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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빼앗고, 죽이고, 희롱하고, 럼을 마신다! 이 거친 해적들에게는 작은 자비마저도 댓가가 있어야했다.
붙들려 끌려나온 여인의 허리를 굵은 팔뚝으로 감고 번쩍들어 허리춤에 낀 해적은 곧 그녀에게 잊혀
지지 않을 추억을 만들어주기 위해 준비를 한다.


「언제 해군놈들이 올지 모르니깐 어서 끝내버리자고!」


 난간을 애워싼 해적 군중을 파헤치고 드디어 여인을 들고있는 해적이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공터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거칠게 여인을 내팽게 치더니 뒤돌아 몇 걸음 걷고는 다시 돌아선다. 그런 뒤
부츠 안에 숨겨 놓았던 단검을 뽑아들며 내동댕이 쳐진 여인을 간악한 시선으로 즐겁게 응시한다.


「선장의 말씀데로 아가씨를 놓아주지.」


단검의 예리한 날끝을 까딱까딱하며 해적이 말을 잇는다.


「헌데… 유감이게도 아가씨를 그냥 놓아줄 수는 없어. 무엇이든 하나 이상은 빼앗아야 하는게 우리
해적들의 ‘철칙’ 이지. 우린 아직 아가씨에게 아무것도 뺏지 않았으니 놓아줄 수 없다 이 말이야.」


호쾌한 웃음소리들은 어느덧 ‘흐흐흐’ 하는 비릿한 조소로 변해 있었다.


「지금 아가씨가 가지고 있을만한 가치있는건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데… 아가씨의 무엇을 가져가고
놓아주면 좋을까, 흐흐….」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뒤쪽의 해적 군중 속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목소리가 높아진다.


「옷! 저 옷이 좋겠어!」


그 목소리에 적극동조하듯 환호가 커진다. 그 반응을 즐기듯 단검을 쥐고있던 해적이 뒤돌았던 고개
를 다시 여인에게로 하더니 마치 이러한 상황을 자신은 원치 않았다는듯 안스럽단 표정을 띄며 보기
좋게 능청을 떠는 것이였다.


「놈들, 지체 높으신 귀족 아가씨에게 짖굳군. 흐흐, 아가씨가 이해하라고! 워낙 바다 위를 오래동안
떠다녀서 여인네 품향기를 그리워해서 그러니…」


해적이 잠시 말꼬리를 흐리더니 몇걸음 여인에게 다가선다.


「아무래도 놈들 말대로 안하면 아가씨 안위에 문제가 생기겠지? 자아, 어서 저 짐승같은 놈들이 원
하는걸 줘버리고 돌아가라고!」


이미 해적 군중의 목소리는 하나가 되어 “옷! 옷! 옷!” 을 굵고 힘있게 반복하고 있었다. 여인은 초점
없는 눈동자로 여전히 자리에 앉은채 좌우를 훑을뿐이였다. 어느덧 자신에게 강요아닌 강요 하던 해
적 마저도 저 무례한 군중 속에 끼어들어 자신을 향한 이 구호에 목소리를 섞고 있으니, 해적이란 족
속의 도를 넘어선 무례함과 무자비함에 여인은 치가 떨렸다.


「… ….」


 그 순간이였다. 구호의 목청이 절정에 달했을때 여인은 난간을잡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경멸하는
눈빛으로 해적들을 노려보았다.


「귀족 아가씨가 우릴 째려보는군 그래!」


한 해적의 농간에 다시 한번 군중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온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은 변함 없었고, 잠
시후 그녀의 각오를 해적들은 볼 수 있었다.


「이, 이봐!」


여인이 난간으로 몸을 넘기기 시작한다. 단검을 들고있던 해적이 다급히 나서며 그녀를 만류하려 들
지만 그녀의 힘겨운 움직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뛰어내리려고? 하! 여긴 수심이 얕은 곳이지! 잘못뛰어 내렸다간 물에 뛰어들기 무섭게 암초에 그
이쁜 얼굴이 흉측하게 으깨지고 말걸!」

「다가오지마!」


말을 읊으며 서서히 다가서는 해적에게 여인은 단호히 소리친다. 처음듣는 여인의 목소리였다. 앙칼
지면서도 그 정적 속에서 또렷히 울리는 다소 앳된 목소리. 잠시 말을 잃었던 해적이 다시 말을 잇는
다.


「이봐, 아가씨… 무모한짓 하지말고 그 옷만 벗어주고 가라고. 특별히 쪽배도 하나 내어주지! 어때?」

「…무모한건 당신들이야! 해군이 당신들을 끝까지 쫓아가 모조리 교수대로 보낼거야!」

「이 아가씨가 이제는 못하는 말이 없군.」


단검을 쥔 해적이 이제는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간다. 그녀는 힐끗 아래를 내려보았으나, 마치 아가리
를 벌린 거대한 상어, 혹은 고래마냥 소용돌이치는 해류만이 그녀의 결단을 힘들게 할뿐이였다. 이미
해적은 ‘지체높은 귀족 아가씨의 옷’을 받을 생각따윈 없는듯 당장에라도 그녀를 해코지할 기세로 두
어걸음만에 난간을 사이에 놓고 그녀와 얼굴을 마주한다.


