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주말은 잘 보내고계십니까
어느덧 2달 가까이 연재하던 바르바로사 작전편도 이제 떠나 보낼 시기가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드릴 내용은 태풍작전 이후 벌어진 소련군의 반격입니다. 자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12월 5일, 바르바로사 작전이 종료되고 독일군의 공격이 멈추자, 스탈린은 이것을 대대적인 반격을 할 절호의 찬스라 여겼습니다. 사실 스탈린의 판단도 여기서 아예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었습니다. 스탈린이 알았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독일군의 공격이 멈추었다는 것은 공세를 할 여력이 소진되었다는 것이고, 실제로 독일군은 월동 장비와 보급품의 부족으로 전 전선에서 이리저리 고생하는 신세였습니다. 게다가 그렇게 깨지고 깨지면서 소련군은 배운 게 많았고, 이는 그 콧대 높은 구데리안조차 투덜대면서 인정할 정도였습니다. 앞선 글에서 언급했던 므첸스크(Mtsensk)에서의 반격이 대표적이죠.

그리고 우선 수도 주변부의 위협을 제거해야 한다는 판단하에 스타브카는 12월 5일에, 마침내 북부-중부 전역 전 전선에서 대반격 공세를 시작합니다. 12월 5일 ~ 12월 11일, 이 일 주일 동안 무려 다섯 곳에서 대대적인 반격을 가했는데, 북쪽부터 순서대로 볼호브 - 티흐빈(對 북부 집단군 제18군, 12월 11일), 칼리닌(現 트베리, 對 중부 집단군 제9군, 12월 5일), 클린 - 이스트라(對 중부 집단군 제3기갑집단군 및 제4기갑집단군, 12월 6일), 툴라(對 중부 집단군 제2기갑집단군, 12월 7일), 리브니(오룔-쿠르스크와 보로네시 사이, 對 중부 집단군 제2군, 12월 6일)이었습니다.

아래 다섯 개의 지도는 위의 반격작전을 나타낸 것이며, 축척을 같은 크기로 맞춘 것입니다.


12월 11일, 볼호브 - 티흐빈 전선. 사실 이쪽은 이미 11월부터 반격을 가하고 있었습니다.


(12월 5일, 칼리닌 전선)


(12월 6일, 클린 - 이스트라 전선)


(12월 6일, 리브니 전선)


(12월 7일, 툴라 전선)

대반격은 상당히 성공적이었고, 독일군은 아주 그냥 뒤로 확확 쫓겨 도망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12월 5일 반격을 개시할 당시의 기온은 영하 26도(영하 15도라고 되어 있는 건 화씨 온도이고, 이걸 섭씨로 변환하면 약 영하 26도 가량이 됩니다)였고, 그래서 손꼽히게 추운 동계 전투였던 것이죠. 

그러니 평시라도 버티는 걸 장담 못 했을 독일군이 이런 극한의 상황에서 버틸 수 있었겠습니까? 아 물론 소련군도 극한의 추위에 고생하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만, 적어도 독일군보다는 확실히 고생을 덜 했습니다. 그 양반들이야 툭하면 동장군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는 게 일상 아닙니까.(게다가 크리스마스 이전에 점령 할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한 탓에 독일군은 제대로 된 월동장비조차 준비를 안하고 갔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련군 자체가, 겨울전쟁 때의 한심한 공세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일례로 이미 7월부터 소련군에서는 대전차포를 흩뜨려서 수행하는 선형 방어 자체가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상대가 기갑군을 집중적으로 운용하며, 소수의 대전차포가 각개 격파당하는 것보다는 첩보를 통해 적의 공세를 예측하고 그 예상되는 지점에 대전차포를 싹 모아서 강력한 방어를 구축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인식한 결과입니다(비록 전술적 미숙과 통신의 부족으로 바르바로사 작전 내내 실패하긴 했습니다만).
그러다 보니 12월이 다 지나갈 때쯤 되자 짧게는 수 km에서 길게는 무려 100 km에 육박하는 밀어붙이기에 성공한 것입니다. 이는 전장 지도로 매우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위의 지도들과 직접 비교해 볼까요?



12월 27일, 티흐빈 - 볼호프 전선. 티흐빈이 일시 점령되면서 레닌그라드로 가는 물자 수송로가 막힐 대위기에 처한 소련군은 성공적인 반격으로 다시 레닌그라드의 숨통을 틔워놓을 수 있었습니다.



