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체가 사라진 채 아래로 끝없이 떨어지는 엘리스는 자기 내면에서부터 무언가가 끓어오르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까부터 몸이 가루화된것도 그렇고 힘이 솟아넘치는듯한 느낌까지... 대체 무슨 일이 생기는거지?'

 전보다 오감이 더 민감해지면서, 왠지모르게 전신이 시원하게 뻥 뚫리는듯한 감각. 그리고 어느 기억.


"자세한 답변 감사합니다, 그레고리 씨."
 그레고리가 사비가 떨어지기 전에 카페에서 나눴던 대화가 하나 떠올랐다. 대화의 내용을 들어보아 <인사이드 아웃>을 본지 얼마 지나지 않은 기간에 나눴던 말이라. 당시 엘리스는 카사딘과 무언의 대립을 하고있던 중이었다. 리신과 마오카이에 대한 정보는 이미 그레고리에게도 알려줬지만 카사딘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하지않았고, 하고싶지도 않았던 그녀는 그동안 저질러왔던 신도들의 죽음대신 또다른 주제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그레고리 씨, 마지막으로 감정에 대해서 하나 묻고싶습니다만,"
"무엇입니까?"

"사람에겐 여러가지 감정이있고, 저번에 본 영화처럼 하나의 감정에 휩쓸린 나머지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할 경우가 생길 수 있잖아요. 감정을 잃었던 상태인 제가, 감정을 되찾는게 과연 올바른 선택일까요?"
 이에 대한 그레고리의 답변은 누군가가 했던 말과 묘하게 비슷했다.

"인간이 제아무리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고 살아간다지만, 그 중심에는 감정이 중추를 잡고있다고 전 생각합니다. 하나의 감정도 상황과 판단에 따라선 그자체가 또다른 감정으로 바꿀수도 있습니다. 감정에 휘둘릴 수도, 치우칠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감정을 잃기에는, 당신의 삶은 되게 무미건조해지겠죠. 당신이 해왔던 추억들에 의미가 남지 않을테고, 구체적인 동기없는 행동만을 반복하겠죠. 만약 감정을 되찾는걸 포기하신다면 지금까지의 노력을 배신하는 선택이겠죠. 그러면 앞으로도 당신은 아무것도 얻지못할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레고리 씨. 그런데 하나의 감정을 다른 감정으로 바꿀 수도 있다는게 무슨 뜻인가요?"

'어라? 이 사람 마치...'



 헤카림을 상대하는 카사딘의 손목검에는 점점 힘이 사라져갔다. 처음에 그와 합을 겨룰때는 온몸에 힘을 담은 채 팔을 휘둘러 검을 내질렀지만, 숨이 가빠지면서 헤카림의 창검이 나아가는 지점에 검을 갖다대서 직격을 피하는 수준으로 전락해갔다.

 카사딘과 한 팀을 이뤄서 헤카림과 맞서는 르블랑도 온몸의 신경이 곤두선채 싸움에 임했다. 르블랑은 환술로 헤카림의 공격을 쉽게 피할 수 있다. 그러나 공포를 자신의 무기로 삼는 공포의 기사인만큼 한번 말려들면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말려든다는 위험성과, 썩은 아귀의 버프와 비록 3분의 1이긴하지만 모데카이저의 힘까지 양도받은 헤카림의 힘은 그가 살아온 이래중 최강인 상태. 스치기만해도 치명상을 입는 천길외줄 낭떨어지같은 게임인만큼 그녀도 신중해야만 했다. 그런데 그녀의 지팡이에서 내뿜은 사슬이 헤카림의 민첩함에의해 끊어지고 카사딘이 무방비상태에 들어설 쯤.


 방어자세를 취하지못한 카사딘에게 향하는 창날이 어느 방향에서 가해지는 힘에의해 방향이 틀어졌다. 헤카림은 자신의 창날에 붙어져있는 표식을 보고, 카사딘은 헤카림의 창보다 더 빨리 날아온 정체불명의 물체를 알아채고 처음으로 기뻐하는 목소리로 그 이름을 외쳤다.

"엘리스!!!"
"네가... 어떻게 살아있는거지?"

 헤카림은 당황한듯이 엘리스를 바라봤고, 엘리스는 대답없이 헤카림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럼 다시 죽여서 데려가주마!"
'파멸의 돌격'. 다음 일격을 날리기 전까지 이동속도 증가와 유닛을 통과할 수 있게만드는 스킬. 통상 공격따위 저 스킬이 발휘되는동안 물리적 타격은 불가능해. 그럼...'

 엘리스는 한 번 죽기전에 자신이었으면 절대로 하지못할 짓을 할 작정이다. 이번 해로윙의 주체는 언데드 최강자인 모데카이저가아닌 헤카림이다. 공포와 두려움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써먹는 상대의 특성은 엘리스를 군도로 잡아가기위한 목적이 충실히 반영된 결과다. 아직도 그녀는 헤카림 주변만 다가가면 원인모를 두려움에 소름이 끼치고 몸이 떨려왔다.


