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7 변명과 음모
 
세드릭 칼스턴은 테레나스 메네실 국왕이 왕좌에 오르던 해에 로데론 북부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특출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남보다 떨어지는 것도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은 평범했을지라도 야망은 평범하지 않았는데, 그것이 그를 주변의 어느 사람보다 성실하고 근면하게 만들었고, 그를 특출나게 만들어 주었다. 그가 20줄이 되었을 때, 온 동부왕국을 휩쓸던 역병이 그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러나 뭇 사람들이 뒤에서 속삭이던 것처럼 미처 다하지 못한 일이 아까웠는지, 아니면 그저 우연인지 모를 이유로 그는 되살아났다. 죽음에서 돌아왔다는 것이 그의 삶을 크게 바꿔놓지는 못했다. 그는 죽은 후에도 성실하게 일했다. 다른 포세이큰들이 존재의 이유를 살아있는 것에 대한 복수에 둘 때 그는 존재의 이유를 자신의 성공에 두었다. 남들이 화살로써 소모되기를 바랄 때 그는 자신의 능력과 성취를 상부가 알아주기를 바랬다. 로데론 북부의 토박이로 한평생을 지내오던 그는 포세이큰의 세력 확장에 큰 공을 세웠다. 그리고 지금, 그는 평범한 농부의 자식으로는 이례가 없는, 한 지방을 관리하는 영주의 지위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는 그 일대에서 알아주지 않는 이가 없는 성공의 표상이었다. 그는 많은 것을 얻었다. 그가 얻은 것은 좋은 집과 부하들, 자신의 집을 지키는 누더기 골렘과 그의 이름으로 통치되는 영지, 많은 돈, 그리고 아첨꾼들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위치까지 올라갔음에도 불구하고, 세드릭 칼스턴은 행복하지 않았다.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이룰 수 있게된 지금에 와서야 그는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포세이큰에게 감정이란 점점 무뎌지고 사라져가는 것이지만, 스스로의 목적을 다 이뤄버리고 끝나지 않는 불멸의 삶까지 가진 세드릭의 정신이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어 본래 절대로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스스로의 안에서 창조해 낸 듯 했다. 그는 비로소 자신의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그의 주변에는 오로지 아첨꾼들 뿐,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줄 관계를 맺어줄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외로움에 점차 미쳐가던 그는 어느날 자신의 영지 주변의 해안가를 산책하다가 물고기와 개구리를 합쳐놓은 듯 한 괴이한 생명체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개나 고양이에게도 귀여움이라는 감정을 느끼지 못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처음보는 생명체에 마음을 빼앗겨 주변의 지나가는 모험가를 고용해 그 생물을 데려와 달라고 부탁했다. 비록 말이 통하지 않는 짐승이었지만 그 생물만은 자신을 아무런 사심없이 있는 그대로 대해준다는 것을 그는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칼스턴 영지의 주인은 종종 그 생물을 처음 만났던 해안가로 자신의 유일한 친구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는 것을 위안거리로 삼았다.
 
그날도 그는 주변 아첨꾼들의 속보이는 간언에 지쳐 멀록을 데리고 해안가로 산책을 나갔다. 폭풍에 뿌리 뽑힌 나무와 부스러진 오두막이 장식된 음산한 해안가였지만 그는 그 해안가를 자신의 애완동물과 함께 거닐때면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해졌다. 세드릭은 황폐해진 해안가를 종종 자신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이미 더 나아갈 것도 없이, 황폐해진채로 영원히 지속되는. 그나마 그 안에서 천진난만하게 뛰노는 멀록만이 유일하게 그 해안가에서 살아 있는 듯 보이는 존재였다. 해안가의 쓰러진 고목에 걸터앉은 그는 멀록을 잠시 풀어놓고 해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저 이 순간이, 그가 유일하게 즐거워하고 행복해하는 순간이었다. 이제 그는 더이상 아무것도 하길 원하지 않았지만, 끊임없이 뭔가를 요구하는 자들이 그의 주변에는 득시글거렸다. 오직 스펙클, 그의 작은 애완동물만이 지금 그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유일한 친구였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문득 정신을 차린 세드릭은 스펙클이 정신없이 해변가의 뭔가를 파헤치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멀록에게 다시 목줄을 걸기 위해 다가갔다.
 
“스펙클, 쓰레기 같은건 파헤치지 말라고 했잖니. 더러운걸 집에 묻혀오면 안돼.”
 
“아옳옳옳! 아옳, 아옳옳옳!”
 
자세히 보니, 스펙클이 열심히 파헤치던 해초 비슷한 더미 사이로 사람의, 정확히 말하면 썩어 문드러져 보이는 팔이 드러나 있는 것이 보였다. 세드릭은 조심스럽게 해초 사이로 나온 팔을 잡아당겼다. 더미 밖으로 끌려나온것은 여자의 시체였다. 티리스팔 숲에서는 시체를 보는 것이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시체들이 점점 모여드는 곳이랄까. 당장 산채로 왔다가 죽어나가는 사람 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 죽은 자들도 이곳으로 모여들고는 했다. 그도 이미 시체를 보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기에 죽은 자에 대한 안타까움보다는 과연 여기 있는 이 시체가 한번 죽은 시체일지, 한번 죽고 살아난 것인지, 두번째 죽은 시체일지에 대한 지극히 이성적인 궁금증부터 떠올랐다. 주인의 궁금증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일까. 스펙클이 공중에 잠시 손을 휘저었다.
 
