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조스는 아마도 아제로스의 역대 악역 중에 게임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알려진 게 가장 적은 녀석일 겁니다. 

이 심연의 신은 검은 제국이 파괴된 이후로 단 한번도 지상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대신 아즈샤라/데스윙/자비우스 등 자신의 입맛대로 이용할 수 있는 녀석들을 타락시켜 써먹었습니다. 돌겜에서는 그런 느조스의 성향을 반영해서인지 '타락자' 라는 수식어를 앞에다 붙여주었습니다. 

워낙 정보가 적다 보니 느조스의 실체에 대해서는 연대기에서 아주 간략하게 나온 부분, 플레이어를 언제든 죽이려고 작정하는 잘아타스의 대사, 그리고 일부 고대신 몹들의 쑤네빠야 꿀라 같은 것들에 의존해 파악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중 그나마 소스를 많이 제공하는 잘아타스의 말들을 발췌해 보겠습니다.


'우습게도 우리 중 가장 약한 녀석이 최후의 승리자가 될 것 같네요. 크툰, 요그사론, 이샤라즈.. 마지막 남은 존재가 이 세계를 삼키는 거죠. 뭐.. 항상 그렇잖아요?'

'오래 전 바로 이곳에서 심연의 신이 일곱 머리의 신에게 패배했어요. 하지만 대체로 그랬던 것처럼, 패배도 결국 느조스의 입맛대로 작용하죠.'

'심연의 신이 꿈틀거리며 서서히 빠져나오려 하고 있어요. 어서 이 타락한 티탄을 처치하세요. 더 거대한 전투가 다가오고 있으니까요.'


느조스의 약함과 패배를 디스하면서도,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암시를 하거나 티탄보다 무서운 적으로 띄워주기도 합니다.

일단 타락한 티탄에 관해서는 (아르거스를 지칭하는 게 아니라면) 느조스가 살게라스보다 물리적으로 강하다는 말일 가능성은 별로 없습니다. 최강의 고대신 이샤라즈는 전성기의 오딘과 라 토림 등 티탄 수호자들이 전부 달려들어도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지만, 아만툴이 결국 잡아뜯어버렸고 그런 이샤라즈에게 패한 느조스가 살게라스의 공격을 견딜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아마도 느조스가 만들 공허 티탄 혹은 느조스를 보낸 공허의 군주들의 개입을 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니면 전체적으로 봐서 불타는 군단보다 느조스가 주도할 검은 제국이 더 처리하기 골치아플 거라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불타는 군단은 우주를 정복하는 강력한 군대이지만, 침공지가 너무 멀 경우 현지에서의 제대로 된 호응이 있어야 병력을 투사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아제로스에서 불군의 협력자가 제거될 경우 침공 전력이 고립된다는 약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본진이 아제로스가 아닌 뒤틀린 황천에 있기 때문에, 무슨 극단적인 수를 쓰던 간에 그 본진을 망가뜨리기만 하면 아제로스에 영향을 주지 않고 불군에 결정타를 안길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일리단은 그 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결국 성공할 예정입니다. 

반면 느조스를 비롯한 고대 신들은 플레이어들이 지켜야 하는 아제로스 그 자체에 기생해 있습니다. 행성 단위의 정밀한 외과수술을 하지 않는 이상 고대 신들을 완벽하게 죽이기가 힘들고, 감옥과 감시 병력을 끊임없이 보강하지 않는 이상 시간만 있다면 고대신들은 언제가 되건 봉인을 풀고 아제로스를 차지할 겁니다. 고대 신의 몸에서 나온 아퀴르와 얼없자 등의 병력도 끊임없이 나타나겠지요.

