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하는 여인과 같이 잠이 든 카사딘은 그만의 세계에서 끊임없는 고민을 했다.


"이 세상의 창조주이자 리그의 창설자인 그들이 과연 그림자 군도의 악행을 모르거나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하나? 아니, 그들은 모든 걸 알고있다. 그런 그들이 네 녀석의 과거나 썩은 아귀의 어두운 일면을 모르는게 더 이상할 뿐! 그 모든걸 알고있는 그들이 너를 그림자 군도에 소속시키고, 거미 여왕으로서 살아가게 했다는건 다름이 아닌 좋든싫든간에 그런 삶을 살라고 정해놓은거다! 심지어 나도! 쓰레쉬도! 모데카이저도! 아무리 날고 뛰는 존재라해도 우리의 행동을 머리 위에서 지켜보고있는 초월적 존재에의해 우리는 정해진 레일만을 따라야만 한다. 그게 바로 '챔피언'이다! 힘으로 인해 자유를 억압받고 자그마한 리그 하나에 모든걸 걸고 싸우는 존재! 너의 여정은 우리뿐만 아니라 창조주인 그들의 의도밖의 행동일 뿐, 2개월 뒤의 결과에 대해 두렵지도 않은거냐!!!"


​ 해로윙때 헤카림이 그녀를 일갈할 때 말했던 대사가, 정작 청자인 엘리스가 아닌 카사딘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엘리스의 의지로 싸워냈지만 과연 그녀가 원하는 삶을 살게 소환사가 방관해줄까. 그림자 군도 소속의 거미 여왕이 반공허세력의 편으로 바뀌는 사상 초유의 전환을 맞이하는 챔피언을 소환사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자신이 엘리스와 어떤 관계로 발전했는지 소환사가 알고있다면, 둘 사이의 관계가 이어질 수 있을까. 엘리스는 과연 자기가 원하는대로 챔피언이라는 직업을 포기하거나 내려놓을 수 있을까.

 무엇보다 '그림자 군도'의 엘리스를 벗어난 채 살아갈 수 있을까.

'아아...!'

 참담한 현실에서 사랑과 자의만으로 모든걸 해결할 수는 없다. 특히나 세계의 창조주이자 직간접적으로 모든 일에 간섭하는 소환사라는 존재가 있는 하에는. 아니, 그러한 존재가 없다해도 본래 세상은 그럴 수 없다.

'나는 이뤄질 수 없는 것에 대해 생각한건가...'

 적어도 엘리스가 소환사가 원하는 삶을 살지 않으려면, 카사딘과의 접촉을 피하는게 더 나은 방법이다... 그녀가 반공허세력에 들어오는걸 진심으로 바랬는지에 따라서 더 나은 결정인지, 아니면 그저 안타까울 따름인지...


 카사딘은 자신의 옆에서 아직 눈을 감고있는 여자의 얼굴을 봤다. 그는 엘리스의 흰 피부. 검보라빛 입술이 아닌 아직 그가 보지못하는 눈을 보고있다. 다사다난했던 10월 24일. 썩은 아귀의 힘을 자신의 것으로 최적화시켰다는건 그림자 군도의 힘과 썩은 아귀의 힘을 버렸다는 뜻이 아니라는걸 알고있다. 전과 달리 엘리스에게 많은 변화가 일어났지만 그녀의 눈은 예전과 같이 빨간색 바탕에 뱀눈처럼 세로로 그려진 검은색 눈동자다.

'하루밤을 같이 지낸 뒤에야 이 여자가 어떻게 해야할지 알아차리다니.'

 엘리스는 카사딘을 떠나야만한다. 그녀가 싫다면, 카사딘이 억지로 떠나는 수밖에 없다. 카사딘은 쭈글쭈글해지고 일그러져버린 얼굴을 만지면서 호흡에 큰 문제가없는 자신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이오니아에서 치료를 받을 때, 이 방면에서도 어느 정도의 개선을 시켜준건지, 민낯으로도 잠을 이룰 수 있었다.

'...그래도 이런 낯을 보여주면서 떠날 순 없다.'

 카사딘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엘리스가 풀어준 복장과 갑옷들을 소리없이 차려입었다. 그녀가 부서뜨린 투구를 제외하고. 그가 아침햇살을 커튼으로 추려받으면서 기립하자, 다리없이 공중에 떠있는 전신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사라진 다리의 부피를 공허의 에너지가 보이지 않는 다리를 만들어준게 더 유력할지도.

 또한 오랫동안 길러서 어깨까지 닿는 머리카락만이 보인다. 이게 카사딘의 맨몸을 뒤에서 봤을 때의 이야기이다.

남은건 아직 깨어나지않은 그녀를 향해 조용한 축복을 빌어주며 이 곳을 떠나기만 하면 된다.