"아옳… 아옳옳!"
 
스펙클의 몸을 옅은 푸른빛 빛줄기가 감쌌다. 멀록은 하등한 생물이라는 것이 주된 사람들의 의견이었지만 그들 중에서도 항상 천부적으로 자연의 힘을 다루는 개체들이 존재했다. 세드릭은 스펙클이 이런 식으로 정전기를 내뿜을 때 마다 사람들의 생각이 어쩌면 잘못되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곧 스펙클은 푸른 번개를 손에 집중시키더니 여자의 가슴을 두손으로 세게 내리쳤다.
 
“크읍!”
 
짧고 굵은 외마디 신음소리와 다 말라 비틀어진 입술 사이에서 들려왔다. 그러나 단지 신음 뿐, 시체는 그 자리에 누워 꼼짝을 하지 않았다.
 
“스펙클, 이 친구는 일어나려면 좀 더 강하게 쳐야 되겠구나. 다시 한번 해보련?”
 
말없이 큰 눈을 꿈뻑거리던 스펙클은 다시 한번 번개의 힘을 모아 시체를 더욱 세게 내리쳤다. 그렇게 몇 번의 시도를 거치자, 더 이상 견딜수가 없었던 시체가 손을 들어 스펙클의 주먹을 쳐냈다.
 
“...이 잔인한 놈아, 그만해…!”
 
번개로 감싼 주먹을 쳐낸 시체가 머리를 잡고서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 앉았다. 목소리는 짜증으로 가득차 있었지만 스펙클은 시체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신이 나서 여기저기 전기를 뿜으며 펄쩍펄쩍 해안가를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아옳! 아옳! 아옳옳옳옳!”
 
“...젠장, 탑이 무너지더니 이번엔 멀록… 재수도드럽게…”
 
“글쎄, 살아있으니 그래도 재수가 좋다고 생각을 해야 하지 않으려나?”
 
검은 옷과 검은 모자를 쓴 시체가 겨우 몸을 일으킨 시체 옆에 쭈그리고 앉아 조용히 말을 걸었다. 그러나 시체는 전혀 반갑지 않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스컬지도 있군.”
 
“스컬지라니, 난 그 리치왕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네. 그자는 이미 몰락한지 오래야.”
 
“우린 리치왕의 지배를 받는 것들만을 스컬지라 부르진 않아. 질서에서 벗어난 놈들을 스컬지라 부르지. 이 스컬지야.”
 
“그래? 붉은 십자군 출신이신가? 그 전에 자기 몸부터 한번 보고 얘기하는게 어때? 이미 그쪽도 그 질서라는 것에서 벗어난지는 오래라고?”
 
“...나도 알아.”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적막이 흘렀다. 해안가 저편으로 스펙클의 아옳거림만이 희미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세드릭이 다시 말을 꺼냈다.
 
“알면, 그렇게 말하면 안되지. 당신 스스로도 스컬지라고 인정하는 거잖아.”
 
“난 스컬지가 아니야!”
 
“그래? 그럼 넌 뭐냐, 도대체.”
 
“난… 그러니까… 난…”
 
릴리안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얼버무리기만 했다. 아버지도 십자군도, 게블러까지 자신을 더 이상 이전의 릴리안 보스라고 불러주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이전의 것은 지나갔으니 이제 새로워졌음은 분명했지만 아주 낡아빠지고 추한 새것이었다. 자기 스스로도 자신이 무엇인지 불명확했다. 자신은 정말 릴리안 보스일까? 아니면 그전 삶의 껍데기일 뿐일까?
 
“아직 정리를 다 못한 모양이로군.”
 
세드릭은 쭈그렸던 다리를 바닥에 편하게 쭉 뻗고 주저앉으며 말했다.
 
“본래 자기 입장을 정리하려면 시간이 걸리는 법이지. 천천히 생각하라고.”
 
릴리안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무심코, 마음 저 깊은 곳 어딘가에서 이제 막 표면으로 올라오기 시작한 한마디를 내뱉었다.
 
“난…뭐지…?”
 
“뭐?”
 
“내가 바다에 빠지기 전에, 내 친구가 나한테 그랬어. 난 내가 살아있을 적 모습의 껍데기일 뿐이래. 그래서 난… 살아있으면안된다고…”
 
“...그래, 그래서?”
 
“난… 그때까지는 내가 릴리안 보스라는데 아무런 의심이 없었거든. 내 몸이 이렇게 되어버린게 너무 충격적이라 거기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것 같아.”
 
“그래서, 친구 한테 얻어 맞고 바다로 빠진건가?”
 
