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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크 첨탑에 재가 휘돌아 내린다. 며칠은 더 계속될 거다. 아니, 몇 주일지도 모른다.


그런 건 상관없다고, 레샤드는 생각했다. 연기와 재는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 학살은 얘기가 다르지만.


주위를 둘러싼 숲은 검게 그을린 채, 부러진 나무들과 불타버린 추방된 아라코아의 사체로 가득했다. 머리 위로,레샤드의 동족을 멸종시키려 했던 고위 아라코아의 본거지 하늘탑이 바위투성이 봉우리 위로 높이 솟아 있었다. 천연 암석으로 이루어진 탑이 발톱처럼 하늘의 아랫배를 할퀴었다. 가장 높은 봉우리에 놓인 거대한 황금 수정은 추방된 아라코아와 그들의 숲 속 고향에 죽음과 파괴를 쏟아 부은 고위 아라코아의 가공할 무기였다.


레샤드는 눈을 감으면 그 모든 것을 다시 경험할 수 있었다. 태양의 힘을 머금어 하얗게 타오르는 광선이 수정에서 뻗어나와 그의 세계를 모조리 불사르는 모습을. 나무가 쪼개지는 소리와 함께, 산 채로 불타오르는 추방된 아라코아의 비명이 여전히 생생했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 끝난 일이라며, 레샤드는 마음을 다스렸다.


꺾이지 않는 광신으로 고위 아라코아를 지배했던 계층, 소위 루크마르의 신봉자들은 혼란에 빠졌다. 놈들의 무기도 파괴되었다. 그들이 남긴 잿더미로부터 무언가 새로운 것이 움튼다. 느리지만 분명하게, 그렇게 움트고 있다.


레샤드는 두 눈으로 직접 보았다. 깨어난 자들의 의회라는 새로운 아라코아 사회는 수 세대 동안 자신들을 지배했던 증오와 경쟁을 벗어던지려 발버둥치고 있다. 불타버린 숲에서 예전의 적은 이제 친구가 되어 함께 걷는다. 한쪽에는 세드의 저주로 날개를 잃은 추방된 아라코아가, 또 다른 쪽에는 그들의 사촌이면서 한때 첨탑 아래 거주하는 모두를 열등한 존재로만 여겼던, 우아하고 강력한 날개 달린 고위 아라코아가 있다.


때가 되었다고, 레샤드는 생각했다. 늙은 뼈는 쉬이 피로해진다...


익숙한 까악 소리가 레샤드의 주의를 끌었다. 붉은 깃털의 잔영이 머리 위를 맴돌았다. 그를 따르는 칼리리 퍼시는 검은 발톱에 두루마리가 가득 든 가방을 꼭 움켜쥐고 있었다.


“아, 찾았구나!” 레샤드는 곱은 손으로 박수를 쳤다. 앞서 퍼시에게 자신이 감춰둔 두루마리 뭉치 중 하나를 가져오라고 했었다. 학자로서 모종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지난 몇 년 동안 숲 여기저기에 이렇게 기록을 숨겨두었던 것이다. “이리 가져오렴.”


퍼시는 가방을 레샤드 곁에 던졌고, 두루마리가 검댕투성이 바닥 위로 이리저리 쏟아졌다. “르아악!” 늙수그레한 추방된 아라코아는 성난 소리를 질렀다. “퍼시발! 조심해야지! 약한 물건인 거 알잖니!”


칼리리는 삐죽삐죽 솟은 나무 밑동에 앉아 삐익, 하고 대꾸했다.


“그래, 그래...” 레샤드는 한숨을 내쉬며, 황금색 테로 장식된 보라색 로브 위 천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각종 씨앗과 견과류를 한 주먹 꺼냈다. “상을 주려고 했단다...”


레샤드는 꺼낸 먹이를 발 주위에 뿌리고 손바닥을 로브에 문질러 닦았다. 퍼시가 나무 밑동에서 폴짝 내려와, 부리와 발톱을 정신없이 놀리며 씨앗을 마구 쪼아댔다.


“품위를 좀 지키렴. 이방인들이 주위에 있잖니.” 그렇게 꾸짖으며 레샤드는 떨어진 두루마리들을 뒤졌다. 그는 칼리리 알을 들어올리듯 애정이 가득한 손길로 두루마리를 주워들었다. 모두 날개 달린 자들과 추방된 자들로 아라코아 사회가 나뉘기 전의 역사를 담은 기록들이었다. “외경”, 즉 동족을 세뇌하고 조종하려던 루크마르의 신봉자들이 억압하고 감춘 역사의 기록이다.


레샤드는 두루마리가 손상된 곳은 없는지 하나하나 불에 비춰 본 후, 다시 조심스럽게 가방에 넣었다. 그러던 중 아라코아를 지배한 고대의 왕, 테로크에 대한 기록인 “몰락의 이전”을 보고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그는 손에 든 두루마리의 무게를 가만히 느껴 보았다.


이 작은 두루마리는 그저 잉크와 양피지로만 이루어졌을 뿐이지만, 고위 아라코아가 휘두른 그 가짜 태양에 견줄 만큼 강력했다.


“레샤드!” 추방된 아라코아 하나가 절뚝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잿빛 깃털은 마치 폭풍이 밀려드는 하늘과 같은 색이었다. 암녹색 깃털 위에 검푸른 가죽 튜닉을 걸친 고위 아라코아가 그 곁에 함께였다.


추방된 아라코아가 말을 이었다. “이스카르를 발견하지 못했네. 정찰병들이 찾고는 있지만, 돌아오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아.”


“아무렴 어때.” 그렇게 답하는 레샤드에게 서늘한 기운이 덮쳐왔다. 그림자현자 이스카르는 추방된 아라코아의 지도자였다. 그런 그가 사라졌다는 건 다소 불편한 일이다. 지난 몇 주 동안 그는 왠지 모두와 거리를 두며 자주 화를 냈고, 그래서 레샤드는 이스카르의 속내가 궁금하기도 했다. 개인사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스카르는 항상 권력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지금 그가 노리는 게 뭘까? 아라코아의 새로운 사회만으로는 부족한 건가?


“우려해야 할 일인가?” 고위 아라코아가 물었다.


“두고 봐야겠지.” 레샤드가 답했다. “앉지, 둘 다. 좀 쉬라고.”


고위 아라코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쓰러진 나무 위로 날아가 앉았다. 추방된 아라코아는 가까이에 있던 나무 밑동에 앉아 얼굴에 묻은 검댕을 닦아냈다.


레샤드는 두루마리를 펼쳤다. 바싹 마른 양피지는 그를 꼭 닮아서, 닳고 닳아 연약한 몸에 비밀을 잔뜩 담고 있었다. 그는 평생을 바쳐 이런 지식을 모았고, 이를 새로운 세대에게 가르쳤다. 과거의 편견과 어리석은 광신이 아니라 지혜를 추구하는 아라코아에게 전달했다.


지금도 바로 그런 일이 필요한 시간이었다.


“이스카르에 대해 뭘 알고 있나?” 그는 고위 아라코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추방된 자들을 이끈다는 것뿐이다.”


“그러면 자넨 신봉자의 지도자인 대현자 비릭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레샤드는 추방된 아라코아에게도 물었다.


다행히 이제는 “고 대현자”라고 불러야겠지만, 이란 말은 머리 속으로만 덧붙였다. 고위 아라코아가 무기를 발사해 추방된 아라코아들을 박멸하려 한 건 모두 그녀의 뜻이었다.


“그년이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이지... 흐리리릭!” 산산이 부서진 숲을 바라보는 추방된 아라코아의 날선 목소리는 거칠게 갈라졌다.


“그래.” 레샤드는 말을 이었다. “겉보기에는 둘이 많이 다르지. 자네 둘도 마찬가지지만. 하지만 예전엔 그 둘도 똑같았다네...”


***


신봉자 비릭스는 나무 홀을 칼날발톱 유충 둥지 위로 기울였다. 홀의 꼭대기에 달린 황금 수정이 따스한 힘으로 고동치며 작은 태양처럼 빛났다. 비릭스는 이 작은 물건에 그렇게 큰 힘이 담겨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깜짝 놀랐다.


이건 과거에 사라진 매우 진보한 아라코아 문명이 남긴 유물, 에펙시스를 사용하여 그녀가 직접 만든 장치였다. 에펙시스의 흔적은 하늘탑 주위의 땅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지만, 비릭스의 동족은 대개 에펙시스 유물을 그저 진귀한 장난감으로만 여겼다. 그녀는 에펙시스를 연구하여 얻을 수 있는 게 많다고 믿은 몇 안 되는 아라코아 중 하나였다.


언젠가는 그들도 내 생각을 이해하겠지.


수정의 빛은 점점 더 밝아지다가, 어느덧 황금빛 불의 광선이 되어 애벌레들을 덮쳤다. 꿈틀거리는 작은 유충들의 살갗이 녹아내리고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불쌍한 녀석들인데 그냥 빨리 처리해.” 신봉자 이스카르가 소리쳤다.


보라색 깃털을 지닌 이 아라코아는 근처를 서성이는 중이었다. 태양현자의 상징인 황금빛 팔찌와 검푸른 두건을 착용하고 있었다. 그는 여러 면에서 이상한 아라코아인 데다가, 등이 굽고 나이에 비해 체구가 작기도 했다. 현자 중에서 가장 현명하거나 가장 앞길이 창창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비릭스의 친구였다. 둘은 함께 알을 깨고 나온 둥지 오누이였다. 그녀에게는 이스카르의 다소 이상한 외모와 기이한 행동거지도 사랑스러웠다.


“괜히 감상적이 된 건 아니겠지?” 비릭스는 물었다.


“당연히 아니지. 그런데 이러다간 늦겠어.” 이스카르가 언짢은 투로 말했다. “장로들이 해 질 녘까지는 돌아오라고 했잖아.”


“벌레들도 없애라고 했잖아. 철저하게 없애라고.”


“그래도 이러다간 늦겠다니까. 애초에 그것 때문에 이런 꼴이 된 거잖아.”


비릭스는 털을 잔뜩 곤두세웠지만 이내 후회가 밀려왔다. 둘이 여기까지 나오게 된 건 이스카르의 잘못이 아니었다. 어제 여명의 의식에 늦은 건 그녀였지만, 규칙을 위반한 벌은 그녀 혼자 받는 게 아니었다. 수년 전, 장로들은 다른 어린 신봉자들과 마찬가지로 비릭스와 이스카르를 한 쌍으로 묶었다. 목적은 어느 정도 깃털이 자란 구성원들이 서로를 지켜보게 하여, 모두가 태양신 루크마르의 뜻에 따르게 하려는 것이었다. 둘 중 하나가 놀라운 위업을 달성하기라도 하면 둘 모두가 칭찬 세례를 받았다.


