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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29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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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독립유공자(?) 무다구치 렌야![]() 흔히 이 사진이 많이 널려있다. 부드러운 인상에 똘망똘망한 눈을 가진 얼굴. 귀엽다고 자꾸 쳐다보지 마시길.정듭니다. ![]() 근엄해 보이는 대한광복군 명장이자 특수 공작요원의 모습.
사진아래에 있는 한자는 '제15군 사령관 모전구렴야 중장'이라고 읽으면 됨. 牟田口廉也 1888.10.07~1966.08.02 그의 머리속에 있는 일본군의 이미지는 장비좋고 능력좋은 독일 육군 현실은 어느날부터 막장화 되기 시작한 일본 육군. 츠지 마사노부와 함께 쌍벽을 이루는 팀킬의 귀재, 인간 과부제조기. 그의 만행을 아는 한국 사람들이 대한민국 독립 유공자라고 조롱을 섞어서 부른다. 아니, 이 인간의 업적 덕에 독립이 훨씬 앞당겨졌으니 정말로 고마워 미칠 지경. 사실 한국에서는 츠지 마사노부와 함께 인터넷에서 뜬 일본군 장성이지만 사실 삽질이나 패전에 이바지한 건 필리핀 탈환때 항공사령관인 후쿠도메 중장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한국에 잘 안 알려졌을 뿐. 무능한 일본군 패장들까지 찬양하기 일쑤인 일본 우익들조차 그만은 전쟁과 패망을 이끈 "삼간사우(三奸四愚)"를 능가하는 "삼대오물(三大汚物)"이라 논할 정도. 성부터가 無駄口(むだぐち: 헛소리, 쓸데없는 말)와 발음이 비슷하다. 참고로 적잖은 우리말 문헌에서 무타구치 렌야를 삼간사우의 한사람으로 꼽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삼간은 스즈키 데이이치(鈴木貞一), 가토 하쿠지로(加藤泊治郎), 그리고 시카타 료지(四方諒二)이며, 사우는 기무라 헤이타로(木村兵太郎), 사토 겐료(佐藤賢了), 사나다 죠이치로(真田穣一郎), 아카마츠 사다오(赤松貞雄) 이 사람을 보면 정말 '무능한 지휘관은 적보다 더 무섭다.'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그런데 이 인간의 행위를 보면 단순히 무능한 수준을 뛰어넘어 일부러 아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초래하는데 유능해 보일 정도이다.이 병맛스러운 행동 때문에 앞서 언급했다시피 태평양전쟁을 미화하려 하는 일본 극우세력들도 이놈만은 전혀 손대지 않는다고 함. 하긴 일본 극우세력이 아무리 정신나갔다 해도 수만명을, 그것도 제대로 된 전투로 인해 전사한 것도 아닌 팀킬해버려서 연합군 승전에 도움을 준, 게다가 일본 극우세력의 관점으로 자기 잘못은 인정하지 않고 뻔뻔하게 잘 살다 죽은 놈을 미화할 리가 없음. 사실 이런 인물이 중장까지 승진한 것은 도조 히데키의 한심하기 그지없는 안목이 한몫했다. 도조 히데키가 얼마나 무타구치에 대해 터무니없는 평가를 했냐면 노구교사건때에는 적절한 조치라고 무타구치의 공적을 치하했고 이 일을 계기로 무타구치는 소장으로 승진한다.제18사단 사단장 시절 활약한 당시, 도조는 그의 진격과 작전전개에 관한 보고를 듣고 "번개같은 움직임이다." 라고 하면서 높게 평가했다고 한다. 이렇게 높게 평가받았음에도 정작 무타구치가 세운 전공은 거의 없었다. 어쨌든 그렇게 인정받아 버마전선에서 15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또한 초기에 인도진공을 계획할 당시 작전수행이 어렵다는 이유로 반대했는데 우리의 멍청한 도조는 "냉철한 판단력을 지녔다." 라고 극찬. 중일전쟁에서의 그의 활약중일전쟁의 방아쇠를 당긴 인간. 그것도 월권행위였다. 밤중에 휘하 병사 하나가 똥 싸느라 화장실에 가서 인원수가 안맞자 중국군에 협조를 요청해 병사를 찾던도중 독단으로 중국군에 대한 공격 허가명령을 내려서, 나중에 이걸 빌미로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그때 그는 전쟁을 일으킬 권한이 없는 일개 부대장. 그런데 기가 막힌건, 부상당한 척 하였다. 이는 홍희범, 밀리터리 실패열전, 호비스트, p.6. 작전실패와 관련하여 첫사례로 실리는 쾌거를 이뤘다. 뭐 사실 중일전쟁 자체를 결정한 건 노구교 사건을 구실로 삼은 상층부이기 때문에 관련이 없지는 않다 수준이었지만, 이 인간이 얼마나 대책없고 책임감없는 잉여인간이라는 걸 엿볼 수 있는 일화가 되었다. 전설의 무타구치그 유명한 희대의 팀킬, 임팔 작전 등으로 일본군을 수만 단위로 팀킬시켜버린 일본 패망과 대한독립의 일등공신. 파벌과 인맥으로 카스트제도 같은 계급이 결정되는 일본군 지휘관답게, 수많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책임을 지지 않고 요직에 남았으며, 심지어 전후에도 잘먹고 잘살았다. 아무튼 수없이 정신나간 짓거리를 저질렀는데 다음과 같다. "보급이란 원래 적에게서 취하는 법이다."