“차라리 그런거였으면 좋았겠네.”
 
세드릭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죽였군.”
 
“그래. 내가 죽였어. 그 덕에 지금 여기 있지. 젠장. 어째서 이런 고민까지 해야 하는거지. 그자식이 마지막에 던진 말이…”
 
머리에 게블러의 마지막 한마디가 맴돌고 있었다.
 
‘돌려줘’
 
“아, 이런 젠장! 젠장!”
 
“이봐… 잠깐 진정하고 말을 해봐.”
 
릴리안은 맴도는 기억이 괴로웠다. 머리를 감싸쥐었지만 기억은 변하지 않았다.
 
“걘… 걘 진심으로 내가 가짜라고 믿고 있었어! 어떻게 나한테 그럴수가 있지? 어떻게…”
 
“어, 이렇게 말하면 좀 상처받을수도 있겠지만, 꼭 필요할 것 같아서 얘기하는거야. 겨우 한사람의 말일 뿐이잖아? 물론 친구라고는 하지만, 널 속속들이 다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의 얘기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라고.”
 
“그래. 그렇게 생각하는게 도움은 되겠지. 하지만, 그자식은… 그자식은…”
 
릴리안은 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잠시 후 힘겹게 다시 입을 떼었다.
 
“그자식은…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었어.”
 
그 말을 마친 릴리안은 당겨 앉은 무릎위로 얼굴을 조용히 파 묻었다. 세드릭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저 조용히 옆에 앉아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려 줄 뿐이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간 후 릴리안이 다시 고개를 들었고, 세드릭이 위로의 말을 건넸다.
 
“힘든 이야기를 하느라 고생했네.”
 
“...아냐, 누군가에게 한번은 하게 되었을 이야기였을꺼야.”
 
“그런 일이 종종 있다고 하더군, 죽었다 살아나면.”
 
“나같은?”
 
“그래. 가족이 돌아서고, 친구가 돌아서는 일. 드물지는 않아. 그래도 십자군의 이야기는 처음들어보네. 자기 사람이 포세이큰이 되면 어떻게 대처할까 궁금했었는데, 신도들의 믿음도 지키면서, 오점도 지워버릴 수 있는 정말 똑똑한 방법을 찾아냈구만.”
 
“‘똑똑한’ 방법이라니, 그들은 빛을 따랐을 뿐이야. 무슨 수단 같은게 아니었다고.”
 
“수단이 맞지. 생각을 해봐. 그런 식으로 말을 만들면 십자군 지도부가 이익을 얻을 수밖에 없는데. 십자군을 우리가 다시 살려 병사로 만들어도 아무 양심의 가책없이 싸움을 할 수 있고, 자신의 친지가 언데드가 되어 오점으로 남아도 쉽게 없앨 수 있지. 조금 선전만 더 하면 신앙적인 희생이라는 말도 끌어낼 수 있겠는데?”
 
“그건 당신들이 생각하는 방향이지. 신앙을 가지지 않는 사람은 이해못하는 거야.”
 
“그 신앙이라는게 그렇게 중요한가?”
 
“물론, 빛은 우릴 인도하며 가장 올바른 길로 이끄는 진리지.”
 
“그게 네 존재를 부정해도?”
 
“...그건, 나도 교리를 잘 아는게 아니라 잘 모르겠지만… 잘못 된 것은… 없어져야 하니까…?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는데, 빛의 공명정대함에 따르면, 잘못을 했으면,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아야 해. 만약, 내가, 죽어없어져야 할 만큼의 잘못을 저질렀다면…”
 
릴리안은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하, 그런걸까. 난 정말 껍데기뿐인 죽어 없어져야 할 스컬지인 걸까. 나도 잘 모르겠어.”
 
“그런게 빛인 건가?”
 
“글쎄, 적어도 내가 아는 한은?”
 
“그게 빛이라면, 난 차라리 어둠을 섬기겠네.”
 
“굳이?”
 
“어둠은 날 이해해 주거든.”
 
“좀 더 얘기해봐.”
 
세드릭은 추억에 잠긴듯 먼 것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난 이 근처 촌동네에서 태어났네. 부모는 기억에 남기 전에 죽었고, 어린시절의 난 거리에서 무슨 짓이든 하면서 살아남아야 했지. 난 티리스팔의 모든 풀과 나무껍데기의 맛을 알고 있네… 하지만 그러면서도 난 그렇게 다른놈들 똥꾸멍에서 나오는거나 빨다가 죽기는 싫었어. 언젠가 그놈들 머리 꼭대기에 올라가 한을 풀고 싶었지. 그래서 열심히 노력했네. 막노동이든, 잡심부름이든, 아무리 고되고 수치스러운 일이라도 다해나가며 살아남았지. 물론 역병에 걸려 이꼴이 되긴 했지만, 이렇게 된 뒤에도 날 알아봐 줄 사람을 찾는데 성공했어. 난 내가 이렇게 되고 난 후에…”
 
세드릭은 누런 이빨을 드러내보이며 사악하게 씨익 웃었다.
 