물론, 둘 중 하나가 규칙을 어기면 벌도 함께 받았다.


그래서 둘은 이렇게, 하늘탑 아래 먼지 구덩이 속에서 성가신 칼날발톱을 박멸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 멍청한 벌레들은 겁도 없이 아라코아의 영토에 들어와, 첨탑의 바위 사이에 악취를 풍기는 둥지를 짓기가 일쑤였다.


갈퀴발톱을 없애는 건 사소한 일이었고, 비릭스나 이스카르와 같은 태양현자에게는 더욱 그랬다. 평생을 바쳐 루크마르의 타오르는 힘을 직접 체득하려 훈련해 온 그들이었다. 그 힘을 불러내 적을 무찌를 무기로 휘두르려 노력해 온 그들이었다.


그런데도 비릭스는 마음 한 편으로 이 일을 즐겼다. 하늘탑을 떠나, 장로들의 감시하는 눈길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 그녀는 지금 자유로웠다. 그리고 이 느낌을 가능한 한 오랫동안 만끽하고 싶었다.


“이해할 거야.” 비릭스는 바위 첨탑 주위로 마치 파도처럼 오르내리는 푸른 언덕을 바라보며 말했다. 불타버린 갈퀴발톱 무리는 벌렁 뒤로 자빠져, 길고 가느다란 다리를 하늘로 뻗친 모습이었다. “우린 일을 제대로 처리했어. 그걸로 벌을 주진 않겠지.”


“물론 너한테는 그렇겠지...” 이스카르가 말했다.


비릭스가 부리를 열고 따지려는 찰나, 근처의 가시덤불에서 무언가 재빠른 것이 튀어나왔다. 또 다른 갈퀴발톱이었다. 커다랗고 얼룩덜룩한 잿빛 곤충은 땅 위를 빠르게 달려서, 앞쪽의 빽빽한 숲으로 이내 사라졌다.


“내버려 둬...” 이스카르가 애원했다.


하지만 비릭스는 이미 그 뒤를 쫓고 있었다. “둥지 오라비, 우린 명령을 받았잖아. 철저하게 없애라고.”


***


우린 이 일로 잔뜩 혼이 날 거야. 허둥지둥 비릭스 뒤를 쫓으며 이스카르는 생각했다. 아니, 내가 혼이 나겠지.


늘 그랬다. 장로들은 누가 잘못을 했든 둥지 누이보다 그를 더 엄하게 벌했다. 이유는 알 수 있었다. 비릭스는 출중했다. 루크마르의 힘을 손에 쥐는 훈련에서부터 과학을 이해하는 데 이르기까지, 비릭스에게는 모든 게 쉬웠다. 심지어는 외모도, 그 창백하고 붉은 눈과 연분홍빛 깃털은 아라코아 사회에서 무척 아름답다고 인식될 만했다. 그녀는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앞날을 향해 나아가는 모범적인 신봉자였다.


물론, 비릭스에게도 문제는 있었다. 지시를 잘 따르지 않고, 충동적이었으며, 고집이 셌다. 할 수만 있다면 언제든 규칙을 어기는 걸 즐겼는데, 그건 아마 그에 따르는 대가를 제대로 치른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스카르가 생각하기에는, 그녀의 재능 때문에 장로들은 늘 처벌의 강도를 낮췄다.


이스카르는 언제나 장로들의 마음에 들려고 노력했지만, 종종 어리석은 실수를 하곤 했다. 그는 비릭스처럼 완벽하지 않았다. 그런 재능을 타고난 그녀를 시기하고 미워할 법도 한데, 이스카르는 그러지 않았다. 다른 이들이 그를 멸시할 때 그녀는 항상 그의 곁을 지켰다. 언제나 그를 보호했다. 이스카르는 그저 비릭스가 자신의 모험과 말썽이 불러올 결과를 이해하는 날이 오기만을 바랐다.


오늘은 그런 날이 아닐 모양이었다.


이스카르는 몸을 휘감아 오는 한기에 푸드득 떨었다. 울창한 나무로 이루어진 숲의 지붕이 저무는 해의 마지막 빛을 완전히 가렸다. 그는 조심스레 거대한 뿌리를 타고 넘었고, 발톱이 축축한 진흙을 파고드는 걸 느꼈다.


나무와 돌로 이루어진 기이한 부적이 머리 위 가지에 매달려 흔들거렸다. 투박한 아라코아 형상이었다. 형상의 꼭 그러쥔 발톱에서는 향이 타오르며, 가느다란 연기를 숲 위로 피워 올렸다. 매캐한 향 때문에 이스카르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너무 멀리 왔다. 여긴 다른 자들의 땅이었다. 루크마르의 은총을 잃고 추락한 자들. 저주받고, 날개를 잃은 채 첨탑 아래의 흙더미에서 거주하는 생물들.


추방된 아라코아들.


이스카르는 루크마르에게 조용히 기도하며, 예복 아래에서 꿈흡입기를 꺼냈다. 그리고 중앙을 십자로 교차하는 가죽 끈이 달린 그 둥근 나무 부적을 두 손으로 꼭 쥐었다.


그 후에는 장로들에게서 배운 것과 같이 꿈흡입기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게 추방된 아라코아를 타락시킨 저주를 막아내는 그물 역할을 하며, 날개를 시들게 하는 효과로부터 이스카르를 지킬 것이다.


이스카르는 벌써부터 머리 속으로 하늘탑에 돌아가서 둥지 밖에 꿈흡입기를 어떻게 걸어 놓을지 생각하고 있었다. 내일 정오쯤이면, 이 끔찍한 장신구에 담긴 저주의 흔적을 루크마르의 빛이 모두 정화해 줄 것이다.


“장로의 안내 없이 여기까지 오는 건 금기야.” 이스카르는 비릭스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이제 포기하자.”


“조용히 해. 저거 봐.” 비릭스는 앞을 가리켰다.


이스카르는 숲 너머를 바라봤다. 보이는 건 나무와 그림자뿐이었다. “갈퀴발톱은 안 보이는데.”


“그딴 건 잊어버려. 더 재미있는 걸 찾았다니까. 저 앞이야.”


그제야 이스카르도 어떤 형체를 보았다. 아라코아였다.


이리저리 굽은 나무들 사이를 살금살금 걷고 있었다. 현란하게 붉은 깃털이 추레한 망토 아래로 언뜻 보였다. 걸음걸이와 체구로 보아 남성인 것 같다고, 이스카르는 생각했다. 그 수수께끼의 아라코아는 꼿꼿이 서서 걸었고, 그건 추방된 아라코아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이스카르의 동족이었다.


“의식이 곧 시작되는데 여기 이렇게 혼자 나와 있으면 안 될 텐데.” 비릭스가 말했다.


“그래... 우리도 참석해야 하는 의식이지만 말이야.”


오늘은 루크마르의 은총이 시작되는 날, 즉 태양이 가장 높이 뜨고 낮이 가장 길고 밝은 날이다. 신봉자들은 모두 의식에 참석하여 예를 올려야 했지만, 이스카르가 분명히 경고했음에도 비릭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의무를 내쳤다.


“저자가 뭘 하려는 건지 궁금하지 않아?” 비릭스가 물었다.


“별로. 계속 여기 있으면, 우리가 받을 벌도 점점 더 엄해질 거야.”


비릭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앞으로 달리다가 그대로 날아올랐고, 천정처럼 머리 위를 덮은 나뭇가지 사이로 향했다.


고집불통 같으니. 이스카르는 그 뒤를 따르며 생각했다. 어리석기도 하고.


둘은 가지와 가지 사이를 차례차례 옮겨 앉으며 이상한 아라코아를 쫓아 숲 깊숙이 들어갔다. 이스카르가 알기로, 이곳은 추방된 아라코아들이 장막의 아크라즈라고 부르는 곳이었다. 룬 문자가 새겨진 보라색 천으로 덮인 조악한 오두막이 어둑한 숲 여기저기에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유일한 조명은, 아니 조명이라고 부르기에는 다소 모자란 그 빛은 숲 전역에 제멋대로 흩어진 보라색 구체에서 드리우는 빛이 전부였다.


“제발...” 또 다른 굵은 가지에 내려앉으며, 이스카르는 비릭스의 어깨를 붙잡았다.


“멈춰 서는 것 같아.”


수수께끼의 아라코아는 추방된 자들의 오두막이 여럿 모여 있는 곳으로 사라졌다. 일종의 마을이다. 서늘한 두려움이 이스카르를 짓누르며, 공포에 불을 지폈다. 그는 짧고 날카롭게 숨을 몰아쉬면서, 이곳의 대기를 가득 채운 저주만은 들이키지 않기를 바랐다.


“지금 네가 하는 짓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봐.” 그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주가...”


“우린 뭔가 수상한 짓을 하려는 게 아냐. 루크마르께서 우릴 보호해 주실 거라고.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봐.”





두려움과 흥분이 뒤섞인 쾌감이 비릭스의 전신을 꿰뚫었다. 그녀는 추방된 아라코아의 추레한 거처 뒤에서 조용히 움직이는 중이었다. 앞서 했던 말은 진심이었다. 이것들 속에서 움직이는 것도 두렵지 않았다. 이 저주받은 곳에서도 루크마르의 빛이, 그 온기가, 저주로부터 그녀를 보호해 줄 테니까.


망토를 뒤집어쓴 아라코아는 썩어가는 나무 막대로 만든 듯한 커다란 오두막 앞에서 멈춰섰다. 입구에는 해진 밧줄에 묶은 작은 두루마리가 여럿 드리워 있었다. 그는 좌우를 살핀 후 안으로 들어섰다. 비릭스는 거주지 위로 뻗은 헐벗고 구부러진 가지에 앉았다.


오두막 위쪽 지붕은 보라색과 검푸른색 천을 넓게 잘라내 하나로 꿰맨 후 대충 덮어 놓은 모양새였다. 비릭스는 지저분한 천 두 장 사이로 그 아라코아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고 귀를 기울였다.


“까마귀가 해를 삼키면...” 변장한 아라코아가 말했다.


난데없이 연기가 피어나 이리저리 휘돌다가, 어느새 추방된 아라코아가 되었다.


