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일부를 죽였다.


생기 잃은 청동용을 보자, 이런 생각이 시간의 지배자 노즈도르무의 뇌리를 스쳤다. 지리온의 몸은 원래 크기의 반으로 쪼그라들어 가죽만 남았고, 머리부터 꼬리까지 병변이 퍼져 있었다. 상처에서는 금빛 모래가 피 대신 쏟아지며, 무한의 흐름 속에서 아직 찾아오지 않은 그의 생애를 허깨비처럼 희미하게 비추었다. 지리온의 미래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노즈도르무는 하이잘 산의 봉우리 하나를 성큼 지나 지리온 곁에 섰다. 시간의 지배자의 태양빛 비늘 위로 역사의 순간순간이 물결쳤다. 죽어 가는 용에게 다가가자, 무력감이 홍수처럼 몰려왔다. 시간의 길에 짙은 장막이 드리어져, 청동용군단의 위상이자 시간의 수호자인 자신조차도 뚫을 수 없었다. 그가 뚜렷하게 보았던 과거와 미래의 일들이 뒤죽박죽 엉키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은 어디에 있는가?” 노즈도르무는 옆에 서 있던 틱크를 향해 기다란 목을 뻗었다. 충성스러운 틱크는 시간의 동굴에 있는 청동용군단의 거처에서부터 지리온을 등에 싣고 있는 힘을 다해 날아왔다. 지리온의 몸이 앙상해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힘든 일을 마친 틱크는 아직 거친 숨을 쉬고 있었다. “지리온은 혼자 돌아왔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노즈도르무는 좌절감에 빠져 소리쳤다. “과거로 열두 명을 보냈다. 열두 명!”


노즈도르무가 대리인을 파견한 이유는 시간의 길이 술렁이는 현상을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을 뿐이라는 기분을 떨쳐낼 수 없었다. 파견된 용들이 현재로 돌아오면, 정오 정각에 하이잘 정상에서 시간의 지배자와 만나기로 했다. 시간의 길로 보내지도 않았던 틱크가 지리온을 데리고 나타났을 때는 정오를 한참 넘긴 시각이었다.


노즈도르무는 용의 몸에서 빠져나가는 시간의 모래를 되돌리는 주문을 시전하며 물었다. “지리온, 자네는 무엇을 보았는가?”


틱크가 끼어들었다. “말할 힘이 없는 것 같습니다.”


시간의 지배자는 틱크의 말을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마법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마법을 예상하고선, 그에 버금가는 강력한 주문으로 차단해버렸다. 시간의 영역에서 청동의 위상을 능가하는 예지력과 기술을 가진 존재는 오직 하나밖에 없었다.


틱크가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지리온이 처음 시간의 길에서 돌아왔을 때 자기가 본 것을 말해주었습니다. 대리인들이 역사 속 어느 시간으로 가려고 해도, 언제나 미래의 그 시간에 이를 뿐이었답니다... 황혼의 시간 말입니다.”


노즈도르무는 고개를 떨구고 눈을 꼭 감았다. 두려웠다. 시간의 가닥이 뭉쳐 종말을 향해 굴러가고 있었다. 암담한 잿빛 미래에는, 시간의 지배자조차 최후를 맞이한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믿었다. 먼 옛날 티탄 아만툴에게서 시간을 제어하는 힘을 받았을 때, 노즈도르무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지리온을 다치게 한 건 누군가?” 시간의 지배자는 답을 알고 있었지만, 부디 틀렸기를... 자신이 본 것이 비정상이기를 바랐다.


틱크는 노즈도르무를 피해 시선을 돌렸다. “무한의 용군단과... 그 지도자입니다.”


나는 내 일부를 죽였다. 저주받을 그 한마디가 위상의 머릿속에 메아리쳤다.


무한의 용군단은 시간이 어긋났음을 보여주는 조짐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여전히 보기도 믿기도 힘들지만, 노즈도르무는 자신을 포함한 청동용들이 성스러운 임무, 즉 시간이 예정대로 흐르도록 지키는 임무를 등지고, 오히려 시간을 망쳐 버리게 될 것임을 깨달았다.


노즈도르무는 화가 치미는 것을 꾹 참으며 지난 몇 주간의 일을 되짚어보았다. 최근에 그는 시간의 길에 갇힌 적이 있었고, 그때 필멸자 스랄이 가장 기초적인 것을 일깨워 주었다. 바로 이 순간의 삶이 과거나 미래에 머무르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갇혀 있던 청동의 위상은 해방되면서 시간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었지만... 결국 가장 두려워 했던 일과 마주하게 되었을 뿐이었다.


“용서해 주게.” 노즈도르무는 지리온에게 속삭였다. 소중한 신하에게 보고 들을 힘이 남아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상처 입은 청동용이 알아들었다는 의미로 목을 굽혔다. 용은 흐리고 침침해진 눈을 이리저리 움직이다 마침내 노즈도르무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시간의 지배자는 거듭 말했다. “용서해 주게.” 지리온의 입이 벌어지고, 몸은 떨렸다. 마치 웃는 것처럼 보였지만, 노즈도르무는 그가 흐느끼고 있음을 알아챘다.


지리온의 미래가 남김없이 빠져나왔을 때, 그는 노즈도르무에게서 멀어지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숨을 거두었다. 두 눈이 겁에 질려 있었다.




***

하이잘 산에 풍악이 울려퍼졌다.


이런저런 일로 지체된 끝에, 용의 위상인 알렉스트라자, 이세라, 노즈도르무, 칼렉고스가 고대 세계수 놀드랏실을 치유하고자 대지 고리회의 주술사 및 세나리온 의회의 드루이드들에게 마력을 보탰다. 얼마 전에는 불의 군주 라그나로스와 그 수하들이 놀드랏실을 잿더미로 만들려 했으나, 필멸자들에 의해 쓰러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나 깨어난 여왕 이세라가 서 있는 이곳, 세계수 밑동에 자리잡은 세나리온 야영지에서 승전보는 아득한 속삭임에 불과했다. 녹색용군단의 위상이 들은 것은 비극적인 이야기뿐이었다.


이세라는 동료 위상들과 데스윙을 어떻게 할지 의논하기 위해 회동을 가졌다. 데스윙, 검은용군단의 미친 지도자. 대격변을 일으켜 세계를 갈기갈기 찢어놓은 장본인. 아제로스의 수호자들이 하이잘과 그 밖의 지역에서 승리를 일구었지만, 그 위상은 괴로움에 몸부림치면서도 기어이 황혼의 시간을 불러들일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가 숨쉬는 한, 멈추지 않고 사악한 계획을 실현하려 들 것이 뻔했다.







노즈도르무는 전략을 강구하는 대신, 지리온의 죽음과 시간의 길에서 무한의 용군단이 또다시 습격해온 일을 이야기했다. 하이 엘프로 변신한 시간의 지배자의 온화한 얼굴에 주름이 패였다. 그도 동족들과 마찬가지로, 놀드랏실 주변에 머무는 단명의 종족들과 가까이 할 때에는 언제나 필멸자의 모습을 취했다.


“그는 내 마법 때문에 죽었소...나 때문에.” 웅얼거리는 노즈도르무를, 이세라는 불편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시간의 지배자는 지독한 곤경에 처해 있었으나, 그녀에게는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멀게만 보였다. 그녀는 현실 세계와 꿈 속 세계를 부유하며, 어느 곳에도 발붙이지 않았다.


청동의 위상은 불안함과 초조함에 주먹을 꽉 쥐었다. “약속 장소로 돌아가야겠소. 다른 대리인들이 와 있을지도 모르니까.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러길 바랄 따름이오.”


이세라는 노즈도르무가 돌아갈 때 위로의 말을 건네려고 머리를 쥐어짰다. 노즈도르무는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아만툴이 그에게 부여한 임무는 어떤 끔찍한 일이 일어났든, 또는 일어나려 하든 간에 시간을 순결하게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세라가 보기에 시간의 지배자가 지닌 사명은 잘못된 점도 있는 것 같았지만, 그녀에게 의문을 제기할 자격은 없었다.