“...내가 알던 모든 살던 곳과 근처 일터로 삼던 모든 요새, 마을, 물길… 그 정보를 포세이큰에게 다 팔아넘겼지! 시냇물에 역병이 퍼져 마을을 집어삼켰고, 요새는 내가 알려준 비밀통로를 통해 함락이 되었어… 마을에는 내 이름으로 학살이 벌어졌고…”
 
“당신, 그런짓을 하고도 떳떳하게 이야기 할 수 있어?”
 
“무슨 소리! 내가 길바닥에서 얼마나 많은 고통과 수모를 겪었는지 아나? 빛은 내가 그렇게 고통받을때 날 거들떠보지도 않았어! 성당의 사제들은 항상 빛나는 옷을 입고 빛의 은총을 거들먹댔지만 내가 다가갔을때 날 진심으로 경멸했지! 난 알 수 있었어! 그자들에 눈에 서린 오만함이 보였다고!”
 
세드릭은 잠시 흥분한 듯 열변을 토했지만 이내 자신을 다스렸다. 그리고 차분한 어조로 다시 말했다.
 
“어둠을 내가 직접 섬긴건 아니네… 하지만, 내가 살기 위해 선택한 일들… 빛은 그 고지식한 시선으로 날 경멸하겠지만 어둠은 날 칭찬하겠지… 한평생 고통받던세드릭 칼스턴… 넌 그럴 권리가 있다…라고.”
 
 “...미쳤어.”
 
“너보다는 낫지.”
 
“어째서?”
 
“넌 빛에 의해 고통받고도 스스로를 파괴하려 하잖아. 난 내가 받은 고통을 더이상 받고 싶지 않을 뿐이야. 지극히 정상적인… 자극과 반응인거지. 정말 미친건 너야. 때리면 때리는대로 죽어버리는.”
 
속삭임의 해안에 다시 한번 긴 고요가 찾아왔다. 두 남녀의 길게 이어지던 대화가 끊기고, 스펙클의 아옳거림도 지쳐서 잠잠해질 무렵, 릴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려고?”
 
“응.”
 
“어디로?”
 
“우리 아빠한테.”
 
“그래? 나랑 같이 안가겠나? 포세이큰에 합류하는건 어때?”
 
“고맙지만, 사양할께. 더 중요한 일을 해야 할 것 같아.”
 
“그래? 그거 아쉽네.”
 
“나중에. 어쩌면. 생각이 들면. 그때 다시 봐.”
 
“그래.”
 
릴리안은 새드릭을 등지고 해안가의 언덕에 발을 디뎠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다시 고개를 돌려 말을 걸었다.
 
“아, 깜박했네, 저 거적데기 있잖아. 저거 걷어치면 여자 시체가 하나 더있어.”
 
“뭐? 그놈도 십자군이야 그럼?”
 
“아니, 잘...은 모르겠는데 아마 너네 포세이큰일꺼야. 내가 물에서 같이 데리고 나왔거든. 상태가 안좋아 보이니까 좀 잘 돌봐줘.”
 
“진작 얘기 하지.”
 
“아… 그게, 사실은 내가 걔를 거의 죽일라고 그랬었거든. 걘 날 풀어주려고 왔었는데 말이야.”
 
“복수라도 당할까봐 그런거야?”
 
“아니, 그냥…”
 
릴리안은 겸연쩍은 듯 어깨를 한번 으쓱거렸다.
 
“...미안해서 그랬어.”
 
그 말을 끝으로 릴리안 보스는 티리스팔의 어두운 숲 속으로 사라졌다. 그 후 세드릭 칼스턴은 릴리안 보스의 얼굴을 다시는 보지 못했다. 다만 얼마 후 수십명의 붉은 십자군이 한명의 여자 언데드에게 당해 죽었다는 이야기만 지나가듯 들을 수 있었을 뿐이었다.
 
 
 
 
 
 
로즈는 자신이 다시 한번 죽은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몸은 움직일 수 없이 무거웠고, 머리는 뜨겁고 어지러웠다. 눈 앞이 혼란함과 그림자로 가득했다. 침대에 누워 몸을 반쯤 일으킨 로즈는 자신이 겪었던 일을 짚어보았다. 죄수를 구하러 탑에 갔고… 탑이 무너졌다! 그렇게 정신없이 추락하던 일은 기억이 나는데, 난 어떻게 여기 침대에 누워있는거지? 심지어 그곳은 꿈틀대는 애벌레도 아니었다. 훨씬 고급스럽고 깔끔한, 그러나 포세이큰 특유의 음침함은 잃어버리지 않은 이상한 침실이었다. 로즈는 고개를 돌려 침실을 쭉 둘러보았다. 한쪽 벽에는 책장이 몇 개 세워져 있었고, 왼쪽에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듯 보이는 계단이 보였다. 분명 방은 매우 어두웠고 빛을 밝힐 것이라고는 작은 초 몇개밖에 없었지만 이상할 정도로 방안의 모든 것을 알아 볼 수 있었다.
 