흥미로운걸. 비릭스는 추방된 자들이 사용하는 어둠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두루마리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그곳에 나타난 자는 탁한 붉은색 깃털로 몸이 덮인 남성 아라코아였다. 손가락은 어딘가 죽은 동물의 모습을 닮아 잿빛으로 잔뜩 뒤틀린 모습이었다. 이제 막 알에서 깨어난 듯한 작은 붉은색 칼리리가 그의 어깨를 덮고 있는 보라색과 황금색 어깨걸이에 매달려 있었다.


“... 어둠이 드리운다.” 그 추방된 아라코아는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제대로 변장을 하는 방법을 배워 보지 않겠나?”


“시간이 없소, 레샤드. 두루마리는 어디 있소?”


“잠깐만 기다리게, 잠깐만 기다려...” 레샤드라 불린 자가 목소리를 낮췄다.


말소리를 들으려 비릭스는 조금씩 가지 끄트머리로 나섰다. 조금만 더... 조금만...


결국 가지가 그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부러졌고, 변장한 아라코아는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찰나의 순간, 비릭스와 그의 눈이 마주쳤다.


그는 오두막을 뛰쳐나가서 망토를 벗어 던지고 숲 꼭대기를 향해 날아올랐다.


비릭스는 투덜거리며 조심스러운 몸가짐을 모두 포기하고 공중으로, 마을 위로 솟구쳤다. 이리저리 얽힌 두툼한 나뭇가지들이 등과 날개를 마구 할퀴었다.


빽빽한 숲에 가려 시야가 좋지 않았다. 그녀는 가지에서 가시로 뛰어다녔고, 나뭇잎을 이리저리 헤쳤다. 부서진 잎 조각이 들어갈까 봐 눈도 거의 감은 채였다. 비릭스는 한데 뭉친 나뭇가지들을 뚫고 앞으로 나섰고, 그대로 우연히 그 아라코아의 등에 충돌했다. 둘은 땅으로 떨어져 나무 뿌리에 여기저기 부딪히며 진흙탕 속에서 미끄러져 내렸다.


그 남자는 빨랐다. 순식간에 다시 일어선 그는 한 손을 높이 쳐들었다. 그가 루크마르의 힘을 불러내자, 불씨가 마치 천둥매처럼 발톱 주위를 휘돌았다.


루크마르시여. 비릭스는 상대를 알아볼 수 있었다. 이키스잖아. 신봉자라고!


“놈들이 보내서 왔나?” 그 남자는 딱, 하고 부리를 닫으며 정수리의 깃털을 바짝 세워 꽤 무서운 얼굴로 물었다.


“전...” 비릭스는 말을 더듬었다. “누구요?”


상대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여기 왜 온 거지?”


“저도 똑같은 걸 묻고 싶은데요.” 비릭스는 허리띠에 묶어 둔 작은 뼈 단검을 향해 손을 미끄러뜨렸다. 두 눈은 상대 아라코아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선택 가능한 방안을 가늠해 보았다. 상대가 하늘탑의 적일까? 아니면 신봉자의 공무로 여기 파견된 걸까? 가능성은 높지 않겠지만, 후자도 충분히 있음직한 이야기였다. 그도 결국은 신봉자니까.


멀리서 여러 목소리와 함께 날개가 퍼덕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뭇가지들이 부스럭거리며 부러졌다.


“안 돼...” 이키스는 빙글 돌아서며 숲 위쪽을 바라봤다. “알아차렸어. 그들이 알아버렸어.”


그는 비릭스가 미처 단검을 꺼내기 전에 그녀의 태양현자 의복을 붙잡고 그대로 앞으로 달렸다. “테로크. 고대의 왕. 그건 모두... 거짓말이야. 그가 누구였는지, 그가 무얼 했는지, 또 저주가 무엇인지도.”


신봉자 중 가장 빼어난 전사인 칼날갈퀴 넷이 숲을 뒤덮은 나무를 뚫고 나타났다. 양손에 황금으로 세공한 반달 모양 날개창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모두 거짓말이야! 모두! 흐라아아아악!” 이키스의 말은 전사들이 날개창의 뭉툭한 면으로 그의 머리를 가격한 탓에 새된 비명으로 끝을 맺었다. 이키스는 무릎을 꿇고 헐떡였다.


두 번째 칼날갈퀴가 검은 가죽 두건을 이키스의 머리에 씌워 눈을 가렸고, 또 하나는 룬 문자가 새겨진 금속 고리를 포로의 부리에 끼워 입을 막았다. 마지막 칼날갈퀴는 이키스의 두 팔을 두꺼운 진홍빛 밧줄로 묶었다.


“비릭스!” 이스카르가 그녀의 곁에 내려섰다. “네가 마을에 들어가자마자 이들이 날 찾아냈어. 아무래도 한동안 저자를 뒤쫓았던 모양이야.”


“그런데 네 덕분에 모두 망칠 뻔했지.” 칼날갈퀴 하나가 위압적인 모습으로 비릭스 곁에 다가왔다. “여긴 너희가 있을 곳이 아니다.”


칼날갈퀴의 가슴을 지나 어깨 위로 솟아오른, 번쩍이는 구릿빛 방어구의 뾰족한 가장자리에 베지 않으려고 비릭스는 뒤로 물러나야 했다. “칼날발톱을 잡던 중이었어요...” 여린 목소리였다. 처음으로 공포가 그녀의 온몸을 가로질렀다.


“칼날발톱은 보이지 않는데.” 전사는 주위를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시선을 다른 칼날갈퀴들에게로 돌리고 비릭스를 가리켰다. “이 두 녀석도 데려가라. 저주받은 자들과 함께 있었으니까.”


***


루크마르의 꼬리에서 나는 철썩 소리가 이스카르의 머리를 울렸다. 채찍은 불타는 갈퀴처럼 그의 등을 할퀴며 깃털과 살을 태웠다. 눈앞이 하얘지는 뜨거운 고통이 머리 속에서 폭발했다.


그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외쳤다. 조용히 견디며 품위 있게 처벌을 받겠다는 다짐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어제도 같은 다짐을 하고 어겼었다. 그제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끝났다.”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렸다.


앞이 먹먹한 고통이 잦아들었다. 이스카르의 시야가 조금씩 회복되며, 방을 채운 희미한 빛을 받아들였다. 창이 하나도 없는 방에서는 천정에 매달린 태양 보주 하나만이 마치 작은 유리 태양처럼 빛을 뿌렸다. 이곳은 하늘탑의 대첨탑에서 무척 외진 장소 중 하나로, 보통 루크마르의 신봉자들이 사용하는 교육실, 의식의 방, 훈육의 방 등이 모인 곳이었다.


이스카르는 훈육의 방 단골 손님이었다.


두 칼날갈퀴가 이스카르를 빙글 돌려 훈육자를 마주보게 했다. 대현자 젤키르. 하늘탑의 지배자이자, 말 한마디로 법률을 바꾸고 생명과 죽음을 수여하는 아라코아가 태양현자 이스카르를 매서운 눈초리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루크마르의 살아 있는 목소리이기도 한 이 아라코아 앞에서 이스카르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 수밖에 없었다.


젤키르는 끝부분만 노란색인 암회색 깃털 위로 화려한 주황색 로브를 걸친 모습이었다. 그 천은 태양 보주의 빛을 받아 반짝였고, 미세하게 섬유와 함께 엮인 마법 때문에 마치 해 뜰 녘의 하늘처럼 아름다웠다. 대현자는 오른손에 루크마르의 꼬리를 들고 있었다. 섬세한 금줄이 홀 주위를 휘감고, 끝부분에는 길다란 불줄기 세 가닥이 달려 있었다.


“날 실망시켰구나, 신봉자 이스카르.”


제 잘못이 아닙니다! 이스카르는 소리치고 싶었다. 전 비릭스를 말렸다고요!


하지만 루크마르의 목소리에게 대들 수는 없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겁니다.” 이스카르가 대답했다. “약속드리겠습니다.”


“그 말이 벌써 몇 번째더라?” 젤키르는 한숨을 쉬었다.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이스카르는 부리가 바닥에 닿을 때까지 허리를 숙였다. “루크마르의 은총을 빌어, 더 노력하겠습니다.”


“계속 지켜보마.” 대현자는 말을 이었다.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다. 중요한 일이다.”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비릭스를 지켜봐라. 어디에 가는지, 누구와 이야기하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든 행동을 관찰해. 뭐든 이상한 점이 있으면 즉시 내게 보고해라.”


“이상한 점이요?”


“그 아이는 추방된 아라코아들과 어울렸다. 태양사제가 정화의 의식을 수행했으니 저주는 걱정할 필요가 없겠지만, 정신에 어떤 영향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이스카르에게는 어딘가 불편한 일이었다. 그 이단자 이키스가 비릭스를 어떻게 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이스카르는 그 바보가 무얼 하고 있던 건지도 몰랐지만, 그런 걸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 정보가 이스카르에게 중요한 것이라고 판단했다면, 대현자는 이미 그에게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네, 네...” 이스카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대현자님. 루크마르의 의지를 받들어,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그 후, 이스카르는 대첨탑의 여러 노대 중 하나로 나섰다. 바위 단상에 발이 닿을 때마다 고통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통에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절뚝거리며 걷는 그에게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신봉자들은 노대를 이리저리 거닐며, 모두 이키스가 붙잡힌 소식에 대해 열띤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이스카르는 그런 이야기를 무시하고 노대의 중앙에 거대하게 솟은 청동 해시계에 다가갔다. 그 장치의 둘레에 새겨진 표식은 하루의 여러 시간을 나타냈다. 그리고 해시계의 그림자가 이 표식 중 하나에 닿을 때면, 모든 신봉자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아라코아에게 빛을 나눠준 루크마르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이스카르는 기도문을 속으로 되뇌며, 훈육의 방에서 벌을 받는 동안 하지 못했던 감사의 인사를 벌충했다. 기도를 마친 그는 노대의 가장자리로 다가가 황금 도금 난간에 몸을 기댔다.


강한 바람이 노대 위로 몰아쳐 그의 두건을 잡아챘다. 그리고 노대에 드리운, 수 놓인 깃발을 미친 듯 흔들어댔다.


진홍빛 칼리리가 까악, 하는 소리와 함께 난간에 앉았다. 이스카르는 새의 깃털을 쓰다듬으며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긴장을 풀려고, 지난 며칠 동안의 일을 이해해 보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아래쪽에는 사방으로 초록색과 붉은색, 노란색 숲이 펼쳐졌고, 그 흐름을 깨뜨리는 건 높이 솟아오른 하늘탑의 바위 발톱뿐이었다. 이스카르가 선 곳 위아래로 아라코아들이 하늘을 이리저리 날았다. 그들 중에는 어린 신봉자도 여러 쌍 있었다.