「우리 배에서 내리라고.」


해적이 그녀의 가슴을 손으로 밀친다. 여인의 비명과 함께 치마폭이 펄럭이며 단 몇초만에 여인의 형
상은 상당한 높이를 낙하해 바다로 빠져버린다. 모든 해적들이 난간으로 붙어 그 아래를 한동안 살피
니 잠시후 우려나 기대하는 일 없이 여인이 암초에 안부ㅤㄷㅣㅊ치고 무사히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며 가픈
숨을 토해내자 다시한번 컬컬하게 웃어버린다.


「상어 조심하라고, 아가씨!」


 더 이상 흥미가 없는듯 하나둘씩 난간에서 고개를 짚어넣는 해적들은 이제 이곳을 떠날 채비를 한다.


「자아, 출발하자고! 닻을 올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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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수척의 군함이 섬을 앞두고 속도를 줄인다. 묵직한 닻이 수중으로 떨어지고 돛을 접는다. 멀리서부터
이글거리는 도시의 불빛은 아른거린다. 선수루의 난간에 양손을 얹고 그 광경을 짐작하며 지켜보고있
는 남자는 분노와 허탈함을 읊조리고 있었다.


「대령님! 상륙준비 끝났습니다!」

「… ….」


 ‘대령’ 직급에 있는 이 남자는 부하의 기별에 일말의 기척도 없이 휙하니 몸을돌려 선수루를 내려온다.
총자루를 하나씩 어깨에 메고 대열을 맞춰 명령을 기다리는 수십의 군복이 이 남자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양옆으로 돌돌말린 흰색 ‘위그(Wig)’를 쓴 그는 직급에 어울리는 권위로운 시선으로 대열을 지
나가다 그 중간에 멈춰서고는 돌아서며 굳게 다물어져 있던 입술을 연다.


「모두 상륙한다. 해적들이 매복해 있을 수 있으니 주의해 도시로 입성한다.」


하나 둘씩 갑판 위의 해군들이 미리 범선 주위에 떨어뜨려 놓은 쪽배로 사다리를 타고 몸을 싣는다. 정
원이된 쪽배는 지체없이 노를 저으며 해안으로 향했고, 대령은 맨 마지막 쪽배에 몸을 실은 뒤, 여전히
숲너머로 보이는 너무나도 환한 불빛에 눈을 떼지 못했다.
해변에 닿은 쪽배에서 신속히 내린 해군들은 그것이 떠내려가지 않게 좀더 위로 밀어올리고 대령이 도
착할때 까지 기다리며 대열을 맞춘다. 그 절도있는 모습은 몇 시간 전 이곳에 먼저 왔다간 해적 들과는
아주 대조적인 모습이였다. 이윽고 대령이탄 쪽배가 해안에 도착했다. 부하들은 먼저내려 쪽배를 밀고
있고, 대령은 그런 부하들은 아랑곳 않은채 걸어 나간다.


「모두 도시로 향한다. 만일 해적이 습격하면 적당히 응수하며 물러선다.」


말을 마친 대령이 허리춤에서 화승총을 꺼내 들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짧게 말한다.


「이동.」


대열은 하나가 되어 절도있게 움직인다. 총자루의 밑을 손바닥 위로 올려놓은채 어깨에 걸치고 좌 우
보폭을 앞으로 다소 과하다 싶을정도로 넓히며 성큼성큼 숲속으로 들어가는 해군들이였다.끈으로 이
어멘 작은 북을 목에걸고 치며 그 소리에 맞춰 행군하는 모습은 해군 과정에서 제일 기초로 가르키는
행군법이였다. 
 실용보다는 절도를 앞세운 제국의 과시와도 같은 상징적인 이 행군의 맨 뒤에는 대령이 근심서린 표
정으로 오로지 하나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하필 제독의 딸이 머무는때에 해적이라니….」


어느덧 도시가 보이기 시작했다. 규모가 큰건 아니였지만 도시를 둘러싼 성곽은 제법 높았고 그 높이
의 성곽보다 더욱 높게 불길은 일렁이고 있었다. 제독이 손짓하자 부관이 소리치고 그와 동시에 북소
리 또한 멈춘다.


「신속히 진입해 자리를 잡도록.」

「진입!」


부관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일렬부터 차례대로 성문안쪽으로 달려간다. 순차적으로 위치와 상황을 파
악한뒤 더욱 깊히 들어가는식으로 도시를 장악하는 모습은 노련한 대령의 눈빛만큼이나 몹시 숙련되
어 있었다.


「… ….」


성문 안으로 들어서 직접 보는 도시의 모습은 생각보다 더욱 심각했다. 이미 오래전에 방화한듯 건물
은 허물어지고 있었고 거리의 외각에는 수많은 시체에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오열하는 도시
민들의 모습이 보였다.