“여긴 대체…?”
 
“아, 이곳은 칼스턴 영지의 주인, 세드릭 칼스턴의 집이지.”
 
로즈가 말을 떼는 순간, 검은 옷과 검은 모자를 쓴 남자가 침대 옆 의자에 앉아있었다. 언제 그 자리에 앉았는지 짐작도 되지 않을 만큼, 남자의 등장은 너무나 갑작스러웠다. 원래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로즈가 말을 꺼낼때 나타난 것인지 헷갈렸다. 이 남자가 로즈를 구해 온 것인지, 혹은 그냥 간병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남자는 로즈가 아프든, 다쳤든, 그런것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 했다. 남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로즈가 정신을 차린 것을 확인한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을 가로지르며 왔다갔다 걸으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당신… 누구시죠?"
 
“우선 첫번째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해주자면, 이곳은 구 로데론의 북부 농장지대인 칼스턴 영지의 중심지로써, 한 때 각기 다른 이름으로 흩어져 있었지만 세드릭 칼스턴이라는 이름아래 하나의 영지로 묶였지! 또한 이 집은 최신 포세이큰 건축양식으로 2층으로 지어졌고, 외부를 담장으로 둘러치고, 안에는 텃밭과, 경비병인 누더기 골렘이 있지. 그리고 이 영지의 수확량은…”
 
굳이 물어보지도 않은 것들에 대한 상세하고 쓸데없는 설명들이 이어졌다. 로즈는 웬만하면 남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었지만, 그대로 뒀다가는 정말 끝이 날 것 같지 않아 중간에 말을 막아섰다.
 
“저기… 여기가 어디인지는 그 정도면 됐어요."
 
“...이곳에 주둔할 수 있는 병사는… 어, 그래?"
 
"네. 당신 누구에요? 전 어떻게 된거죠?”
 
"아직 말할께 한참은 남았는데…"
 
"말씀은 고맙지만 괜찮아요."
 
남자는 아쉬운 듯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러면… 알았어. 난 누구냐 하면, 안 말해줄꺼야. 재미가 없거든."
 
“그게 무슨…”
 
남자는 재미있다는 듯이 조용히 킥킥거렸다.
 
"나중에, 나중에 말해줄께. 하지만 그러면 지금 날 어떻게 부를지가 문제로구만. 그러면 난… 그냥 여기 영주, 세드릭 칼스턴이라고 치자고. 일단은, 이 모습이 그놈 꺼거든."
 
로즈는 이런 포세이큰들의 말장난과 미친 소리가 갑자기 지긋지긋해졌다. 모르도라면 적당히 듣고 빈정거리며 도망이나 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꼼짝없이 남자의 헛소리를 들으며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던 로즈를 향해 남자가 천천히 말을 멈추고 조용히 한마디를 뱉었다.
 
"지겨워하는 표정이로군."
 
"맞아요."
 
로즈는 숨기지 않고 말했다.
 
"정작 중요한 것은 하나도 말하지 않으니까요."
 
"아, 하하하, 아가씨, 중요한건 그런게 아니야. 내가 누군지, 자기가 어디서 뭔 일을 당했는지 그런게 아니라고."
 
"그럼요?"
 
"중요한건, 내가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거야.”
 
남자는 씨익 웃더니 다시 말을 시작했다.
 
“이름, 로즈. 아마 다른 이름을 받았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도 그 이름을 모르지. 로데론 제 6구역 빈민가 출생."
 
남자는 쉬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아버지는 빌, 동네에서 알아주는 주정뱅이로 손꼽혔지. 어머니는 메일리. 거리에서 빌어먹던 거렁뱅이 여자. 아버지라는 놈은 로즈가 세상에 나온지 3일 후에 살인죄로 교수형에 처해졌고, 어머니는 2년 후 마차에 치여 죽었지.”
 
“뭐? 당신… 그거 진짜야…? 어떻게…”
 
로즈가 기억도 할 수 없는 일들이 남자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것이 진실인지 로즈는 알 수 없었지만 남자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쏟아냈다.
 
“부모가 죽어버린 후, 죽은 어머니 품에서 울던 로즈를 낸시라는 여자가 데려갔고, 그 후엔 장물아비 페이건의 집에 살면서…”
 
“잠깐, 그만! 그만해! 더 이상 말 하지 마!”
 
로즈의 외침은 남자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 외침이었다. 잊고 싶은 과거를 들추는 잔인한 혀놀림은 로즈의 절규에서 오히려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누런 이빨을 내보이며 입꼬리를 길게 올려 씨익 웃었다.
 
“...그렇게 16살이 되던 해, 올리버라는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지. 그 후, 왕자 아서스가 로데론으로 개선하던 날, 두 사람은…”
 
“제발, 그만! 알았어, 이제 제발 그만 말하라고!”
 
“말하지 않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난 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어. 중요한 건…”
 
“그래, 당신이 다 지켜보고 있었다는 거지? 알았어, 알았다고! 그러니까 제발 부탁이야. 그 이상 말하지마!”
 