이스카르는 그들 중 자신과 같은 명령을 받은 이가 또 있을지 궁금했다. 둥지 오누이를 것 자체는 신봉자로서의 삶에서 정상적인 부분이었다. 그게 루크마르의 신봉자들을 짝짓는 목적이었다. 이들은 서로가 무기력해 하거나, 행동이 느려지거나, 장로들의 지시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과 같은, 저주의 전형적인 증상을 보이지 않는지 살폈다. 그게 질병의 첫 번째 징후였고, 그와 같은 가르침은 아라코아가 알에서 깨어난 순간부터 몸에 각인되었다.


하지만 둥지 누이의 모든 행동을 감시하고 보고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건 비릭스를 배신하는 걸까? 보호하는 걸까?


***


모두... 거짓말이야...


그 목소리는 지난 사흘 내내 비릭스의 머리 속을 헤집어 놓았다. 그동안 그녀는 둥지에 갇혀 독방 신세를 져야 했다. 그게 대현자가 내린 처벌이었다. 매일 태양사제가 찾아와 그녀에게 남은 저주의 흔적을 씻어내는 정화의 의식을 치렀다.


그 과정 내내 비릭스는 이키스에 대해 생각했다. 이단자에 대한 동정심은 없었다. 태양사제는 이키스가 추방된 아라코아와 함께 신봉자들을 해코지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했다. 며칠 내로 추방당할 테고, 날개 역시 잘릴 것이다. 그런 처벌을 받아야 마땅하다고도 말했다.


하지만 이키스처럼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신봉자들에게도 존경을 받던 이가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그가 찾던 두루마리는 뭘까? 그게 그렇게 위험한 이유는 뭐지?


그런 수수께끼가 머리 속을 갉아대며 도무지 떠나지 않았다. 답을 찾아내기 전에는 마음이 편하지 않을 듯했다.


그래서 독방 처분에서 벗어나던 날, 그녀는 먼지투성이 고서로 둘러싸인 하늘탑의 대도서관 가장 깊은 곳을 찾아갔다.


비릭스는 혼자서 차지한 벽감의 책상 위에 쌓인 수많은 책들에서 몸을 일으켜, 두 눈을 비비며 의자에 기대 앉았다. 대도서관의 바위 벽을 파내어 만든 벽감이었다. 밖에는 고서와 두루마리로 가득 찬 눈물방울 모양 둥지 수백 개가 온 벽을 가득 채웠다. 칼리리가 여러 둥지와 둥지 사이를 오가며 방문객에게 책을 가져다 주고, 책상 위에 남은 책들을 회수했다.


그녀는 한동안 잘 훈련된 새들을 지켜보며 자신이 읽은 모든 것에 대해 생각했다. 뭔가 있었다. 옳지 않은 뭔가 있었다.


비릭스는 다시 고개를 숙여 “고대 국왕의 역사”에서 찾은 문단을 다시 읽었다. 한때 하늘탑을 지배했던 전설 속 아라코아 황제 테로크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 고서는 그의 수많은 범죄와 타락한 행위에 대해 기술하고 있었다. 테로크 치하의 하늘탑은 고통과 독재의 시대로 그려졌다. 용감한 루크마르의 신봉자들이 테로크에 맞서 봉기한 후에야 이 비극적인 시기도 끝이 났다. 그들은 국왕을 폐위시키고 하늘탑에서 추방하며 모든 아라코아를 압제에서 해방시켰다. 루크마르는 테로크에게 등을 돌렸다. 그렇게 그는 추방된 아라코아가 되어 저주를 받았고, 생기를 잃은 채 미치고 말았다.


비릭스가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이미 수없이 들었던 이야기였으니까. 이상한 건 이 일에 대해 그녀가 읽어본 모든 기록이 동일하게 표현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역사론”, “테로크의 폭정”, “루크마르의 구원”까지, 이들 문서는 각각 수십 년에서 수백 년까지 시차를 두고 기록되었다.


그런데 테로크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동일했다.


비릭스는 도서관에 앉아 같은 두루마리와 책을 읽는 이키스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애초에 무엇이 그를 여기로 이끌었을까?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그 뒤에 어디로 갔을까?


역사의 기록이 모두 동일하다는 건 분명 이상한 일이었지만, 새로운 정보를 가르쳐 주지는 못했다. 답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했다. 대도서관은 모든 아라코아에게 공개된 장소였지만, 하늘탑에는 다른 기록 보관소도 존재했다. 루크마르의 신봉자들만 열람할 수 있는 희귀한 고서로 가득한 곳이었다.


비릭스는 생각에 잠겨 발톱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신봉자의 옛 기록을 살피는 건 이곳을 찾아오는 것에 비해 훨씬 어려운 작업이었다. 그 신성한 장소를 지키는 태양기록가들이 그녀가 왜 갑자기 테로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물을 것이다. 그랬다간 다른 장로들도 의혹을 품게 될지 모른다.


쉽지 않은 일이겠는데. 짜릿한 흥분이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비릭스는 벽감의 입구에 걸린 작은 바구니에 두루마리와 고서들을 담았다. 나중에 칼리리가 날아와 원래 장소에 돌려 놓을 것이다.


벽감에서 뛰어나와 대도서관의 입구를 향해 날아오르면서, 그녀는 이스카르에 대해 생각했다. 이 수수께끼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한참 동안이나 잊고 있었다.


태양사제가 이스카르의 처벌에 대해 이야기해 주긴 했었다. 사흘 동안 독방 신세를 지며 루크마리의 꼬리로 채찍질을 당해야 한다고 말이다. 모든 건 그녀의 잘못임을, 자신이 받는 벌은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님을 비릭스도 잘 알았다. 앞으로 조사를 하는 동안에는 둥지 오라비를 끌어들이지 않겠다고, 그녀는 다짐했다.


이스카르에게는 나중에 찾아가도 된다. 지금은 답을 찾아야 한다.





도서관 벽감의 그림자 속에서 이스카르는 비릭스가 날아가는 모습을 바라봤다. 그녀가 독방에서 나온 후로 내내 그 뒤를 쫓다가 여기까지 왔었다. 대현자가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금지한 건 아니었지만, 이스카르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자신의 임무에 대해 비밀을 지킬 자신이 없었다.


그녀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어떤 작은 목소리가 대현자에게서 받은 명령에 대해 그녀에게 이야기하라고 자꾸 머리 속에서 속삭였다. 하지만 그보다 큰 다른 목소리는, 그에게 명령에 따르라고 지시했다.


그는 그 지시를 따랐다.


비릭스가 대도서관을 떠나는 걸 확인한 후, 이스카르는 벽감에서 빠져나와 도서관 아래쪽으로 빙글빙글 돌며 내려갔다. 그리고 가장 낮은 층에서 비릭스가 그렇게 오랜 시간을 보낸 벽감을 찾아갔다.


독서실은 대부분 열려 있었다. 그런데 비릭스는 왜 가장 아래에 있는 곳을 선택했을까? 왜 이렇게 외따로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으려 했을까?


이스카르보다 먼저 한 칼리리가 그 벽감에 도착해서는, 바깥에 걸린 바구니 안으로 부리를 이리저리 찔러 넣었다. 그는 칼리리를 쫓아 버리고 직접 두루마리와 고서들을 꺼냈다. 그리고 책상 위에 차례로 늘어 놓으며 제목을 하나하나 읽었다.


이상하군. 모두 신봉자들이 하늘탑의 권력을 차지했던 시기에 대한 기록이었다. 문제는 사라진 에펙시스 문명에 대한 것을 제외하면, 비릭스는 역사를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런 책은 이스카르가 전문이었다. 학문을 추구하는 건 그가 일평생 빼어난 소질을 보인 몇 안 되는 분야 중 하나였다.


낮고 불안한 지저귐 소리가 이스카르의 목에서 흘러나왔다. 그는 가장 큰 고서인 “고대 국왕의 역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책을 펴지 않고 책의 모든 면을 살폈다. 책등이 구부러진 모양새를 보면 비릭스가 어느 부분을 가장 오래 읽었는지 알 수 있었다. 예전에 한 나이 많은 신봉자가 알려준 기법으로, 제자들이 숙제로 받은 부분을 제대로 공부하고 있는지 확인할 때 장로들이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이스카르는 비릭스가 읽은 부분을 펼쳤다. 이름 하나가 두드러졌다.


테로크.


***


이후 며칠 동안, 이스카르는 비릭스의 그림자가 되었다. 그 뒤를 따르며 행동 하나하나를 관찰했다. 그녀는 그 뒤로 대도서관에 돌아가지 않았지만, 둥지 안에서 홀로 오랜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 시간 동안에는 이스카르도 수상쩍어 보일까 봐 그녀를 감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비릭스가 무엇을 하는지는 알 만했다. 그녀가 조사한 바에 대해 아주 잘 알지는 못해도, 옛 국왕 테로크와 그의 추방에 얽힌 이야기를 알아보고 있음은 자명했다.


그것만으로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라코아는 새끼 시절부터 테로크에 대해 배우니까. 하지만 지금 그녀가 은밀하고 비밀스럽게 조사를 하는 모습은 분명히 이상했다. 비릭스는 가능한 한 다른 아라코아와의 접촉을 피했고, 오직 밤 늦은 시간에만 밖으로 나섰다.


그건 저주의 증상이 아니었던가? 이스카르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루크마르는 비릭스를 사랑했다. 그녀는 축복을 받았다. 비릭스처럼 빼어난 재능을 지닌 이들은 태양 신의 보호를 받지 않을까?


대현자와 만나러 대첨탑 최고층으로 날아 오르는 이스카르의 마음 속에 이 의문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전날 밤을 꼬박 새우며, 젤키르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고민하던 그였다.


진실 외에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이스카르는 첨탑의 가장 높은 노대에서 대현자를 찾았다. 색유리로 거대한 깃털 모양의 장식을 박아 넣은 노대였다. 그 위로 첨탑의 바위 표면에서 뻗은 긴 나무 기둥에 화려한 깃발과 환하게 빛나는 태양 보주가 매달려 있었다.


화려한 장식은 무척이나 아름다웠지만, 이스카르는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그의 시선은 오직 한 가지에만 쏠렸다. 검은 천이 드리운 강철 우리가, 노대 바로 위쪽으로 나무 장대에 매달려 있었다.