휘하의 용들을 지키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결국 동포를 잃고 자길 탓하는 이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지? 고민하는 이세라의 머릿속에 별별 생각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허리케인에 초토화된 방대한 도서관 안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상상 속에서 수많은 말과 영상이 넘쳐났지만, 그것은 모두 다른 책의 낱장이었다.







이세라가 알맞은 말을 찾아내기 전에 노즈도르무는 떠나 버렸다. 으스스한 적막감만이 남았다. 위상들이 모임을 갖는 동안 드루이드 거주지에 사는 나이트 엘프들은 친절하게도 집을 비워 주었으나, 생명체의 활기가 없는 그곳은 춥고 공허하게 느껴졌다.


용의 여왕이자 붉은용군단의 위상, 생명의 어머니 알렉스트라자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무한의 용군단이 데스윙과 함께 움직이는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소. 우리 모두가 하이잘에 와 있는 이유는 데스윙을 처리할 최선의 방법을 찾기 위함이오. 시간의 길 문제는 우리가 한시라도 빨리 움직여야 한다는 반증일 뿐이오. 칼렉고스, 푸른용군단은 연구를 계속하고 있소?”


“하고 있습니다.” 푸른용군단의 위상은 목을 가다듬고 등을 똑바로 폈다. 쾌활했던 칼렉의 태도가 요즘 들어 묘하게 정중해졌다. 죽은 말리고스를 대신해 그가 푸른용군단을 이끌 지도자로 선출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이세라가 짐작하건대, 칼렉은 동료 위상들에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는 듯했다. 사실 위상들은 이미 그를 동등하게 보고 있는데도.


칼렉이 손으로 허공을 쓸자, 룬문자 몇 개가 깜박이며 빛났다. 각각의 룬문자는 푸른용군단이 행한 실험의 세부 내용이었다. 푸른용들은 지식의 보고인 그들의 서식지, 마력의 탑을 샅샅이 뒤졌다. 데스윙의 약점을 찾기 위해서였다. 칼렉의 용들은 마법을 담당하고 있으니, 만약 비전 속에 답이 있다면 찾아낼 수 있을 터였다.


“데스윙이 오랫동안 숨어 있었던 심원의 영지의 정령계에서 그의 피를 조금 찾아냈습니다. 작은 견본이지만 시험용으로는 손색이 없습니다.”


알렉스트라자의 목소리가 기대감에 부풀었다. “그래서 결과는 어땠나?” 이 소득 없는 회담에서 이세라가 본 언니의 모습 중 가장 희망찬 것이었다.


“다른 존재라면 갈기갈기 찢겨 나갈 정도의 비전 마력을 피 속에 주입했는데, 견본은 사나워질 뿐이었습니다. 피가 분열되고 들끓더니, 결국은 변형되더군요.”


생명의 어머니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비전 마법도 효과가 없다니.”


칼렉이 재빨리 덧붙였다. “이제 막 실험을 시작했을 뿐입니다. 데스윙을 상대할 즈음에는 우리에게도 해법이 있을 겁니다. 숫자는 얼마가 됐든 별로 도움이 안 됩니다. 무기가 필요합니다... 아무도 맞선 적 없는 무기가. 저희 용군단은 이 난국을 타개할 때까지 쉬지 않을 겁니다.”


“고맙소.” 알렉스트라자는 이세라에게 물었다. “네가 본 환영 중에 특이한 건 없었니?”


“없어... 아직까지는.” 이세라는 살짝 부끄러워하여 대답했다.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깨어난 여왕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된 느낌을 자주 받았다. 티탄 이오나는 이세라에게 자연을 관장하는 힘과 ‘에메랄드의 꿈’으로 불리는 무성한 원시림의 세계를 주었다. 수천 년 동안 그녀는 ‘꿈의 여왕 이세라’로서 에메랄드의 꿈 속에서 살아왔다. 대격변이 일어나기 바로 전, 꿈에서 깨어나기 전까지는. 이제 그녀는 ‘깨어난 여왕 이세라’라고 불렸다. 오랫동안 감고 있던 눈을 뜬지라, 그녀는 무얼 보아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뭔가 떠오르거든 알려주렴.” 생명의 어머니는 미소 지었지만, 초조해하고 있음이 이세라에게는 전해졌다.


“내일 다시 모입시다.” 알렉스트라자의 말과 함께, 회담은 시작하자마자 끝났다. 아무 결론 없이.


다음날 아침, 이세라는 놀드랏실 밑동에 흩어져 있는 막사 사이를 정처없이 걸었다. 머리 위로 우뚝 솟은 웅장한 세계수와 무성한 나뭇가지가 구름에 가려져 있었고, 대지 고리회 주술사와 세나리온 의회 드루이드들이 여기저기에서 평화롭게 명상하고 있었다. 놀드랏실이 치유된 후, 이세라는 세계수의 뿌리가 흙 속으로 뻗어나갈 수 있도록 드루이드들에게 영혼을 뿌리와 일치시키는 법을 가르쳤다. 그러는 동안 주술사들은 대지의 정령을 달래어 뿌리가 안전하게 아제로스 땅 속 깊숙이 파고들 수 있게 해 주었다. 서로 다른 두 필멸자 집단의 전례 없는 협조로 이루어낸 과업이었다. 이것으로 이세라의 마음은 든든해졌지만, 데스윙을 활개치도록 내버려두면 이들의 고귀한 노력도 부질없으리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깨어난 여왕은 세계수 북동쪽으로 올라가 나무로 둘러싸인 한적한 장소를 찾았다. 숲 속 공터에 들어서니, 깊은 명상에 든 스랄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세라는 스랄을 대단히 존경했다. 그가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몇 주 전 데스윙 일당이 위상들을 습격했을 때, 스랄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모두 죽고 말았으리라. 그는 용의 지도자들을 모두 구하고, 아제로스를 보호해야 한다는 목표 의식을 불어넣어 주었다. 덕분에 위상들은 지난 만 년 동안 해왔던 것보다 더욱 단결하게 되었다.


“스랄.” 살며시 말을 거는 여왕의 목소리에 자연이 깃들었다. 바람이 오크의 땋아내린 긴 검은 머리를 끌어당겼다. 단순한 로브 자락 밑으로 풀잎이 바스락거렸다. 주술사는 아직 눈을 뜨지 않았다.


이세라는 그의 집중력에 놀랐지만, 그가 쉽게 대답하지 않으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처음 놀드랏실을 치유하려 했을 때는 데스윙의 하수인이 나타나 스랄의 정신과 몸, 영혼을 분리하여 대지, 바람, 불, 물의 네 가지 정령으로 바꿔 놓았었다. 필멸의 영웅들과 스랄의 배우자인 아그라가 동분서주한 끝에 그를 구할 수 있었다. 그때 이후로 스랄은 대지와의 결속력을 보여주기 시작했는데, 이는 정령들과 그저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가 아닌 훨씬 강력한 것이었다. 그는 아제로스가 자신의 일부라도 된 듯 느낄 수 있었고, 절묘한 방식으로 세계와 결합했다. 이세라는 이 현상이 그의 영혼을 탈바꿈하는 과정의 하나이며, 스랄 안에 아제로스의 정수가 깃든 것이라고 믿었다.


“스랄.” 이세라는 주술사의 팔에 가만히 손을 갖다댔다.


마침내 명상에서 깨어난 오크가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세라 님, 먼저 시작해 버려서 죄송합니다.”


“그대가 필요로 할 때 돕기 위해 왔을 뿐이다.” 녹색의 위상은 잘라 말했다.


“회담이 어떻게 되었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진전은 있었지.” 이세라는 억지로 말을 내뱉고 화제를 돌렸다. “시작해도 되나?”


“예.” 스랄이 다시 자리에 앉고, 이세라도 마주보며 앉았다. 그녀가 옛날에 배운 바로는, 누군가를 가르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먼저 시범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스랄의 영혼이 대지에 녹아든 사이 그녀는 놀드랏실의 뿌리에 자신을 결속시켰다. 서로 다른 마법이지만 집중력을 이용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했다.


“지금도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가?” 이세라가 물었다. 스랄은 하이잘 너머의 땅은 느낄 수 없다고 말했었다. 마치 정신적인 방어막이 그의 영혼을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이 오크는 새로 생긴 능력을 이해하려고 했지만, 아제로스 안으로 너무 깊이 들어가는 데에는 주춤거리는 듯했다.