“그래, 킥킥킥, 알았다. 그런 네 표정을 보는 건 정말 재미있군.”
 
남자는 그제서야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반대로 로즈는 이런 비정상적인 일상에 질려버린 표정을 지었다. 단 하루 안에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어버리자, 웬만한 일에는 이제 더 이상 놀랄 것 같지도 않았던 로즈도 질겁할 수밖에 없었다. 이 남자는 뭐지? 어떻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내 과거를 알고 있는걸까? 무려 7년이나 지난 일인데.
 
“당신이 날 여기로 데려온거야?”
 
“아니, 아, 맞는건가? 세드릭 칼스턴이 해안가에 쓰러진 널 발견하고 이리로 데려왔지. 하지만 지금은 내가 세드릭 칼스턴이라고 치자고 했으니… 내가 데려오지 않은게 되려면...”
 
남자는 잠시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리고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민하는 듯 보이더니, 순식간에 검보라빛 안개로 둘러싸여버렸다. 그리고 안개가 걷히고 나타난 것은,
 
“안녕 로즈! 오랜만이네?”
 
“엘레스?”
 
“그래. 나야. 수레 놓고 온다더니, 어떻게 된거야? 나만 재미있는 구경 했잖아. 얘기할 상대가 없어서 심심했다구.”
 
엘레스는 지난번 헤어졌을때보다 훨씬 노출도가 심한 옷을 입고 있었다. 팔과 가슴이 다 드러나보이는 빨간 드레스를 입고 치렁치렁한 녹색 머리를 부드럽게 휘날리고 있었다. 심지어 턱의 드러난 뼈도 검지 않고 희게 보이기까지 했다.
 
"엘레스…? 정말 너야? 어떻게… 그런게 가능한거지?"
 
"그게 중요한거야? 중요한건… 내가 지금 엘레스라는 거야…"
 
엘레스는 입고 있던 드레스의 어깨죽지를 한번 옆으로 쭉 찢었다. 쇄골과 가슴이 거의 훤히 들여다 보여 언데드임에도 불구하고 고혹적인 자태를 연출해냈다. 그렇게 엘레스, 아니 엘레스로 모습을 바꾼 무언가는 천천히 침대로 올라와 로즈를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 로즈의 얼굴을 감싸쥐고 어루만졌다.
 
“저기… 잠깐, 엘레스?”
 
“로즈는… 정말 귀여운데…”
 
죽은 자의 얼굴로 낼 수 있는 가장 섬뜻하고 관능적인 표정을 지으며 엘레스의 형체는 말을 이었다.
 
“정말… 순진해… 순진하다 못해... 멍청하지.”
 
엘레스는 로즈의 얼굴을 잡고 끌어당겼다.
 
“널… 가지고 놀고 싶어…부서져버릴 때까지…”
 
입술과 입술이 거의 맞닿을 무렵, 로즈는 정신을 차리고 엘레스의 형체를 세게 밀쳐냈다. 형체는 중심을 잃고 침대 밖으로 쓰러져버렸다.
 
“미..미안, 난 아직 이런건… 생각해 본 적이…”
 
"그래? 후훗, 여자끼린 별로야? 그럼 이런건 어때?"
 
침대 밖으로 넘어진 엘레스의 형체는 검보라빛 안개와 함께 다시 모습을 바꾸었다. 굵직한 목소리의 거대한 형체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이정도면 꽤 괜찮은 남자인 것 같은데."
 
"너… 정체가 뭐야?"
 
"이번엔 그냥 다넬이라고 치자고. 이제 내가 그 이불보 안에 들어가도 되겠나? 귀엽고 순진한 아가씨?"
 
"장난해? 넌 정말 누구야? 원하는게 뭔데?"
 
"내가 원하는거?"
 
그렇게 말하고서 형체는 다시한번 모습을 바꾸었다. 신경질적이고 땍땍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원하는거?!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어! 아하하하하! 굳이 있다면, 그건 혼돈이야! 아무도 뭐가 뭔지 모르고, 아무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저 끝에 가서는 자기가 왜 그랬는지 조차 모른채로 그저 고뇌하다가 내 앞에 모든 선택과 결정을 맡겨버리는 거지. 완전한 지배! 완전한 사육! 완전한 망각!"
 
모르도의 형체는 기분나쁜 갈라지는 목소리로 로즈를 향해 소리쳤다. 다시 침대가로 가까이 다가온 모르도의 형체는 로즈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내 몸에 손대지 마!"
 
"내 몸이라니… 앞으로… 언젠가 내가 널 완전히 잡아먹고…"
 
다시 한번 형체가 모습을 바꾸었다.
 
"네가 완전히 나로 채워지는 날… 그날이 너무 기대가 돼…"
 
로즈의 얼굴이 로즈의 앞에 있었다. 심지어 그 모습은 언데드의 모습도 아니었다. 살아있는, 희고 뽀송뽀송한 얼굴과 생기있는 머리칼을 가진, 19살의 인간 로즈의 모습이 로즈를 끌어안고 있었다. 로즈는 충격에 빠져 잠시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다시 한번 세게 그 형체를 밀쳐 내었다. 그러나 그 형체는 이번엔 침대 밖으로 쓰러지는 대신 부드럽게 뒤로 날아올라 공중에 붕 떠서 로즈를 바라보았다.
 
