시절 기본유닛인 질럿이 게이트웨이에서 튀어나올 때마다 뱉는 대사이고,

 프로토스 진영 내에선 진짜 개나소나 다 하는 소리다.

 그런데, 제라툴이 죽음을 각오한 순간에 읖조린 대사가 저것이라는 건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주류 프로토스로부터 떨어져 나와 오래도록 이단 취급을 받았던 네라짐, 특히나 제라툴은 저그 침공의 장본인 취급을

 받았고, 대모 라자갈을 죽였다는 이유로 네라짐 내에서조차 그를 탐탁치 않게 보는 이들마저 있다.
 (그런데 이런 이유들마저 따지고보면 제라툴이 억울한 면이 많다)

 동족으로부터 온갖 배척과 멸시를 받으면서도 마지막에는 그 동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던졌다.

 스타1 시절부터 수많은 고난을 겪어온 제라툴의 캐릭터가 완성되는 순간이기도 하고, 저 동영상 전체를 살려

 블리자드 캐릭터 최고의 사망신이라 불리우게 만든 대사이기도 하다. 

 스타 크래프트 세계에선 진짜 특별할 것도 없는 저 한마디가 말이다. 



 와우의 바리안 린도 마찬가지다.

 "아제로스를 위하여" 역시 와우 세계에선 개나소나 다 외치는 말이다.

 하지만 호드에게 아버지를 잃고, 절친을 잃으며 엄청난 증오심을 키워갔던 바리안이, 호드와의 갈등,

 공적에 맞서기 위한 연합 등을 거듭하며 서서히 마음을 열게 되고, 마침내 그들을 투쟁과 격멸의 대상이 아닌

 화합과 동맹의 대상으로 받아들인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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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것이 스토리의 힘이고, 그로 인해 탄생한 캐릭터의 힘이다.

 온갖 미사여구 다 동원한 삐까뻔쩍한 대사 없이도 저런 단순한 한마디가 더 큰 울림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럼 우리 트오세 같은 똥은 어떨까?


 계시니, 예언이니, 여신이니 마족이니 잔뜩 무게를 잡고 있지만, 깊이가 너무나 얕다. 
 
 생각해보라. 트오세의 캐릭터 하면 뭐가 떠오르나?

 여캐 일러 가슴이랑 플레이어 캐릭터들 팬티 말고 떠오르는 거 있나? 

 한번 돌이켜보라. 과거 당신과 함께했던 npc들이 지금 뭐하고 있는지.

 아무것도 안한다. 그냥 그 한때 모험을 같이 한 것으로 그들과의 인연은 끝났다.

 메인 퀘스트만 떠올려보자.

 오르샤 영주 이네사 헤먼데일부터 마탑의 그리타, 마족 제스티나 렉시퍼....

 트오세 세계관에서 나름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무려 일러까지 그려넣는 수고를 한 캐릭터들이

 퀘스트 한번 하고 나면 그걸로 땡이다. 로제 남매는 고사리 때문에 숨어살아야 해서 어쩔 수 없다고 치자.

 마족과의 싸움에 인생을 걸고 있는 수많은 전사, 성직자들과의 인연은 퀘스트 하고나면 휘발되어버린다.

 이건 너무나 소모적인 전개다. 그야말로 퀘스트를 위한 퀘스트. 애초에 랩업이 메인 컨텐츠인 트오세라 당연한 건가.

 그렇기에 퀘스트 숫자도 천단위에 수많은 npc, 일러스트 캐릭터가 등장하지만 기억나는 게 거의 없다.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인간과 여신을 위하여' '마족을 위하여'만 머릿속에 들어있는 평면적인 인물들이고,

 이들을 지켜보며 캐릭터를 느껴볼 시간은 오지 않는다. 퀘스트 끝나면 영원히 이별이니까. 

 착한 놈은 그저 착하고, 나쁜 놈은 그저 나쁘다. 고찰해볼 여지도 필요도 없다.

 계시를 찾아다니긴 하는데, 이런저런 퀘스트를 해도 내가 이 세계에서 붕 떠있는 존재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거듭되는 일회용 만남이 서글프기까지 하다. 적이고 아군이고 떠나서. 

 인물과 인물이 사건을 일으키고, 그게 얽히고 설켜 맞아들어가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트오세의 스토리를 보면

 그냥 일직선 레일 위를 나아가는 기분이다. 여기 처리하곤 저기. 저기 처리하곤 그 다음. 

 경카 받기 위해서 알랑방구 뀌고, 끝나면 안면몰수.




 그나마, 그나마 건져볼 캐릭터가 있다면 델무어 르바임을 배신한 마법사 멜히라오스나, 마군주 하우벅이다.

 상기한 평면적인 캐릭터가 가득한 트오세에서, 마군주라는 우월한 위치에 있다가 영혼이 산산조각나 봉인되고,

 이에 대해 복수를 꿈꾸며 신성성 그 자체인 계시자와 손잡는 것조차 마다하지 않으며, 자신과 함께하던 나그네를

 살려달라고 부탁하는 모습과 끝까지 약속을 지킨 그 의리. 트오세 세계에서 접해왔던 '마족=절대악' 공식에 

 의구심을 품게 만드는 거의 유일한 캐릭터이고, 거기다 비록 다른 부분의 영혼이었지만 다름아닌 여신에게 

 통수를 맞아 이용당하는 충격적인 전개까지....뇌리에 강렬하게 남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런 하우벅조차 언제 다시 스토리에 나타나게 될지 요원하지만.







 
주인공을 이용하다가 살아서 도망친 마군주 렉시퍼


가비야 여신을 구하기 위해 헌신한 그리타




그외에도 재등장할 여지 차고 넘치는 애들 많은데, 임씨는 전혀 그럴 계획이 없어 보인다.

능력이 부족한 걸까 의지가 없는 걸까.




몰락한 르귄가의 후손, 스콰이어 마스터.


얘도 르귄가 떡밥 관련해서 주도적인 퀘스트 몇개 만들 법한데, 그런 것도 없다.

스콰이어 전직퀘엔 나오나? 스콰를 안키워봐서.


 



 
 
 

 여담이지만, 난 와우 접을 때 스랄한테 /경례 하고 접종했다. 게임 내의 스랄이 텍스트 쪼가리라는 걸 

 내가 몰랐을까? /경례 하면 받아주기라도 기대했을까? 아니다. 와우의 스토리 내에서 떨어져나온다는 것이

 아쉬웠던 것이고, 그 아쉬움을 내가 제일 좋아하던 캐릭터인 스랄을 통해 토로한 것이다.

 전에 트오세를 접을 때, 그간 사귄 친구들과 작별한다는 게 아쉽긴 했다(그새 그들도 접은듯 하다)

 그런데 트오세 월드에서 나온다는 것에는 조금의 아쉬움도 없었다.

 가슴이 크건 작건, 남자건 여자건, 다들 경카로밖에 안보였으니까.

 딱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할 무언가가 트오세 월드엔 없었으니까.

 

 정말 아쉽다. 곧잘 트오세는 '갓겜이 될 수 있었던 똥겜'이라 불리는데, 정말 그렇다.

 흥행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추고도 스스로 진흙탕 속에 내던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