“그렇습니다.” 절망감을 느낀 스랄이 눈썹을 움츠렸다. “광활한 바다 위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깊이 들어갈수록 해안에서 점점 멀어지는 그런 느낌...”


이세라는 흙을 한 움큼 퍼서 오크의 왼손바닥에 올렸다. “스랄, 이것이 아제로스다. 그대의 영혼이 이 흙 속으로 들어가면, 어디든 밟고 설 수 있을 것이야. 하이잘은 마법의 닻 같은 게 아니다. 오그리마 길바닥이나 가시덤불 밀림에 깔린 것과 똑같은 흙이지. 이 세상은 한몸이다.”


“한몸...” 오크는 흙을 유심히 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어려운 문제는 아주 간단하게 풀릴 때가 많지요... 답은 바로 우리 눈앞에 있었습니다. 제 옛 스승 드렉타르께서도 예전에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세라 님은 그분과 많이 닮으셨군요. 현명하신 데다 참을성 있고... 제가 어떤 장애물에 부딪히든지, 넘어설 수 있는 방법을 알고 계십니다.”


이세라는 스랄이 자신을 빗대 한 말에 웃으려고 애를 썼다.


주술사는 손 안의 흙을 움켜쥐었다. “이게 제 닻이 되어줄 겁니다.”







스랄은 눈을 감고 심호흡했다. 이세라도 따라 했다. “생각을 잠재워라. 영혼은 육신을 떠나 주위 대지를 느껴라. 그대가 깔고 앉은 돌은 내가 앉아 있는 돌과 다르지 않다. 한 걸음 내딛을 수 있다면, 분명 또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음을 명심하라.”


이세라는 직접 개발한 집중법을 되뇌이며 세계수의 거대한 뿌리 중 하나에 영혼을 결속했다. 스랄은 힘이 급증한 것이 그저 운일 뿐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믿었지만, 실은 그 반대였다. 본인은 모르겠지만 그의 목적은 뚜렷했다. 그가 주술사로서 단련해온 세월이 대지와 화합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틔워 주었다. 깨어난 여왕은 그런 성취감을 간절히 맛보고 싶었다.


위상들과 모임을 가졌던 때를 떠올렸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그 회담 속에 간단한 답이 숨어 있었던 건 아닌지, 세세한 부분까지 초점을 맞추어 살폈다. 칼렉의 말이 주의를 끌었다. 젊은 위상이 언급한 어떤 말에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무기가 필요합니다... 아무도 맞선 적 없는 무기가.”


그 말에는 힘이 실려 있었지만, 너무 의미심장해서 그녀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떤 무기...


“...다르오. 당연히 다른 무기와는 달라야지.” 친숙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때렸다. 그 목소리는 해일이 되어 그녀를 삼키고, 의식을 떠돌던 생각의 조각들을 모조리 쓸어냈다.


충격에 휩싸인 이세라가 눈을 떴을 때, 그곳은 하이잘이 아니었다.


그녀는 어둡고 휑한 방을 떠다니고 있었다. 위상의 방, 다섯 용군단의 성지. 발밑에는 용들이 모여 있었다. 과거의 이세라가 있었고, 알렉스트라자가 있었다. 노즈도르무의 첫째 배우자인 소리도르미와, 푸른용군단의 전 위상 말리고스, 그리고... 데스윙도.


아니, 현재의 그 무섭고 흉물스러운 괴물이 아니다. 대지의 수호자 넬타리온, 검은용군단의 자랑스러운 위상이었던 자다. 동료들도 모르는 사이, 그는 이때 이미 타락에 빠져 있었다. 티탄이 땅 속에 가두어 둔 간교한 고대 신,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고 광기에 찬 그 존재 때문에. 결국 그는 아제로스를 보호할 사명을 저버렸다.


이세라는 이때가 언제였는지 즉각 알아차렸다. 만 년도 전, 고대의 전쟁이 한참 벌어지던 때였다. 불타는 군단의 악마들이 아제로스를 침공했고, 위상들은 세계를 멸망에서 구할 의식을 치르려고 여기 모였었다. 위상들은 허공에 떠 있는 특징 없는 금빛 원반을 둘러싸고 있었다.


원반은 얼핏 보기에 수수한 장신구 같았다. 그것이 용군단의 결속을 깨부술 무기였을 줄이야... 수없이 많은 푸른용들을 죽이고 수천 년 동안 말리고스를 은둔하게 만든 그 무기. 용의 영혼.


이세라는 의식이 끝나는 것을 몸서리치며 지켜보았다. 넬타리온을 제외한 모든 위상이 자신의 정수를 할애하여 유물에 힘을 불어넣었다. 그 원반이 불타는 군단을 아제로스에서 몰아내줄 것이라 믿고, 과감하게 의식을 단행했다.


“다 끝났소...” 넬타리온이 선언했다. “담아야 할 것을 모두 담았어. 이제 용의 영혼을 영원히 봉인하겠소. 이뤄낸 것을 절대로 잃지 않도록.”







불길한 검은 빛이 대지의 수호자와 유물을 감싸, 본질을 잘 알아볼 수 없었다.


과거의 이세라가 차분하게 물었다. “저게 정상이오?”


“정해진 과정을 밟을 뿐이야. 괜찮소.” 넬타리온이 불쾌함을 감추지 못하며 대답했다.


말리고스가 덧붙였다. “저것은 어떤 무기와도 다르오. 당연히 다른 무기와는 달라야지.”


말리고스가 말을 마치자 벽이 유리 조각처럼 산산이 부서져 내리고, 에메랄드 빛 공터가 나타났다. 스랄은 여전히 명상에 빠져, 이세라가 본 환영은 의식하지 못했다. 이세라는 스랄을 힐끗 보고는 몸을 일으켜 환영의 조각을 끼워 맞춰 보려고 했다. 용의 영혼이 아제로스를 고통과 죽음에서 구할 수 있단 말인가?


깨어난 여왕은 칼렉과 알렉스트라자를 찾아 한달음에 숲을 빠져나갔다. 그걸 쓰고 자멸하자고 하면 다들 내가 미친 줄 알겠지. 이런 우려가 있었음에도, 어떤 간단한 발상이 그녀에게 경종을 울렸다. 데스윙의 횡포는 시작과 마찬가지로 끝나리라.




****

스랄의 손바닥 위에 있는 흙은 그냥 흙이 아니었다. 자기 손에 붙어 있는 손가락 같았고, 흙 자체는 독자적일지언정 큰 전체의 일부 같았다.


그의 영혼이 발밑을 지나 하이잘의 땅 속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돌 하나하나, 모래알 하나하나가 자신과 이어져 있는 기분이 들었다. 혼돈에 빠진 대지의 정령들을 진정시키려고 그렇게 오랫동안 악전고투했건만, 그들이 이제는 스랄을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환영해주었다.


산에는 활기가 넘쳤다. 아그라를 포함한 주술사들이 대지를 향해 화합의 노래를 속삭였다. 노래는 정령들에게 했듯이 스랄의 영혼도 다독여주었다. 다른 곳에서는 드루이드들이 놀드랏실의 뿌리를 아제로스의 더 깊은 곳으로 이끌었다. 스랄의 영혼은 뿌리를 따라 이동했다. 뾰족한 바위와 화강암 덩어리가 부드러운 흙으로 부스러지고, 그로 말미암아 세계수를 길러내 대지를 더욱 굳게 다지는 곳으로. 치유의 순환 속을 맴돌다 보니 기운이 났다.


스랄의 영혼이 산기슭에 다다랐다. 전에는 여기까지 오는 것이 한계였다. 전에도 그랬듯이 육체가 멀게 느껴졌다. 손에 쥔 흙의 아스라한 감각에 집중하고, 이세라의 슬기로운 가르침을 되새겼다. 이것이 아제로스다... 이 세상은 한몸이다.


그 말에 용기를 얻은 스랄은 마음 속에서 의심을 몰아내고 아제로스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영혼이 한없이 펼쳐지는 대지를 뚫고 곤두박질쳤다. 땡볕에 그을린 듀로타의 흙을 헤치고 진흙투성이 슬픔의 늪에 이르렀다. 모든 땅은 거리나 지역에 상관없이 이어져 있었거늘, 지금껏 깨닫지 못했다.