이키스가 갇힌 우리였다. 붙잡힌 이래 그는 내내 거기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혼자 어둠 속에서 추방당할 날을 기다릴 것이다. 장로 태양현자가 우리를 덮은 검은 천에 모든 열기와 빛을 차단하는 마법을 건 것이다. 그렇게 높은 곳, 그렇게나 루크마르의 품에 가까운 곳에서 아무 은총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이 처벌의 일부였다.


그렇게 태양을 차단당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이스카르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우리 안에 갇힌 아라코아는 미치고 만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그런 자들은 자기 깃털을 마구 뽑아낸다고 했다.


잠시 동안 그는 비릭스가 저주의 징후를 보였다는 이유로 우리 안에 갇힌 모습을 상상했다. 끔찍한 외로움에 가슴이 아파왔다.


“신봉자 이스카르.” 대현자 젤키르가 말했다.


이스카르는 억지로 우리에서 눈을 돌렸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일어나라.” 대현자는 다가오라는 손짓을 했다. “무엇을 알아냈나?”


“지금껏 비릭스를 지켜봤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는 달라졌습니다.”


대현자는 놀란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굳은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비릭스는... 저...” 이스카르는 주저했다.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더 충실히 법규를 따릅니다.”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그의 정신과 몸을 차지하기라도 한 것처럼 거짓말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충격과 두려움에 당황하면서도, 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내내 루크마르께 기도문을 낭독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제 두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확실한가?” 젤키르는 이스카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다른 때였다면 그 시선은 이스카르를 짓눌러 용서를 빌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늘 그의 생각을 지배해 온 자기 혐오와 수치로부터 뭔가 낯설고 짜릿한 것이 떠올랐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그는 강한 힘을 느꼈다. 대현자가, 세상 가장 강력한 아라코아가 그를 믿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그저 조롱의 대상이었던, 수많은 장로들이 무시해 버리기 일쑤였던 이스카르가 루크마르의 목소리를 좌지우지했다.


“확실합니다.” 이스카르의 목소리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대현자는 돌아서며 칼리리를 쫓아버리기라도 하듯 그에게 손짓했다. “계속해서 지켜봐라.”


노대에서 멀어지자, 이스카르의 힘도 사라졌다. 공포의 파도가 그를 덮쳤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루크마르여 용서하소서...


그는 대첨탑 아래쪽의 작은 노대에 앉아 숨을 돌렸다. 내장이 온통 뒤틀리는 듯했다. 잠깐 동안 아침 식사를 모두 게워내는 건 아닌가 걱정스러웠다.


옳은 일이었어, 하고 그는 생각했다.


거짓말을 주워담을 수는 없었지만, 비릭스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줄 수는 있었다. 지금 그 무모한 발길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녀를 구할 수만 있다면, 절대로 헛된 일이 아니다.


***


풍경의 부드러운 노래가 하늘탑 전역으로 퍼졌다. 비릭스는 둥지 안에서 그 소리를 들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단자가 내일 동 틀 무렵 추방될 것이다.


비릭스는 벌써 처분이 내려진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고, 그간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 아무리 조사를 해도 뭔가 실질적인 결론엔 도달할 수는 없었다. 신봉자의 옛 기록을 능력이 닿는 데까지 조사해 봤지만, 찾아낸 거라곤 테로크에 대한 사라진 기록에 대한 언급 뿐이었다. 그런 기록은 이미 신봉자들이 불분명한 “외경”으로 분류했고, 이들이 하늘탑 어디에 존재하긴 하는지조차 비릭스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작은 둥지 안을 이리저리 거닐며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했다. 둥지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천장에 매달린 고치 모양 보금자리에서 홑이불이 잔뜩 비어져 나오고, 펼쳐진 고서와 문서 조각들이 바닥에 온통 흩어져 있었다. 책상에는 부서진 에펙시스 유물과 각종 도구, 깃펜, 반쯤 먹다 남은 썩어가는 음식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어디에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렇게 막다른 길에 도달했다는 사실에 분노하기만 했다. 그럴수록 수수께끼는 그녀를 더 강하게 사로잡을 뿐이었다. 다른 무엇도, 그 무엇도 지금은 중요하지 않았다.


“비릭스!” 둥지의 문 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입구 양쪽에 있는 불투명한 유리창을 통해, 바깥쪽 벽감에 이스카르가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비릭스는 둥지 오라비를 피했던 지난 며칠 간의 행동이 미안해서, 그를 불러들였다.


“이스카르.” 그녀는 자신이 왜 그렇게 오랫동안 혼자 지내야 했는지 설명하려고 악의 없는 거짓말을 몇 가지 떠올렸다. “그간 널 만나러 가지 못해서 미안해. 태양사제가...”


“크리이이익! 거짓말하지 마!” 이스카르가 말을 자르며 비릭스의 둥지로 거칠게 들이닥쳤다. “네가 지금껏 뭘 했는지 알고 있으니까.”


비릭스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물을 수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알았냐고? 대현자님이 알아내라고 시켰어. 널 감시하라고. 대현자님은 지금...”


“날 감시하라고?” 비릭스의 목소리에 독기가 서렸다. “그런데 내게 말도 안 했어?”


“듣기나 했겠어?” 이스카르는 가까이 다가오며 목소리를 낮췄다. “대현자님은 네가 저주에 걸린 건 아닌지 걱정하고 계셔.”


“저주라고?” 비릭스는 짹짹대며 웃었다. “농담이겠지.”


“나도 그 얘기를 믿지 않았어. 그래서 네가 테로크에 대해 조사하는 걸 비밀로 한 거야. 나는...” 이스카르는 비릭스를 외면했다. 그리고 지친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난 대현자님께 거짓말을 했어.”


그 점은 놀라웠다. 이스카르가 그렇게 무모한 짓을 할 용기가 있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좋지 않아.” 이스카르는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말했다. “어째서 테로크에 대해 조사하고 있는지 말해 줘.”


비릭스는 잠시 생각한 끝에, 이스카르는 진실을 알 자격이 있다고 판단했다. 비릭스는 장막의 아크라즈에서 이키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가 추방된 아라코아를 만나고 붙잡히기 전에 어떤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겼는지 모두 설명했다. 그리고 테로크의 몰락에 대한 기록이 전부 무척이나 유사하다는 사실도 이야기했다.


“역사가 전부 똑같다는 게 이상하지 않아?” 이야기를 마친 비릭스가 물었다.


“글쎄?” 이스카르는 책상 주위를 빙빙 돌았다. 그리고 썩은 음식 냄새를 맡고는 몸을 움찔하며 떨었다. “사건의 전말이 명백하다면, 역사가들이 모두 정확하게 기록했을 수도 있잖아.”


“이건 정확한 것과는 달라. 마치...” 비릭스는 말을 마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는 바를 어떻게 말해야 할지 확신할 수 없었다.


“마치 뭔데?” 이스카르가 물었다.


“조작된 것 같아.”


이스카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철저히 기록을 남겼다는 증거일 뿐이야. 네가 찾고 있는 게 정확히 뭔데?”


“나도 모르겠어. 어쩌면 이키스가 찾던 두루마리에... 답이 있을지도 몰라.”


이스카르가 발톱으로 머리 위 깃털을 마구 헝클어트렸다. “대체 왜 그 이단자의 말을 믿는 건데? 그자는 널 속이려 했어. 네 마음속에 의혹의 씨앗을 심은 거라고.” 그는 두 팔을 활짝 펴고 더러운 방을 가리켰다. “넌 쓸데없는 집착을 하고 있어. 미쳤다고. 정신 차리고 내일 추방의 의식에 참석할 준비나 해.”


“하이이익... 네 잔소리 따위는 필요 없어.” 성가시다는 마음이 잠깐 비릭스를 사로잡았고, 의도한 것보다 훨씬 거친 말이 튀어 나왔다. 이런 이야기는 이제 지긋지긋하기만 했다. 시간 낭비였다. 이럴 시간에 조사를 더 해야 한다.


이스카르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적어도 한 번쯤은, 네 행동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거야. 남들한테 어떤 영향을 주는지도 생각해 보고.”


화가 치밀어 올라서, 비릭스는 날카롭고 새된 소리로 말했다. “날 위해 거짓말을 해달라고 한 적은 없어.”


“난...” 이스카르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두 눈에 상처가 가득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서서 그대로 방을 빠져나갔다.


“이스카르...” 비릭스는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이미 사라진 후였다.


창가로 다가간 그녀는 공중을 맴도는 붉은 칼리리 십여 마리 너머로 그가 날아가는 모습을 바라봤다. 고마워해야 한다는 사실은 잘 알았다. 아니, 고마워하고 있었다. 자신을 위해 큰 위험을 무릅썼으니까.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터무니없이 희박하긴 해도, 답을 찾을 기회는 아직 남아 있었다.





동이 트기 전, 루크마르의 신봉자는 거의 모두 장엄한 추방을 목격하러 대첨탑 의식의 방에 모였다. 전통에 따라, 장로 신봉자들은 실제 의식이 치러질 장소인, 바위와 수정으로 이루어진 단상 가장자리를 따라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똑바로 줄지어 선 채 앞쪽에서 이단자의 손목에 묶인 사슬을 붙잡고 선 한 쌍의 칼날갈퀴를 바라봤다. 태양 보주가 장식된 초승달 모양 홀을 든 모습의 거대한 아라코아 석상 두 개가 저주받은 자를 내려다보았다.


나머지 신봉자들은 단상 위쪽의 바위를 따라 줄지어 앉았다. 이들은 직무에 따라 무리를 이루었다. 이스카르는 의식이 이루어지는 단 동쪽에 앉은 태양현자 무리의 일부였고, 그 오른쪽으로는 태양기록가들이, 왼쪽으로는 투사인 칼날갈퀴들이 모여 앉았다.


의식에 늦은 이들은 눈에 띄지 않기만을 바라며 슬며시 나타났다. 항상 그런 이들이 있었다. 의식이 끝난 후에는 모두 루크마르의 꼬리가 선사하는 불의 손길을 맛보게 될 것이다.