물론, 불타는 군단의 알파이자 오메가인 살게라스를 전력에서 빼고 말하는 건 불공평할 겁니다. 우주에 유일하게 본체가 건재한 지옥 티탄은 물질계의 다른 모든 세력이 힘을 합쳐 덤벼도 상대가 안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어느 시점부터 살게라스는 아제로스 행성 자체에는 거의 위협이 안 되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유물 무기 살게라스의 홀 연구에 따르면, 살게라스는 고대의 전쟁에서 뒤틀린 황천으로 튕겨나는 순간 기이한 환영을 보았습니다. 그 환영은 아제로스 세계혼의 모습으로 한쪽 눈을 뜨고 살게라스를 바라봤습니다. 눈을 뜬 세계혼에 매혹된 살게라스는 전략을 완전히 바꿔 아제로스 폭파가 아니라 아제로스를 악마화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대체 누가 타락한 티탄에게 그런 환영을 보여줬는지는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세계혼 자신이 그랬을 수도 있지만, 글쎄요? 아무튼 이로 인해 살게라스는 아제로스에 직접 공격을 가할 생각을 안 하게 되었고, 동시에 고대 신들이 티탄 본체에게 비명횡사할 확률은 매우 낮아지게 되었습니다. 결국엔 최후에 봉인당할 때에나 칼 한번 휘두르고 마는 정도로 끝났습니다. 이제 타락한 티탄과 나머지 티탄 영혼들이 모두 판테온의 옥좌에 묶이게 되었으니, 고대 신들을 물리적으로 손쉽게 제압할 수 있는 존재는 찾아보기가 힘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때맞춰 느조스의 감옥은 느슨해졌습니다. 만약에 느조스가 지금까지 실패한 모든 악역들처럼 성급했다면 이 시점에서 전면에 나설 수도 있겠지만, 잘아타스의 대사에 따르면 아마도 느조스는 1보 후퇴 뒤 2보 전진을 하는 전략을 구사하는 것 같습니다. 말인즉슨, 여태까지의 다른 악당들에게 결여된 겸손과 인내력이라는 미덕을 지니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나중에 등장할 수도 있습니다.

크툰은 퀴라지와 실리시드를 직접 조종해 흐르는 모래의 전쟁을 일으켰고, 요그사론은 티탄 수호자들을 정신지배하고 알갈론을 소환시키는 위험한 도박을 벌이면서 힘을 과시했습니다. 둘 다 고대신다운 전략이고 거의 성공할 뻔했지만, 얼라이언스와 호드라는 필멸자 용사들의 개입으로 전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둘 다 완전히 봉인에서 풀려나고 전성기 시절 모습을 되찾은 것도 아닌데 성급하게 나섰다가 얻어맞고 격퇴당하는 굴욕을 당했지요.

반면 느조스는 바다 아래의 자신을 철저하게 숨기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여러 중요한 인물들을 자신의 입맛대로 잘 이용하고 있습니다.

데스윙을 보자면, 느조스의 부관 존오즈가 대격변 당시 고룡쉼터 사원 공격을 지원하며 데스윙 광기의 배후에 느조스가 큰 역할을 했음을 암시했습니다. 데스윙이 당시 무슨 생각으로 대격변을 일으키려 했던지와 상관없이, 결국 데스윙은 나머지 위상들의 힘을 전부 앗아가면서 아제로스에서 티탄의 안배를 크게 없애 느조스의 일을 많이 덜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두 고대신과는 달리 자기 꼬리는 철저히 잘라내는 것도 성공했습니다. 육체에는 전혀 타격이 가지 않았을 뿐더러 그 위치나 존재여부조차도 확실치 않죠. 물론 데스윙이 끝까지 쭉 밀고 황혼의 시간이 이뤄졌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안 되어도 느조스에게 나쁠 건 전혀 없습니다.

다음은 자비우스입니다. 에메랄드의 악몽은 본디 요그사론이 볼드랏실에서 열어제낀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그걸 가지고 크게 뭔가를 벌인 쪽은 자비우스를 앞세운 느조스였습니다. 자비우스는 심연의 신의 후원 아래 녹색용군단과 꿈의 수호자 말퓨리온을 계속 핀치에 몰아붙여 현실 세계를 공격했습니다. 결국엔 졌지만요.
그런데 이 녀석은 느조스와 어울리기 오래 전부터 살게라스를 섬긴 명가의 일원이었고, 무슨 나무 비슷한 것으로 악몽을 이끌었던 스톰레이지 소설 당시와는 달리 군단 침공 시점에는 다시 사티로스의 모습으로 돌아와 야망을 드러냅니다. 잘아타스는 이렇게 평합니다.