스랄은 익숙한 지역을 떠나, 전에는 미처 몰랐던 미지의 장소를 기웃거렸다.


대해의 어딘가에는 안개에 싸인 신비로운 섬이 있었으며...


동부 왕국 아래, 카즈 모단의 산 속에는 어떤 존재가 섞여 있었다. 강력한 영혼이었지만 정령은 아니었다. 묘하게도, 스랄과 닮은 존재였다. 육체의 구속을 벗어난 필멸자. 알 수 없는 그 존재는 말없이 순찰이라도 도는 듯이 고대의 땅 속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것이 입을 열자 아제로스 전체에 드워프 억양이 울려퍼졌다.


“보아라, 우리는 토석인이다. 땅의 혼은 우리의 혼, 땅의 아픔은 우리의 아픔, 땅의 고동은 우리의 고동...”


땅 속 깊은 곳에서 스랄이 본 것 중에는, 녹아내리는 종양과 상처에 잠식된 장소도 있었다. 그를 가장 오랫동안 잡아둔 광경은 어마어마하게 크고 추운 이상한 동굴들이 별 전체에 퍼져 있는 것이었다. 생명력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 구멍들에는 대지의 정령조차 다가가길 꺼려했다.
그중 한 구멍은 하이잘 산 밑에 있었다. 스랄의 영혼은 그 구멍으로 향했다. 아제로스의 다른 곳과는 달리, 그 동굴 속에 무엇이 있는지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가까이 가자 동굴 속에서 목소리가 뿜어져 나왔다. 목소리는 잔뜩 곤두서 있었고, 깊이를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주술사여.”


마치 아제로스 자체가 말을 걸어온 것처럼, 스랄의 영혼이 진동했다.


“이리 오라.”


스랄은 목소리가 부르는 곳으로 끌려들어갔다. 겉보기에는 뚫을 수 없을 것 같은 동굴 벽을 빙빙 돌다가 드디어 입구를 찾아냈다. 영혼이 구멍 안으로 들어가자, 바위와 흙이 딸려 들어왔다. 잔해가 합쳐져 다리, 몸통, 팔, 머리가 되었고, 다면체 수정 두 개가 눈이 되었다. 새로 구성된 몸은 대지가 만들어 주었다는 점만 빼면 진짜 몸과 똑같았다.


“누구십니까?” 스랄은 쇳소리를 내며 불러보았다. 어조가 가지런하지 않고 돌이 갈리는 듯했다.


넘실거리는 용암 웅덩이만이 방 안을 비추고 있었다. 벽과 바닥은 검은 결정이 섞인 광물로 덮여 있어서 주변의 빛을 모두 잡아먹는 듯했다.


지하 동굴 중심부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여기, 바로 여기에 이 세상의 진실이 잠들어 있노라.”


스랄은 그 말의 위엄에 이끌려, 쿵쿵거리며 방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한 걸음씩 나아갈 때마다 하이잘에 두고 온 몸, 그리고 아제로스 나머지 지역과의 연결이 약해져 갔다. 동굴 한가운데에는 사람 형상이 하나 서 있었는데, 그 얼굴은 만질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묘한 어둠에 감싸여 있었다.


터벅터벅 다가가니 그 조각상 같은 형체가 두 눈을 떴다. 이글거리는 용암빛 눈이었다.


형상을 가리고 있던 어둠이 사라지고, 기괴한 인간 남자 얼굴이 나타나자 스랄은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잿빛 얼굴의 턱 부위에는 거대한 금속 조각이 나사로 고정되어 있었다. 어깨에서는 삐죽삐죽한 뿔이 굽이치며 튀어나와 있었고, 손끝에는 비수처럼 예리한 손톱이 붙어 있었다. 용암 핏줄이 가슴을 가로질렀다.


스랄은 그 인간을 본 적이 없었지만, 정체는 느낄 수 있었다. 필멸자로 변신한 데스윙이었다.







“오만불손한 주술사가 끊임없이 나를 놀라게 하는구나.” 검은 위상의 목소리는 두 개의 커다란 바윗덩어리가 서로 부딪쳐 으스러지는 듯, 우르릉거렸다. “휘두를 자격도 없는 주제에 힘을 부리려 하느냐... 네가 이해하지도 못할 힘을.”


스랄은 동굴 입구 쪽으로 달아났다. 바닥에서 검은 수정판이 떨어져 나오더니 쾅 내리꽂히며 틈새를 막았다. 정령들이 길을 비켜주길 바라며 장벽을 어깨로 들이받았지만, 아제로스의 대지 정령들과는 달리, 악에 물든 광물은 부름에 답하지 않았다.


데스윙이 뒤에서 으름장을 놓았다. “흥미롭지 않나? 고대 신의 피는 이 세계의 것이 아니니, 네 기분 따위 맞춰주지 않는다. 선택받은 자만이 그걸 지배할 수 있지.”


스랄은 공격받을 것에 대비해 위상을 향해 몸을 돌렸다. 하지만 데스윙은 움직이지 않았다.


“네가 오길 기다렸다. 네 영혼이 무턱대고 하이잘 산비탈을 지나 기어오는 것을 보면서 말이지. 산을 넘어올 용기가 없는 줄 알았더니, 의외의 발전이더구나... 다른 위상들이 내 힘을 네게 주려고 한다. 내 자리를 필멸자로 채우려고 해.”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스랄의 능력이 한층 강해졌다고는 해도, 이세라와 위상들은 그에게 위상이 되라거나, 나아가 대지의 수호자가 되라고는 하지 않았다.


스랄은 고대 신의 피로 만들어진 판에 갈라진 틈이나 약한 곳은 없는지 더듬으며, 동굴 벽을 따라 살살 움직였다. “이 힘은 위상에게 받은 것이 아니오. 그리고 힘을 쓰기로 한 것은 전적으로 내 선택이었소.”


데스윙의 웃음소리에 동굴이 흔들렸다. “그렇게 믿게끔 했겠지. 주술사여, 곳곳에 내 눈길이 닿느니라. 위상들이 하이잘에 모여 술책을 꾸미는 것도 알고, 네가 그들과 함께 있는 것도 안다. 겁쟁이들 같으니.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너를 이 운명으로 끌어들여, 내 저주를 네게 떠넘기려 하는 게다.”


“당신이 받은 것은 저주가 아니라, 선물이었소.” 근래 들어 스랄은 티탄과 위상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옛날 옛적에 티탄 카즈고로스가 데스윙에게 대지의 영역을 관장할 힘을 주고 해로운 것들로부터 대지를 보호하는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그 임무 때문에 데스윙은 아제로스 안에 봉인된 고대 신의 영향력에 노출되어 버렸다. 데스윙이 배신한 일부터 황혼의 시간이 임박한 일까지, 위상들이 역사 속에서 갖은 고초를 겪었던 것은 모두 이 세상에서 생명의 씨를 말리려는 고대 신의 음모였다.


“선물이라고?” 데스윙은 소리 질렀다. “너도 다른 위상들처럼 잘못 알고 있구나.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은 감옥일 뿐인 것을 깨닫지도 못할 정도로 아둔하다니.”


스랄이 반박했다. “티탄은 목표를 준 거요.” 하이잘과의 연결은 더더욱 약해졌다.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육체의 손에 쥔 흙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들이 하는 일에 목표란 없다.” 데스윙은 자리를 박차고 스랄을 향해 걸어왔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방 안이 우르릉거렸다. “아제로스는 티탄에겐 실험에 불과했다. 장난감이었단 말이다. 갖고 놀다가 질리니 등을 돌렸고, 이미 버린 세계 따위 무너지든 말든 안중에도 없지 않느냐.”


스랄은 소리쳤다. “세상이 무너진 건 당신 때문이오. 당신이 그 선물을 팽개쳤기 때문이잖소!”


“선물이 아니라니까!” 데스윙이 분노로 몸을 떨었다.


스랄은 그의 말에 어떤 효력이 있음을 눈치챘다. 뭐라도 약점을 드러내길 바라며, 계속해 위상을 도발했다. “그 선물을 감당할 힘이 없었던 거겠지. 그 선물은...”