'삶에서 두려움을 느끼기에, 우리는 열심히 살려고합니다. 슬픔과 분노가 삶의 원동력이 될 수 있듯이 말이죠.'


 엘리스는 자신밖에 모를 정도로 양손바닥을 편 뒤 두 마리의 새끼거미를 소환해냈다. 그리고 자신의 양옆에 배치시킨다음, 자신이 마주하고있는 적의 모든 것을 인식하기로 마음먹었다.

 또다시 마음속이 혼란해진다. 머리속에서 자신이 두려워하는 장면들이 떠올려진다. '정신 기생'에서 깨어난 직후의 자신, 칭란 마을에서의 생존, 위험천만할지도 모르는 앞으로의 삶.


 하지만, 그것은 지금의 두려움이 아니라, 헤카림에 의해 의도적으로 부풀려진 감정이다.


'그 두려움들을 인정하자. 하지만 지금의 내가 느끼는 두려움을 의식해야만해!'

 지금 엘리스가 가진 가장 큰 두려움은 헤카림의 창을 피하지못해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다. 그 장면은 상상만해도 끔찍한 장면이다. 그러나 그러기에 엘리스는 현명하게 이를 대쳐해야만한다. 아니, 두려움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해야만 한다.


 엘리스는 헤카림의 창을 피하고, 앞으로 곧장 달려나갔다. 곧이어 헤카림의 발밑에서 두개의 폭발이 일어났다. 고작 몇 초만에, 그녀는 헤카림의 두려움에 휩쌓이지않고 거미폭탄으로 반격까지 가했다.

"어라...?"
 방금 전에 빗나간 공격을 다시 날렸으나, 헤카림은 또다시 같은 패턴의 회피와 폭발에 당했다.

'무슨...! 저녀석이 어떻게 내 주변에 흘러넘치는 '두려움'에 휩쌓이면서도 침착하게 반격을 할 수 있는거지?'

''파멸의 돌격'. 확실히 저 스킬을 사용하면 시전이 끝날때까진 피해를 가할 수 없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시전한 다음공격이 끝나면 대상을 관통하는 상태가 풀린다는 뜻이지. 근거리에서 녀석의 공격을 피하고 바로 반격하지않으면 해낼 수 없는 패턴이지. 하지만 난 가능해. 왜냐면...'

 엘리스는 다시 자신에게 달려오는 헤카림의 질주에 대응하면서 자신의 독백에 마침표를 찍었다.

'녀석의 공격패턴을 완벽하게 외우고있고, 대련을 통해서 얻은 회피감각이 있으니까. 그리고 녀석이 원하는 두려움에 떨지 않으니까!'



 아이오니아의 어딘가에 있는 숲. 그 숲중에서도 공터마냥 나무들이 듬성듬성하게 자란 장소에서 여러 싸움이 벌어지고있다. 리신이 요릭이 불러낸 수많은 구울들과 요릭을 상대로 압승을 거두고있기도하고, 카서스를 상대하는 카르마의 활약도 있지만, 카사딘과 르블랑은 전과달리 적극적으로 헤카림과 싸우고있는 엘리스의 모습만 보였다. 엘리스의 부활과 동시에 둘은 싸움에서 이탈해 상황을 지켜보고있었다.

"헤카림에게서 풍기는 '공포'를 극복했다는건가?!"
"그런것 같군요."
 그러나 엘리스의 때맞춘 회피&반격방향이 외지고 구석진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결국 뒷걸음질치거나 옆으로 피할 나무들 때문에 움직일 공간이 막혀버렸고, 헤카림은 의도가 들어맞았다는듯이 힘을 줘서 창을 휘둘렀다. 카사딘은 주먹을 꽉 쥔 채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승리를 입증하는 헤카림의 웃음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엘리스는 두 발로 지면을 박차오른 뒤 주변의 나무기둥에 두 손과 발을 얹음으로써 헤카림의 공격을 피했다. 인간 상태에서 거미처럼 기어오르는 기술을 썼다는 말이다. 즉각적인 반응이었지만 성공한 자신의 능력을 보고 감탄한 엘리스.

"기어오른다는게 이런 감각이구나..."

 이어서 엘리스의 주문이 읊어지자, 숲 주변을 가득 메꾼 거미떼가 등장했다. 그림자 군도에 거주하는 동굴속 거미들을 모조리 아이오니아로 불러낸 것이다.

"(전원, 일제히 헤카림을 공격해라.)"

 거미의 언어로 명령을 내리자, 수백마리의 새끼거미들이 한마음으로 헤카림을 향해 달려들었다.

"엘리스! 고작 이런 새끼거미들로 나와 싸우겠단거냐! 그렇다면 큰 오산이다!"