적의 것을 빼앗아 쓰는것은 산업화가 이루어지기 이전의 전장에서는 정석 중의 정석이긴 한데,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사항이다. 아직 인민군이 이 전술을 사용하는데,어떤 꼴이 날지는 알아서 상상해 보자. 참고로 아돌프 히틀러는 아르덴 대공세를 계획할 당시 병참 문제를 "간단히 해결할 수 있음! 연합군 꺼 탈취하면 그만임ㅋ"이라고 말했다. 물론 연합군은 바보가 아니었으므로 독일군이 연료를 탈취하지 못하게 후퇴할 때마다 연료를 제거하고 후퇴. 마찬가지로 에르빈 롬멜 또한 보급 능력을 무시한 채 북아프리카 전장을 걷잡을 수 없이 늘려버린 점에서 실책을 찾을 수 있는데, 이 또한 보급 문제를 중요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같은 가솔린 연료라 할지라도 옥탄가가 다를 수 있고 무장의 경우 탄약을 원활하게 공급하기 힘들기 때문에 부품화가 이루어진 이후에 보급품을 전장 조달한다는 개념은 시대에 맞지 않는다. "무기의 부족이 패배의 원인은 될 수 없다."
문장 자체는 별거 아닌 것 같아 보이지만, 전문은 이렇다. "사토 부대장은 군명을 어기고 코히마를 버렸다. 식량이 없다며 전쟁을 할 수 없다고 제멋대로 퇴각했다. 이것이 황군인가, 황군은 먹을 것이 없어도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 병기가 없어, 탄환이 없어, 먹을 것이 없어 싸움을 포기한다는 것은 이유가 안된다. 탄환이 없으면 총검이 있다. 총검이 없으면 맨손이 있다. 맨손이 없으면 발로 차라, 발도 없으면 물어뜯어라. 일본남아에게 야마토 정신이 있다는 것을 잊었는가. 일본은 신이 지켜주는 나라다..." 그야말로 군기 찬양의 극치. 다른 각도로 보면 목숨은 내다버리는 것이라는 생각을 천명한 문구이다.
"포탄은 자동차 대신 소나 말에 싣고 가다가 포탄을 다쓰면 필요 없어진 소나 말을 먹으면 된다."