“닥쳐라!” 데스윙이 명령했다. “그걸 선물이라고 주장하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라. 하지만 알아둬라. 날 대신한다는 것, 이 잔인무도한 선물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세계의 불타는 심장을 직접 느낀다는 뜻이다.”


흙으로 만들어진 스랄의 가슴 깊은 곳에서 통증이 솟구쳤다. 아제로스의 핵 속, 꺼지지 않는 불꽃이 영혼을 휘저었다. 돌 피부가 쉭쉭거리며 김을 내뿜었고, 분노를 띤 검붉은 빛을 발했다.


“죽어가는 세계의 무게를 짊어진다는 게 어떤 건지 느껴 보아라.”


아제로스의 모든 바위가 차례차례 스랄을 짓누르자, 다리가 휘청거렸다. 몸이 쪼개지고 금이 갔다. 육체적인 고통을 넘어서는 감각이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중압감에 숨이 막혔고, 정신이 흐트러졌다.


“선물이 생각했던 것만큼 달콤한가?” 데스윙이 재미있다는 듯이 물었다. “이것이 바로 위상들이 하려는 짓이다. 널 나처럼 이 세계에 옭아 매려는 거야. 영원히 고통 받으며 사는 저주란 말이다.”


극심한 아픔을 견디다가, 스랄은 자기에게 엄청난 힘이 생겼음을 깨달았다. 이제 아제로스의 무게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 데스윙은 이런 이점을 내준 것을 알고도 저리 거만한 것일까?


스랄은 자신의 직감을 의심하지 않았다. 기다렸던 대로 데스윙이 빈틈을 보였다. 순식간에 아제로스의 무게를 주먹에 집중한 후 데스윙을 향해 내질렀다. 매혹될 만한 힘이었다. 산이라도 두 동강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검은 위상은 스랄이 다가와도 잠자코 서 있었다. 아제로스의 모든 무게와 힘을 실은 주먹이 데스윙의 가슴에 부딪히기 일보 직전, 그 힘은 손을 떠났다.


인간 모습을 한 위상의 몸에 주먹을 부딪자, 팔꿈치까지 산산조각 나버렸다. 부서진 팔에서 용암이 끓어오르는 듯한 아픔을 느끼며, 스랄은 주저앉아 울부짖었다.


아득히 멀리, 그의 육체가 있는 하이잘 근처에서 대지가 갈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

푸른용군단, 비전 마력의 절대 원칙을 담당하는 그들 중에는 필멸자도 있었다. 푸른용들이 한계를 지적해도, 칼렉은 새로운 발견을 해낼 잠재력만을 보았다. 그에게 마법이란, 냉철한 논리로 엄격하게 짜인 시스템이 아니라, 우주의 생명선이었고 끝없는 가능성이었다. 그가 아는 한 마법은 구현된 아름다움의 형태에 가장 가까운 것이었다.


이세라가 찾아와 용의 영혼의 용도에 대해 흥분해서 말했을 때, 그는 가능성 여부를 떠나 의문을 떠올렸다. 데스윙은 그 무기에 다른 위상들이 한 것처럼 정수를 불어넣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를 상대로 용의 영혼을 쓰기는 어렵지 않을까? 또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은, 용의 영혼을 그대로 사용하면 그 힘 때문에 어떤 용이든 피해를 받을 게 확실하다는 점이었다. 그 유물은 데스윙의 몸을 찢어발겨, 금속판으로 이어붙인 지금의 몸을 만들었다.


그런 난점이 있음에도, 칼렉은 그 유물을 잘만 사용하면 동경했던 위상들 사이에서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네 용군단이 절멸의 위기에 처해 있는 이런 때에, 그는 마법의 대표자가 되었다. 전임자였던 말리고스가 티탄 노르간논에게서 부여받은 놀라운 힘이 이제 그의 차지였다. 용군단 전체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푸른용들이 그를 선택했고, 신뢰하고 있다. 동족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알렉스트라자는 반신반의하는 투였다. “용의 영혼에는 데스윙의 힘이 담겨 있지 않으니, 데스윙에게는 효과가 없을 거요.” 이세라가 떠올린 발상을 칼렉에게 이야기한 후, 둘은 세나리온 야영지의 회합 장소에서 생명의 어머니와 만나 계획의 효용성에 대해 논의했다.







“맞습니다.” 푸른 위상은 말을 더듬었다. 위상들의 눈빛은 지루해 보였고, 자기가 입에 담는 모든 단어를 평가하는 것 같았다. “그의 정수가 필요합니다. 안타깝게도, 저희가 채취한 피 견본은, 실험에는 쓸모가 있긴 했으나, 여기에는 쓸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마력이 충분히 있으면, 용의 영혼이 가진 성질을 바꿔서 그에게 효과를 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이론적으로는요.”


“이론적이라고...” 생명의 어머니가 되풀이했다.


칼렉은 속으로 찔끔했다. 용의 영혼을 쓰는 건 확실히 위험 부담이 크다. 그 유물이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해 그가 가진 지식은 대부분 키린 토, 특히 로닌이라는 인간 마법사의 저서에서 얻은 것이었다. 로닌은 그 무기를 직접 다루어 보고 특성을 어느 정도 파악한 후 이를 주제로 논문을 남겼는데, 그 논문이 칼렉에게는 둘도 없는 정보원이었다. 다만, 증명된 내용이 너무 적었다.


“다른 방법이 없어.” 이세라가 나서 주어서, 칼렉은 안도했다. “언니가 힘들 거라는 건 알지만, 그게 옳은 길 같아. 이 무기가 화근이 돼서... 우릴 분열시켰잖아. 우리 삶의 암흑기는 시작과 똑같이 끝날 거야.”


알렉스트라자가 시선을 떨구었다. 칼렉은 파란을 예감했다. 사실, 알렉스트라자가 이 계획을 들으면 이런 반응을 보일 것 같아 걱정이었다. 유물에 얽힌 뒷이야기는 익히 알고 있었다. 고대의 전쟁 막바지에 푸른용, 녹색용, 청동용, 붉은용의 위상이 그 무기를 찾아내어 힘을 불어넣은 뒤로, 데스윙은 물론 다른 용들도 그걸 사용할 수 없었다. 수천 년이 지나, 용아귀부족 오크들이 용의 영혼을 손에 넣었고 그 힘으로 생명의 어머니와 붉은용들을 노예로 부렸다. 수많은 붉은용들이 전쟁용 탈것으로 혹사당했던 끔찍한 시간이었다.


“알렉스트라자 님, 이것이 우리가 기다려온 결론입니다.” 칼렉은 그녀를 안심시키려고 했다.


“알고 있소...” 쓸쓸한 목소리였다. “그럼 난 노즈도르무에게도 알려주러 가겠소. 연구를 계속하시오.”


시간의 지배자에게 모든 것이 달려 있었다. 칼렉이 유물을 변화시킬 방법을 찾아내더라도, 노즈도르무에게 도움을 청해 시간의 길에서 그것을 되찾아야 한다. 용의 영혼은 현재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10년도 전에 로닌에 의해 대부분이 부서졌고, 그 후 검은용 시네스트라가 남은 조각을 모아갔다. 당시에는 힘이 거의 사라진 조각이었는데, 그마저도 시네스트라가 죽으면서 흔적도 없이 부서져 버렸다. 시간의 지배자에게 물으면 용의 영혼을 가져오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하겠지만, 칼렉, 이세라, 알렉스트라자는 이 일을 꼭 성공시켜야 함을 알고 있었다.


생명의 어머니가 자리를 뜬 후, 칼렉은 세나리온 야영지의 작은 탁자 앞으로 돌아왔다. 그는 마력의 탑에 있는 대리인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수정구를 이용했기에, 야영지 곳곳에 수정구를 여러 개 흩뿌려 두었다. 한 개를 집어들고 손 안에서 굴리며, 용의 영혼이 가진 난점에 대해 곱씹었다.


칼렉의 곁에서 소리 없이 걷고 있던 이세라가 입을 여는 순간, 땅이 비틀리는 바람에 둘은 바닥에 나동그라질 뻔했다. 대지 고리회와 세나리온 의회가 머물고 있는 놀드랏실 밑동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두 위상은 경계하는 눈짓을 나누었다. 대격변 이후 지진은 흔하게 일어났지만, 이번 지진의 진원지는 바로 그들의 발밑에 있는 듯했다.