'자비우스는 계속해서 주인을 바꾸며 힘을 탐하지만, 결국 거듭 패배하고 말았어요. 심연의 신이 꽤나 보잘 것 없는 용사를 택했군요. 아니면 뭔가 다른 생각이 있는 걸까요?'

제가 볼 때 느조스는 자비우스의 이용가치가 다했다고 보고, 군단에 알랑거리는 꼴보기 싫은 사티로스를 유저들이 죽이도록 내준 다음 에메랄드 악몽의 가장 깊은 곳은 보존하는 길을 택한 것 같습니다. 자비우스를 죽이면 세나리우스 등 악몽에 감염된 에메랄드의 꿈이 전부 정상화된 것처럼 보이지만, 이세라의 환영을 따라가 보면 여전히 공허의 잔재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이것도 느조스 특유의 거짓 후퇴 전략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출처 - 역게 jnysh 님 게시글 스샷)


마지막으로 아즈샤라입니다. 아즈샤라와 물에 빠진 명가의 일원들은 샤라스달의 힘으로도 심연에서 살아나는 것이 불가능했고, 결국 느조스의 손길을 거쳐 나가로 변모했습니다. 느조스가 그랬다 라고 확정적으로 나온 건 아니지만 딱히 다른 후보가 없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아즈샤라와 나가들은 고대 신의 세력을 자신의 상위로 보지 않고 동맹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바쉬르에서 크발디르와 나가의 전쟁 때 등장하는데, 크발디르의 맹공에 밀리던 나가들이 동맹인 얼굴 없는 자들의 소환의식에 성공해 역으로 크발디르를 몰아붙이게 됩니다. 또한 이 나가들은 어디까지나 아즈샤라를 위해 싸우지 황혼의 망치단처럼 고대 신을 섬기고 그 뜻을 받들거나 하지 않습니다. 즉, 나가들은 분명 심연의 신의 축복을 받아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되었음에도 거의 만 년 동안 느조스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지 않았다는 뜻이 됩니다.

이게 언뜻 보면 좀 이상하지만, 느조스의 행동 양태를 가정하면 설명이 가능합니다. 첫째, 느조스는 바깥 세력에 자신의 위치를 가능한 숨기고 싶어합니다. 둘째, 외부 인물들과 깊은 주종관계를 맺는 대신 그들에게 어떤 행동을 유도해 그로 인한 이익을 얻습니다. 해저에 잠겨있을걸로 추정되는 느조스의 위치상 나가들은 자신의 영역에서 수륙양용으로 부릴 수 있는 매력적인 부하들이지만, 동시에 수중 감옥의 위치를 적에게 드러낼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직접 정신지배를 하고 부관을 둬 이래라저래라 하기보다는 간접적으로 도움을 주는 척 하면서 천천히 이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지상을 다시 지배하길 원하는 아즈샤라의 허영심을 채워주는 형태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어쨌든, 군단이 종결되는 확팩 시점까지의 모든 진행 상황은 느조스의 최종 승리 가능성을 점점 높여주고 있습니다. 위상은 힘을 잃었고 다른 고대신들은 상대적으로 무력화되었으며 군단은 붕괴될 예정입니다. 그리고 아제로스는 검에 찔려 그 목숨조차도 위태위태한 상황이 될지 모릅니다. 느조스는 감옥에서 기어나와 남들이 힘들게 싸워 차려놓은 과실을 먹기만 하면 되지만, 여전히 변수들은 있습니다. 


1. 마그니 브론즈비어드

마그니가 아제로스 티탄의 대변자가 된 이상, 아제로스에 해를 끼치려는 모든 세력들은 마그니가 필멸자들에게 아제로스의 생각을 술술 털어놓는 걸 극도로 경계해야 합니다. 마그니가 속고 있는 게 아니라면요


2. 크툰과 다른 고대신들의 재기

살게라스는 하필이면 실리더스를 찔렀습니다. 느조스 본인이 칼빵당하지 않은 건 다행이지만, 이 일로 크툰이 아제로스의 힘을 쭉쭉 빨아 모습을 드러낸다면 죽쒀서 남주는 꼴이 됩니다. 만약 그런 전개가 실제로 이뤄질 경우 느조스는 오랜 전통을 따라 필멸자들의 어그로가 크툰에게 끌리게 하고 자신은 뒤에서 이익을 챙길 거라고 생각합니다.