"너야말로 그렇게 생각했다는게 큰 오산이지."
 헤카림은 엘리스의 새끼거미들을 밟아죽이면서 엘리스에게 달려들었다. 엘리스는 자신의 양 팔을 대각선으로 벌렸다. 회피동작이 아님은 분명했다.

 하지만 'ㅅ'자로 서있는 그녀의 양 어깨와 허리 뒤에 달려있는 4개의 거미다리가 헤카림을 찌르듯 가리키더니, 끝에서 새빨간 독이 발사되어 헤카림을 적중했다. 상당히 움직이기 불편해진 헤카림은 그 새로운 동작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아차렸다.

"'신경독'...인가?"
"그래. 인간 형태일 때 용도가 전혀없는 거미다리를 활용하는 방법으로 쓴거야. 인간상태일때는 뒤에 있는 거미다리를 신경독을 내뿜는 파이프로 응용했지."
"거미 여왕주제에 다리를 날개로 상향시켰군.! 하지만 그러기엔 난 너무 가까이 와있거든!"
 엘리스의 새로운 '신경독'을 무시하는건 아니지만, 헤카림이 엘리스의 독에 맞았을 때는 이미 그녀의 코앞까지 다다랐을 때였다. 창검 대 맨몸. 상식적으로 누가 유리한지 물어보는게 바보인 상황.

 그러나 헤카림의 창날을 면으로 밀쳐낸 뒤 앞으로 내지른 엘리스의 주먹은 이상하리만큼 뾰족하고 날카로웠다.

"저건...?!"
"엘리스의 팔이, 거미다리로 변했어?"
 이번엔 카사딘뿐만이 아니라 르블랑도 놀랐다.

"인간 형태와 거미 형태로 변하는 능력을 부분적으로 다룬건가! 제아무리 거미의 다리라지만, 엘리스의 거미는 썩은 아귀의 거미! 밀도나 강도로 봤을 때, 엘리스의 팔은 거미의 다리로 만든 랜스나 다름없어!"

 카사딘의 말대로, 엘리스가 내지른 팔은 주먹같이 각진 공격이 아닌 점을 찌르는듯한 뾰족한 공격이었다. 통상 주먹이나 킥에도 꿈쩍않던 헤카림의 갑옷에서 충격이 일어났다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창을 바로잡은 헤카림. 한 팔을 다시 거두고 나머지 팔마저 모두 거미 다리모양의 랜스화시킨 엘리스. 현저하게 떨어진 헤카림의 기동력이지만 엘리스는 도망치거나 피하지않고 제자리에서 상대와 합을 겨뤘다. 둘 간의 싸움은 주스트(*중세 시대에 벌인 마상 창시합. 랜스를 들고 싸움)같이 창과 창끼리의 격렬한 맞부딪침으로 가득찼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거미다리모양의 랜스는 헤카림의 창날을 견디지못하고 금이 가고있었으며, 본래 창술로 승부하지않는 엘리스의 특성상 창싸움은 당연히 밀릴수밖에 없었다.

"흐아아!"
 랜스로 이어진 엘리스의 두 팔을 작살내려는것마냥 헤카림이 크게 창으로 호를 그렸지만 그걸 노렸다는듯이 엘리스는 백덤블링을 구사하면서 거리를 벌렸다. 곧이어 그녀는 또다시 여분의 거미다리 4개를 헤카림에게 겨눠 신경독을 날렸고, 지금껏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던 또다른 거미를 시켜 헤카림의 등 위로 올라타 공격하게 이끌었다. 그 거미는 수많은 신도들을 잡아먹고, 엘리스의 젊음을 유지하는 액체를 가진 거대거미였다.

"하앗!"
 짧은 기합을 지르며 두 팔을 앞으로 지르자, 엘리스가 지금껏 날린 고치중 가장 크고 질긴 거미줄이 헤카림을 속박시켰다. 두차례에 걸쳐서 제약된 기동력과 근거리에서 시전된 스킬은 제아무리 헤카림이라도 피하긴 어려웠다.

"(거대거미, 이제 헤카림에게서 떨어져라.)"
 거대거미는 곧장 헤카림에게서 떨어졌고, 엘리스는 주변에 깔린 수많은 새끼거미들을 불러모았다.

"'위험한 새끼거미'!"

 엘리스가 이번싸움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스킬을 말하면서 시전하자, 주변에 있던 수백마리의 새끼거미들이 생물폭탄으로 바뀌어서 헤카림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엘리스 일행이 싸우고 있던 숲의 일부분이 전부 초토화시킬만큼 강한 폭발이 일어났다.

<계속>


<글쓴이의 말>


작중 설정상도 그렇고, 실제로 엘리스의 스킬특성상 헤카림과 싸워서 이기긴 어렵죠. 그래서 '헤카림을 이길정도로 엘리스를 진화시켜보자!'해서 엘리스의 새로운 싸움방식을 고안했습니다. 실제 힘을 제약받으면서채전장 내에서 싸우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엘리스 고유의 파워가 강화된 것이기 때문에 굳이 원작파괴까지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마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