대지가 다시 한 번, 전보다 난폭하게 일렁였다.


“이럴 수가...” 눈이 휘둥그래진 이세라가 드루이드식 건물의 나무벽을 단단히 붙잡았다. 그녀의 목소리에 공포와 수긍이 섞여 있는 것이 칼렉을 불안하게 했다.


“데스윙입니까?”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가 온 건가요?”


녹색의 위상은 말없이 건물 밖으로 뛰어나갔다. 칼렉도 그녀를 따라 놀드랏실 밑동으로 달려갔다.


세계수 주변에 균열이 잔뜩 생겨 있었다. 주술사와 드루이드들이 균열 속으로 떨어진 동료들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세라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혼란스러워 하는 칼렉을 아랑곳하지도 않고, 그녀는 세계수를 지나 나무들이 둥글게 줄지어 있는 고요한 공터로 올라갔다. 공터 한가운데에 스랄이 앉아 있었다. 보아하니 명상에 빠진 듯했다. 곁에는 반려자인 갈색 피부의 오크 여성이, 그의 어깨를 흔들어대고 있었다.


칼렉과 이세라가 공터에 들어서자, 아그라가 두 위상을 돌아보았다.







“고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그녀는 스랄을 본명으로 불렀다. “지진이 일어났을 때 이이를 찾아 보았더니 여기 이러고 있었습니다. 명상에서 깨질 않는데, 어떻게 된 걸까요?”


이세라가 스랄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는 심하게 고통받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지만 몸에서는 상처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건 그가 한 일이다...”


깨어난 여왕은 스랄의 왼손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았다. 칼렉이 보기에는 손 안에 아무것도 없었다. 녹색의 위상은 멈칫하더니 재빨리 흙을 한 줌 집어 오크의 손바닥에 놓아 주었다.


칼렉이 물었다. “스랄이 지진과 관계가 있습니까?”


“그는 지금껏 다른 주술사들이 해온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대지와 소통했소. 이 땅이 그의 일부이며, 그 또한 땅의 일부요. 무언가가 그의 영혼을 가둬 놓았소. 이 균열... 이것은 그의 상처요.”


“그이를 구할 방법이 있어야 할 텐데요.” 아그라가 애원했다.


“그의 영혼이 하이잘에서 너무 멀리 가지 않았다면, 가능성이 있다.” 이세라가 자리에서 일어나 아그라에게 손짓했다. “주술사와 드루이드가 마음을 모아야 한다. 우리가 할 일이 많구나.”


스랄의 배우자는 망설였다. “이이를 이대로 두고 갈 수는...”


“그를 살리고 싶으면 날 믿어야 한다.” 이세라의 목소리는 속삭임에 가까웠지만, 칼렉은 강한 위기감을 느꼈다.


아그라도 똑같이 느꼈으리라. 그녀는 천천히, 녹색의 위상에게 협조했다.


“이세라 님, 제가 할 일은 없습니까?” 칼렉은 몹시 소외감을 느꼈다. 스랄이 궁지에 처해 있는 곳은 정령계였기 때문에, 그곳에서 푸른 위상은 아무 힘이 없었다.


“그의 곁에 있어 주시오. 무슨 일이 있든, 손에서 흙이 떨어지지 않게 해 주시오.”


그리고 이세라와 아그라는 육체를 떠났다. 떠나며 아그라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어깨 너머를 돌아다보았다.


칼렉은 원하던 대답을 듣지 못했지만, 그래도 시키는 대로 따랐다. 혹시 이세라가 그를 별볼일 없다고 생각해서 이런 하찮은 임무를 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잠깐 들었으나, 깨어난 여왕이 그런 식으로 다른 이를 판단하지는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말에 다른 뜻은 없었다. 그가 해줘야 하는 일이었다. 그뿐이었다.


칼렉은 스랄 옆에 앉아, 어쩌면 자기가 이기적인 마음으로 데스윙을 쓰러뜨릴 방법을 찾으려고 몰두했던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주위를 둘러보니, 실행 가능한 방법이 더 있었다. 만약 스랄이 진짜로 대지와 일체화를 이룬다면, 그것은 다시 말해, 데스윙이 그러했듯이 이 필멸자가 자기 영혼 안에 아제로스의 일부를 담게 된다는 뜻이 아닌가?


푸른 위상은 옆에 있던 주머니에서 수정구를 꺼냈다. 잠시 후 수정구 속에서 희뿌연 안개가 사라지고, 푸른용군단의 나리고스가 얼굴을 드러냈다.


“칼렉고스 님.” 나리고스가 머리를 조아렸다.


푸른 위상도 말하기에 앞서 예를 갖추었다. “예전에 용의 영혼으로 붉은용군단을 공격한 단명의 존재가 있었는데, 맞소?”


나리고스가 대답했다. “네크로스 스컬크러셔라는 오크였습니다. 야비하기 짝이 없는 놈이었죠.”


“맞아, 맞아. 그 녀석이었소. 유물의 반작용으로 놈이 받은 피해는 어느 정도였소?”


“로닌의 기록에 의하면, 전혀 없답니다.” 나리고스가 서술했다. “용의 영혼은 우리 종족과 달리 단명의 종족에게는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답니다. 사실 그런 점에서 꽤나 특이한 물건입니다.”


“고맙소, 친구여. 그거면 됐소.” 칼렉은 수정구를 다시 주머니 속으로 흘려넣었다.


스랄, 대지의 정수에 다가간 필멸자. 푸른 위상은 곰곰이 생각했다. 얼마 전 그 오크는 칼렉, 이세라, 노즈도르무, 알렉스트라자에게 대지의 힘을 보태어, 위상의 힘을 합치고 데스윙의 부하들이 공격해 오는 것을 늦추었다. 그때 그의 역할은 아제로스의 전달자일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주술사는 더욱 성장했다. 그가 해답이었다... 용의 영혼을 창조한 장본인에게 들이댈 수 있게 해줄 버팀목이었다.


칼렉고스는 스랄의 손바닥에 흙을 얹으며 오크의 얼굴이 고통으로 뒤틀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위상들의 고난을 끝낼 유일한 희망이 생겨나기도 전에 사라질까 두려웠다.




****

데스윙이 스랄의 가슴을 손톱으로 긁어, 돌 피부에 또 하나 깊은 자국을 내었다. 주술사의 몸에는 손톱 자국이 가득했지만, 목숨에 지장을 주는 상처는 없었다.


검은 위상의 목적은 스랄의 의지를 꺾어 뜻대로 움직이는 인형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스랄은 그것 말고는 적이 왜 아직까지 자신을 죽이지 않는지 설명할 도리가 없었다.


데스윙은 성공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동굴 속에 갇힌 스랄의 영혼은 고통 말고는 아제로스를 느낄 수 없었다. 이 상황이 몇 주 전 그가 의심, 공포, 분노에 사로잡혀 있었을 때 일어났다면, 벌써 굴복하고 이 외진 감옥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렸을 터였다. 그러나 그는 지금 주술사로서 자신의 목표에 더할 나위 없는 확신이 있었다.


“티탄은 당신이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했겠지.” 스랄이 말했다. 위상에 비하면 그의 힘은 보잘것없었기에, 그는 유일한 무기인 말을 사용했다. “그들은 당신을 믿었소. 당신이 임무에 실패하고 아제로스의 생명체들에게 종말을 안기려는 존재와 한패가 된 건 두려움과 의심 때문이 아니오?”


“주술사여, 엇나간 충성심을 갖고 있구나. 티탄이 그럴 마음만 먹었으면, 생각할 것도 없이 너희 종족과 여타 하급 족속들을 몰살시켰을 게다. 고대 신들은 티탄의 작품이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내가 묶인 사명에서 풀어 주겠다 약속했느니라. 그날이 오면, 나는 티탄의 흔적을 죄다 쓸어버리고 이 세상 위에 군림할 것이다. 아제로스는 새로 태어나는 거다.”