저 '식량'으로 쓰겠다는 코끼리와 소,말은 대개 점령지에서 조달한 것들인데... 먹이도 제대로 안주고 부려먹은 데다 원래 종자들이 장거리 이동을 잘 안하는 종들이라 먹은 소보다 지쳐서 객사한 소가 더 많았다고 한다. 일부는 강을 건너다가 떠내려 가기도 하고, 산맥을 넘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지기도 하고, 포격에 놀라 도망치기도 했다. 거기에 그 동물들이 죽는 바람에 물자와 식량이 동시에 날아가는 사태가 발생하여 실제로 무사히 도착한 개인 탄약의 양은 계획의 절반뿐이었다. 더욱이 수송 수단으로 쓸 가축들의 사료를 마련하는 방안에 대해서 질문을 받자 "초식 동물들이니 풀 뜯어먹으면 되잖나." 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정글에서 비행기를 어디에다가 쓰냐?" 영국군은 포위된 진지에 계속 항공 보급으로 각종 물자를 쏟아부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끔 운좋게(?) 일부가 일본군 쪽으로 떨어지면 일본군들은 처칠 급여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생명줄로 여겼다. 모자란다고 하소연하자... "일본인은 원래 초식동물이니 길가의 풀을 뜯어먹으며 전진하라" 이 작전이 얼마나 개차반인지 참모장인 다나카 대령이라는 장교가 미친 짓이라고 작전회의에서 렌야에게 하지 말아야 한다고 거듭 권했으나 개무시하고 밀어붙였다. 밀리터리 실패열전에 의하면 이 다나카 대령은 폭발하여 렌야 앞에서 쓰레기같은 놈이라고 욕을 하며 울분을 토했고 당연히 군직에서 해임당했다.
임팔의 중심에서 진격을 외치다임팔 작전은 버마(지금의 미얀마)에서 아라칸 산맥을 직접 넘어 인도의 북부인 아삼을 기습해 직접 압박한다는 계획이었는데, 작전 입안과 강행 자체가 자신의 체면 때문이었다고 주위에서 증언하고 있으며, 지형이고 적군상태고 다 생각하지 않은채 개인이 휴대할 수 있는 최대량의 물자만 감안해서 15일짜리 작전이라고 휘하 부대에 지시해놓고는 실제로 작전 기간이 3달이 넘어갔다. 그리고 이 작전을 승인한 도조 히데키도 다른 전장의 전황이 악화되어 정권을 유지하기 힘들게 되자 정권 유지를 위해 작전을 인가했다는 증언도 아직 남아 있다. 웃긴것은 작전 최종 인가를 한곳이 자기집 목욕탕. 이때문에 임팔작전을 결재한일을 가지고 "목욕탕 결재"라고도 한다. 영국군과 마주칠 때 병력의 절반 이상이 영양부족과 피로로 전투가 힘든 상태였지만, 그 이후로도 보급을 제대로 해주지 않았다. 임팔 작전에서 굶어 죽어가는 일본군들의 모습을 보고싶으면 '여명의 눈동자'에서 나왔던 살아있는 뱀 뜯어먹는 장면을 보면 된다. 그장면이 나오는 부분이 이 임팔 작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휘하 부대장이 계속 철수를 요구함에도, 부하들이 전장에서 무의미하게 죽어나가는 상황을 파악하고도 진격하라고 계속 독촉하고선 실제로 자신은 초조해했다. 실제로 작전실패가 확실한 상황에서도 상황을 파악하러 온 대본영의 장군 앞에서 체면 때문에 차마 후퇴하겠다고 말도 못하고, 후퇴하라고 말해줄 때까지 기다리다가 결국 말을 못했다는 엄청난 위대함을 자랑한다. 결국 전투는 참다가, 참다가, 참다가 부하들의 몰골을 보다 못한 휘하 31사단장 사토 고토쿠 중장이 독단으로 후퇴를 결정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참고로 이게 일본군 육군 항명 사건 1호다. 바로 이 사토 중장이 무타구치를 만나러 오자, 자결해 버리라며 단도를 남겨두고 정작 자신은 숨어버리는 추태를 보였으며, 그는 무타구치를 이 칼로 죽여버리겠다며 칼을 갖고 가버리기도 했다. 당시, 31사단장 사토 중장이 얼마나 열을 받았는지는 그가 무타구치의 15군 사령부에 보낸 전문에서 절절히 느낄 수 있다. "공격 계속 명령 접수했음. 그러나 명령만으로 병력이 움직일수 있다고 생각하는 귀하의 사고 방식이야말로 이 작전을 실패로 이끌어가는 중대요인이 되고 있음. 눈앞의 본 사단의 1만 장병은 아사 직전 상태에 놓여있음. 탄약은 고갈되어 맨손의 병력으로 화해버렸음. 사태가 여기까지 이른것은 모두가 귀 제15군에게 그 책임이 있음. 귀군은 이상 사실을 판단, 반성하여 본 작전을 즉시 중지함으로써 폐하의 적자들을 개죽음으로 이끄는 일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과감한 조치를 강구하기 바람." 쉽게 풀이하자면 이런 뜻이다. "지금 니새끼 때문에 이꼴 됐는데, 이짓 더하라고? 못해 배째!새끼야!"