12월 25일, 칼리닌 전선. 이 공세의 성공으로 칼리닌, 즉 트베리는 오늘날 유럽의 주 도시 중에서 독일군을 상대로 가장 먼저 탈환된 도시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로스토프의 경우, 일시 점령으로 끝난데다가 이후의 청색 작전에서 함락되어버리는 바람에 완전 탈환이라고 하기는 좀 거시기했지만요.



12월 25일, 클린 - 이스트라 전선. 이 공세의 성공으로 모스크바는 그런대로 한시름 놓을 수 있었습니다.



12월 17일, 툴라 전선. 툴라의 중요성은, 툴라 자체가 모스크바의 남익을 닫는 곳이자 공업의 중심지이기 때문에 매우 높다고 앞서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U자형으로 돌출되어 나온 툴라 지역의 측면을 향한 대공세로 돌출부가 사라지게 되자 툴라 역시 한시름 놓게 되었고, 이 결과로 중부 집단군을 상대로 한 소련군의 모스크바 전역에서의 반격은 큰 성공으로 끝났습니다. 비록 적 전열 자체를 완전히 섬멸하지는 못했습니다만.


 
그리고 진짜로 큰 대성공. 12월 16일, 리브니 전선입니다. 공세 시작이 옐레츠(Yelets)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옐레츠 전선으로 볼 수도 있는데, 여하간 보시다시피 독일군의 일부가 포위 섬멸당하는 대형 사건이었습니다. 정확하게 후방을 닫고 전방으로 공세를 가해 적을 찢어서 분쇄하는 방식이었는데, <독소전쟁사>에서는 이 포위 섬멸당한 군단이 제34군단이라 하는군요. 여하간 이는 소련군이, 적어도 수뇌부, 즉 장성들에 있어서는 독일군에 전혀 밀리지 않는 대등한 수준에 올라섰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장면입니다.

여기에 모스크바 남단에서의 대공세, 툴라 남쪽에서 회전문 돌리듯이 북쪽을 향하는 공세, 마지막으로 크림 반도의 케르치 대공세까지 이어져서 12월 한 달만 해도 무려 여덟 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일련의 이어지는 성공으로 스탈린의 허파에 바람이 들어가버리면서, 가뜩이나 일련의 대공세로 상당히 지쳐 있던 소련군은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강제로 전 전선에서 벌어지는 총공격에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주코프나 티모셴코 등이 반발을 했지만 소용없었죠.(제가 중부집단군 마지막편에 오류를 범했는데 이 이후 공세는 소련군 장군들은 입에 거품물고 반대했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3차 하리코프랑 헷갈린 것 같네요...)

 그 결과가 바로 일련의 이어지는 비극입니다. 류반 공세 실패, 제2충격군의 고립 및 항복, 르제프에서의 박살(오죽하면 이 일대에 붙은 별명이 르제프 고기분쇄기, Rzhev Meatgrinder였겠습니까), 그리고 좀 멀리 나가면 제2차 하리코프 공방전까지... 그래서 소련군은 능력 밖의 것을 노린 탓에 제대로 실패했고, 이걸 또 자기가 현지사수 후퇴불가 명령을 내려서 먹혀들어갔다고 생각한 히틀러는 이후 내내 이 명령을 반복하다가 깨지는 거죠. 뭐 하긴 그런 명령을 반복하지 않았더라도 깨졌겠지만, 히틀러 덕에 몇 년 일찍 전쟁이 끝났다고 해 둡시다.(스탈린이건 히틀러건 남의 말 안듣는 황소고집은 
쌍벽을 이루네요)

아, 지도상에서 충격군(Shock Army)이라는 것이 이쯤에서 등장하는데, 충격군은 적의 방어진을 향한 강력한 포병사격 및 정예 보병의 돌격을 바탕으로 전선의 구멍을 뚫는 역할을 맡습니다. 이러한 군대가 등장했다는 것 자체가 종심 전투 교리의 완벽한 부활 및 소련군의 공세역량을 보여주는 것이었죠. 처음 충격군이 결성된 게 1941년 11월 25일입니다. 원래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충격군이라는 개념이 있기는 했습니다만, 독소전 직전에는 없었죠.

사실 르제프와 데미얀스크를 바르바로사편에 넣어서 다루고 싶었으나, 르제프는 다루기에는 스케일이 너무 커서 별수없이 나중에 청색 작전을 다루기 전에 연재할 생각입니다. 독일군 장성 중에서 발터 모델을 가장 좋아하는 저는 좀 안타깝네요... 다음 기회로 미루도록하죠.

여하간 여기에 라스푸티차를 거쳐, 이런 식으로 청색 작전 이전의 상황과 연계되는 겁니다.

지난 글 링크

독소전쟁 정리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