데스윙이 스랄의 가슴을 무릎으로 짓눌러 벽에 몰아붙였다. 스랄이 일어나려고 발버둥칠 때 동굴 밖 지표를 넘어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지 고리회의 목소리였다. 멀른 어스퓨리, 노분도, 그리고... 아그라.


주술사들이 자신을 찾고 있는 것이 정령들을 통해 전해졌다. 원래의 육체를 향해 정신을 집중했더니, 놀랍게도, 손 위에 축축하고 시원한 흙덩이가 새로 놓여 있는 것이 느껴졌다. 하이잘과 동굴 사이에 놓인 대지를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집중력을 남김없이 쏟아부어 동굴 밖의 정령들에게 마음 속으로 소리쳐 대답했다.


침묵이 뒤따랐다.


스랄은 힘이 생기면 다시 외쳐 보려고 자신을 가다듬으며, 돌덩이 몸을 치유하기 시작했다. 주술사들이 하이잘에 생긴 균열을 메우고 있는 것도 느껴졌다. 덕분에 자신의 상처가 낫고 있었다. 새 힘을 얻은 스랄은 몸을 일으켰다.


“내 질문에 아직 대답하지 않았소. 두려움과 의심 때문에 실패한 거요?”


데스윙의 눈이 진홍빛으로 이글거렸다. 그는 스랄에게 달려들어 목을 움켜잡고 공중으로 들어올렸다. 검은 위상은 오크의 뱃속에 서슬 퍼런 손톱을 쑤셔넣었다.


“중심부가 망가진 생태계에서, 진실을 보지 못하는 것이 곧 실패다. 너와 다른 위상들이 잘못된 명분으로 가엾은 생물들을 기만하든 말든 중요하지 않다. 너희들이 가망 없는 미래를 향해 목숨을 내던질 때, 누가 이기는지 두고 보자꾸나.”


데스윙이 움켜쥔 스랄의 목에서는 돌 피부가 녹아내렸다. 손아귀를 더욱 조이자, 손가락이 목을 파고들었다. 하이잘과 스랄 간의 결속성이 다시 약해졌다.


스랄은 이를 드러내며 몸부림쳤다. “아니... 이기는 건 우리요... 우리는 어려움에 맞서... 서로 도왔으니까. 당신이... 실패한 이유는... 그 무거운 짐을... 혼자서 짊어지려고 했기 때문이오!”


스랄이 데스윙의 화를 돋운 결과 동굴 주변의 대지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검은 위상은 공격에 박차를 가하는 대신, 갑자기 스랄을 내동댕이쳤다.


데스윙이 손을 쳐들고 분노에 차 울부짖었다. 고대 신의 거대한 핏덩어리들이 동굴 바닥에서 떨어져 나와 천장 귀퉁이에 두꺼운 결정 벽을 이루었다. 영문을 모르던 스랄이 진동의 원인을 파악하는 데는 잠시 시간이 걸렸다. 놀드랏실의 뿌리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바위와 흙을 뚫고 동굴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대지 고리회가, 아마도 세나리온 의회와 함께, 그를 찾아낸 것이다.


스랄은 몸을 날려 데스윙을 들이받았다. 위상이 바닥에 쓰러짐과 동시에 시전하던 주문이 중단되었다. 데스윙은 씩씩거리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의 몸이 고동쳤고, 가슴에 파인 틈에서는 용암 촉수가 스르르 기어나왔다. 검은용이 스랄에게 다가오려는 순간, 놀드랏실의 뿌리 중 하나가 결정 가루를 흩날리며 동굴 벽을 뚫고 들어왔다.


데스윙은 세계수의 뿌리가 달려드는 것에 맞춰 자세를 잡았다. 잠깐 동안 그는 뿌리에 맞서 자리를 지켰지만, 뿌리는 살아 움직이는 공성 망치와 같았고, 코도의 배 둘레보다도 거대했다. 곧 또다른 뿌리가 세 갈래 더 따라와 동굴을 덮치고 검은 위상을 밑바닥으로 몰아넣었다.


다섯 번째 뿌리가 서서히 구멍 안으로 들어왔다. 다섯 번째는 스랄의 허리를 감싸 밖으로 꺼내주었다. 밖에 나오자, 육체와의 연결이 견고해졌다. 대지를 느껴 보니, 고대 신에게 잠식된 곳 없이 원래 모습 그대로였다. 스랄이 겪었던 모든 고통과 고난, 데스윙의 존재감과 같은 영혼이 찢겨나가는 감각도, 눈 녹듯 사라졌다.




****

알렉스트라자는 시간의 지배자가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산 정상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곳은 드루이드와 주술사들의 야영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생명의 어머니는 용 모습을 취했다. 오랫동안 엘프의 몸으로 지내다가 다시 날개를 펴니 기분이 상쾌했다. 마찬가지로 용 모습인 청동의 위상 옆에 착지해 이세라와 칼렉의 계획, 용의영혼을 어떻게 이용할지와 그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추측하건대 노즈도르무는 거부하리라. 이유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그는 예상했던 것보다 침착한 태도였다.







노즈도르무가 말했다. “용의 영혼이라... 과거로 돌아가 바로잡고 싶었던 날들이 있었다오. 말리고스의 용군단을 구하고... 그 끔찍한 운명에서 우리 모두를 구하고 싶었소.”


시간의 지배자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시선은 흔들림 없이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바람을 행동에 옮겼다면, 무한의 용군단과... 미래의 나 자신과 다를 바가 없겠지.”


알렉스트라자가 대답했다. “그대는 그대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특별한 존재요. 이오나는 내게 생명을 보호하라는 사명을 주셨소. 용의 영혼 이야기가 불거졌을 때도, 나는 사상 최악의 무기를 현세로 가져오면서 내 임무를 지켜나갈 수 있을까 자문했었지.”


“그래도 가져올 거잖소.” 노즈도르무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소. 생명을 지켜내려면, 위협이 되는 것들을 제거해야 할 때도 있으니까...”


생명의 어머니는 자신과 붉은용군단뿐만 아니라, 다른 생명체들까지 용의 영혼 때문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던 역사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했었다. 결국, 그녀는 어려운 결론에 도달했다. 세상을 지킬 수 있다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아깝지 않았다.


“그대가 틀렸다고 믿는 일을 강제로 시킬 수는 없지만, 생각해 보시오. 이 세계가 죽어가는 것을 그저 지켜보라고 아만툴이 그대에게 시간을 다스리는 힘을 주었겠소?”


“그 미래는 무한의 용군단이 점거했소. 내가 거기 갔더라면...” 노즈도르무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시간의 지배자는 걱정과 두려움에 차 있었다. 생명의 어머니는 시간의 길이 어찌될지를 떠나, 종말에 관련된 무언가가 청동의 위상을 괴롭히고 있음을 감지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노즈도르무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했다. 그가 근심거리를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그의 선택이었다.


알렉스트라자는 노즈도르무 쪽으로 고개를 숙이고 부드럽게 말했다. “그대들 각자에게 선물을 내리며...”


“그대들 모두에게 임무 또한 내리노라.” 시간의 지배자가 주저함 없이 고대의 말을 끝맺었다. 그것은 티탄이 위상들에게 남긴 마지막 명령으로, 각자 특별한 힘과 지식을 가졌지만 이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암시였다. 모두가 하나였다.


“내가 생명을 맡았듯이, 그대는 시간을 맡고 있지. 하지만 우리 모두의 임무는 무엇이겠소?”


노즈도르무가 나지막히 말했다. “이 세계를 보전하는 것...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황혼의 시간을 막는 것.”


그리고 시간의 지배자는 입을 다물었다. 생명의 어머니는 그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보았다. 슬픔이 북받쳤다. “대리인 중에 돌아온 자가 있소?”


“아니. 아무도 오지 않겠지. 그래도 기다리는 거요. 일전에 시간 속을 방황하던 나를 스랄이 구해주었지. 지금은 시간 밖을 방황하고 있구려.” 청동의 위상이 싱긋 쓴웃음을 지어서, 알렉스트라자는 깜짝 놀랐다.


시간의 지배자는 마침내 지평선에서 눈을 돌려 알렉스트라자를 보았다. “내가 너무 오랫동안 융통성 없이 굴었지. 그대의 말이 사실이오. 기다림의 시간은 지나갔소...”