「…대령님, 생각보다 피해가 심각합니다.」

「내 눈은 장식인줄 아는가.」

「아, 죄송합니다!」

「흩어져서 제독님의 따님이나 찾아와.」

「예!」


 부관이 손짓하며 몇 몇씩 부하들을 나누고 수색 작업을 시작하자 대령은 좌우로 시선을 굴리며 서서
히 걸음을 옮겼다. 지금 그의 관심사는 도시의 복구가 아닌 제독의 딸의 안위였다. 제독의 철 없는 딸
이 굳이 해적 출몰이 잦은 해역인 이곳 ‘아조레스’ 에 오겠다, 고집을 피울 때부터 그의 수고는 시작된
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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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독또한 처음에는 그녀의 뜻을 만류했을 것이다. 허나 뜻대로 되지 않았고 결국 제독은 전선에 있어
야할 대령을불러 그녀의 경호를 맡겼다. 처음 그녀를 런던의 항구에서 만나 자신의 군함에 태우고 나
서 돛을 펴는 그 순간부터 조용했던 대령의 근처에는 말괄량이의 목소리가 떠날 날이 없었다.


「제 얘기는 끝났어요!」


언제부터 시작했었는지 기억 조차 않나는 그녀의 빠른 템포의 경쾌한 수다들중에 유일하게 귓전에 박
히는 말이였다. 대령은 대답대신 고개를 살짝 숙였고 다시 침묵을 지켰다. 그러자 여인은 다시 말문을
열었다.


「노튼 경께서는 나에 대해 궁금하신게 아무것도 없으신가요?」

「… ….」

「늘 말씀이 없으시군요. 아무래도 노튼 경께서는 아버님의 요청. 제 경호에 대한 임무가 맘에들지 않
는 모양이시군요.」

「…무슨 그런 말씀을… 존경하는 미런 제독님의 따님을 경호하는 이 임무는 제게 큰 영광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다. 그러나 어느정도의 아첨발림은 앞으로의 출세에 있어 꼭 필요한 것 이였다. 하지만 
이 어린여인을 속이기에는 노튼의 표정이 너무나도 딱딱했던 것일까, 그녀는 어렵잖게 간파하고 시무
룩한 표정으로 노튼을 응시한다. 결국 노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실례를 범해 한가지 여쭈자면, 무슨 이유로 루에르 양께서는 온갖 위험이 있는 저 ‘아조레스’로 향하
시는 것입니까.」

「음, 노튼 경 다운 질문이시군요. 답해드리겠어요.」


 그 힘겨운 시간을 보내는 속에서 노튼은 원하던 한가지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최근 포르투칼의 항해
자가 몇십년 전, 에스파니아로 망명한 ‘크리스토퍼 콜롬버스’ 제독이 발견한 ‘인디아(india)’ 에 닿아 그
곳에서 많은 양의 후추를 싣고 귀항한 일로 세간은 떠들석했다.
 영제국 또한 해상강국으로서 발돋움하기 위해 몇차례 인디아 항해에 대한 사전준비를 하였었지만, 이
제껏 여의치 못한 시점이였다. 그런 와중에 포르투칼이 대대적인 후추무역과 인디아의 각종 진귀한 보
화들을 가지고 사방 각국에 무역을 펼치자 넘쳐나는 부를 쓸데 없는 귀족들의 사치를 만족시켜줄 소비
책으로 런던에서도 후추와 각종 보화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였다.
 여기서 중요한건 후추 무역과 인디아 공예품의 등장이 아닌 이제껏 큰 관심을 받지 못했던 ‘아조레스’
에 대한 무게였는데, 최근들어 해적이 급증함에 따라 서 아프리카에서 아조레스를 경유해 런던으로 가
는 우회항로가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그녀가 그곳 아조레스로 향하는 이유는 그런 활기찬 아조레스의
모습을 직접 보기 위함이란다.


「뜻은 알겠으나 아조레스는 진작에 해적들의 출몰이잦은 위험해역으로서 여전히 그 치안이 확보되지
않은 시점입니다. 포르투칼에서도 해군을 파견해 해역 장악에 힘쓰고는 있으나 섬 여기 저기서 해적들
의 약탈이 자행되는 그런 곳입니다. 아직 런던을 떠난지 얼마되지 않았으니 회항하심이 어떻습니까.」

「그런 말 이라면 아버님한테 질리도록 들었어요. 아버님도 못 꺾은 제 뜻을 노튼 경이라고 꺾을 수 있
을까요? 그리고, 그런 이유때문에 최근 여러 실적을 올리고 계신 유능한 군인이신 노튼 경께 제 경호를
맡긴 것이 아닌가요?」

「… ….」


대령 ‘노튼’ 은 이 영악한 여인을 런던으로 되돌려 보내는건 불가능한 일이란걸 그때 직감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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