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달이 희끄무레해지고 밤 짐승들도 울음을 그치는 새벽 중턱이면, 아무리 피곤하더라도 절로 눈이 떠지는 기묘한 습관이 매일 나를 침대 밖으로 밀어낸다. 그러면 난 내 팔만한 너비의 원목 탁자에 앉아, 그 좁은 위를 비추는 놋쇠 등불에 의존하여 펜을 놀리는 것이다. 날이 선 펜촉이 정적을 긁어내는 소리와 종이의 섬세한 떨림. 글에 대한 애착이라기보다는 이 묘한 감각에 반해 시작하게 된 극작가 일이었다. 무엇을 시발점이라 부르면 좋을까, 그래. 생업이었던 재봉사를 과감히 때려치우고, 몇 달간 밤낮을 새우며 써내려갔던 처녀작의 끝머리에 Fin을 써넣은 그 겨울밤이라 치자. 그 짧은 문구의 마지막 획을 긋는 순간에 느꼈던, 아찔한 두통과 미칠 듯한 허기보다도 더욱 거세게 나를 조여오던 그 쾌감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형용할 수 없는 어떠한 충만함이 밀려와 나의 세계를 흠뻑 적시고 꽃 피우는 듯 했던……. 그 황홀함은 펜을 그러쥐는 원동력이 되기에 충분했고, 나는 머릿속을 헤집는 수많은 명칭의 잡념들을 마무른 양피지에 풀어내며 다시금 그 절정을 맛보길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무의식은 그에 대한 갈증을 끊임없이 각인시키며 계속 나를 더욱 더 깊은 심연으로 내몰아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아니. 완벽한 예술의 경지는 이제 그 실마리조차 찾을 수 없다.


 이성을 좀먹어드는 초조함을 느끼며 뺨을 가볍게 때렸다. 대본을 극단장에게 제출해야하는 기한이 이제 꼬박 이틀 남았다. 답답한 것은 연인의 머리를 베어들고 아리아를 부르는 A의 독백씬에서만 근 5일을 날려먹었단 점, 그리고 이 빌어먹을 장면을 아직까지도 전개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근래 단장이 꽂힌 그 잔혹미의 개념이 어디서 생겨났는지는 모르겠으나, 흥건하게 뿌려진 피 속에서 미학을 찾는 게 미친 짓이란 나의 생각은 이로써 더욱 확고해졌다. 지금이라도 단장을 설득해볼까, 종잇장 같은 귀를 가진 인간이니 조금만 그럴싸하게 꾸며 말해도 넘어올 텐데…….둥그렇게 꼰 수염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이는 단장의 모습을 상상하며 거의 절반쯤 A의 존재를 지워가던 중, 찬 기운이 어깨를 감싸 쥐며 망상의 밖으로 나를 끌어낸다. 흠칫 바라 본 어깻죽지에는 굵직한 골격의 큰 손이 얹혀있다. 유난히 선이 두꺼운 검지와, 말랐음에도 도드라진 푸른 핏줄이 강인한 인상을 주는, 그의 손이다.

  “안녕.”

낮게 되울리는 목소리는 지독하게 허스키함에도 불구하고 맺음새의 맑음까지 지니고 있다. 달콤한 인사에 안도하며 끌어 잡은 그의 손을 따라 묵직하게 기대어지는 남자의 체취 속엔 약한 술 냄새가 배어있다.

 “오늘은 마시지 말라했잖아.”

흔한 변명도 없이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는다. 간헐적인 숨이 살을 간질인다. 그 것은 아주 뜨거워서, 순식간에 내 피부를 에던 찬 공기를 데워버린다. 이 묘한 행위가 잔소리가 길어지기 전에 흐름을 돌리려는 그이 나름의 응석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어때, 오늘은 A가 아리아를 끝마쳤나?”