"가는거야?"
 카사딘은 자신이 원하는 연출을 맡으면서 퇴장하지 못한 자신을 한탄해하며 발걸음을 멈췄다. 떠나야한다. 균열 이동으로 아예 건물밖으로 나갈 수도 있지만...

"내가 부탁했잖아...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걸 너도 할 수 있다면서, 왜..."
 ...자신이 원하는대로 이별할 수 없는 이상, 엘리스의 말을 무시한 채 갈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한 번 더 엘리스의 얼굴을 보고싶었다. 요염하고 도도하지만, 자신을 바라볼 때는 마음을 숨기지 못한 채 몸을 배배 꼬는 순한 여자의 모습을. 비록 그 행위가이 자신의 민낯을 그녀에게 보여주는 결과를 낳는다 하더라도.

"이 여정은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게되었어. 나는 그림자 군도로부터 자유로워졌지만, 이 여정을 통해서 만났던 관계들과 또다른 이별을 맞이하고 있다고! 마오카이, 리신, 카르마, 그리고 르블랑, 심지어는 너마저도... 나는 혼자남겨지고싶지않아. 나는 너와 떨어지기 싫어! 그러니까 제발... 나를..."

"아니야, 엘리스."

 엘리스는 큰맘을 먹은듯이 남자로선 굉장히 높은 목소리톤으로 말하는 카사딘의 목소리에 말을 끊었다. 저음으로, 투구속에서의 발성때문에 울려퍼졌던 기존의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였다. 그리고, 엘리스에게 부정문으로 말하는 두번째 순간이면서, 무미건조한 말투가 아닌, 다정하고 친근감이 담긴 말투로 말한 첫 마디였다.

 카사딘은 등을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동시에 자신의 민낯을 그녀에게 보여줬다.


 카사딘의 얼굴은 선을 그어서 손상되진 않았지만 약 절반하고도 그 이상이 다방면으로 가해진 압력에 의해 비틀어지고 쭈그러지듯이 망가져있었다. 왼쪽 눈은 망가진 안면피부때문에 뭍혀있었음에도 흰 안구에 검은색 눈동자가 구분될만큼의 시각이 있는듯하며, 눈부터 볼까지의 피부는 살점이 없어 겹겹이 깔린 안면근육이 시뻘겋게 드러나있었다.

 하지만 엘리스는 심각하게 망가진 왼쪽 얼굴이 아닌, 아직 인간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오른쪽 얼굴이 짓는 표정을 보았다. 하나의 인간으로서 자신에게 분명히 내보이는 웃는 표정. 그러면서도 끝에 처진듯한 눈썹은 반쪽짜리 웃음마저도 애잔한 인상을 가미했다.

"네 곁을 떠난 이는 아무도 없어. 리신도, 카르마도. 르블랑도. 네가 그들을 기억하는 한, 너는 혼자가 아니야. 그리고..."

 균열 이동으로 엘리스가 앉아있는 침대 바로 옆으로 다가온 카사딘은 그녀의 오른손을 맞잡고 그녀의 심장이 있는 곳으로 옮겼다.

"마오카이도, 분명 네 안에 있으니까."

 엘리스는 손을 놓고 카사딘을 안았다. 그의 가슴속에 파묻은 얼굴속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커져갔다. 카사딘은 한 박자 늦게 엘리스를 안았다.

"그들의 몫까지 열심히 살아가줘. 마오카이의 희생과 그들의 죽음을 헛되이하지 않도록."

 엘리스는 카사딘의 품에서 얼굴을 세로로 비벼댔다. 마지막으로 그는 엘리스에게 속삭이듯이 말했다.

"네가 살아있는한,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어, 엘리스... 보고싶을거야. 나도 그러니까."
 자신이 사랑한 남자의 몸을 꽉 껴안던 팔이 허공을 가르면서 주인의 몸을 감았다. 그녀가 안으려는 대상이 양 팔안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카사딘은 엘리스의 곁을 떠났다.


 더이상의 슬픔을 참지못하고 엘리스는 고개를 숙인채 또다시 울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마저도 떠나버려 다시 혼자가 되었다는 고독감에 사무쳤기에, 그녀는 자신의 가슴이 원하는만큼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 모든 슬픔과 눈물이 끝나는 순간, 엘리스는 움츠렸던 어깨를 피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호텔의 침대에서 빠져나와 필트오버의 경치가 훤히 보이는 창문으로 다가갔다. 커튼을 확 치는 순간, 이미 아침을 넘긴 미온적인 햇살이 그녀의 온몸을 데웠다.

 겨울의 햇빛을 맨몸으로 받은 엘리스는 눈에 힘을 주고 앞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의 끝은 고층건물도, 하늘도 아니었다.


 창문 속 유리에 희미하게 비친 자신의 얼굴을 응시하고있는 엘리스 본인을 향해있었다.

<마지막을 향해 ◐>


<글쓴이의 말>


이번편을 기점으로 카사딘까지 떠났습니다. 드디어 이 작품을 마칠 때가 왔네요.