이스카르는 군중 틈에서 비릭스의 모습을 찾았지만 그녀는 눈에 띄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화가 나 있었고 그녀의 이기적인 태도에 분개한 상태였지만, 걱정하는 마음만은 전과 다르지 않았다. 추방 의식에 빠질 만큼 어리석단 말인가? 그녀의 집착이 그렇게까지 극단적일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리고 여기 오기 전에 비릭스를 확인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대현자 젤키르가 나타나자 신봉자들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는 은색 띠가 어깨 주위를 둥글게 감싼 날카로운 갑옷과 함께 화려한 예복을 갖춰 입은 모습이었다. 머리 위에는 길게 뻗은 발톱처럼 비죽비죽한 금속 관을 쓰고 있었다.


젤키르는 루크마르의 갈퀴발톱을 오른손에 쥔 채로 성큼성큼 걸었다. 황금색 띠를 두른 길쭉한 지팡이 자루는 맑은 하늘과 같은 색의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창날은 둥근 돌 칼날이었다. 그건 고대로부터 내려온 신성한 유물로, 루크마르의 깃털과 갈퀴발톱으로 만든 것이라고 전해졌다.


대현자는 이단자 앞에 멈춰 섰다. 두건을 뒤집어쓴 이키스는 마지막으로 이스카르가 보았던 때보다 많이 말라 보였다. 몸의 깃털이 군데군데 빠져 있는 모습은, 마치 자기 손으로 직접 잡아 뽑은 것만 같았다. 한때는 화사했던 붉은 깃털도 어느새 탁한 진홍빛으로 바래 버렸다.


“보라!” 대현자는 두 팔을 들어올렸다.


바깥에서 태양이 막 떠오르기 시작했다. 햇빛은 대첨탑 꼭대기를 장식한, 노르스름한 수정을 통과하며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황금색 빛줄기가 이 방의 잘 연마된 청동과 황동 표면을 비추며 아른거렸다. 머지않아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루크마르의 빛을 받아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여명이 밝았다.” 대현자는 말을 이었다. “루크마르가 약속한 바와 같이 다시 돌아왔다. 그 빛을 하늘을 밝히고 우리를 어둠으로부터 지켜 주리라. 그 보답으로 루크마르가 요구하는 것은, 지금까지 요구한 유일한 것은, 우리가 그 의지를 포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 루크마르에 등을 돌린 자가 서 있다. 한때 너희 중 일부의 친구였던 자다. 스승이었던 자, 신봉자 중 하나였던 자다. 그의 이름은 이키스이고, 지금 추방된 아라코아의 저주를 품고 있다.”


나지막이 지저귀는 소리가 신봉자들 사이에서 퍼져 나왔다. 이스카르는 다시 군중 속에서 비릭스를 찾았다.


어디 있는 거야?


대현자는 목소리를 높여 신봉자들을 침묵시켰다. “이 일을 교훈 삼아 항상 경계하는 마음을 잃지 않도록. 저주는 가장 위대한 자들에게도 그 발톱을 박아 넣는다. 한때 그렇게 유망한 미래를 품었던 이키스는 추방된 아라코아와 손을 잡고 우리에게서 루크마르의 선물을 앗아가려는, 그 길에 오직 어둠과 절망만을 남기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렇다면… 과연 루크마르의 빛 앞에서 두 눈을 감아버린 그에게 날개가 필요한 것일까? 영예로운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보다 지상의 패거리와 함께 진흙탕을 거니는 쪽을 택했다면, 날개를 지니고 있을 필요가 있을까?”


대현자는 이단자에게 다가가며 가까이에 선 칼날갈퀴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들은 뒤로 물러나며 이키스를 묶은 사슬을 단단히 잡아당겨, 그가 손바닥을 위로 한 채 양 팔을 벌린 모습이 되게 했다. 이키스의 진홍빛 날개가 팔 아래에서 활짝 펼쳐지자, 깃털이 거의 땅에 닿을 만큼 내려왔다.


“이제 소중하고 자애로운 신의 자식이 아닌 이자에게 날개는 필요 없다.” 대현자 젤키르는 루크마르의 갈퀴발톱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무기의 둥근 창날을 이교도의 겨드랑이 부근으로 가져갔다. 다시 천천히, 젤키르는 루크마르의 갈퀴발톱을 이키스의 팔 아래쪽을 따라 움직여, 날개의 안쪽 면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숙달된 단 한 번의 움직임으로, 이키스의 팔을 따라 창날을 움직였다. 루크마르의 갈퀴발톱은 깃털과 피부, 뼈를 한꺼번에 갈랐다. 피가 바닥으로 쏟아져 내려 섬세한 수정과 바위 표면에 웅덩이를 이루었다. 이단자의 날개는 바닥으로 털썩 떨어졌다.


그의 부리를 고정한 금속 고리 사이에서 새어 나오는 숨죽인 비명 소리는 이스카르에게도 똑똑히 들렸다.


대현자의 시선은 신봉자들 위를 떠돌다가 한 순간 이스카르에게서 멈췄다.


“이게 루크마르에게 등을 돌린 자를 기다리는 운명이다.”


젤키르는 그렇게 말하고는 이교도의 나머지 날개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


장막의 아크라즈.


비릭스는 마을을 둘러싼 숲을 조심스럽게 통과했다. 몸에 두른 두꺼운 회색 로브는 하늘탑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은밀히 움직이기 위해 꼭 필요했다. 미행은 당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녀 생각엔 그랬다. 하지만 위험은 가능한 한 피할 생각이었다.


추방의 의식이 이루어지는 동안 장막의 아크라즈를 찾아오기로 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지금 이 순간 대현자는 이키스의 날개를 자르고 있었다. 곧 칼날갈퀴들이 그를 하늘탑에서 내보내고 지상으로 내칠 것이다. 다른 추방된 아라코아와 함께 살 수 있도록. 신봉자들은 대첨탑에 남아 밤중까지 루크마르의 위대함을 기릴 것이다.


숲을 지나는 동안 비릭스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주위를 거니는 추방된 아라코아들을 피하며 어둠 속에서만 걸었다. 처음 이 마을에 왔을 때보다는 추방된 아라코아들이 더 많이 눈에 띄었다. 그 당시에는 오직 이키스의 뒤를 쫓는 데만 집중했을 뿐, 그 밖의 것은 대부분 무시했었다.


이번에는 주위를 샅샅이 살폈다. 곰팡내와 썩은 내가 마을을 가득 채웠다. 저주 때문에 몸이 변형된 추방된 아라코아들은 절뚝거리며 주위를 거닐었다. 이들은 모든 면에서 어딘가 비뚤어져 있었다. 불결했다. 그들이 생활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나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처음 이키스를 쫓아갔던 오두막을 발견했다. 입구에 작은 두루마리들이 매달려 있는 집이었다. 추방된 아라코아의 기척은 없는지 살폈다. 눈에 띄는 자가 없는 걸 확인한 비릭스는 허물어져 가는 오두막 안으로 들어섰다.


아무도 없었다. 곰팡이투성이 고서와 두루마리가 가득한 눈물방울 모양 바구니가 나무 서까래에 매달린 채 흔들거렸다.


“아무도 없나?” 비릭스가 말했다.


아무도 없었다.


이키스가 뭐라고 했더라? 까마귀가 하늘을… 까마귀가 해를…


“까마귀가 해를 삼키면…” 그녀는 텅 빈 오두막을 향해 속삭였다.


짙은 연기가 피어올라, 추방된 아라코아의 모습을 이루었다. 그 그림자 같은 형체는 서서히 선명해지더니 어느덧 실체를 갖추었다. 그녀의 눈 앞에 레샤드가 나타났다. 작은 붉은색 칼리리가 그 어깨 위에 앉아 있었다.


“… 어둠이 드리운다.” 레샤드가 말을 받았다. “넌 누구지?”


“내 동족 하나가 여기 두루마리를 받으러 왔었다. 오늘은 내가 대신 왔다.” 비릭스는 그 불쾌한 아라코아에게 다가서며 두건을 벗고 머리의 깃털을 잔뜩 세웠다. 상대를 겁주려는 속셈이었다. “두루마리는 어디 있지?”


“아, 그자를 쫓아왔던 녀석이로군.” 레샤드는 그렇게 말했다. 그 태평한, 거의 조롱하는 듯한 목소리가 무척 거슬렸다. “왜 내가 두루마리를 내어 줄 거라고 생각하지?”


단 한순간에 비릭스는 허리춤에서 뼈 단검을 빼들고 추방된 아라코아의 목덜미에 가져다 댔다. “난 설득 실력이 제법 뛰어나거든. 게다가…”


하지만 뭔가 날카로운 것이 가슴을 찌르는 느낌에 말을 멈춰야 했다. 고개를 숙이자, 마치 칼리리 발톱처럼 구부러진 작은 검은색 단검이 가슴팍을 지그시 누르는 게 보였다.


“내가 학자라고 해서 바보인 줄 알면 안 되지.” 레샤드가 말했다.


“그런 것 같군.” 비릭스는 빈 손을 천천히 뻗어 새끼 칼리리를 홱 낚아챘다. “그래도 칼을 내리고 내가 원하는 걸 달라고 부탁해야겠는데.”


비릭스는 칼리리를 콱 움켜쥐었다. 그 새는 고통스러운 울음 소리를 내며, 손안에서 버둥거렸다.


“그만! 그만!” 레샤드는 검을 물렸다. “그냥 네 의도를 확인한 것뿐이야. 네가 적이라고 생각했다면, 이렇게 몸을 드러내지도 않았을 거라고. 암호는 제대로 댔으니까.”


비릭스는 칼리리를 놓아 주었다. 그리고 단검을 물렸지만, 손에서 떼어놓지는 않았다. “그 암호가 무슨 뜻이지?”


“자장가의 일부분이야. 아라코아의... 분열이 있기 전으로부터 전해 내려 온 노래지.” 레샤드는 두 팔을 활짝 펼치고 주위를 둘러봤다. “저주가 있기 전, 아라코아가 지금보다는 더 나은 존재였던 시기, 더 현명했던 시기 말이야.” 그는 다 해진 로브 안으로 손을 넣어 낡은 두루마리 하나를 꺼냈다. 보라색으로 물들인 가죽 집에 담긴 종이였다. “이게 있으면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몰라.”


비릭스는 두루마리를 받았다. 그리고 손 안에서 이리저리 돌려 보며, 두루마리 집에 새겨진 빛바랜 룬 문자를 살폈다.


“네가 여길 찾아왔던 다른 아라코아의 진짜 동료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추방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여기까지 찾아온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어. 넌 진정한 탐구자다. 이런 시기엔 저 첨탑 위의 존재들 중에서 그런 이를 찾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 레샤드는 말을 이었다. “그 두루마리는 모든 걸 바꿀 수 있어. 우릴 다시 하나로 만들 수 있다고.”