게다가 이러한 류의 전문이 계속 날아오자 무타구치의 참모들이 사토 중장을 달래기 위해 찾아왔는데, 오히려 길길이 날뛰면서 규탄하는 바람에 찍소리도 못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게다가 독단적으로 철수하기로 마음먹고는 참모진과 부하들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을 정도로 열이 뻗혀있었다. "지금 우리 사단의 위에는 3개의 머저리 집단이 있다. 제15군과 버마방면군과 남방총군이다. 이런 머저리들 믿고 기다리다간 우리 사단이 전멸하고 말것이다. 이에 본 사단의 퇴각을 본관 책임하에 독단결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정작, 그 후에 사토 중장은 일본에 정신병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소환되어 입을 막기위해 연금된다. 평소의 일본군이라면 저런 경우에는 아무리 장군이라도 불명예 제대 및 군사재판, 심하면 할복인데 저렇게 약한 조치를 취한 이유는 군사재판이 열리면 고위층 여럿이 다칠 사안이였기 때문. 즉 다른 파벌이나 해군한테 꼬투리를 잡힐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 일본군 높으신 분들의 사토에 대한 평가는 '임팔 작전의 실패를 가져온 원흉'이었지만, 사토의 부하들의 평가는 당연히 정반대였다. 반대로 작전 책임자인 무타구치는 15군 총철수 이전에 '시찰'을 명목으로 먼저 도망간 사실이 드러났지만 겨우 예비역에 편입되는 경미한 징계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육군 예과 사관학교 교장으로 승진했다. 덤으로, 사토가 정신병에 걸렸다고 주장한 사람도 무타구치. 이러한 일련의 사태만 봐도 구 일본군이 얼마나 제정신이 아닌 집단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임팔 작전 관련 일화임팔 전선의 전황이 악화되던 당시, 자신은 전선 지휘부 옆에다 기생집을 차려놓고 무조건 오후5시 땡~ 하면업무마치고 기생집에 들어가서 술 마시며 노느라 나오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전황이 한참 악화되자전선지휘도 제대로 안하는 주제에 사령부 옆에다가 제단을 쌓아두고 신불에게 이기게 해달라고 비느라그나마 주간에 하던 업무처리조차 전부 뒤로 밀어버렸다."각하가 좋아하시는건 첫째가 훈장, 둘째가 메마(여자), 셋째가 기자"라는 노랠 만들어 불렀다.
임팔 작전으로 9만 2천명의 병사를 전투도 제대로 하지않고 1만 3천명으로 줄여버린 팀킬에 성공한 무타구치 렌야는 "아놔 책임감 느낀다. 콱 자결해 버릴까?"라는 상투적 발언을 내뱉었다. 그러나 수석부관이 "아무도 없는데서 하십시오. 누구도 방해하지 않을 겁니다. 이번 패전의 책임같으면 장군님이 할복하고도 남습니다."이라며 조용히 권총을 내밀자 째려보고는 살아갈 의지를 곧추세웠다. 게다가 겨우 살아돌아온 생존자들이 간신히 안전지대에 들어오자 장교 전원을 집결시켜 1시간 넘게 훈시를 하는 바람에 영양실조 상태에 있던 장교들이 쓰러져 기절하거나 심지어 사망한 사례조차 있었다. 아무리 영양실조 상태였다지만 일반 병사도 아니고 그래도 사정이 좀 나았을 장교들이. 그리고 이때 한 연설에서 그 "무기의 부족이 패배의 원인은 될수 없다."라는 병맛 발언을 했다. 15사단장도 31사단장과 비슷하게 작전 취소를 건의했다고 경질되었는데 새로 임명된 15사단장이 장교들의 군도를 검사하니 전부 녹이 슬어있다고 화를 냈다. 하지만 장교들이 살고 있던 곳은 항상 물이 차있는 참호였으니 녹이 안슬래야 안슬 수가 없었다. 보급품이 부족해 비가림도 못했다. 녹이 스는건 둘째치고 그 물바다 위에서 어떻게 살 수 있었는지 참...