요그사론 또한 울두아르에 얼굴없는 자가 나타나는 등 여전히 저 아래에 있기는 한 것 같습니다.


3. 오딘과 발라리아르

로켄의 세치 혀로 봉인되어 오랫동안 신경 끄고 있던 수호집단이 풀려났습니다. 사고 안 치고 얼호와 잘 협력한다면 엄청난 아군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전성기의 티탄벼림 군대도 독자적으로 검은 제국을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4. 무르도즈노

무르도즈노는 고대신의 꾀임을 받아 타락한 시간의 위상입니다. 5인던전에서 죽어버려서 좀 포스가 없어보이지만, 생각해 보면 무르도즈노는 고대 신들에게 데스윙보다도 훨씬 더 강력한 무기입니다. (사실 우리가 무르도즈노를 물리쳤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것 때문에 무르도즈노는 거기서 죽을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시간의 끝이라는 미래가 데스윙의 파멸로 아제로스의 진짜 시간선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되었으니까요.)




노즈도르무는 티탄의 권능으로 시간선 전체를 보며 자신의 죽음까지도 알 수 있었고, 무르도즈노는 '진짜' 시간의 끝을 보고 뜨악해서 대신 그 5인던전 시간의 끝을 창조해 낸 존재입니다. 물론 미래의 시간의 길은 많이 갈려 있고 심지어 아만툴조차도 모든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시간의 위상은 많은 가능성들을 모두 체크할 수 있고 어떤 시나리오대로 진짜 시간선이 진행되어야 고대 신들이 승리할 가능성이 높은지 알고 있을 겁니다. 즉 무르도즈노가 고대신의 꾀임에 넘어온 시점에서, 고대신들은 자신이 어떻게 해야 승리할 수 있는지에 대한 미래를 손에 쥔 셈입니다.

잘아타스는 느조스를 가리켜 패배도 항상 자신에게 득으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게 순수하게 느조스의 원대한 전략적 감각일까요 아니면 미래를 미리 살펴본 결과일까요? 이샤라즈에게 패배해 몸을 낮춘 다음, 결과적으로 티탄들이 이샤라즈만 뽑아버리고 나머지 고대신들은 죽이지 않고 봉인만 하게끔 한 것이 우연일까요? 

물론 검은 제국 당시에는 청동용 같은 건 없었습니다. 다만 무한의 용군단들은 시간선을 얼마든지 넘나들 수 있고, 청동용군단이 검은 제국 당시의 모습조차도 재현할 수 있는 것을 보면(실리더스) 무한의 용군단들도 그 시간대로 갈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굳이 요란 떨 것 없이, 누군가 느조스에게 어떻게 될 거라고 살짝 귀띔만 해 주면, 느조스는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결과를 가져오는 선택지를 골라 역사를 자신의 입맛대로 진행시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가설에는 헛점이 있습니다. 일단 무르도즈노가 느조스 하나에게만 충성할지는 모르는 일입니다. 아니 사실 무르도즈노가 고대신에게 설득당하긴 했어도, 고대신을 위해서 시간선에 간섭을 하는가는 확실치 않습니다. 고대신의 꾀임에 넘어간 녀석들 중에는 로켄이나 베네딕투스처럼 충성스러운 수하가 된 경우도 있지만, 가로쉬처럼 고대 신이 보여주는 환영이나 속삭임에 끌리기만 하고 어쨌든 자기 하고싶은 대로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무르도즈노가 나중에 과거의 자신 혹은 필멸자 용사들의 끝없는 노력으로 불가능한 운명을 가능하게 하는 데 감명받는다면, 그 힘을 역으로 고대 신들을 퇴치하는 쪽에 쓸 수 있을 겁니다.

일단은 노즈도르무가 대격변 시점까지 무사한 게 확인된 이상, 그 시점 이후에 발생할 무르도즈노에게는 타락자 느조스의 지분이 가장 크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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