"날… 누가 맘대로 하도록 두진 않을꺼야!"
 
"그래? 지금 넌 너 자신을 지킬 수 있을만큼 강한가? 어제만 해도 쉴새없이 강한 힘들에 둘러쌓여 휘둘리지 않았던가?"
 
로즈는 대꾸하지 못하고 쳐다만 보았다. 인간 로즈가 다시 말했다.
 
"불쌍한 것… 감당하지도 못할 힘의 노예가 되어 발버둥치는구나. 내 그늘로 도망치지 않으련?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줄 수 있단다."
 
"널 어떻게 믿고 그런…"
 
"난 이미 널 한번 도와줬지. 잘 생각해봐. 네가 어제 어떻게 은신을 할 수 있었을까?"
 
"네가…?"
 
"그래. 내가 그때 네 귀에 속삭여줬지. 물론 아가타의 눈으로부터 숨게 해준 것도 나야. 내 도움이 없으면… 넌 당장 이 땅에서 살아남지도 못한다고…"
 
"난… 날 도와줄 사람들이 있어! 네 도움따윈 필요 없다고!"
 
그 말을 듣고 인간 로즈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분명 여자가 웃는 목소리였지만 목소리에 뭔가 그르렁거리는 이상한 울림이 섞여들려오고 있었다. 이윽고 인간 얼굴이 한조각 한조각 벗겨지기 시작했다. 그 벗겨진 얼굴 뒤에는 다른 얼굴은 없고, 오로지 검보라빛 덩어리만이 가득했다. 그 형체를 중심으로 방의 모든것이 형체를 잃고 검보라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침대도, 책장도, 바닥도 모두 어두운 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이제 웃음소리에는 여자의 목소리는 찾아볼 수 없었고, 오직 섬뜻한 그르렁거림만이 남았다. 로즈는 무엇인가가 꽉 조여오는 듯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로즈의 몸은 공중의 형체 앞으로 떠올랐다.
 
'친구를... 배신하게... 될 것이다…'
 
귀로 들리지 않는, 머리로 울리는 목소리가 속삭여왔다.
 
'난… 네게… 진실을 보여줬다… 확인은 네 몫이다…'
 
형체에서 검보라 빛은 이미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새어나왔다. 그 어떤 빛도 이보다 더 강렬할 수는 없을 것만 같았다.
 
'그때까지... 기다리도록 하지… 나는… 언제나...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순식간에 시야가 흑암으로 까맣게 뒤덮였다. 로즈는 깜짝놀라 몸을 일으켰다. 눈을 떠보니 조금전 보고있던 방과 똑같은 방의 침대에 자신이 누워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다만 이번에는 자신의 옆에 걱정어린 눈길로 앉아있는 두 언데드와 이상한 짐승 한마리가 있었다는 것이 달랐다. 한명은 처음보는 얼굴이었지만, 한명은…
 
"당신! 날… 날 어떻게 하려고 한거야!"
 
로즈는 그 중 낯이 익은 한명을 손가락질하며 소리를 질렀다. 간호를 하던 연금술사 요한은 당황하여 무슨 짓이냐고 소리를 높였지만, 정작 지목당한 세드릭 칼스턴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보였다.
 
"괜찮네. 오늘은 이상한 분들을 많이 만나는구만. 몸은 좀 괜찮으신가? 구해줬던 친구가 잘 돌봐주라고 했거든."
 
로즈의 머리에 릴리안이 물속에서 자신을 잡고 헤엄치는 기억이 잠시 스쳐지나갔다.
 
"릴리안은 어디 있죠?"
 
"자기 갈길을 갔네. 아버지를 찾아간다고 하던데."
 
"아버지를…"
 
"그래. 그보다 자넨 병산가? 행색을 보니 병사는 맞는 것 같은데, 그럼 빨리 브릴로 가는게 좋을꺼야. 거기에 지금 전 병력이 집결하고 있거든. 아마 자네의 상관이나 동료도 다 거기로 향했을꺼라고."
 
로즈는 천천히 자신의 할 일을 되새겨 보았다. 아직은 어안이 벙벙했지만, 지금 자신의 할일은 돌아가는 것이었다. 돌아가서 물어야 했다. 자신이 어떻게 이런 일을 당했는지, 왜 아무도 자신을 찾지도 않았는지. 따져 물어야 했다.
 
"몸이 좀 나아지면 말하라고. 전투 중 부상으로 인한 낙오는 도망병 처리되지 않으니까."
 
"전 지금 괜찮아요. 지금 당장 갈 수 있을까요? 브릴이 여기서 먼가요?"
 
"그래? 아니, 아직 그렇게 좋은 몸 상태는 아닌것처럼 보이는데… 해변에 떠밀려오고 나서 자리에 누운지 아직 하루정도 밖에 지나지 않았다고. 물론 여기 요한이 응급처치를 했지만 아직은 무리야."
 