****

네 용의 위상과 스랄은 놀드랏실 발치에 있는 드루이드 거처에 모였다. 그들 가운데에, 이 세상 것이 아닌 용의 영혼의 형상이 둥둥 떠 있었다. 알렉스트라자는 거기 서 있는 것만으로 오싹해졌다. 이 광경은 수천 년 전, 유물에 힘을 불어넣는 의식을 거행했던 때를 떠올리게 했다.







그것은 칼렉고스가 마법으로 소환한 복제품에 불과했지만, 힘을 가지고 있었다. 위상들은 용의 영혼 환영이 발하는 연보랏빛 광채에 감싸이자, 자신들의 그림자가 깜박이며 필멸자 모습과 본래의 용 모습을 번갈아 비추는 것을 알아챘다.


노즈도르무가 말을 꺼냈다. “용의 영혼을 손에 넣으려면, 먼저 내가 예견한 미래로 떠나야 하오. 시간의 끝 그 자체지. 종말에 군림하는 무한의 용군단과 그 지도자를 처치하면 시간의 길이 다시 열리고, 그러면 과거로 가서 용의 영혼을 되찾을 수 있을 거요.”


“시간의 길에서 유물을 갑자기 끄집어내면 역사는 어떻게 흘러갑니까?” 스랄이 물었다. 오크는 위상들 사이에서 말없이 서 있기만 했다. 그에게서는 이미 많은 도움을 받았기에 생명의 어머니는 그를 쉬게 하고 싶었으나, 아제로스를 구하려면 그가 다시 한 번 목숨을 걸어 주어야 했다.


“시간은 어떤 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일직선으로 뻗어 있지 않다. 청동용군단이 역사의 흐름을 멈추고 우리가 과거에 끼칠 영향을 무효화시킬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오래도록 시간을 완전무결하게 지켜 왔다. 이번 일이 끝나면, 용의 영혼을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려놓겠다...”


칼렉고스가 말을 이었다. “원래 있어야 할 곳 말입니다만, 용의 영혼을 획득할 수 있는 지점은 많습니다. 그렇지만 이 유물은, 역사의 흐름에 따라 특질이 변화했습니다. 성공하려면 그 무기가 가장 순수했을 때의 상태로 사용해야 합니다. 노즈도르무 님이 길을 여시면, 용의 영혼이 만들어진 바로 그 시대에서 가져올 겁니다. 고대의 전쟁 시대 말입니다.”


“운반자가 남았군.” 알렉스트라자가 스랄에게 손짓했다.


“친구여.” 칼렉고스가 스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제가 알아낸 바로는, 이 유물은 용이 만지면 만진 자를 갈가리 찢어 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고통에 차 미치게 만들죠. 하지만 짧은 삶을 사는 존재라면, 그런 천성 때문에 육체적 손상 없이 용의 영혼을 사용할 수 있을 겁니다.”


“스랄, 우리의 부탁을 들어주려면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할 것이야.” 이세라가 명랑한 목소리로 분위기를 띄웠다. “용의 영혼을 현재로 가져오면, 고룡쉼터 사원으로 들고 오너라. 그 유물에 처음으로 힘을 담은 위상의 방, 그곳으로 이어지는 강력한 힘이 고룡쉼터 사원에는 있다. 용의 영혼에 이미 힘이 담겨 있겠지만, 우리가 다시 한 번 정수를 주입해 전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만들겠다... 더 불안정해지기도 하겠지. 데스윙이 우리 속셈을 알면, 부하들과 함께 사원에 들이닥쳐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대를 막으려 들 테니 주의하여라.”


스랄이 겸손하게 말했다. “여러분의 지혜를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아제로스의 다른 종족들도 데스윙 때문에 고통받고 있습니다. 필멸자들로 이제껏 본 적 없는 대규모 군대를 조직하여 검은 위상을 칠 수도 있습니다. 이쪽이 더 간단한 방법 아닙니까?”


알렉스트라자가 말했다. “살아 있는 모든 필멸자가 데스윙을 치더라도, 아무 소용 없다. 그는 고대 신이 가진 어둠의 힘에 의해 뒤틀렸다. 물리적인 공격은, 제아무리 강하더라도 그를 처치할 수 없어. 그는... 흩어져야 해. 그의 본질적인 정수를 흐트러뜨려야 하는데, 용의 영혼만이 그 일을 해낼 수 있다.”


“그대가 도와줘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칼렉이 덧붙였다. “용의 영혼은 네 위상의 힘을 담고 있지만, 데스윙은 힘을 주입하지 않았습니다. 이 무기로 그를 쓰러뜨리려면, 대지의 수호자의 힘을 불어넣어야 합니다. 스랄, 그대에게는 작긴 하지만 그럴 힘이 있어요. 아제로스 대륙의 정수를 담은 힘이.”


“용의 영혼을 우리가 직접 사용할 수는 없다.” 알렉스트라자는 스랄에게 말했다. “그대의 몫이다... 그대가 해준다면 말이지. 이보다 큰일을 부탁할 수는 없을 것이야. 이미 목숨 걸고 우릴 도와준 그대이니.”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니 황송합니다. 허나 한 가지만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단명의 종족들이 라그나로스를 몰아냈고, 그 이전에 리치 왕이며 수많은 적들을 쓰러뜨렸습니다. 저희는 몇 번이고, 아제로스의 방패가 되었습니다. 저희에게도 여러분만큼이나 싸울 권한이 있습니다. 정중히 말씀드리건대, 이 숭고한 계획이 성공하려면 그들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스랄의 말이 옳음은 두말할 여지가 없었다. 알렉스트라자는 이 험난한 여정에 필멸자를 더 끌어들이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그들이 원한다면, 물론 환영이다.”


“원하는 자들은 언제나 있지요.” 오크가 미소 지었다. “도움을 청하겠습니다.”


스랄이 떠난 후, 위상들은 침묵 속에 남겨졌다.


“한 가지 의문이 떠나질 않습니다.” 칼렉이 입을 열었다. “우리의 목적이 황혼의 시간을 막는 것이라면, 그것이 티탄이 우릴 만든 이유라면, 일이 끝난 후 우리는 어찌 되는 겁니까?”


칼렉의 말에 방점을 찍듯이, 싸늘한 바람이 세나리온 야영지를 쓸었다. 안색이 변한 위상들은 서로 눈짓을 교환했다. 모두가 이 까다로운 수수께끼를 놓고 고민하던 참이었다.


노즈도르무가 되뇌었다. “그래... 임무를 다하고 나면, 그 뒤에 우리는 무슨 쓸모가 있단 말이요? 시간의 길이 오염돼서, 아무리 나라도 우리 앞에 놓인 미래를 볼 수가 없소...”


“우리가 하려는 일은 손해일까... 아니면 이득일까?” 이세라는 생각에 잠겼다.


“티탄에게는 틀림없이 계획이 있었을 겁니다.” 칼렉의 주장이었다. “마법, 시간, 생명, 자연... 이것들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입니다. 이들을 영원토록 지키기 위해서 우리가 존재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알렉스트라자는 다른 위상들이 목소리를 높여 각자의 소망과 걱정을 놓고 논쟁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들 앞에는 곧은 길이 뻗어 있었으나, 황혼의 시간 너머로는 뿌연 안개에 뒤덮여 분명하지 않았다. 생명의 어머니도 마음 속에 공포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용의 여왕이었고, 동료들을 이끌어야 할 때가 있다면,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우리 중 누구도 확실히 알지 못하오.” 알렉스트라자가 말하자 다른 이들이 주의를 집중했다. “안다고 한들, 무슨 상관이 있소? 티탄이 우리에게 사명을 준 이유잖소. 바로 지금이 우리가 받은 경이로운 힘을 발휘해야 할 때요.”


생명의 어머니는 바로 옆에 있는 두 위상, 이세라와 칼렉고스의 손을 잡았다. 그들은 또 노즈도르무와 손을 잡았다. 모두의 마법이 합쳐져, 서로에게 흘러들어갔다. 마음을 달래주는 그 힘 덕분에 초조해하던 위상들의 마음이 진정되고 굳건한 의지가 솟아올랐다.


알렉스트라자가 말했다. “우리는 하나로서 미지를 향해 뛰어들 것이오. 언제나 그리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