“우릴 다시 하나로 만든다고.” 이 멍청이가 설마 진심으로...


밖에서 들려온 날카로운 새 소리가 비릭스의 생각을 끊었다. 그녀는 두루마리를 허리춤에 집어 넣으며 황급히 오두막을 빠져나갔다. 추방된 아라코아들이 사방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머리 위, 붉은색과 초록색으로 뒤덮인 숲의 지붕으로부터 뭔가 커다란 것이 나타났다.


날개가 달린 형체였다.


비릭스는 욕설을 뱉으며 변장을 찢고 날개를 펼쳤다. 그리고 장막의 아크라즈에 있는 오두막들 위로 날아올랐다. 그녀가 마을 위로 드리운 나무에 우아하게 내려앉자, 가지 위에서 몸단장을 하던 칼리리 십여 마리가 이리저리 날아올랐다.


비릭스가 미처 다시 날아오르기 전에, 누군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그녀는 빙글 돌아 공격한 자를 내려치는 동시에 손바닥에 루크마르의 화염구를 불러냈다.


그리고 이스카르를 보았다.


그녀의 둥지 오라비가 몸을 가누려고 두 팔을 활짝 벌려 나뭇가지들을 붙잡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긴 왜 온 거야?!” 그의 시선은 그녀가 허리춤에 꽂아 둔 두루마리로 옮겨갔다. “겨우 그것 때문에 이런 위험을 무릅쓴 거야? 그게 대체 뭔데?”


“나... 나도 아직 잘 모르겠어.” 그렇게 말하는 사이 비릭스가 느끼던 흥분도 잦아들고, 공포와 혐오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자신의 말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행동이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 이제서야 깨달았다.


***


하늘탑으로 돌아가 안전한 비릭스의 둥지를 찾아간 후에야 그들은 두루마리를 펼쳐볼 수 있었다. 태양 보주의 빛 아래에서, 둘은 낡은 문서를 읽었다. 고대의 문헌 여럿을 합친 기록이었다. 테로크와 그의 딸 리디크에 대한 기록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다.


이스카르와 동족들이 성장하며 배운 것, 모든 공식적인 기록에 남아 있는 내용과는 무척이나 달랐다. 먼저 역사의 어디에도 테로크에게 딸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었다. 이 판본에서 그는 폭군이 아니라 성군이었다. 자애롭고 용감한 지도자였다. 그의 재임 기간에는 루크마르의 신봉자들도 존중을 받았으나, 신봉자들은 더 강한 권력과 명성을 갈구했다.


그리고 앞길을 가로막는 건 단 하나, 테로크뿐이었다.


“신봉자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국왕을 폐위했다. 국왕과 리디크, 또 국왕의 최측근까지 모두 사로잡은 신봉자들은, 그들을 하늘에서 세데크 골짜기를 향해 내던졌다...” 비릭스는 소리 내어 읽었다.


세데크 골짜기? 이스카르도 그곳을 알았다. 금지된 장소였다. 하늘탑 동쪽의 늪지로, 신봉자들이 이야기하기로는 어둠에 잠긴 지역이었다. 전설 속에서는 루크마르의 적이자 악한 신이었던 세드가 아주 오래 전 그곳에서 죽었고, 이후 그 땅은 세드의 피로 오염되었다고 했다.


“하늘을 날 날개가 없어, 리디크는 살아남지 못했다. 추락의 충격 때문에 그녀의 뼈는 산산이 조각났다. 하지만 테로크는 목숨을 건졌다.” 비릭스는 말을 이었다. “그러나 골짜기의 저주받은 물에 닿은 순간 그는 세드의 저주에 걸렸다. 그 물이, 바로 질병의 근원이었다.”


“그게 근원이라고...” 이스카르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이게 사실일까? 정말 그럴까? 장로들은 루크마르의 은총을 잃으면 저주에 걸린다고 가르쳤다. 특히 루크마르의 뜻에 거역하는 이들에게는 저주가 내린다고 했다. 저주는 각자의 나약함에 기인하는 것이지, 외부의 요인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문서는 저주의 근원이 세데크 골짜기의 물이라고 주장한다. 그건 누구라도, 그 어떤 미덕을 지닌 자라도, 저주의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건 이스카르가 아는 전부가 거짓이라는 뜻이었다.


“저주는 테로크의 정신을 혼란에 빠뜨렸고, 그는 점차 시들기 시작했다.” 비릭스는 계속해서 두루마리를 읽었다. “신봉자들이 하늘탑에서 추방한 그의 여러 추종자도 같은 운명을 맞았다. 그리고 이들은 추방된 아라코아가 되었다. 테로크가 사라진 후, 신봉자들은 아라코아를 온전히 지배하기 시작했다.”


비릭스는 두루마리를 탁자 위에 올려 놓았다.


“여태껏...” 차가운 분노가 이스카르의 안에 차올랐다. 신념을 유지하고 모든 법규를 준수한다면 저주에 걸리는 일은 없을 거라는 믿음으로 지금까지 살아 왔다. 헌신을 증명하기 위해 견뎌낸 그 모든 처벌, 이를 악물고 버텨야 했던 온갖 고통과 역경... 그건 무얼 위한 것이었던가?


“이게 사실인지는 알 수 없어.” 비릭스가 입을 열었다. “너도 어제 같은 말을 했었잖아. 추방된 아라코아가 우릴 속이려고 이 이야기를 꾸며낸 건 아닌지 어떻게 알겠어?”


“모르지.” 이스카르가 답했다.


하지만 그는 알아낼 것이다. 이 문서가 존재하는 만큼, 그 내용이 사실이라면 다른 기록도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런 외경은 대첨탑의 심장부에 숨겨져 있을 터였다. 오랜 세월의 결에 묻혀 사라진 두루마리와 역사, 장로들이 감춰둔 것들. 단서. 비밀. 진실.


“그런데 이게 사실이라면,” 그는 말을 이었다. “하늘탑은 영원히 달라질 거야.”





비릭스는 창가로 걸어갔다. 수십 마리 칼리리가 밤하늘을 이리저리 떠돌고 있었다. 깍깍, 끼익, 하는 소리를 내며 새들이 첨탑의 천연 바위 창틀에 내려앉았다. 그 너머로 하늘탑의 노대가 태양 보주의 빛을 받아 환하게 빛났다. 비릭스는 그 아름다움에 사로잡혔다.


“그거, 없애야 해.” 그녀는 이스카르를 향해 돌아서며 말했다.


“없앤다고?” 둥지 오라비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어딘가에 감춰야 해.”


“이게 모든 걸 망칠 수 있어. 이대로 두기엔 너무 위험해.” 비릭스는 두루마리를 향해 움직이며 맞받아쳤다.


이스카르도 같이 움직였다. 그리고 그는 문서를 손으로 내리쳤다. “이게 사실이라면, 우린 평생 거짓말에 속아 온 거야. 그게 중요하지 않아? 이걸 손에 넣으려고 그렇게 고생을 하고 모든 위험을 무릅쓰더니, 이제 와서 없애겠다고?”


“어리석은 짓이었어. 그냥 수수께끼에… 집착했던 거야.” 그녀는 두루마리의 나무 막대 하나를 붙잡고 당겼다. 이스카르는 손에 힘을 주고 문서를 눌러, 움직이지 않게 버텼다. “이건 잊어버려. 부탁이야.”


“잊어버리라고?” 이스카르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그는 빈 손으로 두루마리의 반대쪽 나무 막대를 붙잡았다. “이걸 어떻게 잊으란 거야?”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야.” 비릭스는 손에 단단히 힘을 줬다.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아무 상관이 없어.”


그리고 그녀는 장막의 아크라즈와 추방된 아라코아들에 대해 생각했다. 오물과 부패로 가득한,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곳. 자신의 동족과 열등한 그들이 동등한 존재로서 함께 사는 세상을 그려보려 했다. 마음의 눈에 떠오른 모습은 하나같이 구역질 나기만 했다.


하늘탑은 강력하고 장엄했다. 그걸 바꾸는 건, 추방된 아라코아와 다시 관계를 맺는다는 건 비릭스가 아는 모든 것을 파괴할 것이다. 비록 신봉자로서 그 따분한 규칙과 무의미한 공부와 의식에 넌덜머리가 나긴 하지만, 그녀는 자기 삶의 방식을 잃고 싶지는 않았다.


이 세상 무엇을 그런 삶에 비할 수 있다는 말인가?


“넌 나처럼 추방된 아라코아 사이를 걸어 본 적이 없어.” 비릭스는 두루마리를 당겼다. 그녀는 이스카르보다 힘이 셌기에, 둥지 오라비가 붙잡은 손을 놓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네가 그랬다면, 지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을 거야. 하늘탑을 이대로 지키기 위해 이 거짓말을 받아들여야 한다면, 그럴 만한 가치가 있어.”


마지막으로 힘을 내, 비릭스는 이스카르의 손에서 두루마리를 찢어냈다. 둥지 오라비는 그대로 쓰러져 바닥을 굴렀다. 그녀는 손바닥에 루크마르의 불꽃을 불러내 두루마리에 불을 붙였다. 불꽃의 혓바닥이 낡고 해진 종이의 가장자리를 핥았다.


“흐리이이익! 안 돼!” 이스카르가 달려들어 손으로 비릭스를 후려쳤다. 그녀는 팔뚝으로 그 공격을 막아내고는, 이스카르의 옆머리를 강타했다. 그는 그대로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불길이 두루마리를 집어삼키면서, 불씨와 재가 이스카르 주위에 흩날렸다. 무릎을 꿇은 그는 재를 손으로 그러모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아라코아를 위한 일이야.” 비릭스는 둥지의 창을 향해 돌아섰다. “그건…”


턱, 하고 말문이 막혔다. 수많은 칼리리가 두 개의 창 밖에 앉아 있었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은 채 가만히 거기 앉아, 흐릿한 유리를 통해 그녀를 지켜보았다.


이상한데. 저 새들이 이렇게 집중력을 보이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비릭스는 싸늘한 불안감에 뱃속이 뒤틀리는 것만 같았다.


무언가 커다란 것이 둥지의 문을 두들겼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에 경첩이 떨어져 나가며 문이 쓰러졌다. 두 명의 칼날갈퀴가 날개창을 쳐든 채 방으로 들이닥쳤고, 그 뒤를 대현자 젤키르가 따랐다.


“아라코아를 위한 일이라고.” 루크마르의 목소리가 말했다. “실로 그러하지.”