한숨을 뱉으려던 입술이 한순간 멈춘다. 유능한 무대 담당자인 그가 매번 시나리오 스케치를 훑으며 머릿속으로 스테이지를 그려본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며칠 째 아무 진전도 없는 작업으로 그의 일까지 딜레이를 준다는 것을 굉장히 죄스럽게 생각하는 점도 있지만, 또 하나. 그가 나와 함께 작업해 온 그 어떤 것들보다도 이번 작품에 굉장한 기대를 품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저녁 시간이 끝나고 한번 찾아오는 것이 다였겠지만, 단장이 잔혹미에 대해 연설하는 동안에도 보기 드물게 열의를 보이더니 이젠 한가로운 시간마다 내 방을 찾아와 시나리오를 흘끗대는 것이다. 내성적인 그가 이렇게 관심을 내비칠 정도라니,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가 없다. 망설이는 호흡을 알아챈 그가 낮게 웃음을 흘린다.

  “괜찮아, 난 빠른 건 질색이거든. 극적인 연출은 그만큼 공을 들여야 탄생하지. 조바심 낼 거 없어.”

그의 손이 부드럽게 머리를 쓸어내리고, 그 끝을 말아 쥐며 다정히 키스한다. 이상할 정도로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그의 몸 중 유일하게 녹아있는 붉음의 자국, 움켜낸 내 한 줌의 머리칼로 희롱하듯 젖은 입술 선을 따라 쓸어내리자 엄습해오는 묘한 쾌감이 절로 몸을 떨게 만든다. 사방의 공기를 달아오르게 하던 나직한 울림이 다시, 귓가에 내려앉는다.

  “작품에 골몰하고 있는 당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를 거야.”

매끄러운 손길은 헝클어진 머리를 익숙하게 한 갈래로 묶어낸다. 그리고 입 맞추며.

  “그리 길지 않은 검은 머리카락.”

덮여있던 것이 사라지고 희게 드러난 목을 살짝 물어, 그 곳에 붉게 핀 열꽃에 나지막이 읊조리며.

  “답답하다고 풀어 헤친 첫 단추 틈새로 드러나는 목덜미도.”

이어서 상냥하게, 하지만 힘주어 얼굴을 감싸 당겨 날카롭게 곤두선 적안을 마주보게 한다. 홀린 듯이 응시하다 점점 가까워져오는 그 열기에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부드러운 감촉이 눈두덩에 닿고, 따스함이 퍼져나간다.

  “앙칼진 눈매, 또렷한 동공.”

바랜 듯이 탁한 잿빛의 결 좋은 가닥이 그의 눈가에 흘러내린다. 천천히 내 입술 언저리를 어루만지는 그의 엄지 손끝에는 나를 한 겹, 한 겹씩 풀어헤치는 힘이 있다. 나도 모르게 손을 움직여 그의 얼굴을 탐해본다. 고집 있게 뻗어있는 정돈 된 눈썹, 빽빽하게 들어찬 속눈썹 사이로 끝없이 나를 응시하는 눈동자. 선이 굵은 콧날과 갓 면도한 듯 푸르스름한 턱선을 차례로 쓸어내리며 나는 미학을 떠올린다. 또 한번 예고 없이 날아든 낮은 저음에 정신이 아찔하다.

  “혈색이 그대로 드러나는 입술, 네 모든 게.”

그는 가볍게 입 꼬리를 올려 호선을 지어 보인다. 다시 다가오는 그의 뇌쇄적인 아름다움에 온몸의 피가 뜨겁게 흐르며 더 짙은 열망을 갈구한다.

  “어서 네가, 네 작품이 완벽해졌으면 좋겠어.”

그리고 나는 이 순간에서야 깨닫는 것이다.

  “그렇게 하겠다고 말해.”

나의 예술의 기준은 그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임을. 힘들게 목소리를 꺼내본다. 거칠어진 호흡으로 낮아진 톤 때문인지 내 응답은 스스로에게도 더욱 간절하게 느껴진다.

  “약속할게, .”

잠시 다가오는 것을 멈추고, 그는 얕은 한 숨과 함께 낮게 읊조려온다.

  “사랑스럽군.”

숨결이 가까워졌다. 주목나무의 붉은 열매, 그 달콤한 향기가 난다. 이미 어떠한 저항도 할 수 없다. 다만 눈을 감는 수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