"아니요! 괜찮아요. 난 정말 괜찮다구요. 봐요. 난 지금 이렇게 멀쩡하게 걸을 수 있잖아요. 문제 없어요."
 
확실히 그랬다. 그 꿈속의 이상한 존재가 자신에게 뭔가를 한 것일지도 몰랐지만, 확실히 지난 밤의 사건을 겪은 것에 비하면 몸이 가벼웠다.
 
"글쎄… 그렇다면 고르도를 데려가게나. 어짜피 그 녀석도 차출되서 브릴로 가야 했으니. 놈이 멍청하지만 착해서, 혹시 몸이 좋지 않아도 잘 지켜줄꺼야. 좀 있다가 같이 출발하라고."
 
"네. 감사합니다."
 
 
 
 
 
 
 
 
 
 
로즈는 간단하게 준비를 마친 뒤, 건물 밖으로 나왔다. 건물 밖에는 거대한 덩치의 누더기 골렘이 기다리고 있었다.
 
"고르도! 이분은 영주님의 손님이다! 같이 브릴로 잘 모셔가라. 할 수 있지?"
 
"고르도, 영주님 말 잘 듣는다. 알겠다."
 
"고르도라는게… 누더기골렘이었어요?"
 
"그래. 처음보나? 이녀석 징그럽게 생겼지만, 손재주도 좋고 착해. 뇌를 암사슴의 것으로 집어넣었거든. 순하지. 시키는대로 잘 할꺼야."
 
"그렇다면다행이지만… 아무래도 좀…"
 
로즈는 옛날 누더기골렘을 피해 거리를 도망치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런 괴물이 이제는 로즈의 호위역이라니. 습격당할 염려는 없었지만 꺼림찍함을 지울수는 없었다. 고르도도 그것을 눈치 챈 듯 했다.
 
"고르도, 미안하다."
 
"응?"
 
"고르도, 못생겼다. 징그럽다. 하지만 해치지 않는다. 무섭게 생긴만큼 잘 해준다…"
 
그 말을 듣고 로즈는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덩치는 산만해서 말 한마디에 쭈그러드는 모습이 의외로 귀여운 구석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즈가 피식 웃는 것을 보고 연금술사 요한이 거들었다.
 
"거봐, 착하다고 했잖아."
 
"고르도, 착하다. 손님 너, 내가 특등석에 태워준다…"
 
고르도는 로즈를 한 손으로 번쩍 들어올리더니 자기 어깨에 설치된 좌석에다가 올려다 놓았다. 고르도는 이미 그런식으로 많이 사용되었던 듯 했다. 어깨에 편히 앉아 있을 푹신한 좌석은 물론, 떨어지지 않도록 난간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로즈는 들어올려졌을 때는 깜짝 놀랐지만, 이내 그 높이에서 내려다 보는 경치에 마음을 빼앗겼다.
 
"굉장하다! 고르도, 너 정말 착한 애구나!"
 
"고르도, 착하다… 칭찬 들었다… 기분 좋다…"
 
"브릴까지는 그렇게 멀지 않을것이네. 몇시간안에 갈 수도 있고, 고르도가 덩치가 커서 빠르니까, 오늘 밤 안에 도착할 수도 있을걸세. 아무튼 잘 가라고. 또 다치지 말게. 그리고 고르도, 손님 잘 모시고,일이 끝나면 빨리 돌아오거라."
 
"고마워요. 영주님. 도와주신거 정말 감사해요."
 
"뭘, 잘 가라고."
 
세드릭 칼스턴은 그들이 멀어져가는 것을 먼치에서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이윽고 문 앞에서 스펙클이 아옳거리며 세드릭을 향해 달려들었다. 세드릭은 스펙클의 손을 잡고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버렸다.
 
 
 
 
 
 
 
 
 
 
고르도의 어깨에 올라탄 로즈는 불어오는 숲바람에 상쾌함을 느끼고 있었다. 지난 밤의 일은 끔찍했다. 수도 없이 많은 것들이 로즈를 마음대로 하려고 사방에서 도사리고 있었다. 로즈는 자신을 닮은 무언가가 이야기하던 것을 머리에 떠올렸다.
 
'그래? 지금 넌 너 자신을 지킬 수 있을만큼 강한가? 어제만 해도 쉴새없이 강한 힘들에 둘러쌓여 휘둘리지 않았던가?'
 
물론 로즈에게 그럴 힘 같은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스스로 몸을 숨기지도,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는 나약한 존재밖에 되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이라도 버텨보고 싶은 생각이 천천히 들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채 목숨을 구걸하고 힘을 구걸하는 것은 너무나도, 자존심상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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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입니다. 전체 chapter1은 10~11화 안으로 끝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가능하다면요.


제 글은 해당지역 퀘스트를 간단하게 해보신다면 더욱 재미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호드 캐릭터 하나 만들어서 휙 돌아보시면 금방 보실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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