전쟁 이후 영국군이 그래도 임팔을 친건 연합군의 의표를 찌른 좋은 발상이었으며 임팔 전선이 유지되었으면 연합군으로는 매우 고전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물론 당시 일본군이 임팔을 점령할 능력도 전선을 유지할 능력도 없었다는 것을 빼면이라고 말하며 조롱했다는 일화가 있다. 임팔 전선에 투입된 부대 중에는 남방 전선(남태평양 지역)에서 이동된 부대도 있었는데, 그 중에는 과달카날에서 굶어죽을 뻔한 부대도 있었다.과달카날과 임팔에서 모두 살아남는데 성공한 운좋은 병사는 "과달카날보다 더 끔찍하다!"라는 말까지 남겼다.
사단장일때에 다른사람에 의해 아삼지역 진공작전이 계획되었을 때엔 '무모'해 보인다고 반대를 했었다. 그런데 지역 사령관이 되자 임팔 작전을 적극적으로 밀어 붙이면서 "아삼이나 벵골에서 장렬히 죽고 싶다." 라고 노래를 했다. 이건 뭐 원균도 아니고. 무타구치는 죽을 때까지 임팔 작전이 공격은 최선의 방어라는 교훈을 얻은 것이라고 했다. 즉 44년이 임팔 작전이 없었다면 동남아 전선의 붕괴는 더 빨랐고 더 파멸적이었다는 말. 그러나 45년의 영인군의 버마 진공은 원래 계획에 없었다는 점 즉, 다시 말해 임팔에서 일본군이 말아먹은 몇개의 정예사단 때문에 진공 계획을 급히 세웠다 그리고 그러한 약체 일본군의 저항과 우기에 대한 우려로 버마 진공 역시 간신히 성공시켰다는 점에서 오히려 임팔 전투 때문에 동남아 전선의 붕괴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확하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에 임팔 전선에서 죽은 희생자 유족들이 위령제를 지낼때 그자리에 나타나서 <임팔 전선의 패배는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부하들이 잘못 싸운것>이라는 유인물을 나눠주려다가 물세례. 이후로 이 전선에 참여한 부하였던 사토 고토쿠나 미야자키 시게사부로 같은 옛 부하가 죽으면 장례식에 출몰하여 똑같은 짓을 저지르다가 유족들에게 욕설과 같이 멱살을 잡히고 바깥으로 내쫓겼던 적도 있었다. 심지어는 죽은 뒤 자기 장례식에서조차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 다른 놈들이 못나서 실패한...' 라는 유인물을 돌렸다고 한다.
연합군의 수호신일부에서는 임팔 작전이 남방전선의 전면적 붕괴를 막았던 제한된 공격전의 성공이라고 하는데 임팔 전역에 참가한 사단은 거의 80% 이상 전투불능이 되고 말았다. 그나마 20%가 살아남은 건 앞에서 나온 31사단장 사토의 독단 때문. 바꿔 말하자면 무타구치의 지시에 따른 부대는 전부다 전투불능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1945년 초반에 연합군 내부에서도 위험하다고 한 미얀마 진공 전격작전이 성공한 것은 원래대로라면 방어할 수 있었던 일본군 전력을 임팔에서 고스란히 날려먹었던 것도 주요한 원인이다. 오오. 영국군 승리의 공헌자! 전쟁 이후최종 계급은 육군 중장. 이 정도 되는 자가 이래서야 구 일본군이 미군쯤의 물자와 병력이 있어도 전쟁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전후 일본군의 여러 장성들이 전범 재판을 통해 사형 등에 처해졌으나, 이 인간은 임팔 작전에서 일본군을 재기 불능급의 다대한 피해를 끼치는 등 연합군의 승리에 크게 공헌했기 때문에 불기소 처분되어서 그대로 석방. 반대로 말하면 막말로 일본 정부가 전범 재판을 했으면 바로 사형당했을 장군이 바로 무타구치 렌야. 그리고 죽을 때까지 잘 먹고 잘 살았다. 임팔 작전으로 수만의 목숨을 내다 버렸는데 정작 본인은 아무 문제없이 잘먹고 잘살고 일본인들이 싫어할 만도 하다. 이 사람은 정말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대단한 인물이다.(대한민국 건국 훈장을 줘야할지도) 위키피디아에서는 명사들이 많이 묻힌 공동묘지인 타마레이엔(多磨霊園)에 묻혔다고 한다.(현충원이 적절할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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