비릭스는 깜짝 놀라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대… 대현자님…”


“넌 항상 호기심이 많았지. 안 그러냐?” 그 말과 함께 젤키르는 이스카르를 가리켰다. “저 녀석을 묶어라.”


칼날갈퀴 하나가 달려들었다. 그는 두건을 꺼내 이스카르에게 씌우고, 금속 고리를 부리에 끼워 입을 닫았다. 이스카르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저항하지도 않았다.


비릭스는 애써 용기를 내 말했다. “이스카르는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그저…”


“이 녀석이 뭘 했는지는 나도 안다. 네가 뭘 했는지도 알고.” 젤키르는 비릭스의 창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밖에 옹기종기 앉은 칼리리 무리에게 손을 뻗었다. 대현자는 한 마리의 깃털을 부드럽게 쓰다듬었고, 그 새는 나직한 소리를 내며 그 손길을 반겼다.


“지켜보고 있었다.” 젤키르는 말을 이었다. “칼리리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는 건 흔치 않은 능력이지만, 이렇게 매우 유용할 때가 있지. 우리 동족들이 혼자 있을 때 어떤 말과 행동을 하는지 알게 되면, 너도 깜짝 놀랄 거다.”


“그러면서 우리가 이렇게 될 때까지 내버려 두셨다고요?” 비릭스는 물었다. 활활 타오르는 분노가 두려움까지 모두 집어삼킨 듯했다.


“수수께끼를 쫓는 건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그렇게 알아낸 지식으로 뭘 하느냐 하는 거지. 그게 바로 네가 누구냐를 결정한다. 신봉자 중에서도 고위직까지 올라가는 이들은 모두 수많은 진실의 무게를 감당해야 한다. 수많은 비밀의 무게를. 그리고 오직 현명한 이들만이 아라코아를 위해 그런 걸 감출 줄 아는 법이다.”


젤키르는 칼리리를 쫓았다. 새들은 모두 밤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너도 그렇게 현명한 이들 중 하나다. 넌 우리와 함께 위대한 자로 자라날 잠재력을 지녔다.”


비릭스는 어떤 기분을 느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감사해야 하나? 이런 때에?


“하지만 고집불통이고 말을 잘 듣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지.” 대현자는 그녀의 어깨에 한 손을 올렸다. “다행히, 그런 문제는 고칠… 방법이 있다.”


다른 칼날갈퀴가 뒤에서 비릭스의 팔을 붙잡고 비틀었다. 수없이 많은 바늘이 마구 찔러대는 것처럼 따끔거리는 고통이 피부를 파고들어 목덜미까지 차올랐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저항했지만 헛수고였다.


“난 항상 네게 너그러웠다. 그 점은 미안하게 생각한다. 내가 조금 더 엄격했더라면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테지. 하지만 내가 지금 하는 일은, 모두 널 아끼기 때문에 하는 거다… 네가 언젠가 위대한 아라코아가 될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칼날갈퀴가 두건을 씌워 눈을 가리자, 비릭스는 비명을 질렀다.


어둠이 세계를 집어삼켰다.


***


비릭스는 어둠 속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을 보냈는지 알지 못했다. 며칠… 몇 주… 아니, 한 평생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아무 상관 없었다. 그녀는 그저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다행히도 결국엔 끝이 났다. 누군가 눈을 가린 두건을 벗겨냈다. 대현자가 그녀를 마주보고 있었다. 비릭스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이, 그는 부드럽게 비릭스를 일으켜, 대첨탑 아래 어딘가에 있는 구불구불한 지하 묘지를 따라 그녀를 이끌었다.


“내가 이스카르를 네 둥지 오라비로 정한 이유를 알고 있니?” 대현자는 물었다.


어둠 속에서 보낸 시간 때문에 비릭스의 감각은 무뎌진 상태였고, 그래서 그 말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그녀는 대답하려 했지만, 부리를 빠져나온 건 낮은 신음 소리뿐이었다.


“그 녀석이 네게서 무언가를 배울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대현자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를 지켜보는 동안 네가 책임감을 배울 수 있을 거라고 믿었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지만, 결국 그렇게 되었는지도 모르겠구나. 두루마리를 태우기로 결정한 건 현명한 일이었다. 책임감 있는 행동이었어.”


그녀는 대현자를 따라 대첨탑의 주 전당으로 들어섰다. 천정의 반구형 수정에서 빛줄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빛이 온몸을 감싸 따듯하게 덥히자, 비릭스는 등을 곧게 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음식과 물보다 이게 필요했었다. 빛.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빛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무엇보다 그걸 만지고 붙잡기를 갈망했다. 전당 안의 빛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일생의 모든 낮을 다 합쳐도 만족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이제 네가 배워야 하는 게 책임감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대현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게 진짜로 필요했던 건 결과의 의미를 이해하는 거다.”


그 말이 행복에 빠져 이성을 잃었던 비릭스를 깨웠다. 전당 중앙에 세 명의 아라코아가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두 명의 칼날갈퀴가 이스카르의 양옆에서, 그의 손목을 묶은 사슬을 붙잡고 있었다. 부리는 여전히 금속 고리로 묶여 있었지만, 전사들이 두건은 벗긴 상태라 비릭스는 그를, 그는 비릭스를 볼 수 있었다.


대현자는 루크마르의 갈퀴발톱을 비릭스에게 주고 물러났다. 그녀는 손에 쥔 신성한 유물의 무게를 가늠하다가 방을 둘러봤다.


지켜보는 이는 없었다. 다른 추방의 의식과는 전혀 달랐다. 훨씬 더 개인적이고, 훨씬 더 비밀스러운 순간이었다.


“빛에서 살겠느냐, 어둠에서 살겠느냐?” 대현자는 그녀 뒤에서 나직이 속삭였다.


비릭스는 지팡이를 손에 든 채 앞으로 나섰다. 이스카르는 그녀를 마주보았지만, 움직이지는 않았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의 눈에서는 두려움을 찾을 수 없었다. 오직 차갑게 너울거리는 분노뿐이었다.


그녀는 옆으로 뻗은 그의 오른팔 아래 창날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선택했다.


***


레샤드가 이야기를 마치자 짧은 침묵이 흘렀다.


상대편 추방된 아라코아가 나무 밑둥에서 일어나, 굽은 등을 할 수 있는 데까지 폈다. “이스카르에 대해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군. 늘 우리 사회 최하층에서 태어났다고 하던데.”


“본인이 즐겨 하는 이야기는 아니겠지. 게다가 알다시피 이스카르는 거짓말을 즐기기도 하고.” 그 말과 함께 레샤드는 일어섰다. 너무 오랫동안 앉아 있던 탓인지 무릎에서 투둑, 하는 소리가 났다.


늙은 뼈는…


고위 아라코아는 쓰러진 나무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레샤드는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한때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섬기겠다고 맹세했던 지도자에 대한 이야기였으니까.


레샤드는 장막의 아크라즈에서 비릭스를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그 여자가 어떤 아라코아가 될지 그때 알았더라면. 그때 한 번만 단검을 내밀었다면 수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었을 텐데…


물론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레샤드도 비릭스가 하늘탑의 대현자가 될 줄은 몰랐다. 에펙시스 기술에 대한 집착이 고위 아라코아의 도시 꼭대기에 가짜 태양을 세우는 일로 이어질 줄은 몰랐다. 비릭스가 그걸 추방된 아라코아에게 사용하라는 명령을 내릴 줄은, 그렇게 그들을 세계의 표면에서 불태워 버리려 할 줄은 전혀 몰랐다.


비릭스와 그 최측근들은 이제 죽었지만, 그들은 이 세계의 오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태양의 빛에 사로잡히고, 광신에 빠지고 만 고위 아라코아의 모습으로.


하지만 레샤드는 추방된 아라코아도 아무런 책임이 없는 건 아니라는 점을 다시 상기해야 했다. 그들은 반대쪽 극단으로 도피했다. 어둠에 사로잡혀, 수치심과 자기 혐오에 파묻혔다.


까마귀가 해를 삼키면 어둠이 드리운다. 검은 날개가 하늘을 보듬으면 타오르던 하늘이 잦아든다. 나의 아이들아, 편히 쉬거라. 태양도 잠을 자리니.


고대 아라코아는 빛과 어둠이 꼭 같은 양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함께할 때만이 추방된 아라코아와 날개 있는 형제 모두 번성할 수 있다.


이제서야, 레샤드의 동족도 그걸 이해하게 되었다.


적어도 대부분은 그랬다. 이스카르와 같은 이들이 그런 이성적인 결론에 도달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이스카르의 삶은, 비릭스와 마찬가지로 테로크에 대한 진실을 알아낸 후 완전히 달라졌다. 불구가 되어 추방당했지만, 그는 추방된 아라코아에서 세력을 키워 지도자가 되기에 이르렀다. 최근 수년 간, 레샤드는 이스카르에게서 무언가 어둠의 힘이 자라는 것을 느꼈다. 복수와 힘에 대한 조용한 갈망. 어쩌면 그건 하늘탑에서 보낸 마지막 시기에 잉태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스카르가 지금 레샤드 곁에 있는 이 두 아라코아처럼 눈을 떴을까? 과거는 묻어 두고 새로운 미래를 맞을 준비를 했을까? 아니면 아직도 옛일에 사로잡혀, 어둠 속에서 비틀거리고 있을까?


“레샤드!” 한 고위 아라코아가 이야기꾼 곁에 내려앉았다. 그의 눈에는 끔찍한 공포가 가득했다. “이스카르를 쫓아간 정찰병들을 찾았습니다. 모두 죽었어요.”


“죽었다고?” 장로 아라코아가 물었다.


“살해당했습니다. 르아아악! 이스카르에게요. 다른 이들은 아직 그를 찾고 있습니다.” 전령은 그렇게 답했다.


이야기꾼은 검게 탄 나무 밑둥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천천히 씨앗과 견과류 주머니를 거꾸로 뒤집어, 내용물을 지면에 흩뿌렸다.


퍼시는 조금 혼란스러운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무슨 장난이냐는 듯한 표정으로 레샤드를 올려다봤다.


“괜찮으니 모두 먹으렴.” 레샤드는 모이를 향해 손짓했다. 찬란한 앞날이 그의 동족을 찾아올 것임은 분명했지만, 아직 축배를 들 때는 아니었다. 해야 할 일이, 극복해야 할 과거의 잔재가 아직 남아 있다. “이제 힘을 키워야 한단다. 우리 모두 그래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